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교육은 교사와 학생관계, 교사와 교육내용 및 방법과의 관계, 그리고 학생과 교육내용 및 방법과 관계 등의 상호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성과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세 가지 요인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 요인이다.교사의 자질, 교사의 역할, 교사의 전문성 내지 지적능력 등은 학생들의 행동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의 학습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학생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교육환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이며 학생의 교육환경 가운데서 교사를 빼놓고 시설이나 기구만을 보고 좋은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으므로 좋은 교육은 좋은 교사가 있을 때에 가능하다.교육의 본질을 Eduard Spranger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작용에 의한 문화의 전달과 갱신의 과정 또는 비교적 성숙한 자와 미성숙한 자를 자연의 상태에로 끌어올리기 위한 문화작용”이라고 보았다. E.Spranger가 말한 비교적 성숙한 자란 학교 교육 현장에서 바로 현직교원 (주로 교사)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 및 교육내용과 아울러 교육내용을 구성하는 3대 요소의 하나일뿐더러 교육의 방향을 결정 내지 이끈다는 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되어 있다. 즉, 교사는 인격적 존재로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온갖 교육적 작용이 교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형성자로서의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 있다.그리고 모든 교육 활동이란 교사의 학생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사에 대한 학생의 태도는 학생들의 심리적, 사회적, 나아가서는 신체적 또는 인격적 성장발달에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교사에게 있어서도 교수 목표 달성의 만족감이나 사명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교사에 대한 태도가 인격적 감화는 줄 수 없으며 교사의 역할 수행은 어렵다고 본다.교사의 자질교사의 자질이란 교사가 될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바탕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사의 자질이란 일정한 범주 속에 넣어 규정하기 힘든 것이며 교육 작용의 본질에서 자연적으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교사의 자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김종서는 교사의 자질은 비교적 영속성이 있는, 교사가 갖추어야 할 개인적 특성 및 교직적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지적, 정서적, 사회적 및 신체적인 개인의 특성과 교직적 태도를 의미하며 주로 내적 요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한국 교원 윤리 강령의 전문 5장 26조는 우리나라 교사의 자질과 관계되는 행동윤리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개개인의 인격과 개성 중시, 둘째, 공평무사와 정직, 셋째, 고상한 품위와 취미 등의 교양미, 넷째, 협동심, 책임성, 애국심, 다섯째, 사회실정의 정확한 파악과 적극적 봉사, 여섯째, 근면·성실이다.또한 대한민국 교육법 75조는 “교원은 항상 사표가 될 품성과 자질의 향상에 힘쓰며 학문의 연마와 교육의 원리와 방법을 탐구 연마하여 국민교육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고 한국교사상과 교사 자질에 관해 명문화하고 있다. 정리하면 교사의 자질은 사랑, 이상. 교육기술을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이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격완성, 이상 세계의 실현이라고 볼 때 교사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지도하는 것이라 하겠다.또한 오천석은 교사의 자질을,첫째, 교사의 기본태도로 전문적인 자질에 앞서 교사의 소명의식이 필요하며 교사의 마음으로서의 사랑· 겸허· 개방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교사가 지켜야 할 자질이라고 하였으며,둘째, 교과에 대한 깊은 전문적 지식과 좋은 학습지도 방법이 필요하며,셋째,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인성적인 동정이 있어야 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정범모는 교사의 자질을 교사로서의 교사, 인간관계로서의 교사, 인간으로서의 교사, 사회개조자로서의 교사로 나누었고, 박용헌은 교사의 자질 특성을 4가지 측면으로 분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교사의 전문적인 측면에서는 교과에 대한 지식, 수업을 위한 준비, 동기 유발, 수업에 대한 열의, 학습 토론의 유발과 그 지도, 융통성, 용어, 목소리, 표정과 몸짓, 학습 분위기 조성 등을 들었고,둘째, 교사 자질의 인간적 측면에서는 학습자의 이해, 학습자에 대한 태도, 지도성, 훈련 방법, 신뢰성 등을 들었으며,셋째, 교사의 인성적 측면에서는 유머, 비판에 대한 반응, 상식, 안정감과 자신감, 창의성, 건강, 외모, 지도, 인품, 사회성을 들었으며,넷째, 교사자질의 적응적 측면에서는 인기, 직업정신, 상사와의 관계, 동료직원들과의 협동, 행정 능력 등을 들었다.Combs는 지식, 인성, 교육기술, 교직에 대한 태도 등을 중심으로 교사의 일반적 자질을 교과목에 대한 풍부한 지간, 학생과 동료교사를 잘 아는 것, 그리고 교사자신에 대한 긍정적 지각, 학습 목표와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지각, 적절한 교수방법에 대한 지각 등 5가지를 들고 있다.훌륭한 교서의 자질로서 Hight(1995)는 가르치는 과목에 대한 풍부한 지각, 가르치는 학과에 대한 열성, 학생에 대한 풍부한 지식, 학생에 대한 열성, 일반적인 교양, 유머를 이해하는 마음 등 6가지를 들었다.이상에서 보았듯이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의 일관된 결론을 찾기는 어렵지만 위에서 살펴 본 교사의 자질을 준거로 하여 바람직한 교사의 자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고 개성을 존중하여야 한다.오천석은 교사의 학생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원천을 둔 사랑이며, 학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의식하는데서 흘러나오는 사랑이다. 하루하루 그의 영이 자라고 있음을 지켜보는 희열에서 샘솟는 사랑이라고 하였다.따라서 스승의 사랑은 상대적일 수는 없고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편애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정범모는 교사에게 무엇보다도 이해심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 이해, 친절, 따뜻함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김종철은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고 학생 개개인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능력과 적성 및 발달의 단계에 맞게 교육하는 것이 교육의 정도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사는 교사 나름의 편입관에서 벗어나 학생 개개인을 관찰하여 이해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개인차나 개인의 욕구와 성장 발달에 따른 교육애를 베풀어야 할 것 이다.둘째로, 교사는 폭넓은 교양과 풍부한 전문적인 지식 기술을 몸에 지녀야 한다.과학기술의 발달과 지식내용의 폭발, 학교교육의 대중화, 학부모의 교육수준 향상, 각종 새로운 교수 학습 이론 개발과 자료의 보급 등 교육환경의 부단한 변화에 따라 교육의 기능과 역할이 점차적으로 복잡화, 고도화, 전문화됨에 따라 교직의 전문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며, 이와 같은 현상은 결과적으로 교사에 대해 고도의 전문적인 소양과 자격 요건을 요구하는 교육 세태로 나타나게 되었다.