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다큐멘터리 - 대몽골, 천상의 왕 프레스타 죤을 보고19세기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만들기를 경쟁했을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식민지 국가들은 강제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하루빨리 근대화 되어 그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근대화는 곧 서양화였다. 그래서 인지 아시아 대한 관심과 인식이 많이 높아진 오늘에도 서양에 대한 콤플렉스와 왠지 모를 피해의식을 지우기가 쉽진 않다.그런데 우월하기만 할 것 같던 서양에도 콤플렉스는 있었고 그것은 자생적인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온 침략자?징키스칸?으로 인한 것이었다.유럽의 르네상스를 예고한 이탈리아 화가 지옷토의 프레스코 벽화에 나타난 몽골문자와 폴란드에서 몽골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에 대한 추모미사를 비추면서 다큐는 시작한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바지에 몽골어가 쓰여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나를 놀랍게 했다. 서양의 문화를 상징하는 예수의 그림에 동양의 언어, 그것도 몽골이라는 한 나라의 언어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난생처음 보는, 낯설지만 가까운 역사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동아시아의 역사이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 그것은 서양의 세계사를 통해 역사를 배워오던 우리에게는 새로운 역사였다.이슬람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유럽의 중세시대, 사람들은 동방에서 나타날 한 사람의 영웅, 프레스타죤이 이교도를 타개하고 크리스트교를 구원하러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에 처음 등장해 로마교황청에서 수군거리던 이 소문은 결국 중세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프레스타죤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에 대한 속절없는 공포가 만든 단순한 환상이었을까? 그러나 이슬람과 싸우는 동방의 군대는 실존했다! 1222년 10만의 대군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습격함으로써, 당시 유럽인들은 마음속에서 그리던 프레스타죤의 군대가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의 군대는 러시아를 습격하고, 다시 폴란드의 리그니츠로 진격한다. 로마교황청은 그때까지도 러시아의 그리스정교가 이단이라서 프레스타죤이 침략했다고 치부해버린다. 곧 이어 그들이 믿던 신의 군대는 지옥의 사자로써 나타나고 그제서야 교황은 몽골에 사자를 보내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한다.교황청에서 파견한 사자 카르피니는 우수한 몽골의 문화에 놀란다. 초원에서 말과 함께 생활하며 강한 정신을 기르고 사유재산이 없고 토지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유럽인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어 답신으로 받은 종이는 뛰어난 몽골의 문명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몽골제국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유럽을 깨웠고 이로서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채비를 서두른다.특히 동ㆍ서의 무역과 관련되어 알게 된 쪽빛무늬 도자기의 유통경로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당시의 동ㆍ서방의 무역실태가 어떠했는지를 상징해준다. 푸른빛이 도는 쪽빛무늬 도자기의 원재료는 중동에서 들여온 코발트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유입돼 현재 영어로 ‘차이나’라고 불리는 도자기로 만들어져 다시 유럽으로 퍼지는 경로를 통해 우리는 13,4세기의 찬란했던 실크로드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몽골제국의 신하가 기독교 한 종파의 신자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몽골제국이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편 것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보호하는 했다는 것은 그들의 세계화 인식을 잘 드러내 준다. 그것은 국가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진 지금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15.1“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덩샤오핑의 말은 오늘날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을 단번에 드러내 주는 유명한 문구이다.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개혁개방정책이후 중국은 연간 8~9%의 성장률을 보이며 아시아의 강국을 넘어 세계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다.영국의 대처수상과의 만남에서 덩샤오핑의 과감하고 적극적인 외교는 홍콩반환이라는 성과를 올리고 1997년 2월, 홍콩반환을 목전에 두고 덩샤오핑은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한지 10여년이 흐르고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고 있지만 그의 리더쉽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일치한다. 