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ting Myopia이 논문은 1961년에 발표된 비교적 오래된 글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인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 글의 타당성이 충분히 검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지금 쇠퇴 또는 퇴장한 모든 산업은 모두 한때 성장산업이었다. 이런 산업이 쇠퇴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경영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다. 경영자들이 자기산업의 목적이나 영역을 너무나 협의로 정의, 규정했고 제품지향적 사고로 경영을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로 미국의 철도산업과 영화산업이 있다. 미국의 철도산업은 자신의 산업을 광의인 운송산업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좁은 의미인 철도산업이라고 규정하였고 소비자지향적인 사고가 아닌 제품지향적인 사고로 경영하여 쇠퇴기를 맞았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는 영화산업이 근본적으로 오락산업이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즉 영화만을 만드는 제품지향적 사고 대신에 오락을 제공한다는 소비자지향적인 사고를 가졌었더라면 영화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나일론과 유리산업의 듀퐁과 코닝사를 살펴보자. 이 두 회사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경쟁력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욕구를 분석하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사실 그 산업에서 성장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드라이 크리닝업, 전기산업, 식료품산업의 예는 자신들의 산업이영원한 성장산업이라는 환상으로 인해, 즉 자신의 제품들은 결코 다른 제품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환상으로 인하여 과거, 현재에 있어서 사양산업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영원한 성장산업이란 것은 없고 단지 성장의 기회를 포착하고 창조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만이 성장산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꼭 쇠퇴기로 빠져들 뿐이다. 망해 가거나 망해버린 지난날의 모든 성장산업의 역사는 급성장과 그것 때문에 앞날의 쇠퇴를 보지 못하는 자기기만의 악순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순환에 빠져들게 하는 요인으로 4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인구증가에 대한 미신, 둘째는 제품에 대한 지나친 신뢰, 세째는 대량생산의 위력, 넷째는 R & D의 위험이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첫 번째는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이 보다 풍요해짐에 따라 제품의 수요가 늘어 성장이 보장된다는 믿음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시장이 자연히 커져서 자사의 제품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타성에 빠져 창의적이고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석유산업을 예로 들면 그들은 세계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석유수요가 자연히 증가할 것으로 생각하여 제품의 개선과 마케팅보다는 생산과 탐사에만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제품의 발전이 타회사에서 시작되게 하는 실수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인구 증가로 인한 근시안이기도 하지만 산업을 연료가 아닌 석유 또는 휘발유로 규정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기도 하다.두 번째는 제품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자사의 제품에 경쟁할 수 있는 대체품은 없다고 굳게 믿는 태도이다. 석유산업의 경우에서도 지금은 누구나 언젠가는 모든 분야에서 석유를 대체하는 연료를 사용할 것을 확신하지만 이 글이 쓰여진 때에 석유산업의 경영자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대체연료의 개발도 석유산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석유산업이 지금껏 생존하고 있는 것은 경영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쇠퇴기때마다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세 번째는 대량생산의 압력이다. 대량생산체제는 원가 절감으로 기업이 생산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즉, 많은 상품량으로 판매에 대한 압력이 가해지고 기업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판매를 할뿐, 소비자의 욕구 충족을 위한 마케팅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소비자, 시장조사를 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던 자동차 산업에서도 소형차가 잘 팔리는 현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소비자의 욕구를 알게된 것은 바로 생산비 절감에만 몰두하게 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제품지향적 사고에 빠지게 하는 대량생산체제의 함정이라 할 수 있다. 대량 생산체제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소비자의 욕구나 취향을 알아내지 못하고 또 새롭고 변화된 마케팅 제도와 관행에 적응하지도 못하게 되며 다른 경쟁산업이나 보완적 산업이 하는 제품개발에 대처하는데 실패하게 마련이다.