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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인의 생애와 문학
    金東仁의 生涯와 文學1. 몇 가지 전제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시 하수구리 6번지에서 전주김씨 대윤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조상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대부호로평양교회 초대장로였다는 기술을 여러 논자들의 글에서 볼 수 있다.그런데, 위와 같은 진술에는 세 가지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거의 위의 진술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세 가지 의문이란, 첫째 김동인의 출생지가 정말로 하수구리 6번지인가하는 것과 그의 부친 김대윤이 평양교회 초대장로이며 대부호인가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의 해결은 김동인의 작가적 성격의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이 글은 김동인의 문학적 특성을 작가의 생애사 검토를 통하여 추출하고자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글이므로 위의 의문점을 해명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먼저, 김동인의 출생지에 대한 혼란은 출생지의 동리명이 상수리, 하수구리, 진석동 등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그런데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서는 가족의 증언과 호적을 참고로 하여 김동인의 출생지 겸 본적지를 하수구리 6번지로 확정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간된 전집에도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김동인의 유족들의 현재의 호적이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망인 김경애여사와 면담시 확인한 신혼시의 주소가 하수구리이며, 이곳이 김동인이 재혼한 결혼식장인 평양 서문밖교회의 뒷문 밖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리고 김동인의 형인 김동원의 장녀인 김순환 여사[1918년생,현재 미국에서 거주]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이곳의 집은 김동원이 매입하여 준 것이라 한다. 한편 미망인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이곳의 집은 작은 한옥이었다 한다. 그런데 1925년 11월에 나온 창간기념호에 실린 문인주소록에 기재된 주소는 상수리 271이다. 뿐만 아니라 1930 재취경위는 알 수 없으나 장자를 본 후 17년만에 차자를 얻은 그의 기분은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그는 어린 김동인을 기가 꺾이지 않게 길렀는데, 그것이 김동인의 오만한 성격형성의 첫째 원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옥씨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에 의거할 때 193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가 칠순에 가까 왔다 하니 대강 1865-6년생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35세를 전후하여 김동인을 얻은 것으로 당시로 보아서는 매우 늦게 얻은 자식이 된다. 여기서 만득자에 대한 모친의 남다른 애정과 그로 인한 자식의 성격형성을 짐작할 수 있다.*^김동인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곡식 흩으려 놓은 사건이나, 성경시험 사건과 동경유학을 가게 된 경위들은 그의 유아독존적 태도가 형성되게 된 이유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만득자에 대한 왜곡된 부모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동인에 대한 모친의 맹목적인 편애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김동인의 부친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재취부인인 옥씨보다는 연상일게 분명하며, 이렇게 볼 때 김동인이 출생했을 때에는 부친의 나이를 50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남인 김동원이 1913년 105인사건의 상고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후, 1915년경 성가하여 분가할 때에 김대윤은 어린 동인 동평과 젊은 부인의 장래를 위하여 장자에게 전재산을 상속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가 장자에게 상속할 재산에서 이미 재판비용으로 쓴 경비를 제한 나머지만을 분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32세에 실업계에 투신한 김동원이 실업계와 교육계, 그리고 흥사단과 연관이 있는 수양동우회에서 주동적으로 활동하여 서북지방의 지도자가 된 것은 전혀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 여겨진다.^한국이 없어지고 일본제국의 한 지방으로 화한 것은 여가 열한살난 해였다. 소위 의 고향인 평양, 의 소산소인 --이것이 여의 생장한 환경이었다.*^어렸을 때 동인은 울음을 한 번 터뜨리면 좀처럼 1917년 3학년 때 회람잡지에 일본어로 소설을 한편 게재하게 된 이후인 듯하다.*^위에 요약한 유학과정과 문학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방향설정 이유를 검토할 때 무언가 진지하지 못한 면이 김동인에게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학교 선택과 장래의 목적 변경이 그것인데, 물론 운명적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심사숙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1918년 성탄절 밤에 청년회관에 모인 유학생들은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작성에 대하여 흥분된 이야기를 나눌 때 김동인은 주요한과 함께 하숙으로 돌아와서 `정치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라는 명분으로 동인지 간행을 의론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여 이날 밤을 우리의 민족사에 두 가지 큰 의의로 고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김동인의 행위와 자평에 동의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민족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줄 독립선언과 같은 중대사를 타인에게 밀고, 그것이 아무리 우리의 근대문학의 초석을 딲는 일이라 하더라도 오불관언하는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김동인의 역사의식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김동인은 지 간행의 경비를 대고, 주요한 최승만 김환 등이 동인이 되어 1919년 2월 8일자로 동인지 가 발간된다. 스무 살의 혈기와 자기를 선각자노라는 만용으로 순수문학을 부르짖은 김동인은 을 1호와 2호에 연재하고, 3호에서 6호까지에 를, 8호에는 과 를, 그리고 9호에는 를 발표한다. 이 사이에 잡지에 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하는데, 이때가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이다. 물론 이기간 중에 그는 등 십 편의 수필과 등 여섯 편의 평론을 발표한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분명 김동인의 문학적 태도는 이광수 의 그것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우리는 우리의 전인인 춘원의 밟은 문학 발자국을 옳다고 보지 않았다. 춘원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개혁의 무기로 썼다. 이상 건설의 선전기관으로 썼다. 그 태도 내지 주의를 우리는 옳다 보지 않은 의 기간 동안 손 한번 잡아 본 일 없이, 그러나 늘 기쁨에 찬 마음으로 바라만 볼 수 있었던 것도 첫사랑의 마리와 관계 있는 것이다. 