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반 " -『한국사의 재조명』역사교육과 9763015 박준현우리의 역사에서 느껴지는 양반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속에 양반이라는 단어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란 너무나도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대개의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이 아닐까한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기존의 양반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쟁을 일삼고, 하위계층들을 착취하고, 그때 당시에는 당연했을지 모르지만 지금보면 너무나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유교적인 관념과 중국제일주의의 보수적이고 행동을 일삼는...... 이런 무수한 부정적 수식어가 연상되는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양반이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우리의 고유한 신분(?) 혹은 사회현상이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는 양반이란 실체를 타율성론, 정체성론 운운하며 우리역사를 왜곡하고 비판하던 일본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 다소 신선했고, 과연 어떤식의 서술이 이어질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고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우선,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바로 양반은 하나의 명확한 계급이나 신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나 아니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 양반은 노비나 상민 등과 함께 조선사회를 구성했던 하나의 규정화된 신분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양반이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관습을 통해 형성된 것이며, 양반과 비양반의 한계기준이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극히 명확한 기준에 의해 확정된 계층으로도 양반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명확한 기준이 성립되지 않아 양반으로서 규정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이들을 양반이라고 부를수 있는 과거사회에서의 또다른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얘기하는 재지양반층(농촌에서 주로 거주하며, 지극히 명확한 기준의 부재로 양반의 구분이 애매모호했던 양반들)은 이러한 주관적, 상대적 구분기준의 적합성과 배타성을 지니기 위해 18세기이전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선 경제적으로 보면 자신이 직접 농경을 주관하며 각종 농사기술이나 일정 들을 손수 관장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일과 방문객을 정중하게 접대하는 일을 최고로 삼고, 사회적으로는 향안, 향소 등으로 지방에서의 지도층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동족집단의 형성과 혼인, 학연의 관계망으로서 그들만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무척 애쓴 노력을 엿볼수 있었다. 이런 양반의 모습은 언뜻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었지만, 분명 입신양명으로 그들의 지위가 자타에 의해 완전히 공인되는 것이 아닌한 양반들의 지위가 법규제같은 제도적 장치로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이유로 나름대로 양반의 정의를 내려본다면, 양반이란 일단 "한정되어 있던 벼슬자리에 올라가야 그 존재를 명확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고, 이에 실패하면 그 나름대로 경제적,사회적 등의 측면에서 그들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 했던 하나의 사회적 집단"이라는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물론 이런양상은 18,19세기로 갈수록 경제적, 사회적 여건의 변화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양반의 행태 - 경제적으로는 하위 계층의 생산물에 철저히 의존하며 사회적으로는 하위계층의 신분상승 시도로 기득권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 로 차츰 변모하게 되지만,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양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하는 그들의 행태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쭉 이어져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모든 사상과 생각이 자유롭게 유통되고 교류되며 세계화, 국제화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양반이 그 중심에 있던 유교적 문화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지금의 유교적 문화양태를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이 사실이 오늘날 양반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 이전부터 16세기까지가 양반들이 그들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철저히 노력하던 사회가 주된 것이었다면, 18,19세기는 비양반세력들이 양반이 되기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비양반세력들이 사회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를 틈타 기존의 양반들이 소유하던 지극히 명확하게 규정될수 있는 구분기준을 제외한, 다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양반, 비양반의 구분기준에 상당히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이는 비양반세력들이 양반을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으로서 설정하고 이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기존의 양반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나 생활이념들이 사회 전체로 고루 확산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저변에 유교적인 문화가 자리하게 한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재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에는 과거 양반들이 애지중지하던 유교적인 관념에서의 문화라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양반지향성"에서 나온 것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유교문화권에 속한 여러 동아시아 국가중에서 한국이 유달리 그 문화적 흡수나 사회침투정도가 가장 깊고 넓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 같다.