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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Ping : 열망하고, 움켜잡고, 유영하라! 평가A좋아요
    Ping : 열망하고, 움켜잡고, 유영하라!(원제 - Ping : A Frog in search of a New Pond)○ 저자소개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Stuart Avery Gold)기업가이자 작가이며, 이매지니어(imagineer).현재 미국에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리퍼블릭 오브 티(The Republic of Tea) 사의 사장이기도 하다. 리퍼블릭 오브 티는 '최고의 차'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을 미션으로 하는 기업으로, 매장을 '대사관'으로 고객을 '친선대사'로 부르며 독특한 경영과 마케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장을 ‘대사관’으로 고객을 ‘친선대사’로 부르며 독특한 경영과 마케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와튼 경영대학원, 뉴스쿨 대학, 파슨스디자인스쿨 등 앞선 커리큘럼을 채택하는 것으로 유명한 대학뿐 아니라, 포춘 500대 기업의 인기 초청 강사이기도 하다.○ 작품소개이 책은 핑이라는 개구리를 소재로 이솝우화와 같이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자기 계발을 위한 지침서다. 작은 연못에 살던 개구리가 물이 말라버리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과정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로 로드무비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되는 많은 장애물과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핑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책속에 담아내고 있다.총알이나 공이 날아가는 모양이나 소리를 뜻하기도 하고, 신호 따위를 날려보낸다는 의미로 쓰이는 핑은 이 책에 등장하는 개구리의 이름이다. 저자는 가상의 핑이 아니 실제 발견된 특이한 종의 개구리를 근거로 한 우화로써 생태학계의 새로운 보고로 화제를 모았던 ‘새로운 개구리 종의 발견’의 기사를 토대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개구리는 녹지대가 무성한 ‘황제의 정원’ 베이징 북서쪽 교외에 위치한 곳에서 발견된 중국 내에서 수세기 동안 최고의 정원으로 원형 그대로 보전된 곳에서 살고 있을만한 가치를 가진 특이한 개구리다.○ 줄거리 / 인상적인 구절점점 물이 말라가는 연못에서 주민들은 다들 그럭저럭 불평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연못의 풍경 속에서 유난히 개구리 한 마리가 불평을 하기 시작한다. 그 개구리는 바로 핑,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꿈을 갖고 핑은 연못을 떠난다.며칠 밤낮을 점프하며 달렸지만 보이는 것은 황량한 풍경과 마주한 것은 나무장막과 철썩 강. 그 과정에서 핑은 그 삶의 멘토인 부엉이를 만나게 되고 부엉이의 인도와 가르침을 얻어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낙원인 ‘황금의 정원’으로 가게된다.1. 믿음의 도약- 가슴뛰는 삶, 남들과 다른 삶을 살려면 우리에겐 두가지 자질이 필요 합니다.첫째는 가장 최상적인 삶(best life)을 살고자 하는 "강열한 열망"입니다.두번째는 그 열망대로 매일매일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힘 즉"결단력"과 자발적인 의지"입니다.- 삶은 내가 의도한 대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2. 현명한 눈- “네가 꿈을 꾸지 않는 한, 꿈은 절대 시작되지 않는단다. 언제나 출발은 바로 ‘지금, 여기’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때와 적당한 곳을 기다리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 하지. 무언가 ‘되기(be)’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do)’ 해.”- 의도적인 삶이란 바로 네가 하는 행동이 곧 너 자신인 상태를 말 한단다. 우연(chance)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choice)에 의해서 살아가는 게 의도적인 삶이란다.- 태도가 곧 성취다. 당신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느냐에 따라 할 수 없던(can't)일도 할 수 있는(can)일이 된다.3. 시작하는 자의 마음- 위험은 기회(opportunity)를 현실(reality)로 바꾸어 준다.- 실수는 극복하면 되지만 나태함은 영혼을 질식시켜버린다. 훗날 네가 실행했던 일보다 실행하지 않았던 일들 때문에 더 많이 후회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라.4. 테스트-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정말 할 수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해 낼거야, 말은 신념을 낳고 신념은 행동을 낳는다. 네 운명을 다스리려면 먼저 네 생각을 다스려야해, 네가 생각하는 것이 곧 네 미래가 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대로 사는 삶,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해도 그 삶을 향한 발걸음 역시 오직 한 번에 한걸음씩 밖에 나아갈 수 없다. 그 발걸음들이 모여 진정한 위대함이 되는 것이다.5. 비전(vison)- 재능은 누구에게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기술이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변화를 네가 죽을 때 까지 따라다닐 친구로 여겨라.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라. 한계를 버려.- 기회란 이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만들어낸 열매다.- 실행이 곧 존재다.(To do is to be ) 네가 행하는 대로 네가 만들어 진다.6. 지금 여기- 의도적인 삶을 사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믿음(belief)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지(will)야, 그 두 가지만 있다면 불가능 한 것이 없다., 길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어. 