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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측량] 조선후기 조선전도와 대동여지도
    조선후기 조선전도(朝鮮全圖)의 발달과[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조선 후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조선의 지도 제작도 18세기 영조.정조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가 대축척지도의 발달이었다. 이 변화는 측히 전국지도 즉 전도에서 현저했다. 추척이 큰 지도가 만들어짐에 따라 지도의 크기도 디형화 되었으며, 따라서 지도에 표시되는 내용이 상세하고 정확해졌으며 풍부해졌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국가적 차원이 아닌 개인들도 정확한 지도의 제작에 기여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상기(鄭尙驥)와 그 후손들,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이다.조선 후기의 대축적지도의 발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지도학자가 정상기이다. 김정호보다 1세기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실학자인 그는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하여 를 제작하였는데 이 지도는 조선시대 지도제작의 수준을 한단계 높인 획기적인 지도였다.그의지도는 그의 아들인 정항령(鄭恒齡,1710~1770)에 의해 한층 발전되었으며, 손자 정원림(鄭元霖,1731-1800)과 증손 정수영(鄭遂榮,1743-1831)도 지도를 계속 교정 수보하여 더욱 정교하고 훌륭한 지도를 제작하였고, 또 그 지도를 본 여러 사람들이 피사를 하였기 때문에 현재 정상기의 원본 지도가 어느 것 인지 확실지 않으나 대전도(大全圖)의 서본이 5종정도, 팔도분도(八道分圖)의 사분은 40종 정도 남아있다.정상기는 대형의 조선전도인 동국전도(그림1)를 먼저 그리고, 이를 여덟부분으로 나누어 도별 지도를 제작하여, 도별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도별 지도는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면적이 좁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합한 장에 그리고, 면적이 넓은 함경도를 북도와 남도를 분리하여 각각 그린 점이 기존의 도별지도와 다른 특징이다. 전형적인 는 함경북도에 지도의 발문(跋文)과 백리척(百里尺)이 수록되어 있으나, 후대에 전사된 지도에서는 다소의 편차가 존재한다. [그림-1]동국대전도정상기의 는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도별 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었영조가 이 지도를 보고 감탄하면서 모사하여 비치하도록 명하였다. 여암 신경준은 정항령(鄭恒齡)의 지도를 국가적인 지도 제작 사업에 참고하였으며, 성호 이익 등 지식인들이 그의 지도를 전사하여 소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다산(多山) 정약용(丁若鏞)도 그의 저서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정향령의 지도를 여러차례 인용하여 조선의 수경(水經), 즉 강줄기의 갈래와 흐름을 설명하고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특히 북부 지방의 윤곽이 매우 정확해 졌다. 따라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조선 전기 지도의 가장 큰 결점이었던 함경,평안도 지방의 부정확성을 극복했다고 평가 받았다. 이후의 조선 지도들은 대부분 이 지동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다.여함 신경준의 지도의 제작이 천문도(天文圖) 보다 어려움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장향령의 집에 간평의(簡平儀)가 있었으며, 정항령과 함께 국토의 사방 모서리에서 해와 달의 궤도를 측정하여 지도 제작의 일을 마치기로 하였으나 정항령이 먼저 죽었음을 슬퍼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 볼 때 정항령은 아버지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의 수정 등 지도 편찬 작업에 천문의기등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지도 제작자들이 새로운 과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하동(河東) 정씨 가문이 정상기 집안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해주(海州) 정씨 집안인 정철조(鄭喆祚,1730~1781), 정후조(鄭厚祚,1758~1793) 형제가 원본보다 훌륭한 수정본 지도를 만들었다. 정철조는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사할 정도로 그림에 뛰어났으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그림으로 유명하였던 것으로 지적할 정도로 그림에 능함은 물론, 천문, 역법 등에도 달통하였다. 김정호는 [천구도(菁邱圖)] 벌례에서 형인 정철조의 지도가 훌륭하다고 언급하였는데, 황윤석(黃胤錫,1729~1791)은 팔도지도(八道地圖)를 제작 한 후 그 발문에 동생인 정후조가 지도를 만들었다고 기록하여 차이가 있다. 황윤석은 정철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천에 의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정후조는 [사예지(四裔志)라는 지리서도 편찬할 정도로 뛰어난 인문이었다.청장관 이덕무는 중국 성(省)의 남극고도(南極高度)를 논하는데 이책을 인용하고 있다. 정후조가 제작한 ‘해주신본(海州新本)’ 지도로 불 수 있는 것이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와 성신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동국팔로분지도(東國八路分地圖)]이다.[해좌전도(海左全圖)]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1850년대에 제작된 목판본 소형 조선지도이다.(그림2) 목판본 조선전도의 제작과 간행은 당시 지도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며, 지도의 보곱과 대중화가 이루어졌던 사실을 보여준다.이러한 지도 발달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지도학의 대미를 장식한 지도 제작자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이다.