라오스 관광산업- 목 차 -Ⅰ. 서론1. 일반사항2. 지리적 특성3. 지역별 소개Ⅱ. 루앙프라방의 관광산업1. 루앙프라방 개요2. 루앙프라방 주요 관광지3. 루앙프라방의 관광산업Ⅲ. 결론Ⅰ. 서론1. 일반사항정식국명 : 싸탈라나랏 빠싸티빠타이 빠싸쏜 라오(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형태 : 사회주의 공화국국가설립 : 1975년 12월 2일(독립년월일 : 1953. 10. 23)수도 : 비엔티안(Vientiane, 위앙짠)위치 : 동남아시아 북부,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있는 나라(북위 18°, 동경 105°)면적 : 236,800㎢ (한반도의 1.1배)인구 : 592만 1545명(2003)종족 : 라오 룸, 라오 틍, 라오 쑹 및 소수민족종교 : 불교 95%, 카톨릭?기독교 등의 기타 종교 5%언어 : 공용어는 라오어, 그 외 각 민족의 고유한 언어사용, 외국어로는 주로 불어와 영어가 쓰임기후 : 고온 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5월~10월 우기, 11월~4월 건기)화폐단위: 낍 (Kip)통 화 : 공식적인 통화는 낍(Kip)이고, 태국의 밧, 미국 달러가 통용되기도 한다화폐의 종류는 1, 5, 10, 20, 50, 100, 500, 1000, 2000, 5000 권 종이 있으나, 현재 100낍이하의 통화는 사용되지 않는다.▶사진1.라오스의 화폐500낍 1000낍 2000낍 5000낍2. 지리적 특성▶동쪽으로는 베트남, 북쪽으로는 중국, 북서쪽으로는 미얀마, 서쪽으로는 타이, 남쪽으로는 캄보디아에 둘러싸인 바다를 접하지 않은 내륙국이다.▶남북의 길이가 1000㎞ 이상, 동서는 가장 나비가 넓은 곳이 500㎞이고 좁은 곳은 150㎞이다. 중국과 인도차이나 각국 사이의 접촉지대로서 군사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간섭을 많이 받아왔다.▶국토의 대부분이 울퉁불퉁한 산지(70% 이상)이고, 나머지는 평야와 고원지대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밀림으로 덮여 있고 철도와 항구가 없는 내륙국이기 때문에 경이었던 파응움(Fa gnum) 왕이 프라방 불상을 들여와 지역 주민들에게 신성한 부다로서 존경을 받으며 도시의 이름이 루앙프라방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루앙프라방은 수도 Vientiane에서 약 350Km 떨어진 북부에, 메콩강과 칸(Khan)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의 다양한 아름다운 산들로 둘러 쌓여 있다. 인상적이고 아담한 '푸씨(Phousi)'라는 작은 산이 도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자들에게 산 정상에서 루앙프라방의 아름다움을 사방으로 전망할 수 있는 타워의 역할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루앙프라방은 매우 오래 전 라오스인들에 의해 건설된 뛰어난 건축물들인 유적을 풍부하게 갖고 있다. 4만 명의 인구가 루앙프라방 도시에 살고 있는데, 그들은 문화와 전통을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하고 있으며, 라오스 정부에서는 루앙프라방을 북부 라오스의 문화와 자연의 관광 중심지로 활용하고 있다.고대의 라오스식 건물과 식민시대 영향을 받은 프랑스 스타일의 건물이 주변의 환경과 어우러진 루앙프라방은 199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루앙프라방 시민들뿐 아니라 라오스 국민 전체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여행자들은 평화로운 계곡, 부드럽고 친절한 현지인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루앙프라방의 보존지역과 강 건너의 촘펫(Chomphet) 지역 사이에는 150개 이상의 불교 사원이 다양한 형태로 루앙프라방의 오랜 역사를 통해 세워졌다. 루앙프라방의 중심부는 445개의 전통적인 스타일의 라오스 가옥들이 신비하고 매력적인 그림으로 여행자들에게 다가온다. 동굴, 폭포, 고산족 마을, 의상, 생활방식 등의 여러 방면에서 잠재된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관광산업의 개발이 도모되고 있다.2. 루앙프라방 주요 관광지① 루앙프라방의 경건한 아침, 딱밧▶사진4. 루앙프라방의 중요 볼거리로 자리잡은 딱밧 풍경동남아시아 국가는 전국민이 불교 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와 삶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도시마다 수많은 사원들이 세워져있고, 남자들은 적어도 평생에 좀 더 가깝게 유착되도록 만든 것. 유럽 양식과 라오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십자형의 평면배치는 크메르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왕궁은 1975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해 왕정이 폐지되던 해까지 왕궁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그 다음해 박물관으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궁 박물관 내부는 왕의 접견실, 왕좌, 왕과 왕비의 침실, 도서관, 응접실, 왕실 음악 전시품, 왕실 초상화, 외교사절로부터 받은 기념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또한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불상인 ?파방?을 보관하고 있는데 외부에서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파방은 90% 순금으로 만들어진 높이 83미터의 불상으로 무게는 50Kg다.▷파방 Phabang황금 불상인 파방(=프라방)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9세기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쎄이론 Ceylon(스리랑카)에서 11세기 경 크메르로 넘어갔다가 파응움 왕 King Fa Ngum 때에 란쌍의 수도로 옮겨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란쌍 왕조의 수도이름이 씨앙통 Xieng Thong에서 루앙프라방(위대한 불상의 도시란 뜻)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1563년 쎗타티랏 왕 때 수도를 위앙짠으로 이전하면서 파방도 함께 옮겨졌으며, 1779년 싸얌(태국)의 공격을 받아 빼앗겼던 불상을 1839년에 되돌려 받아 1975년 왕궁으로 옮겨와 보관 전시되고 있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불상이다.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있는 황금으로 빛나는 건물은 ?호 파방 Ho Pha Bang?으로 파방을 안치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사원이다. 현재까지 미완인 상태로 공사가 오랫동안 진행 중이다. 맞은편에는 회의실을 겸한 왕립극장이 위치하며 월, 수, 토요일 저녁 6시 전통 무용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왕립 극장 앞에 세워진 대형 동상의 주인은 다름 아닌 씨싸왕웡 왕이다.③ 왓 씨엥 통 Wat Xieng Thong▶사진6. 왓 씨엥 통의 사원과 벽면의 모자이크라오스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사원. 반도형태를 띠고 있는 쪽으로 향하는 메인 입구 앞쪽에 있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건물은 왕실 영구차를 보관한 곳으로 ?홍 껩 미엔 hong kep mien'으로 불린다. 