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 萬海와 白石의 時世界{일단, 이 시집(님의 침묵)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 시집에 수록되어진 시들의 주제와 소재들, 그리고 그 내용이 품고있는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시들의 중심소재인 '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미스터리(Mystery)와 그 특유의 문학성으로 인하여, 만약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 할 경우, '장님 코끼리 만지는 듯한 결과'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을 분석하기 위해서 취해져야 할 방법은 "전체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실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하지만,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연구를 실시할 경우, 그 결과가 '거대한 밀전병'과 마찬가지로 아주 얇아질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분석은 얼마 아니 되는 시간만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한 사람의 힘과 능력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과 능력과 더 나아가서는 '여러 견해들로부터 나온 소견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여러 연구서(硏究書)들과 논문들을 두루 살피면서 장기간에 걸쳐 연구되어져야 한다. 더욱이, 만해 스스로도 살아생전에 당신이 왜 이 글을 작성하였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시들 속에 등장하는 '님'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뚜렷한 답변'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연구가 더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작가는 작품으로서만 말한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만약 그 격언이 옳다면, 아직까지도 그 누구도 만해의 발언을 명확하게 알아들은 이가 없다는 뜻도 되리라.)먼저, '님의 침묵'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불승(佛僧)이었던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에 의하여 작성되어진 장장 90편의 시들이 수록되어져 있는 시집이다.만해(卍海)는 20세기 초엽에서 중엽까지 일제 식민치하의 비호 하에 들어오고 있던 일본 불교계의 영향에 의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던 '조선 불교 교단'을 이끌었던 얼마 아니 되던 큰 승려들 중 하나임과 동시에, '대한해방운동가'였던 인물로서, 그는 이 시집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대표적인 은유적 상징이며, 또한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등장하고 있다. 물론, 불교에서라고 해서 '어린羊'을 은유적 상징으로서 사용하지 못할 법은 없지만, 그래도, 만해가 사용한 '어린羊'의 개념이 과연 불승(佛僧)으로서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나왔는가 에는 의문이 있기에, 여기에 몇 가지 근거를 드는 바이다.첫째로, 만해는 '불승(佛僧)이라는 신분'과 '대한해방운동가라는 상황'을 너머, '한 사람의 지식인'이었다. 즉, 그는 그 어떤 특정 종교나 사상에 얽매여서 사고(思考)할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예로서, 그는 머리를 깎기 전에 이미 유학(儒學)을 공부하였으며 그렇기에 고향에서 '서당의 훈장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시대가 '조선말엽의 개화기 시대'였음을 고려한다면,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개화사상'과 함께 들어왔었을 '기독교적 사상'을 그가 접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는 서양 여러 나라들로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포교를 위하여 들어오던 시대였던 데다가, 조선 후기까지 숨도 크게 못 쉬던 천주교 신자들도 '제 세상을 만난 듯이 활동을 하던 덕에 급기야 '제주민란'(1901)까지 일어났던 상황이었다!) 더 나아가서 '3.1 독립선언서'(1919)를 발표할 적에, 그와 함께 그것을 작성하고 발표하였던 다른 32명의 인사들 중에는 '기독교계의 대표 이승훈과 기타 15명의 인사들'(기독교측 16명, 천도교측 15명, 불교측 2명)이 참가하였던 사실을 유념할 적에, 그가 기독교측 인사들과 접하면서, 아니면 그 이전부터 여러 종류의 채널들을 통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에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한반도에서 양(羊)이 길러진 시대는 고려시대로서 금(金)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잠시 길러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길러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에 일본정부가 '양모(羊毛)를 자급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한 뒤, 자국의 홋카이도(北海島)와 한반도 북부의 '회령'일대에서 방목하기 생각하는 바이며, 그러한 연구 뒤에 깊게 연구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만해 한용운의 시의 세계-사상한용운은 시인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였으며 불교의 석학이었고, 우리 근대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사상은 한가지 면으로써가 아닌 시인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사상, 독립 운동가로서의 독립 사상, 승려로서의 불교 사상 및 기타 사상으로 세분화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문학에 대한 사상한용운은 문학은 문예를 포함하여 문자로 기록된 '모든것'이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예술이 오늘날 일부 문학자들이 말 하는 바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를 꽃에 비해서 누구나 감상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성 그것은 어느 한 사회나 계급은 물론이요, 어느 한 시대나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있다.