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서론1. 개성공단 개발 배경Ⅱ.개성공단 사업추진 현황1.개성공단의 의의 및 현황가. 의의나. 사업추진 현황 및 개발방안다. 추진과정라. 시범단지 개발마. 인프라 건설계획바. 정부의 적극적 지원2.개성공단 사업 추진과정에서의 문제점3.기대효과 및 해결과제1. 기대효과2. 개성공단 성공을 위한 과제Ⅲ.개성공단 사업의 향후 전망1.개성공단 전망2. 남북한 경제 규모 확대3. 남북통일에 대한 기여Ⅳ.결론Ⅴ. 참고문헌Ⅰ.서론개성공단 시범단지 가동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개성공단 개발사무소는 2004년 10월 20일 준공식을 가졌으며, 경의선 및 동해선 도로의 개통식과 철도 시범운행이 조만간 있을 예정이다. 시범단지의 운영은 또 본공단을 가동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법제도적 문제와 투자환경의 적합성을 점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개성공단의 실질적 진전을 보여주고 입주기업 중 리빙아트 및 신원은 북측근로자 270여명을 고용해 매일 평균 1200세트의 냄비를 신원은 매일 평균 300여벌의 의류를 생산중이다.) 더욱이 국내 경기침체로 인해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던 중소기업의 활로개척 가능성과 맞물려 개성공단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1. 개성공단 개발 배경먼저 북한이 개성공단을 개발 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인 배경과 경제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 경제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북한이 개성공단에 합의한 것은 경제회복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필요 때문이며 북한은 이미 10여년 가량 가용 자본의 부족으로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였으며 북한은 현재 독자적인 힘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수 없으며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어 자력에 의한 저축이 가능한 지점까지 생산 능력이 확대되어야 경제가 회복 될 수 있다.)정치적인 배경 면에서는, 북한에서 경제위기 이후 배급체계의 혼란과 계획경제의 체제이완, 유민증가 등 사회질서에 대한 혼란이 증가되어 왔으며 북한 정부는 지금까지 경제 위기로 인해 야기된 사회적 질서 이완을 장기적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현실적 문퓨터 등의 도시형 업종을 유치할 계획이다.3단계는 동북아 경제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과 산업설비 분야의 유망업종을 유치한다는 계획아래 3공단 4000만평을 완공하여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남북의 산업구조 고도화와 지식기반 산업의 강화를 위한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현대아산과 토지공사가 시행사로서 수행방식은 북측으로부터 토지를 50년간 임차하여 공업단지로 개발 후 국내외 기업에 분양하고 관리를 하게 되며 사업효과를 조기에 실현 할 수 있고 비용절감 효과가 크며 남북간 상호 의존성 및 집적 효과가 큰 업종을 배치할 계획이다.)기업소득세는 10-14% 수준으로 책정되었고 개성공단의 분양가는 평당 14만 9000원으로 책정되었으며 북한의 노동자들이 받게 되는 최저임금은 57.5 달러이며, 주당 근로시간은 48시간이다.)다. 추진과정개성공단 조성사업의 추진 경과는 다음과 같다. 본 사업은 원래 현대아산과 북한의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 및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사이에 추진키로 합의된 민간차원경협사업으로 시작되었으나 추진 과정에서 남북 당국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당국차원의 경협사업 성격이 가미되었다. 즉, 현대아산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개성공업지구의 개발업자로 지정받고(2002.12.4) 2000만평의 토지이용권을 획득(2002. 12. 23)함으로써 개성공단 조성사업의 총괄적인사업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아산이 자금난 등으로 인해 개성공단 조성사업 독자적 추진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사업권의 일부를 한국토지공사에 이양하게 되었다. 2002년 12월 26일 현대아산은 한국토지공사와 개성공단사업 시행협약서를 체결하고 1단계 사업인 100만평에 대한 자금조달, 설계, 감리, 분양업무 등 실질적인 사업권을 한국토지공사로 이관하는 한편 통일부, 현대아산과한국토지공사를 개성공단 1단계조성 사업 (총 1억 8500만 달러 약2200억원)의 사업자로 승인하게다. 그러나 현대 아산은 개성공단 1단계사업(100만평)의 사업권을 제외한 2.2개) 협력사업 승인‘05.1.26o 개성공업지구 전력 공급 개시05. 3.16o 그린닥터스 개성병원 개원05. 5.10o 주 신원 패션쇼05. 5.26(표)개성공단 사업추진경과자료: 통일부, 2005, 4 개성공단 사업추진 현황.라. 시범단지 개발시범단지의 운영은 개성공단의 실질적 진전을 보여주고 또 본공단을 가동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법제도적 문제와 투자환경의 적합성을 점검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 총 15개의 입주기업 중 11개 기업은 이미 통일부의 협력사업 승인을 받았으며 나머지 4개 기업에 대해서는 반출물자의 심사판정이 완료되는 대로 사업승인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1단계 100만평 부지내 2만8천 평을 15개 기업에 분양했는데 2004년에 리빙아트와 sj테크2개 업체가 준공하였으며, 나머지 13개 업체는 2005년에 본격 가동 될 예정이다.2005년 1월 26일에는 2개 기업(재영솔루텍, 제씨콤)에 대한 사업승인으로 시범단지 협력사업 승인을 마무리 했으며, 지난해에는 13개 기업에 대한 협력승인을 기승인 하였고, 개성공단 1단계 시범단지는 승인 받은 15개 업체가 입주하게 된다.현재 금년 상반기 입주 및 생산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인데 현재 9개 기업이 공장 건축 중이고 상하수도, 도로 포장 등의 구조물 공사의 진행률이 금년 4월까지 89.9% 이다. sj테크, 신원, 삼덕통상, 등은 북측근로자 200여명이 기술 연수중이고 리빙아트 및 신원은 북측근로자 270여명을 고용해 매일 평균 1200세트의 냄비를 신원은 매일 평균 300여벌의 의류를 생산중이다).개성공단 건설계획에 따르면 현대는 총 10억 달러를 투자, 2,000만평(공단부지 800만평, 배후도시 1,200만평) 규모의 산업단지를 단계별로 건설할 계획에 있다. 제1단계로 100만평을 시범공단 지역으로 우선 개발하여 섬유, 신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분야의 기업을 입주시키고, 제2단계에서는 300만평을 2004년까지, 제3단계는 400만평을 2008년까지 각각 개발해 자동차 부품·기계할 계획이다.2,3단계 시범단지의 인프라 건설계획은 1단계 100만평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폐수, 폐기물 용수 등의 내부 기반 시설을 지원할 예정이며 전력, 통신 등의 외부 기반시설도 공장 가동에 차질이 없도록 조기에 공급할 예정이다. 2.3단계 개발 방향은 단기적으로 국내기업 구조조정 촉진과 경쟁력 강화 계기를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며 중장기적으로 수도권과 연계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동북아 지역 분업체계를 형성하며, 서울의 금융, 인천은 물류, 등과 협력체계를 구축하여 개성공단을 수도권과 연계된 산업단지로 개발할 예정)이며, 개성은 제조업, 서울은 금융, 인천은 물류, 경기도 관광기능을 특화 연계할 수 있다.현재 도로(4차선, 통일대교 북단-개성 간 12.1km),는 경의선?동해선 모두 연결구간 공사가 완료되어 ‘04.11부터 인원ㆍ차량ㆍ물자의 원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고 철도는(단선, 문산-개성 간 27.3km) '05.12월 말 완공예정이다. )바. 