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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의 불교와 사회 평가A+최고예요
    高麗時代의 佛敎와 社會1. 序 - 高麗의 開國과 佛敎의 位置高麗佛敎는 政治的으로 高麗라는 統一國家를 誕生시키는데 그 理念的 基盤을 提供하였다. 王建은 高麗 建國이 佛法의 加護에 힘입었다고 굳게 믿었고 그로 인해 高麗를 佛敎國家로 建設하려고 心血을 기울였다. 高麗初 佛敎界는 地方勢力을 形成하고 있었기 때문에 王建의 佛敎界와의 結合은 그의 豪族聯合策과도 連結되는 것이었고, 또 民心收拾의 敎化面에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이러한 脈絡에서 國家建設에 있어 佛敎의 도움을 받으려는 王建의 의지는 이후 高麗 王들의 治國策에도 反映되어 政治的制度로 發展하였다. 이리하여 高麗佛敎는 그 始發點부터 王權 또는 國家權力과 서로 密着되면서 그 敎勢를 뻗치어 支配階層의 權座에 君臨하여 갔던 것이다. 이는 비록 形式的이지만 國王의 上位에 王師?國師를 둔다던가, 僧科制度의 시행, 大藏經의 간행, 燃燈會, 八關會의 행사 등의 高麗史 기록에서 살펴 볼 수 있다.高麗의 佛敎가 발전하는 데는 이러한 王室, 貴族의 보호 외에도 일반 백성들 사이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佛敎의 位置도 한 몫을 했다.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儀禮의 대부분이 佛敎식으로 거행된 것이 이러한 예이다. 이처럼 高麗 社會에서 佛敎는 모든 階層의 歸依를 받아 굳건한 基盤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그 位置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위치의 佛敎일지라도 羅末麗初의 政治的 混亂期에서는 많은 波瀾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佛敎는 個人主義的인 坐禪을 標榜하고 나선 禪宗이 등장해 호족 세력과 결탁하여, 王室 佛敎?貴族 佛敎로 機能하고 있던 敎宗에 反對하면서 分立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佛敎界의 分立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敎宗과 禪宗 내에서도 다시 宗派 間의 對立이 일어나 그 樣相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이와 같은 分立 과정에 佛敎는 호족 세력과 결탁하면서 발전을 이루며 더불어 여러 가지 社會적 폐단을 낳기도 했다. 寺院이 호족 세력과 밀착된 데서 오는 政治的?經濟的 폐단을 비롯하여, 觀念化?保守化 찾았다.華嚴宗은 光宗의 정치 개혁시, 왕권 강화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면서 가장 優勢한 宗勢로 떠올랐다. 羅末麗初에 가장 優勢했던 禪宗을 제치고 華嚴宗을 主導的 宗派로 등장시키는 데에 공이 큰 人物로는 北岳 出身의 均如였다. 均如는 分裂된 南北岳의 華嚴勢力을 北岳의 立場에서 統合시켰다. 그러나 均如가 活動하던 時期, 華嚴宗團 내에 對立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와 상당히 성격을 달리하는 坦文이 있었다.이러한 華嚴宗은 均如와 坦文 그리고 以後의 여러 國師?王師를 배출하였고, 高麗 中期에도 주로 王子나 宗室에서 出家한 高僧들에 의하여 主導되면서 外戚門閥勢力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義天도 이 시기 활동하던 인물로, 文宗의 넷째 아들이었다. 義天은 均如에 대해 批判的 立場을 취하면서, 새로 竣工된 興王寺를 華嚴宗의 本刹로 삼아 敎勢를 크게 振作 시켰다.以後 華嚴宗은 武臣 執權期에 武臣執權에 저항하는 문벌의 후예들과 연결되어 여러 차례 도전하다가 宗勢가 크게 약화되었고, 地方에 基盤을 둔 寺院과 高僧에 의해 蒙古 壓制 아래서 宗勢를 維持하였다. 恭愍王 執權期에는 眞覺局司 千熙를 國師로 輩出하였을 뿐 宗勢가 크게 沈滯하였다. 그 후 華嚴宗은 이론적 특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다른 宗派의 이론에 혼합되어 마침내 朝鮮 初에 이르러서는 宗派로서의 位置를 상실하고 敎宗으로 統合되었다.高麗 華嚴宗은 대체로 民衆과 王室을 연결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寄與하였다. 華嚴宗은 法界觀을 통해 국가와 민중과의 일체감을 강조하였고, 法界觀에 의하면 八關會는 민중을 대변하는 토속신앙의 祭典이었다. 이러한 華嚴宗은 森羅萬象을 法界로 연결시켜, 高麗의 國家的 단결을 강조한 華嚴思想을 바탕 아래 많은 寺院을 維持하면서 高僧을 輩出하였다.2.2. 法相宗法相宗은 慈恩宗 또는 瑜伽宗이라고도 불렸으며, 高麗의 4대 종파 중 하나였다. 그러나 禪宗이나 華嚴宗에 비하여 宗勢가 약했다.法相宗은 高麗 中期 급속히 宗勢를 확장하여 華嚴宗과 함께 高麗를 代表하는 敎宗의 兩大山脈을 形는 天台學은 元曉의 저술에 포함되어 있다. 원래 天台學은 隨나라의 智?가 法華經을 中心으로 하여 조직한 사상으로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전래되어 高麗 초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天台宗은 華嚴宗 출신의 義天이 제도적으로 형성시켰는데, 義天은 禪宗에서 敎宗에 접근하던 佛敎 기반과 敎宗에서 禪宗까지 넓혀 가던 의식이 교차된 시점에서 天台宗을 정립시켰다. 이러한 天台宗의 形成은 義天의 굳은 의지도 있었지만 왕실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원인이었다. 義天의 母后, 仁睿太后는 仁州李氏의 門閥出身이었으나, 佛敎를 통합적으로 발전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義天의 佛敎運動에 협력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義天은 자기의 學文과 뜻을 굳히고자 宋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머무는 동안 여러 高僧들을 만나 佛法을 토론하고 佛典도 수집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국내외에서 구입한 書籍을 편찬하여 간행하고 한편으론 天台宗 開立에 전력을 기울였다. 義天은 歸國하면서 禪宗과 敎宗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天台敎學을 講義하면서 동지들을 모아 지관을 닦으며 天台宗風을 드날리려 노력했다. 