한국의 현대지도제작의 중심지인 국토지리정보원 앞뜰에서 김종호의 동상이 서있어 김정호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 제작가이자 지리학자로 존경받고 잇음을 보여준다. 김정호는 1804년에 태어나 1866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그림-2]해좌전도정확한 생존 시기나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물이다. 단지 그가 남긴 방대한 지도와 지리지만이 그의 위해함을 입중한다.고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를 상호보완적으로 보았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지라학의 양 분야인 지도의 지지의 제작으로 설천하였다,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등의 지지(地志)를 편찬하였으며, [수선전도(首善全圖)],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餘地圖)등의 지도를 제작, 간행하여 지지와 지도의 제작과 보급에 힘썼다.최근의 연구에 의해 그의 또 다른 지도인 [동여도(東輿圖)]와, 지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 [여도비지(輿圖備志)]가 알려지고 이에 대하 sdusrn가 이루어짐에 따른 그의 지도와지지 편찬에 관하여 새로운 조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밝혀진 내용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금종호는 1830년대~1840년대에 [청구도],[수구획하여 만든 방안지도로서, 당시까지 제작된 조선전도중 가장 큰 지도이다, 각각의 격자는 동서 70리, 남북 100리이며, 이것이 지도책의 한 면을 이룬다.(그림3) 남북 29층[그림-3]을 층별로 나누어 훌수층은 1권에 짝수층은 2권에 수록하였다. [청구도]가 지니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도]는 대형 전도를 기초로 전국을 방안 격자로 나누고, 남북으로 잘라 각 층을 단위로 지도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여 그린 이전의 군현지도에서는 보이지 축적의 불일치나 도면 넓이의 차이를 극복하였다. 또한 방안 격자를 지도 안에 그리지 않고 도관선에 10리 눈금을 표시함으로써 방안으로 인한 번잡함을 피할 수 있고 도면 외곡의 눈금에 의 해 거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지도 안에는 산천을 비롯한 지형 뿐만 아니라 성곽(城郭), 창고(倉庫), 역도(驛道), 봉수(烽燧), 진도(津渡), 교량(橋梁), 제언(堤堰), 산성(山城), 서원(書院), 사찰(寺刹), 고읍(古邑)등 경제,사회,문화적인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각 국현에서 호구, 전결,곡충,군병등의 기초적인잘가 주기되어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이전의 전도와 달리 각 군현의 경계가 그려져있어 군현의 영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마지막 지도로서 한국고지도의 대명사이자 고전이다. 김정호는 1861년(철종12년)에 [대동여지도]초간본을, 1864년[그림-3]‘청구도’의 서울부분(고종 원년)에 재간본을 간행했다. [대동여지도]는 한국전역을 대상으로 그린 전도로서, [청구도],[동여도]와 함께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조선전도 중 갖아 큰 지도로서 전체 크기 세로6.6m 가로 4.2m의 대형지도이다.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총 11장(지도25면), 숭술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1장(2면)만이 전한다. 현존본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서울역사 박물관 소장본은 보물 제850-1호로 지정되어 있다.[대동여, 휴대용지도 등 관청과 민간에서 이루어진 지도 성과를 종합하고, 각각의 장점믈 취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뛰어난 점은 조선 후기에 발달 했던 대축적지도의 두 계열,죽 18세기 이후 민간에서 활발 하게 제작되었던 전국지도, 도별지도와, 국가와 관청이 중심이 되어 제작했던 상세한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헤산 내용을 겸비한 일목 여연한 대축적전국지도를 만듬 점이다.[대동여지도]가 많은 사람에고 보급, 애호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목판본 지도, 즉 인쇄본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데 있다. [대동여지도]이전에는 목판본 지도가 있었다. 또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한 지도도 있었으나, 이들은 대체로 필사본으로세 제작이 한정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일반 국민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관청이나 궁중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세하고 내용이 풍푸한 지돌르 접하기 어려웠던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대동여지도]는 획기적인 지도였다.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 본 지도 중에서도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 정교함과 품격을 갖춘 지도이다. 정밀 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찬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룡한 전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또한 [대동여지도]는 조선에서 가자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분첩절접식(分帖折疊式)으로 만들어져 소장, 휴대,열람하기에 편리한 형태의 지도였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남분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하였다.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길이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 또는 1판(版)으로 하고 1절ㅇ르 병풍 또는 어크디언처럼 접고 필수 있는 분첩절첩식 지도를 만들었다. 22접을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帖)은 다시 절첩식으로 접혀져 병풍처럼 접용된다.