머리가 일곱 개인 나가가 장신된 12m 짜리 장례용 마차로 씨싸왕웡 왕의 운구를 운반하기도 했다.④ 왓 위쑨나랏 Wat Wisunnarat▶사진7. 수박 모양의 왓 막모보통 줄여서 일반적으로 ?왓 위쑨?이라고 부른다. 본당 건물은 1513년 건축한 것으로 현존하는 사원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그러나 원래의 건물은 목조로 지은 것으로 1896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벽돌 등도 같이 사용하여 재건축한 것이다. 본당의 맞은편에 있는 시멘트 색의 반구형 건축물은 ?탓 빠툼? 이라는 이름의 불탑으로, 부처님의 유골 중 일부가 들어있다고 한다. 동그란 모양 때문에 수박 탑이라는 뜻인 ?탓 막모 That Makmo?라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⑤ 팍 오우 동굴 Pak Ou Cave 탐 빡우루앙프라방 주변 볼거리 중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우 Nam Ou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동굴. 빡우 동굴에는 불상들을 가득 모셔 놓고 있어 불상 동굴 Budda Cave라는 별명을 얻었다. 약 4,000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두 개의 동굴로 나뉘어져 있으며 아래쪽을 탐 띵 Tham Ting, 위쪽을 탐 품 Tham Phum라고 부른다. 이중 탐 띵은 동굴이라고 하기에 깊이는 얕기만,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무수히 놓여 있어 현지인들의 기도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 이 불상들은 새해가 될 때마다 부근의 주민들이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기도를 하러 와서 놓고 가곤 하며 쌓이기 시작했는데, 그 기원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위쪽의 탐 품은 동굴 내부가 깊어 대낮에도 매우 어두우므로 둘러보고 싶다면 랜턴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빡우까지는 루앙프라방에서 25Km 거리로 동굴 입장료는 1만낍이다.▶ 사진8. 팍 오우 동굴의 불상3. 루앙프라방의 관광산업▶문화 유산 관리유네 유적과 관광지를 개발하려는 종사자들에 의해 추가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현재의 분류는 잠정적인 것이다.루앙프라방을 방문하는 여행자 중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대상은 고 수익자들이지만,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배낭여행자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루앙프라방은 육로, 항공, 또는 강을 통해서 주변 지역과 연결되기 때문에 배낭여행자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현지인 참여루앙프라방의 대부분의 호텔은 현지인에 의해 운영되며 쑤완나품 호텔(Souvannaphoum Hotel)은 루앙프라방의 라오스 정부와 인터라오 관광이 조인트 벤처로 운영하며, 푸와오 호텔(Phouvao Hotel)은 프랑스인이 경영(프랑스 70%, 라오스 정부 30% 투자), 푸씨 호텔(Phousi Hotel), 파라솔 블랑 호텔(Parasol Blanc Hotel)은 비엔티안에서 온 라오스인이 경영한다.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도 모두 현지인에 의해 운영되고, 기념품 상점과 가게들도 현지인에 의해 운영된다. 약 80명의 현지인이 전통 공연예술 단체에 소속돼 있다.레스토랑 또한 대부분이 현지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두앙참파, 인도차이나 등의 레스토랑은 외국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베이커리는 외국인이 투자를 해 운영하고 있다.문화 유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현지인은 없으나 행정기관과 헤리티지 하우스(Heritage House)에서 기술적인 모니터를 하기 위해 15명의 현지인을 고용하고 있다. 수 백 명의 현지인은 유산 보존을 위한 노력에 참여하고 있는데 대부분 건설회사에 근무한다. 유산에 대한 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해야 하지만 아직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학생들에게 자신의 집과 인접하고 있는 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교육하게 될 것이다. 지방 정부 교육부와 헤리티지 하우스는 상호협조하며 출판물 또는 참고서를 발행해 어린 학생들에게 교육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 교육단체는 유산 보호지역에 사는 주민에 대해서만 1년에 두 차
모택동 시기의 중국은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을 지원하는 일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했었다. 그동안 중국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했던 이유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과 투쟁하는 북한을 지원한다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사명감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과 중국과 소련의 갈등관계에 있어서 북한이 소련측으로 기울지 못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이 채택됨에 따라 중국의 군사?안보지원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다. 중국은 대외관계에서 이념요인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하게 되고 주변 정세 안정유지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주변국에 대해 군사?안보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북한에 대해 공격무기 제공을 점차 축소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다.1. 1990년대 이전의 중?북 관계중국은 정부수립이 북한 정부수립보다 늦게 출범하였고, 내전 후 나타나는 산적한 문제 해결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거나 군사적 협력을 강화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1950년 김일성의 계획 아래 소련이 적극 지원하기로 하여 발발한 한국전쟁에까지도 중국은 묵인한 정도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 당시만도 북한과 중국과의 군사협력관계는 쌍무적 직접관계가 아니고 소련을 축으로 하는 소련?중국?북한이라는 3각 관계 속에서 협력을 유지하였다.이러한 중국과 북한이 군사적 협력을 실질적으로 갖기 시작한 것은 1950년 10월 중국군이 한국전에 직접 투입되면서부터이다. 중국은 당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깃발아래 북한의 후퇴를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군사적 지원을 할 여유가 없었던 중국은 다만 북한 지역에 군사적 주둔을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뿐이었다.그러나 1956년 제 20차 세계공산대회를 통한 스탈린 격하운동과 후르시쵸프의 평화공존 노선으로 말미암은 중?