言及한 바 있듯, 義天이 활동하고 있던 시기는 佛敎계의 각 종파가 서로 反目하고 있었기 때문에 佛敎改革運動이 不可避하였다. 이런 까닭에 義天은 먼저 敎宗界의 통일부터 꾀하여 華嚴宗의 립장에서 각 宗派들을 回通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敎宗 전체와 대립하고 있던 禪宗을 융합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問題의 解決을 義天은 天台宗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이때 내세운 것이 敎觀?修였다. 義天은 佛敎道는 마땅히 敎와 禪을 ?修해야 비로소 수행의 征路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여 敎를 떠나 敎外別傳만을 내세우는 禪宗에 대해 매우 批判的이었다.天台宗은 本山 國淸寺가 宣宗 6年(1089)에 創建되기 시작하여 肅宗 2年(1097)에 完工되자 本格的으로 天台學을 알려 그 터전을 굳히게 되었다. 義天은 國淸寺 개창 이후 강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는데 여기서 注目되는 것은 담연의 저술인 十不二門을 講說한 점이다. 이것가 있다. 曹溪라는 名稱은 본래 中國 禪宗의 제 6 조 惠能이 있었던 명산인 까닭에 그와 關聯하여 우리나라의 기록에도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宗派를 의미하는 曹溪宗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高麗의 肅宗朝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이때는 앞서 說明한바와 같이 義天에 의해 天台宗이 開立됨에 따라 禪宗이 크게 萎縮되는 時期로서, 이에 刺戟을 받은 각 山門은 그것에 對稱하는 자신들의 宗派를 曹溪宗이라 稱하게 된 듯싶다.사실 曹溪宗이 勢力을 擴張해 가기 전까지는 門閥貴族勢力과 密着된 華嚴宗과 法相宗등 敎宗이 當時 佛敎界의 主流를 이루었다. 그러나 1170年에 武臣亂이 發生하자 旣存의 王室과 文臣貴族들의 權益을 不定하고 들어선 武臣政權에 대하여 門閥貴族勢力과 긴밀한 關係를 맺고 있던 敎宗寺院이 抗拒하고 나섰고, 이러한 敎宗寺院의 抗爭은 崔忠獻이 執權하여 禪宗勢力만을 基盤으로 하여 佛敎界를 改編하려는 데 대한 反撥까지 겹쳐 더욱 거세게 일어나는데, 그렇지만 이들의 鬪爭은 崔忠獻의 강력한 武力的 彈壓에 의하여 많은 희생자만을 내고 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武臣政權期에는 禪宗이 曹溪宗이라는 名稱을 띠고 繁盛하게 된다. 또한 거기에는 ?堀山門 出身의 禪僧인 普照國師 知訥과 같은 큰 思想家가 나와 活動한 事實도 물론 빼 놓을 수 없다. 당시의 世俗化된 佛敎界를 바로잡기 위한 信仰 結社運動이 시작되고, 새로운 宗旨를 마련함으로써 內的인 基盤을 다지는 것은 그의 努力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이다. 이러한 知訥의 思想은 12세기 高麗佛敎의 問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밖으로 政治的 混亂의 틈바구니에서 墮落한 佛敎를 바로잡아 正法을 구사하고, 안으로 禪敎間의 對立과 葛藤을 解消하는 일은 知訥이 살았던 高麗佛敎의 課題였으며, 그는 실제로 이러한 問題를 解決하는 데 平生을 一貫하여 盡力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思想은 이러한 問題에 대한 苦惱의 産物인 것이다.이때 知訥이 내세운 主旨를 한마디로 말하면 頓悟漸修와 定慧雙修였다. 知訥에 의하면 頓悟, 李通玄의「華嚴論」을 읽으면서 더욱 禪?敎가 하나라는 確信에 이르게 되었다. 禪은 부처의 마음이요, 敎는 부처의 말씀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禪과 敎가 둘일 수 없다. 이것이 知訥의 禪敎融會精神의 基本이다. 그가 頓悟漸修를 强調한 것도 禪?敎를 하나로 融會하려는 것과 無關하지 않다.이처럼 知訥은 禪을 中心으로 敎까지 積極的으로 수용 敎?禪의 調和 내지는 一致를 追求하여 그 나름의 思想體系를 樹立하고 새 宗旨를 펴 當代는 물론 그 以後에도 그의 後繼者들에 의해 繼承, 發展하였다.3. 佛敎와 社會高麗 社會와 佛敎는 뗄레야 뗄 수없을 정도로, 佛敎는 社會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종교였다. 高麗 때 佛敎는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실 및 귀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뿐더러, 태조의 訓要十條에도 高麗社會에서 차지하는 佛敎의 중요성이 언급되어 있을 정도이다.高麗佛敎는 현실생활과의 접촉면에서 社會的 重要性을 크게 나타냈다. 위로는 王室?貴族으로부터 밑으로는 庶民에 이르기까지 佛敎를 現世利益의 宗敎로서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본래 來世觀에 입각한 宗敎였지만, 일면 이 세상에서 국가나 개인의 번영과 행복을 좌우하는 종교로서 신앙되는 경향이 짙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의 佛敎는 현실의 생활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社會적인 측면에서도 중요성이 컸거니와, 이와 관련하여 佛敎에 호소하는 각종 불사가 성행하게 되었다.3.1. 燃燈會와 八關會의 성행佛敎행사 가운데 高麗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된 것은 燃燈會와 八關會였다. 태조의 訓要十條에는 燃燈會와 八關會의 중요성이 직접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이들 행사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3.1.1. 燃燈會燃燈會는 궁전 四方에 등불을 밝히고 국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 등으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며 諸佛과 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국가의 평안과 왕실의 번영을 빌던 의식이다. 燃燈會가 열린 시기는 小會日(1월 14일)과 大會日(1월 15일)로 나누어 不夜城을 이루었으며, 태자를 비롯한 百官과 외례였다.