결국, 우리가 우리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유교적인 생활습관이라는 것은 역사의 산물이지, 결코 중국을 존숭하는 단순한 유교사상 지향적인 고유의 민족성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재지양반계층의 상대적 양반지위의 유지를 위한 시대를 1단계로 하여, 18,19세기의 비양반세력들의 양반신분의 성취노력으로 인해 사회 저변에 양반적 가치관과 생활이념의 하층침투가 바로 양반지향사회라는 사회적 현상을 낳게 된 것으로 결론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이 보았을 때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 전통적인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유교적관념성향의 것들은 기껏해봐야 생긴지 수세기에 불과한것이며 이것이 사회전반에 퍼지게 된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양반계층들의 양반지향적 성향으로 인해 양반적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사회저변에 확대되기 시작하던 18세기 이후의 일인 것으로, 이는 우리가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그리오래 되지않은 것일수도 있으며 오랜 옛날부터 변하지 않고 존재해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엄청난 실수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듯하다. 즉, 전통의 가변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론얼마전에 시간을 내어 조금은 생소한 오페라 '안중근'을 보러간 적이 있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노래와 다소는 과장된 몸짓들이 낮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하였다. 분명히 鼓手와 唱者 단 두명으로 구성된 판소리나 '아가씨와 건달들'같이 화려한 춤과 대중적인 노래로 무장한 뮤지컬과는 달랐지만 이 세가지 음악극은 말 그대로 '음악극'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듯 음악과 스토리가 공존하는 형태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는 이상에서 밝힌 세 음악극, 즉 판소리와 오페라, 뮤지컬을 비교하고자 한다. 물론 세 음악극 모두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각각 가지고 있겠지만 우선 크게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만큼 판소리와 비교하여 오페라와 뮤지컬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크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각각의 역사에 대해 고찰해본후 오페라를 중심으로 두고 오페라와 판소리, 오페라와 뮤지컬의 비교를 통해 전체를 살펴보도록 하자.판소리의 역사판소리는 18 세기초(숙종-영조때 AD 1674-1776)에 발생한 것으로 18 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전성기를 맞았는데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하여 양반들의 감상과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판소리의 주요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덕분에 판소리는 사설.음악.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었으나 민중적 현실인식과 반봉건적 예술적 심화나 문제의식은 일정하게 수정되어 얼마 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가지도 허용하는 굴절을 겪었다.20세기는 전기 5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이때는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판소리의 변화는 무대예술로서의 변화로 요약할 수.15해방 후 판소리는 여성 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해 ,1960년대에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정부의 지원으로 196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소생의 계기를 맞은 판소리는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학자.학생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오페라의 역사오페라의 기원은 바로크음악(16세기 말 - 18세기 중반)의 가장 중요한 공적중의 하나로 정확한 기원은 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1597년 피렌체, 베르디 백작 궁정에 모인 귀족들은 고대 그리스극을 상연하자는 논의에 몰두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여 4개의 악기만으로 이뤄진 음악극'다프네'이며, 현재 이를 오페라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완전한 오페라는 초기 바로크 시대인 1600년, 프랑스의 앙리4세와 마리아 데 메디치의 결혼식때 상연된 '에우리디체'로서 카메라타라는 일종의 클럽에 의해 발명되었다.그후,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몬테 베르디'에 이르러 오페라는 비로소 현대와 같은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의 특성은 1607년 작 '오르페오'부터 1608년 작 '그대는 죽었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의 악보는 지금과는 달리 생략된 방식으로 통주저음을 사용하였다. 또하나의 특징은 '카스트라토'라 불린 인공적 남성 소프라노 또는 알토이다. 이들은 소년기 때 이들의 음성을 평생토록 보존하기 위해 거세를 했고, 그 결과 오랜 훈련을 통해 남성의 힘과 화려한 음역을 겸해 가지게 되었다. 바로크 오페라는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중창과 합창 등 음악분야의 위대한 형식들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제후들의 궁정을 위한 오페라였고 봉건 계급의 사회관을 구현한 사람들의 오락이었다.뮤지컬의 역사18세기 유럽의 대중연극, 무용, 레뷰, 잡극,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비엔나 식의 오페레타, 프랑스의 오페지는 미국이다.미국에서 뮤지컬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존 케이시가 작곡한 " 거지 오페라 "가 상연되고 부터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의 오페렛타의 여러형태의 희가극이 소개되면서 미국의 뮤지컬은 크게 발전하였다. 노래와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오페라를 혼합한 형태의 악극형태인 "민트럴 쇼 ", 가벼운 뮤지컬 극인 "보드빌", 해학적인 내용을 담은 장막 풍자극인 " 벌레스크" 등이 공연되면서 미국적인 뮤지컬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미국의 뮤지컬이 영국 등 유럽의 오페렛타로부터 탈피하여 독자적인 형태를 갖춘것은 1920년대의 일이다. 