소갈등과 함께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은 북한에 군사지원과 경제지원을 강화하게 되었고, 특히 1958년 북한 주둔 중국군이 철수하면서 북한의 군사력 약화를 보강하기 위해지와 군사적 실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이념적 협력은 계속 견지하면서 두 나라 관계를 적대관계로 비화하지 않도록 하였다. 즉, 실리적 면에서는 소련과의 관계유지를 중시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본래 반미?반제투쟁을 유지한 관계 때문에라도 중국과 관계가 단절되는 적대화를 원하지 아니하였다.1968년 이후 북한은 소련 지원하에 이룩된 군사적 우위력을 남한에 대해 무모하게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소련을 불안케 하였고, 이로 인해 소련의 대북한 정책이 식어지자 중국은 이 틈을 이용,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강화하여 양국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원조가 다시 재개된다. 중국 수상 주은래는 1970년 문화혁명 이후 최초의 방문국으로 북한을 설정하고 1970년 4월 5일에서 7일까지 북한을 방문하면서 중국과 조선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 10주년 기념을 갖고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대폭 증가시킬 것을 약속하고 이를 지체없이 이행하는 결단을 보였다. 이어서 화국봉 총리(1978년 5월 5일)와 등소평 부총리(1978년 9월 8일~13일)의 친선 방북이 이루어지는 등 관계가 활발하면서 1970년 이전 양국간에 있었던 보잘 것 없던 군사 교류가 이후부터는 중국이 북한의 군사원조의 주요 국가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1970년대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이러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중간에 관계 개선이 설정되고 중국이 내부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즉, 중국은 화국봉 체제에서 등소평 체제로 전환이 되면서 동시에 미국과의 협력관계가 발전되고 이에 힘입어 군사지원이 적극화될 수 있었으며 또 중국은 북한의 대미 접촉도 적극적으로 주선하는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였다.1980년대에는 북?중간의 군사적 협력관계가 더욱 확대되는데 특히 중국이 MIG-21의 개량기인 A-5 전투기 20대(당시 연간 생산 40대)를 북한에 파격적으로 지원한다.) 1983년에도 다량의 MIG-21을 중국으로부터 인도 받았으며 이에 보답으로 북한은 중국에 청진항의 사. 1990년대 이후의 중?북관계1) 한?중수교 이후 중?북관계1990년대에 북한은 소련 붕괴 후 탄생한 러시아와 군사 및 정치?경제면에서의 협력 관계를 단절하고, 오직 중국만이 사회주위 정치체제를 표방하는 유일한 북한의 우방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중국 역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 개혁?개방을 함으로써 북한과의 관계가 상당한 괴리를 갖게되고, 1992년 한?중수교로 중?북관계가 냉각상태에 접어들게된다.그러나 한?중수교 후 중?북간의 군사관계는 이전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고 긴밀하게 유지되었다. 1992년 9월 이후부터 1994년까지 중국과 북한 군사 대표단의 상호방문활동에서, 중?북한 군지도자간 접촉과 교류는 한?중수교 이전보다 오히려 빈번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은 한?중수교가 있던 1992년 이례적으로 3개의 군사대표단과 5개의 우호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였다. 이는 중국이 중?북군사동맹 관계가 한?중수교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이처럼 중국과 북한 군지도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한?중수교에 대한 북한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중국의 정책적 고려 이외에, 양국 지도부간 인적 유대관계에 크게 기인하였다. 중국과 북한의 원로들은 1930년대초 이래 항일전쟁과 1950년대초 한국전에서 함께 피를 흘린 경험으로 인하여 심정적으로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지휘아래 항일 유격전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 등소평(鄧小平), 팽진(彭眞), 양상곤(楊尙昆), 홍학지(洪學智) 등 중국 공산당 원로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중국군 최고 지도자들이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사실도 중?북한 군사지도자간 접촉?교류를 빈번하게 유지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과 북한에서는 제도보다도 인적인 요소에 의해서 주요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에 양국 군지도부간 유대관계는 중?북간 군사적언급한 것도 중?북한간 협력지속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도 13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축전을 통해 “피로써 맺어진 전통적인 조?중 친선을 계속 강화?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는 바,) 중?북한간 군사동맹조약이 큰 변화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2) 미?북 기본합의 이후 중?북관계1993년 북한 핵문제가 국제현안으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미국과 북한은 적대적 대립을 지속해왔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후 미국은 북한의 NPT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강온 양면정책을 채택하였고, 이로써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의 핵문제 동결과 양국간 관계개선 문제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 등 사회주의권 붕괴와 한?중수교로 인하여 조성된 국제 고립을 타개하고 경제위기를 해소하고자 하였다.미?북 기본합의 이후에도 중국과 북한은 고위 지도부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북한 인민무력부 부부장인 김정각과 김광진 상장이 중국을 방문한 바 있고, 중국 측에서도 장공(張工), 사옥효(史玉孝), 왕계영(王繼英) 등 군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군사협력 문제를 논의하였다. 1995년 10월 중국은 한국전에 참전한 바 있는 사옥효(史玉孝) 광주군구(廣州軍區) 정치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여 군지도자간 우호관계를 강화하였다. 북한의 최광 총참모장은 사옥효(史玉孝)와의 회동시 양국관계가 ‘피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996년 5월 북한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의 방중시에는 양국이 「군사원조협력협정」을 체결하여 무기부품, 항공유, 군복용 목화 등 군수품 공급과 군사기술 지원문제에 합의하였다.)