마지막은 R&D 의 위험이다. 대량생산이 기업을 생산에만 집중하게 한다면 R&D는 기업이 기술연구에만 치중하게하여 제품에 대한 지나친 믿음을 조성하게 한다. 이것은 현재의 제품을 혁신,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으나, 제품지향적 사고에 빠지게 함으로써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마케팅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산업을 쇠퇴 또는 퇴장하게 만드는 요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산업이란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과정이라는 견해는 모든 기업가들이 명심해야할 중요한 핵심이다. 마케팅 마이오피아란 한마디로 기업가들이 이런 사고를 하지 않고 역으로 제품지향적 사고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경영자는 마이오피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이 과연 무슨 사업인지를 규정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단순히 제품만으로 사업을 규정해서는 안되고 제품의 존재이유를 생각하여 고객의 욕구와 필요가 그 사업의 근본목적으로 규정되어야 하겠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고객의 욕구에 경쟁사보다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가 이다. 이것이 바로 마케팅의 핵심이라 하겠다. 고객조사와 시장조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여 고객지향적 제품을 생산한다면 최소한 성장산업의 쇠퇴속도를 늦출 수 있으며 나아가 지속가능한 성장 또한 이루어 질 것이다.그리고 성장산업들의 운명이 제품의 편협화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된 예가 많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 어떠한 산업, 제품이 성장국면에 있더라도 언젠가 진부화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성장기에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그 산업이 성장기에 있을 때 과감하게 자신이 직접 대체제나 보완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대체제에 의해 자신의 산업이 쇠퇴할 것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마케팅 마이오피아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았다. 이 과제를 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40년 전에 벌써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고,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마이오피아에 빠져있는 사람, 산업이 많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의 산업은 아직 제품지향적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고객지향적으로 변하고 있는 과도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지난 40년동안 인구성장, 대량생산, 제품확신, R&D중시등 마이오피아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물론 소비자의 성향이 원시적이어서 소비자들이 욕구를 잘 분출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기업들은 제품지향적인 사고를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경영자들은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객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여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Myopia에 빠진 학생들나는 마이오피아에 빠진 가장 좋은 예는 우리들 바로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상품은 학생, 상품의 소비자는 기업이라고 가정하겠다. 쉽게 말해 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판매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학생을 분석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일제하 연희상과의경제학풍과 경제연구회사건연희상과는 한국 근대 경제학, 사상사의 메카였다. 그러므로 일제하 연희상과라는 학술집단에 대한 이해는 우리나라 근대 경제, 사상사를 알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학자들이 대부분 월북하거나 납북되었으며 다소 맑스적인 학문경향으로 객관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960년대 이후 구미경제학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그 당시의 학풍과 학술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번 과제를 통해 내가 속해있는 연세대 상대의 전신인 연희 상과의 성립과 일제하 활동에 대해 알수 있었다. 우선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요약해 보겠다.연희상과는 1915년 YMCA에서 개교하여 1917년 한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되었다. 연희상과가 본격적으로 교수진을 충원하고 연구활동을 조직하는등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20년대 중반기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상과 과장 이순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사상계와 경제학계는 학문관에 다양한 분화가 나타났다. 