바람(wind)은 항상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나그네에게 친절한 법이란다.7. 흐름- 행복이란 목적지(destination)가 아니야, 행복은 과정(process)이란다.- 우리가 행복을 기다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행복은 늘 그 자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내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내가 어떤 선물들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에 열정을 품고 있고, 어디로부터 힘이 솟는지, 나는 진정 누구이고, 무엇을 바라는지, 숨김없이 완전히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독후감/창작| 2006.07.05| 4페이지| 1,000원| 조회(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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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 안민가 평가C아쉬워요
    안민가(安民歌)-----------------------------------------------------안민가는 경덕왕 24년 3월 삼짇날 충담사를 맞이하고 그에게 백성을 편안히 다스리기 위한 노래를 지어달라 하여 지어 바치게 된 사뇌가 형식의 노래이다. 그 내용은 임금과 신하와 백성의 관계를 밝히고 나아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치세안민의 방법을 제시한 작품이다.● 원 문{君隱父也臣隱愛賜尸母史也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民是愛尸知古如窟理叱大 生以支所音物生此 惡支治良羅此地 捨遣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國惡支持以支知古如後句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작자 : 충담사* 출전 : 삼국 유사* 연대 : 신라 35대 경덕왕 24년 (765)* 형태 : 향가, 10구체* 성격 : 유교적, 관념적, 교훈적* 주제 : 치국안민의 도를 밝힘* 의의 : 현전하는 향가 중 유일한 유교적 성격의 노래{君은 어비여.臣은 딪힝샬 어힝여.民은 어릴�� 아힝고 힝샬디民은 딪힝 알고다.구믈ㅅ다히 살손 物生이흘 머기 다싶라이 힝흘 빛리곡 어듸 갈뎌홀디나라악 디니지 알고다.아으 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힝다딪나라악 太平 힝니잇다.임금은 아버지요.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머니요.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한다면백성에 대한 애정을 알리로다.꾸물거리며 사는 인생이것을 배불리 먹여서나 다스려이땅을 버리고 어디에 갈것인가 할 때나라를 지닌 혜택을 알리로다.아아, 왕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 것이면나라가 태평합니다.● 배경 설화이 노래는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조에 다음과 같은 유래와 함께 실려 있다.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문루 위에 거동하여 측근들에게 말하였다."누가 능히 길에 나가 훌륭하게 차린 승려를 데리고 올 수 있겠는가."이때 마침 차림새와 거동이 깨끗한 승려 한 사람이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오니 왕이 말하였다."내가 말한 훌륭하게 차린 승려가 아니다."신하들이 다시 찾아보니 어떤 승려 한 사람이 장삼을 입고 벗나무로 만든 통(삼태기라고도 함)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말하였다."네가 누구냐.""충담입니다.""어디서 오는 길인가.""저는 매양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드립니다.오늘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나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연분이 있는가."승려가 이에 차를 다려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안에서 희한한 향기가 코를찔렀다. 왕이 말하였다."내가 일찍이 들으니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그것이 과연 그러하냐.""그렇습니다.""그러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노래를 지어 주시오."승려는 그 자리에서 명을 받들어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왕사로 봉하였으나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창작 동기이 노래는 정치적 위기가 나타났기 때문에 필요했다. 경덕왕 19년에 월명사에게 청해 를 지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했는데, 그 뒤 5년이 지나 경덕왕 24년인 765년이 되자, 경덕왕의 전제왕권을 위태롭게 하는 정치적인 도전이 더욱 가중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오악·삼신의 신들이 자주 대궐의 뜰에 나타난다고만 했지만,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위기는 왕당파가 물러나고 金良相 일파가 등장한 것으로 구체화 되어있다. 이는 경덕왕이 자기에게 거역하는 신하가 생겨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백성의 지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충담사에게 부탁해 를 지었다고 보아야 한다.또한 충담사에게 의 솜씨를 칭찬하고 를 짓게 한 것은 충담사가 화랑을 위해서 노래를 짓는 승려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미륵은 화랑 정신의 상징이고, 는 화랑을 찬양한 노래이다. 