김종철은 교사는 스스로 자기의 품성, 자질, 능력 등을 꾸준히 발전시키고 향상 시키는데 앞장 설 것이 기대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 끊임없이 자기 갱신과 분발을 하게하며 그 잠재적 능력을 신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였고,서명원은 남을 지도하는 교육자는 자신의 일반교양을 넓힐 뿐 아니라 전문분야 또는 교과 면에 지식이 풍부하여야 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과 교육 기술 연마에 힘 쓸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셋째, 교사는 교직에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교사, 스승, 선생님은 인격으로나 학식으로나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며 교사 자신이 교직에 긍지와 보람을 가져야 한다.김영식은 예나 지금이나 교사들에게 긍지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며, 긍지가 있는 곳에 사람들은 믿음과 기대와 존경을 보내준다. 긍지가 없는 곳에는 이러한 믿음이나 기대나 존경을 키울 수가 없다고 하였다.이 밖에도 교사는 원만한 성품과 건전한 습성을 소유하고 용모와 언행이 점잖고 품위 있어야 한다,교사의 자질에 관한 선행연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김영하는 중등학생의 교사역할에 대한 기대 연구에서 학교수준별에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교사자질의 특성은 학생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교사와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는 교사.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는 교사, 벌 보다는 칭찬과 충고를 하는 교사 등 이었다. 성별에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교사자질의 특성은 학생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교사,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는 교사,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교사,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대화를 잘 이끌어 가는 교사 등이었다.이홍란은 학생들이 기대한 교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용모는 점잖고 품위 있는 교사를 원하였다.이병주는 교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자기에게 친절하고 사기를 복 돋아 주는 교사를 좋아하는 반면, 편애하며 성품과 언어생활 태도가 바르지 못한 교사는 싫어했다. 인품 면에서는 높은 식견과 넓은 지식을, 근엄하고 엄격하면서도 항상 온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점잖고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다방면에 취미를 가지고 정신적인 감정과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연구하는 교사를 좋아했다.한동교는 학생이 기대한 교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교사는 항상 교재연구에 성실하며 지도방법에도 많은 관심과 경험을 쌓아 학생들의 교육효과를 높일 수 있는 자질이 요구된다고 했고, 품위 면에서 학생은 교사의 편애를 가장 싫어하므로 학생의 기회여부가 균등해야 한다고 했다. 성격 면에서 교사는 내향적으로 끈기와 투지로 문제를 해결하고 외향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세하며 학생과의 접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인격 면에서 교사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우선 친근감을 갖도록 하여야 하며 학생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활동 면에서는 교사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생각이 훌륭하여도 활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했다.
목차서론본론시대적 특징삼국의 교육삼국시대 교육 읽기문화의 일본전파중국과의 문화교류결론 및 나의 의견서론삼국시대는 역동적 교육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일본 및 중국과의 교육문화 교류에 대하여 설명하기 이전에 그 시대의 시대적 특징과 삼국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고,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본에게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본론시대적 특징종전의 부족국가들을 병합함으로써 출발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보다 광범위한 고대국가 체제로의 변신을 도모하였다. 그들은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법령을 반포하였으며, 각 부족들이 갖고 있었던 서로 다른 사상들을 극복하고 부족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역사서의 편찬이나 법령의 반포는 국민들의 문해(文解)능력이 있을 때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학교 및 이와 유사한 교육제도를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한편 삼국시대의 특징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세력 균형을 이룬 정립상태로서 당시는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삼국의 교육에는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청소년 수양단체의 존재와 교육내용에서의 문무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삼국시대는 한국 교육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교육의 시대로 남게 된다.삼국의 교육에서는 보편성과 함께 그들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교육이 시대적·사회적 산물임을 감안할 때 이는 곧 삼국의 상황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달랐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그 시대가 달랐던 만큼 특유의 교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대의 교육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다. 우리 교육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삼국시대 교육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삼국의 교육(태학)태학은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되었으며 기록상 우리나라 최을 휴대했었다는 기록과 ‘백제전’에 “그 나라 서적 가운데는 5경 및 자?사가 있다.”는 등의 기록들을 볼 때, 백제의 교육내용으로는 5경 이외에도 천자문, 사상서, 사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백제의 교육내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중국 ‘백제전’의 “(백제인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으며, 아울러 고서나 사서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 가운데 뛰어난 자는 글짓기에도 정통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이것은 곧 백제가 서적 중심의 문교육 뿐만 아니라 무교육도 중시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백제가 무술교육을 중시했던 이유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와의 대치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백제에서는 의?역?