    인문/어학| 2005.06.01| 10페이지| 1,000원| 조회(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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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대전 인물] 히틀러의 생애
    광기에 찬 천재인가? 악마의 화신이가?1889년 독일 국경 군처의 작은 오스트리아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42세의 세관 공무원 [아로히스 히틀러]와 부인 [클라라]의 네 번째 자녀 [아돌프 히틀러]가 탄생하던 이 시기에는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또 다른 시대가 시작 되는 것을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 많았다.과거 일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백 개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연합체에 불과했던 독일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1세]가 바로 그 전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황제와 더불어 그 역사적인 위업을 이룩해 내었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히틀러의 탄생 1년 후에 권좌에서 물러났다.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단일제국을 이룩한 독일은 중부 유럽 최대의 강대국을 향해 눈부신 발정을 계속했고, 역사적으로 줄곧 그런 독일의 충실한 병방 노릇을 해왔던 히틀러의 조국 오스트리아도 덩달아 안정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이 평화로운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소년 히틀러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초등학교 5년과 중학교 4년을 졸업하는 것으로 그의 정규 교육과정을 끝났다.당시 대부분의 주류가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9년간의 정규 교육기간은 특별히 짧지도, 길지도 않은 보편적인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비천한 신분과 짧은 학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히틀러의 비뚤어진 성격이 형성 되었다는 일부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아버지 아로히스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직업 공무원이 되기를 바랬지만 [린츠]실업(實業)중학교 시절의 히틀러는 성적부진으로 한 학년을 낙제하기도 해서 그런 아버지를 실망시켰다.이 짧은 학창시절동안 그의 학우들이 기억하는 히틀러의 모습은 항상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매사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붙임성 없는 성격, 그리고 언제보아도 책에서 손을 떼는 법이 없는 고독한 책벌레의 모습이다.그가 14세 때 부친 아로이스가 죽었고, 그는 평소의 희망이었던 화가가 되기 위해 고향 린츠를 떠나 수도 [빈]으로 갔다. 하지만 빈의 미술학교 절 유태인 청녀로부터 성병을 옮겨 받았던 기억 때 문이라는 등등의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이런 류의 주장은 매우 신빙성이 낮다.그 무렵 빈은 지난 천년 세월동안 유럽사회의 한 가지 ‘전통’처럼 되어있던 반유태주의가 기승을 떨고 있었고, 바로 그때 어떤 놀리적인 체계나 성숙된 판단조차 없이 이런 토막 난 사상들을 마구잡이로 섭렵하고 있던 이 스무 살 안쪽 청년의 머릿속에 반유태주의도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게다가 동, 서유럽이 만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온갖 종이 뒤 섞여 살고 있는 빈이란 도시의 특징은 청년이 자신만의 편협한 인종차별 이론을 더욱더 키워가도록 해주는 바탕이 되었다.“나는 이 도시의 한 가지 특징인 인종적 혼 합성을 극도로 경멸한다. 체고인, 폴란드인, 헝가리의 마자르족, 유태인, 집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이 도시를 타락시키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짧은 학력과 부족한 연륜 으로 인해 그가 가진 정치적 신년이란 것이 대부분 단편적인데다가 오류와 모순투성이 였지만, 하여간 1913년에 빈의 생활을 청산하고 독일의 [뭔헨]으로 이주한 히틀러는 그 무렵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맥주집에서 술안주삼아 떠드는 얘기에 불과 했던 ‘유태인의 세계 지배음모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반 유태주의의 신념가가 되어 있었다.1914년, 25세로 독일 국적을 얻게된 그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여자에 대해서도 전혀 흥미가 없다는 몇가지 이례적인 점을 뺀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고,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신의 새로운 조국을 위해 제16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자원 입대한다.서부전선으로 보내진 그는 실로 용감한 군인이었고, 모범적인 병사였다.연대의 연락병이었던 그는 세차례나 부상을 당하며 사병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는 수훈을 세웠고, 이때 전우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학창시절의 그것과 비숫한 편으로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있다.“한마디로 이상한 놈이었다.모두가 군대의 거친 식사와 피복에 대해는 왠일인지 심경에 변화를 일이켜 이 작고 초라한 정당의 55번째 단원으로 입당했고, 군에서 제대한다. 나치당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비현 실적인 사회의 낙오자들이었다.실직적인 창설자는 [안톤 드렉슬러]라는 열쇠 제조공이었고 다른 멤버들의 면면도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으므로, 31세의 퇴역군인 아돌프 히틀러가 이 단체의 실직적인 지도자로 부상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921년, 스스로 초안을 만든 당규에 의해 나치당의 ‘총통’으로 추대된 히틀러는 이때부터 훗날 자신과함께 제3제국을 이끌게 된는 충복들을 계속 나치당으로 끌어 들이기 시작한다.이때 입당한 [루돌프 헤스]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같은 이들은 무식한 시골 건달들로 채워진 나치당에서도 보기드문 엘리트들이 었고, 이 초라한 신생 정당의 총통을 마침내 [독일의 총통]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에른스트 룀]과 [헤르만 괴링]이었다.