이는 세미마루를 마리의 화신으로 본 김동인은 진정하고 깨끗한 사랑은 육체의 개재를 떠나야 한다고 보는 동인의 사랑관과 유관한 것이다.^첫사랑이 소년의 동경과 순정의 꿈으로 끝난 후, 김동인은 많은 여인을 보고 많은연애할 기회를 가졌었지만 유희 기분이 안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적이 없다고 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쓰고 있는데, 여기서 김동인의 왜곡된 여성관의 근거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김동인이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인데, 부친의 별세로 귀국한 김동인은 육로리에서 건어물상을 하는 거상의 딸인 동갑내기 김혜인과 결혼을 한다. 이 결혼에 만족한 김동인은 신혼 초에는 아내를 무척 사랑한 듯하다.*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김동인은 약 6개월간 신혼기간을 아내와 보내고 다시 동경으로 간다. 아끼꼬를 만난 것은 이 때이며, 가와바다화학교에 적을 두고 후지지마다께지의 화실로 미학을 배우러 다니면서 동문으로 사귀게 던 것이다.^부친의 사망후 김동인이 물려받은 유산은 삼천 석과 당시 돈 10여만 원이었다 하는데, 이 정도의 재력을 지닌 김동인이 아끼꼬에게 홀대를 당하게 던 것은 앞에서 간단히 서술한 바와 같이 민족적 차별의식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이 후지지마의 화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들의 관계는 정상적인 연인의 관계라 할 수 없을 듯하다. 에 서술하고 있는 이들의 관계를 보면 이것이 분명해 진다.그는 다혈질의 여자였다. 그리고 철학자와 같이 이론을 캐기를 좋아하였고, 참새와 같이 지절거리기를 좋아하였다.이와 같이 서술되고 있는 아끼꼬는 말괄량이이며, 방자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여인이다. 이들의 관계는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서로 욕설을 하면서도 열정에 타오르는 입맞춤을 하는 이상한 연애관계를 석 달이나 지속한다. 1919년 3월 5일에 귀국한 김동인은 동월 26일 출판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어떤 사람의 권고와, 심심하면 나가 보는 그의 태도는 절실한 생활적 동기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동인은 노산홍과 불유쾌한 헤어짐 이후 몽리사업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침 일찍이 자전거로 현장에 나가고, 날이 어두워 져서야 돌아왔으며, 오전 오후에 한 번씩 몽리구역을 편답하면서 검분하기도 하였다.^백여 평의 땅을 잡아서 나는 자농까지 하였다. 더럽다고 곁에도 가지 않던 거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스스로 지은 농사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유쾌한 노릇이었다. 농립모에 삽이나 호미를 들고, 논에 들어가서 일하는 자기를 스스로 보고는, 나는 때때로 빙그레 웃었다.*^동기야 여하간에 김동인이 노동과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문학의 깊이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동인에게 나름대로 새로운 체험을 얻게 했던 개간 사업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이는 관계 사업을 조사하러 나온 관리와 변변치 않은 언쟁으로 개간으로 벌려 놓은 농토를 원상 복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파산의 위협 아래서 군산, 대구, 신의주 등을 떠돌면서 이 고통을 잊고자 노력한다. 이 때의 그의 심정을 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이런 때에 받는 공포와 불안을, 무인고도에 혼자 버림을 받은 사람의 느끼는공포와 불안에 비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그 때의 공포와 불안은그따위에는 비길 종류가 아니었다. 자활책과 처세술이라는 것을 아직 배우지 못한내가, 당연한 결과로서 그때 나의 앞에서 발견한 커다란 두 가지의 그림자는,,하는 것이었다. 이런 때에 당연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직이겠거늘, 나는 그때 그런 것을 생각하여 본 일이 없었다. 재산이 없으면 거렁뱅이거니 이렇게 생각한뿐이었다.*^이 글에서 김동인이 받은 타격의 정도를 알 수 있겠거니와, 그는 한 달 정도의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아직도 스물 두셋으로 보던 새파란 젊은이가,한 달 동안에 삼십이 넘은 중년'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으며, 아내인 혜인도 탄이다.^
    인문/어학| 2003.05.08| 22페이지| 2,000원| 조회(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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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 이광수연구 평가B괜찮아요
    李光洙의 生涯와 文學李 光 洙 의 生 涯 檢討 家系1.* 1892년 음 2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신리에서전주 李씨 鍾元(42세)과 충주 김씨(3취, 22세)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누이가 둘 있음. 아명 보경(부친의 꿈에 노승이 거울을 주고감),아호 孤舟, 외배, 올보리, 京西學人, 춘원 등.부친 이종원 과거에 실패한 후 술에 빠짐.조부 李建圭는 풍신 좋고 기운 센 풍류남아, 기생첩을 얻어 술집을 냄.유년기의 가세가 기울어 대여섯 번이나 이사, 마지막집은 방 두 칸에부엌 한 칸. 다섯 식구가 살다.2.* 1902년 8월 호열자로 부친 사망, 아흐레만에 모친도 사망. 누이 둘을거느린 천애고아가 됨. 1년 후 애란도 사망하여 애경과 남매만 남게 됨.(「人生의 香氣」1924. 11. - 1925.1, )나무하며, 친척집에서 눈치밥을 먹음, 마을 사람들이 마련해 준 3원을가지고 평양에서 담배를 사다가 팜. 외가와 재당숙을 찾아 전전,3.* 1905년, 하루는 따뜻한 양지에서 이를 잡고 있다가 조부는 물론 부친과친분이 있는 동학의 대 접주인 서병달에 발견된다. 서접주는 한 달간훈련을 시킨 후 박대령집에 데리고 간다. 서울에서 오는 지령을 베껴서각지로 보내는 일을 함. 박대령의 무남독녀 禮玉(다섯 살 위)에 대한 애정.나무하다가 손을 비었을 때 매주던 여인, 새옷을 입혀주던 서병달의 아내,박대령의딸 예옥 등은 이광수의 여성상의 원형이 됨.동학체포령에 의하여 정주를 떠남. 정주-박천-평양-진남포-(화륜선)-인천-서울로 옴. 열흘에 「일어독학」을 몽땅 외어 소공동학교 일어선생이 됨. 천도교 일본유학생 선발에 뽑힘.< 敎育, 交友>4.* 1906년 동경으로 가서 大城中學에 입학. 학비부족으로 귀국.1907년 재도일하여 明治學院 3년에 보결시험으로 입학. 바이론, 체홉등을 애독. 문일평, 홍명희, 최남선 등과 교우(「문단생활 30년을 돌아보며」), 명치학원 친구인 야마사끼(山埼俊夫)와 친하여 톨스토이와성경을 읽고 토론(「그의 自敍傳」, 조선일보, 1936. 12.22자」- 표면상 3인칭인 듯하나 1인칭관찰자 서술. 보고.*「어린 벗에게」- 서간체=1인칭, 일방적 발신, 자기표현 극대화.*「방황」- 자전적형태의 1인칭 주인공 서술, 심리묘사.참고 1. : * 장편 「無情」(, 1917. 1. 1 - 6. 14 )* 「開拓者」(, 1917. 11. 10 - 1918. 3. 15 )참고 2. : *「放浪」( ?),「사랑인가」(1909.12)--미확인 소설참고 3. * 散文詩 「獄中豪傑」( 9호, 1910), 「곰(熊)」( 6월),「우리 英雄」(, 1910 ),「말듣거라」(), 1913),「새아이」, 1914),「내 소원」,「님나신 날」,「한 그믐」(, 1915),「벗」,「궁한 선비」,「양고자」,「極熊行」(, 1917 ),「어머니의 무릎」(, 1918)참고 4. *「文學의 價値」(대한 흥학보> 11호, 3월)「文學이란 何오」(, 1916 )「懸賞小說考選餘言」(, 1918 )참고 5. *「情育論」(, 1906 )「今日我韓靑年과 情育」( 10호, 1910. 2), 에 외 3편「早婚의 惡習」(, 1916. 11. 23-26 )「朝鮮家庭의 改革」(, 1916. 12. 14- 22 ) 외 2편「婚姻에 對한 管見」(, 1917 )「耶蘇敎의 朝鮮에 준 恩惠」( 9호, 1917 )「婚姻論」(, 1917. 11. 21- 30 ) 외 5편「意志論的 進化論」( 16호, 1918 )「宿命論的 人生觀에서 自助論的 人生觀에」( 17호, 1918 )외 2편「朝鮮靑年獨立團宣言書」( 1919. 2. 