역등을 담당하는 전업 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에 어느 정도 잡학교육이 실시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이처럼 백제에서 문?무?잡학교육이 이뤄졌다는 것은 곧 당시에 어떤 식으로든 학교 내지 교육제도가 존재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것들은 고구려의 태학처럼 중국식의 학교였을 수도 있고 혹은 경당이나 화랑도 같은 청소년 수양단체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들의 명칭이 무엇이고 특징이 어떠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학교 내지 교육제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사료가 취약한 한국 고대 교육사 분야를 접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교육사적 안목이다.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학교설립이 늦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이 두나라에 비해 교육상의 발달이 늦었다고 볼 수 없다. 신라에는 일찍부터 학교가 아닌 신라 고유의 교육제도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화랑도였다. 화랑도가 신라의 기간 교육제도라고 하는 것은 김대문이 지은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화랑도)로부터 나왔으며,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이처럼 화랑도는 신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양성해 냈던 제도로서 당시 중국식의 학교제도와는 사뭇 다른데 원인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의 교육제도를 모방하게 됨에 따라 유교 경전과 문학의 학습이 교육의 주된 내용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삼국시대 교육처럼 역동적이고 균형있는 교육은 더 이상 어렵게 된다. 특히 고려시데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다음부터는 문약으로 흐르게 됨에 따라 교육은 서적의 암기나 글짓기 능력 함양과 같이 시험위주의 학습으로 변질되게 된다.그런데 지금까지 다룬 삼국시대 교육은 공식적인 제도교육을 중심으로 살핀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 삼국민들에게 교육적 영향력을 미친 요인은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시의 무형식적 교육의 영역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이다. 종교가 당시 사람들의 정신셰계에 미친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이다.삼국은 공통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 수입 경위와 보편화 과정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불교는 당시 삼국민 모두의 가치관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자비, 인과응보, 호국 등의 사상은 현실생활에서 그들의 의식을 규율하는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불교뿐만 아니라 무속 사상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특히 무속사상은 우리 민족의 의식의 원형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지닌 교육력은 대단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남에게 해를 입히면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무속적 사고방식은 불교의 인과응보사상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삼국민의 의식 속 깊이 내면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어떤 형식교육도 이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문화의 일본전파고구려·백제·신라는 기원전 1세기에 초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3세기부터는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면서 점차 발달하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삼구그이 문화는 사상·학문·제도·예술 등 모든 면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도화한 삼국문화는 곧 일본으로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동진의 학술과 사상이 백제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자가 일본에 전해진 것을 이보다 앞서서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보이는 바와 같이 왜의 작은 나라들이 중국 및 낙랑?대방군과 교섭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나 본격적으로 한문이 전달된 것은 왕인박사의 일본행을 시발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백제가 일본에 한문을 전함과 동시에 유ㅎㄱ을 전수시킨 것은 백제가 이후 한성으로부터 웅진?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에 자주 보이는 백제의 오경박사 파견 사실로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이미 근초고왕대에 박사제가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유학에 대한 이해도 백제적인 것으로 소화되고 유학사상 역시 정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에 전달한 유학과 그 사상도 백제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이와 같이 백제로부터 학문과 유학사상의 일본 전수는 곧 일본에서의 학무노가 유학사상의 보급을 보게 되고 유교 정치 이념의 이해를 가져오게 되어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추고천황 11년조와 12년조를 보면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성태태자가 12계관위와 17조 헌법을 정하였다는 것이다. 관위 12계는 유교 덕목 그 자체를 이용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17조 헌법은 유불 사상에 입각하여 여러 신하들을 훈계하는 지배 원칙으로서 제2조의 ‘독경삼보운운’을 제외하고는 각 조목의 대부분은 나 등 유교 전적의 사상을 따거나 구절을 이용하고 있어서 이것 또한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한편 이 관위 12계와 17조 헌법을 제정한 성덕 태자는 불교관계는 고구려 승려인 혜자에게 배우고, 유학은 박자 가가에게서 배워 통달했다고 추고천황 원년조에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서 각가에 대한 인적사항은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에 유학을 전달한 나라가 백제이고 또 백제가 일찍이 박사제를 수립하여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한 일이라던가 각가가 모두 백제 성왕 때의 사실인 점이 주목되며 역시 일본 불교의 시발이 백제에 있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백제는 서울을 웅진으로 옮긴 후 대통사와 같은 큰 사찰을 창건하였고 웅진 도읍기에 축조한 무령왕능의 현실 벽면은 연화문전으로 쌓여 있으며 부장품으로 불교적인 내용물이 출토되고 있어 불교 신앙이 융성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겸익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초문오부율을 번역하게 하여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으며 중국의 양나라로부터 자료를 청해오는 등 교학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의 불교가 성황을 이루었던 사실을 백제전에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에 전수된 불교는 백제적인 불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백제의 문물들은 끊임없이 일본에 전수되어 법사?선사?