그 중 내가 주목한 부분은 덩샤오핑의 ‘발상의 전환’ 이었다. 16살 떠났던 프랑스유학으로 덩샤오핑은 서구 문명에 대한 안목이 있었고 확신이 있었다. 가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그의 신념은 실사구시와 실용주의 정책으로 이어진다.특히 흥미로웠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리더쉽을 비교한 부분이다. 카리스마 있는 한 개인이 강하게 이끄는 마오쩌둥의 리더쉽과 제도를 만들고 인재와 후계자를 키우면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덩샤오핑의 러더쉽은 특히 대조되어 보였다. 마오쩌둥의 리더쉽이 과거 왕이나 전제군주의 그것이 라면 덩샤오핑의 리더쉽은 현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나 CEO의 그것이 아닐까.덩샤오핑은 정치 역정에서 세 번이나 실각하고 다시 자리에 오른다. 그의 드라마틱한 정치 역정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마오쩌둥과의 관계다. 당시 중국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세 번이나 버렸지만, 결국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덩샤오핑에 대해 계속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덩샤오핑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실무에는 덩샤오핑 같은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력승계는 생과 사의 투쟁 속에 이루어졌지만, 덩샤오핑은 결국 살아남았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종식시켰다.덩샤오핑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을 때 마오는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거였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이기도 했다. 대약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중국에 대기근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마오쩌둥이라 할지라도, 그는 봉건주의 국가를 신 중국으로 재탄생시킨 건국자였다. 그에 대한 부정이 곧 중국이라는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국가적 영웅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정치 경제적으로 겪은 과오에 대해서는 비판했다.덩샤오핑이 세 번의 실각을 겪고 다시 복권하였을 때, 그의 행보는 그의 진정한 리더쉽이 어디에 있는 가를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되었을 때 부인으로부터 이혼 당하고 아들이 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불구가 되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는 반대세력들을 포용하고 이끈다.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고 실용주의 정책으로 함께 이끄는 덩샤오핑의 리더쉽은 오늘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적과 흑』속의 연애감정에 나타난 ‘Cristallisation(결정작용)'1. 시작하며스탕달은 (1822)에서 “연애를 하는 남자는 공상의 세계에서 상대방 여성을 극도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상대방의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게 된다. 잘츠부르크의 암염 채굴장에서는 나무가지 같은 것을 던져두기만 하여도 그것은 마침내 소금의 결정으로 덮여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답게 빛나게 되는데, 연애심리 또한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는다.”고 하였다. 그는 애정이 일종의 착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하여, 이 착각이 하나하나 쌓여가는 과정을 ‘Cristallisation(결정작용)'이라 표현했는데, 그러한 사랑의 결정작용이 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줄리앙’, ‘레날부인’, ‘마틸드’를 통해 알아보았다. 본문은 신영출판사(1984, 김붕구 옮김)에서 발행한 ‘적과 흑’을 인용하였다.2. 줄리앙과 레날부인① ≪레날부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둘이는 몸을 맞대다시피 하고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앙은 아직까지 이렇게도 훌륭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도 눈부시게 살결이 아름다운 여인이 정답게 말을 걸어 준 일이라곤 한 번도 없었다. 레날 부인은 이 시골 청년이, 처음에는 그처럼 창백하던 얼굴이 지금은 붉게 상기된 두 빰 위에 눈물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고는 앳된 소녀처럼 웃어댔다. 부인은 아침까지의 지나친 근심을 스스로 웃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초라하고 꾀죄죄한 신학생이 아이들을 꾸짖고 때리러 올 줄 알았는데, 이 젊은 양반이 가정교사라니.≫ (제1부 6장 ‘권태’ 중.)- 줄리앙과 레날부인의 첫 대면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줄리앙은 이제껏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귀족부인의 화려한 자태와 아름다운 미모에 반하게 된다. 