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공학이란?-산업 시스템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조화롭게 지휘하고 조절하는 방법에 대한 학문산업공학의 목표-급변하는 기술환경 하에서 현재보다 나은 방법으로 일을 수행하고 시스템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개선하는 것.ERP와 SCM-SCM은 ERP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SCM은 업무의 흐름으로 관리하려는 관리 시스템으로 ERP에 지능 부여.-차이점 : SCM은 단순히 데이터를 처리하는 전사적 자원관리(ERP)에 지능을 부여하는것과 같다.-ERP의 모듈에 SCM 기능이 부문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RP는 기업의 기간업무인 회게, 생산, 영업 등의 프로세스 및 데이터 처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SCM은 솔루션이 지녀야할 다양한 시뮬FP이션 프로그램이나, 물류에 관련된 복잡한, 정보처리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이있다. 고로 SCM과 ERP는 서로 보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ERP-전사적 자원관리, 기업의 기간업무 즉 회계, 인사, 재무를 포함한 구매, 생산, 물류 등을 통합 관리해주는 SW시스템이다.-이미 개발된 패키지SW를 사다가 사용함으로 설치비와 시간이 절약되고 신기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할수 있다.-ERP패키지 : ERP실현에 필요한 기능을 구비한 SW를 통합한 패키지-자체 개발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패키지를 구입해 조정하는 것이 보편화됨-대다수의 ERP패키지들이 고가이고, 사용하기 어려우며, 운용 유지에 많은 인력과 투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패키지 개발 필요.-기대효과 : 기업환경의 변화에 신속히 대처, 고객 만족의 향상, 외부 시스템과 통합 용이,신뢰성확보, 수준높은 처리량, 관리 중복배제, 업무능률향상-단점 : 일본의 상거래 습관에 대한 대응의 지연, 로컬 지원의 부족, 내용의 이해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교육체제의 미정비, 컨설턴트 부족, 리엔지니어링 방법의 확립, 버전업에 대한 대응SCM-기업내 또는 기업 간의 다양한 사업활동의 프로세스와 부문간, 부서간에 존재하는 벽을 넘어서 수주에서부터 고객 납품에 이르기까지 상품 공급의 흐름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는것-제품생산을 위한 프로세스를 부품조달에서 생산계획, 납품, 재고관리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관리 솔루션. 전체를 보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특징.-최근에는 제조단계 외부의 가치사슬이나, 공급체인관리를 더 중요하게 인식하게 되는 경향-SCM시스템의 표준화 요구. 참여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정보를 공유함으로서, 공급망 전체에서 SCM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특징 : Supply Chain 전체를 하나의 실체로 간주. 전체 원가 및 시장점유율에 심대한 영향-성공사례 : 델 컴퓨터 (부품공급 회사와 고객기업, 운송 업체 등이 하나의 몸체로 움직이는 체제를 유지해 가는 것. Supply Chain의 성공 요인으로 작용.-구축효과 : 재고감소, 업무절차의 간소화, 업무처리의 시간단축, 부가가치가 없는 작업 제거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필요성 : 부가가치의 60∼70%가 제조과정 외부의 공급체인 상에서 발생한다.6시그마-과거 품질관리 기법이 대량 생산 시대에 부합하는 공장중심의 운동이었다면 6시그마는 정보화 사회에 알맞는 21세기형 전 방위 경영혁신 운동을 요약할 수 있다.-품질수준을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문제해결 과정과 전문가 양성 등의 효율적인 품질문화를 조성, 품질혁신과 고객 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전사적으로 실행하는 21세기형 기업경영 전략-제품의 설계, 제조 및 서비스의 모든 총체적 활동을 최적의 관리 상태로 유지해 높은 품질을 갖는 제품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동향 : 대기업들이 6시그마를 앞다퉈 도입하며, 이를 협력업체로 전파하고 있다.-불량이 일어날 수 있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기법.-TOP-DOWN방식을 취함, 모든 프로세스를 대상으로 함. 전체 최적화. 측정 중요시-DMAIC문제해결기법 사용정의,측정,분석,개선,관리(표준화,통계적 공정관리)-벨트제도 : 6시그마 추진과정중의 핵심역할을 하는 프로젝트의 리더나 요원들을 말한다.모든 임직원의 참여를 유도하고, 과학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들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승급체계. ( 챔피언, 마스터블랙, 블랙, 그린 벨트등)BPR-기업 경영 내용이나 경영 과정 전반을 분석하여 경영 목표 달성에 가장 적합하도록 재설계하고, 그 설계에 따라 기업형태, 사업내용, 조직, 사업분야 등을 재구성 하는 것.-어느 한 부분만이 아닌 기업 전체를 대상으로함.-목표 : 업무방식의 일대 혁신을 꾀함으로써, 기업의 효율을 극대화 시킨다.