화랑의 세력은 경덕왕 때 정계에서 밀려나 있었으므로, 충담사를 매개로 해서 재야세력과 제휴하면 왕권을 위협하는 신하들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사상적 배경충담사가 지은 안민가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 당시의 여러 시대적 특수 상황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그러므로 이 노래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가요가 딛고 서 있나 산문기록의 경위로 보나 안민가는 이른바 다싶놀애 , 즉 치리가 혹은 이국안민가 계통에 속하는 가요이고 또 비록 완전한 자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 하여도 충담사가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을 충간하고 계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지은 노래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안민가 裏面에는 당시 신라 사회가 겪고 당해아만 했던 여러 종류의 복잡한 정치적 고민과 비안민적 요소들이 깔려 있고 또 가사 내부에는 이러한 당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충담사 자신의 경론과 포부가 표현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경덕왕이 귀정문루상에 駕行하여 그 앞을 지나가는 충담사를 불러다가 안민의 대도를 얻으려 한 행위 자체부터가 혼미를 거듭하는 시국을 수습하려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왕의 그러한 뜻을 받들어 충담사는 안민가를 통해 격의 없이 구국의 대방을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다.경덕왕 때의 정치사회 내에는 몇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파벌이란 왕을 따르는 왕당파와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이에 반기를 든 반왕당파, 이상 두 가지 이상의 그룹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성격의 파벌은 왕 16년에 구주를 비롯한 지방군현의 명칭을, 왕 18년 중앙관부의 명칭을 한식으로 고친 것을 계기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한다. 왕이 지방군현과 중앙관부의 명칭을 한식으로 바꾸려 한 의도는 질서가 정연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함으로써 전제주의적 정치체제를 굳히려고 한 데에도 있었고, 이러한 왕의 정책이 귀족들의 반감과 이의를 삼으로 해서 신라의 정치사회는 자연 두 개의 파벌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경덕왕은 중대를 대표하는 전제군주 말기의 인물로서 그의 생각으로는 전제주의적인 중대의 왕통이 자기 다음 대에도 게속 이어지길 것을 바라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전술 한바 두 번에 걸쳐 지방군현과 중앙관부 명칭의 개혁을 단행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이러한 희망과 의도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그것은 경덕왕의 아들인 36대 혜공왕 때에 접어들자 역시 그 역사적 소임을 계승 완수치 못하고 모반한 반대파의 무리에 의하여 피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을 볼 때 경덕왕은 미리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전제주의적인 정치적 요세를 확고히 구축하여 했을 것임은 예측하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왕이 귀문정루상에 가행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를 정치적인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현상을 나름대로 타개해 보자는 마지막 의도에서 찾을 수 있고 평소부터 나라안의 어지러운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왕의 복잡한 심중까지도 미루어 알고 있는 충담사는 이에 구국의 대방을 서슴없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2 경제적 측면안민가 내면에 잠재해 있는 불안정과 혼돈의 요소는 서민의 빈곤한 생활 실태라든가 재변의 각도를 통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전절에서 경덕왕이 귀정문루상에 가행하게 된 동기를 파쟁의 극복을 통한 정국의 안정을 찾고자 한데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안민가의 가사 내용을 일별하면 그런 이유 이외에도 또 다른 동기가 작용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왕을 괴롭혔으리라는 흔적인 역력히 엿보이며,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왕은 재야로부터 구국의 대방을 듣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충담사 또한 아무 구애됨이 없이 노래를 통해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였으리라 관측된다. 산문기록을 보면 충담사에게 왕은 나를 위해 안민가를 지어다오 라고 명을 내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노래를 지어올리라는 왕의 이와 같은 말은 매우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즉 백성을 편안케 할 수 있는 방안이면 무엇이든지 제시해도 좋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든지 에는 전절에서 살펴본바 정사일반에 관한 것도, 또 왕 자신의 군주학에 관한 것도 내포됨은 물론 백성들의 생활에 관한 문제도 의당 내포될 수 있는 것이라고 왕과 충담사 모두가 그렇게 믿었으리라 본다. 안민가는 이처럼 양자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 위에서 빚어진 가요라는 점에 또 다른 특성이 있다.피상다. 통삼의 위업을 완수한지 불과 80년밖에 안 된 때라서 역사적인 삼국통일의 열기가 아직도 지속되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민생의 생활상도 麗 濟의 군사와 싸울 때보다 훨씬 향상되었으리라는 가상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직 가상에 지나지 않을 분 실제로는 백성들의 경제생활의 실태가 곤경에 처해 있어서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음이 사적에 나타나 있다. 계속되는 천재지변으로 농사는 말이 아니었고 민생들의 식생활은 호구조차 힘든 예도 적지 않았다.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형세였으므로 나라의 국기가 제대로 설리 없었고 따라서 정치가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파탄과 위기 그것은 바로 경덕왕 때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다.3 오악삼신의 현신노래 내용을 당시의 역사적인 현실과 접맥시켜서 고찰할 때 안민가의 출현 동기는 앞에서 살핀 바로도 충분히 파악될 수 있다.