특히 1996년 7월에는 중?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 35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의 북해함대(北海艦隊) 소속 함정이 북한의 남포항을 방문한 바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건으로 양국간 군사적 우호친선관계를 확인하게 되었다.이미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또한 중국과 북한간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의 효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조짐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북한과 접촉시에는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 다음 세대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북한이 도발하여 발생하는 한국전에는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다.) 주변정세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중국은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자동개입 조항의 구속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자세 속에는 북한의 무모한 대남 무력도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3. 2000년대 이후의 중?북관계중국은 동북지역의 안정 및 미국의 대중 포위전략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안보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과의 안보관계 강화가 대미관계 개선에 부담이 된다는 견해도 있으나 북한이 안보적 완충지대로서 필요하다는 전통적 안보관이 우세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중국은 탈냉전 이후에도 다음과 같은 전략적 이유로 북한을 필요로 해왔다고 할 수 있다.첫째, 비록 중?북간 체제의 실질적 상이성은 커지고 있지만 그래도 중국과 가장 유사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안정이 자국의 안보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둘째, 미국 중심의 단극적 세계체제 확립에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핵문제로 인한 북미간의 갈등에 대북한 영향력을 대미외교에 유용한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셋째, 미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며 동북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넷째, 북한이 현재 유지하고 있는 군사력이나 한국과의 군비경쟁 상태를 고려할 때, 북한은 중장기적으로 외부로부터 첨단무기를 구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북한이 경제적 구매력을 회복할 경우 무기구매시장으로 북한을 경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북한은 중국의 이러한 전략적 고려사항을 활용하여 대 중국 동맹정책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실제하였다.
제목 : 『아시아와 유럽의 예절문화 차이』(동?서양 예절 문화의 차이)1. 동양예절의 특징동양예절의 기본은 실천 도덕인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한국의 예절 또한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기본을 두고 인륜을 가르쳐 왔다.동양 예의의 근본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데 있으며 아울러 검소함과 진실을 드러내는데 있다. 물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를 행하는 언어와 행동에는 변화가 따를 수 있겠으나 그 근본 정신만은 예와 이제가 다르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깔본다거나, 자신을 내세운다거나, 상대를 떠본다거나, 말만 앞세운다거나, 터무니없이 과장한다거나, 진실을 숨긴다거나 하는 등의 겉다르고 속다른 행위는 이미 예의가 아닌 것이다.동양이라고 하면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주로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을 말할 수 있다. 이들 세 나라는 같은 한자문화권이며, 따라서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책들이 한문으로 쓰여졌다.그런 관계로 빈번한 문화교류와 인적 왕래 등으로 인해 생활방식도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 같은 유교문화권이기 때문에 사상적 배경이 같아서 삶에 대한 가치기준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많다.그러므로 지역특성에 의한 차이는 있어도 일반적으로 예절인식이 같으면 규범적 격식에 있어서도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 및 유교계통의 예법은 상하 신분제도에 근거하여 뿌리내린 것으로 언어와 동작, 복장의 색상 및 형태, 소지품, 음식, 좌석 등 자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까다로운 규칙을 정하여 계급의 질서를 유지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나라별로 말하면 중국은 소위 동양문화의 종주국으로 자처해 중화(中華)사상이 팽배해서 유교의 중흥(中興)학자인 주자(朱子)의 학설에 의한 예절이 5천년 중국예절의 집대성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왕조가 소위 중화인 만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절에 있어서도 다분히 주변민족의 생활방식이 혼성된 경향이 있다.일본의 경우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문화 위에 중국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유입?접목되고 다시 불교문화가 깊이 침투되면서 그것들을 융화해 나름대로 생활문명을 형성했고, 근대에 와서 동양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서구문화를 일찍 받아들여 국제적 시각으로 볼 때 세련미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섬나라로서의 특성을 살려 생활규범상의 독자성을 잘 살리고 있다.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 칭호를 들을만큼 예절에서 단연 선진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동양정신문화의 핵심이라 할 도덕, 윤리예절이 우리나라를 원류로 하고 있음에 깊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유교문화권에 살면서도 생활규범에서는 독자적인 주체성을 지키고 있다.2. 서양예절의 특징서양에서의 예의는 인간 생활에 있어 인간과 인간의 연결 수단인 언어와 동작의 법식을 가리키는 말로써 에티켓(Etiquette)이라 표현하고 있다. 