    인문/어학| 2006.12.30| 13페이지| 1,5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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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충렬전에 나타난 초월성 연구
    < 목 차 >1. 서론 .... 11.1. 연구목적 ......... 11.2. 연구사 검토 .... 32. 작품의 구조 및 내용 분석 52.1 의 서사 구조 .. 52.2 전후반의 대응적 구조 ...... 73. 작품에 나타난 초월성의 양상 ............ 83.1. 중개자에 의한 위기극복 .. 83.2. 꿈을 통한 예시 .............. 133.3. 매개물을 통한 상징적 표출 ............ 144. 대중의 현실 반영 욕구 ..............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웅소설 담당층은 현실적 삶에 처하여 당하는 고난이 명백하고 강력할 때, 그것을 초래했다고 여기는 억압적 분노를 영웅의 형상에 투사하였던 것이며, 영웅을 통해 아직 명확한 지향을 획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삶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본고에서는 영웅소설의 전형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을 대상으로 하여 고난에 대한 주인공의 대응방식과 그 해결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초월성이 작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서구적 관점의 소설과 다른 우리 古小說이 가지는 독특한 미적 구조를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1.2 연구사 검토영웅소설 개별 작품들은 대부분 영웅소설이라는 類型의 하나로서 의미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영웅소설 작품들이 창작 연대나 작가에 대한 사항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설사의 입장에서 거시적인 조망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방향은 소설사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연구 방향이라 할 수 있지만, 개별 작품의 독자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오히려 제약이 될 수 있다.한 작품 내에는 유형으로서의 보편성과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개별성이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한 작품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보편성과 개별성을 아울러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형 연구에 치우치면 작품의 한 면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작품의 독특한 가치가 쉽게 매몰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 중의 하나가 이다.은 기존의 연구에서는 ‘영웅의 일생’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보다는 영웅소설의 유형성을 설명하는 자료로서 접근하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따라서 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자체를 분석하기 보다는 영웅소설 전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영웅소설에 대한 전반적 논의의 한 자료로서 을 다룬 경우는 조동일?서대석?이상택?성현경?유배당함.15. 강승상 가족은 노비로 전락하고 충렬은 피신함.16. 승상 부인 소씨와 강낭자가 잡혀가는 중 탈출함.17. 소씨는 자결하고 낭자는 창가에 잡혀 수절함.18. 충렬은 광덕산 백룡사에서 화를 피하고 노승을 만나 수련을 함.19. 남흉노 선우, 남만 가달, 토번 등이 침입하자, 정한담과 최일귀는 적에게 투항함.20. 충렬은 갑주, 창검, 천사마를 얻어 출전하여 적을 물리치고, 항복 직전의 천자를 구원함.21. 충렬은 도원수에 제수되고, 최일귀를 죽임.22. 충렬이 적진에서 황후, 태자를 구하고 위기에 빠진 천자를 구함.23. 정한담이 유심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유배 보냄.24. 정한담이 충렬을 유인하고 천자를 곤경에 빠뜨려 항복받으려 하나, 충렬이 돌아와 한담을 사로잡음.25. 호왕이 황후, 태후, 태자를 사로잡아 본국으로 돌아감.26. 호왕이 태자를 죽이려 할 때, 충렬이 나타나 모두를 구하고 호왕을 죽임.27. 충렬이 유심과 상봉하고 돌아와서 한담을 죽임.28. 충렬이 강승상을 구하기 위해 출전하여 가달을 물리치고 구출 해냄.29. 회군하는 길에 회수에서 모친 제를 지내고 능릉에서 모부인 장씨와 상봉함.30. 영능에 도달하여 수절하던 강낭자를 만나고 소부인 제사를 지냄.31. 경성에 돌아와 옥관도사를 처단함.32. 부귀영화를 누림2.2 전후반의 대응적 구조은 주로 가족의 분리와 재회를 중심으로 전후반의 대응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충렬은 그의 가족과 분리되면서 고난이 점차 가중된다. 먼저 그 부친 유심과 떨어지고, 이어 모부인 장씨와 헤어지게 된다. 다시 강승상의 구원을 받았으나 강승상이 정배되고 강낭자와 소부인과도 떨어지게 된다. 충렬은 이러한 고난의 연속에서 삶의 회의를 느끼고 산으로 들어가다가 백룡사에서 노승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전반부의 고난과 분리의 과정은 끝이 난다. 이처럼 은 충렬이 백룡사에서 수업을 받는 것을 축으로 후반부가 전반부와 대응하여 가족이 차례로 재회하면서 유충렬의 역량이 발휘되는 구조를 난 ? 업난 일엽표주 물의 ?여스며 ?가 온? 일? 션녀 션창 박기 나셔며 부인을 ?촉?야 ? 안의 들나 ?니 부인이 창황 중의 ?예 올나 션녀를 보니 머리 우의 옥연화를 ?고 손의난 봉미션을 들고 쳥의홍상의 ?옥?를 차스니 진짓 션녀요 인간 ?? 안이로다 부인이 황송?야 국궁?례 왈 박명? 쳔쳡을 니?지 구완?니 션녀의 집푼 은덕 엇지 다 갑푸릿가 션녀 ? 왈 소녀는 남? 용왕 장녀옵더니 금일의 부왕이 분부?시기를 ?명국 유충열의 모 장부인이 금야의 도젹의 변을 볼 거시니 네밧비 가 구완?라 ?시기로 왓?오니 부인의 명은 상제도 아난 ?라 소녀 갓튼 게집이야 무삼 은헤 잇다 ?릿가 )장부인은 선녀의 안내로 선창가에서 배를 타고 도망하게 된다. 그러나 마철일당이 배를 타고 쫓아오니 거의 잡힐 지경에 이른다. 이때 광풍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풍랑이 거세져 마철일당이 탄 배의 양 돛대가 부러져 더 이상은 쫓아올 수 없게 된다.적션의 양돗?가 부러져 물 가온? ?려지니 쳔? 항장사라도 ?상의 ?를 타고 가자 ?들 돗?가 업셔스니 어?로 가리요 젹션은 ?릴 업셔 빈 ?만 둥둥 ?고 부인의 일렵주는 용왕의 포주라| 바람 분들 파션할손야 범범중유의셔 놉피 ? 살갓치 다라갈 졔 그 ? 압펀 고요?여 창파는 잔잔?고 월?은 은은?? 옥황이 분부?야 용왕이 주신 ?여든 염예가 잇슬야)비바람에 마철 일당의 배의 돛대가 부러졌지만 장부인의 배는 아무 파손없이 살같이 달아난다. 이는 옥황이 분부하여 용왕이 주신 배이기 때문이다. 즉, 하늘이 자신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기 위해, 용왕, 선녀를 중개자로 보내어 충렬과 그의 모친의 고난을 극복하게끔 한 것이다.사실 장부인이 마철 일당에게 쫓기는 고난은 고난이면서 동시에 중개자를 통한 위기의 극복이기도 하다. 유심을 유배 보내고 회수가로 도망친 충렬을 한담의 무리가 쫓을 때, 충렬과 장부인을 잡아 모두 물에 던지라고 한다.날? 군사 다셧 명을 속출?야 분부?되 너의 등이 밧비 이 밤의 번양 회수가의 다달나 ?의 젼갈노 분부?되 금명일 간자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의 직접적인 하늘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중개자에 의한 위기 극복으로 본다. 