정부의 적극적 지원1) 지원조직 구성개성공단의 중요성?특수성과 시범단지가 갖는 상징성을 감안하여 정부차원에서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뒷받침할 ‘개성공단사업지원단’을 04.10.5에 출범시키고 공단을 개성 현지에서 종합 관리할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도 ’04.10.20개소했다. 본 지원단은 통일부, 산자부, 건교부 등 8개 부처가 참여, 4개과 28명으로 구성된다.2) 지원 대책정부는 폐수, 폐기물, 용수 등 내부 기반시설에 소용되는 1095억을 국내 공단에 준해 무상지원할 예정으로 있다.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이 국내사 제품과 동일한 대우를 받도록 주요국과 자유무역(FTA)협상과정에서 협의를 벌일 방침이다. 한, 싱가포르 FTA협상에서 개성공단 생산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한기로 합의한 바 있다. 정부는 투자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위해 건축비 기금대출 및 손실보조제도를 실시하고 있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이 북한 측의 정치적 상황 변화로 손실을 볼 경우 20억원 범위 내한 인력의 고용창출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효과들은 궁극적으로 남한의 경기 부양, 생산력 증대 등으로 연결되고 국제 경쟁력의 향상과 수익성 제고에도 기여할 것이다. 개성공단에 건설되는 인프라 건설은 통일 후 북한 지역 투자를 앞당기는 효과를 가지게 됨으로써 향후 통일비용을 절약하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셋째, 개성공단의 건설은 남북관계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양 지역간을 잇는 수송·통신연계체제가 확보되고 이를 유지·관리하기 위한 남북한간의 접촉이 불가피해 질 것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각종 합의와 협정체결이 남북관계를 크게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2) 북한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한편, 북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첫째, 막대한 규모의 실물자산을 무상으로 유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둘째, 노동력의 고용증대를 기할 수 있다.인프라와 공단조성에 따르는 인력의 고용은 물론, 북한 주민들이 기업 내 상시인력으로 일할 수 있어 이에 따른 근로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셋째, 도로·용수 등 인프라시설 사용료도 북한 당국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고, 북한 주민은 공단에서 생산된 생필품을 직접 공급받을 수도 있다.특히 음·식료 가공업체들이 대량생산에 임할 경우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 해소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원·부자재 공급도 북한이 대부분 맡게 됨으로써 이로 인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넷째, 생산물품 수출에 따른 국제거래의 신인도 제고, 해외시장에서의 이미지 개선, 대외투자환경의 개선, 공단인근지역의 발전효과, 생산·관리·경영면에서 남한의 선진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효과를 비롯하여, 기술 인력 양성도 꾀할 수 있다.이상과 같은 효과는 총체적으로 북한 경제 전체를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3) 개성공단의 경제적 효과개성공단은 남북한이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협력 사업으로 경제, 정치, 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델이 될 것이며, 남.
목 차Ⅰ. 서론Ⅱ. 10.26 보궐선거의 과정1. 후보자 분석ㄱ. 대구 동구 을ㄴ. 울산 북구2. 각 지역의 유권자의 정치 성향(투표성향)ㄱ. 대구 동구 을ㄴ. 울산 북구3. 선거운동 전략1) 대구 동구 을한나라당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2) 울산 북구한나라당민주노동당4. 선거결과Ⅲ. 결 론Ⅳ. 참고 사이트Ⅰ. 서론10?26 재선거는 경기 부천원미갑, 광주, 대구 동을, 울산 북구 등 수도권 2곳과 영남 2곳에서 치러졌다. 재적의원 299명 국회의원 가운데 1.3%를 충원하기 위해 치러진 재선거였지만, 여야 지도부는 물론 소속 의원까지 정기국회 일정까지 팽개친 채 대거 유세에 동원됐다. 10, 26 재선거는 금년 들어 두 번째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급진 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까지 참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한나라당의 전승과 열린 우리당의 전패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패배로 나타난 10, 26 재선거의 결과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그것은 지난 17대 총선 이후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점차 드러나고 있는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에 대한 좌절감이다. 개혁과 진보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기대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우선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해 일말의 기대마저 무너져 내리고 이제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희망마저 없어졌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사회에 만연된 경기침체나 사회양극화에 대해 과연 참여정부가 내놓은 성과가 무엇인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은 과연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등에 대해 국민들은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다.Ⅱ. 10.26 보궐선거의 과정1. 후기호1번 이강철 (李康哲)대구 동구 을열린우리당이강철 후보 약력- 1973년 경북대 총학생회 간부- 1973년 11월 유신헌법철폐 시위 주도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징역 15년 선고, 8년간 복역)- 1981년 8월 형집행정지로 석방- 1985년 1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 경북 민통련 사무국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대구 넘쳤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활력이 사라졌고, 두 번이나 연이어 정권창출에 실패했습니다.더 슬픈 것은 이 정권이 나라를 사지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념으로, 빈부로, 지역으로 나라는 분열되고, 국민들은 먹고 살기조차 힘듭니다. 더 거둔 혈세로 높은 자리 더 만들고, 공무원 늘이고, 별 필요없는 일을 벌이면서 이래야 경제가 산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분노가 솟구치고, 대구의 아들로서 자존심이 상해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저는 1998년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제학자였습니다. IMF 때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더니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아 정말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2002년 대선에서 졌습니다. 