매너(Manner)란 에티켓을 드러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에티켓이란 오늘날 인간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인 불문율로써의 규범을 뜻하나, 원래는 서양의 궁중 예의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궁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통과의례로써의 표준 행동을 의미하였다.서양에서 예의 자체를 보는 관점은 동양에서와 크게 달랐다. 동양에서는 매사에 상하 신분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높은 신분의 행동을 낮은 신분에서 그대로 따라야할 때는 대단히 무례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서양에서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 오히려 예의에 맞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예의의 실행에 있어 자기의 취미와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다.서양의 에티켓이란 서양의 예절이며, 서양의 사회계약적 생활규범을 말한다. 생활규범은 생활문화권에 따라 독특하게 발달?정립되는 것이므로 서양에도 서양대로의 생활규범이 독특하게 정립되었다.그것이 동양의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이었고, 그들과의 교류가 빈번하지 않을 때에는 서양의 에티켓을 모른다고 해서 별로 불안을 느낀다거나 무례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그러나 현대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첫째, 우리가 입는 양복이 서양의 옷이기 때문에 현대인의 복장예절에는 당연히 서양의 에티켓이 행해지게 되고, 양식을 먹는다거나 커피?홍차 등 그들의 음식을 먹으려면 역시 서양의 식탁매너에 능숙해야 한다.또, 현대는 국제화?세계화라고 해서 온 세계가 동일 생활문화권에 묶이는 경향이 있고, 자연스럽게 서구인들과 어울리게 되는 우리에게도 서양의 에티켓은 차츰 비중이 커지고 있다. 서양의 옷을 입고 서양의 음식을 먹으면서 서양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서양의 에티켓과 매너를 알아서 행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에티켓이란 인격과 품위의 반영이며, 또 생활의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사회구조와 환경이 바뀌었어도 현대적 감각의 에티켓을 준수하고, 에티켓에 대한 역사적인 의식, 업무의 능률을 생각하면서 기쁨이 가득찬 생활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서양의 에티켓과 매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같은 동양이면서도 우리나라와 중국?일본 등이 각기 지역과 역사적 특성에 따라 다르듯이 서양도 나라마다 에티켓과 매너가 다를 수밖에 없다.에티켓이 서로 다른 점을 분간하는 요령은 언어와 예절을 결부해서 생각하면 편리하다. 일반적으로 동일 언어문화권의 생활규범은 거의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달라지면 예절도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3. 동양예절과 서양예절의 차이현대사람들이 ‘예절’이라고 하면 진부하고 까다롭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생각하면서, ‘매너’라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알아서 행해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예절이 에티켓이나 매너이고, 매너나 에티켓이 바로 예절인데, 우리말로 예절이라고 하면 낡은 것처럼 인식하고, 외래어로 에티켓이나 매너라고 하면 그것은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절과 에티켓의 다른 점은 예절은 우리나라의 예절이고, 에티켓과 매너는 주로 서양의 예절이라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음식문화와 차이점』☆ 목차 ☆Ⅰ 서 론Ⅱ 본 론1. 중국의 음식문화1) 일반적 특징2) 지역별 음식3) 식사예절2. 일본의 음식문화1) 일반적 특징2) 지역별 음식3) 식사예절3. 중국과 일본 음식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1) 공통점2) 차이점Ⅲ 결론Ⅰ 서론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의식주나 생활방식 등 여러면에서 비슷한 문화를 형성해왔다.비슷한 문화이면서도 각 나라별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는데, 그 중에서 음식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중국과 일본의 지리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여기서 지리적 특성과 관련해 중국과 일본의 음식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먼저 중국과 일본 각 나라의 음식문화의 일반적인 특징과 대표적 음식, 식사예절을 알아보고, 두 나라간 음식문화의 차이점을 알아보기로 한다.Ⅱ 본론1. 중국의 음식문화1) 일반적인 특징① 재료의 다양성광활한 땅과 넓은 바다를 가진 중국은 각 지방마다 자연적?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커서 중국에서는 바다의 잠 수함과 육지의 탱크, 하늘의 비행기만 빼고는 못 먹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갖가지 재료들을 바탕으로 다양 한 음식이 발달하였다.② 숙식위주의 식습관조리기구는 간단한 편이고 조리법에 있어서 반드시 불이나 뜨거운 물을 사용하여 익혀먹는다.③ 기름의 사용기름을 많이 사용함으로서 적은 재료를 가지고 재료의 맛과 영양분을 유지한다.느끼함을 덜기 위해서 차를 많이 마시게 된다.(차 문화 발달)④ 음식과 보신약재를 일상의 식생활에 광범위하게 사용한다.‘식의합일(食醫合一)’ 이라하여 먹는 것과 약은 똑같은 것을 뜻함.⑤ 음식의 조화와 균형영양과 맛의 균형을 강조하며, 음식의 균형적 섭취를 통하여 건강을 극대화시킨다.(和: 조화)⑥ 다양한 향신료 사용외양이 풍요롭고 화려하며, 맛이 다양하고 풍부하다.2) 지역별 음식일반적으로 4대 요리로 나누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8대 요리 또는 12대 요리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으나, 오늘날 빠르게 발전하다동안 중국의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궁중요리 를 비롯하여 고급요리가 발달하여 가장 사치스러운 요리문화가 특징으로, 특히 중국 청나라 때 궁중요리가 기본이 되어 발달한 요리가 바로 북경요리이다. 지 리적으로 한랭한 북방에 위치하여 열량 높은 음식 섭취가 필요한 까닭에 육류를 이용한 튀김과 볶음요리가 많으며, 부드러우며 짜지도 달지도 시지도 맵지도 않 은 담백한 맛이 특징이고, 면류, 만두, 빙(떡) 등 가루음식과 쇠고기와 돼지고기 의 내장, 양고기, 오리고기, 어패류 등을 이용한 튀김과 볶음요리가 대표적이다. 북경오리구이② 사천요리사천(四川)지역은 중국의 서부산악지대로 식재료가 다양하지 않으므로 마늘, 파, 생강과 매운 고추 등의 향신료를 사용하는 요리가 발달하였고, 맵고 짜지 만 느끼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마파두부, 삼선누룽지탕, 삼겹살채소볶음 등이 대표적인 음식이다. 마파두부③ 광동요리광동(廣東)지방은 중국 남부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탓 에 서양의 음식재료와 요리법이 결합된 독특한 특성이 있다. 풍부한 식재료 를 사용하였고, 뱀, 쥐, 개, 원숭이 등을 이용한 기상천외한 동물요리가 많았다.