충렬이 천상계에서의 힘을 복원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개자를 통한 천[天]의 개입이 있는 것은 충렬이 천상계에서의 힘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충렬이 한담을 치는 것이 곧 하늘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충렬의 도움으로 천자는 기적같이 목숨을 구하고 한담을 사로잡으나, 황태후와 태자, 태후는 호왕에게 붙잡혀 가고, 이들을 구하려 충렬은 호국으로 향한다. 호왕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충렬이 쫓아올 것을 염려하여 人家를 모두 없애 충렬은 굶주림에 지친 채 적진으로 들어간다. 이 때 일원 선녀 선창이 등장하여 지친 충렬을 도와준다. 하늘이 충렬을 돕고자 용왕에게 분부를 내려 선녀를 보낸 것이다.사고무인 적막?? 난 ? 업난 일엽표주 강상의 ? 오더니 일원 션녀 션창 박긔 나아와셔 원슈의게 예?고 금낭을 ?너 과실 두 ?를 주며 왈 ?역이 곤&고?오니 과실 ? ?를 자시고 ? ?는 두엇다가 일후의 ?련이와 지금 황후 ?후 ?자 호국의 잡퍼 가셔 동문 ?도 상의 왼갓 형별| 갓초오고 자?을 ?촉?야 검술을 히롱?니 황후의 귀? 명이 경각 잇난지라 장군은 엇지 급?물 모로고 밧비 가지 안이 ?난잇가 두어 말 이로더니 범범즁유〃 가난지라 원수 ?경?야 그 과실 ? ? 먹고 천긔를 살펴 보니 ?자의 장셩이 ?러질 ? ?고 자미셩이 칼 ?? 달여?늘)3.2. 꿈을 통한 예시소설 속의 인물들은 현실적 존재이므로 장차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인물이 일상인과 다른 특별한 존재인 경우 꿈을 통해 그의 앞날을 예시하곤 한다. 꿈은 인간의 수면 중에 일어나는 정신작용이다. 꿈은 자발적이고 非隨意的인 성질을 갖는데, 이것은 조리 있는 합리적 사고와 다른 점이다. 꿈이 갖는 이러한 성질 때문에 예로부터 사람들은 꿈을 자신에게 무언가 알려주는 징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대에는 이와 같은 생각이 신비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사람들은 그 무엇인가를 알려 있다.
    인문/어학| 2006.12.30| 21페이지| 4,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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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가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 사상의 맹아로서의 실학 사상 연구
    한국 근대 사상의 맹아로서의 실학 사상 연구-박제가의 사상을 중심으로序論실학(實學)은 중세 사회의 해체기인 조선 후기 사회에 형성되어 당시 사회 개혁을 중요한 과제로 삼은 사상이다.) 조선 후기 실학이 발달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통치 질서의 동요, 성리학의 반역사성(反歷史性)),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중세 신분 질서의 붕괴 등의 내재적 요인과 서학(西學) 및 청대(淸代) 학문이 전래된 외래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역사의 부름에 부응하여) 실학은 오랜 지배 구조의 인습을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고자 하는 근대 지향의 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이와 같이 조선의 자생적인 근대화를 재촉할 수 있었던 실학 사상은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1801년(純祖1)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인해 진보적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이 탄압을 받으면서 근대화의 싹은 잘려져 나갔다.본 고에서는 근대 지향성의 의의를 살펴보기 앞서 실학 사상의 형성 및 전개, 이념적?학문적 특성 등에 대해 살펴보고, 그를 통해 실학의 근대 지향적인 면모를 찾아보는 한편, 근대화의 싹이 잘려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 상황과 실학 사상 내부에서 찾아보려 한다. 단 조선 실학파가 남겨 놓은 방대한 사상적?학문적 유산과 그 안에 드러나는 근대 지향성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어 북학론자의 하나였던 박제가에 한하여 언급하고자 한다.1. 실학 사상의 형성 및 전개1) 실학 사상의 대두와 배경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조선 후기에 들어 정치?사회?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체제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운동이 일부 선각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실학 사상의 대두인 것이다. 실학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대두하여 영?정조 때 전성을 이루어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은 학문으로 이 실학사상은 우연히 대두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 사회 등에 있어서 전반적인 변동에 따른 역사적 이다.2) 실학의 성격 및 의의실학이라는 용어는 통시대성(通時代性)을 지닌다. 즉 어느 시대이던지 간에 그 시대에 있어서 현실성 또는 현실적 의의를 지니는 학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학의 개념이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불교나 사장학(詞章學)에 대하여 성리학을 실학이라 하였고, 다시 양란을 겪은 뒤 공리공담으로 흘러버린 성리학에 반발하여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실학이라 하였다.)본고에서는 후자의 뜻에서 실학을 정의하므로, 여기에서 실학이 당시의 성리학적 학풍에 대한 반성적 토대 위에서 사회 현실의 구체적인 제반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실학이란 용어가 통시대성을 가지는 것을 통해 실학이 당시 지배층의 이념을 대변하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볼 때, 실학사상은 조선후기의 역사적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한 진보성향의 지식인들에 의해 제시된 탈 성리학적?근대 지향적 개혁사상이라 요약해 말할 수 있다.) 또 그 역사적 의의를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첫째가 민족주의적 성격, 둘째가 본고에서 살펴보려는 근대 지향성, 셋째가 피지배 계층을 대변하는 사상이라는 의의이다.)당시 성리학은 일종의 중세 보편주의적인 사상이었고, 조선 후기 집권층은 이러한 주세 보편주의에 얽매여 모화(母華)사상과 존주대의론(尊周大義論)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화, 역사도 중국의 일부분으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이같은 화이(華夷)사상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문화?역사에 자각하기 시작했고 그를 바탕으로 민족의 역사, 지리, 언어,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부문에 관한 연구를 체계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점에서 실학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둘째, 실학은 근대 지향성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나 이는 따로 분류하여 다루어보기로 하고, 실학의 세 번째 역사적 의의에 대해 얘기해보자. 민족주의적인 성격과 근대 지향성이라는 의의한다. 그 성격을 통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민중이 토대가 되는 개인 중심의 사회를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고, 국민 각자가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어, 누구나 자유로이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풍부한 자본력과 합리적 경영 방식만 보유된다면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이윤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또 사회적으로는 사회 각 계층이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이 되며, 사상적으로는 절대적 가치 체계에 의한 불합리한 구질서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고를 구현하는 사회를 뜻한다.