정말 피눈물을 쏟았습니다.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한나라당의 정권 창출에 모든 것을 걸기로 다시 결심했습니다. 작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단 한순간도 저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잘못은 매섭게 질타했고, 당의 중요한 순간마다 할 말은 했습니다. 올해 1월부터는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일해왔습니다.제가 동을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하자 욕심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지역구 의원직이 탐나서가 아닙니다. 이번 선거가 한나라당 깃발만 꽂는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례대표로 편안히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대구에서 지면 한나라당에겐 최대의 위기일 수 밖에 없고, 우리 손으로 정권을 만드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한나라당 요즘 바짝 정신 차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대구를 위해 무엇을 하나 열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대한민국 제대로 다시 세우기 위해 피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젊습니다. 실력도 있다고 자신합니다. 당을 구하고 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 편안함에 안주하기보다 더 험한 길로 가겠습니다.동구 을을 혁신의 중심으로 만들 정책 전문가!동구 을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구하는 학벌사회 때문이다. 지방대생들은 능력이 뛰어나도 학벌 때문에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다. 서울대를 해체하고 국공립대를 통합하여 특성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내실 있는 무상보육, 무상교육을 실현해야 한다.▲ 부유세 도입부유세의 과세대상으로서 정확히 평가되어야 할 자산은 ① 부동산, ② 주식 및 채권 등 유가증권, ③ 예적금 등의 금융자산으로 나눌 수 있다.민주노동당은 실효성이 있는 자산 평가가 부유세 도입의 기본 전제임을 잘 알고 있으며, 이러한 자산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노력의 결실은 이미 2004년 정기국회에 법안으로 제출된 바 있다.부유세가 도입되면 세정이 복잡해진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조세제도가 정착되고 부동산 및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효과를 가져와 탈세 및 검은 돈에 의한 비리가 근절될 것이다.4) 이명숙 후보동구을자민련생년월일:1950/12/08 (여) 54세약력(주)아름다운여행사 대표효성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자민련 사회ㆍ복지특위 위원장방통대 총학생회 부회장배우자 (유), 자녀(3남2녀)5)조기현 후보동구을무소속약력: 계명대학교 정책대학원 졸업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국민고충처리위원회 상임위원ㄴ. 울산 북구1) 박재택 후보북구열린우리당○ 박재택 후보 약력- 59년 대전신흥초등학교 졸업- 62년 진주중학교 졸업- 65년 부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졸업- 72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73년 서울특별시 새마을 지도과- 81년 총무처 기획관리실 기획담당- 85년 총무처 의정과 정부의전담당- 89년 대통령비서실 지역균형발전기획단 과장- 90년 대전EXPO조직위원회 인력기획부장- 94년 총무처 민원조사1과장 96년 총무처 총무과장- 2000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조사2국장-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설립기획단 행정지원담당 국장- 2002년 행정자치부 정부청사관리소장- 98년-2002년 2002월드컵조직위 자원봉사전문위원회 위원- 98년-현재 공공분야자원봉사 전문- 장애인 일자리 창출과 이동권 확보 노력- 여성회관 건립- 공공서비스 일자리 창출로 노인 일자리 제공3) 정갑득 후보북구민주노동당1958/01/18 (남) 47세약력(주) 현대자동차 금형부 근무대구 농림고등학교 졸업전. 현대자동차 6,8대 노조위원장전. 현대자동차 노조 협의회 10,11대 의장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부위원장/중앙위원현. 울산교육문화생활협동조합 이사장2. 각 지역 유권자의 정치 성향(투표성향)이는 지난 11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와 더피플 가 재선거 지역 유권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전화자동응답시스템 (ARS) 방식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결과다. 조사 결과를 보면, 대구 동을 지역에선 유승민 한나라당 후보가 이강철 열린우리당 후보를 불과 2.8%포인트 차이로 앞서는 등 오차범위 이내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다. 투표에 반드시 참여하겠다는 층에서는 유 후보 43.1%, 이 후보 42.3%로 혼전 양상이 더했다.특히 40대에선 이 후보가 51.4% 대 24.1%로 유 후보를 크게 앞서가고 있고, 50대에선 두 후보 모두 37.6%의 지지율을 보이는 등 40~50대에서 이 후보의 선전이 눈에 띈다. 이는 지역발전에 민감한 이들 연령층에서 이 후보의 인물론과 지역개발론이 일정한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 지역의 한나라당 지지율은 54.6%로, 열린우리당 지지율 22.4%보다 월등히 높다. 선거가 정당대결 구도로 치러질 경우 지지후보가 없다고 밝힌 20.4%의 유동층이 한나라당 유 후보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울산 북구에서는 일반적인 예측과 달리 윤두환 한나라당 후보가 정갑득 민주노동당 후보를 13.8%포인트 차이로 상당히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이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여론조사 직전인 지난 10일 밤에야 결정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층에서 정 후보의 지지율은 34.0%로 뛰어올랐다. 노동자층이 많아 민주노동당 결집력이 높은 이 지역의 특성상 정 후보는 앞으로 지지율이 지역발전론을 선택했다. 말없는 표심은 먹고 사는 문제 보다는 친한나라당 정서와 현 정권의 실정 비판을 더 원했다. 그러면 지역의 정치지형은 변할까? 개표 결과에서 보듯 지역민들은 급격한 변화, 자리바꿈은 싫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점진적인 변화, 한나라당의 뼈아픈 자기성찰도 원하고 있었다.지역민들은 대구=한나라당 , 작대기만 꽂아도 한나라당 공천이면 당선 이라는 등식을 더 이상 무작정 원하지는 않고 있음을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것이다. 지역민들은 한나라당에게 여전히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지금보다 몇 차원 업그레이드되지 않을 경우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표심도 분명히 담겨 있다.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의 44% 득표가 이를 증명한다. 이 표 중에는 과거 한나라당 지지세였다가 이번 재선에서 이 후보 쪽으로 돌아선 유권자들도 상당수 있다고 봐야 한다.당장 30, 40대 등 젊은 유권자층은 이 후보에게 기울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50대 이상은 투표율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꼭 투표하는 층이라는 것. 실제로 2차 여론조사에서 연령별 투표 참여는 50대 이상이 79.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동을의 경우 한나라당 텃밭 으로 전통적 지지기반이 강하며, 특히 이 후보가 선거를 맞아 '급조한' 조직보다도 훨씬 탄탄하다"고 평가했다.ㄴ. 울산 북구북구 선거관리위원회의 잠정 선거인수는 총 9만6,624명으로 이중 남 4만9,540명, 여 4만7,084명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연령별로 살펴보면 30대가 3만3,254명(34.4%)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 40대 2만5,575명(26.5%), 20대 1만7,608명(18.2%) 순을 보이고 있다.이번 재선거의 각 당 주요전략은 선거인 수의 약 70%를 차지하는 30~40대 공략에 집중될 수 밖에 없으며 이들 연령층의 선거참여 여부가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북구 8개 동의 역대 선거 정당 지지도는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이나 후보의 인물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어왔다. 현대자동차와 적이다.
