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중남미 경제문제의 개괄중남미 각 국은 쿠바 혁명의 여파로 국내 진보세력과 보수세력간의 충돌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나라마다 좌우파 군부세력이 각기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통치를 실시하였으나 1980년대 경제위기 속에서 군부는 정치일선에서 모두 퇴진하게 되었다. 그 후 민선정부들은 경제적 난국의 파고 속에서도 민주주의 공고화에 큰 진전을 이루어왔다.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집권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경제사회 정책상의 지속성이 보장되는 안정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민주정부들이 추진한 개혁정책들이 경제파탄 시기에 진행됨으로써 그 비용이 겉으로 들어 나지 않고, 더군다나 대중사이에서 형성된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의 추가적인 비용을 감수하고 인플레 억제 등 경제안정화 노력을 수용하게끔 만든 것이다. 또한 외국인투자의 증가와 수출시장의 확대와 같은 유리한 국제 경제적 환경요인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비용은 사회부문별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저항세력의 조직력을 약화시켰다. 과거 수입대체산업화(ISI)발전전략하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던 일부 노동자나 기업가는 손해를 볼지라도 개혁과 함께 활성화되는 수출부문 등은 이득을 보기때문에 새로운 노동 및 경영 기회는 개혁의 비용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구조조정과 함께 발생한 고실업(잉여 노동력 발생)사태는 파업과 같은 과격한 노조활동의 여지를 제한하고 있다.경제사회정책에서 실패한 민선정부가 군사정부에 의해 와해되는 사례를 1980년대 민주화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은 중남미 정치문화의 중대한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중남미의 경제구조는 1980년대 외채위기를 기점으로 변질되기 시작해 외채위기가 1988년 Brady Plan의 본격화에 힘입어 극복되기 시작하면서 국내경제의 재조정기를 맞게 되었다. 국내경제 재조정은 1990년대 중남미의 모습을 1980년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첫째 정부재정의 건전화와 인플레의 하락, 둘째 공기업의 민영화,985년 Baker Plan이었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은행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Brady Plan으로 대체되었다. Brady Plan은 사상 처음으로 은행에 대한 국가부채의 축소를 실현시켰는 데, 그 효시는 1988년 시티뱅크가 독자적으로 여러 국가에 대한 대부잔액을 축소시킨 것이었다. 멕시코 채무는 1989년 1달러당 약 65센트의 가격으로 결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도 곧 이와 비슷한 인하율을 적용받게 되었는 데, 특히 볼리비아와 코스타리카 같은 소국가들에게는 더 큰 인하율이 적용되었다. 브라질의 경우는 1992년 협정이 타결되었다.그러나 외채위기는 종전의 내부지향적이며 국가개입적인 수입대체산업화(ISI) 발전전략이 종언을 고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정부의 국내산업 보호에 기초한 ISI 발전전략은 산업체질을 총체적으로 보호의존적인 구조로 전락시켜 국제경쟁력의 저하는 물론, 특히 공공부문에서 방만한 경영과 대규모 부채 누적사태를 야기시키고 말았다. 수출지향적 모델을 택하였던 아시아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외채위기 이후 중남미 국가들이 택한 경제개혁의 길은 그 절차상 비록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대안없는 대안'으로서 채택되지 않을 수 없었다.(2) 수출지향적 발전전략외채위기가 불러온 수입대체 발전전략에 대한 회의와 반성은 곧 외부지향적인 수출중심의 발전모델의 채택으로 이어졌다.수출지향적 발전모델과 함께 중남미 경제정책 입안자들 사이에 가장 핵심적인 이슈로 등장한 것은 바로 국제화였다. 중남미에서 말하는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 international insertion)는 새로운 발전전략의 수단으로서 세계경제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GATT가입 등 국제경제체제로의 통합 방식에 대한 다각적인 모색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발전전략의 성공여부는 수출시장의 확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지역통합 노력과 역외사한 역내 국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도미노 현상처럼 쉽게 확산되곤 하였다.외채위기 이후 중남미의 경제개혁은 시장지향적 경제개혁을 의미한다. 중남미의 자본주의 역사는 길지만 그 운영체계는 1930년대 이래 대체로 50여년간 시장주도(민간주도)보다는 국가주도형으로 이어져 왔다. 시장지향적 경제로의 재전환 작업은 1970년대 칠레에서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라 일컫어지는 경제관료 집단이 급진적인 경제자유화를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1982년 외채위기를 계기로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맞아 종전의 국가주도형 경제구조를 민간주도의 구조로 바꾸면서 확산되고 이를 주도한 개혁파들은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ta)라고 불리우게 되었다.