이제 실학사상에 대한 개괄적인 언급은 여기에서 마치고 이를 바탕으로 북학파 중의 하나였던 박제가의 사상과 그의 사상에 드러난 근대 지향적인 성격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자.2. 楚亭 朴齊家의 북학론(北學論)1) 박제가의 실학 사상앞에서 실학 사상의 대두 배경을 통해 살펴봤듯, 성리학적 명분론에 급급하는 시대에 태어난 박제가는 훌륭한 학식과 포부를 갖추었음에도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서얼출신이었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신분에 구애없이 인재를 등용한 정조에게 발탁되어, 검서관으로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내각(內閣)에 비장된 서적을 마음껏 읽어서 식견을 넓혔고, 또한 국내의 유명한 인사, 박지원?홍대용?유득공?이덕무와 같은 훌륭한 실학자들을 사귀며 이용후생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었다.종래 성리학을 숭상하는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실학파 학자들도 농업을 중요시하고 상업은 말리(末利)라 하여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박제가는 이러한 사상을 오히려 정면으로 반대하고 상리(商利)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는 “재물은 우물물과 같은 것이어서 펴내면 퍼낼수록 나오지마는 그냥 두면 말라버린다)”하고, “검소하다는 것도 있는 것을 절용(節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예 없는 것은 검소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검소하다가 온갖 공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효종 즉위(1650)후 추진된 북벌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북학’은 북쪽을 배운다는 의미로 문화적으로 뒤쳐진 나라가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문물을 개혁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박제가의 북학론은 조선의 문물과 청의 문물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청의 문화가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전제 아래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저술「북학의」에서 중국과 조선의 문물을 상세하게 비교하고, 선진 문물의 수용을 통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강조하였다.)박제가가 생각한 조선 내부의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이었다. 그는 이러한 가난의 원인을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제도와 백성들이 사물이나 도구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문제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농업 기술과 문물제도를 익힘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다음은 박제가의 북학론을 농업, 상업, 기타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① 농법 개량을 통한 농업 진흥책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농사하는 방법을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논이 만경(萬頃)이 있어도 소용없다”고 하여 땅의 많고 적음보다는 주어진 땅에 대한 합리적 경영이 생산의 증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또한 “곡식의 생산은 사람에게 달렸지 땅에 달린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하여 농업의 주체로서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농사를 잘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사짓는 법을 전수하게 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박제가는 농업의 합리적 경영과 주체로서의 사람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종자 뿌리는 방법, 이양법, 농기구 관리 방법, 병충해 방지 등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비록 박제가가 농본주의적인 입장에 서있는 실학자는 아니었어도, 농업 진흥에 관심을 가지면서 농민의 유민(流民)화와 토지 겸병을 저지하자는 구민(救民)의 입장에서 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②상업의 중요성과 유통의 강조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농본주의적 입장에서 상업의 폐해를 강조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업을 긍정하는 학자가 있더라고 그것의 자 부응하는 내용으로 선비를 뽑아 적절히 기용하자 하였다. 또 군사면의 문제에서도 수레의 사용과, 일상 생활?군사의 문제를 하나로 결합하자는 주장을 통해 모든 사물과 산업이 비록 직접적으로는 군사를 위한 것이 아니어도 군사의 목적에 충당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또 박제가는 서사(西士)를 초빙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이 서양인들의 초빙을 권유하는 박제가의 태도에서 선진 문물을 배워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이와 같이 박제가는 여러 방면에서 공통적으로 선진기술?문화를 습득하여 용사론(容奢論)에서와 같은 능률적인 재생산을 통해 중국, 나아가서는 서양 문물과의 해로 무역을 개척하고 나라를 세우자는 근대 지향적인 면모를 비추었다.3. 역사 발전 단계의 역행 - 실학의 이상 실현의 좌절이상의 박제가의 사상에서 민간 상업 자본 이데올로기가 일부 생산 분야에까지 반영하기에 이르고, 실학사상 그 자체가 봉건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구폐론이라는 보다 농후한 근대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박제가는 신유사옥을 계기로 1801년 종성으로 유배되어 3년 후 풀려났는데 그 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다산의 유배생활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전반기의 봉건 반동 아래 실학의 정상적인 발전이 저지 당한 서글픈 상황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실학 사상이 정치에 반영될 기회를 놓치게 되고 이와 같은 민본주의에 바탕을 둔 개혁사상이 1870~80년대 부르조아 개혁사상으로서의 개화사상에 발전적으로 계승될 시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있었던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은 잘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박제가를 비롯한 실학자들이 내세운 주장은 시대적 요청에는 민감하였지만, 실학자들이 권력에서 소외되었거나 서자 출신의 이른바 불우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집권층이 피폐한 민생에 대해 돌봄 없이 정쟁(廷爭)과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게다가 .