부드럽고 담백하며 달짝지근한 맛이 있으며 느끼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대표적 인 음식으로 탕수육, 상어지느러미요리, 구운 돼지고기 등이 있다. 돼지구이④ 상해요리상해(上海)지역 음식은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따뜻한 기후의 영향으로 각종 농산물과 해산물을 이용하여 간장이나 설탕으로 달콤하게 맛을 내고 기름 기가 많은 진한 맛과 푸짐한 양이 특징이다. 바닷게로 만든 푸룽칭셰, 한마리의 생선으로 머리부터 꼬리까지 양념을 달리해서 만든 생선찜, 만두의 일종인 탕바 오 등이 유명하다. 게요리3) 식사예절중국인은 우리가 말하는 의식주(衣食住)를 식의주(食衣住)라고 할 만큼 식사와 식사예절을 매우 중시한다. 식사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분방하며, 정성을 다해 손님을 접대한다.① 식탁은 원형(圓形)으로 되어 있으며, 음식을 놓는 부분이 빙글빙글자리를 앉을 때는 집에서는 손님이 안쪽에 앉고 주인이 입구에 앉으며, 밖에서도 비슷하지만 때로는 주인과 손님이 옆에 나란히 앉는 경우도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안쪽에서부터 자리를 차지하여 앉음.)③ 요리가 나오면 손님이 먼저 맛을 보도록 손님 앞에 놓는다.(생선요리는 생선머리가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에게 향하도록 놓음)④ 요리는 원판을 돌려가며 자유롭게 조금씩 덜어서 먹는다. (맛있다고 혼자 많이 먹으면 실례)⑤ 요리접시를 완전히 비워서 먹는 것은 오히려 실례이므로 음식은 조금씩 남긴다.(우리와 달리 접시를 완전히 비우면 음식이 모자라는 것으로 간주되어 결례)⑥ 차나 술도 손님부터 시작하여 따라서 마신다.(항상 손님 위주로 음식을 배려함)2. 일본의 음식문화1) 일반적인 특징① 계절적 요리와 여러 가지 식기로 시각적인 면을 중요시한다.일본요리는 ‘보면서 즐기는 요리’ 라 할 만큼 맛뿐만 아니라 색깔이나 모양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사계가 분명한 일본에서는 식생활이 계절에 민감해 싱그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그리고 일본 식기는 재질도 다양하고 형태도 다양해 음식을 연출하는데 있어 장점을 갖고 있다. 담을 때도 공 간의 미를 충분히 고려한다.② 식기는 기본적으로 1인분씩 따로 쓰고 소식을 한다.무조건 많이 담는게 아니라 색과 모양을 보기 좋게 다소곳이 담는 것이 일본 요리의 특징이다,③ 주식과 부식이 구분되어 있고, 주식으로 쌀밥을 먹는다.일본도 한국과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고, 야채와 해조를 많이 사용한다. 일본은 육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는 데,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메이지 연대에 이르러서이다.④ 콩(대두) 제품인 두부, 유부, 미소, 낫또, 간장 등을 많이 활용한다.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대신 콩 소비 중심의 독특한 식생활 문화가 정착되었다.⑤ 재료의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맛을 살려서 조리한다.어패류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였기에 신선도와 위생을 중요시한다.⑥ 조미료를 진하게 쓰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三菜)가 일반적인 상차림이다.2) 지역별 음식지금은 교통 수단의 발달과 요리 기술의 교류로 그 지역적인 특성이 떨어지고 있지만, 일본음식은 지리적인 특 성에 따라 크게 나누어 관동음식과 관서음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여기에 특색있는 오키나와와 아이누족의 음식을 들 수 있다.그러나 현재 일본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의 전통 조리법과 외국 문화와의 교류로 들어온 외국조리법 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① 관동음식관동지방의 음식은 에도(지금의 도쿄)요리로 불린다. 설탕과 진한 간장을 써서 음식의 맛을 진하게 낸다.따라서 관동지방의 조림은 짭짤하고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고 국물이 거의 없다.생선초밥, 덴뿌라, 민물장어, 메밀국수가 대표적인 음식이다.② 관서음식관서지방은 전통적인 일본요리가 발달한 곳으로 교토의 담백한 채소나 건어물요리와 오사카의 실용적이고 합리 적인 생선요리가 주종을 이룬다. 맛깔 나는 음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전라도 음식을 꼽듯이 일본에서는 관서지방 의 음식이 유명하다.음식의 맛은 연하면서 국물이 많고, 재료의 색과 형태를 최대한 살리는 특징이 있다.◎ 스시스시(壽司, すし)는 일본에서 주식으로 먹는 음식인 초밥으로 니기리스시(にぎり すし, 생선초밥), 마끼스시(卷き壽司, 김초밥), 지라시스시(ちらしすし, 회덮밥)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예전에는 생선초밥용 생선으로 붕어나 은어를 주로 사 용하였지만 요즘에는 도미, 광어, 농어와 같은 흰살생선이나 참치, 연어, 송어와 같은 붉은살 생선, 전복, 피조개, 소라와 같은 조개류, 전갱이, 고등어, 전어와 같은 등 푸른 생선, 새우, 오징어, 문어, 연어알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초 밥을 만들고 있다.◎ 사시미사시미(刺身, さしみ)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으로 생선을 날로 회친 것을 의미하 는 것인데, 여러가지 생선 중 흰살생선과 기름지지 않은 것부터 먹고 기름이 많은 생선 과 붉은살 생선은 나중에 먹어야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함께 나오는 저민 생강은 다른 종류의 회를 먹기 전에 한두점 먹 고추냉이)를 넣어 차게 만들어 먹는 메밀국수이다.3) 식사예절① 젠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식 상차림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젓가락만으로 먹는다. 젓가락으로 먹기 불편한 닭고 기, 게 등은 손으로 먹어도 된다.② 식사를 할 때에는 바른 자세를 취하도록 하며 지나치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유의하고 작은 접시에 음식을 덜 어다 먹는다. 밥, 국, 반찬 순으로 뚜껑을 열고 뚜껑은 상의 왼편에 놓는다. 전채 요리를 먹은 후에 밥을 먹 는다. 밥은 양손으로 밥공기를 들어 왼손에 놓고 오른손으로 먹는다. 국그릇도 같은 방법으로 드는데 국물을 마시고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먹는다.③ 상을 물린 후에는 후식으로 과일이나 생과자를 먹고 차를 마신다. 차는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왼손으로 찻 잔을 받친 다음 오른손으로 찻잔을 잡고 소리 없이 마신 후 뚜껑을 덮는다.3. 중국과 일본 음식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1) 공통점위에서 알아본 것처럼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음식문화는 비슷한 점도 있으면서 상당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그 중 공통점이라 할 만한 것은 조화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는 겉으로 보이는 음식의 아름다움을 강조 하는 특징이 있는데, 중국은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고 생각하므로 음식의 외양을 화려하게 하고, 일본은 시 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고, 계절감을 강조한다.그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추구하는 점이다. 중국은 식의합일이라 하여 약재를 식생활에 다양하게 사용하고, 음식 을 통해서 건강을 극대화시키려 하고, 일본은 다 아는 것처럼 세계 제일의 장수국가이다. 일본이 세계 제일의 장 수국인 것은 적게 먹고, 고기보다 해산물을 즐겨먹으며, 맵고 짜지 않고 담백하게 먹는 식습관의 결과라 할 수 있다.2) 차이점① 재료와 조리법의 차이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과 일본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중국은 광활한 국토와 넓은 바다 가 있어서 재료가 다양하고,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패류를 이용한 요리가 발이다.