중남미의 오늘날 시장지향적 경제개혁의 구성요소는, 첫째 국가부문(parastatal sector)의 축소와 민간부문의 창의성 및 확대를 지향하는 민영화(privatization), 각종 제도의 간소화와 정부의 경제활동 관여 축소를 통해 시장의 경쟁성을 장려함으로써 산업경쟁력 재고를 지향하는 무역자유화(trade liberalization) 또는 무역제도개혁(trade reform) 등을 핵심요소로 볼 수 있다.외채위기의 원인이 방만한 재정운영에 있다는 반성에 따라 중남미의 개혁정부들은 재정수지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국제금리의 하락과 부채탕감 조치등에 힘입어 극적인 재정건전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안정화계획을 시행한 중남미 국가들의 재정수지는 1987-1989년간 GDP -7.8%의 적자수준에서 1992년에는 0.7%의 흑자기조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물가 안정기조가 뚜렷이 나타났다.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국가들의 평균 인플레이션은 1992년에 22%로 감소, 전년도의 절반 수준이었고, 1990년의 900%보다 크게 낮은 수치였다.이같은 재정건실화에는 공공부문의 수입증가가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UN산하 중남미경제위원회(ECLAC)가 1992년에 평가한 바와 같이 중남미 재정분야에90년 사이 년 1.2%를 넘어서지 못했으나, 1991년에는 3%선을 넘었고, 1994년에는 평균 4%, 1995년에는 이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플레 역시 1995년에는 평가절하 이후 위기를 겪고 있는 멕시코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20%미만의 수준으로 억제될 전망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재정수지도 개선되었고, 멕시코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율과 국제수지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특히 환율정책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경우처럼 태환정책(Convertability)이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대부분의 나머지 국가에서는 crawling peg을 통해 점진적인 평가절하 방식이 채택되고 있다.공기업의 민영화작업은 긴축정책의 성공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재정개혁과정의 일부분일 뿐 만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포괄적으로 수정한 조치였다. 민영화는 민간부문에 더 많은 경제운영의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었으며, 정부는 지분매각을 통해 정부 총수입 중 1-4%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대외채무가 국가의 주 재원조달 방식이었던, 1970년대와 대조적이다. 중남미 각국의 항공, 전화 및 전신, 철강산업 등 주요 기업들이 민영화되었다.그러나 민영화가 단지 단발적인 자금확보 조치에 지나지 않고, 진정 중남미 경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민간부문의 책임의식과 투자의 지속성, 경영의 합리화, 꾸준한 자본형성이 수반되어야 한다.나. 중남미 경제의 향후 전망1. 미주경제통합의 전망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NAFTA 확대방침에 대해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다. 멕시코의 경우에는 본래 미국과의 교역비중이 높았고, 독특한 권위주의 정치제도가 작용하여 NAFTA 협상기간동안 대통령이 의회, 노조, 기업인, 농민, 언론, 야당으로부터 자율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여타 중남미 국가의 경우에는 미국의 'NAFTA 수준의 개방'요구가 개혁정부에 정치경제적으로 주는 부담이 크다. 즉 이들 국가의 경우, 자유무역이 가져오는 이점은 도 작용했지만, 수입급증으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1994년 총 115억 달러, 대미 100억 달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만큼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의 수출경쟁력 수준을 우려하고 있다. 중남미 국가들이 인식하는 멕시코의 교훈은 미국과의 자유무역이 단기적으로 미국상품 수입의 급증을 의미하며, 개방된 무역체제가 무역수지로 인한 위기에서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된다는 점이다.더욱이 대 중남미 자본유입의 약 40%가량이 단기자본 즉, 핫머니이기 때문에 미국 등 다른 시장의 금리인상과 같은 외부적 상황변화에 따라 자금의 유출러시 가능성은 상존해 있다. 따라서 미국이 총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남미 국가들과 자유무역을 시도한다면, 멕시코의 경험은 중남미 국가들에게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꺼리는 경제 요인이 될 것이다.MERCOSUR의 대 NAFTA입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는 SAFTA(남미 자유무역지대)의 실현 가능성, EU와의 FTAA(미주 자유무역지대)협상, 미국과 브라질과의 관계, MERCOSUR 회원국들의 거시경제적 상황, 아르헨티나의 NAFTA 카드 사용여부, 미국내 정치적 상황에 따른 FTAA 주도능력 여부 등이 남아있다. 