*들어가면서..백제는 600여년의 긴역사를 가지고 있고 특히 한성 백제사가 그 기간이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우리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서 백제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고 최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의 시대에 관해서 삼국사기에서 조차 즉위하고 20년 동안의 자료가 누락되어있다.우리는 삼국사의 한축을 이루면서 활발한 정복활동과 대외관계를 가졌던 근초고왕의 업적에 대해서알아보고자 여기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우리는 근초고왕의 즉위에 있는 그 배경부터 대외관계 ,정복활동,정치적 업적등에 이르는 여러분야에 걸쳐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근초고왕의 즉위 배경..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차남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체격이 크며 외양이 기이하게 생겼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초고왕2세를 뜻하는 근초고하는 묘호가 말해주듯 그는 자신이 초고왕의 혈통을 이었음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방계혈통에 속하는 고이왕, 책계왕,분서왕,계왕으로 이어지는 고이왕계 왕실을 종식시키고 적통 왕실을 복구했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조처였다.그가 초고왕의 직계를 자임한 것은 명분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비류왕이 죽은 뒤, 그는 대륙 백제의 계왕과 왕위 계승권을 두고 서로 다퉈야 했고, 그 ㅐㄷ문에 그는 2년 동안 정식으로 왕의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계왕을 쫓아내고 대륙백제를 아루흔 뒤에야 비로소 왕의에 오른 그는 즉위 후에도 여전히 왕의 계승의 명분을 얻지 못하여 시달린 모양이다. 그래서 스스로 초고왕의 직계 혈통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바로 초고왕 2세를 뜻하는 '근초고'라는 묘호였다.*근초고왕의 정치1. 근초고왕의 집권체제 정비초고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한 근초고왕은 왕권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굳게 하였다. 이렇게 지배세력을 재편성한 근초고왕은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기 위한 제도의 정비를 추진해 나갔다. 먼저 그는 늘어난 귀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관등제를 정비하고 일원화하였다. 종래에는 중앙의 유력귀족들배체제를 정비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하나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백제에서의 불교는 동진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이 불교는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를 제시하여 종래의 조상숭배 및 부족 중심적 신앙체계를 국가차원 신앙체계로 체계화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각 지역의 족장세력들을 중앙귀족화함으로써 이루어진 중앙집권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2.근초고왕의 정복활동근초고왕때 절정을 이룬 백제의 정복활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낙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이요. 둘째는 전라도지역의 진출이며, 셋째는 황해도 방면으로의 진출이었다. 먼저 가야로 진출한 근초고왕은 가야 7국을 평정하여 부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이 지역을 직할영토로 넣지 않고 공납을 바치는 조건으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의 공납업무를 목씨세력으로 하여금 관장하도록 하였다.(왜냐하면, 이 지역을 평정할 때 목씨 출신의 장군이 핵심적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목씨세력들이 백제의 중요한 지배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가야지역을 평정한 근초고왕은 그 여세를 몰아서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 영산강 유역에는 침미다례(해남)를 중심으로 한 마한의 잔여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백제가 직산(稷山), 천안(天眼) 지역에 기반을 둔 목지국을 병합하였을 때 백제국으로부터 이탈하여 중국과 교섭을 벌이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근초고왕은 이들이 백제에 귀복하지 않자 군대를 보내어 먼저 침미다례(해남)를 쳐서 복속시켰다. 침미다례(해남)가 복속되자 비리(比利). 벽중(僻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등의 세력들은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이로써 마한의 존재는 소멸하였으며, 근초고왕은 전라도 지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마한의 잔여세력을 평정하여 영역을 크게 확대한 근초고왕은 남진해 온는 고구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백제는 먼저 신라와의 우화관계를 도모하여 공동전선을 한 소국과 연맹 왕국의 단계를 거쳐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가운데 점차 전문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부류들이 형성된 결과였다. 그들이 속한 신분은 자질이나 능력에 의해서 보다도 혈연적 유대나 출신지역 등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러한 계급관계가 법률로 고착되어 혈연적이 영속성을 띠게 되었다.1) 지배세력의 구성과 신분제백제의 지배세력은 왕족을 포함한 귀족 관료세력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귀족세력의 핵심층은 주로 건국의 주류인 부여 고구려계의 중추세력과 소국의 수장층이었으며, 그밖에 호민이나 전문 행정요원 및 전사집단도 귀족층에 편입되었다. 귀족들은 중앙의 권력과 상충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지배영역을 지키면서 토지와 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권이 강화된 이후에도 귀족층은 왕비족과 정사암 회의 등의 중추적인 역할은 통해 정치 사회적인 지위를 강고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귀족층 사이에도 여러 가지 엄연한 차별이 존재하였다.. 