레날부인 또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정교사로 온 줄리앙의 수줍고도 산뜻한 모습을 보고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 앞으로 벌어질 사랑얘기의 출발인 셈이다.② ≪열 시를 치는 마지막 종소리앙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부인의 손이 잡혔다. 부인은 이내 자기 손을 뺏다. 줄리앙은 얼결에 다시 한 번 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 자신도 극도로 흥분해 있었지만, 자기 손에 잡힌 그 얼음장같이 찬 손의 감촉에 줄리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르르 떨며 부인의 손을 꼭 쥐었다. 부인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손을 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기어이 부인의 손은 줄리앙 손에 잡히고야 말았다. 줄리앙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 찼다. 그것은 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무서운 내면의 고통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데르빌르 부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는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유달리 억세고 우렁찬 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러나 레날부인의 목소리는 벅찬 마음의 동요를 숨길 수 없었다.≫ (제1부 9장 ‘전원에서의 하루 저녁’ 중.)- 소심함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줄리앙은 레날부인에게 첫 번째 접촉을 시도하고 레날부인이 자기 손을 결국 뿌리치지 않자 행복감에 휩싸인다. 부인 또한 그날 저녁 사랑에 대한 행복감에 빠지게 된다. 사실 줄리앙이 레날부인의 손을 잡게 된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감정이라기 보다 소설 뒷부분에서도 나오듯이 그에게 있어 그러한 행위는 ‘비장한 의무’였던 셈이다. 전날 레날부인이 자신의 손을 외면했을 때 받은 자신의 열등감을 메우기 위한 자신만의 거룩한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들은 그들의 사랑에 불을 지피게 된다.③ ≪아직 어떤 남자에게서도 받아 본 일이 없는 열렬한 키스를 줄리앙에게서 받자, 그가 딴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삽시간에 없어지는 것이었다. 당장에 부인의 눈에는 줄리앙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부인은 의심으로부터 오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고 여태껏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행복이 나타나자, 사랑의 황홀경과 걷잡을 수 없는 즐거움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은 벼락부자가 된 사업가들을 내내 잊지 못하고 있던 베리에르 시장을 빼고는 모든 사람에게 유쾌한 밤이었다. 줄리앙은 그 계획도 고스란히 잊고 있었다. 난생 처음 그는 미(美)의 힘에 점점 끌려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몽롱하고 달콤한 몽상에 빠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부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수 잎사귀 소리와 두브 강가의 물방앗간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1부 11장 ‘어느 날 저녁’ 중.)- 어느 덧 그들의 사랑은 더욱더 앞으로 나가게 된다. 레닐부인은 자신의 일과 돈 밖에 모르는 레날시장에 대해 어느 정도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편과는 다른 줄리앙의 모습에 반하게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의 연인을 질투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덧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게 된다. 스탕달은 이 부분에서 멋진 회화적 표현으로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 뛰어난 효과를 통해 우리들은 그들의 심리상태에 충분히 젖어들 수 있었다.④ ≪줄리앙은 다시 한 번 부인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또다시 그 손을 잡고 꼭 쥐었다. 자정이 다 되어 응접실로 돌아가면서 부인은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우리들을 버리고 딴 데로 가시려는 거지요?” 줄리앙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네! 그래야만 하겠어요. 저는 부인을 미칠 듯이 사모하고 있어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도 젊은 신학도로서는 얼마나 큰 과오인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 말을 듣고 부인은 그만 줄리앙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화끈한 그의 볼이 거의 자기 볼에 닿을 만큼 부인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완전히 그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이 두 남녀가 보낸 하룻밤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레날 부인은 가장 고상한 정신적 사랑의 쾌감에 사로잡혀 흥분해 있었다.