이 중 SAFTA의 등장은 대미 FATT 협상에서 중남미 국가들의 입지를 제고시키게 될 것이며, 미국은 SAFTA의 형성을 견제하기 위해 안데스그룹 국가들에 대해 무역특혜를 부여하거나, 한때 NAFTA 가입을 희망했던 아르헨티나를 NAFTA에 가입시키는 방안을 검토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에도 협상조건상의 장애는 여전한데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MERCOSUR의 대외공동관세 체계를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를 MERCOSUR에서 이탈시키게 될 것이므로 정치적 부담이 커 실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따라서 MERCOSUR의 협상입지가 높아지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NAFTA측과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 MERCOSUR측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FATT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그러나 다른 한편, S.
라틴 아메리카에서 종속이론이 생성된 ECLA(라틴 아메리카 경제 위원회;UN Economic Commission for Latin America)의 권고와 주장에 의한 수입 대체적 공업화 정책의 추진 및 그것의 실패에 따른 반성과 쿠바혁명의 성공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먼저, ECLA의 수입 대체적 공업화 정책이란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부(富)가 1차 대전과 대공항으로 인해 급격히 감소된 결과로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저발전국이 취할 수 있는 대책이란 공업화와 내부 지향적 발전을 이루하는 것 밖엔 없었다. 비교 우위에 입각한 국제 분업이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무역확대를 유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발전국과 저발전국에서의 각각의 수입품에 대한 소득 탄력성의 불균형은(공산품의 소득 탄력성 , 1차 산품의 소득 탄력성 ) 무역 조건에 있어 오랜동안 저발전국이 발전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수입 대체적 공업화 정책의 실패이다. 수입 대체화에 의해 도입된 기술은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며, 노동절약적이어서 실업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입 대체적 공업화는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지나친 외국무역에의 의존, 공업화 과정의 외국 자본에 의한 지배, 문화적 제국주의의 가속적 침투, 국민 대중의 궁핍화를 심화시키면서 내무 지향적 발전 노선의 한계가 드러났다. 종속이론이 하나의 학설로서 자리를 굳히기까지의 과정 또는 배경에 대하여 위의 두 가지 요인 외에 1960년을 전후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던 맑스주의적 민족해방 운동의 번성, 그 중에서도 쿠바 혁명의 성공이라는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이와 같은 시각에 근거하여 종속이론은 어떤 학문적 사조에 의해 출현하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쿠바 혁명의 예와 같은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 민중들의 진정한 인간적 삶의 구현을 위한 투쟁과정의 소산이자, 나아가 이러한 투쟁의 진로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종속의 개념'종속'이란 뜻은 저발 이 무렵 영국은 산업화로 대량 생산되는 상품의 판로를 찾기 위해 해외시장의 개척에 부심 했고,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열강들을 몰아내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먼로주의를 제창하고(1823), 범아메리카주의(Pan-Americanism)란 미명 아래 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정치, 경제, 사회등 제문제에 직접 관여한다. 결국, 1899년 스페인 함대를 침몰시켜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식민지인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든다. 이때부터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로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이 시기의 라틴 아메리카 내부 사정은 전 분야의 혼돈 상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핵심을 이루던 스페인 세력이 물러간 뒤에 확고한 대체 세력이 출현하지 못하고, 한편 독립 전쟁에 참여했던 세력은 독립이 성취되자 권력과 부의 배분 문제로 내분에 휩싸인다. 허약한 정부는 정권 유지에 항상 불안했고,그들의 힘을 지방 호족들의 반대로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민중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자신들의 비호 세력을 찾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와의 결탁이다. 