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가마쿠라 막부는 정권 창출 과정에서 무공은 세운 무사에게 토지를 부여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충성을 얻는 상호 이혜관계로 성립되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몽고 침입에 대해서, 부하 무사들에게 보답을 하지 못하고,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하에서 정치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막부의 실력자들은 더욱 강한 독재 정치를 펼치고 이러한 행동은 더욱 많은 비난과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고다이고 천황의 기치아래 막부 타도 운동이 시작되고. 결국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게 된다.표 1.원구 이래의 막부의 불만↓가마쿠라 막부의 강력한 독재↓무가 정권의 권위와 중심 실추↓막부의 약화↓고다이고 천황의 도막 운동↓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조정 정권의 부활2. 남북조 시대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후 정권은 쇼군이 아닌 천황이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가장 큰 공은 천황과 그 주위의 공경이 아닌. 사무라이들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공로자인 사무라이들에게는 아무런 공도 돌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공도 세우지 않은 공경들만이 중용되었다. 이에 사무라이들은 천황의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여러 사무라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오랜만에 정권을 잡은 천황과 공경들은 조정의 정치를 잘 수행하지 못하여 당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참고: 니조가와라의 낙서: 1334년 교토의 니조가와라에 등장한 신정부 비판의 문장으로서, 오랜만에 그것도 자신의 힘이 아닌 사무라이들에 의해 정권을 잡은 공경들의 무능력함을 조소하는 글이다. 이 글은 당시 천황과 공경의 무능력은 물론 궁궐을 새롭게 짓는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시키려는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였다.예> 최근 도성에서 유행하는 것들야간 습격자. 강도. 죄수. 졸지에 다이묘가 된 자. 방금 잘린 목....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조정과 무가의 대립이 격렬해 진다. 그리고 지방과 서일본 지역 정도의 지역에만 힘이 미쳤을 때. 당시로서는 변방이었던 관동 지방이나 동북 지방에서 살던 호족과 토착민이 천황의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이에 동북지방을 에조치 즉 오랑캐 땅이라 부르며, 그들을 토벌할 목적으로 천황의 명에 의해서 무장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위가 생겨났고. 이 명칭은 무가 정부인 막부가 출현하자 막부의 실력자 즉 당시의 최고 실력자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그것은 남조와 북조의 대립과 막부 내부의 분열이었다. 즉 외부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남조와 대결하고 있었으며 내부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의 동생인 다다요시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형제간의 정권 쟁탈전이 일어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다다요시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형제의 정권 쟁탈에 이어, 다카우지의 아들과 손자가 정권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결국 무로마치 막부는 제 3대 쇼군 요시미쓰의 시대가 되어 비로서 남북조는 하나의 왕조로 통합되고(1392). 아시카가 집안 싸움도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동한의 와중에서 각지의 슈고는 힘을 비축하여 슈고다이묘로 성장해 간다.북 조 남 조아시카가 다카우지동생 다다요시 ↔ ↔ 고다이고 천황고묘 천황참고:가마쿠라 막부 당시 일본의 황실은 지묘인토( 고묘 천황, 후에 북조)와 다이카쿠지토(고다이고 천황. 후에 남조)라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를 개설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자신이 물리친 고다이고 천황을 대신하여 그와는 다른 계열< 지묘인토> 고묘 천황을 옹립하게 된다.이 후 무로마치의 3대 쇼군 요시미쓰 때인 1392년 드디어 남조는 북조에 통합된다. 즉 당시 막부가 지지하고 있던 북조는 남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 후 황위는 북조와 남조에서 교대로 오르기를 합의한 것이었다. 또한 각국의 국아령은 남조가 장원은 북조가 지배한다는 협의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황위는 계속 북조에서만 나오게 된다.3. 슈고 다이묘들의 성장가마쿠라 막부의 실제적도 자신의 임지는 슈고다이(守護代)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토에 출사하였다.그리고 남북조의 대립이 격화되고 남조에 의하여 교토를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자. 무로마치 막부(북조)는 군사력 강화를 위하여 각 슈고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어 그들 영지의 군대를 조성하게 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지원하게 한다. 즉 막부는 1392년 반제령(半濟令)이라는 것을 실시한다. 이 반제령은 자신의 영지에서 군사력을 키워 막부를 돕는 슈고들의 경제력을 높이기 위하여 실시된 것인데. 이는 일국 내의 장원과 공력의 연공의 반을 슈고가 징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슈고는 무로마치 막부가 내린 명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국내의 장원과 공령을 침략하여 이것을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력한 주종 관계를 맺어 난간다.이러한 반령제의 영향은 쇼군과 슈고간의 충성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은상이라는 관계를 와해시키고, 슈고가 사적인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서, 강한 가신단을 소유한, 즉 막부의 쇼군에게 충성하는 무사단이 아닌 바로 위의 슈고에게 충성하는 무력 세력을 소유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게 했다. 