크게는 관학적 학문관과 이에 대립 저항한 반관학·반일적 학풍으로의 분화였고 반일 학풍내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사상과 사회주의 공산사상으로 나뉘어졌다. 이런 분위기속에 연희상과는 1924년 교수진 보강에 착수하여 다음해에 백남운, 조병욱외 3명을 영입하였다. 그리하여 연희상과는 일본과 미국, 이론과 실무의 균형을 꾀하였다. 연전의 학풍은 두가지 특징을 띄었는데 첫째는 반일·반관학적 성향으로 이는 이순탁을 비롯한 상과교수들의 학문적 기조이자 당시 연전 전체의 사상적 분위기이기도 하였다. 둘째는 자본주의 학문관과 사회주의의 학문관이 공존한 점이었다. 이는 연전의 학문적 자유주의를 반영하는 동시에 1920년대 중반의 한국 사상계와 학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상과 교수들중 이순탁과 백남운은 민족적 관점에서 맑시즘을 수용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전형적인 미국학풍의 체득자인 조병옥은 계급적 관점이 빠진 전형적인 부르주아경제학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맑스주의와 자본주의가 혼재했기 때문에 갈등도 있었지만 반일 반관학의 공통된 자세를 견지했으므로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연전은 학생들의 연구단체설립을 적극 지원하여 문과에는 철학연구회, 수물과에는 수리연구회를 상과에는 경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 중 논의의 대상인 경제연구회는 26년 창립총회를 통해 회칙을 확정함으로써 정식 출범했다. 경제이론 및 실제문제의 토구(討究)가 창립목적이었다. 학술경향은 자연히 교수들의 학풍을 반영하여 맑스주의, 사민주의, 자유주의가 공존하였다. 이는 27년 간행된 경제연구 창간호를 통해 알수 있다. 창간호에는 맑스주의적인 글과 항일자세를 견지한 글, 맑시즘을 정면으로 부정한 글이 함께 게재되었다.1930년대는 29년 대공황을 계기로 자본주의의 체계적 모순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심각한 정치적 사상적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공황의 모순을 전가하기 위한 일제의 수탈정책이 고도화되고 계급모순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은 급격히 확산됐다. 이와 더불어 치안유지법 개정등 일제의 사상탄압또한 강도를 더해갔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한국 사상계, 학계도 변화시켰다. 첫째는 일제의 조선 식민을 합리화하는데 목표를 둔 관학풍이 확산된 것이다. 경성제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내놓은 한국사의 정체성론, 타율성론이 대표적 논리였다. 둘째는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1920년대 후반부터 그 계급적 속성과 타협성을 드러내며 개량화한 점이다. 반면 사회주의 세력은 계급적 성향을 강화하며 더욱 좌경화했다. 연전상과 내부에서는 1929년 동맹휴학의 여파로 사상적 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학교 당국은 맹휴선동 혐의로 조병옥을 퇴직시켰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학문관과 세계관을 대표해 온 부르주아경제학자의 사퇴를 의미했다. 연희상과가 30년대 들어서는 20년대 말까지 반일적 입장으로 공존해온 맑스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맑스주의쪽으로 학문관이 기울었다. 30년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일본의 사상탄압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실천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단지 학문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상과 교수들의 대응은 개인적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대응이 있었는데 전자는 개인적 연구를 통해 일제의 조선인식론을 비판하여 맑스주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조선인식론을 제기한 것이었고 후자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조선경제학회를 창립하여 일제의 관학연구에 집단 대응한 것이었다. 연전상과는 민족해방·독립건설을 지향하는 입장의 메카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상과의 이러한 학풍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백남운이었다. 그는 부르주아학계와 일제의 관학적 조선연구를 전면 비판했다. 일제의 조선 정체성론, 타율성론을 맑스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 와 한국봉건사회경제사(상) 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이처럼 백남운과 연전상과는 조선학술계의 대명사로 조선경제사 연구의 메카가 되었다. 그리고 30년대 연전상과의 경제학풍을 이끈 또다른 사람은 이순탁이었다. 그는 정치적 민주주의, 사상의 자유, 좌우합작, 계급협조, 민족협동을 중시한 맑스주의 진영내의 일본의 사민주의자였다.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1928년 경성제대법문학부 교수들이 조선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일제의 조선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제국주의의 학풍을 강화해 가자 연전상과 교수들은 조선경제학회를 창립하여 주도하고 운영에도 적극 나섰다. 그들은 이 학회를 통해 학술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 관학의 경제학 연구에 저항했던 것이다. 동맹휴학이후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경제연구회도 30년대 초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교수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 연구회또한 맑스주의적·반관학적·반자본주의적 학풍으로 기울었다. 