-특징 : 결과 지향적으로 설계, 데이터는 처음 발생했을 때만 입력, 일이 수행되는 곳에 결정권 부여, 업무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필요성 :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으로 인한 경쟁 심화로 인한 신속한 변화 요구, 경영우위를 능동적으로 유지, 조직의 복잡성 증대와 효율성 저하에 대한 대처-ERP가 BPR과정이 성공적으로 되도록 하는데 핵심적인 수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BPR에 결여되어 있었던 구현 기능을 실질적으로 제공기존BPR변화정도점진적근본적시작점기존없음변화횟수한번 계속적한번접근방법bottom-uptop-down범위좁다(기능별)넓다.위험보통높다수단통계분석자료정보기술-성공요소 : 리더쉽, 공감대형성, 성공요인과 연계, 프로세스 재설계의 폭과 깊이 확정, 고객을 위한 리엔지니어링, 변화관리(변화에의 저항 극복), 변화 이유에 대한 공감획득-기대효과 : 새로운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재설계 함으로써 업무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동싱 증대물류정보 시스템-물류관리의 주요 단게별 요인인 포장, 하역, 보관 및 수송등 각 기능간을 연결시켜 전체적인 물류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토록 하는 정보시스템.-필요성 : 물동량 증가에 대비, 하역작업의 신속화, 보관작업의 효율화, 포장작업의 표준화, 수송활동의 경제화-효과 : 고객 서비스의 향상, 물류비의 절약-기능 : 상거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운송, 보관, 하역, 포장, 유통가공의 제 기능을 현실적으로 실행할 경우에 그 내용을 정확, 신속히 전달하는 기능, 이런 제기능을 통합된 시스템으로 구성하여 전체로서 효율화를 구축하는 기능-단계 : 물류목적의 결정, 예산의 결정, 시스템 개발, 시스템의 대체안의 평가와 선택, 최적의 물류시스템 선택, 물류시스템의 실시, 시스템의 평가와 검토-문제점 : 소프트 웨어산업의 낙후, 전문전산요원의 부족, 소프트웨어의 상품화 미흡생산관리-투입물(인력, 자재, 장비, 자금, 정보)을 산출물(재화, 서비스)로 변환시키는 변환시스템 혹은 생산시스템의 효율적 효과적인 관리를 의미한다.-기업에서 재화 또는 서비스의 생산을 담당하는 생산기능에 관한 의사결정, 즉 생산의사 결정에 관한 연구이다.-기업경영에서 생산 활동의 예측, 관리, 게혹, 통제 등의 체계적 시책을 모두 관리하는 것.-경영의 생산활동을 능률화 하고 생산력을 최고로 발휘시키기 위한 일련의 시책.-목표 :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를 필요한때에 최소의 비용으로 생산하고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생산원가 최소화(재료비, 노무비, 간접경비), 좋은 품질, 납품, 유연성(수요의 질적, 양적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능력): 낮은 원가, 좋은 품질, 신속한 납품, 높은 유연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생산관리의 5요소 (5M): 사람(man), 기계(machine), 재료(material), 방법(method), 자금(money)-최근 동향 : 적시생산(JIT 불필요한 생산요소배제, 필요를 적시에): 종합적 품질경영(TQM 6시그마, 불량률 100ppm>>>1ppm으로): 컴퓨터 관련 정보 기술(제품설계, 제조공정에 영향을 주는 컴퓨터 관련 생산기술): 시간에 의한 경쟁(TBC 제품과 서비스 배달속도, 개발통한 시장에 출하속도)
1) 러시아 혁명의 배경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이었던 크림전쟁(1853∼56)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군사적 후진성이 드러났으며, 1861년에는 농노해방을 단행하였다. 농노해방은 러시아의 근대화를 의미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을 자극했고,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혹심한 경제공황으로 농민이 신분상으로는 농노 상태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나, 경제적으로는 발전의 모체였던 중산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노동자의 상태도 선진국에 비해 위생시설이 형편없었고, 낡은 기계로 인한 생산량 감소로 임금이 낮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합법적 활동으로 그것을 개선할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노동운동은 과격화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 제정러시아는 잇따른 침략으로 인근 제지역을 병합한 ‘제민족의 감옥’에 불과했으므로, 소수민족의 소요가 광범하게 확대되어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격화했으며, 혹심한 경제공황과 경찰의 탄압은 농민봉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동으로 체제에서 소외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세력의 정부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2) 제1차 러시아 혁명러시아에서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의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고조된 노동자의 반정부운동과 자유주의자의 입헌운동이 러 ·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가풍 신부의 인솔 아래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발포하여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수도의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군대와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포킨호(號)의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동맹 