제국주의 세력(미국)의 비호 아래 안주하게 된 정부는 사병화된 군대와 공권력의 강화로써 민중과 유리된 독재 집단으로 되어 간다. 이들은 정권의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폭군으로 부상한다. 이와 같이해서 민중 착취가 제도화되기 시작하고,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미국의 국내 경제의 한 부분으로 귀속된 셈이 된다. 라틴 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개발, 착취하기 위해 미국은 농업 분야를 시작으로 광산, 석유, 금융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관련 기업을 진출시키는데, 초기의 대표적인 회사가 the United Fruit Co.와 the Tropical oil Co. 등이다. 착취 대상이 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산재하는 대단위 농장에서는 특히 사탕수수, 바나나, 커피까. 사실 우리는 유럽 중심으로 표준화한 사상사와 교과서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유럽사와 사상이 중심축으로 우뚝 솟은 가운데 그밖의 것은 곁가지처럼 인식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이성형씨가 엮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까치)은 이런 편향성을 교정하고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역사사상서다. 여기에 묶인 글들은 지난 6월 대구 효성가톨릭대에서 개최된 여름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됐던 것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변화상을 선진국 흐름에 맞춰 읽어내는 데 익숙한 시각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준다.저자는 아스테카와 마야 등 콜럼버스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문명사를 개괄한 뒤 이후 500년을 △정복과 식민시대 △독립과 국가건설 △공화국시대 △쿠바혁명과 세기말까지로 나눠 집중적으로 살폈다.책의 곳곳에서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많은 중남미 사상가들의 지적 고뇌가 느껴진다. 쿠바 독립과 새 사회공동체를 구상한 호세 마르티와 브라질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사회학자 질베르투 프레이리, 일생을 쿠바와 라틴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싸운 체 게바라가 그들이다.또 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종속이론에 대해서도 등장배경과 비판양상 등을 상세히 분석했다. 이와 함께 70년대를 전후해 나타난 해방신학을 21세기의 길목에서 재조명했으며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호세 미게스 보니노, 엔리케 두셀, 레오나르두 보프 등도 소개했다.(서울/연합뉴스)[개요] [역사 배경과 통합과정] [통합의 목표] [조직과 제도][정책과 규정] [회담일정과 현안] [교역 현황] [Mercosur와 대외 관계][통합의 목표]아순시온 협약은 회원국 상호주의와 이행 의무 준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통합의 단계로는 초기 에는 자유무역지대에서, 관세동맹으로, 궁극적으로는 회원국들 간의 자본과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 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공동시장 형성을 목표로 한다.아순시온 협약에서부터 Mercosur가 결성되기 전인 1994년 말까지의 과도기는 자유무역지대의 형 성 단계였다. 현재 Mercos항상 변덕스러운 운수에 달려 있지만 에르난 코르테스처럼 극적인 행운을 붙잡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가 1519년 스페인 탐험대를 이끌고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 원주민 사자(使者)는 흰 얼굴에 번쩍이는 투구를 쓴 이 침략자를 케찰코아틀神이 재림한 것으로 믿었다.그 신이 아니고서는 떠다니는 요새(要塞)를 타고 바다를 달리는 일하며, 치명적인 불을 내뿜는 지팡이를 지닌 채 철갑을 두른 말에 올라타고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육지를 넘나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코르테스 일행이 성도(聖都) 테노츠티틀란에 도달하자 아즈텍王 목테수마는 그 이방인들을 성안으로 맞아들여 신처럼 대접했다.코르테스는 자신의 원주민 애인이자 조언자인 말린체의 도움으로 아즈텍 제국을 무자비하게 정복했다. ‘라 콘키스타’(정복) 과정에서 수천만 명의 원주민이 살해되고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끌려오면서 세계 경제는 혁명에 휩싸였다.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마드레 파트리아’(조국)인 스페인으로 쏟아져 들어간 귀금속과 원자재는 스페인 제국의 원동력이 됐다.세계와 신세계의 결합은 문화와 상업, 그리고 공통된 언어로 밀접하게 묶인 채 근 4세기 동안 지속됐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 사람과 인디언들의 피도 불가피하게 섞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내부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잉태하게 됐고 결국 파국을 낳았다. 