이는 주로 가문의 격에 의해 결정된 것 같은데, 특히 왕실과의 통혼은 왕족과 함께 최고귀족으로 군림하는데 큰 관건이 되었다. 백제의 지배세력 가운데 국왕을 비롯하여 왕족 왕비족 및 대성귀족이 정치 경제 문화의 주도권을 쥔 최상의 특권층이었다. 그들은 왕도에 거주하는 왕경인으로서 지방민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유지하였고, 국가의 주요한 관직뿐 아니라 전조권의 지급이나 식읍 등을 통해 대토지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매우 제한된 소수의 귀족가문이 사회적인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를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부르고 있다.백제 왕실은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이민 세력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왕계는 온조계와 비류계 간의 세력교체를 상정하는 견해가 일부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부여씨의 온조계 왕실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2)민의 구성과 생활삼국 초기 철제 농토목 용구가 사용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진전되고 계급 분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종래의 촌락공동체는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 무렵 록하였다는 기사가 참고된다. 이를 통해 중앙정부는 각 지역의 특산물 실태파악과 함께 담세능력을 감안하여 조를 부과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측면도 있지만, 조세행정면에서 볼 때 종래 단위 정치체별로 임의적으로 가혹하게 행해진 집단적 수취가 점차 극복되어 가는 일면도 살필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국가의 수취는 점차 지방관에 의해 행정 단위별로 이루어지고 아울러 개별가호가 정율적인 조세를 부담하는 등 백제의 세제가 점차 제도의 틀은 갖추면서 점차 정비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외관계1) 고구려와의 관계{백제의 광범위한 정복 전쟁으로 말미안아 고구려와 관계가 대립적으로 된다.백제 근초고왕시기에는 백제가 가장 흥성한 시기였고, 고구려는 세력의 남하 정책과 맞물린 결과라고 보고 있다.백제와 고구려가 대립하였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영토를 접하고 있었으므로 정복국가의 속성상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면 백제와 고구려간의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기 위한 문제, 대방의 옛땅이었던 연평평야 등과 비옥한 한강유역 진출이라는 국가적 명제가서로 충돌한데서 벌어졌다.특히 근초고왕 때 전투가 치열했다.369년에서 371년 사이에 백제는 에성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크게 충돌하였다. 근초고왕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왕 사유(고국천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배전)에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타라였다. 왕이 태자(근구수)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갑자기 쳐서 이를 깨뜨리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얻었으며 그 노획한 것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6년(371) 고구려가 군사를 이르켜오므로, 왕이 이말을 듣고 페햐(예성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 갑자기 치자 고구려 군사가 패하엿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힘을직계인 초고계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고, 또 진씨를 왕비족으로 삼아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나아가 서남으로는 가야세력을 평정하고, 남으로는 마한의 잔여세력을 병합하여 영역도 크게 확대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전연에 의해 요동지역으로의 진출을 저지당한 고구려가 진출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자 이는 당시 한강 유역에서 신흥의 기세를 올리고 있던 백제를 긴장시켰다. 고구려의 남진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백제는 이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근초고왕은 신라와의 화호를 도모하였다.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는 4세기초에는 백제가 신라를 처음으로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긴장되었다. 그러나 366년(근초고왕 21)과 368년(근초고왕 23)년에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좋은 말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관계정립에 나섰다. 이시기의 양국은 형제관계로 표현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제2기(4세기말∼5세기초중):백제·왜·가야 연합 대 고구려·신라 연합의 대결소수림왕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와서 정복적 팽창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이시기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양국 사이에 변화가 생겨나게 된 발단은 백제의 禿山城主(독산성주)가 주민300여호를 이끌고 신라에 내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백제는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신라가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형제관계로 표현될 정도로 밀접하였던 양국 사이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신라는 점차 고구려와 연결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신라가 친고구려적 입장을 취하게 된 배경은 당시 석씨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김씨계 내물왕이 고구려를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때문이었다. 즉 내물왕은 고구려에 밀리고 있는 백제보다는 강성한 고구려와 연결을 가지는 것이 국내에서 왕의 입지를 높일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고구려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신라의 연결에 대항하기 위해 이미 영향권내에 있던 가야와 왜와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였다. 여기에는 가.