파업은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여 혁명은 고조에 달하였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10일간이나 무장봉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 한편 10월선언은 입헌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세력을 만족시켰고, 10월선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혁명세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도시의 대규모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1906년 5월에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어 러시아 제1차 혁명은 실질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3) 러시아의 2월 혁명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러시아의 군장비와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나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 가축의 징발로 농업은 황폐화되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인한 생필품의 감산, 도시의 식량 ·연료사정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년 여름 카데트(입헌민주당)를 중심으로 ‘진보블럭’이 결성되어 정부의 실정, 전쟁 수행상의 실책에 대해 엄한 비판이 가해졌다. 16년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치안당국마저 혁명의 절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라스푸틴에 심취한 황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전제(專制)를 고집하고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2월 중순부터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지구 사령관 카발로프 장군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3월 8일(러시아 구력 2월 23일) 영하 20 ℃ 의 추위에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시민들에게 식량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카발로프 장군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거부당했으며, 제3일부터는 군부마저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제4일째는 반란병과 노동자가 감옥에서 정치범을 석방하고 관청을 점거하였다.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두마(국회) 지도자들은 12명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 군주제를 살리는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신내각을 구성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결정하였다. 니콜라이 2세도 이를 받아들여, 3월 15일 동생인 미카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양위를 받은 미카엘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3월 15일 구성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2월혁명인데, 1905년의 제1혁명과는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4)러시아의 10월 혁명2월 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임시 정부는 전쟁 계속 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그러던 중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병사·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노농 소비에트 대회와 농민 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 피 착취 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차 례1. 조선통신사란? ( p. 2 )·조선통신사의 개요·조선통신사 요약·조선통신사란?2. 조선통신사 ( p. 3 )·조선통신사와 한.일 문화교류·조선 통신사의 왕래 경로·조선 사절 왕래 일람표·조선통신사 행렬도 해석·조선 통신사가 일본의 문화 발달에 미친 영향3. 마치며 ( p. 5 )·논란·토론·결론4. 참고자료 ( p. 7 )1. 조선통신사란?조선통신사의 개요-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조선통신사 요약-조선 통신사의 파견 동기조선 : 일본의 간청으로일본 : 정치적 권위 수립, 선진 문화 수용-조선 통신사의 활동구성 인물 : 학문, 기술, 예술에 뛰어난 인물인원 수 : 300~500명일본의 대우 : 국빈으로 대접-활동외교사절 :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 유지선진 문화, 문물 전파 : 학문, 문학, 기술조선통신사란?-조선통신사라 하면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일본 바쿠후 쇼군(幕府 將軍)에게 파견하였던 조선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뜻한다. 