8 )참고 6. * 기타 수필 : 「余의 自覺한 人生」( 3권 8호, 1910 )「同情」, 沈默의 美」(, 1914 )「大邱에서」,「東京雜信」(, 1916 )「거울을 마주앉아」,「海蔘威로서」,「東京에서 京城까지」(, 1917)李光洙의 長篇小說에 나타나는 作家精神*. 長篇小說 年譜「無情」(매일신보, 1917. 1.1-6. 14) ,「開拓者」(매일신보, 1917. 11. 10-1918. 3. 5), ◈「許生傳」( 동아일보, 1923. 12. 1.-1924. 3. 21운동후의 頹廢와 墮落, 그릇된 貞操觀, 蓄妾風潮, 西歐憧憬.指導精神 - 민족주의적 애국정신(봉구,순영의 3.1운동 참여), 기독교사상과 인류애(사랑과 희생, 봉구, 순영, 순흥, P부인)歸農意識의 擡頭 - 봉구의 金谷생활-「흙」의 단서.④ 유관논문 및 의의 ; 「혼인론」「자녀중심론」「민족개조론」, 문학론을 「文士와 修養」「藝術과 人生」, 작가의식의 형상화에 성공.4. 「群像」(1930-31)① 제작배경 ; 병중에 社의 영업방침하에 쓴 것(편집국장). 시대정신의 통속적 표현 신문학 일반의 쇠퇴현상(임화「通俗小說論」), 1930년대의 조선의 橫斷面, 다른 작품에 비해 특별한 경향과 수법의 작품(「革命家의 아내」서문, 1930.10),「개척자」와 함께 가장 관심을 못 끈 작품.②「혁명가의 아내」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병든 孔産의 아내요 동지인 方貞姬가 그를 배반하고 정욕의 본능적 유혹에 耽溺하여 비극으로 귀결한다. 「사랑의 다각형」은 타의적으로 빚어진 치욕적 생활을 탈피하여 희생적 자아를 추구하는 玉貴男과 현실적유혹에 빠져 희생적 애정을 배반하는 宋恩姬, 그리고 여인에게 배반당해 立身報國을 위한 유학을 포기하는 韓恩敎의 사랑의 삼각형을 그림. 全과 누이 愛卿과 옥귀남, 閔長植과 宋간호원 등의 사랑의 3각 갈등. 옥귀남(희생적 자아) 한은교 송은희(순응적 자아), 은희의 배신과 귀남의 희생적 자아에서 새로운 지향 의식을 자각. 3부작의 마지막인「삼봉이네 집」은 식민지치하 농촌수탈정책하에서 농토를 잃고 생활을 찾아 유전하는 망국백성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린 소설.③ 「혁명가의 아내」- 개인의 현실적 욕구와 패배하는 사회개혁의지. 시대상.「사랑의 다각형」-「재생」의 모티브에서 사회의식이 제외된 순응적 현실과 희생적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삼봉이네 집」-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면서 정착의식을 성취하려는 삶의 현장과 지표의 제시.④ 종합평가 ; 1부 좌절, 2부 재생의 인지(재생), 3부 삶의 지표제시(구제)(현재 미래), 주관적 전지 시점 객관화. 1,2부는「재생」에, 3부는 恭愍王」(조선일보, 1937. 5. 28-6. 10,피검), 「世祖大王」(전작 박문서관, 신역사소설전집 5권),「원효대사」(매일십보, 1942. 3. 1-10. 31)1. 역사소설 창작 동기 및 배경 ;그 시대의 지도정신과 환경과 인물의 특색과 및 시대의 약점 등을 폭로·설명하자는 역사학적·사회학적 흥미,前時代의 해부로 인하여 次時代의 진로를 암시하려는 微衷재현, 묘사, 자신의 예술적 흥미.민족정신 밀수입의 포장으로 쓴 것.아무 쪼록 쉽게, 언문만 아는 이면 볼 수 있게, 읽는 소리만 들으면 알 수 있게, 그리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그리고도 독자에게 도덕적으로 해를 받지 않게.史實에 충실,2. 개별작품의 특징 :*「선구자」: 도산 안창호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전기, 일제에 의하여 113회로 중단.*「마의 태자」: 新羅 최후의 왕인 敬順王이 高麗 태조인 王建에게 항복하고자 하여 태자가 이를 말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 잃은 슬픔으로 金剛山에 들어가 麻衣를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는 史實을 제재로 쓴 소설. 700면의 소설의 대부분이 궁예에 대한 이야기이며, 마의태자에 대한 부분은 말미에 약간임. 김동인은 '喜劇的, 唱劇調'요, '한 개의 講談'에 지나지 않으며, 소설적 의미의 주인공도 불분명하다고 비판.*「단종애사」: 史實에 충실한 소설.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端宗 이 그의 叔父인 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되어 비참하게 죽은 사실에 근거한 소설. '人情과 義理'를 드러내려고 창작. 연재 당시 독자의 인기집중을 받은 작품. 김동인은 '소년왕의 일대기', '남효원의 六臣傳의 演義'일뿐, '史實의 再生'이라는 소설로의 새로운 해석에 의한 창작이 되지 못함을 비판.*「이순신」: 古下의 권유로 쓴 소설. 춘원이 가장 숭배하는 인물. 시「우리의 英雄」참조. 殺身成仁 憂國衷情의 소설화. 주인공의 영웅화와 英雄主義史觀이 문제.*「이차돈의 사」: 순교정신에 뿌리를 둔 진리숭상의 미학을 소설화. 불교의 신라 하였다. 그녀가 김일련이었구나 하고 나는 기억을 되살렸다. 그녀는 내가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닐 때 사귄 김일홍의 누이였다. 당시 동경의 모 여학교에 다니는 그녀에게 나는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는 실의에 차 방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유는 기혼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해삼위로 가는 도중 파선하였을 때 같은 배를 탄 김일련을 구조하였다. 그녀는 그 동안 어느 시인과 열렬한 사랑을 하다가 그가 죽은 뒤에 백림으로 유학가던 길에 조난당한 것이었다. "우리"는 장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지 못하며 다만 차에 실려 갈 뿐이었다.는 장편 「無情」이 끝나갈 무렵 씌여진 작품이다. 「無情」을 거의 끝낼 무렵 그는 동경에서 스물 한 살의 의전 졸업반 여학생을 알게 되어 가슴을 태우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 하숙집 牛溪館 이층에서 한참 화제 중인 「無情」을 집필하다가 이광수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기침이 심하고 미열이 났다. 너무 과로한 탓이러니 하고 병원에 찾아갔다. 그 병원이 바로 우시고매 여자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었다. 진찰비가 일원 오십전이었는데, 이광수는 육십전밖에 없었다. 모처럼 온 것을 그대로 돌아설 수도 없고 해서 쩔쩔매고 있을 때, 이광수 앞으로 한 女人이 지그시 다가왔다. 그 여인은 조선을 구할 태양 같은 고국의 학생이 진찰비가 없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앞에 다가선 것이었다. "좋으시다면 제가 빌려 드리겠어요." 그 여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샛파란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그 여인이 바로 허영숙이다. 허영숙은 「어린 벗에게」에서 김일련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잉광수의 두 번째 부인이다.이광수는 '무저항주의 무폭력주의 博愛主義에서, 人類本然의 理性과 良心의 權威가 바로 善이다.'라고 말하며 勞動力作이 最大最初의 善이라고 믿는 톨스토이의 인생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가 불교로 전이할 때까지 많은 작품에 이런 톨스토이의 종교의식에 의한 생활이 형상화된다. 톨스토이는 일찍이 부모를다.
    인문/어학| 2003.05.08| 12페이지| 1,000원|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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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한국 중세사, 고려] 고려 왕조의 성립 평가B괜찮아요