연구회는 연구반을 설립하여 연구발표회를 열었는데 일제강점하의 한국경제현실, 일제정책의 기만성과 대공황 후의 세계경제동향, 파시즘현상, 국제정세변동을 민족주의·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1935년에는 타과생도 가입할 수 있도록 회칙을 바꾸어 연구회를 사실상 연전의 학생회로 만들어가는 한편 3과가 연합하여 연전타임스 라는 학내신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연전에서는 교수 학생 모두가 반일·반자본주의의 경향을 띠었는데 30년대 중반이후 일본의 사상탄압이 더욱 격렬해지자 상과 교수 전원이 참가하여 주도했던 조선경제학회는 해산되고 학생들의 경제연구회도 학술활동을 중단한 채 1937년 초부터 휴지(休止)상태로 들어갔다.경제연구회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상과의 학술활동이 休止상태로 들어선지 1년이 지난 38년 2월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경제연구회가 당국의 허가없이 극비리에 학생웅변대회를 열어 여운형 등 일명 주의자 를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었던 것으로 판명되자 책임자 이용을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그가 민족공산주의사상을 소지한 인물이며 이것은 연전의 항일적·맑스주의적 교육방침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라는 자백을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따라 경찰은 연전학생들이 민족공산주의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 연전의 교수들때문이라 판단하여 특히 백남운, 노동규를 사상운동의 용의자로 지목하여 구속 수사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경제연구회를 좌익교수그룹의 지도아래 좌익학생들이 운영해온 학생공산주의 운동단체라고 간주했다. 경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5년 이후의 경제연구회 간부와 유억겸 등을 모두 검거하는 등 수사가 연전의 적색교수그룹 등 학교당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던 경제연구회와 이순탁, 백남운, 노동규 교수에게 적색교수 라 하여 검거한 것은 일제가 한국에서 반파쇼 인민전선 노선의 부상을 우려한 결과였다. 일제가 수사초기부터 이 사건을 인민전선적 사건으로 몰아가려 했음은 여러 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교수들이 이른바 학문의 자유 라는 그늘에서 평화적·합법적 수단을 빌어 공산주의 활동에 나섰다고 판단했다. 경찰의 수사는 38년 2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어 상과의 전임교수 전원과 졸업생 재학생도 검거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압수수색도 벌였다. 압수대상에는 메모지, 수첩, 일기장까지 압수했던 것으로 미루어 수사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 일제가 연전상과의 반일·반관학적 경제학풍을 탄압하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검찰은 결국 세 교수를 기소, 예심에 회부하고 정광현, 이용은 기소유예, 나머지는 무혐의 처리했다. 세 교수의 범죄요지는 강의 집필 강연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었다.1938년 연전상과의 전임교수는 모두 10명이었는데 경제연구회 사건으로 이순탁, 백남운, 노동규, 정광현 등 4명, 동우회·흥업구락부(클럽) 사건으로 홍승국, 최순주 등 2명, 모두 5명의 정교수 전원과 1명의 전임강사가 강단을 떠났고 교장을 제외한 교무위원 전원이 일거에 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연전은 교수진 개편이 불가피하였다. 경제연구회사건 이후 교수진 개편은 상과교수들의 시국인식과 대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건이전의 교수들은 민족주의 맑스주의 사상과 절연한 채 스스로 근신해야했고 이후 영입된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상과의 항일적·맑스주의적 교육방침과 학풍, 연전의 민족주의적 교육이념과 학풍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학교전체가 신체제에 순응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연구회 사건 이후 상과에 나타난 두번째 변화는 교과과정을 개편한 것이다. 이른바 이데올로기교육의 강화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과의 경제학풍의 또 다른 변화는 경제연구회를 해체하고 商友會를 조직한 일이었다. 상우회는 단순히 회원간의 친목도모가 목적이었다.
{YONSEI UNIVERSITY{{REPORT과 목 명 : 근대경제사담당교수 : 홍 성 찬제 출 일 : 12월 6일상경대학 경제학과 3학년 0021381 최 우 정해방 이전의 한국경제§머릿말해방 이전의 한국경제는 어느덧 한 학기가 끝나가는 근대경제사 강의의 네 번째 과제이다. 과제를 제출할 때마다 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학생들 저마다의 독창적인 생각과 견해를 알아보려는 과제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질보다는 양을 채우는데 급급했으며 나의 생각이 과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번 과제나마 이미 배워서 또는 글을 읽음으로써 알 수 있는 객관적 지식보다 나의 주관적 생각과 견해가 주가 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사실 나의 지식만 뒷받침된다면 해방 이전의 결정적 사건 중 하나를 부정하여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반(反)사실적 가정을 통한 분석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의 부족함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음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Ⅰ. 