≫ (제 1부 13장 ‘살이 비치는 양말’ 중.)≫- 연애에 반드시 동반되는 밀고 당기기가 이루어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줄리앙은, 자신이 레날부인을 진정 사랑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의 허영심과 부인에 대한 신분의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녀에게 사랑을 호소한다. 소설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레날부인에게 줄리앙은 시기적절하게 작업을 걸고 있는 셈이다.⑤ ≪점심을 먹고 나서 부인은 브레이군(郡)의 군수 샤르코 드 모지롱씨의 방문을 접대하러 응접실로 돌아왔다. 부인은 키가 높은 자그마한 자수대에 않아 융단을 뜨고 있었다. 데르빌르 부인이 곁에 앉아 있었다. 부인이 대낮에 바로 이렇게 앉아 있었는데도 우리 주인공은 그의 발을 슬며시 내밀어 부인의 고운 발등을 꼭 누르기에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부인이 신고 있는 살결이 비치는 양말과 파리에서 주문해 온 예쁜 구두가 그 멋쟁이 군수님의 시선을 끌고 있었던 참이다. 부인은 질겁을 했다. 그러고는 가위와 털실과 바늘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줄리앙이 한 짓도 부인이 가위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취한 서투른 동작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영국제 강철로 만든 그 작은 가위가 동강이 나고 말았다. 부인은 줄리앙이 좀더 가까이 있어 주지 않은 것을 자꾸 투덜거렸다. “선생은 나보다 먼저 가위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성의껏 하신다는 게 가위는 받지 못하고 제 발만 힘껏 걷어찼군요.”≫ (제1부 14장 ‘영국제 가위’ 중.)- 야심가이고 정열적인 줄리앙은 그가 좋아하는 귀부인에게 이번에는 더욱 대담한 어필을 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레날부인의 기지에 사건은 별탈없이 넘어갔지만 레날부인은 줄리앙의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에 대해 주의를 준다. 둘의 사랑은 불륜이며, 또한 귀족과 하인의 로맨스로서 당시의 신분질서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둘의 사랑은 처음부터 아주 위험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줄리앙은 신분상승에 대한 크나큰 욕심을 품고 있지만 위의 행위에 미루어 볼 때 사랑에 목숨을 걸 정도로 열정적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스탕달의 신분평등에 대한 생각이 줄리앙을 통해 나타나는데 줄리앙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언에 화가 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평등을 떠난 사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3. 줄리앙과 마틸드① ≪입구가 트였다. 줄리앙은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밥통들에게 그처럼 주목을 받으니 어디 나도 한번 보아주지.’ 줄리앙은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그처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지 나도 알 수가 있을테지.’ 마틸드의 시선을 붙들려고 줄리앙이 애쓰고 있을 때, 마틸드도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바로 내 의무를 내 의무를 실행할 때다.’ 줄리앙은 중얼거렸다. 줄리앙의 얼굴에는 이미 불쾌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환히 어깨를 드러낸 마틸드의 옷이 그에게 준 쾌감과 -사실 그의 자존심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호기심에 끌려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이 여자의 아름다움에는 젊음이 넘쳐흐르는 듯 싱싱하구나.’ 줄리앙은 생각했다.≫ (제2부 8장 ‘가치있는 훈장이란?’ 중.)- 라몰후작의 저택으로 들어온 줄리앙은 후작의 딸인 마틸드를 처음엔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거만하고 딱딱한 모습에, 눈까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서 싫어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심한 권태감을 느끼던 이 천방지축 라몰양은 줄리앙의 비범함에 조금씩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줄리앙이 무도회장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다.② ≪한편 마틸드는 자기가 줄리앙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여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마틸드의 웃음은 그러한 거북스러운 감정을 숨기기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숨기기에 성공했다. “당신은 어떤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알타미라 백작이 파리로 망명하게 된 그 음모 사건을 둘러싼 재미있는 일화라도 생각하고 계신 거 아녜요? 얘기 좀 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겠어요 맹세해도 좋아요.” 마틸드는 지금 자기가 입 밖에 낸 말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이람! 아랫사람에게 애원을 하다니! 점점 더 거북스러워지자 마틸드는 그것을 숨기려고 가벼운 말투를 덧 중.)