    고려 왕조의 성립차례1. 머리말2. 신라말의 사회정세와 후삼국의 성립1) 사회 혼란과 호족의 대두2) 후삼국의 성립3. 고려 왕조의 성립1) 왕건 세계의 성장2) 고려 왕조의 탄생과 후삼국의 통일4. 고려 왕조 성립의 역사적 의의5. 맺음말1. 머리말9세기 말과 10세기 초, 신라(新羅) 사회는 집권세력의 타락과 골품제도(骨品制度)의 모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급격하게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앙 권력의 약화를 틈타 지방에서는 이른바 호족(豪族)세력이 성장하게 되고 한반도는 다시 한번 심각한 분열과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전란의 시대 속에서 건국되어 그 혼란을 평정하고 새로운 통일의 시대를 연 국가가 바로 고려(高麗)이다. 고려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한반도의 재통일(再統一)이라는 위업을 이루어 낸 왕조이며 불교(佛敎)를 숭상하면서도 유교적(儒敎的) 정치 이념을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즉 중세적(中世的) 사회로 이행한 왕조이기도 하다. 즉 고려 왕조의 성립은 단순한 새 왕조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본 발표에서는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고려 왕조가 극심한 분열과 전란의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고 통일 왕조로서 이 땅에 설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지적이 있기를 바란다.2. 신라말(新羅末)의 사회 정세와 후삼국의 정립1) 사회 혼란과 호족의 대두신라 사회는 8세기 후반부터 극심한 왕위 쟁탈전을 거치며 진골 귀족(眞骨貴族)들이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모순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신라 사회를 이끌어 오던 골품제(骨品制)는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해 갔고, 현실적으로도 전제 왕권은 그 권능(權能)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편 중앙 귀족들은 부패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고 이에 따라 정치 질서는 해이해지고, 국가 재정은 궁핍해져만 갔다. 신라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중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이라 칭하면서 사병(私兵)을 보유하여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이들 호족에 의해 점차 붕괴, 해체되어 갔고, 그것은 중세 사회로의 이행을 알리는 신호였다.2) 후삼국(後三國)의 성립(견훤과 궁예의 등장)신라 말의 혼란기에 각 지역에서는 저마다 힘있는 세력들이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신라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각지의 수많은 반란 세력 가운데 두드러진 세력은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尙州)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지금의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지금의 原州)의 양길(梁吉),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州)의 견훤(甄萱), 철원(鐵圓, 지금의 鐵原)의 궁예(弓裔)등으로서 이들은 모두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다. 원종, 애노, 기훤, 양길 등의 세력은 지방의 한낱 반란군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지만 그들과는 달리 새로운 국가 체계를 수립하여 신라에 대항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과 궁예는 각각 주위의 대소 반란 세력들을 병합하고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성장시켜 마침내 후백제(後百濟)와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하게 되었던 것이다.견훤은 상주의 농민 출신으로 본래 성(姓)은 이씨(李氏)였는데 뒤에 견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그는 군인이 되어 서남해 방면에서 도적 등을 소탕하며 많은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비장(裨將)으로 승진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견훤은 지훤(池萱), 박영규(朴英規), 김총(金摠)등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들은 그 후 견훤의 중요한 심복이 된다. 이런 와중에 진성여왕의 실정과 기근으로 백성이 유리하고 도적이 봉기하자, 도적 소탕 등을 핑계로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진격해서 여러 군현(郡縣)을 접수하고 그 기세를 몰아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며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닦게 된다. 그 후 그建)을 발탁하여 송악(松岳)의 태수로 임명하고, 왕건과 더불어 신라의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에 있는 30여개의 성을 쳐서 빼앗았다. 또 왕건을 보내어 양길의 군사를 쳐부수고, 이듬해 국원(國原, 지금의 忠州), 청주(淸州) 등을 손에 넣었다. 901년(효공왕 5년) 궁예는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워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훗날의 태봉)라 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기존의 신라, 후백제와 더불어 후고구려까지 세 나라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여기서 특이한 점은, 견훤과 궁예는 모두 신라 계통 출신으로 백제나 고구려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이 시대에 유행하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부흥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 말기의 여러 반란 세력들은 신라의 외곽 지역, 즉 호남, 충청, 강원, 경기 등의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활동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과거 백제나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고, 그 지역 주민들도 대부분 고구려, 백제인의 후손들이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이 지역들은 경주(慶州)와 그 근방 지역에 비해 차별을 받았고, 그런 차별에 대한 반감과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 · 호족의 성장, 그리고 과거 고구려, 백제에 대한 지역민의 계승 의식이 맞물려 고구려, 백제의 부흥의 움직임이 일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궁예와 견훤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과는 연고가 없는 그 지역의 호족,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고구려,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고 국명(國名)에도 그러한 계승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3. 고려 왕조의 성립1) 왕건 세계(世系)의 성장고려 태조(太祖) 왕건은 송악 지역 출신의 지방 호족으로써 그의 아버지 용건(龍健)이 자진하여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려 의종대 김관의(金寬毅)의『편년통록(編年通錄)』을 토대로 한 『고려사(高慮史)』의 「고려세계(高慮世系)」에 기록된 왕건과 그 조상들에게 귀부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왕건이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궁예는 투항한 이들 부자(父子)를 금성과 철원태수에 각기 임명하였다. 898년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양을 거쳐서 오늘의 서울 일대를 차지하였고, 900년에는 군대를 한강 이남으로 더욱 남하시켜 충청도 지방에까지 힘을 뻗치었다. 