『 중국과 한국의 문화 비교 』거대한 땅 덩어리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의 문화는 매우 다양하다. 한국의 문화가 중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이에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를 비교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세 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 특징을 살펴보고 같은점과 다른점을 알아보기로 한다.1. 음주예절 문화1) 한국의 음주예절)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술의 문화가 대단히 고상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왔다.술을 음식 가운데 가장 고귀한 음식물로 인정한 우리 민족은 술 자체를 숭상할 뿐만 아니라 술에 따른 그릇까지도 중시하여 특별하게 제작하였다.우리 술의 유래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으나 고대 제천의식에 군무놀이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예부터 술을 하늘에 바치고 기분을 돋우는 음식으로 활용하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이미 술에 대한 금법(禁法)이 발표되는 것을 볼 수 있다.이에 오래전부터 내려온 음주예절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기로 한다.- 술 대접하는 예절술을 대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켜 결례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손님에게 무슨 술을 마시겠냐고 의견을 묻는다.? 가능하면 안주도 손님이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한다.? 술은 여러 가지 혼합하는 것을 피한다.? 손님의 주량을 짐작해 준비하며, 안주가 식거나 중간에 모자라지 않게한다.? 손님이 싫다는 술을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손님이 취한 것 같으면 슬기롭게 절제하도록 유도한다.- 술을 마시는 예절술을 마실 때에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흥겹게 유도하도록 하되 넘치고 지나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여러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실 때 첫잔은 참석자 중 좌장에 해당되는 윗사람이 마시는 술의 양을 보고 적절히 마신다.? 술은 맛을 보며 조용하게 마신다.? 먼저 어른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 윗사람에게 술잔을 드릴 때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드리는데,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들고 할 것 같으면 언동을 주의해 취중의 소 동이 일지 않게 한다.? 술자리의 뒤끝은 깨끗해야 하며, 좌중의 가장 나이 많은 이가 일어나면 모두 다 같이 술 자리를 피한다.? 주인에게 감사한 뜻을 표하는 것은 그 다음 날 하는 것이요, 술자리를 파하는 순간에 답 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이처럼 한국의 주도는 엄격하지만 현대인의 음주문화는 엉망이다.다음의 음주문화는 현대인이 고쳐야 할 잘못된 습관들이다.? 자신이 마신 잔으로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한다. 음주결과 지향문화는 고질적인 술잔 돌 리기와 술집 순례를 만들었다.? 폭탄주를 강권한다. 조선시대에도 백중홍이라 불리는 막걸리+소주공식의 폭탄주가 있었 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회오리주, 쌍끌이주, 불꽃주 등등 변종을 쏟아내는 폭탄주는 건강 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에 술을 대접받았을 때 뒤에 다시 갚아야 하지만 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어 그 두 터운 뜻을 길이 간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람은 가끔 즉시에 즉흥적으로 갚 아버리기 위하여 2차니, 3차니 하면서 몰려다니지만 오히려 경박한 세태의 풍조라고 하겠 다.2) 중국의 음주예절)중국인들에게는 수 천년 전부터 음주의 습관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술 문화는 중국인의 생활양식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역사상 술은 이미 BC 2100년 이전 하(夏)왕조 때부터 제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는 사람을 사귀고 인격을 논함에 있어서 술이 중요한 척도로 인식되어왔다. 술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기준은 향기가 짙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맛이 있고, 뒷맛이 오래가는(濃香, 醇和, 美甛, 回味長) 점에 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이 사람을 품평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중국인들의 술자리는 주흥이 무르익을수록 왁자지껄해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일면 무질서해 보이는 술자리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되는 술자리의 예절(酒道)이 있다. 특히 주의할 점은 술을 마실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같이 술잔에 입을 대고 같이 입을 떼야친다는 것은 “팽주”라 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가 서로 잔을 비우자는 것을 의미하므로, 잔을 부딪친 후에는 건배(乾杯:원샷)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건배는 마를 건(乾), 잔 배(杯) 자이므로, 술잔의 술을 모두 비운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신 후에는 상대방에게 술잔의 입구를 들어 보여 다 마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건배는 호탕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어 많이 하면 할수록 서로 의기투합되고 친구로 사귈 만 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강권해서는 안되고, 응하지 못할 경우는 사정을 말하며 양해를 구해야만 한다. 