목 차Ⅰ. 서언Ⅱ. 본론1.음서제의 성립2.음서의 종류와 그 범위A.친족범위B.문음, 공음3.음서의 시행 시기4.음서제도의 운영A. 음서의 연령B. 음서의 시행 원리와 수혜인원Ⅲ.결론Ⅳ.참고도서고려음서제도 연구 김용선 일조각 1996.고려시대 음서제도와 과거제도 연구 박용운 1990.고려시대사 박용운 일지사 1985.고려음서에서의 外孫出現과 法制變改 김수진 1991.Ⅰ. 서 언신분제 사회에 있어서 지배계층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할때 그들이 신분을 어떻게 하여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어떠한 방법을 통해 그것을 유지해 나갔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질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문벌(門閥)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의 지배계층이 형성되었던 고려시대의 경우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려의 문벌사회에 있어서 모두 관직을 가지고 국가에 복무하게 됨으로서 최고의 지배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관인등용(官人登用)을 위한 방법 가운데 특히 음서제도가 주목된다.음서제(蔭敍制)란 부조(父祖)의 음공(陰功)에 의하여 그 자손을 벼슬에 서용(敍用)하던 제도로 고려 시대의 경우 과거제(科擧制)와 더불어 가장 보편적인 관인등용법(官人登用法)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서 고려왕조는 문음(門蔭)을 보아 등용하는 제도와 과목(科目)으로 시험하여 그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두가지 방식을 동시에 채택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하나의 인 사로(人仕路)로써 기능 뿐만 아니라 고려문벌의 성격, 더 나아가 사회의 성격을 이해 할수 있다.Ⅱ. 본 론1. 음서제의 성립우리나라 음서제의 시작에 대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다음의 사례가 제시 되어있다. 즉 신라 진평왕 32년에 삼국 통일의 원훈(元勳)인 김유신의 공덕을 기려 그의 적손(嫡孫)인 윤중(允中)에게 대아찬(大阿 )을 제수한 일을 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음서중에는 국가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신하의 자손들을 사환(仕宦)케 하는 방식도 포함 하고 있으므로 이 예를 수긍하여 좋을 것 같다.이런 음서의 모습이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는바탕위에서 일반 고위 관료의 자손들에 대하여 음서하는 제도가 성립한 때는 언제쯤일까? 그 시기는 추측컨대 성종조(成宗朝 982∼997)로 보인다. 사실 음서를 시행했다는 구체적인 기사가 처음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이 목종 즉위년 12월의 일이다.1. (成宗 16年= 穆宗 卽位年) 12월 황위보루에 행차하여 사면령을 반포하여 3년간의 役을 면 제하고…文武의 관리에게 (官등작 1級을 더해주며, 5품 이상(관리의 ) 子에게는 蔭職을 수여하였다 (《고려사절요》권 2)2. 목종이 즉위 敎하여 문무 5품 이상(관리의 ) 子에게는 蔭職을 수여하였다 (《고려사》권 75 選擧志 3)위의 두 기사는 동일한 내용의 사료로서 목종은 즉위에 즈음하여 반포한 교서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은사(恩賜)을 내리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子에 게 음서의 특전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즉위 교서는 12월에 반포되었는데 목종은 불과 2 개월전인 10월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음서제도는 적어도 목종이 즉위하기 이전인 성종대에 이미 그 제도적 시행을 위한 규정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또한 음서를 받을수 있는 기준이 5品以上官으로 되어있다. 이점 역시 주목할 사항인데 6 품이하의 관리와 구별하여 특별대우를 하고 있는 경우가 성종조부터 종종 보이고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종조의 제도적 성립을 위한 기반이 성종, 목종ㆍ현종ㆍ정 종 연간의 제도적 성립의 과도기를 거쳐 고려시대의 모든 제도ㆍ문물이 정비 내지 완성되 는 문종대에 비로소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것 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의 음 서 시행에 있어서 제도적 정착기를 문종대로 잡는 것은 그 하한을 너무 늦춘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목종은 즉위한 지 겨우 두 달만에 음서를 시행하라는 교서를 직접 내 렸듯이 적어도 목종 즉위년에는 이미 음서가 구체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적 규정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고려시대 음서 시행을 위한 제도적 성립고 있었으므로 각 제도 사이에 차이가 나게 마련이었으나 그 보다는 오히려 유사성이 더욱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음서제는 신라 이래로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의 자손을 서용(敍用)한 사례에서 그 선구를 찾을수 있으나 그것이 5품이상의 고급관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제도로서는 새로운 지배신분층이 자리잡히고 귀족적 통치제도가 마련되는 고려 성종조에 이르러 중국의 것을 참작하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2. 음서의 종류와 그 범위《고려사》권 75 選擧志 3 에 의하면 凡蔭敍와 凡敍祖宗苗裔 및 凡敍功臣子孫 으로 구분할수 있는데 이것은 음서 자체를 다시 세분 한 것일뿐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세 경우는 모두 그안에 포함된다. 먼저 祖宗의 苗裔를 敍用하는 제도에 대해 알아보면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실의 후손들중 無官·無職者에게 人仕토록 하거나 爵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祖宗의 후예들에게 王孫이라는 신분에 따라 官爵의 특전을 베푸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와같은 특전은 친족의 遠近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또 外孫도 內孫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같은 음서이면서도 凡敍祖宗苗裔가 왕손을 대상으로 한것인데 비해 凡敍功臣子孫와 凡蔭敍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으며 또 後二者간에도 전자가 국가에 공로를 세운 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데 비해 후자는 일반 고위 관료들의 자손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여기에서도 성격상 차이를 볼수 있다. 이중 우선 凡敍功臣子孫에 관해 살펴보면 《고려사》권 75 選擧志 3 에 목종 5년 12월에 태조공신의 자손중 無官者를 錄用 하였다. 는 기사를 비롯하여 「凡敍功臣子孫 」에 수록되어 있는 기사들도 요는 삼한공신, 삼한후공신, 배향(配享)공신등 각 공신의 자손에게 인사의 특전을 준다. 태조대의 개국공신인 배현경(裵玄慶)등 6공신을 포함한 삼한공신의 자손들이다. 삼한후공신은 삼한공신에 비견될 정도로 큰 공훈을 세운 후대의 신하들에게 내린 칭호이고 배향(配享)공신은관직에도 해당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신들은 대개가 고위관료들이므로 6품관이하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전투공신중에는 하급관료가 보이고 있다.A.음서의 범위『고려사』 選擧志의 음서에는 12개의 음서 시행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규정이 제정된 시기는 목종 즉위년부터 충선왕 복위년 까지 즉 고려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 가운데 음서의 혜택을 받을수 있는 친족의 범위를 정리해보면 음서의 시행은 최초의 규정인 목종 즉위년의 교서(敎書)에서는 자(子)에게만 해당되었으나 두 번째 규정인 顯宗 5년 12월에는 子, 孫, 弟, 姪 의 범위로 확대 되었다. 이후 仁宗12년 6월에 判文에는 子(수양자 포함), 孫, 外孫, 姪 등으로 더욱 범위가 넓어졌고 고종 40년 6월에는 여자 추가되어 가장 넓은 범위내에 음서가 시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친족의 범위는 고려후기까지 거의 그대로 지속 되고 있다.고려시대 음서의 혜택을 받을수 있는 친족관계를 그림으로 보이면수음자본인 弟자(수양자 포함) 여 姪내손 외손子- 父蔭孫- 祖蔭外孫-外祖蔭弟-兄蔭姪-伯父蔭姪-叔父蔭고려 시대 음서 위의 명칭의 범위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 가장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曾祖蔭, 高祖蔭 高祖之父蔭등 위의 범위를 벗어나는 다른 명칭의 음서도 자주 행하여졌음을 알고 있다. 