이리하여 한강 상류 지방에 국한되던 궁예왕의 영토가 한강 하류의 넓은 평야지대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 견훤의 배후인 나주 지역을 공략하여 견훤에게 커다란 군사적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 활동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에게 커다란 신임을 얻게 되고 서서히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관직도 시중(侍中)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왕건은 이처럼 힘있는 세력으로 성장해가며 고려 왕조 성립의 기반을 닦는다.2) 고려 왕조의 탄생과 후삼국 통일신라 왕족 출신의 궁예는 901년에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나 궁예는 나라를 일단 세운 뒤에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종래의 진지한 노력을 포기하고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였다. 자신을 세상 끝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彌勒佛)의 현신(現身)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그는 관심법(觀心法)이라는 일종의 '넘겨짚기'로 위협적인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 일례로 승려 출신인 궁예는 스스로 불경 20권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정통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단적이고 파격적인 교리였거니와 그 교리로써 가르치라는 분부를 내리니 그에 대해 반발하며 따르지 않는 승려들이 나왔다. 석총(釋聰)이 그 대표적인 승려였는데, 그는"모두 사악한 이야기요 괴이한 말들이기에 가르칠 수 없다."하였다. 궁예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하여 석총을 잡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쇠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는 처벌에 에누리가 없었다. 또한 그는 말년에 와서는 관심법을 통해 왕비 강씨에게도 화살을 날렸다. 그녀에게 간통의 혐의를 씌우고는 뜨거운 불에 쇠공이를 달구어 그녀의 음분한 사전 모의가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그 예가 바로 궁문(宮門)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4인의 마군장군이 거사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4인의 마군장군은 궁예왕의 건국과정에 참여한 세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궁예왕이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청주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즉 궁예왕의 왕권이 강화되어 가던 시기에 많은 이들이 숙청되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을 지켜보던 4인의 마군장군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감에 따라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거사가 이루어지고 궁예는 궁성을 호위하는 자신의 친위군 장수들이었던 4인의 마군장군들의 기습적 모반으로 손 쓸 틈도 없이 궁중을 탈출했다. 후에 궁예는 부양 땅의 농민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포악한 절대 군주 궁예는 그의 부하 왕건에 의해 역사 속의 인물로 사라졌다. 이로써, 918년 후고구려(태봉)는 건국된 지 17 년만에 무너지고 새롭게 고려 왕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먼저 왕건은 고려라는 국호를 통해서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분명히 한다. 물론 궁예와 같은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호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정치적 의도도 있었지만 실제로 고구려 고토(故土) 회복을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왕건은 919년에 평양(平壤)에 성을 쌓음과 더불어 평안남도 용강(龍剛)에도 성을 쌓아 북으로 출정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방면의 북진 정책은 926년에 발해(渤海) 멸망 뒤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또한 왕건은 동북방면으로의 북진 정책도 추진하여 많은 흑수 말갈(黑水靺鞨)족이 귀순해 오기도 한다. 이러한 북진 정책의 노력으로 고려는 청천강 유역에서 함경도 안변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또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견훤의 강력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은밀히 호족 세력의 이탈을 막기 위한 포섭 공작을 광범위하게 펼쳐 나갔다. 여러 호족들로부터 29명의 부인
    인문/어학| 2002.10.28| 8페이지| 1,000원| 조회(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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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한국중세사, 고려] 고려초 호족연합정권설 평가B괜찮아요
    목 차Ⅰ. 머리말Ⅱ. 호족연합정권의 정의와 동향1. 호족연합정권의 정의2. 시대별 호족세력의 동향Ⅲ. 호족 연합정치의 운영실태1. 호족들과의 인적·사적 결합2. 제도적 운영3. 호족연합정권설의 지지의견Ⅳ. 호족연합정권설의 비판과 문제점Ⅴ.결말Ⅰ. 머리말新羅末·高麗初의 전환기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주인공은 지방세력이었다. 이들 지방세력을 흔히 '豪族'이라 부르며, 이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호족의 실체에 대해 상당한 이해가 축적되었고, 新羅末·高麗初期를 '豪族의 時代'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초기의 정치적 성격을 지금까지는 흔히 호족 연합정권으로 이해하여 왔는데, 최근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그러면 고려초기의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자.Ⅱ.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과 시대별 호족세력의 동향·호족 : 호족은 족단을 기초로 한 혈족집단의 수장으로서, 혈연집단은 신라시대부터 촌락을 구성하는 사회적 기초였고 나말려초기를 거쳐 고려 후기에 이르러 족단 내부의 계층분화가 진행되기까지 정치, 사회적 기초단위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주,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지방사회를 통치하였고 중앙의 정치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 즉 관반제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경제력은 물론 권력과 무력을 갖추고 문화를 독점적으로 향유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당시 새로이 전래된 선종불교를 받아 들여 이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정한 지역에서 대두한 호족 중 세력이 가장 큰 호족은 그 수장을 통하여 하위호족을 지배하였다. 고려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화하게 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 있으면서 왕권강화와 더불어 향리화의 길을 걷게 되는 부류이다. 그러나 지방에 남아 있던 향리들도 과거나 천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대토지 소유라는 경제력을 근간으로 하여 권력이나 무력, 그리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갖 춘 지방의 유력한 족단 太子로 冊封하도록 하였고, 또한 혼인에 있어서도 진천 임씨, 양근 함(왕)씨, 청주 김씨 등의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시킴으로써 혜종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시켜주었다. 