지금부터 꼭 1백 년 전인 1898년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가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독립했다. 스페인의 운이 다 하면서 미국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지 근 5백 년이 지난 오늘날 스페인 정복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라틴 아메리카를 휩쓸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와 칼 대신 휴대폰과 랩톱 컴퓨터로 무장하고 있다. 영토가 아닌 시장이 그들이 노리는 목표다. 지난 90년 이후 스페인 기업들은 2백30억 달러 이상을 라틴 아메리카에 쏟아부었다. 올해에만 스페인의 투자액은 약 7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돼 미국 다음의 최대 투자 스페인은 10년 간의 부채와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에 눈을 돌렸다.그곳은 엘도라도 같은 노다지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성숙돼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새로운 투자처와 자유시장을 찾기 시작하고 있었고 스페인 기업들은 그 지역의 민영화 기업들을 앞다투어 사들이기 시작했다. 텔레포니카社는 페루와 아르헨티나에 투자했고, 스페인을 대표하는 항공사인 이베리아 항공은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항공사들의 지배권을 사들였으며, 전기 사업체인 엔데사社는 아르헨티나·페루·베네수엘라 등에서 여러 이권을 확보했다.처음부터 이같은 ‘재정복’은 당초의 ‘정복’보다는 공생적(共生的)인 성격을 더 많이 띠고 있었다. 스페인의 對 라틴 아메리카 투자 규모는 90년 스페인의 총 해외투자의 14%였던 것이 97년에는 43%로 껑충 뛰었다. 스페인은 페루 내 최대 외국 투자국이며 그들의 투자 규모는 총 외국인 투자의 3분의 1에 육박하고 있다. 또 아르헨티나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2위다. 그러나 스페인의 입장에서 라틴 아메리카는 단순한 종착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그것은 동시에 유럽 무대 진출을 위한 교두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 중에서도 특히 남쪽의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 등에 스페인 투자자들은 단순히 언어와 관습을 공유하는 파트너에 그치지 않고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 구실을 한다. “스페인 기업들은 라틴 아메리카 경제의 등뼈다. 스페인은 또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스페인의 경제 담당 국무장관인 크리스토발 몬토로는 말했다.구세계와 신세계의 결합은 문화와 상업, 그리고 공통된 언어로 밀접하게 묶인 채 근 4세기 동안 지속됐고 그 과정에서 스페인 사람과 인디언들의 피도 불가피하게 섞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내부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잉태하게 됐고 결국 파국을 낳았다. 지금부터 꼭 1백 년 전인 1898년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가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독립했다. 스페인의 운이 다 하면서 미국의 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환경변화연구개발과 개발과 생산비용의 증가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자동차산업의 발전속도는 비교적 느린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증가와 더불어 환경보호문제, 안전성 향상, 에너지 절약 등 사회적 요구가 다양해지고 수요에 비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자동차산업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화해가는 소비자의 수요도 새로운 수요창출에 한 몫을 해가며 자동차산업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동차산업에 전자 또는 신소재기술이 적극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자동차의 제품수명도 이와 더불어 짧아져 갔다. 다양해져가는 소비자의 수요에 대해 자동차메이커들은 다품종으로 그것도 고품질, 저가격으로 시의적절하게 시장에 공급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자동차산업은 대규모의 설비투자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제품을 개발하는데도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산업이 되어버렸다.연간 약 300백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 6위의 일본 닛산자동차만 하더라도 연간 2~3개의 모델을 시장에 출시하고 있으나, 하나의 신 모델개발을 위해서는 평균 3년 반 가량의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기초연구와 설계 등 기술개발부문에 9,000명 이상의 대규모 고급기술인력의 투입이 필요하고, 매년 매출액의 5.5% 안팎인 2조원정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에 개발된 포드의 신형 에스코트 모델에는 20억 달러, 포드의 몬데오모델에는 60억 달러, GM의 새턴에는 50억 달러, 크라이슬러의 네온에는 13억 달러 등의 개발비가 들었다. 