비구니 등의 승려들을 파견하며 경론을 보내고 와박사 등 사원 건축에 중심이 되는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많은 사원을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이 민달 천황 6년조와 13년조에 보이고 있다.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은 당시 불교숭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소아씨와 불교를 배격하고 재래의 국신신앙을 주장한 물부씨와의 대결에서 소아씨가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아씨는 추고천황대의 실력자로서 이후 불교를 크게 장려하고 법흥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소아씨는 백제 계통의 사람으로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 집단을 배경으로 하여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일본의 불교는 백제로부터 전래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흥법과 장려에도 백제계사람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가 전해진 후 일본지역에서 승려가 된 대다수가 백제계사람이 아니면 고구려와 가야계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백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승려와 기술자들을 보내어 불교신앙을 장려했다는 점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불교는 추고천황 32년조에 “당시 시유사유책육소 승팔백십육인 배오백육십구인 장일천삼백육십오인”이라 함.”
목차서론본론- 基督敎學校의 成立-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 기독교학교의 민족교육- 기독교가 한국교육사상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결론 및 나의 생각서론개화기에 기독교가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분야이냐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가 우리나라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며, 조금 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100년 전 우리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했을 때의 달라진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적인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기독교 문화의 유입은 우리나라의 복식과 경제, 사고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육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교육 분야야말로 철저하게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온 분야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기독교가 이루어놓은 한국 근대교육을 빼고 나면 한국 교육의 역사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기독교는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에 커다란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그렇다면 지금부터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교육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알아보고,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논해보도록 하자.基督敎學校의 成立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기독교계학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시작이었다.아펜젤러는 1885년 7월 27일에 서울에 들어와 8월 3일에 이겸라와 고영필 두 남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7일에는 이종운, 오인학 두 사람을 정부에서 보내어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인 1886년 10월 6일에는 20명의 재적생을 갖는 학교로 발전하였다.이 학교는 그 교육사업의 공적을 나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1887년 2월 21일에 고종은 ‘배재학당’이라고 하는 인재를 배양하는 뜻의 학교 이름을 지어주는 동시에, 그 당시 명필이었던 정학교(丁學敎)로 하여금 쓰게 한 액자를 하사하였다.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역시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리 개화기라 할지라도, 이 시기는 아직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남존여비의 봉건사상이 지배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여자에게는 교육을 제공할 필요도 없으며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던 때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란 해괴한 현상으로 여기던 때에, 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혁신적이고 과단성 있는 일이었다.그러하기 때문에 설립 초기에 이화학당에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거지의 딸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하층민의 여자아이들이었다. 그것마저도 부모가 학생을 자진하여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랜튼 여사가 학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찾아 나서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얼마나 학생을 얻기가 힘들었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당시 서울에는 1887년 앨러스가 세운 정신여학교, 1897년 캠벨이 세운 배화학당 등이 있었다.1910년 2월 현재, 666개의 기독교 학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장로교 계통의 학교가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가 초등정도의 학교였으며 대학이라 칭한 것이 1개 학교, 대학부라 칭한 것이 2개 학교, 중등정도의 학교가 19개 학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부터 선교사들은 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으며, 이미 설립된 학교도 많은 제한과 탄압을 받게 되었으므로, 이것에 견디지 못한 학교는 문을 닫게 되어, 그 숫자가 감소하였다.조선총독부에서 1912년에 조사한 ‘在朝鮮基督敎會附屬學校一覽’에 의하면 경기도에 70개 학교, 충청남도에 17개 학교, 충청북도에 7개 학교, 전라남도에 8개 학교, 전라북도에 22개 학교, 경상남도에 10개 학교, 경상북도에 51개 학교, 강원도에 6개 학교, 황해도에 83개 학교, 평안남도에 205개 학교, 평안북도에 107개 학교, 함경남도에 21개 학교가 설립되어 총계 607개 학교인 것으로 나타났다.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기독교학교의 교육방침은 선교사들 중심의 무비판적인 서구화나 서양인의 생활풍습을 수단으로 삼던 편협한 이기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순미(純美)한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신사상 위에 근대문명에 고나한 지식을 주고 과학적인 생활을 하게 하여 실력 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 할 수 있는 정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배재학당의 교육목적이었다.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교육목적은 한국 여성으로서 갖추어야할 지식과 교양을 폭넓게 길러주는 것과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바로 깨닫고 한국인, 나아가서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할 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양성하는 것에 교육목적이 있었다.