그러나 ,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그의 이복동생인 堯와 昭가 혜종의 세력에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부 후백제 지역 출신이나 경주 세력과 연결되기도 했지만 주로 패강진 세력, 특히 평산 박씨 세력과 연결되어 있어 혜종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였다. 堯와昭 세력의 움직임을 눈치 챈 왕규가 혜종에게 이를 참소 했으나, 혜종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하자 왕규는 점차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더욱이 혜종이 그의 딸을 昭와 결혼시키자 잘못하면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그는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혜종을 제거하고 외손인 廣州院君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나 혜종의 제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혜종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왕규를 처벌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혜종이 왕규가 자신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실상 세력 면에서 혜종이 훨씬 약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왕규의 혜종 제거 시도로 인해 혜종의 세력은 왕규 세력과 혜종·박술희 세력으로 분열되었고, 이 틈을 탄 요와 소의 세력이 박술희·왕규 등을 제거함으로써 요가 혜종의 뒤를 이어 정종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혜종대의 왕위 계승전은 혜종 가문의 側微로 인한 왕권의 미약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등장한 호족세력들끼리의 결합이 강고 하였기 때문이다.3) 정종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동향정종은 박수경·박수문 등의 패강진 세력과 서경 세력의 협조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西京 遷都를 시도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서경천도 계획은 북진정책의 일환이거나 圖讖思想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호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개경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서수 있었던 공신 소유의 노비들을 풀어주기 위해 奴婢按檢法(955)을 실시하였다. 이는 태조 이래의 많은 공신, 특히 호족 출신 공신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고 이는 곧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시도는 광종 9년 科擧制의 실시로도 나타났는데, 이는 후주의 귀화인인 쌍기의 건의로 처음 실시 된 것이었다. 이것의 목적은 유교적 학식으로 왕을 충실히 보필할 수 잇는 신관료군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 광종 11년(959)에는 백관의 公服을 정하였는데, 이는 곧 광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이때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급 관리인 權信이 상급 관리인 俊弘·王同를 참소하자 광종이 이들을 폄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어 간신이 충신들을 무고하게 모함하고, 자식들이 그 부모를 참소하기 까지 하였다. 광종은 이렇게 호족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 내지 숙청하면서 자신의 신변에도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여 이 해(960)에 관부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徇軍部를 軍部로, 內軍을 掌衛部로 개칭하여 시위군을 강화하고, 국왕의 병권 장악과 관련된 그 조직이나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광종의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주로 학사라고 불리던 文士층과 중국에서 귀화한 南北庸人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정에서 非才들(재주와 학식이 부족한데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광종에게 잘 보여 고위직에 오른 자들)과 신진관료층인 後生들(신진관료층을 포함한 나이가 젊은이들)이 함부로 진출하여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다.세 번째 시기는 광종 11년 이후부터 그의 말년인 광종 26년(975)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광종의 개혁과 숙청, 그리고 혼란이 계속되면서 일부 호족공신 세력들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광종의 불교에 대한 혹신 때문에 극심한 폐단이 노출되어 결국 광종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그렇지만 광종대에는 문신 귀부자와 피귀부자 사이에 일정한 형식과 조건 등이 충족될 때에 비로소 성립된다고 할 수 있는데, 기부자는 자신의 자식이나 인척을 보내 충성을 표시하고 이에 대해 피기부자는 일정한 반대급부를 제공하였다. 예를 들면 관직을 주거나 사성 혼인을 통해 의제 가족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비록 기부자와 피기부자 간에 형식적으로 상하관계 혹은 군신관계가 성립되었지만 당시 귀부 호족들은 성주 혹은 장군이라 불리우며,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兵部·倉部등과 같은 관부를 설치하여 지방민들을 통치하는 등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잃지 않은 채 고려왕조에 참여하였으므로 귀부 호족은 상황에 따라 혹은 기부자의 의사에 따라 그러한 관계를 깰 수 있었다. 예)공직은 연산 매곡인으로 어려서부터 용략이 있어 신라말에 본읍장군이 되었다. 이때 난리가 일어나자 드디어 백제를 섬겨 견훤의 복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자 직달 차자 금서 일녀를 백제에 볼모로 보냈다.공직이 일찍이 백제에 조공하여 그 무도함을 보고 직달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건에게)기부하고자 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 직달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명주에게 귀부하여 패읍을 보전코자하오니 (중략)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공직은 드디어 뜻을 정하고 왕건에게 귀부하였다......(생략)...(전략)태조가 기뻐하여 대상을 제배하고 백성군의 록과 마 3필과 채금을 사하였다 그 아들 함서를 좌원으로 삼고 정조 준행의 딸을 아내로 삼게하고...(생략)2)婚姻을 통한 연합건국세력과 호족세력과의 인적 결합은 귀부 관계 못지 않게 혼인관계를 통해서도 널리 이루어 졌다. 그 예로서 왕건은 유력한 호족의 딸들을 비로 맞아 들였을 뿐 아니라, 그의 소생인 이복남매들끼리도 서로 혼인을 시킴으로써 왕건은 전국의 유력한 20여 호족세력과 외척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들 호족들의 협조를 통해 후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궁예와 견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혼인정책은 호족의 입장 후에는 지방세력의 견제책으로 한낱 볼모의 위치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갔다고 여겨진다.4) 事審官制度(사심관제도): 사심관 역시 호족연합정치의 일환으로써 태조 18년 신라의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事審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심관은 귀부 호족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귀부 호족들에게 실질적으로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한편 사심관에 임명함으로써 중앙과 관계를 갖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의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침투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 도에 거주하는 호족출신의 지배계층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하려 했던 것이라 보고 있다.