이 시기에 롬버그 의 "사막의 노래 (1921)" 와 프림 의 "로즈마리(1925)" 같은 오레펫타 계열의 우수한 뮤지컬이 발표되었다.1928년 미국의 생활과 정서를 담은 획기적인 작품 "쇼 보트" 가 등장하면서 미국의 뮤지컬은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된다. 1942년에 들어서 미국의 뮤지컬은 눈부시게 향상되어 현대뮤지컬의 예술성을 갖추게 되었으며, 사업적인 대중극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미국의 뮤지컬이 새로운 전기를 맞은데는 1950년대 이후이다. 2차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후 전쟁의 아픔을 달래고 정신적으로 위로받기를 갈망하던 미국인에게 뮤지컬은 청량음료와 같은 공연예술이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뮤지컬은 콜 포터 , 레너드 번스타인 , 어빙 벌린 이 중심이 되어 버라이어티 쇼와 같은 대중적 성격을 털어내고 예술성은 갖춘 전문적인 양식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새로운 작품 "아가씨와 건달들 (1950)", "왕과 나 (1951)", "마이 페어 레이디 (1956)",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57)" 등이 발표되었다.1960 - 70년대의 미국 뮤지컬은 특유의 낙천적인 면이 사라지고 사회적 문제등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진지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헬로우 돌리 (1964)", "지붕위의 바이올린 (1965)", "헤어 (1967)", 고 호소력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1980년대를 맞으면서 미국의 뮤지컬은 대형 공연물로 각광받으면서 공연예술의 상업화를 주도하는 장르로 부상하였다. 또한 미국 중심의 지역성을 불식시키면서 세계인이 공유하고 향수할 수 있는 극예술로 그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판소리와 오페라오페라는 음악적 요소 외에도 문학적 요소, 시적요소(대사), 연극적 요소(극으로서의 구성과 연기), 미술적 요소(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무용적 요소등이 한 덩어리가 된 종합에술이다. 매력을 살 수 있는 범위도 넓고 규모도 크지만 반면에 작품으로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기가 힘든 것이다. 특히 극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느쪽으로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까다로운 문제이다. 지휘자를 필두로 음악쪽으로는 독창, 중창, 합창과 관현악이 있고 극쪽으로는 연출자를 중심으로 연극과 무용, 조명, 도구, 의상, 분장 등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독창자는 등장인물의 성격에 따라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으로 구분되며 전통적인 오페라일수록 그노래는 하나하나 완결된 독창곡이 많다. 합창은 극속에서 군중의 역할을 하며 관현악은 성악과 무용의 반주를 하면서 등장인물의 감정, 성격, 행동등을 묘사하거나 강조하고 무대분위기를 묘사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그 외에도 관현악은 막올리기 전의 서곡을 비롯해 막과 막 사이에 간주곡과 끝의 휘나래로 연주한다.오페라의 대본은 보통 희곡과 마찬가지로 韻文으로 쓰여지며 막, 장, 경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페라 대본은 전문가가 따로있어 작곡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쓰여져 왔으나 그후 연극을 위한 희곡에 곡을 붙이는 경우가 있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작곡자 자신이 대본을 쓰는 경우도 있다. 배역은 주로 높이와 종류에 따라 구별해서 정해지지만 대부분이 소프라노와 테너가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많다. 출연인원은 소규모로부터 수십명, 수백명, 그리고 관현악반주에 백여명의 악사, 그 외에도 스텨진들이 있다.오페라를 군중 공동 같은 입장이지만 판소리의 개인은 그것이 전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판소리의 창자는 매우 책임이 막중한 것이며 반면에 엄격한 제약없이 자유분방한 잇점이 있는 것이다.판소리는 소설체로 된 장편의 이야기를 혼자서 노래와 아니리(대사)그리고 발림(형용동작)을 섞어가며 극적인 효과를 발휘해 수많은 관중을 울리고 웃기는 음악예술이다.이때의 반주는 오직 북 하나뿐으로써 이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 짧으며 두시간 길면 여섯, 일곱시간을 노래하는 창자를 도와 재미있는 북가락과 얼씨구, 좋지, 좋다, 어이, 좋구, 암, 그렇지 등의 감탄사(추임새)를 구구절절에 넣어 창자는 물론 청중들까지 흥을 돋우게 되는 것이다. 창자와 고수는 언제나 콤비를 이루게 마련이며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안된다. 일고수이명창이란 말은 이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우리나라 남도지방에서 발생해서 성장해온 이 판소리는 오늘날에는 전라도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민의 예술로 등장되고 있는 것이다.그 사설은 열절의 춘향가, 효성의 심청가, 우애의 흥부가, 정충의 수궁가, 신의의 적벽가등의 인륜을 노래한 다섯 개의 작품이 지금까지 잘 전해오며 장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옹고집전, 배비장전 등이 노래없이 사설만 전하고 무숙이 타령, 강릉매화전, 가까신선타령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이렇게 한 사람의 창만으로 불리우던 판소린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등장인물을 배역에 다라 나누어 맡고 관현악 반주를 붙이고 무대장치와 조명, 의상 등을 갖추고 무대위에 오라서게 되니 이것은 곧 창극인 것이다.오페라와 뮤지컬오페라와 뮤지컬은 우선 그 원류가 유럽임이 같고 또한 뮤지컬이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장르이기에 형식면에서 둘은 상당히 유사한 점을 보인다. 우선 오페라에서 등장하는 독창, 합창, 중창, 서곡, 간주곡등이나 아리아등등 오페라에서 들어봤을 법한 단어가 뮤지칼에 그대로 등장하는데 판소리처럼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나 악기등에서처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인물들이 무대에 등장하여 극적요소와 .