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밑바탕에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이념이 깔려 있는 동시에, 설립자들의 개인적인 교육이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손인수는 기독교계 학교의 건학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첫째, 전도의 방법, 신자들의 기독교적인 훈련, 교역자의 양성을 위하여둘째, 봉건사상에 사로잡힌 한국인을 무지로부터 해방시켜 실력 있는 한국인을 만들기 위하여셋째, 서양 의술과 과학적인 치료 방법을 이식하기 위하여넷째, 남녀평등과 인도주의 및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하여다섯째,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전달, 소개하여 이 나라의 제반 문물제도를 혁신하고, 과학화하고, 현대화하기 위하여여섯째, 근대 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기독교학교의 민족교육고난 받는 국가와 민족을 구원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 및 기독교학교가 전개한 사업이 바로 민족교육이었다. 즉 국가와 민족이 열강의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한 때에 기독교학교는 교과교육, 교과 외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주었던 것이다.교과교육은 국어?수신(윤리)?역사?지리?체육?음악?성경 등으로써, 심지어는 성과목조차도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해 주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어를 비롯한 위의 교과들은 그 내용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에 충분한 것이었다.또한 과외활동으로서의 체육활동, 특히 운동회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직면한 때에 학생들에게 활달한 기상을 길러주고, 나아가 국권을 외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주는 기회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운동회를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는 기회로 삼았다. 운동회는 ‘관?공?사립연합운동회’, ‘ 사립학교연합운동회’, 또는 각 개별 학교의 운동회 등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활발히 개최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운동회가 자신들에게 대항하여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는 것을 감지하고, 이 운동회조차도 개최하지 못하도록 탄압 하였던 것이다.창가 역시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여 주고 있다. 선교사들이 찬송가 형식으로 들여온 창가가 한국민족에게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창가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기독교 및 기독교학교에서 특히 창가를 통한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이것도 탄압하는 대상으로 삼고 창가를 통하여 일본정신을 주입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소위 『보통교육창가집』을 편찬하였던 것이다학교의 각종 행사 즉 교내행사인 소풍?성탄절?방학식 및 졸업식 등도 주요한 민족교육활동으로 승화시켰으며, 국가의 기념일인 개국기원절?황제탄신일 등의 날에도 외보에서 개최하는 행상 참가하거나 학교자체의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충군애국의 정신을 나타내기도 하였다.한편 실업교육 역시 주요한 민족교육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학회에 남긴 공헌 중의 하나는, 한국국민에게 실업이나 근로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동시에, 실제로 학생들에게 실업교육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장차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것과도 연결되었다. 그러한 것의 구체적인 예가 자조부 등의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실업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길이요,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독교학교에서 전개한 민족교육활동은 학교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문화는 中國一色이어서 비단 교육뿐만이 아니라, 학문, 종교, 행정 제도 등과 유교적인 인생관, 세계관,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느 면에서나 漢文主義, 事大思想, 慕華思想에 젖지 않는 면이 없었다. 교육은 한갓 개인영달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누구나 과거에 급제하여 고급관리가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었다. 당시 文을 숭상하고 생산을 천시하였던 사회의 통념으로 보아 일신상의 성공이라는 것은, 곧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교육의 특징을 숭고주의(崇古主義)라고 규정할 수 있다. ‘옛것은 새것보다 낫다’, ‘이미 진리는 고인에 의하여 발견되었다’는 생각이 당시 사람들의 사고에 깊이 박혀있었다.이때에 기독교 학교는 교육을 개인 영달의 수단으로만 여겼던 전통적인 교육사상을 깨뜨리고, 교육의 목적을 사회봉사에 두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학당훈인 ‘욕위대자 당위인역’이나 정신여학교의 교육이념인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등은 모두 이 봉사 정신을 강조한 예라고 볼 수 있다.(2) 인간존중?평등교육의 이념李朝社會의 봉건적 모습의 그 대표적 특징은 세습적 계급제도라고 하겠다.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나 양반과 常人으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여기에 인간 존중, 만민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상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국에 오자 곧 양반, 서민의 자제 등에 구애됨이 없이, 또한 남녀와 불구자에 대한 구별이 없이, 계급 사상을 깨뜨리고 교육의 기회 균등의 원칙을 그 시행에 옮겼던 것이다.(3) 실업교육관의 정립文을 숭상하고 양반을 높였던 이조 사회에서는 實業, 즉 직업교육은 문화에 비하여 아주 열세에 있었다. 實科를 구교육에서는 잡과라 하여 율학, 역학, 의학, 천문학 등이 이에 포함되었고 이러한 기술 교육은 각각 그 소관 관청의 책임하에 실시되었다.정부에 의한 이와 같은 실과교육을 위한 노력이 없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것은 언제나 文科 교육에 비하여 열세에 있었던 것다.
7차 교육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교 1학년까지 10년간은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으로 정해 10개 과목을 배우게 하되 학생별로 ‘수준별’교육과정을 운영하고, 고교 2,3학년은 ‘선택중심 교육과정’으로 정해 학생들이 학업수준과 적성에 맞게 배울 과목을 선택해 심화학습하게 하는 것이다.초등학교부터 고교 1학년 때까지는 그야말로 국민으로서 갖춰야할 기본 소양을 공통적으로 익히게 하고, 고교 2,3학년 때는 각자 진로에 맞춰 각자 다른 심화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이는 전 국민이 초. 중. 고 과정을 똑같은 과목만 배워 전 과목 총점을 기준으로 한 줄을 세워 대학에 가게 하는 교육체계를 탈피하자는 취지다.이처럼 고교 2, 3학년 때, 전면 선택과목제가 도입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 등 계열구분이 원칙적으로 사라진다.고교 1학년 때, 배우는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에 포함된 과목은 국어, 도덕, 사회(국사포함), 수학, 과학, 기술, 가정, 체육, 음악, 미술, 영어 등 10개 과목이다.