설비투자 부분을 포함한 신 모델 개발에 미국업체들은 평균 40억 달러를, 일본 기업들은 평균 20억 달러를 각각 투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예시 11, 12 참조)이와 같은 연구개발비와 생산비의 상승은 자동차생산의 규모의 경제를 높여서, 현재 자동차업계에서는 한 모델이 사용하는 내부엔진과 트랜스머션과 차축 등이 백만대 이상의 규모가 되지 않으면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차개발을 서두르는 등 활발히 기업인수합병과 전략적 제휴를 증대하려는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BMW나 벤츠 같은 고급차종업체들 역시 종합자동차메이커들이 전문차종업체들의 제품까지 개발하여 저가격으로 내놓음에 따라 경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수 합병 제휴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현재 세계자동차산업은 초대형업체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이다. 국경이 없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제각기 경쟁력강화에 나서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도 이같은 세계적인 변화에 대하여 생산능력의 확대와 신시장개척 등 생존을 위한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본격화된 자동차산업의 구조개편은 갈수록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예시 13 참조)선진국시장의 포화1995년 전세계적으로 생산된 자동차는 모두 5천 51만대로 이 중 4천 8백 67만대가 판매되었다. 미국, 서유럽, 일본 등 전통적인 주요 선진국시장이 전세계수요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한국, 브라질, 중국, 호주, 아르헨티나, 인도 등의 신흥시장은 30%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인 시장들은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신흥시장의 부상 등으로 그 비중이 계속 낮아지는 추세이다. 1990년대 들어 북미, 일본, 서유럽 등 주요 시장은 최대 3천 6백만대 선에서 수요가 멈춘 상태이다. 1995년 북미, 유럽, 일본시장은 이 지역의 전체생산능력의 약 12%에 해당하는 400만대의 공급과잉이 발생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일본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이 높았던 북미시장의 공급과잉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미 일본시장도 기업들의 생산확대와 시장개방압력이 맞물리며, 수출은 빠른 속도로 줄고 있으며 수입은 점차 늘어 포화상태를 보이고 있고 과잉생산시설이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선진국시장의 변화 못지 않게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한국, 브라질,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함으로써 세계자동차시장의 3극 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한 신흥시장은 1994년에 11.8%이 포드미국은 대형차 개발에 전문화한다는 지역별 사업부제를 채택하였다.그러나 포드는 1993년 11월, 트로트만 회장의 취임이후 2000년대 세계제일의 자동차메이커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포드2000 이라는 기치아래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즉, 오랜 세월동안 포드의 국제화전략이었던 지역별 사업부를 폐지하고 통합된 제품라인별 단일사업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에 의해 포드는 1995년 북미와 유럽자동차사업을 통합하여 자동차모델별로 전문화된 5개의 부서를 두고 책임운영을 하게 되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예시 15참조) 이 조직개편의 핵심적 목표는 공정과 생산개발, 생산, 공급, 판매 등을 표준화하고 경영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연간 20 ~ 30억 달러의 경비를 줄이는데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먼저 미국포드와 유럽포드는 완전히 통합되어, 1995년 1월 1일부터 FAO(Ford Automotive Operations)내에 5개의 자동차사업부로 흡수되었으며 또한 각 사업부는 이전에는 각기 지역별로 분리되었던 제품개발, 생산, 구매, 그리고 마케팅을 한 사업부 내에 통합하여 책임지고 운영하게 되어 각 분야에서 전세계의 운영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포드사가 수립한 장기경영계획인 포드2000은 우선 북미와 유럽에서는 구체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는 성공적인 일종의 세계화전략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아시아지역은 공백으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세계시장에서 14%의 시장점유율을 가진 포드는 아시아 시장에서는 1.5%의 낮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포드에 비해 아시아시장에서는 일본업체와 더불어 1980년대부터 아시아를 공략해 온 GM이 상대적으로 선두주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GM의 경우 1980년 최초로 적자를 기록하면서 로저 