지난 1945년 해방에 이어 우리민족은 곧 분단을 맞게 되었고 이어서 6.25라는 민족적 참상을 겪으며 남북한 양측은 각각의 체제 안에서 이질적인 역사적 행보를 계속해왔다. 그 결과 해방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양측의 사회, 문화적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는 보이는데 여기서는 그 중 남북한의 음악에 대해 비교해보기로 하자.이러한 비교를 위해서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체를 분단에 따른 당시의 과 함께 각자의 길을 걸어온 북한과 남한의 음악적 전개상황과 그 특징등으로 분류하여해방 당시의 남북한의 음악적 환경역사적으로 서울이 음악중심이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해방 후 북한은 50여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해방직후 북한음악계는 남한에 비하여 전문음악인 수.단체.교육기관 등의 음악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남한에는 국악원.구왕궁아악부 등의 전통 음악계와 조선음악가동맹.고려교향악협회등 양악계 등의 조직체가 있었다. 남한 전국의 전문음악인들을 거의 망라하여 1946년에 전문화 된 조직체들이 서울과 지방에 산재되어 있는데 비하여, 북한은 음악전문가를 비록하여 동호인 중심의 조직들이 각 지방별로 산재해 있다가 1946년에 가서야 전문가 중심의 음악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북조선음악건설동맹'이 1946년 3월에 조직되었고, '중앙교향악단'이 1946년 7월에 조직되었다가 1947년 1월에 '국립교향악단'으로 재편되었으며, 1947년에 국립합창단, 북조선가극단등의 양악계와 조선고전악연구소와 같은 창액계 조직이 있었다.교육기관에서도 남한에서는 1946년 2월에 경성음악하교가 설립되고 같은 해 8월에 국립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흡수 발전하였으며, 지방에서도 경주예술대학원과 대구음악학원등을 비롯한 사설 연구소 등이 전국에 있었다. 반면 북한은 1949년 3월에 대학제에 의한 국립음악학교 창설을 결정하여 평양 및 각 도에 산재되어 있던 음악연구소들을 통합하여 평양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동시에 해주예술전과학교를 발전시킨 것년 국립음악학교가 1952년 11월에 해주의 학교와 통폐합하여 5년제의 평양음악대학으로 개편한 데 이어, 현제에는 35개의 전공학과가 있는 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발전하였다.북한음악의 전개이처럼 남한에 비하여 열세였던 북한음악계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1950년 직후였다. 그것은 6.25로 인하여 100여명에 이르는 음악인들이 월북한데서 비롯된다. 그 음악인들이 당시 한반도차원에서 전 장르에 걸쳐 민족음악을 추구한 중진으로서, 월북으로 북한의 음악계 조직과 전문기관이 개편되었고, 여기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으로 유학시켜 부단하게 음악인들을 양성시킬 정도로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는 점등이 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북한은 1966년부터 천리마시대를 맞아 민족음악의 현대화와 함께 혁명적 음악예술의 창작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월북한 민족전통음악계가 판소리 발성과 창법이 비판받는 것과 같이 이 기간에 위축을 받는다. 이 기간 북한은 음색과 주접을 현대적 미감과 시대요구에 맞게 발전시켜야 민족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아 민족전통악기 개량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맑고 밝으며 유순한 음색'이 기준이었다. 1963년에 평양과 지방의 음악전문가들과 음악극장 관계가 그리고 악기공장들이 참가하여 약 150여 점의 개량악기와 창안.제작한 악기들이 나왔다. 1966년부터 민족음악이 주체가 되어야함을 정식화하는 북한은 1970년부터 1980년까지 '피바다식 민족음악 구현시대'로서 「피바다」(1971), 「당의 참된 딸」(1971), 「꽃파는 처녀」(1972)등의 가극이나 그 밖의 창작품, 또 민족악기와 양악기가 배합하거나 민족발성과 영악발성이 배합되는 '주체적 관현악 편성이나 합창'이라는 '배합관현악'또는 '배합합창'등의 편성법이 확립되어 창작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평양악기공장 연구팀에서 개발한 전자종합민족악기인 주체5형을 내놓아 여러 단체에 편성시커 나갔다.80년대에 들어와서는 1982년 주체사상이 완성체계로 등장하여 전분야에 적응,. 1987년부터 주체음악총서 전 15권 중 제1권인 『주체적 음악에술 건설방침』이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곧,, 주체음악의 기본특징과 주체음악 건설의 기본원칙 그리고 그 실천방도를 구체화하고 있는데, 그 주체음악이 민족음악이다. 민족음악개념이 주체음악으로 뚜렷해지기 시작하였다. 민요의 개념, 종류, 장단, 조직구성체계, 굴림새, 화음구성의 원칙, 관현악법, 악기법, 배합편성의 원칙, 양성에 대한 민성 발성법의 원리, 농현과 미분음, 끌소리 등 민족 전통음악에서 본색이 과학적으로 밝혀 발전시키는 원칙들이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또 창작, 연주, 교육, 연구, 메스컴 분야에 이론과 실제를 적용해갔다. 1981년 12월에 『리조실록』과 가 1986년의 『경국대전연구』등 한글번역이나 연구서의 예와 같이 세종과 세조 시대의 궁정음악을 비롯하여 각종 고악보들을 '민족음악의 빛나는 유산'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평양음악대학 악기전시실에 『악학궤범』에 의거하여 아악기들을 복권 전시하는 것도 80년대이다. 또, 1985년의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의 노래」, 음악무용작품「행복한 노래」, 1988년에 평양에술단에 의하여 '기념비적'작품들을 내놓기도 하였다.남한음악의 전개현재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음악형태는 전문음악인들이 전개하고 있는 음악과 국민들의 사회적 감수성으로 반응하고 있는 음악으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다. 전문음악인들이 전개하고 있는 음악은 전통음악으로서 국악과 전통음악에 바탕을 둔 창작국악, 양악의 바탕에서 전통음악과 대화하며 창작한 음악, 그리고 서양음악이 있고, 국민들의 음악 감수성으로 반응하고 있는 음악은 일본풍과 서양풍의 대중음악이 그것이다. 지난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정할만큼 남한사회에서 전통음악의 기반은 일본풍과 서양음악에 대하여 음악제도와 국민들의 감수성 그리고 문화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그 현상은 분단과 6.25 이후 국가의 문화정책 부재와 서구식 사회제도화에 기인한다.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가 서양음악으로 분을 서양음악 중심의 음악대학들이 제도화한데 비하여 1954년 덕성여자대학교 국악과와 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가 생길 정도로 교육기관에서 뒤늦게 시작하였고, 또, 모든 음악대학에서 전텅음악이 중심이 아니라 서양음악이 중심이 된 '음악대학'에 '국악과'난 '한국음악과'가 소속되어 있다는점. 1950년 1월 19일 대통령 제271호로 아악중심의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한데 비하여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생긴다는 점, 1995년 실시할 6차 교육령에 가서야 전통음악교육이 명시된다는 점, 그리고 정부의 문화체육부과 90년대 특히 UR협상체결 이후 국제개방과와 함께 민족문화정책수립이 비로소 본격화한다는 점등에서 서양음악 중심으로 제도화하였다. 이 제도화의 상징은 음악 용어에서 반증할 수 있는데, '음악'이란 일반적 용어가 '전통음악이나 국악'이 아니라 '양악'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이처럼 한국음악사에서 전통음악의 기반과 중심은 남한이었지만, 분단이후 지금까지 전개한 음악사회가 순기능으로 본다면 ' 국제적 다양성 음악 익히기'인데 비하여, 역기능으로 본다면 전통음악해체를 가속화하여 일본과 국제음악에 대한 모방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도 국가적인 음악정책이 부재한 상태이었으며, 더욱이 개인적인데다 주로 양악악단 중심으로 제도화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북한 음악사회의 전통해석북한에서는 전통이라는 의미의 해석은 지금까지는 민족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1926년 이래 혁명전통으로서 더욱 확립된 주체의 사상체계에 의하여 계승하며, 현재에 적용은 물론 앞으로도 발전계승시켜야 하는 근본을 가리킨다.