이밖에 인사를 관장하는 내봉성이 중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왕건은 지방의 여러 호족들과 연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이들 호족들의 상호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정한 인사업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왕권을 견제하는 내의성(정사논의, 간쟁적인 역할)은 호족연합정치의 제도적 뒷받침 해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녹읍, 식읍제를 통하여 호족들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을 공적으로 인정해주고 그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지방을 통치하는 방법을 취하였다.3. 호족연합정권설의 지지의견高麗初期의 정치적 성격을 지금까지는 흔히 '豪族聯合政權'으로 이해하여 왔다. 대부분의 개설서에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통설화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족연합정권'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李基白인데, 그는 太祖 王建이 "자기 스스로를 여러 호족들의 최고 대표자로 한 호족연합정권을 수립하였다"고 하여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태조 왕건 당시의 정치형태를 호족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규정한다면 호족연합정권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왕건의 호족과의 結婚政策, 賜姓定策에 나타난 특징이 그러한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였으며, 왕건이 호족의 협조를 얻어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계속 호족과의 연합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밖에 없었고 중앙집권적인 지방형태는 이루어다.
    인문/어학| 2002.10.28| 10페이지| 1,000원| 조회(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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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한국중세사)] [고려사회의 성격]-귀족제설과 관료제설을 중심으로 평가A좋아요
    [고려사회의 성격]-귀족제설과 관료제설을 중심으로목 차Ⅰ. 머리말Ⅱ. 귀족제 사회설1. 귀족ㆍ귀족제의 개념문제2. 귀족제 사회설의 논거Ⅲ. 관료제 사회설1. 관료제 사회설의 등장 및 그 배경2. 관료제 사회설의 논거Ⅳ. 귀족제설과 관료제설의 논의과정Ⅴ.맺음말Ⅰ.머리말고려사회에 대하 역사연구는 다른 시대의 역사연구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부터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많은 문제점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려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 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신라는 골품제사회 고려는 귀족사회, 조선은 양반사회라고 배워왔고 당연한 통념으로 생각해 왔다.물론 고려시대의 주도적인 정치 담당세력은 일반적으로 귀족의 신분으로 파악하여 오고 있으면 그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많다. 그러나 그 것이 완전한 귀족사회였느냐 하는데 관료제 사회였느냐 하는데는 충분히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1972년 박창희씨가 '관료제설(官僚制設)'을 주장한 것을 필두로 하여 종래 통설로 여겨왔던 '귀족제설(貴族制設)'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1972년 박창희(朴昌熙)교수가 역사학회 주최 월례발표회에서 종래의 귀족제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이 관료제설을 주장하고 나선데서 발단되어, 1973년에 귀족제설을 주장한 김의규(金毅圭)의〈高麗官人사회의 성격에 대한 試考〉와 같은 학보지(歷史學報)에 동시에 실리므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이에 대한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다.본 고에서는 앞서 얘기한 '귀족제설') 본 고에서 이 부분은 유승원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인가〉(《역사비평》36, 1997)를 주로 참고로 하였음.과 '관료제설') 본 고에서 이에 대해 박창희(朴昌熙)의 〈高麗時代 '官僚制' 에 대한 考察〉(《歷史學報》58, 1973)〈高麗時代 「貴族制社會設」에 대한 再檢討〉(《白山學報》23, 1977)를 주로 참고로 하였음 .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대한 학계의 논쟁과정을 간략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정법에 규정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인정될 뿐 아니라, 제정법의 다른 규정에도 배치되지 않는 경우에 국한된다.불문율 내지 관습법의 경우는 성문화되어 있지 않았을 뿐, 이를 어긴 경우에는 공개적이고 정해진 절차에 따른 형벌이나 불이익 처분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성문법과 다를 것이 없다. 공인된 사회적 제재 여부가 단순한 관습·관행과 불문율·관습법을 가리는 지표가 되는 셈이다.법제적 특권의 조건은 첫째, 사회적 서열을 결정하는 데 간접적이고 은폐된 형태로 작용하는 법제가 아니라 사회적 서열을 결정하는 직접적이고 명시된 법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지배층은 여러 가지 사실상의 특권을 누리게 마련이며, 오늘날의 ‘선진사회’라 하여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또 국가의 정책이나 법제가 기득권자에 유리하도록 결정되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은 것이다.둘째, 후천적으로 성취한 지위에 따른 특권은 귀족의 지표가 될 수 없다. 오늘날에도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처럼 얼마든지 법제적 특권이 부여될 수 있지만 이것과 귀족이 향유하는 특권은 그 원리가 다르다. 하나는 성취를 원리로 하여 부여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출생을 원리로 하여 부여되기 때문이다.셋째, 귀족의 두 번째 지표 ‘지위의 세습’에서 세습은 단순히 세습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기회균등이라고 말해지는 오늘날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세대를 거듭하여 사회적 지위가 고정되고 세습되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계급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날의 계급과 전근대사회의 신분을 동일시 할 수는 없는 일이다.결국 귀족이라면 그 지위의 세습이 법제에 의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습이란 ①가문이나 혈통 자체를 기준으로 한 전수(傳授), ②부조(父祖)와 자손 사이의 지위의 일치, ③지위의 계승에 대한 영구적 보장 등 세 가지 사항을 요건으로 한다.유승원. . 36. 역사비평사, 1997. 제 3장 1절 2항 ‘대 보호책으로 5품 이상의 문무양반(文武兩班)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지급하게 되었다. 이 법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의 양반전시(兩班田柴)가 당대한(當代限)인 데 비하여 공음전시는 법 제정의 근본 취지에 합당하게 「전지자손(傳之子孫)」하는 세습적 상속을 인정한 점에 있었다.