    인문/어학| 2006.12.30| 9페이지| 1,5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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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행정 및 경영] 새로운 학교 경영, 대안학교 평가A좋아요
    새로운 학교 경영“대안 학교”-분당 以友 학교-? 제출일 :? 학 과 :? 학 번 :? 이 름 :1. 대안 학교란?가. 대안의 의미대안 학교, 대안 교육이라 칭하는데 있어 ‘대안(代案)’이라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안이란 ‘어떤 안에 대신 하는 안’으로, 이 용어 자체가 확정되어 잇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대안 교육의 영어식 표현은 'alternative education'으로 다른 어떤 유형의 교육을 대체하는 것인데 엄격히 말해 교육에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기존의 교육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새로운 교육이 과연 가능하지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와 같이 대안 학교, 대안 교육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부터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다. ‘대안’이란 용어에서부터 대안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안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나. 대안 학교의 개념)대안교육은 19~20세기에 개발 중심의 근대적 가치가 생존경쟁의 가치, 적자생존의 가치로서 인간간의 유대를 단절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자연환경과의 친화력을 약화시키고, 인간성을 비인간화하는 교육에 대한 반기로 나타난 운동이다. 이러한 움직임 중 대안학교는 정규학교나 비정규학교에서 교육 이념 및 운영방식의 독특성을 가지고 기존의 학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대안적인 학교의 형태를 말한다. 즉, 지식 위주의 기존 학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는 다양한 실천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다.교육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안학교에 대한 개념을 명시하고 있다."자연 친화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전수를 교육목표로 학습자중심의 비정형적 교육과정과 다양한 교수방식을 추구하는 학교를 말한다."다. 대안 학교의 등장 배경)대안 학교의 등장은 결국 근본적으로는 기존 제도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생의 개성과 창의성을 무시하고, 성적 작한 것이 대안 학교이다. 다시 말해, 대안 학교는 획일적인 공교육 제도가 초래하고 있는 각종 부작용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하여 시작된 교육 제도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 외에도, 학생관과 학습 내용 및 방법의 변화 인식에서 비롯된, 기존의 획일적인 학교 교육 외에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대안 학교 등장의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다.라. 대안 학교와 기존학교의 차별성(1)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기존의 학교는 학생을 단지 주어진 가치와 지식을 받아들여야 할 피동적 존재로 취급하는데 반해, 대안 학교는 학생을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존재 그리고 스스로 사물을 판단하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또 학생을 교사나 부모에게 종속된 것이 아닌 독립된 인격을 지닌 개체로 바라본다. 따라서 대안 학교에서 내거는 대안 교육은 주어진 교육 내용이나 그에 따른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런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학생의 능동적인 참여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즉 기존의 학교가 학생을 로크의 백지설 쪽에 손을 들어 바라보고, 산출보다 투입에 치중하는 데 반해, 대안 학교는 학생들의 잠재적인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가를 학생들에게 맡기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쪽에 손을 들어 산출에 치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만 봐도, 대안 학교와 기존 학교는 근본적으로 차별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란 곧 학생에 대한 시각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인데, 출발점이 다르다는 건 곧 그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출발점과 과정이 다름에도 기존학교나 대안 학교 모두 같은 도달점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2) 교육권과 학습권 문제대안 학교의 교육은 의 교육받을 권리와 의 학습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이다. 기존 학교는 학습자의 능력이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와 일치하지 않아 학습자의 학습권을 참여권, 지식과 사상 창출의 자유’를 통해 학습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즉, 교육과 학습에 관련된 권리 논의가 변천되는 과정을 통해, 교육 기관을 만들어 교육에 참여할 권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 주민들 스스로가 교육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권리의 전형적인 실례가 곧 대안 학교인 셈이다.) 교육과 학습에 관한 권리 논의 변천 과정교육할 권리→교육받을 권리→교육(기본)권의 핵심으로서소극적 학습권→적극적인학습권(3) 대안 학교의 유형제도교육과의 관련 정도에 따른 대안 학교 유형제도교육의 틀 속교육과정 운영이나 학교운영에 있어서 국가의 감독과 통제를 받는 공?사립학교거창고등학교, 참교육운동, 열린교육 등제도교육의 틀 곁정규학교는 아니지만 각종학교인학력인정 고등학교와 같은 형태풀무 농업기술학교와 영산성지고등학교, 분당 이우 학교 등제도교육의 틀 밖제도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자유로운 형태의 대안교육민들레학교, 숲속마을 작은 학교 등 운영 형태에 따른 대안 학교 유형정규학교형일반학교와 같은 형태로 운영되는 형태거창고등학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영산성지학교, 분당 이우 학교계절학교형여름 혹은 겨울방학 동안을 이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지는 형태대구의 민들레 학교, 부산 창조학교경남 산청의 숲속 마을 작은 학교,서울 따로 또 같이 만드는 학교, 등방과 후프로그램형학생들이 학교활동이 끝난 다음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방과 후 프로그램서울지역공부방연합회여럿이 함께 만드는 학교유아 교육프로그램형유아대상2. 또 다른 대안 학교 - 분당 이우(以友) 학교이우 학교는 가정에서 통학이 가능한 도시형 대안 학교로, 중학교 과정 3학급, 고등학교 과정 4학급씩 총 21학급 4백 20명 규모로 중?고교 6년 과정을 통합 운영한다. 이우 학교는 정규학교형의 대안 학교로, 일반 학교의 기본 교과 내용을 교육하나, 기존 학교 교육 과정의 틀에서 벗어나, 창조적으로 재편성하여 이루어진다는 차별성을 갖는다.또, 학급 규모를 20명으로 제한하고, 3년 연속 담임제를 실시하며, 학생 선발 시, 학생의 사회학교의 교육 이념성, 계급, 인종, 종교, 장애 여부를 가리지 않고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과 환경을 소중히여기며 21세기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지혜를 터득하는 사람으로 길러낸다또한, 이우 학교는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 학교와 차별성을 갖는다. 기존 학교의 머리로만 지식을 습득하는 데 치중하는 교육 방법이 아니라, 온몸으로 배우는 교육 방법을 고수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삶과 지식의 합일을 도모하고, 지성, 감성, 의지를 고루 함양하도록 한다. 교사의 역할 또한 적성과 흥미가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지식을 주입하는 기존 학교 방식을 지양하고, 학생 중심의 열린 교육을 추구하도록 한다. 