아울러 민족음악의 전통이란 지금까지의 전 인민대중이 이룩한 음악전통을 오늘에 창조적으로 계승하되 그 기준은 1926년 이래 확립된 주체의 음악문예이론에 적용하는 음악전통을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음악전통에는 그 자체가 여러 요소에 의하여 매개되어 혼재되어 왔음은 물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의 민족들이 자주성을 지켜나온 음악이 민족음악이라서 무구하는 것은 시대성의 요구를 떠난 '복고주의'라고 비판한다.이 때문에 북한은 민족음악에서 주체를 세우며 현대화를 철저히 구현하는 방향으로 음악을 구조화시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민요의 현대화에 따른 재형상 문제'와 '민족악기 개량문제'그리고 '민족기악 작품 창작의 문제'등이 80년대 이후의 현재까지 중요한 과제로 추진되고 있다. 말하자면 개화기 이래 접촉된 일본제국주의의 음악과 서양음악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남한과 더불어 예외일 수 없는 북한 음악현실이지만, 60년대 이후부터는 민족음악의 주체화와 현대화라는 기치를 들고 점차 다른 민족의 음악요소를 극복해가고 있다.예를 들자면 해방후에 나온 대표적 노래인 「김일성 잔국의 노래」(1946)나 「애국가」(1947, 악보2)는 서양의 장음게에 의한 노래이고, 「문경고개」(1950)등은 서양의 단음게에 의한 노래이다. 이러한 혼재성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북한은 먼저 노래에서는 민요적인 5음음계에 바탕을 두고 6/8박자, 12/8박자 등의 장단을 적용시킨 민족음악의 전통과 가사의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한 혁명전통을 음악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리고 기악곡에서는 3화음의 화성체계를 제외하고는 그 선율이 민요적이면서 노래적인 단락을 민요등의 전통조선악을 따르고 있다.그리고 모든 노래들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곱게 소리를 내는 발성법'이나 발주(發奏)가 될 수 있는 음색을 택하거나 앞의 노래에 적용한 기준을 바탕으로 민족악기에서 탁성을 제거하고 새로운 악기로 개량하는 새 관현악 편성법을 강구한다. 약기개량에 있어 대표적인 경우가 '장새납'이다. 태평소로 알려진 새납은 모든 조성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여러 조성의 악기로 개량한 것이 장새납이다. 이 악기가 개발됨으로써 독주.중주.합주용의 악기로 가능해진다. 새납에 비해 장새납은 음량이 작고, 음역이 넓으며 음색은 부드러우면서 표현력이 더 풍부한 악기로 알려졌다.이처럼 민족음악의 전통은 민용에 그 바탕을 두되 현대화시켜 음악을 구조화시키려는 것이 북한의 음악사
서론"역사란 무엇인가?"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교양수업으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들은 적도 있고,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저 막연할 뿐이다. 역사교육과에 입학한 이래로 비교적 많은 역사수업과 저서들을 읽어봤지만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과 회의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그렇기에 이처럼 스스로의 역사관조차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고대』라는 유명한 저서를 읽고 저자의 주장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소감을 밝힌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얕은 지식과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역사관을 바탕으로 감히 이성시 씨의 주장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자체가 일종의 시행착오의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몇 자 적어 보도록 하겠다.이 책에서는 지금껏 우리가 배워왔던 고대사 이야기는 우리의 현대적 필요에 의해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들을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발해사,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일본사와 식민지 역사학등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민족주의와 연결하여 논의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역사의 역할과 정의 측면에서도 논의될 수 있을것이다. 여기서는 이를 바탕으로 되도록 종합적인 내용을 담되 역사의 역할 측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본론역사 연구의 역할은 무엇인가?아버지가 역사교사였던 관계로 어렸을 때부터 틈틈이 아버지로부터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곤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역사적 지식 그 자체보다는 아들이 좀더 진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자라주길 바라시던 아버지였기에 그 역사 이야기들은 주로 우리민족의 우수함이나 위인들의 업적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던 것 같다.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아직도 생생히 기억속에 남아있는 그때의 아버지 말씀들을 떠올려보면 아쉽지만 실재와 동떨어진 부분도 있으며 일제 시대 우리 학계에 퍼져있던 민족사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내용들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한편 내 어린시절은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일종의 뿌듯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아버지의 사관이 내게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그렇다면 이것이 역사의 역할일까? 개인적으로 이것은 역사 연구의 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연 발전하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나는 역사 발전설을 믿고 있으며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는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과거의 힘을 빌려 만들어나가는 미래와의 대화라는 홉스봄의 주장에 동감한다.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고 그 과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로서 미래를 좀 더 밝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역사의 역할이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왜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내야 했나?왜 각국이 같은 역사를 두고 제각기 다른 해석을 했느냐에 대한 해답은 이미 명확하다. 과거 역사에 대한 제각기 다른 해석의 바탕에는 현재 정치현실에 역사를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었던 것이다.