父蔭, 祖蔭 등과 같이 음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공신은 아니었으며 반드시 특별한 공훈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고려시대의 음서를 父蔭, 祖蔭, 外祖蔭 伯父蔭등의 음서와 父功, 祖功, 外祖功등 勳功또는 공신음서의 의미로 시행된 두가지 커다란 유형으로 구분할수 있다.다시 말해서 일정한 품계나 관직에 오른 관리의 자손에게 시행되는 음서가 곧 門蔭과 공신자손에게 행하여진 음서 곧 功蔭으로 정리할 수 있다.B. 문음과 공음고려시대에 행해진 음서가운데 문음이라 함은 문반 5품이상 관사의 자손에게 제수된 음서를 의미하게 되는데 그 하나로 움직이 주어졌던 것이다. 둘째로 음서는 왕태후의 책봉과 같은 경사(慶事)때에도 행하여 졌다. 셋째로 太廟에친향(親享)한 후에도 음서가 베풀어졌다. 넷째로 국가에 어려운일 생겼을 때 또한 음서가 행해진 사실을 볼 수 있다. 그 하나가 화재의 경우다 즉 이러한 때는 왕은 수신하는 서(書)를 발표하고 명산 대천에 여러 가지 은사(恩賜)를 베풀면서 동시에 음직(蔭職)도 주었던 것이다. 다섯째로 남경, 서경등을 순행한후 귀경(歸京)하여 음서를 베푼 사례도 보인다. 다른 하나로 고관(高官)이 사망하였을 때 주어지는 음서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만 가지고 본다면 음서가 특별한 시기에 한하여 행하여 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음서의 계기가 괸 군왕의 즉위 왕태후의 책봉, 화재 친향등 모두가 일상적이고 정기적인 행사는 아닌 것이다. 이처럼 음서가 과거처럼 정기적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제수된 특전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음서가 과연 국가의 비상시에 간헐적으로만 행하여진 것일까? (《고려사》 권7 세가)에 보면 상예태음(常例泰蔭)도 수여되고 있는데 공로에 대한 특별조치라는 의미 의외에 이것은 정1품 정2품 고위관료였으므로 해서 주어지는 음서인 듯 한데 常例라는 표현에서 정기적인 시행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음서 연월을 고찰해 보면 충열왕 12년과 13년 충숙왕 6,7년에 계속하여 음직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이때는 매년 음서가 행해졌다고 말할수 있다.4. 음서제도의 운영A. 음서의 연령 선거지 음서조에는 모든 음서 출신자는 나이 18세 이상으로 한정한다 라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은 거의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실제의 음서 시행 사례를 조사해 보면, 44개의 사례 가운데 18세에 음서의 제수를 받은 것은 두 차례 뿐인데 비하여, 70%에 가까운 31사례가 17세 이하에서 음서를 제수받은 경우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실제 사례를 조사해보면 고려시대 음서를 제수받는 연령은 최저 5세.
동학의 불길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불길이 점점 더 강해가자 막기 어려웠던 조선정부는 6월 1일 원세개(袁世凱) 에게 청의 출병을 요청했다. 원세개는 일단 주저했다. 천진조약에 의하면 청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일본에 통보해야 함으로 원세개로서는 일본의 태도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출병을 권유하는 조선주재 일본공사관 통역인 정영방(鄭永邦)과 일본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의 말에 속은 원세개는 일본이 중국의 파병에 크게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게다가 원세개는 공사관 보호의 명목으로 백 명 정도밖에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결국 당시 청의 최고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3))의 파병을 결심케 하였다.6월 3일 원세개를 통하여 조선정부의 원병요청이 정식으로 제기되자 이홍장은 즉시 직예제독(直隸提督3)) 엽지초(葉志超)와 대원진(大原鎭) 총병(總兵) 섭사성( 士成)에게 1500 여명의 청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출동하도록 명하고 또한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에게 순양함 제원(濟遠)과 양위(揚威)를 거느리고 인천으로 파견토록 하였다. 한편 6월 7일 일본에게는 천진조약(갑신정변 후 청일 양국은 조선 출병시 상대국에게 통보하기로 함)에 의거하여 청군의 파병을 통보하였다. 일본은 6월 2일 공사관과 영사관 및 거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을 결정했다.●일본의 파병이미 청이 출병하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파병 준비를 해놓고 있던 일본은 청이 출병을 통보한 6월 7일보다 이틀전에 병력을 출발시켰다. 인천까지의 거리가 일본보다 청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6월 5일 출발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공사와 해군 육전대 420명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6월 9일이었고 6월 6일 출발한 청의 선발대 2100명은 6월 8일 아산만에 도착했다(8일부터 12일에 거쳐 상륙). 이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오토리 공사에게 병력을 대동하지 말라고 요구하였으나 오토리 공사는 이를 무시하고 6월 10일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서울에 입성하였다강들에게 빼앗긴 이득을 조선을 정벌해서 얻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군사력도 빈약했고 국내외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실행하진 못했지만 이 주장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조선이 대륙진출의 발판인데다 일본을 향해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반도가 필요했고 더 큰 이유는 제국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원료의 공급지와 생산품의 소비시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초기 자본주의가 그렇듯이 일본의 자본주의 역시 노동자들의 착취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본의 노동자는 저임금과 살인적인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들에게 쌀값 폭등이라는 것은 곧 사회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정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공급지로서의 조선은 아주 중요한 땅이었다. 7) 당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청과의 일대 전쟁이 불가피했다.이런 이유로 일본정부는 어떻해서든지 개전(開戰)의 구실을 만드려 애를 썼다. 그 구실은 다름아닌 조선 내정의 공동 개혁안이었다. 6월 16일 무쓰 외상은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汪鳳藻)에게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내용으로 종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던 청이 이 제안을 거부할건 당연했다.