퇴역 육군대위로서 그 무렵 독일안에 흔히 빠렸던 무장한 퇴역군인들로 이루어진 폭력집단을 이끌고 있던 에른스트 룀은 그런 혼란시른 시기에는 어떤 논리나 범률보다도 휠씬 더 앞서게 마련인 나치당의 폭력 친위부대를 구성하고, 돌격대(SA)라 불리운 그 단체의 지휘관이 되었다.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에이스로, 전쟁영웅이며 부자인 동시에 바바리안 지방의 귀족출신인 헤르만 괴링의 재산헌납과 나치당 입당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당부분 남아있던 신분 사회의 전퉁에 따라 출신성분이 미천하다는 약점을 안고있던 히틀러와 나치당에 상당한 힘이 되어 주었다.이처럼 히틀러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과 룀이 이끄는 돌격대의 폭력, 괴링의 돈과 신분배경이 결합된 나치당은 고만고만한 다른 정적들을 물리치고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게다가 이 1920년대 초반의 수년동안 계속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히틀러와 나치당을 권력의 정상으로 끌고가는 견인차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의 체결은 분노한 독일 국민들을 단결 시켰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은 독일의 경제를 도탄찻잔속에 폭풍과도 같은 어설픈 '국가 전복기도'는 단 하룻밤 사이에 끝나 버렸다. 이튼날 아침 정부군의 경찰부대가 시내로 진입하여 발포를 시작했을 때 한낱 정치깡패 집단에 불과했던 돌격대는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고, 16명의 나치당원이 죽었다.히틀러는 가까스로 그곳에서 도망쳤지만 이툴뒤에 체포되어 국가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불발로 끝난 쿠테타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더 공고히해 주는 결과를 불러왔다.재판과정에서 그는 타고난 웅변으로 독일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린 공화국 정부의 '매국행위'를 성토하고 조국 독일과 민중에 대한 지신의 '한없는 사랑'을 열렬히 피력했다."공화국정부는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십년뒤, 백년뒤, 아니 수천년 후에 역사의 법정이 나를 심판할 것입니다. 나의 죄는 단지 우리의 적들과 비굴하게 타협한 저들에게 복종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 뿐입니다."재판이 끝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바이에른에서만이 아니라 전독일에서 유명한 애국자요, 영웅이 되어 있엇다. 히틀러는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이미 정치적 거물이 되어 버린 바람에 그 수형생활은 전속 비서까지 거느린 호화스런 요양생활과도 비슷했고, 그나마 그것조차도 9개월로 그치고 만다. 그리고 이 수형생활 기간중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활동을 결산하는 한권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다.그 거창한 의도와는 달리 일정한 이론도, 체계도 없이 tm무살 안팎의 빈시절 이후로 손톱만큼도 발전한 것이 없는 잡다한 지식과 편견들을 잔뜩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한 이 책에는 [나의투쟁:mein kampf]이란 제목이 붙여졌고, 이것은 곧 나치즘의 성경이 된 동시에 장차 독일 제3제국이 실행에 옮기게 되는 그 수많은 악행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된다.만일 1933년 이전에 독일의 지식인과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조금만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이책을 잘 읽어 보았더라면 그 속에 숨겨진 저자의 광기에린 편견과 무서운 야심을 눈치 찾아온 이 경제불황은 또다시 그들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1925년 2만7000명에 불과했던 나치당의 숫자는 1929년 17만8000명으로 불어났고, 히틀러는 이 불만에 찬 군중들을 향해 일자리와 빵을 약속했다. 그리고 1930년에 치루어진 총선거에서 나치당이 107석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제2정당으로 부상하지 히틀러 자신도 깜짝 놀랐다.1차 대전의 패전으로 프로이센 제국이 무너지는 바람에 급조된 하이마르 공화국의 파국은 바야흐로 눈앞으로 다가오고있었다. 허약한 정부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기에 바쁜 온갓 정파의 자장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고, 나치당은 항상 그 선두에 서있엇다.1932년의 선거에서 히틀러는 대통령에 출마했지만 37%의 특표를 얻음으로써 57%의 지지를 얻은 전임[힌텐브르크]대통령에 밀려 낙선했다. 하지만 그해 7월 최근 5개월 사이에 벌써 세번째로 실시되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230석의 국회의석을 얻어 제1당으로 부상했다.나치당의 갈색 제복을 입은 230명의 국회의원이 당당하게 국회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해르만 괴랑은 다수당의 대표로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국민 인민당]같은 우파정당은 니치당과 연대하지 않고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구 제정시대 이래 줄곧 사회의 기득권 층이었던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들 공동의 정적이었던 공산당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므로, '반공'을 기치로 내건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런 목적에 이용해 먹기에도 더없이 적당한 존재로 보였다.그에 따라 1933년 1월,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형에 의해 수상에 임명되지만, 결과적으로 불때 이 우파 연립정부는 자신들이 공산당 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사나이에게 권력을 쥐어 주었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죽음을 자초하는 치명적인 실수란 사실을 몰랐다. 하여간 정책 수행능력보다는 길거리의 선동과 폭력투생에 훨씬 더 익숙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부랑자는 빈사 직전에 놓인 바이마르공화국의 제2인자가 되었고, 자신들의 두목이 합법적으로 선다.