일본은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그러한 침략에 대한 반발로서 각자의 정치현실에 맞게 해석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광개토대왕비의 " "라는 내용은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낳았고 한국에서는 "삼한.삼국 일본열도내 분국설"을 낳았다.이는 발해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는 발해를 한국사 체계 속에 적극적으로 자리 매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래 '통일신라'라 불리던 이 시대를 동일 민족에 의한 두 구가, 곧 신라와 발해가 한반도 남북에 병존했다고 인식함으로써 "통일"에 얽힌 역사적 평가는 뒤집어지면서 "남북국 시대"라 호칭하는 방식으로 정착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오늘날의 분단 상황 극복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신라.발해 병립 시대에 투영하여 동일 민족이 남북으로 병립해 있는 부자연스러움과 불완전함을 환기시키고 통합에의 전망을 열어 보이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이 발해 지배층으로서의 고구려족을 중시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발해 영역 내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말갈족에 비중을 두면서 발해는 당대 소수 민족인 말갈인의 지방 정권이라는 견해를 드러내면서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한다. 이는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과 연관을 갖으면서 이를 위해 활용된 바이다.그리고 일본의 동아시아 세계론 역시 태평양전쟁 패전 전의 체제 아래에서 독선적으로 특이화된 일본사를 극복하고 새로이 세계사의 문맥 속에서 일본사를 이해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이며 그것을 위한 이론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구로이타가 총족부의 『조선사』편수와 고적 조사 보존이라는 사업을 계획한 것 역시 이 두 가지를 통해 시종일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이 배경에 깔려있었다.이렇게 고대의 역사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각국의 정치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각국의 국민들은 이렇게 잘 만들어진 역사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초중고교 12년을 통해 이러한 역사에 익숙해져 있다. 단적인 예로 나는 중2 국사시간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처음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국사선생님의 그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국사선생님이 삼한.삼국 일본열도내 분국설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진희의 '석회도포설'까지 언급하며 일본의 교활함과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열강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우리는 최근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에 분개하며 방송에의 연일 보도와 정부 자원에서의 항의까지 이루어 졌었다. 만들어진 역사가 버젓이 뻔뻔스럽게도 일본 국민에게 가르쳐지고 있다고하며 우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만들어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우리가 어렸을 적에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꼽으라면 가장 많이 꼽힌 위인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었을 것이다. 그 두 인물의 위대함을 조금은 비상식적인 수준까지 강조되었고 위인전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을까?이순신은 우리에게 국민적 영웅이고 역사서는 물론이고 소설, 영화로도 제작되어 그의 위대함과 충성스러움, 아울러 큰 이해심과 덕망 높음까지 강조되었다. 역시 중학 국사시절에 내가 국사 선생님께 들었던 말을 떠올려보면 "나폴레옹이 제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이순신 장군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하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한번도 진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기억이 난다.하지만 이는 최근에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순신이 부각된 데에는 민족사학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이 위협받던 개화시대와 뒤이은 식민지시대를 통하여 민족적 염원이 국권회복에 집중되었던 시대적 요청이 작용함으로써 우리에겐 민족적 긍지를 불러일으킬 영웅을 필요로 하였고 그 대상으로 이순신이 지목된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이순신은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성인(成人)인은 아닌 듯 하다. 최근 밝혀지는 사료에 의하면 그는 원균의 공을 가로채려다 문책을 당한일도 있고, 관직에 나감에 있어서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은 오히려 개인적인 능력으로 관직에 나가 승진을 거듭하는 원균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다. 또한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의 탁월함보다는 오히려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반면 역사적 패자의 진영에 있었다는 이유로 역사속의 유명한 "역적"이 되었던 원균은 그의 능력과 행적에 비해 너무도 폄하되었던 것이다.세종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글창제의 동기가 고유문자를 가지지 못한 국가적 체면과 민족의식, 그리고 세종대왕의 백성들에 대한 애정이라고 가르친 우리의 역사교육 역시 민족사학의 잔재인 것이다. 앞서 "모반의 역사" report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이는 분명히 고려 무신난 이후 백성들의 의식 수준의 향상과 그러한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문자의 교육이 필수적이었던 당시 조선 조정의 훈민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현실 정치에 역사를 끌어다 활용한 것이다.이러한 예는 비단 동아시아의 문제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세계 역사에서도 1947년에야 국가로 탄생한 파키스탄이 인더스 문명을 끌어대 ‘파키스탄 5,000년사’를 말하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악용된 점도 그럴것이고 제1차 세계대전 역시 그런 맥락속에서 왜곡이 이루어졌다. 