MBC 명작의 고향 –『적과 흑, 그리고 스탕달』을 보고80년대 풍의 화면에선 구슬픈 음악과 언젠가 많이 들어본 성우들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젤 위의 도화지와 마주한 할아버지, 여럿이서 어깨동무를 한 채 춤추며 노래부르는 젊은이들. 그곳이 항상 그렇게,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지는 아쉽게도 가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흔히 몽마르뜨란 단어를 통해 떠올려지는 영상 그대로 화면은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언덕 위의 파리지앵들을 비추었다. 이공과 학교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파리로 떠났던 16세의 앙리 베일은 이러한 파리적 기운에서 오랫동안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의 불씨를 발견한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시험까지 포기하고 한동안 연극 구경과 극작에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화면은 다시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가까운 그르노블의 산악지대를 비춘다. 1783년 1월 23일, 장자끄 루소가 14번지에서 스탕달(본명 앙리 베일)은 태어난다. 그곳에는 그가 어린시절 뛰어 놀던,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한산해 보이기도 하는 그르네뜨 광장의 모습도 나온다. 또한 어린시절 그가 즐겨보던 도피네 산의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경치에 자연의 경이감이 느껴진다. 바람부는 도피네 산은 도전과 좌절의 상징으로서 작품 속에서도 나타난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스탕달은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돈만 밝히는 속물이라며 혐오하던 변호사 아버지와 혐오하기는 매한가지인 예수회 신부인 가정교사 밑에서 자랐다. 어쩌면 스탕달은 이러한 환경을 통해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에 눈뜨고, 사교계에서 교류한 부르주아지들과 정신적 괴리감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스탕달은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기도한 반항아 쥘리앙 소렐을 통해 브장송 대성당의 웅장하고 은은한 종소리를 표현하면서도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이성의 신을 믿는 사실주의적 작가의 모습을 일생의 행적을 통해 보여주었다.그가 오직 편안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외조부 앙리 가뇽박사였다. 스탕달은 화자의 입을 빌어 외조부 집 테라스를 함께 거닐며 외조부가 해줬던 작은 별, 큰 별 얘기 같은 동화가 자신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심어주었다고 얘기한다. 또한 당시 젊은 연인들의 비밀스런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던 동네의 한 정원을 지켜보며 소년 스탕달은 어렴풋이 그가 훗날 스스로 말하게 되는 ‘연애를 통한 순수한 행복’을 발견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고독하고 불우한 소년 스탕달에게 그러한 발견은 그가 일평생을 로망띠끄(Romantique)로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적과 흑의 틈바구니에서 출세를 원하지만 자신의 여인을 위해 정열을 불태우는 쥘리앙 소렐의 복합적 성격처럼 스탕달 자신 역시 사실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비디오속의 스탕달학회장은 스탕달은 종래의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문학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탕달은 전통적인 룰을 깨고 새로운 양식의 소설, 기행문, 수필 등을 쓰고, 현실에서 얻은 소재를 통해 현실세계를 재창조하는 독특한 문학세계를 표현하였다. 적과 흑 역시 스탕달이 에 기재된 한 사건에서 취재하여 소설화한 작품으로서 연애사건이 기본 뼈대이지만 부제를 ‘1830년대의 연대기’로 붙인 것처럼 7월 혁명전야의 프랑스 사회상을 예리하게 담아내기도 하였다.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에서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고 말했다. ‘젊은 베르테르’와 ‘좁은 문’의 사랑이 그러하듯 쥘리앙의 사랑도 결국 미사를 드리는 레날부인에게 총을 뽑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교회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으로 떠들썩했을 화면 속의 브랑고 마을은 지금은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으로 한산한 촌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은 당시 부르쥬아였던 미슈부인의 저택 창가에 그려진 해시계다. 그 해시계의 그늘 시침은 아직도 자리를 바꿔가며 시간을 가르키고 있다. 베르테 청년이 미슈부인과의 사랑을 끝낸 지, 쥘리앙 소렐과 레날부인의 사랑이 끝난지, 그리고 스탕달이 죽은 지 2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해시계가 어김없이 시간을 가르키듯, 괴로워하고 기뻐하며 사랑에 빠져있다. “살고, 쓰고, 사랑하고, 만 59년 2개월을 살았다.”