공음전시는 본래 관도에 오르지 못한 고위관료의 자제들이 그들의 관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경제적 생활토대를 마련해 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아니하였다. 공음전시는 양반전시를 받고 있는 재직중의 관료에게 이중으로 지급하고 이것을 다시 자손에게 상속시키는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귀족사회의 여러 제도가 귀족관료의 이해와 그들의 신분우대원칙에 최대한으로 부합되도록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제도를 마련한 고려왕조는 귀족제 사회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제도적인 측면과 함께 귀족관료들의 실상과 그들이 고려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서도 귀족제설은 입증되고 있다.고려의 대표적 문벌 귀족가문은 경원 이씨(慶源李氏)로 알려졌다. 이 가문에서는 10여대에 걸쳐서 5명의 수상과 20명에 가까운 재상(宰相)을 배출하고 왕실 및 주요 귀족가문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 많은 재상을 배출하고 최고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과 혼인하여 귀족신분의 범위를 지키려고 애썼다. 여기에서 귀족제사회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해주 최씨(海州崔氏)도 경원 이씨에 비견될 만한 고려의 최대 문벌의 하나였다. 이 가문 역시 10여대에 걸쳐 6명의 수상과 10여 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그들이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 역시 명문집안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귀족가문들이 존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들 귀족가문 출신이 거의 모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고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특권 신분층인 소수의 문벌귀족가문이 정부의 요직을 점유하고 국가를 운영해 간 귀족사회라고 이해된다.그러므로 음서제 의미한다. 그것은 국권은 고려의 지배자로서의 자율화를 이루고 그러한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모든 세력을 극복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전민(全民)을 장악하는 그런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왕은 충량하고 유능한 간부를 선발하고 확보하는 것이 선결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들을 수단으로 하여 전제군주국가 건립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국왕에게 직접적으로 종속될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그 어떤 종족(宗族), 친족(親族)적 배경과의 연계에서 국왕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 각자와 국왕과의 직접적인 상하관계에 들어서야 했던 것이다. 또한 국왕은 이러한 유능한 신료(臣僚)들을 되도록 넓은 계층에서 전국적 규모로 획득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과거제를 시행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능한 과거 관료들을 조직적으로 생산 확보하게 되었고, 그들을 기반으로 관료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광종대(光宗代)에 수립된 관료제는 성종대(成宗代)에 이르러 확고히 발전되어갔다. 성종대 에는 고려의 전제군주국가체제가 튼튼한 기반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려사절요를 통하여 성종대에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약한 인사들을 살펴보면 최승로, 이지백, 서 희, 김번언, 등의 17명이다. 이들 17명중에서 과거출신 관료는 11명에 이른다. 요컨대 성종대의 주도세력은 그 압도적 다수가 과거출신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정치 지배자 층은 전국적 범위에 걸쳐있다. 그리고 계통 또한 다양하였다.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종대에는 압도적으로 과거관료 또는 과거관료에 주도되는 관료제가 운영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지배자 층 내에 귀족제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논증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종래의 귀족제설에서는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자 층이 신라의 귀족인 6두품 계통의 유학자로 구성되었다." 또는 "신라의 지배층은 그대로 고려의 지배층을 형성하게 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시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위에서 본바와 같이 그러에서의 집권층과 피치민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무신에 대한 문신 집권층의 차별이 불러온 이 쿠테타는 무신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 무신들이 집권층과 다른 계층이 아니란 것이다, 문반이 귀족이었으면 무반도 역시 귀족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무신들 중에는 천민층(賤民層)이 섞여있다고 하여 그 출신의 문제가 곧 무신층의 신분상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권 무신층에는 천민 계통의 출신은 이의민을 비롯한 몇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은 종국에는 무신들 사이에서조차 제거되고 말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이리하여 정중부의 쿠테타에 의한 귀족제설의 여러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무신들은 집권이후에 종래의 과거제적 가치체계에 많은 타격을 주었고 많은 변화를 일으켰지만 무신층 자체의 새로운 가치체계를 새로이 창출하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쿠테타가 통치구조 또는 정치형체의 변혁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변혁은 그 시기,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 당시 왕권은 상대화되었다. 그것은 과거제가 거의 절대적이던 권위를 잃고 상대화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이러한 변용과정(變容過程)이 최씨 무신 집권시대에는 더욱 심화되어갔다. 당시의 관료제는 최씨정권의 유지,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되었기 때문에 모든 관료는 외형상 고려왕조의 관료이면서 내용상으로는 이중적 성격을 띄어야 했던 것이다.한편, 이 정권 하에서 관료는 일반적으로 의식상의 자주성이 싹틀 수 있었다. 그것은 군신의 가치체계에 균열이 생겨 국왕에의 종속에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면으로는 최씨의 전민(全民)에 대한 지배가 자가(自家)를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종래의 지배방법과는 달리 실제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이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관료가 당시의 복잡한 국내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고려관료것이다.
    인문/어학| 2002.10.28| 10페이지| 1,000원| 조회(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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