1차 대전의 전쟁 책임은 모두 독일에게로 돌아갔지만 실상은 자국내에서 소화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해외 식민지 개척이 불가피했던 당시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주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으로 영국은 독일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돌리며 전쟁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자국 국민에게는 「자유주의의 수호」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국가적 이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만들어진 역사의 배경은 오직 정치적인 목적이 전부였을까?그렇다면 우리가 같은 사실을 놓고도 각국이 다르게 해석하는 배경은 오직 현실정치에의 활용이라는 한가지 이유밖에 없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과연 역사가는 현실정치에 활용되는 부속의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가 가운데 이토록 진정한 역사가가 없다는 말일까? 분명히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역사가 좋아서 역사가라는 긍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현실정치와 떨어져 한문연구에만 매진하는 역사가가 있을법도 한 대 분명히 현재 각국의 역사를 바라보면 같은 사실을 놓고도 각자의 나라의 민족적 긍지나 정치적 현실에 유리하도록 해석되고 있다.
중국문화의 이해- 한족과 소수민족의 대립측면에서 바라본 중국의 역사 -서론역사교육과에 입학한지 벌써 6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중국에 관한 레포트를 쓰면 항상 난감함을 느낀다. 중국은 정말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도 어려운 국가라는 생각이 해가 거듭될수록 더해만 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아시아의 최강국, 우리와 형제 혹은 군신관계를 맺어왔던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나라라는 중고교 수준의 피상적 이해가 중국의 실체라면 참 쉽겠지만 알수록 복잡하고 거대한 중국에 관한 내용들은 개인적으로 참 부담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굳이 주제를 선정하라면 소수민족에 관한 주제를 택하고자 한다. 최근에는 개인적으로 중국사에서의 소수민족에 관해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소수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강희제", "옹정제"라는 책을 읽으면서 부터이다. 내게 있어 야만과 강인함으로 대표되던 마치 칭기즈칸의 이미지와 같은 그들 소수민족에 대한 이미지는 이 책들에서 수정된다. 특히 옹정제의 성실함과 치밀함 등에서 느껴지는 정적인 이미지나 하루에 5시간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국정을 돌보는 일에 몰두했다는 옹정제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리고 동양사개론 수업을 통해 김택민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역사 속의 중국을 항상 요동치게 했던 북방의 소수민족, 하지만 김호동 교수의 "황하에서 천산까지"에 등장하는 현재는 너무도 나약하고 고통받는 소수민족의 모습은 충분히 흥미로운 탐구대상이었다.여기서는 그처럼 중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던 중국의 소수민족의 역사상 역할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만 특정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고 최근 관심 있게 본 역사관련 서적들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소수 민족과 한족을 좀더 공정한 눈으로 그리고 나아가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한 루트로서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한족 왕조의 커다란 과제로서의 소수민족중국 역사상 한족에게 있어 북방의 유목민족(소수민족)들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물론 이후 역사 속에서 이들은 중국 본토를 점령하여 한족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들 소수민족은 침략을 통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한족에게는 큰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항상 북방의 소수민족이 강성할 때만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초원은 유목민족(소수민족)들을 생활터전으로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을 먹고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살았다. 이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비단을 좋아하였는데 따라서 비단의 획득이 곧 권력의 획득으로 이어졌다. 결국 유목민족들은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비단 획득은 늘 평화로운 교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침략을 통해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세력이 강성할 경우 더더욱 침략은 빈번해진다. 하지만 반대로 초원에 가뭄이 들어 이들의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되어도 역시 남쪽에 대한 노략질은 빈번해진다. 초원에 가뭄이 들어 풀이 말라 그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남쪽 농경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결국 유목민족들이 강성하건 재해에 휩싸이건 농경지대의 한족들은 근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한족의 대응 또한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들을 정벌하려면 군대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군대를 보내면 군수품의 부담이 엄청나며 군사로 징발되는 장정은 물론이고 군수품을 운반할 장정도 동원하게 되므로 농사지을 장정의 부족하게 되고 그에 따른 세금의 가중은 결국 농민들을 군도로 만들게 된다. 