    인문/어학| 2004.10.26| 7페이지| 1,000원| 조회(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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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아교육] 장애 유아의 유치원 통합교육 현황 및 프로그램 지원 욕구
    장애 유아의 유치원 통합교육 현황 및 프로그램 지원 욕구최근에 들어서면서는 지금까지 많이 사용해 온 주류화의 개념보다는 포함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통합교육을 장애 아동과 일반 아동의 두 개의 분리된 집단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서로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함으로써 통합 교육의 개념이 함께 교육한다는 개념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장애 유아와의 통합 교육이라고 하면 그냥 한반에서 같이 수업하는 것이 전부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최근의 통합교육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는 동일한 학급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과 정상적인 아이들의 일과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장애 유아 통합 교육이란 장애를 지닌 유아들이 장애를 지니지 않은 또래들과 함께 유치원이나 보육 시설 등의 기관에서 교육받는 것이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동일한 소속감을 지니고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으며 동등한 선택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미국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통합이 되어 50%이상이 통합 교육 현장에 속해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주류화의 개념이 우선적이며 미국에 비해 완전 통합에 배치된 유아들은 전체 특수 교육 수혜자중 6.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미국보다 더 나은 통합이 되어 장애아들도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장애 유아 교육에 있어서 우선적인 교육의 형태로 변하려면 재정 확보의 어려움, 변화에 대한 저항, 유아교육과 특수 교육간의 서로 다른 교육적 가치관,관련 전문가들의 책임의식 형성, 일반유아교육과 유아특수 교육 간의 교육과정 운영상의 상의 등의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할것이다. 하루 빨리 우선적인 교육이 형태로 바뀌려면 이런 문제점들 해결해야한다고 한다.이 연구에서는 262개의 기관을 대상으로하여 질문지를 이용하여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258개의 유치원들 중 34.1%인 88개의 유치원 만이 운영 지침이 있는 것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지침 있는 경우나 없는 경우 많은 유치원 들이 유치원에서 원하는 조건에 부합가는 경우에 특수 아동을 허용한다고 했으며 50%에 가까운 유치원들이 입학은 허가하지만 가능하면 입학 하지 않기는 바란다고 하였다. 장애 유아 입학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장애 유아 교육 여건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는 일반 유아 부모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 결과를 고려한다면 통합교육의 여건 조성을 위해서는 프로그램 운영상의 지원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인식 전환이나 교사 연수 등의 다각도의 노력이 포함되어야함을 시사한다.통합 학교의 경우 장애 유아를 위한 보조 인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유치원 측에서 고용한 보조인력이라고 한다 대부분 그 사람들은 장애 유아 옆에 항상 있으면서 활동 참여 보조나 장애 유아의 문제행동에 대처를 한다고한다. 여름 방학에 실습을 할때 한 아이가 있었는데 성격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아이역시 항상 옆에 누군가가 붙어 있어야 사고를 줄일수가 있었다.유치원에서 장애 유아를 교육하면서 장애 유아를 교육하는 구체적인 교수방법을 모르겠다고했다고한다. 또, 장애 유아들로 인해서 학급 운영이 방해 받는다라고 했다. 나도 아마 이 특수아 교육이라는 수업을 듣지 않고 유치원 교사가 되었더라면 이런 경우 정말 이지 많은 고민을 했을것이라고 생각이된다. 앞으로도 이런 특수아를 위한 수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합 교육을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장애 유아 통합교육에 대한 앞으로의 방침을 조사한 결과통합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시할 방침이라는 대답과 함께 당분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도 대다수 나왔다. 당분간 실시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시설, 전공 교사 등 특수교육적 여건의 부재와 교사 인력 및 장애 유아 교수 능력 부족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과연 이런 이유에서 실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가 이런 여건이 잘 마련 되어 있지 않아 통합교육이 어렵다는 것은 공감이 간다.장애 유아 통합교육을 위해서는 장애 유아 교육을 위한 통합 교육 전문가의 지원과 장애 유아 교육을 위한 교사 연수 등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였으며 필요로 하는 전문가 지원의 형태로는 유치원내 특수 교사의 전담 배치가 지원 됐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많았다.
    교육학| 2004.10.15| 2페이지| 1,000원| 조회(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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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 음식물쓰레기에 관하여..