술 마시기 싫다고 술잔을 엎어놓으면 안되며, ‘情’이 있으면 모든 것이 술과 같다는 중국 속담처럼 하다못해 술잔에 물이라도 담아 마시는 것이 예의이다.중국인과 처음 대면하는 술자리에서 주량 자랑은 금물이며, 술을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특히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는 술자리라면 거의 술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보통 저녁 7∼8시부터 시작하면 두세 시간 동안 건배가 계속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가라오케’ 열풍으로 거의 중국대륙 전 지역에서 저녁 식사 후 2차로 ‘가라오케’를 찾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문제는 가라오케에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小姐’(아가씨)가 있는데, 한국손님들 중 중국인들 앞에서 가끔 술주정을 하여, 어렵게 만들어 놓은 좋은 분위기를 한순간에 망쳐 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심해야 할 예절 중 하나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날 점심부터 똑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오후 3∼4시쯤에 끝나면 다시 저녁에 환영주를 베풀고, 이러한 술자리가 중국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는 점이다. 중국에서의 술자리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1주일 뒤에 트림을 하면 입에서 고량주 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다 한다.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술이 없으면 예를 다하지 못한다(無酒不成禮)’라하여 일상의 거의 모든 행사에 술이 등장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독특한 음주문화를 형성시켜왔다. 물론 현대에 와서 음주습 한다.)? 중국에서는 술잔이 다 비기전에 첨잔하므 로 한국의 습관과 틀리며, 잔을 돌리는 습관도 없다. )? 중국인은 작은 술잔임에도 단숨에 들이키 는 법이 없다.)? 술을 마시기 싫다고 술잔을 엎어놓으면 안 된다.2. 전통혼인문화1) 한국의 혼인문화)우리의 고유한 사회제도는 처가살이가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아들과 딸에게 똑같이 상속이 행해지며, 혼인한 딸도 부모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국식 예법이 도입되면서 여자가 남자집에 들어가서 시부모를 모시는 시집살이가 행해졌다.조선의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은 처가살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친영례(親迎禮)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친영례(親迎禮)란 중국식 혼속으로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눌러 앉아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여자가 시가집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시집가다’는 표현은 중국식 친영례가 시행되면서 생겨난 표현으로 조선시대 이후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부의 적극적인 계도와 법적 처벌로 인해 점차 친영례가 행해지게 되었으나 완전한 중국식 친영례는 행해지지 않았고, 사위가 처가에 와서 혼례를 치르고 밤을 지샌 후 시부모에게 인사를 가는 반친영례(半親迎禮)가 보편화되었다. 즉, 반친영례는 중국식 혼속과 한국의 고유혼속의 절충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중국의 혼례는 오랫동안 ‘육례(六禮)’를 유지해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식 육례(六禮)를 따르지 않고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사례(四禮)를 행하였다. 의혼이란 혼담을 주고받는 단계를 말하고, 납채란 혼약의 의식으로 남자 쪽에서 남자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붉은 보자기에 싸서 여자집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납폐는 혼인을 결정하는 것으로 혼서지(婚書紙)를 남자 쪽에서 작성하여 패물과 함께 보내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인 친영은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남자집에서 혼인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중국식 혼속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혼인하는 습속이 오집으로 와서 혼례식을 거행하는 친영(親迎)이란 절차를 거치게 된다.) 3) 비교같은점다른점? 중국의 육례(六禮)와 한국의 사례(四禮)가 비슷하다.? 혼인의식에서 기러기를 사용한다부부간의 금슬이 좋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궁합을 보고 좋으면 혼례를 계속 진행하였 다. 중국이나 조선 두 나라에서 궁합이 매 우 중시되었는데, 좋은 궁합이 나오지 않 으면 본격적인 혼례 단계로 들어갈 수 없 었다.? 화려한 혼수품으로 부의 과시를 했다.? 동성동본이나 양인과 천인간의 혼례, 부모 님이 돌아가신 후 탈상 전까지는 혼인할 수 없었다.? 이혼에는 남편에 의해 쫓겨나는 ‘출처(出 妻)’와 합의 이혼 형태인 할급휴서(割給 休書), 그리고 나라에 의해 강제 이혼을 당하는 ‘이이(離異)’가 있었다.? 중국은 육례(六禮), 한국은 줄여서 사례 (四禮)이다.? 혼례석에 서는 위치가 달랐다.우리나라는 신랑은 동쪽에서 서향하여 서 고, 신부는 서쪽에서 동향하여 선다. 중국 은 신랑이 서쪽에서 동향하고, 신부는 동 쪽에서 서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옛 사 람들이 오른쪽을 높인데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랑을 양(陽)으로 보 고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우선시 하면서 신랑이 동쪽에 서고 신부가 서쪽에 서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친영단계에서 중국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남자집에서 혼인식을 거행하 나, 우리나라에서는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혼인하는 습속이 그대로 행해졌다.? 중국에서 이혼을 하고도 재혼이 가능했다.3. 식사예절 문화1) 한국의 식사예절)우리나라의 식사예절이라고 하면 식사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근래는 우리의 고유음식, 중국음식, 서양음식, 일본음식, 과학문명에 의한 인스턴트 음식 등이 혼재되고 있어 식탁예절도 음식에 따라 약간씩 달라진다.그러나 식사예절의 기본은 본래 같은 것이다. 식사예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어른이 자리에 앉으신 다음에 아랫사람이 자리에 앉는다.? 아랫사람이나 주부 또는 보조인이 음식그릇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