스미스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기업변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세계화전략을 추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시아전략을 본격격으로 추진하였다. GM은 현재 일본, 중국, 태국 등에 아시아 자동차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가장 많은 조립공장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영위기를 맞이하여 자산매각, 잉여인원의 판매점진출, 융자 등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버블경제의 전성기에 마즈다는 야마모토, 후루다, 와다 등 3명의 최고경영자가 중심이 되어, 독일 BMW같은 고급차 메이커로의 전환을 시도하여 잇달아 고급차를 개발하였고, 판매망도 도요타와 닛산에 필적하는 규모로 확대하였다. 이와 함께 야마구치현에 대규모 공장도 신설하였다. 마즈다는 1991년 생산 1백38만대, 매출액 2조3천41억엔을 기록해 회사역사상 절정에 달하였고, 경상이익 규모도 7백억엔대를 유지하였다.그러나 마즈다는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버블경제의 붕괴와 엔고의 여파에 따라, 사세가 급작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는 4백41억엔, 1994년에는 3백54억엔, 1995년에는 1백26억엔의 경상수지적자를 기록하였다. 부채잔고가 4천8백67억엔, 1998년까지 상환할 전환사채잔고 1천6백억엔 규모로 경영상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수출규모 역시 1990년 86만대에서 1995년 44만대로 격감하였고, 내수규모도 같은 기간 중 59만대에서 36만대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1990년에는 도요타, 닛산에 이은 3위 업체의 자리에서, 미쓰비시와 혼다에게 추격을 당해 업계 5위로 밀려났다. 그 결과 대규모 고용감축과 판매망축소가 불가피했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장기적으로 전체 모델을 감축한다는 계획하에 1995년에는 크로노스모델의 국내판매를 중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품공용화와 해외구매로 부품비용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었다.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즈다의 대규모 적자가 개선되지 않아, 마즈다의 주거래은행인 스미토모은행은 포드에게 사실상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즈다는 계속되는 경기침체에 따른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1992년 대주주인 포드에게 부회장을 포함한 4 ~ 7명의 경영인의 지명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등, 포드사의 경영권을 대폭 강화하기로 결정한 바가 있다. 또한 1993년 11월 취임한 현재의 트즈다의 패밀리아와 에스코트는 장차 underbody를 공유하여, 같ㅇ느 차가 양사의 브랜드로 판매될 전망이다. 또한 마즈다는 엔고가 진행되면서 유럽에 자체브랜드로 수출해온 레뷰(아벨라)를 포드로부터 OEM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포드의 한국진출포드는 1986년 기아자동차와 자본제휴관계를 맺고, 소형승용차를 공동으로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포드의 Sable 을 1989년부터 기아가 대리판매를 하기로 하는 등 긴밀한 제휴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는 1995년 2월 기아자동차서비스와 공동출자하여 포드코리아 를 설립하여 직판체제로 나섰다. 포드코리아는 이미 선인자동차, 우성산업, 천일고속 등 3개 업체와 딜러계약을 맺었으며 3개 회사가 전국을 3개 권역으로 분할하여 판매와 A/S 및 부품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직판체제를 구축하였다. 1986년 현재, 포드코리아를 통해 포드의 9개차종이 판매되고 있다. 포드는 국내시장에 진출하기에 앞서 1년간 국내시장조사회사와 공동으로 자동차시장을 조사하였으며 현재 토러스와 몬데오 등을 위주로 가격파괴를 통해 시장을 점차 넓혀 가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포드코리아가 영업을 시작함에 따라 기아자동차는 1989년부터 자체판매망으로 수입 판매하던 포드의 Sable의 판매를 중단하였다.기아자동차의 선택최근의 경영상황과거 마즈다의 기술공여로 자동차를 생산하여 판매하던 기아는 이제 세피아와 스포티지를 독자개발하는 등 자립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김선홍회장 등 기아의 최고경영자들이 대부분 기술자출신으로 기술에 대해 아낌없이 투자해온 탓이었다. 이러한 기아의 기술력은 제휴관계회사인 마즈다와 포드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고, 국내 및 해외에서도 기아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우수한 메이커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그러나, 최근 기아를 둘러싸고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문제는 M&A가능성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까지 기아의 M&A를 다뤘을 만큼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1993년 말경 삼성그룹의 기아주식의 대량매입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