조선 건국후 태종 1403년(태종3)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정권(足利政權)도 책봉을 받아 조선·중국·일본간에 사대교린의 외교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정책으로 조선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하여 양국의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이때 통신이라는 용어는 외교관계를 가지는 두 나라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모든 사절이 통신사의 명칭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보빙사(報聘使)·회례사(回禮使)·회례관·통신사·통신관·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이들 모두가 조선국왕의 명에 의하여 서계(書契)와 예물을 지참하고 일본에 가서 막부장군을 접견하였고, 형식에 있어서는 막부도 이들을 국왕사로 접대하는 데 차이가 없었다는 그에 준하는 국왕사의 호칭을 써야 한다.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에 편성된 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이 사행은 중도에 정사기 병이나서중지 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1428년(세종 10) 11월에 편성된 뒤 다음해 일본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였던 정사 朴瑞生이하 사절단에 의한 것으로 최초의 통신사라 할 수 있다.2.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와 한.일 문화교류-통신사의 파견이유에 따른 내용으로 성격에 있어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전의 경우,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국왕사는 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콩·목면 특히 綿布를 가져갔다. 이어 일본 禪宗이 크게 부흥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들을 구하여 갔다. 이에 반하여 조선의 사절은 대개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대부분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왜구의 금지 요청과 축소관계 수립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어 일본의 금구책(禁寇策)에 대한 치하 및 犯寇者 처벌, 왜사의 귀환호송, 降倭의 배신에 대한 책유, 일본국왕사신의 보빙, 표류인의 호송에 대한 치사, 국왕·대장군·대마도주 등의 조위 경하 및 예물증여, 상역·어업표류민·피로인·세견선 등의 협의, 국내외정세의 탐사 등이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경우는 우선 임진왜란 직후 일본과의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 수호체결, 피로인 쇄환, 대마번의 견제 및 일본국정 탐색, 막부장군의 습직축하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607·1617·1624년에 파견된 사절단은 통신사라는 칭호 대한 '회답 겸 쇄환사(回答 兼 刷還使)'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이 의미는 일본이 조선에 강화를 요청한 데 대하여 조선은 아직 도쿠카와막부를 정식의 정권 및 대등한 관계의 교린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강화조건으로 제시한 현안문제가 해결된 때까지 과도기적인 조처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형식적이나를 맺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중원을 지배하는 청나라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외교질서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대등외교 수립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국의 정치환경 속에서 통신사의 목적과 서계·예단·여정 등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항례화된 것은 역시 이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신사 펴견의 정례화 이후 그 파견목적은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장군습직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 때마다 다른 목적과 이유를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1643년은 청나라의 압력에 대한 견제와 겸대(兼臺)의 제도 실시 이후 늘어나는 무역량의 축소요구, 일본의 解禁政策과 島原生變에 대한 일본국정의 탐사였다. 1719년은 외교의례 복귀에 대한 조선의 외교방침 전달 및 대마도에서의 조약체결 등 구체적인 양국의 현안문제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대륙정세가 안정되고 양국의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1748년과 1764년은 우호관계 유지를 위하여, 그리고 1811년은 전례가 없었지만 대마도에서의 역지통신(易地通信)을 통하여 형식적인 의례가 되었으며, 이후 정례화된 통신사는 단절되었다. 물론 그 뒤에도 도쿠가와막부에서는 장군이 습직할 때마다 '대판역지통신(大阪易地通信)' 이 결정되었다가 번복되었지만 이미 양국은 통신사 파견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 그 뒤 양국 모두 외교와 내정에 고민하면서 서로가 통신사 파견을 연기하는 사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변화되고, 또 일본도 막부체제가 붕괴된 뒤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자 양국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게 되었다.