수업 진행 역시 문제 해결식 수업 전략, 모듬별 학습과 개인별 학습의 조화, 학생 스스로가 연구?발표?토론하는 세미나식 수업, 정보화 교육, 교사의 적절한 안내와 조언?강평식으로 진행하여 기존 학교와의 차별성을 꾀하는 정규형 대안 교육을 하도록 한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기존 학교와의 차별성을 지닌 엘리트 교육만을 지향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회의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려 한다는 넒은 의미에서의 엘리트 교육 지향은 맞을지라도, 이우 학교는 엘리트 교육이 아닌 전인 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지식 교육을 위주로 하는 엘리트 교육의 전형인 특수 목적고와 엄연히 다른 것이다.이우 학교의 차별성은 학교 경영에서도 드러난다. 이우 학교의 설립은 공교육의 파행에 반기를 드는 교육 운동가와 뜻 있는 시민, 학부모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졌다. 사립학교 대부분의 경우 재단 이사회, 이사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 학교 교육의 공공성(公共性)을 훼손하고 있으며, 학교의 한 주체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학교 윤영에서 철저하다시피 소외되어 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이우 학교는 ‘이우 학교 설립 추진 위원회’를 모태로 하여 학교 법인을 설립, 법인 이사회를 민주적으로 선출해 학교의 살림을 뒷받침하고, 학교 윤영위원회를 활성화하여 학교 운영 및 교육 전반에 걸쳐 학부모들의 의견을 폭넓게 시각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대안 학교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도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기존 학교 제도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인 교실 붕괴, 학교 붕괴, 권위주의적 학교 체제 등을 대신해 줄 방안으로 보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다. 또, 반면 교육 당국에서 특성화 고등학교 법제화 초기에 대안학교가 갖고 있는 여러 성격 중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안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라는 측면을 너무 부각해 대안 학교를 이른바, 불량학생들이 보이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 있어 대안 학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입장이 있다. 즉, 정부가 기존 학교의 폐해를 뒤덮어 줄 만한 대안 학교를 제도 교육 내부로 끌어들이려고 한 결과 대안 학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커진 셈이다. 이런 까닭에 대안 학교를 설립에 있어 지역 주민들의 설득?이해가 필수 요건으로 남겨진 상황이다.하지만 이우 학교를 바라보는 분당 지역 주민들의 시각은 좀처럼 남다르다. 일단 대안학교라면 ‘불량한 학생들의 집합처’로 여겨지고, ‘학교 부적응의 무언가 모자란,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모임’이라는 오해를 사 대안 학교 설립에 달그닥 소리를 내기기 쉽상인데, 이우 학교는 학교 기공식에 동원동 일대의 주민들이 참석하여 학교의 무사한 공사를 고사할 정도로 학교 설립에 나름대로 순조로운 상황이다. 이러한 것은 분당 지역의 신도시라는 특성과도 관련지을 수가 있는다. 분당 지역은 주거를 목적으로 설립된 신도시인 까닭에 여러 지역에서 학생들이 한 학교, 한 교실로 모여 들 수 밖에 없다. 즉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색깔을 가지고 모인 아이들이라 그만큼 교실 붕괴, 학교 붕괴, 탈선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보다 좋은 조건을 갖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학교 제도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거둬들일 이우 학교와 같은 도심형 대안 학교를 요구하게 되고 이우 학교와 같은 대안 학교, 대안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와 .
    교육학| 2004.12.23| 7페이지| 1,000원| 조회(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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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행정 및 경영] 교단 내 갈등 사례 연구
    ? 교단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 사례 조사 ?- 갈등 양상?해소 방안들어가며교단 내 생기는 갈등은 교육적 측면)에서나, 사회적 측면)에서나 해결되어야만 하고, 또 해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지난 4월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심에 부응하여 교단 내 일어나는 갈등 사례의 조사를 통해 갈등 양상과 그 해소 방안에 대해 살펴보았다. 갈등 사례 조사는 본인의 학창 시절, 신도시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갈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례 조사는 당시 학교에 재직했던 교사와의 면담을 통해 하였다.1. 갈등의 시작1996년 A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교단 내 갈등에는 ‘신도시’이란 지역과 ‘신설 학교’라는 배경이 있었다. 새롭게 개척한 땅에는 토착 세력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평화롭지만 개척민 모두 실세를 잡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A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신설 학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사들 간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교조 교사와 비전교조 교사간에 갈등이 생겼다.갈등의 시작은 앞에서 예를 든 개척민들의 권력 싸움과 같은 작은 데서 비롯되었다. 학급 편성을 하는 과정에서 한 보직 교사가 회의 때 우열반 학급 편성을 제안하고 나섰는데 몇 교사가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고 한다. 마침 이 보직 교사의 제안에 반대했던 교사들이 대부분 전교조 교사였는데, 이에 교감 승진에만 급급했던 이 보직 교사가 자신의 제안을 반대하고 나선 전교조 교사들을 학교 육성회장과 한 전교조 교사 사이에 생긴 갈등을 틈타 학교에서 내쫓으려 했다.학교 육성회장과 전교조 교사 사이의 갈등은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하는 육성 회장이 각 학급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 몇을 뽑아 과외를 하려던 계획이 한 전교조 교사로 인해 허사로 돌아가면서 생겼다고 한다.이러한 사건을 시작으로 한 교사와 한 학부모의 개인적 욕심으로 인해. 그리고 이에 전교조 교사들이 강력 반발해 오히려 교장과 보직 교사를 학교에서 내쫓으려고 강제 전출의 리스트에 올라와 있지 않은 다른 교사들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의 세력 다툼 분위기상 자신의 몸 사리기 일쑤였던 교사들이 협조에 부응하지 않았고, 이러한 일이 전교조 교사와 비전교조 교사의 갈등으로 크게 번졌다. 이렇듯 일이 크게 벌어진 데에는 일의 원인 제공자라고도 볼 수 있는 보직 교사가 이솝우화의 박쥐처럼 행동한 영향도 있었다. 교장 앞에서는 학교 내의 갈등이 빠른 시일 안에 해소되어야 한다면서 자신의 건전한(?) 입장을 내세웠고, 뒤에 가서는 비전교조 교사와 전교조 교사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자리만큼은 고수하려했다. 사건의 전말에 자신은 아무 관계없는 양, 비전교조 교사에게는 전교조 교사로 인해 학교가 어수선하다며 그들을 두둔했고, 전교조 교사에게는 자신이 교장에게 잘 얘기해 주고 있다며 전교조 교사의 반발 행동을 잠재우려 - 그렇게 해야 전교조 교사들의 강제 전출이 순조로워질 테니까 - 했다.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작은 갈등이 전교조 교사와 비전교조 교사라는 큰 범위의 갈등으로 번졌고, 그러는 과정에서 마치 조선 시대 붕당 싸움이라도 되는 냥 사소한 이유를 들어 서로를 헐뜯었다. 예를 들어, 전에 아무 일 아닌 듯 넘겼던 한 전교조 교사가 일과 시간에 숙직실에서 음주를 한 것이 징계 이유로 불거졌고, 한 문제 학급이 전교조 교사의 담당 학급인 것조차도 교사의 자질 문제로 논하게 됐다.3. 