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글.지은이는 머리글에서 이 책을 구성하며 스스로 세운 원칙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첫째, 불교는 원효의 시대에서는 이미 보편적인 사유체계를 갖는 세계종교였다.둘째, 역사주의의 관점에서 원효를 살핀다.셋째, 거사(居士) 모습의 원효를 그리자.책을 끝까지 읽은 지금이지만 여전히 지은이의 의도를 모르는 “나”이다. 책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요약하는 기회를 빌어 원효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이 글의 구성은 편의상 원저 의 그것을 따라가며 요약 (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제 1부 배경.원효가 태어났고 살아갔던 시대의 신라는 불교가 공인(법흥왕 14년, 527)된지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불교가 공인 된지 100 여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지배층의 이해에 의해 전략적으로 수입된 불교 가 원효의 시대에 와서 그렇게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지은이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우선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을 살피기로 하자.중고기의 신라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골품제와 삼국전쟁의 수행이라는 두 가지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어느 고대사회에도 신분제도는 있었지만 신라의 골품제는 그 전례를 찾아 보기가 힘들 정도로 강력한 신분제도였다. 골품제는 관직의 상한선에서 거주지역에까지 실로 신라 사회의 전영역에 걸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삼국전쟁의 수행과 통일의 과정에 대해 자기희생을 감수한 지배층의 자세를 지은이는 크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가 강해서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가 쇠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신라는 자력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화랑의 활약을 물론 빼놓을 수는 없지만서도 말이다.( 제 2부 생애.원효(617-686)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라 하였다. 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學不從師). 원효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될 것이다.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동굴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동굴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동굴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또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 것은 실계하였기 때문에 속죄의 한 방법으로서였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가항(街巷)에서 대취가무(大醉歌舞)한 것이나, 대안(大安)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大安, 大安"을 외친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대중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다. 이러한 노력으로 종고기에 성행하였던 미륵신앙을 제치고 아미타정토신앙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600년 뒤의 불교사가인 일연은 가난하고 못배운 서민들조차도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외게 되었으니 이는 다 원효의 덕분이라고 추앙하였던 것이다.원효의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요석공주와의 관계이다. 그는 중국유학을 단념하고 경주로 돌아와 떠돌다가 하루는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 하늘을 떠 받들 기둥을 베어 오련만.” 태종이 마침 이 일을 듣고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꾸며 그로 하여금 설총을 낳게 한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재미있는 일이다.( 제 3부 사상.그의 대표적인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諍論)들을 화회(和會)시킨다"(涅槃經宗要)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실생활면에서 염정무이(染淨無二), 진속일여(眞俗一如)를 주장하면서 불교를 생활화하는 불교대중화운동으로 전개된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혜공(惠空), 대안등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 생활화시킴으로써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가항(街港)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無碍)박을 두드리고《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 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一佛乘)에 총습(總濕)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大海중에 일체 중류(衆流)가 돌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곧 상호대립적인 사상과 교외를 모두 융회하여 일불승(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함이다. 또 그의 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지극히 공평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이회(利會)시킨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원효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가장 독창적 저술인 에 이르면 그의 이같은 사상적 면모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불교 교의와 인간의 온갖 다양한 주장들을 없음(空)과 있음(有), 나(人)와 세계(法) 등 열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묶고 화쟁의 논리에 입각하여 그것을 하나 하나 회통(會通)시키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어느 주장을 일방적으로 묵살하지 않는다. 열린 자세로 수용하면서 하나하나 그들을 논리적으로 교통정리 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밝혀나가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원효의 중심사상은 和諍사상 또는 和會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화쟁이란 그의 중심 사상이라기보다는 중심 논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원효의 화쟁은 반드시 회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쟁회통(和諍會通), 즉 화쟁에서 그치지 않고 회통에 이르고 있음이다. 따라서 화쟁보다는 화쟁회통의 준말인 和會가 더욱 정확히 그의 중심논법인 셈이다.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이란 말은 논쟁을 화해시킨다는 정도의 상식적인 용어가 아니다. 여기서의 '諍'이란 '다툼'의 뜻이 아니라 '자기주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쟁(異諍)은 곧 각자의 주장이나 견해 또는 각기 다른 학설을 말함이다. 원효는 인간은 각기 다른 대립적인 이설들을 유통(琉通)·회통(會通)시켜 하나의 큰 진리를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和會의 방법에 있어서, 원효는 모든 異諍에 대해 옳고 그른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개입시키지는 않는다. 오직 최고의다는 그러한 화쟁회통의 논법을 통하여 밝혀진 心性의 세계를 그의 중심사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가 여러 저술들을 통해서 밝혀낸 심성의 세계는 바로 佛心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一心이다. 일심이란 다름아닌 모든 가능성을 감싸고 있는 중생심(衆生心) 그것이다. 중생심 그대로가 곧 진리를 머금고 있는 일심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뜻에 契合하는 일심사상, 그것이 곧 원효의 중심사상인 것이다.원효는 이 일심사상을 화쟁의 논리를 통해 더욱더 심화시켜 간다. 모든 강물들이 바다에 이르러 한 맛이 되듯이 그는 온갖 다양한 주장들을 화회시켜 佛心이며 衆生心이니 一心으로 회통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의 방법이 무애(無碍)의 행위였다.더러움과 깨끗함이 없고 眞과 俗이 둘이 아닌 경지의 삶, 그것은 곧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 자의 무애한 삶의 모습이다. 어떤 사상이나 관습에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하고 행동했던 원효의 걸림없는 삶 또한 바로 이같은 일심사상의 표출이었던 것이다.十門和諍思想十門和諍思想현존하는 고선사(高仙寺) 원효스님 비의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就中十門論者 如來在世己賴圓音 衆生等..........通融聊爲序述 名曰十門和諍論)즉, 여래재세시에는 부처님의 원음에 의지하여 중생들이 바른 가르침을 체득할 수가 있었으나 부처님 열반하신 후 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중론 이설(衆論異說)이 생겨 그 갈피를 잡기가 어려우므로 원효대사가 異諍을 융화하고 衆說을 會釋疏通하고자 십문화쟁론을 저술하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여러 학설들을 열거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가하여 그 문제의 초점에 맞추어 화해하고 있다.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 경론의 교설들을 會釋하고 유통하여 부처님의 참뜻을 바르게 드러나도록 한다. 앞의 것을 異諍和解, 즉 和諍이라 하고 뒤의 경우를 會釋疏通, 곧 회통이라 하는데, 이 화쟁과 회통은 따로 떼어서 쓰는 말이 아니고 함께 써서 和會라고 한다. 그러므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