문학이 계급주의나 예술지상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 중용적 예술관이며, 문학이 인간적 존엄성을 고양시켜 주기 때문에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며 감동과 쾌락을 인간에 공여하고 감성과 이성을 조화 시켜 예술성을 얻게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작품세계작품 세계 그의 생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우리 문단사에 흔히 보이는 단순한 서정 시인이 아니요, 일생을 종교적 구도 정신과 조국 광복에의 염원을 안고 살다 간 시인이다. 따라서 그의 시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만해는 '님의 침묵'(1926)에서 님이 침묵한 시대(일제 식민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교적 자세로 노래하여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개척하였습니다. 만해의 시는 퇴폐와 감상이 주조를 이루던 1920년대의 시단에 매우 귀중한 업적으로 평가된다.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 이 땅을 휩쓸기 시작한 계급 문학의 구호에 빠져들지 않고 독자적인 시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한국시의 내면적 깊이를 더했으며, 시의 언어적 방9년에 오산고보를 졸업하였다. 말하자면 대학 이전까지의 학창시절 전부를 백석은 정주의 오산학교 교정에서 보낸 셈이다. 이처럼 백석이 12년이나 되는 긴 기간의 학교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오산학교 교정이거니와, 이런 오산학교를 생각하면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이 학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오산학교는 정주 출신의 상인이었던 남강 이승훈이 민족주의자인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을 받고 그가 세웠던 서당을 개편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둘째, 오산학교는 교육의 목표가 애국적 지도자 양성에 있는 만큼 민족주의 정신이 학교의 기본정신을 이루었고 실제로 일제 강점기 하에 3·1만세 사건을 주도하는 등 당대의 민족운동을 이끌어갔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셋째,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남강 이승훈이었지만 그이외에 학교를 이끌어가는 초대 교장엔 정주의 선비 치당 백이행(백석과 종씨이며 돌림자도 같음)이, 2대 교장엔 경기도 출신으로 한학과 신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근대적 선각자 여준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백석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우리 역사 속에 널리 알려진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임명되어 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넷째, 이들 이외에도 오산학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학교의 교사로 우리 근대소설사의 선구자인 이광수가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또한 우리 근대시사의 앞자리에 놓이는 김억이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역시 우리 근대시사의 문제적 시인인 김소월을 이 학교에서 발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미술사의 문제적 화가인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다.이렇듯, 백석이 대학 이전까지의 학창시절을 보낸 오산학교는 우리의 역사와 교육사 그리고 문학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학교였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백석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이 당시 하숙을 쳐서 가계를 이끌어가기도 했던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점이 백석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년 8월 31일, 조선일보 지면에 「定州城」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시단 데뷔는 그가 소설가로 데뷔한 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고서이다. 백석의 고향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밝혔듯이 평안북도 정주이다. 백석은 바로 그 정주에 있는 정주성을 소재로 삼아 그의 데뷔작을 발표하였던 것인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헐리다남은성문이한을빛같이훤하다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定州城」의 전문백석은 데뷔작인 위 인용작품에서 대상만을 묘사할 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조금도 작품 속에서 직접 표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정주성의 주변 정황이나 풍경을 상상할 뿐, 이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위 작품으로부터 추측하기 어렵다. 이런 시작방법은 백석의 독특한 영역에 속하거니와, 그로부터 우리는 백석의 시세계에 모더니즘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백석은 시 「定州城」으로 문단에 나와 주로《조선일보》와 그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조광》에 시를 발표하였다. 「山地」「주막」「비」「나와지렝이」「여우난곬族」「통영」「힌밤」등이 다 그렇게 발표된 작품이다. 그후 백석은 1936년에 이르러 『사슴』이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시집의 뒷면에 인쇄된 내용을 보면 백석의 시집 『사슴』은 그 당시 정가가 2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가격은 '조선 초유의 고가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이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일약 1930년대 우리 시단의 신예시인으로 그 자리를 확고하게 굳히며 많은 관심 속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우리 시사의 문제적인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김기림, 박용철, 임화, 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