는 아직도 몽마르뜨 언덕에 잠들어 있는 스탕달의 묘비글을 보며 생각해 본다. 사랑이란 것은 무지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순수한 행복’이란 것은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프롬은 또 말했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방이후, 친일파의 진로와 한반도 속 미국의 의미1. 해방직후의 친일파 처단 공방해방 후 한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일제 통치 하에서 말살된 민족 기능의 회복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자주 정부의 수립이며, 경제적으로는 민족 경제의 안정이며, 이념적으로는 민족정기의 회복이었다. 여기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처단 문제는 해방 후 정부의 수립이나 경제적 당면문제 못지 않은 비중을 가지면서 민족의 숙제로 등장하였다. 그렇지만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우선 그 하나가 이른바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개념 문제다. 일제 하에서 한민족은 거의 전원이 창씨개명을 했고, 신사참배를 했고, 공출, 헌금같은 전쟁 협력 행위를 하였다. 때문에 ‘부일 협력’이라는 말은 가장 넓은 개념 규정을 할 때 일제하의 전체 민중을 옭아 넣는 그물이 될 수도 있다. 이는 해방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반대한 대한일보가 반민법을 ‘망민법’이라 매도한 근거이기도 하지만 그 처단 문제는 이와 같이 개념 규정 자체부터가 간단히 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단의 범위를 일정한 직급 이상이나 악질 행위로 축소한다면 그 표준을 어디에 두며, 판별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월급 봉투를 위해서 직무에 임한 지사. 군수가 있는가 하면 공로와 승진을 위해서 독립운동자를 박해한 말단 순사도 없지 않았다. 거기에 누가 누구를 처단하며, 재판하느냐도 문제였다. 넓은 의미에서는 일제하의 전체 민중이 ‘부일 협력자’였다. 이런 천태만상을 어떻게 단순히 일도양단 할 수 있겠는가.그런데다 당시 미군정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1945년 9월 6일 미 제24군의 진주에 앞서 선견군사로 입한 한 해리스준장은 이튿날인 7일 정무총감 엔도와의 회담에서 “현행 관청에서 집무중인 관리 및 관청의 건물 설비를 계속해서 사용하겠다”고 했다. “조선은 여전히 총독과 정무총감의 총괄 밑에 두고 미군 사령관은 그 행정의 관리. 감독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한민족의 진의의 소재에 대한 이 같은 무지는 미군정에 의한 전직 총독부 관리의 대량 재기용으로 나타났다. ‘행정을 담당할 인재의 부족’을 이유로 그 계층을 극력 두둔함으로써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처단에 결정적인 난관의 하나를 보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처단은 우리 민족이 기필코 달성해야만 했던 역사적인 기본 과제였다. 이 문제를 완수하지 못하는 이상 신생 대한민국은 역사상 당위를 천명할 수 없었고, 민족의 정기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처단은 해방 정국에서 커다란 고민 거리로 등장하였다. 당위와 현실의 괴리, 또 그로 인한 허다한 쟁점을 중심으로 해방정국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2.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부일 협력자의 처단 문제는 해방 후 우리 민족이 당면했던 가장 기본적인 과제였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도 요는 민족정기의 수호 천명으로써 시종을 삼아야 하는 것이니, 기본적인 당위성에서 그것은 해방 후 정부의 수립보다 차라리 우선하는 비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통일 정부의 기본인 자주성 문제, 또 민주주의의 수용?발전도 일제 잔재의 극복청산을 전재로 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조항이었다.이렇게 따지고 보면 해방 후 부일 협력자의 처단이야말로 신생 조국의 출발을 다짐하는 전부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신생 정부의 지도자를 선별하는 전제였고, 그 기본단위인 국민과의 화합을 이루는 근원이었다. 새로 탄생할 정부는 부일 협력자에 대한 응분의 조치를 취함으로써만 민족의 당위를 천명할 수 있었고,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문제를 등한히 한 이승만 정부의 출범은, 따라서 그 출발의 커다란 부분을 그르쳤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해방 후 우리가 통일 정부의 수립에 실패한 것도 요는 민족의 주체적 구심 세력을 형성하면서 하나로 화합 단결하지 못했던 점에 탓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일제가 아닌가. 강화도조약 이래 70년에 걸쳤던 친일화 정책. 또 통치의 기본이었던 밀정정치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 불신을 만연시키면서 민족분열의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독소를 척결하지 못하는 이상 민족화합은 공염불이요, 통일정부의 수립 또한 백일몽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그 기본적인 작업에 실패했다. 결과는 이후 10여 년, 4.19를 있게 하고야 만 민주주의의 오도였다. 