그러나 산문기록에 의하면 왕 24년에 오악삼산신등이 간혹 현신하여 전정에 모이더니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루상에 가행하여 안민가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왕이 안민가를 얻으려 한 직접적인 동기는 유사에 기록된 오악삼산신 등의 현신에서 구해야 하거니와 추단하는 바 그간의 경위를 더듬어 본다면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파쟁과 군신간의 질서가 파괴, 서민적제생활의 심각성 등이 적체되어서 왕의 심기가 편치 않던 데다가 겹쳐서 상서롭지 못한 산신들의 현신이 있게 되자 이에 왕은 안민의 대방을 얻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지 않았는가 한다. 안민가 출현의 근원 되는 오악삼산신등이 현신하자 왕은 일차적으로 殿庭에 모시고, 그 다음 가요의 마력을 빌어 이 不祥의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 듯하다. 노래 내용에는 오악삼산신 등에 관련한 문맥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二日 現의 변괴를 도솔가로 물리친 경우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민가 가사에서 거론되고 있는 군 신 민 간의 바른 질서의 유지, 민생의 식생활문제 해결 등이 이루어지는 일 자체가 오악삼산신 등의 현신으로 야기된 다.
    인문/어학| 2003.03.31| 7페이지| 1,000원| 조회(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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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연극 '등신과 머저리'
    등신과 머저리------------------------------------일요일 오후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에게는 왠지모를 설레임이 다가왔다. 실로 연극공연을 본게 언제인지 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 설레임은 거의 5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공연장으로 향하는 때문일 것이다.나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 활동을 했던 초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극을 보는데 어려움이나 두려움 같은건 없었다. 대학로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밤 늦게까지 호흡을 맞추고 무대를 만들면서 고생하던 생각이 떠오르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하기 까지했다. 그때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중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정말로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을 맞히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때의 기분은 정말 무대위에 서본 사람만이 느낄수 있고, 공연이 끝난 후 텅빈 객석을 바라보았을 때의 공허한 기분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알수 없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잠겨 대학로에 도착한 후 조금 일찍 공연장에 들어섰다. 공연장에 들어와서 무대를 본 느낌은 소박한 느낌이랄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초라하기 까지했다.100여석 남짓한 객석에 몇평 되지않는 무대, 낮은 천장, 몇 개의 조명이 전부였다. 특이한 것은 무대 양 옆으로 객석이 들어서 있는 것이었다. 공간이 협소한 탓도 있겠지만 과연 저 자리에서 공연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어느덧 공연시간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30여명 정도의 관객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다. 나는 이 연극이 잘 알려져 있고 작품성도 인정받은 작품이라 관객이 어느정도 있을줄 알았는데 휴일날을 감안하면 너무 적어서 연극계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다.연극 등신과 머저리 는 70년대초 세상을 들끊게 했던 희대의 연쇄 살인범 이종대와 문도석에 관한 이야기다. 이 연쇄 살인범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들이 감옥에서 만난 순간부터 범죄를 저지르고 최후에 자살하는 순간까지의 범죄 행적을 수사극 형식으로 추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이 작품은 희대의 살인마로 불리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었다. 물론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흉악범이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머물면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이 예상했던 비극적 결말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해 보고 그들을 그러한 상황으로 내몰았던 그 시대 사회현실을 생각해 보면서 그들이 처량하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마 이종대의 대사중에 세상에는 우리같은 강도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보다 더한 합법적인 강도들이 더 많다. 는 대사는 마음에 와 닿았다.연극을 보는 동안 그들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 살인강도 이종대가 마침내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장면에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남편을 끝까지 사랑해주는 황은경이 죽음의 순간 앞에서 여보... 사랑해요... 라고 외치는 장면은 아직까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연극을 보면서 소극장만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아주 가까워서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볼수 있었고 배우들이 내뿜는 기를 직접 느끼고 배우들과 같이 하나되어 호흡하면서 작품에 빠져들 수 있었다.