동시에 슈고는 각국 국아의 기능까지도 흡수하여 일국 전체에 미치는 지역적 지배권을 확립하여 나갔다.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정치적 실권 외척(쇼군은 상징) 쇼군(아시카가 가문)정치기구 렌쇼(1224). 싯켄(1203) 관령( 호소카와.시바. 하타케및 관직 야마.= 슈고 다이묘들)조정과의 초기=이원적 정부 조정은 단지 상징적관계 (조정을 공경함) 존재로 전락함후기= 조정 무시지방 통치 슈고와 지토 파견.고케닌 슈고다이묘들과 슈고다이(조정의 고쿠시에 대한 들에 의한 일국 지배막부의 견제 및 세력확대) (반제령으로 인한 권한 강화)재산 상속 분할 상속 단독 상속(각 혈연간의 관계 긴밀) (혈연 중시에서 지역 중시. 상속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폭주)대외 관계 몽고의 내습 명과의 무역.왜구(남북조의 전란중에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에 침입)문 화 사무라이 문화의 주체 조정. 무가. 중국 문화의한 슈고다이묘들의 가독 교체에 개입하여 그들의 권력을 억제하는 한편 인척 관계를 통해 막부 내부에 영향력을 끼쳐 온 귀족에 대해서도 견제를 한다. 그러나 요시노리의 이런 정치적 방법은 많은 적들을 만들게 되고. 이에 6대 쇼군 요시노리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에게 살해당한다.쇼군 요시노리의 죽음은 쇼군의 권위와 세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고, 무로마치 정부의 실권은 이제 아시카가라는 쇼군 가문에서 유력한 슈고 다이묘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이 후 전국 시대의 서막을 장식하는 오닌의 난이 발생하여, 일본은 전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오닌의 난은 가독 상속에서 비롯되었다. 즉 가마쿠라 막부시대에는 분할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나 무로마치 시기에 접어들어 단속 상속으로 되자 당연히 적자의 지위가 서자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해져 서로 상속자가 되어 거대한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거나. 혹은 도태되지 않기 위하여 일족간에 싸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속에는 가문의 가장 어른이며 실제적 소유자인 부친의 의사뿐만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과 그 가독 상속자에 속에 있는 가신단의 지지 유무가 큰 변수로 작용하면서 상속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운 형태를 나타내게 되었다.참고: 무로마치 막부↓●관령( 쇼군 보좌.중앙의 각 기관 통괄 하는 직책) ●사무라이도코로(교토 경비.재판을 하는 직책)↓ ↓호소카와 가문. 시바 가문. 하타게야마 가문 아카마쓰가문. 잇시키가문. 야마나가문.교고쿠가문※ 이들 관령 3가문과 사무라이도코로 4개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를 유지. 지탱해주는 측근 슈고 다 이묘들로써 3관 4직으로 통칭되었다.먼저 막부의 3대 관령가 중 하타게야마. 시바 양가문이 가독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로 세력이 약해지자 상대적으로 내분 싸움이 없었던 호소가와 관령가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4직 중 하나인 야마나 씨의 세력이 강해지자. 자연스럽게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이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그리고 이들 호소가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은 하타 삼자 즉 무로마치막부 혹은 주위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 혹은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가신단들에 지지와 협조에 의해서 많은 부분 상속자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 삼자들의 개입은 이들이 서로 양분되어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위해 서로 대립 심지어는 같은 혈육간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요시마사의 동생 요시미와 쇼군의 처 히노 도미코의 늦동이 아들 요시히사가 충돌한 것이다. 게다가 요시히사 측이 요시마사의 암살을 기도하자 이들을 지지하고 있던 각각의 슈고다이묘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교토로 불러 들여 일촉 즉발의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른다.이에 1467년 드디어 하타케야마 가문의 상속문제에 개입하고 있던 호소가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오닌의 난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이들은 동군(호소가와 가문) 과 서군(야마나 가문)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 각국의 슈고 다이묘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가문에 가담함으로써 전투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된다. 수십만명에 이르는 동.서의 군대들은 교토라는 좁은 지역에서 전투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란은 각 지방에까지 번져 나가 온 나라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약 11년에 걸친 이 오닌의 난은 호소가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죽자 긴 전쟁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자. 전쟁은 곧 끝났다. 원래 이 오닌의 난은 한 가문의 가독 상속을 둘러싼 몇 명의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체면 싸움이었던 것이다. 즉 대의명분 없는 소모전이었던 것이다.오닌의 난은 끝이 났지만 전쟁의 여파는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우선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완전히 땅위에 떨어져 이제 그 영향력은 거의 상실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막부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쇼군의 권위에 의지하던 지방 슈고다이묘들 역시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장원의 산물을 이름뿐인 막부에게 공납할 의무가 없어지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