중국은 풍년이 들어도 전 국민이 끼니를 잇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식량난이 심각하였으니 무리한 전쟁의 감행은 농민들을 토지를 떠나 약탈을 일삼는 군도로 만들고 갈대숲에서 운집하여 급기야 기존 왕조 자체에 위협이 될 대세력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이 지역은 갈대숲이 무성하여 농토를 떠난 군도들은 조정의 추격을 피해 갈대밭으로 숨어들고 의리를 중시하는 중국 특유의 성향과 대세결정론(혼란한 현실에 지친 중국인들이 그들중 누군가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그를 하늘이 내린 시대를 구할 인물 즉, 진룡천자라 믿고 그쪽에 합류하는 습성) 에 힘입어 단숨에 거대한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왕조 말기에 봉기한 화북 호걸들이 갈대밭을 무대로 하여 성장하여 결국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것 또한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은 이러한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쉽사리 이민족들에 대한 정벌을 감행 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진회와 같은 인물이 주장한 화친론은 비판받기는 하나 그의 선택 역시 국가의 안영을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국가의 존망자체의 위험을 겪지 않기 위해 한족왕조로서는 무력에 의한 공격보다는 치욕적이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다량의 예물을 보내고 또한 공주를 시집보내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게 되는 인물이 왕소군과 채문희 등으로 이들을 두고 지어진 시들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예물을 통해 이민족 왕조의 요구에 응한다 하여도 그 양이 어마어마하여 국가재정을 압박하고 국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는 마찬가지였으니 한족왕조로써는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지게 된다.이와 같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해 결국 남쪽의 왕조는 장성을 쌓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이 황토사상과 더불어 중국을 수천 년 간 제자리에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되고 만다. 당시 서양에서는 활발한 해외진출을 통해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더욱 지형적 폐쇄성을 이어가고 이와 더불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사회적 대붕괴는 중국의 과학기술의 역사, 나아가 중국의 역사를 처음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게 하였다.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본 그들의 현실이러한 내용들은 어쩌면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히 한족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를 우리가 그대로 배워온 지금까지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초원을 달렸던 유목민족, 즉 소수민족들은 오직 약탈과 침략을 즐기는 난폭하고 사악한 존재였을까?그들의 치열한 삶 또한 생존을 위한 그들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북쪽 지역은 초원과 사막의 유목지대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농업한계선과 일치하는 만리장성 이북으로써 매우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다. 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부세계에 대한 대응과 자연재해에 의한 떼죽음이 가져 주는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식량을 약탈하기 위한 부족적 단결과 타부 족으로부터 그들 자신이 약탈당하는 겨우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공동방어의 필요에서 단결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부족제적 국가의 성격을 띄고 있는데 이후 요, 금, 원, 청 등의 이른바 정복국가에 이르러서는 전제군주적 국가의 형태로 변모하면서 군사력 자체를 키워나가서 중국 본토를 지배하기에 이른다.이들 정복국가들은 한족의 본거지를 지배함에 있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구사했다. 북위의 경우 피로 얼룩진 유목민족의 역사 속에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효문제는 한화정책을 편다. 하지만 한화정책의 결과 한족의 물결 속으로 이민족은 뭍혀버린다는 사실을 깨닳은 이후의 정복왕조들은 한족과 섞이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다.이렇게 척박한 땅에서의 생존하기 위한 황하 북부지방과 그들의 침입을 방어하려던 남부지방의 대립과 갈등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양상에는 변화가 생겼다. 티베트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민족들이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성전까지도 순교까지도 불사하는 회족들, 중국에 정복되어 편입된 뒤 독립을 위해 수많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위구르인들과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면 예전 광할한 초원을 누비던 용사들의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더욱이 한족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 속에 등장하던 약탈자적 이미지는 더더욱 떠오르지 않는다. 더구나 한때 엄청난 군사력을 자랑하며 한족 본토마저 점령했던 정복왕조의 하나인 몽고족 마저 지금은 둘로 나뉘어져 있음은 세월의 변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청말기부터 지금의 중국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많은 이민족 지도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지금은 그러한 격렬한 항거는 없지만 여전히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다. "과거 40여 년에... (중략) ... 증오심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코 다른 민족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고대부터의 지금까지의 많은 유목민족들의 과제는 민족의 생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이는 역시 그들 유목민족 뿐 아니라 한족의 과제이기도 했을 것이다.한족과 소수민족이 이루어낸 중국역사이러한 사실들을 돌아보면 한족은 한족대로 소수민족은 소수민족대로 각자의 생존을 위해 한쪽은 침략을 막아야 했고, 또 다른 한쪽은 침략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들 양 진영의 역사적 대립은 중국 역사에 어떠한 현상을 가져왔을까?이것은 '중국사의 시스템 이론적 분석'에서의 김관도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그의 이론은 제법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나 역시 벌써 몇 번째 읽어보긴 했지만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충의 내용을 보자면 중국 사회에 세계에 유래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봉건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주기적인 위기.동란.붕괴의 과정을 거쳐 중국 봉건사회가 가지는 초안정 시스템에 의해 다시 예전의 구조로 돌아간다는 이론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 역사 속에서 이러한 동란은 200-300년을 주기로 계속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동란의 촉매재로서의 역할을 한 여러 가지 요인들 중의 하나가 이들 소수민족이 아니었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