조선 통신사의 왕래 경로-한양(서울) - 부산 - 쓰시마 섬 - 에도(도쿄){조선 사절 왕래 일람표에도 시대의 조선 사절 왕래 일람표{연도조선일본정사부사종사관임 무총인원1607선조 40慶長 12呂祐吉慶暹丁好寬修好4671617광해군 9元和 3吳允謙朴梓李景稷오사카 평정,日域 통합 축하4281624인조 2寬永 원鄭姜弘重辛啓榮이에미쓰의 쇼군직 계승3001636인조 14寬永 13任金世濂黃戶태평 축하4751643인조8金履喬李勉求-이에나리의 쇼군직 계승336** 출전 : 姜在彦, , 平凡社 選書, 1977, 119쪽조선 통신사 행렬도 해석{-조선 통신사 행렬도를 보면 일본 정부가 조선 통신사들을 호화롭게 영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많은 일본인들이 짐을 들고, 앞서 길을 안내하는 것을 보면, 조선 통신사의 권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일본인의 옷차림, 맨발 벗은 모습은 그들의 문화 수준이 낮다는 것을 짐작 게 하였다.-조선 통신사와 일본인들의 자세를 비교해 보면 누가 도움을 받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예악(禮樂)을 중요시했던 조선시대에는 아악이 새로 정비되고 의례 때 사용되는 음악들이 발달하였다. 일본에 파견한 조선의 외교사절인 조선 통신사 행렬도를 보면, 당시의 통신사들이 위풍당당한 행악대를 앞세우고 행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악대는 붉은 색과 푸른 색을 비롯한 화려하고 강렬한 색의 옷을 입고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징, 바라, 태평소, 북, 나발을 연주하고 있다. 행악대는 당시 일본의 수도인 일본의 에도성에 입성하는 우리 조선 통신사들의 행렬을 한결 화려하고 위엄있게 유지해주었을 것이다.조선 통신사가 일본의 문화 발달에 미친 영향-외교 사절의 왕래로 양국간에 정치적 관계가 밀접하게 되었다.조선 통신사 일행들과 일본의 학자, 문인들 간에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조선의 유학은 일본의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조선의 선진 학문이나 기술을 일본에 전해 주게 되었다.3. 마치며논란조선의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왜곡시킨 식민사관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쇼군이 최고 통치자인 장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대등한 국가 사이에 이루어지는 誠信의 상징으로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했음에도, 통신사는 에도시대 초기부터 朝貢使節 로 둔갑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대한 멸시감과 대립감을 조장한 이 편견은 일본의 율령시대 이래 형성된 조선관에 기초한 것으로, 조공사절관은 일본 내에서 국학이 발전하게 되는 18세기 중엽 이후 대두되었다. 이것이 海防論者왕사절 10회)과 일본이 보낸 총 5000여 회(일본국왕사 61회)의 조선 전기 사절왕래를 도외시하고, 아울러 조선 후기의 통신사를 비롯한 모든 사행의 왕래 및 성격에 대한 검토 없이, 통신사를 조공사절 로 결론지어 말할 수는 없다.조선은 일본의 파견 요청에 따라, 이웃 나라와의 禮的 관계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은 1000여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통신사를 안내하였고, 매일 3000여 명을 동원하여 접대를 준비하는 등, 장군 일대의 성대한 의식 으로 통신사를 맞이하였다. 통신사의 왕래를 더욱 더 필요로 한 것은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일본 국왕사가 오지 않은 것은 조선 측이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豊臣秀吉가 일본 사절의 상경로를 통해 침략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전쟁 도발에 대한 응징책의 일환이었다.상경 금지로 인해 조선 국왕을 알현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은 대마도로 하여금 大差倭를 보내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도록 하였다. 1636년 이후 외교 사행에 관한 제도가 개편된 뒤, 일본의 외교 사행은 대마도에서 전담하여 파견하였고 그 횟수는 총 696회에 달한다. 이를 別差倭라 하며, 그 중 통신사와 장군의 경조사를 담당했던 大差倭는 102회 도항하였다. 반면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행은 통신사 9회, 問慰行(문위행, 일본어 통역관이 대표격인 사행으로 대마도주에게 파견되었음) 54회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의 최고통치자인 쇼군의 즉위를 축하했다는 표면적인 사명에 집착해서, 통신사가 조공 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토론- 조선통신사에 관한 한.일간의 교차된 역사해석으로 인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에 대한 우리들의 의견을 내보기위하여,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보고 느낀점과, 왜의 정부가 조선 통신사에게 호화롭게 대접한 까닭을 같이 토론해보았다.·철희 : 일본인들은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머리를 딴 모양으로 있지만 우리는 선비 옷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 갓을 쓴뒤 점잖게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에 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