한국에서 근대로의 이행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에 한국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다. 우선 근대로의 이행은 중세적 질서 즉, 신분은 계급이라는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점에 대해 학설이 갈리고 있지만 나는 1876년 개항을 전환점으로 하여 중세와 근대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근대로의 이행이 한국 중세사회의 자력(自力)이 아닌 외세의 불순한 동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소 불쾌하기는 하지만 중세적 질서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개항이야 말로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개항이후에 한국은 좀 더 근대적인 모습을 띄어가게 된 것이지 개항 이후의 어느 시점을 중세와 근대의 전환점으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Ⅱ. 자본주의 경제관의 확산개항과 함께 한국은 세계 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되게 되었다. 한국을 노린 열강의 의도와 개항의 상상해보면 차라리 개항으로 자본주의가 한시라도 빨리 보급될 수 있었음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외세의 아무런 간섭없이 조선이 그대로 중세적 질서에 머물렀다면 또는 자본주의가 싹을 텄을지라도 크게 결실을 맺지 못했더라면, 물론 그렇지 않을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훗날 더 큰 위기와 굴욕을 당했을지도 모른다.자본주의 경제관이란 말 그대로 資가 本이라는 가치관으로써 한국에서는 문명개화(文明開化)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문명개화사상이 한국에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문명개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당시는 가장 기본적 경제제도였던 지주제를 농민적 입장에서 개혁하자는 토지개혁론과 사회개혁론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지주와 소작농, 부자와 빈자 등 계급간의 적대의식이 고조된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대지주, 대부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는데 그들로서는 돈이 인격인 사회, 돈이 최고인 사회를 만들자는, 그리고 그들이 문명개화에 가장 큰 일꾼이라는 문명개화사상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것이였다. 즉 문명개화사상은 부와 권력을 소유한 집단의 계급의식이자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이 글의 전체적인 논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참고로 동학에 대해 살펴보자. 거두절미하고 동학은 계급의 괴리로 인해 생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학의 원래 취지는 서학(西學:천주교)에 대처하는 도(道)를 만들자는 것이었지만 동학이 확산되고 농민전쟁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무엇보다 농민등 하층민의 불만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약 현재에도 계급간의 괴리가 크게 벌어진다면 언제든지 농민전쟁과 같은 일이 재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이 역사적으로 갖는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우연한 계기로 지금도 동학이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대순진리회와 증산교가 그것이다. 아마 동학이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라는 교파로 분리된 후 그에서 흔히 듣는 “도를 아십니까?”에서 도(道)가 바로 동학의 도(道)였던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동학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그들 또한 동학의 교주였던 최제우와 최시형등을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판 동학에 빠지는 이들이 이처럼 많다는 것일까? 역사가 말해주듯 계급간의 괴리가 바로 그 원인일 것이다. 계급간의 괴리가 격화될수록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기존의 세상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므로 이러한 종교에 빠지기 쉬어지는 것이다. 이런 종교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인데 빈부의 차이 없이 모두 평등하게 산다면 누가 새로운 세상을 바라겠는가? 이렇듯 동학과 같은 종교의 교세(敎勢)가 팽창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불평등이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더 이상 이런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위기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의미로 이러한 종교들의 교세(敎勢)를 불평등의 지표(index)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Ⅲ. 근대화 개혁과 식민지 금융체제의 구축조선말 갑오개혁, 대한제국 성립, 광무개혁, 을사조약등을 거치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양의 서구식 근대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대화, 이른바 세계화를 위한 것이였는데 역사상 어느때보다 역동적(力動的)으로 세계화가 이루어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정부는 문명개화 또는 근대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막대한 재원(財源)이 필요하였는데 당시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상태였으므로 재원조달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첫째는 국내자본 동원이고 둘째는 외국자본의 도입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통화발행이었다. 