즉, 7차 교육과정의 총론적인 목표는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주는 교육과정의 틀을 깨고, 일선 학교와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개발해 나가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나 전교조와 초등 교원단체는 7차 교육과정이 공교육을 파탄시키고, 사교육비의 증가를 초래할 것임을 지적하며, 시행을 즉각 중단하고, 수정고시를 통해 교육과정 논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렇다면 지금부터 달라진 7차교육과정 중 미술교과에 대해 집중 탐구해 보도록 하자.본론중·고등학교의 미술시간은 주 1시간이다. 그것도 고1, 고3 혹은 고2, 고3 때에는 없다. 중학교 미술시간에는 주로 만들기, 그리기 등등 실습이라도 하지만, 고등학교 미술시간은 매우 형식적이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지 않으니, 과외 받을 과목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것이고, 학부모들은 이를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고 한다.그러나 이게 과연 환영할 일인가...?-7차 교육과정 내신에서도 배제-몇 년미술작품 한 점을 보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삶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인류가 언어로 생각과 삶과 역사를 기록하듯이 영상으로도 동일한 것을 기록해 온 것은, 영상언어는 언어보다 더 즉각적이고, 알기 쉽고, 강력하기 때문이다.각 국의 언어와 어휘와 문법이 다르듯이, 각 국의 영상언어와 도상들과 문법도 다르다. 모두가 각자의 언어를 배워야 하듯이, 영상언어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 앞에서 눈 뜬 장님’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미술의 경우에도 르네상스 미술양식의 언어체계와 모더니즘 양식의 언어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하여 실제처럼 그려내면서 종교적이거나 역사적 이야기를 그려내는 르네상스 양식이 작품들과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이야기가 없는 그림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양식의 작품들을 언어체계들을 배우지 않고 읽는 방법은 없다.선진국들의 미술교육 강화는 과연 제대로 된 미술 감상만을 위한 것일까? 미술작품은 물감과 화포, 나무나 돌 혹은 쇠와 같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미술은 생각을 물질화하는 과정이고, 물질에서 생각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즉 작가는 그의 메시지를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다듬은 후에 어떤 수단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재능과 인내와 시행착오를 거쳐 물질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다.작품감상은 그 역순이다. 작품의 형과 색, 구도 등을 보고, 어떤 생각이 이렇게 되었을까를 추론하고, 결국 작가의 생각에 도달하고 공감하는 것이 작품감상이다. 한 시대의 작가는 그의 시대를 그의 세대의 영상언어를 사용하여 이야기한다. 동시대의 작품을 감상하기가 쉬운 이유이다. 시대가 달라진다면? 지역이 달라진다면? 당연히 영상언어를 읽는 방법을 따로 배워야 한다. 시대와 지역의 시공적 차이를 넘나들며, 조형언어로 쓰여 있는 생각과 삶과 역사를 읽어내는 능력을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 이외의 방법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 또 물질과 정신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미술교육의 요점인 것이다.-있으나마나한 과목으로. 생소한 모더니즘 기법들을 주로 실습하니,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러니 공허하고 있으나 없으나한 과목이 된 것이다.이 미술과목은 어휘의 70%가 넘는 한자어를 외국어 취급하는 국어과목과 선택과목으로 전락한 국사과목과 더불어 ‘21세기의 세계화 정보화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이라는 7차 교육과정의 모토를 무색하게 한다.이처럼 달라진 7차 교육과정 이전이나 이후나 미술교육과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업에 배당된 시간이 타 교과에 비해 월등히 적다는 것이다.그림을 직접 그려보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시간이 한 시간 안에 해결될 리 만무하다.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는 미술이론만을 가르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미술적 감성을 향상시키고 적성에 맞는 소질개발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학습시간이야말로 진정한 미술교육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7차 교육과정의 미술과의 교육목표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표현 및 감상 능력을 기르고, 창의성을 개발하며, 심미적인 태도를 함양한다’이다.이 같은 취지에 맞게① 가. 미적 대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수업② 나. 느낌과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③ 다.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미술 문화유산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에 요점을 두었다.달라진 7차 교육과정의 특색을 설명하자면첫째, ‘교육자 중심’, ‘공급자 중심’의 교육 과정에서 ‘교육 과정 중심’, ‘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 과정으로- 제 6차 미술과 교육 과정에서는 학교 급별 목표를 따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해 제 7차 교육과정에서는 미술 교육을 받은 학습자가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의 최종 단계인 고등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성취해야 할 능력 중심으로 목표를 진술하고 있다.둘째, 교육 과정에서의 구체적 내용 제시가 최소화되었다.- 학교 및 지역 사회의 특성, 교사의 교육관, 행사나 계절 등을 고려하여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배려 됨.-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 흥미와 관심, 적성, 진로 등을 고심미적 태도 등을 강조하는 것이 미술과의 목표이다.그렇다면 미술과의 7차교육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7차 미술과 교육과정교육과정 : 교육을 통해 어떤 인간을 길러 내려고 하는지의 교육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교육내용은 무엇이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교수. 학습 방법은 무엇이며, 교수 . 학습의 결과는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을 설계하는 것..Ⅰ. 개정의 요구미술과 교육의 새로운 변화, 사회여건의 변화, 교육이론의 발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미술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등은 미술과 교육 과정의 주기적인 개정을 요구한다.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의 편성 방침에 따라 미술과 교육 과정을 개정해야 하는데...첫째,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기간인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10년이 하나의 체제로 구성됨으로써 학교 급별 차이에 따른 연속성이나 연계성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내용의 계열성과 위계성, 통합성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둘째, 학생들이 반드시 학습해야만 하는 내용을 정선, 구조화하여 보다 효율적인 학습자 중심의 활동 을 보장하기 위하여 학습 내용의 범위와 수준을 조정해야만 한다.셋째, 학생들의 능력, 적성, 진로에 적합한 학습자 중심의 교육을 실천해야만 한다.