    음식물 쓰레기 무엇이 문제인가?1. 음식물 쓰레기란...가정이나 음식점에서 버리는 음식물 찌꺼기, 식품의 판매?유통과정에서 버려지는 음식물, 가정과 식당 등 조리과정 중에 식품을 다듬으면서 버리는 쓰레기, 먹고 남긴 음식물 찌꺼기, 보관했다가 유통기간 경과로 그냥 버리는 식품 쓰레기 등을 말한다.농?축?수산물 도매시장 등에서는 판매와 수송과정에서 먹을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합니다. 가정, 음식점 등에서 구입한 식품의 훼손된 부분을 다듬을 때 먹을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하며, 먹고 남아 있는 음식물 찌꺼기 등도 발생합니다. 식품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유통기간이 지나거나 보관 부주의로 변질된 식품 폐기물이 발생합니다.2. 음식물 쓰레기 얼마나 발생할까?하루에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1만 1,237톤, 1년에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약 410만여 톤으로 8톤 트럭 1,400여 대에 달합니다. 우리나라 생활폐기물 발생은 1995년 쓰레기종량제 도입 초반기에는 크게 감소하였으나 최근에는 다시 조금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였으나 그 감소 추세가 점점 둔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생활폐기물 중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23%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이는 10%에 불과한 미국에 비하면 무척 많은 양입니다.그동안 생활쓰레기 발생량은 매년 증가했지만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이 줄어든 것은 음식물 쓰레기 분리배출지역 확대, 감량의무사업장 확대, 국민들의 음식문화개선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3. 어디서 어떤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나?음식물 쓰레기는 가정에서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와 음식점, 단체급식소, 농수산물유통시장 등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발생 실태를 배출원별로 보면 일반가정에서 53%, 음식점·단체급식소·농수산물유통시장 등에서 47%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인당 발생량으로 보면 음식점에서 1인당 2.3㎏/일이 발생하여 가정의 1인당 0.3㎏/일의 약 8배나 됩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의 감소 추세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새로운 정책개발과 국민들의 식생활개선을 위한 노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배출원별로는 외식문화와 유통산업의 발전과 함께 가정보다는 음식점이나 유통업소에서 발생하는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가정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가정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는 원인을 조사한 결과 39.2%가 야채를 집에서 다듬기 때문, 24.7%가 보관 중 상해서, 23.7%가 실제 먹는 양보다 많이 차리는 습관 때문, 11.3%가 포장단위가 크기 때문이라고 조사되었습니다. 음식을 취급하는 단계별로 보면 음식 준비 단계에서 버려지는 부분이 54.6%, 조리 후 남은 음식으로 버려지는 부분이 45.4%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에서 음식 준비 단계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는 과도한 상차림을 자제하고 냉장고에서 버려지는 양을 줄이기 위한 실천을 해야 합니다.음식점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음식점의 음식물 쓰레기 발생원인을 보면 음식점에서는 음식업주의 70% 가량이 소비자들이 푸짐한 상차림을 선호하고 적정량 이상으로 주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반면, 소비자들은 52% 가량은 음식점에서 제공하는 양이 많기 때문이라고 조사되었습니다. 또 음식을 취급하는 단계별로 음식물 쓰레기 구성비율을 조사한 결과 업종별로 약간 차이는 있으나 조리 이후에 발생하는 양이 6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조리 후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조리에 들어간 정성과 돈이 버려질 뿐만 아니라 이 쓰레기들은 염분, 기름기 등이 많아 처리하는 데에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음식점주와 소비자가 각각 상대방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고 있어 음식점주와 소비자 모두가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실천수칙이 필요합니다.단체급식소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한편 단체급식소에서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을 줄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급식 인원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통 1인당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은 가정이나 음식점보다는 낮지만 음식 준비 쓰레기의 양을 줄이기 위한 방법과 급식인원을 정확히 예측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에 환경부에서는 가정, 음식점, 급식소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생활실천수칙을 만들었습니다. 또 음식점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감량하기 위하여 음식업 단체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자율적 협약을 추진했습니다. 모범음식점, 환경사랑음식점, 관광식당 등 음식점을 대상으로 한 지정제도를 통합하여 모범환경음식점을 지정하여 운영하고 그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또 농산물의 규격 출하를 유도하여 유통·조리단계에서 발생하는 농산물 쓰레기 발생을 저감하고자 도매시장에 쓰레기 유발 부담금제의 도입을 확대 실시하고 식품의 적정 포장 단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4. 발생한 음식물 쓰레기 어떻게 처리할까?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는 재활용하거나 소각처리 등 중간처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매립장에 매립됩니다. 음식물 쓰레기의 매립 처리를 위해서는 매립시설 부지 확보와 사후 관리에 많은 비용이 소요될 뿐 아니라 소각할 경우에는 불완전 연소로 각종 유해물질이 배출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우선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이미 발생한 쓰레기는 재활용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우리나라의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률은 97년도 9.8%에서 2000년도 45.1%, 2001년도 56.8%로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5. 우리나라의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현황은?우리 나라의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률은 분리배출 지역의 확대, 자원화시설의 확충, 재활용 제품의 품질관리 강화 등으로 2000년 말 45.1%에서 2001년 말 기준 56.8%로 크게 증가했습니다.