반일을 표방한 이승만 정부의 명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좀먹어 들어간 일제 잔재의 은존이었다. 그런데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간과해 버릴 수 없는 문제점 하나가 남겨지고 말았다. 우리는 부일 협력자의 처단에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을 스스로 짓밟아 버리고 만 것이다.3.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친일파이승만 정권 12년의 총리 8명중 2명이 망명객 출신이다. 반면에 친일계와 친일권이 점한 비율은 4명으로 전체의 50%나 되었다. 이러니 친일의 전력자가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맡았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한가. 정기는 애당초부터 오도되었고 그런 오도된 정기 밑에서는 친일자가 독립운동가로 둔갑한다 해도 사실 괴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그렇지만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에 친일계 인사가 끼었다고 해서 흥분하는 것은 역시 금물이다. 근본은 제1공화국의 총리 50%를 친일계로 앉혔다는 자체가 잘못이며, 반민법의 용두사미로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실책인 것이다. 민족사회의 근본이 이 정도로 빗나갔으니 전후좌우 구석구석이 설령 뒤죽박죽이 된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애국자로 둔갑한 친일파, 그것은 그렇게 빗나간 근본에서 창출될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후손에게 민족정기와 애국을 가르칠 수 없는 고약한 조상이 되고 말았다. 일제에게 붙어서 신도실천을 외치고서도 ‘애국’인가. 이런 무리의 단죄를 무산시키고서도 민족정기요, 그런 무리를 총리, 장관에 앉히고서도 사회 정의인가. 선열들을 이 지경으로까지 욕보여 놓고서도 살신성인의 순국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이제야말로 우리는 환골탈태가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단계이다. 살을 찢어 내는 아픔으로 그 모든 비리를 척결해 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유구한 민족사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친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이었고 불가항력이었다. 하지만 그 뒤처리에서 우리는 친일행위 그 자체보다 몇 배나 크고 엄청난 모순을 범해놓고 말았다.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들은 친미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탈을 바꿔써 가며 현재도 이 땅을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4. 해방이후, 한반도 속 미국의 의미미국이라는 외세는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굽이굽이마다 핵심적인 결정권자와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 개입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사람 어느 누구와도 상의 한번 없이 자기들 멋대로 조선을 38도선에서 양쪽으로 두 동강을 내는 지리적 분단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2년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 이 시점까지 줄곧 남의 나라에서 마치 그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해 왔다. 이 땅에 놓여 있는 미국이라는 외세의 발자취를 미국사람의 눈과 미국화 되어버린 친미사대주의라는 남의 눈으로가 아니라 민족 중심적인 눈, 곧 우리 자신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우리 현대사의 첫 출발인 해방공간을 보자.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과제는 첫째,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구축된 식민지 잔재와 친일파의 청산이었다. 둘째는 미국의 주도로 두 동강난 분단을 해소하여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인의 염원과 과제는 미군정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고, 결국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박정희가 대통령까지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6?25라는 민족상잔까지 겪는 참화 속에 빠졌고,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과 적대가 남북 사이에 가로놓이게 되었다.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자, 그 후과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만 보더라도 1980년의 5?18항쟁에서 전두환 정치군부 지원, 1987년 6월 항쟁에서 당시 신민당 당수 이민우 구상에서부터 6?29선언에 이르는 예방(수동)혁명의 추진, 걸프전쟁 이후의 '제2의 한국전쟁' 시나리오, 1994년 6월 전쟁일보 직전까지 치닫게 하였던 북한 영변 핵위기, 1997년의 IMF경제신탁통치, 1998~1999년의 '3~4월 위기설'로 일컬어지는 금창리 핵위기 등에까지 이른다. 그러다 부시라는 전쟁광이 집권하자마자 '악의 축' 전쟁 위협으로 우리 민족 전체를 공멸시킬 전쟁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