실제로 청은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를 통해서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첫째, 조선의 변란(變亂)이 이미 진압된 이상 중일양국이 공동진압하자는 건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둘째, 조선의 선후(善後)문제는 조선 정부 자체로 처리해야 할 것으로 중국 정부에서도 간섭을 하지 않는 이상 일찍 조선의 자주를 인정해 준 일본정부는 더욱 간섭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셋째, 천진조약에서 이미 변란이 진압되면 즉시 철병해야 한다고 규정한 이상 철병문제를 더 논의할 필요도 없다." 8)6월 21일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어 청국과 개전할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당일 주일 청국공사에게 절교서를 전달하였다. 이어 7월 20일에는 북경주재 일본 대리공사 고무라가 청 정부에 대해서 정식으로 2서 일본군은 청과 전쟁할 명분을 얻게 되고 또한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협력을 얻게된다. 9)●당시 열강의 입장제정 러시아 시대에 동진정책이 마무리 되기전 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대양과 접한 곳이라곤 오직 서쪽의 "페테르부르크(Peterburg)"라는 발틱해 깊숙한 북쪽 끝 곳 밖에 없었다. 남쪽의 흑해연안은 좁디 좁은 다르다넬스 해협과 좁기로는 다르다넬스 해협보다 만만치 않은 지중해의 지브롤터 해협 때문에 함대 행동에 극히 제약을 받았고 제국주의 시절에는 해양을 끼지 않고는 국력을 뻗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기에 부동항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위해 러시아 못지않게 필사적이었다.●청의 개전 결심일본의 침략야욕에 대처하는 청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져 있었다. 주전파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당(帝黨)파고 주화파는 서태후, 이홍장을 중심으로 하는 후당(后黨)파이다. 1875년 청의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종친 광서제(光緖帝)가 즉위하게 되는데 그때 광서제가 4살에 불과해 서태후가 섭정을 하게된다. 1887년 광서제가 다시 귀정(歸政- 정치를 돌린다, 즉 친정, 스스로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선포한다. 그러나 대신들은 훈정(訓政)을 간청한다. 2년뒤엔 1889년 서태후는 귀정을 선포하고 정치권을 황제에게 넘긴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말뿐이다. 광서제에겐 결재권이 없었고 정권은 여전히 서태후의 손에 있었다. 이에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정권을 빼앗으려 하였고 일부 관료도 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이 제당과 후당의 발생원인이다.서태후는 자기의 60번째 생일이었고 만에 하나 전쟁에서 패할 경우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까 염려해서 전쟁을 반대하였다. 이홍장 역시 전쟁을 반대하였다. 이홍장은 염군의 난때 청 정부 대신 이를 진입함으로서 중국 근대사를 피로 장식할 군벌의 시초가 되었다. 북양육군10)과 북양해군은 이홍장의 정치 밑전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북양대신겸직예총독(北洋大臣兼直隸總督)직을 20년째 맡을수 있었다. 제당은 894. 2. 15(이하 양력)무장봉기 : 4월 하순전주성 점령 : 5월 31일조선 조정, 청국에 원병을 요청 : 6월 4일6월 6일 : 청국은 파병을 결정하고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군대파견을 알림.6월 8일 : 섭사성 휘하의 청군 900여명이 아산만에 상륙.6월 12일 : 엽지초 휘하의 청군 1,500명 아산만에 상륙6월 2일 : 일본은 청국으로부터의 통지가 있기 전에 이미 파병을 결정. 임오군란, 갑신정변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청국군의 2배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6월 4일 : 일본 육군, 대본영을 설치하고 동원령을 내림.6월 16일 : 7천-8천의 혼성여단이 인천에 상륙-- 일본군은 이미 조선에 와 있던 청군과 충돌을 기대하였으나 청군은 아산만에 모두 상륙하여 충돌이 없었다. 이에 충돌의 핑계를 찾아야만 했다.6월 15일 일본내각은 조선의 사태가 비록 평화적으로 타결된다 해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요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청국에 알려 그들과 공동으로 조선개혁을 주도할 것을 제의하고, 만일 거절하면 일본 단독으로 추진하고, 청국과의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키지 않는다고 결정했다.6월 16일, 일본은 청국에 이를 통고. 21일 청국은 이를 거절23일 일본정부는 일본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강행한다는 뜻을 일본공사 오오토리에게 알림. 오오토리에게 내려진 구두훈령은 "현재의 정세로는 개전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어떤 수단을 가리지 말고 개전의 구실을 만들도록 하라".7월 3일 오오토리는 조선정부에 이른바 개혁안을 제시하고 조선대표들과 회의를 거듭함. 일본은 열강의 움직임을 살피고, 특히 영국의 협력을 얻는데 주력. 영국의 양해가 성립되자, 17일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 대원군-개화파정권(갑오개혁정권)을 만들어 냄. 그리고 25일에는 드디어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 양국군함이 충돌함.●풍도 앞바다 해전일본 제1 유격대의 아키쯔시마, 나니와, 요시노의 합계 톤수는 약 11,000법상으로 합법이라는 주장을 들고 나와 소동이 진정되었다.한편 풍도의 해전에 이어 아산(牙山) 근처의 성환에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육지전이 벌어졌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오시마 여단 남하의 밀보를 얻은 제독 엽지초는 아산 동북 20km에 위치한 성환에서 일본군을 요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풍도의 해전에서 청군의 수송선이 격침되어 증원병력 대부분이 수장되었다는 소식은 아산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엔 충분했다. 결과 청군은 3,500의 병력과 야포 8문이라는 병력으로 일본군과 맞서게 되었다. 엽지초는 일본군과의 결전을 피하기로 결심하고 총병 섭사성이 이끄는 2000의 병력으로 성환을 방어하고, 제독 엽지초는 1500의 병력으로 공주에 수용진지를 설치, 패배할 경우에는 우회 북상하여 평양의 청군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병법의 기초를 무시하는 초보적 오류였다. 안그래도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오시마 여단의 7000명의 병력보다 열세한 병력을 분산 배치함으로서 각개격파의 위험이 있었고 실제로 각개격파 당했다. 섭사성 총병은 성환의 고지에 병력을 분산배치 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보병 4개 대대, 기병·공병 4개 대대와 야포 8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보조부대로 우익을 공격하고 섭사성 총병이 주력을 이끌고 우익으로 이동하는 사이 주진지를 공격, 2시간만에 중심의 월봉산 진지를 돌파하였다. 섭사성 총병은 포 8문을 버린채 공주로 퇴각하였다. 엽지초 제독의 보고에 따르면 청군의 사상자는 200여명이고 일본군은 장교 2명 포함 82명이었다. 이후 오시마 여단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 본대의 압력 때문에 8월 5일 서울로 귀환하고 엽지초 제독이 이끄는 청군은 서울을 우회, 황급히 평양의 본대와 합류했다.●평양으로..이미 전쟁을 피할수 없게 되자 청은 주일공사 왕봉조를 소환하고 8월 1일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하였다. 같은날 일본 천황(明治天皇)도 대청(對淸)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일본의 입장에서 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