재활용을 위해 분리 배출된 음식물 쓰레기는 보통 선별, 파쇄, 가열 처리 등을 한 후 필요한 영양분을 첨가하여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거나 톱밥, 축분 등과 혼합하여 발효시켜 퇴비로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혐기성 소화로 메탄가스를 생산하여 연료로 재활용하는 등 음식물 쓰레기를 재활용하로 확충하여 1일 재활용량이 2000년 5,200톤에서 2001년 6,370톤으로 늘었고 음식물 쓰레기 분리배출지역도 2000년 말 770만 가구에서 2001년 950만 가구로 확대되어 전체 가구의 60.2%가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여 배출하고 있습니다.또 사료관리법령을 개정하여 사료화 시설의 제조업등록 및 사료 안전관리인 고용의무화 추진, 사료화 시설의 가열처리온도 기준 강화 등 자원화 제품의 품질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사료와 퇴비등 재활용 제품의 유통 활성화를 위해 재활용 제품 공공기관 우선 구매 품목으로 지정하는 한편, GR(Good Recycling) 인증규격을 제정하였습니다. 앞으로 기존의 퇴비와 사료 중심의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방법을 연료화 등으로 다양화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6. 음식물 쓰레기 무엇이 문제인가?음식물 쓰레기는 귀중한 식량자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소각이나 매립의 방법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환경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1만 1,237톤으로 8톤 대형 트럭 1,400대 분에 이릅니다.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재활용은 우리 자녀에게 물려 줄 깨끗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① 경제적 측면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서 2001년 수행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4조 7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또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연간 4천억 원의 예산을 사용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농축수산물 수입 액수(약 9조 5천 억,1999년 기준)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연간 자동차 수출액에 맞먹고 상암동 축구장을 70개 이상 지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특히, 14조 7천억 원 중 음식점 등 외식부문에서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제적 손실가치가 8조 4천억 원으로 57.4%에 달합니다. 앞으로 외식산업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을 예상할 때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외식 부문에서 더욱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으로 결식아동이 16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따라서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② 환경적 측면2001년 현재 생활쓰레기 매립시설은 242개가 운영되고 있으며 면적은 약 28㎢로 여의도 면적의 10배에 해당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하여 생활폐기물을 매립하기 위한 이와 같은 매립시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부지확보는 물론 매립되는 쓰레기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고 빗물이나 지하수가 유입되지 않게 관리하여야 하는 등 운영에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음식물 쓰레기는 80% 이상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쉽게 부패되는 유기성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음식물 쓰레기를 매립하면 질소와 유황 화합물에 의한 악취 발생과 파리, 모기 등의 해충번식을 유발할 수 있으며 쓰레기가 썩은 더러운 물인 고농도 침출수가 발생하여 이에 대한 사후 처리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것도 문제입니다.1800년대부터 쓰레기 발생량이 급격히 증가하고 매립지가 부족하게 되자 쓰레기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소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각으로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재와 열, 화학오염물과 악취를 발생시킵니다.음식물 쓰레기를 소각 처리하면 음식물 쓰레기 자체의 낮은 열량과 많은 수분 함량으로 소각효율이 떨어지고 이에 따른 불완전 연소로 각종 유해물질을 배출할 가능성이 높아 오히려 2차적인 환경오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7. 음식물 쓰레기 감량 및 자원화 정책음식물 쓰레기를 줄여야 하는 이유는 발생한 음식물 쓰레기를 매립·소각 처리하는 과정에서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또 귀중한 식량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입니다.우리나라 전체 생활 쓰레기 발생량 중 음식물 쓰레기가 23%(2001년 기준)를 차지하고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되는 식량자원이 15조 원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발생량 자체를 원천적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줄이는 만큼 경제적으로 이익일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도 줄
    자연과학| 2004.05.27| 7페이지| 1,000원| 조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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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형물(실험) 평가A좋아요