    예체능| 2002.12.24| 2페이지| 1,000원| 조회(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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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 고갱
    고갱-未開한 이야기-----------------------------------------------폴 고갱 (1848~1903)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아버지는 프랑스인이며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이었다.고갱이 태어났던 시기에는 프랑스 정국의 변화로 그의 가족은 멀리 페루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배 위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6년간의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고갱은 17세 때 선원이 되어 24살까지 해상 생활을 계속하다가 보불 전쟁이 끝난 뒤인 1871년에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주식거래소에 고용되었고 1873년에는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의 작품들은 들라크르와나 쿠르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7∼28세부터는 인상파 화가 피사로와 사귀면서 그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또 인상파 그룹에도 참여하면서 새로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35세때(1883년) 고갱은 마침내 직장을 버리고 화가로서 작품 제작에 몰두할 마음의 각오를 굳혔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 ·판화 ·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타이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 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이 작품은 고갱이 산업문명의 발달로 점차 인간의 순수성을 잊어버리는 문명세계를 벗어나 타히티 섬의 원시 세계에서 자연이 제공하는 신비로움, 인간의 원초적이고 순수한 모습을 그린 그림중의 하나이다.
    예체능| 2002.12.24| 2페이지| 1,000원| 조회(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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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 과거청산 평가A좋아요
    과 거 청 산-------------------------------------------한·일간 국교가 재계된지 37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한·일 관계에서 과거청산은 항상 걸림돌이 되어온 문제였다. 또한 한국의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부는 항상 일본에 과거청산을 요구하여 왔고, 정상회담이 열릴때마다 빠지지 않는 문제가 과거청산 이었다.이렇듯 한·일간의 과거청산이 광복 이후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양국이 반세기 이전의 문제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아마도 역사적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민족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일 것이다.광복이후 한·일간 과거청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청산 문제가 한·일간 항상 얽혀있었기 때문에 국교재계 이후 어느 정권에서나 과거청산을 하려 하였고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진정으로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 위기만을 모면하려고 했기에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있는 것이다.이렇듯 이웃나라인 한·일 양국은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며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과거의 문제에 얽매여서 가깝고도 먼나라가 되었을까?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안일하고 이중적인 태도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일본은 한·일간 위안부 문제나, 교과서 왜곡 문제등이 불거져 나오면 겉으로는 사과의 입장을 밝히면서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망언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물론 일본사람 중에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사죄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묵고하고 회피하려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일본 국민을 대표하는 총리 및 장관, 의원들이 매번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을 위한 신사참배를 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다음으로 한·일 양국간의 국민적 감정문제를 빼놓을수 없다.우리는 과거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속에서 숱한 고통과 수탈을 당한 민족적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상처가 쉽게 아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몸에 배어있다. 이러한 반일감정은 일본사람을 쪽바리 라고 부르는 용어에서도 쉽게 느낄수 있다. 그리고 한·일전 축구경기를 보더라도 다른나라와 경기할 때와는 다르게 꼭 이겨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특히 기성세대나 일제치하에 살았던 세대일수록 반일감정이 강하게 나타난다.또한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큰소리 치지 못하는 것이다.만약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힘이 있었다면 일본은 오래전에 사죄를 하고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하였을 것이며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등의 망언도 밥먹듯이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정부의 태도를 보면 과거청산에 대한 요구를 하다가도 경제적 위기나 일본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자세를 낮추어 왔다.그러면 이렇듯 양국이 계속해서 우울한 과거의 역사에 얽매여서 감정싸움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고질적인 감정을 털어버리고 화합과 협력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이제는 우리도 반세기 전의 역사적 감정에서 벗어나 일본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또한 안일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고 좀더 적극적으로 과거 청산에 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일은 정부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나 문화,예술단체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일은 누구보다도 우리같은 젊은세대가 주도하고 이끌어 가야할 것이다.얼마전 성공리에 치룬 한·일 월드컵 대회에서 일본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나는 왠지모를 감동을 받았다. 이처럼 이제는 감정싸움을 그치고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며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침략 당했다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두 번다시 군사적 침략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침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힘을 기르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02.12.24| 2페이지| 1,000원| 조회(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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