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 흥미와 관심, 적성, 진로 등을 고려하여 개별화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여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교육과정의 구성과 운영이 요구된다.Ⅱ. 6차 교육과정과의 비교1. 6차 교육과정영역 : 미적 체험활동, 표현활동, 감상활동으로 구분.지도 내용구성 : 미술과 생활(생활과 밀접한 미술을 느끼고 미술의 역할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고 환 경개선의 의지와 표현활동의 동기 유발을 위하여 신설..), 느낌 나타내기, 상상하여 나타내기, 보고 나타내기, 꾸미기와 만들기, 붓글씨로 나타내기, 작품감상으로 구성.2. 7차 교육과정영역 : 미적 체험활동, 표현활동, 감상활동으로 구분. (6차와 동일)지도 내용구성 : 학년 군별(3,4학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대상, 환경, 사건이 포함될 수 있다..나. 초등학교 (3,4,5,6학년)수준에서의 ‘표현활동’ 내용에서 성취하여야 할 능력: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고,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게 함으로써 표현활동에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며, 창의적인 활동에 기반이 될 수 있는 기초능력을..... 제 6차의 느낌 나타내기, 상상하여 나타내기, 보고 나타내기, 꾸미기와 만들기, 붓글씨로 나타내기, 등의 표현활동을 묶어서 표현 영역으로 통합하였고...( 통합의 이유 : 7차의 수업 시수 축소와(초등 축소 없음) 학습량의 30% 축소 방침에 따라 학습량 조정의 필요성 때문.. 중복 제시되고 있는 내용들을 통합하여 학년 수준에 적합한 주제, 표현 방법, 조형 요소와 원리, 표현 재료와 용구 등을 익히도록 함으로써 교육의 효율성을 꾀하고, 현대 미술의 동향인 장르. 영역별 비구분화, 창의적 표현 활동에 발 맞춰 나가기 위 한....다. 초등학교 (3,4,5,6학년)수준에서의 ‘감상활동’ 내용에서 성취하여야 할 능력: 서로의 작품과 미술품을 보는 활동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미술품의 특징을 이해하며 존중하도 록하며, 작품을 보는 능력을 길러 줌으로써 생활 속에서 미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시대별, 양식별 미술의 변천과정을 이해함으로써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 아가 미래의 미술 문화를 창조하는데 바탕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Ⅲ. 미술과 학년별 내용1. 미적 체험 영역가. 자연미 발견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 할 수 있다.1) 선과 형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2) 색의 아름다움을 찾아 본다.나. 조형미 발견주변의 조형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1) 선과 형의 아름다움을 찾아본다.2) 색의 아름다움을 찾아본다.가. 자연미와 조형미의 특징 이해자연과 조형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특징을 이해 할 수 있다.1) 자연과 조형물의 아름다움을 비교한다.2) 자연과 조형물의 형과 색에서 변화를다.
에드가 드가와 인상주의의 관계는 줄곧 불분명했다. 그는 1860년대에 팡탱 라투르나 마네와 잘 아는 사이였지만, 그 무렵 팡탱 라투르가 그린 집단 초상화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인상파가 등장하는 다른 그림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동료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인상파전에 참여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드가는 많은 좀에서 인상파 그룹과 동떨어져 있었고, 그들에 대해 비판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입장 때문에, 그가 보수적인 화가들을 그룹에 끌어들이려 했을 때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게르브아 카페에서 동료들과 나눈 대화는 신랄한 논평과 도발적인 이론으로 차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또한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인 사람이어서 동료 화가들이 출세를 목적으로 자신을 선전하고 기회주의적인 거래 관계를 맺는 것을 경멸했다. (그는 ‘유명하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드가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마네와 함께, 당시의 여가 풍조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에 바탕을 둔 인상주의의 도회적 특징을 규정했다. 혁신적 구도와 실험적 기법은 자연주의적 효과를 낳는 계획적이고 인위적인 표현수단을 요구했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은 내성적이고 지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그는 뎃생을 중시했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했으며, 전통적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많은 습작을 거듭했다. 이런 작업 방식 때문에 그는 자연을 직접 그린다는 ‘외광파’의 이념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외광파’ 화가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모조리 총살해야 한다고 농담한 적도 있었다. 그는 1869년에 노르망디 해안에서 파스텔 연작을 그린 뒤에는 1890년대까지 풍경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내 예술만큼 자연발생적인 예술은 없다. 내가 하는 일은 거장들을 재현하고 탐구하는 것뿐이다. 나는 영감이나 자연스러움 기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미술사가인 캐럴 암스트롱은 그의 미술사적 위치를 ‘인상주의의 고립자’라고 적절히 묘사했다있다. 그리고 드가의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마루 바닥재를 급속히 후퇴시켜 거리감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감상자로부터 불안정하게 떨어져 있는 느낌을 자아내어 정상과는 다른 영역을 암시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실내오하는 대부분 가정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나 친구들의 초상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드가의 는 비가정적인 세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무대장치나 삽화와 비슷하고, 그 때문에 거기에 어떤 사연이 담겨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침실의 누추함은 분명 불륜관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관계는 여전히 연극이나 소설과 비슷한 구조를 통해 전달된다. 드가는 이 작품을 ‘나의 풍속화’라고 불러, 이 그림이 역사화와는 다르지만 서사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그의 준거가 현실보다 예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1865년 작품 (그림3)도 예술과 현실 사이의 유익한 긴장이 낳은 산물이다.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마 그의 어릴 적 친구인 폴 발팽송의 아내일 것이다. 그녀는 시골 별장 정원에서 딴 꽃들을 방금 꽃병에 꽂은 참이다. 정원용 장갑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자세는 드가가 특히 좋아한 포즈로서 사색을 암시한다(망설임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캔버스 테두리로 제한된 화면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눈길은 우리에게 액자 밖의 세계를 의식하게 하고, 그림은 그녀가 속해 있는 현실이라는 더 큰 종이에서 잘라낸 조각으로 이해된다.