    Solid 고형물Ⅰ. 실험 목적(Objective)1.1 정의(Definition)수중의 고형물에는 입자상으로 현탁되어 있는 고형물과 용액으로 되어있는 용존 고형물이 있다. 부유물질은 이 중에서 수중에 현탁되어 있는 입자상의 고형물을 말하며 원수나 폐수의 오염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다.보통 103~105℃에서 건조할 때 증발 잔류물(residue upon eaporation at 103~105℃)로 남는 물질을 말한다.1.2 목적(Objective)물속에 녹아있는 Solids의 형태를 파악하고 각 sample을 비교, 분석해 보자1.3 이론(Theory)액체 물질 속에 들어 있는 물을 제외한 모든 물질이 고형물질로 분류된다.고형물은 음용수를 비롯한 각종 용수, 가정하구, 공장폐수 및 슬러지내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을 제외한 모든 물질을 말한다. 음용수에 다량의 고형물(특히 용존 고형물)이 함유되어 있는 경우 맛을 내고, 심미적인 불쾌감을 유발하며, 무기광물질이 많은 물은 공업용수로 부적당하게 되는데 우리 나라의 음용수 기준은 총 고형물질이 500㎎/ℓ가 넘지 않도록 되어 있다.한편 오염된 물에서의 고형물 자료는 오염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특히 부유물질이 높은 물은 외관상 좋지 못하며 처리장 운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하수처리장이나 폐수처리장 등에서는 부유물질을 설계나 운전시 중요한 인자로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부유물질은 처리효율을 나타나는 지표로 방류수 기준항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 하수처리장의 부유물질 방류수 수질기준은 20㎎/ℓ이다. 고형물의 분석에서 다루게 되는 물질들은 매우 다양한 무기물과 유기물질들이 존재하므로, 고형물질실험은 성질상 경험적이게 되며, 분석과정이 비교적 단순하다. 대부분의 분석이 무게 분석법(gravimetric method)에 의해 이루어지며, 침강성 고형물(settleable solid)의 측정과 비전도율(specific conductance)을 측정하여 계산해 내는 용존 고형물만은 예외이다. 고형물에 대한 분석에서의 주요 문제들은 각종 고형물들, 즉 예를 들면 용존 고형물, 부유물질(suspended solid), 휘발성 고형물(volatile solid) 및 강열 잔류고형물(fixed solid)등의 양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한 각 분석법들과 관련된 것이다.이번 실험은 음용수를 비롯하여 오염된 물, 가정?공장?축산페수 및 처리공정에서 생성되는 슬러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액체와 반액체 물질속에 들어있는 고형물질을 측정하는 실험이다.◎ Water = H2O + Solids(1)존재형태ⅰ 부유 물질 : SS(Suspened Solids)0.1㎛정도의 공극을 갖고 있는 여과지로 여과시켰을 때, 여과되지 않고 남아 있는 고형물로 탁도(Turbidity)를 유발시키고 유기물과 무기물이 모두 포함된다.ⅱ 용존 물질 : DS(Dissolved Solids)부유 물질을 제외한 나머지를 일컫는다.* 측정 원리미리 무게를 단 유리섬유 여과지(GF/C)를 여과기에 부착하여 일정량의 시료를 여과시킨 다음 항량으로 건조하여 무게를 달아 여과 전후의 유리 섬유의 여과지의 무게차를 산출(중량법)하여 부유물질의 양을 구한다.* Filter (여과시 걸리면 SS, 통과하면 DS)1) Glass fiber filter(유리섬유) : 입경의 크기가 Membrane보다일정치 않음. 가장 많이 사용함.고온실험에 사용함→ water, wastewater에 사용2) Membrane filter(막여과지) : 정확한 측정을 위해 사용, 고온에 약함. Texture 고름, poresize 고르고 일정(2)열적인 성질ⅰ VS (Volatile Solids) : 타서 날아가는 것 (휘발성 고형물)총 고형물중의 휘발성 고형성분은 유기물이라고도 불리며, 이것은 550℃로 가열할 때 휘발하는 고형물을 말한다.※ 의의 : 휘발성 고형물 실험은 총고형물 중의 몇 %가 유기성이고 잠열에 의해 분해시킬 수 잇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실험이다. 염기성 소화와 포기에 있어서의 유기물 부하를 구하는데도 쓰인다.ⅱ FS (Fixed Solids) : 재가되어 남는 것 (강열잔류 고형물)휘발성 고형물을 제외한 나머지를 일컫는다.* 측정원리증발잔유물 접시를 550℃에서 15-20분간 가열하여 함량으로 하여 무게를 달아 잠열 감량을 구해서 휘발성 물질의 양을 구한다.◎ 고형물 성분간의 관계TS = VS + FS∥ ∥ ∥TSS = VSS + FSS+ + +TDS = VDS + FDSTS : Total Solids (총고형물, 증발잔류물)VS : Volatile Solids(휘발성고형물)FS : Fixed Solids(강열잔류고형물)SS : Suspended Solids(부유물질)DS : Dissolved Solids(용존고형물)VSS : Volatile Susperded Solids(휘발성부유물질)VDS : Volatile Dissolved Solids(휘발성용존물질)FSS : Fixed Suspended Solids(강열잔류부유물질)FDS : Fixed Dissolved Solids(강열잔류용존물질)앞에서 사용한 TS를 550℃에서 15-20분간 유지* Filter에 걸린 것 : SS* Filter에 통과된 것 : DS* drying oven에서 103-105℃에서 1시간 정도 건조시킨 후 무게를잰다. → SS* 550℃화로에서 10-30분 동안 태운다. 남아있는 것이 → FSS* 음용수 수질기준 : 증발 잔류물 → 500㎎/ℓ"20 - 100㎎"* TSS는 거의 없고 대부분 TDS가 높다.* hardness가 높으면 FSS가 높다.*TDS가 높으면 수중이온 성분이 많으므로 um(ionic strength) 높으면↔ r는 1보다 작아진다.* 항량의 정의‘항량으로 될 때까지 건조한다.’ 또는 ‘항량으로 될 때까지 가열한다.’라 함은 같은 조건에서 1시간 더 건조하거나 또는 가열 할 때 전후 차가 g당 0.3㎎이하일 때를 말한다.* “정확히 단다”라는 함은 규정된 양의 검체를 분석용 저울로 0.1㎎까지 다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 취하여”라 하는 것은 규정한 양의 검체 또는 시액을 홀피펫으로 눈금까지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약”이라 함은 기재된 양에 대하여 ±10%이상의 차가 있어서는 안된다.Ⅱ. 실험 방법(Experimental Process)2.1 실험 원리미리 무게를 단 유리섬유여지(GF/C)를 여과기에 부착하여 일정량 시료를 여과시킨 다음 항량으로 건조하여 무게를 달아 여과전후의 유리섬유 여지의 무게차를 산출하여 부유물질의 양을 구하는 방법. 정량범위 : 5㎎이상2.2 실험 기자재 및 시료?graduated cylinder (100㎖) ?beaker (1000㎖)?Drying Oven (103~105℃) ?Vacuum filtration apparatus?Washing bottle ?Chemical balance?Muffle furnace (550℃) ?메스 플라스크 ?피펫?Whatman GF/C glassfiber filter paper (47㎜ diameter)?Dessicator (dry keeper)?은박 접시?핀셋, 집게?폐수 (50㎖)2.3 실험 과정♣ SS (부유물질)① 유리섬유여지(GF/C)를 105~110℃의 건조기 안에서 2시간 건조시킨다.② 꺼내어 황산데시케이터에 넣어 방냉한다.③ 건조한 GF/C를 정밀하게 무게를 측정한 다음 여과기에 부착시킨 후 소량의 증류수로 정착 시킨다.④ 시료 적당량을 여과기에 주입하면서 흡인여과한다.⑤ 여과기의 기벽과 여지상의 잔류물을 증류수로 수회 씻어준다.⑥ 유리섬유여지를 조심스럽게 핀센트로 꺼내어서 은박지에 주의하면서 놓는다.⑦ 이 유리섬유여지를 105~110℃의 건조기 안에서 2시간 건조시킨다.⑧ 꺼내어 황산데시케이터에 넣어 방냉한다.⑨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한다.⑩ 일차 무게 측정한 유리섬유여지를 전기화로(550±50℃)에 넣고 15분동안 가열한후 다시 데시케이터에서 방냉후 유리섬유여지의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한다.*부유물질(Suspended Solids)여과 전후의 유리섬유 여지 무게의 차를 구하여 부유물질의 양으로 한다.부유물질 = (b-a)×1000/Va : 시료 여과전의 유리섬유 여지무게(㎎)b : 시료 여과후의 유리섬유 여지무게(㎎)V : 시료 양(㎖)[유의 사항]? 부유물질 정량 : 2mm체를 통과한 수중의 불용성현탁입자를 측정의 대상으로 한다.? 시료량은 건조후의 부유물질이 5mg이상 되도록 통상 시료는 200ml정도로 한다.
    공학/기술| 2003.03.16| 6페이지| 1,000원| 조회(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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