갈등의 결말 - 갈등 해소 방법이러한 교사들 간의 갈등이 학생들의 눈까지 보이기까지 했는데 학부모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자식 일이라면 발벗고 뛰어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사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학교 내의 묘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어머니회’에서 전직 교사였던 어머니를 중심으로 갈등에 휘말려 있지 않은 몇 교사들과 함께 교사들 간에 패어진 깊은 골을 메우려 나섰다.우선 ‘어머니회’에서는 갈등을 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회’에서는 교장과 육성회원들을 한자리에서 모아 전교조 교사에 대한 오해-문제 학급이 전교조 교사의 학급 운영 미숙으로 인한 것이라는 오해와 전교조 교사가 학교에 있음으로 인해 학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오해 -를 풀고, 육성회장과 소수 비전교조 교사 사이에 있었던 과외 계획을 언급해 육성회장의 퇴임을 요구했다. 또 교장이 육성회장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학교 재정상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육성회원들과 의논, 학교 발전 기금을 관리하는 운영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일에 전말에 있었던 비전교조 교사와 전교조 교사, 보직 교사, 육성회장, ‘육성회’ 등 모두의 회식 자리를 마련하여 학교에서 교사간 세력 다툼보다 중요한 일이 학교 발전에 있음을 부각시켰다. 그 회식 자리에서 언급되었던 갈등의 해소 방안은 다음과 같다.1. 전교조 교사가 일과시간에 숙직실에서 술을 먹은 일에 대해→ 전교조, 비전교조를 떠나 일과 시간에 교사가 음주를 한 일은 마땅히 징계 받아야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간 지난 일을 끌어들여 일을 크게 버릴 필요는 없다. 학교 이미지에 해가 되는 일이다.2. 비전교조 교사가 육성회장과 손잡고 과외 지도 계획을 세운 일에 대해→ 아무리 대상이 육성회장일지라도 학교에서 교사가 과외를 주선한다는 것은 위법에 해당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공공연히 다른 학교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역시 일이 커져봤자 아직 형성되지 조차 않은 학교의 이미지에 해가 되는 일이니 대(大)를 위해 소(小)를 눈감아 두도록 하자.3. 문제 학급으로 인해 전교조 교사의 자질 문제가 논의된 데 대해→교사의 학급 경영 미숙으로 인해 문제 학급이 생겨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한 학기조차 지나니 않은 상태에서 학급을 문제 학급으로 나누는 것도 잘못된 일이고, 교사의 학급 경영을 운운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어머니회’에서 ‘학생 선도 어머니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의 생활 지도와 학교 이미지 조성을 돕겠다.4.공에서 시작된 일이고, 교사의 장래와 학교의 이미지 상 좋지 않으므로 없던 얘기로 하고, 교장과 전교조 교사의 화해로 마무리짓자.그리고 ‘어머니회’에서는 한 달에 한번 교사들과 ‘어머니회’, ‘육성회’의 화합 자리를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갈등으로 인해 학교 이미지가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고, ‘어머니회’와 입장을 같이 했던 몇 교사들의 제안으로 한 학기에 최소 한번 교직원 체육 대회를 열어 단합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러한 갈등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A학교의 ‘학생 선도 어머니회’는 경기 교육청에서 교육 소식으로 소개할 정도로 학교 이미지 형성에 좋은 영향을 끼쳤고, 교직원 체육 대회 및 화합의 자리는 지금까지도 학교의 전통인 냥 자리 잡아 교사들 간의 화합을 꾀하고 있다고 한다.4. A학교 갈등 사례 조사를 통해 본 교단 내 갈등 해소 방안갈등이란 둘 이상의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면 언제나 일어나는 사회적인 현상인 것 같다. 아무리 비슷한 성격, 성향의 사람일지라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해 관계에서 갈등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 탄력을 받아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기도 하지만, 때론 이런 갈등이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교단 내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교단 내에서 일어나는 작은 갈등이 더 나은 타협점을 찾는데 탄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앞의 사례에서 살펴봤듯 작은 갈등이 수습할 수 없는 큰 갈등으로 번지는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만약 학급 우열반 편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 논란이 일었을 경우 우열반 편성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우열반 편성이 아닌 참신한 학급 편성을 했더라면 학교의 독창적인 특성화 교육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예를 들어 대구의 한 중학교에서 운영한다는 코스모스 반 같은 운영 말이다.A학교의 교단 내 갈등은 일이 크게 벌어지기 전 수습할 수 있었던 갈등이었는데,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 사람들의 성향 탓인지, 개인과 개인간의 갈등이 전교조, 비전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신도시 지역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A학교가 신설학교로 학교 기반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A학교의 교단 내 갈등은 어쩌면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교사들이 신설 학교라는 공간에 모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가운데에서 보직 교사의 제안에 몇 교사들이 반대를 했다면 그 반대는 생각이 다른 ‘개인’의 단순한 의견 차이로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개인’이 아닌 ‘전교조’라는 또 다른 집단의 반대로 보여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갈등이 더 커졌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보직 교사의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갈등의 골이 더 깊게 패어졌다고 생각해 볼 때 만약 보직 교사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있었더라면 전교조 교사도 비전교조 교사도 교장도 보직 교사의 말을 한번 더 걸러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다.그렇다면 신설 학교에 모이는 교사들은 자신의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신설 학교에서 이러한 갈등은 반드시 지나쳐야 되는 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지? 두 방안 모두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방안은 교장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교장은 장학의 책임과 학교 행정 및 경영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교사들 간의 화합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는 교장의 책임 하에 교사들의 단합을 꾀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등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또, 교사들 간에 갈등이 일었을 때, ‘교사’라는 공동체적인 생각 전에 전교조 비전교조의 이분법적인 소속 집단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 조정해야 하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교장 책임 하나 교육부 책임 하에 교사들의 소속집단에 대한 편견을 버릴 것을 조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장이 교사들에게 전교조의 잘못된 인식을 버리게 한다거나, 아니면 교사들 사이에서 전교조 비전교조로 나뉘 된다.
    교육학| 2004.12.23| 6페이지| 1,000원| 조회(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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