그림3 은 몇 년 전 살롱전에 전시된 쿠르베의 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쿠르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관행에 따라 꽃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화면 중앙으로 모으고 캔버스 바깥의 것은 그림의 인상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드가는 감상자들이 이런 구도에 익숙해져 있는 것을 이용하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의 책략은 너무 참신하고 결정적이어서, 진솔하고 사실적인 효과를 낳는 동시에 그 노련한 수 있는(그리고 사진 매체를 통해 포착할 수 있는) 독측한 시각적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연스러운’ 것으로 감지되는 효과를 연출했다. 형상을 조각내고, 색채를 대비시키고 평면화하는 모네의 기법은 동시대인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실제 모습을 기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징표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다. 전통 미술을 배운 드가는 모네보다 밀도 있게 물감을 칠하여 가혹한 비난을 피했지만, 자연주의와 예술적 기교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균형을 유지한 것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드가는 사진 효과를 교묘히 풍자적으로 전용했지만, 그 성과물은 조금도 사진 같지 않았다.화면 중심에서 벗어난 대상이 테두리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통행인-말이나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플라놔르’-의 시양에 우연히 포착된 광경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당시에는 ‘스냅 사진’같은 게 없었다. 드가는 에서도 과 거의 같은 구도를 사용했다. 드가의 친구로서 드가를 인상파에 끌어들인 수채화가 겸 판화가인 뤼도비크 나폴레옹 르피크(1839~89)는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공공장소를 정처 없이 거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로수가 우거진 샹젤리제 거리는 우리 뒤쪽에 있다. 튈르리 정원은 그림의 원경을 이루고 있고, 오스만의 파리 개조 덕분에 상점가로 변모한 리볼리 가는 그 왼쪽에서 시작된다. 과 마찬가지로 왼쪽 가장자리를 잘라낸 효과는 무심히 던진 눈길에 포착된 광경을 암시한다. 주요 인물들은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화면에 떠 있는 듯이 보이고, 그 화면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팔을 뒷짐 지고 왼쪽 겨드랑이에 우산을 끼고 있는 르피크의 몸짓은 한가로운 걸음을 암시하고, 멋지게 시가를 문 표정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이 보인다. 왼쪽 인물은 르피크 가족에게 잠시 정신이 팔린 구경꾼이지만, 르피크의 애완견인 그레이하운드만이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오후 나절에 콩코르드 광장에 나온 것을 가르니에의 무용 연습실을 양쪽 다 방문했겠지만, 작품을 실제로 제작한 곳은 화실이었다. 그의 그림은 현장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드가는 1870년대에 친구인 알베르 에슈에게 편지를 보내 발레 심사장 입장권을 부탁하면서 “실제로 보지도 않고 무용 심사 장면을 그렇게 많이 그린 것이 조금 부끄럽다”고 고백했다.발레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 뒤 몇 년 동안 드가는 복잡하고 독창적인 구성을 모두 참구했다. 그는 대개 한 가지 소재를 다양한 형상으로 변형시켰는데. 이는 그가 하나의 착상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애썼다는 증거이자 끈기 있게 실험을 계속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그림 8)에는 같은 주제를 다른 기법으로 그린 작품이 두 점 더 있는데, 그 가운데 크기가 조금 더 큰 작품-(그림9)-은 캔버스에 유채물감으로 그려졌지만 사실상 단색화다.이 작품에는 둥근 모양의 무대 가장자리가 보이고, 화면 오른쪽에서 연습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두 신사 가운데 하나가 지워지고, 무용 선생도 없고, 왼쪽 아래에 불쑥 튀어나와 있던 콘트라베이스의 머리 부분도 시야에서 사라졌다.그림 8 그림 9 하지만 이것들은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것은 구도를 복잡하게 하고,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작품에 거리감을 주고, 넓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은 남자들의 지휘 감독 아래 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가가 날카로운 심미안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발레에 대한 관심이 더욱 완벽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이런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대 중앙에서 우아하게 춤추고 있는 두 무용수와 차례를 기다리며 기지개를 켜거나 등을 긁적거리거나 그 밖의 온갖 꼴사나운 몸짓을 하고 있는 나머지 무용수들의 대비다.자주 듣는 얘기지만, 드가의 무용수들은 별로 예쁘지 않다. 이를 두고 드가의 관찰이 너무 잔인하다는 둥 여성혐오증 때문이라는 둥 의견이 분분했는데, 가장 보기 좋은 보기는 (그림 10) 정면에 나오을 벌 수 있었고, 상류층 남자들과 교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드가가 발레 연작을 그리고 있던 시기에 그의 어릴 적 친구인 뤼도비크 알레비는 두 젊은 무용수 자매와 그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부모의 약점을 다룬 (1880)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오페라와 발레의 내부 세계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예술적 통찰 때문만이 아니라 관능을 암시하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기본적으로 발레단은 몸을 이용해서 남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젊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페라 극장의 단골손님으로 발레 연습장에 들어갈 수 있는 돈 많은 남자들은 무용수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들이 무용수를 후원하는 것은 은밀한 형태의 매춘행위였다. 1875년에 새로 문을 연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에서는 무대 뒤의 휴게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드가의 무용수들은 남자들의 향학적 눈길만이 아니라 성적 착취까지 당하는 대상이었다. 이들에 대한 드가의 태도에는 매혹과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실제로 무용수는 드가가 두려워하면서도 예술로 ‘안무’할 필요가 있는 주제로 인정한 바로 그 현대성을 구현한 존재였다.일부 비평가들은 드가의 선정적인 주제와 급진적인 구도가 부르주아의 인습에 대한 고의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중산층을 경멸했다 해도 그들을 인간 이하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무용수의 관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것을 생각하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조사용 표본으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느낌이 든다. 파리에서 그런 족속을 가장 매혹시킨 현상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매춘이었다.1876년 위스망스는 매춘부를 다룬 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에드몽 공쿠르는 1877년에 라는 소설을 발표했다(프랑스어의 ‘피유’(fille)는 처녀만이 아니라 창녀도 의미할 수 있다). 드가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스케치를 몇 점 그렸다. (1877)에서 졸라가 소개한 나나라는 인물은 1880년에 발표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