정부는 이러한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엄청난 재원이 필요킬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린 강대국들의 상호견제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불안으로 외자(外資)도입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백동화라는 통화를 신규 발행함으로써 근대화를 이루려하였다. 그러나 아직 한국화폐는 본위화(本位貨)가 아니였으므로 통화증발은 경제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압력을 가했다. 이른바 백동화 인플레이션이었다. 인플레이션과 개항 후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는 백동화의 가치하락을 불러 일으켰고 시중에서는 백동화만이 유통되고 엔(円)화나 엽전은 점점 퇴장하게 되었다. 즉 명목가치와 실제가치의 차이가 큰 악화, 백동화가 그렇지 않은 양화, 엔화나 엽전을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또한 환율의 급변은 한국상인은 물론 일본상인에게도 극히 불안한 요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정부는 1904년 10월 메카다를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인플레이션 및 환(換)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그 해 11월 백동화 발행을 중단시키고 다음해 6월에는 일본의 민간은행인 제일은행의 서울지점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든 후, 엔화를 준비하고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한국과 일본은 단일통화권이 되었다. 물론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엔본위화를 찍어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경제를 일본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으리라 사료된다. 그리고 7월에는 구백동화를 회수하고 새로운 백동화를 찍어 2 대 1이하의 비율로 교환해주어 백동화 가치를 절반 이하로 평가절하(平價切下)시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주된 백동화 유통 지역이였던 서울과 평양에서는 유동성이 급격히 축소되어 금리가 폭등하였다. 바로 화폐공황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실물로 자산을 구성하고 있던 자산가들은 유동성확보를 위해 실물을 헐값에 매각하면서 몰락해 갔다. 특히 엔화를 다량 보유하거나 일본의 은행에서 저리(低利)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던 일본인들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었다.그리고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정점으로 그 아래에 식민지 중앙은행인 제일은행과 기타 농공은행, 일반은행, 창고회사, 금융조합, 어음조합 등이 배치된 식민지 금융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켜 문명개화 즉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Ⅳ. 일제의 강점정책과 한국경제의 동향일본은 수탈의 극대화를 위해 체계적으로 한국을 개발해 나갔다. 식민지 금융체제가 구축된 후 1910년대에는 한국물자의 일본으로의 원활한 수송과 일본제품의 수입을 위하여 유통망, 도로등 인프라, 행정망, 지방제도를 정비했고 20년대에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고 회사령을 철폐하여 일본인의 회사설립과 투자를 전면 허용하였으며 한일간의 관세를 철폐하여 한국을 무관세 지대화함으로써 상품시장도 완전히 개방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에 거의 모든 부분을 완전 개방하게 된 것이다. 또한 대공황과 소화(昭和)공황을 거치면서 일본을 정(精)공업지대로 조선을 조(粗)공업지대-농공업지대로 만주를 농업지대로 하는 일만선 블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1931년의 만주침략, 37년 중.일전쟁, 40년 태평양 전쟁으로 1930년대 한국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하고 공업특히, 전쟁과 관련된 산업에 자원을 집중시킴으로써 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산업은 한국의 필요와 효율성과는 관계없이 일본의 필요에 의해 발전한 것이었다.또한 한국은 1911년에서 38년 사이에 국내총지출이 연평균 3.7%씩 증가하는 양적 팽창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진행되었다. 대지주 및 대자본가, 재계(財界)의 수뇌부는 거의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되어졌으며 총독부에서 재정, 금융, 산업, 무역, 노동 정책을 관장한 고위 관료도 모두 일본인이었다. 즉, 한국의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은 모두 일본인의 몫이었지 결코 한국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어떠한 주장도 사실에 비
일본 근세 도시의 성립과 전개일본의 명치유신 이전까지 幕府시대를 중심으로 한 이글은 일본의 도시들이 근세에 어떻게 발달해왔는가를 보여준다. 일본은 동아시아경제의 중심으로써 일본의 근세가 서양의 근세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세와 비교하여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서구에서 주장하는 발전단계설을 아시아는 따르지 않았고 서구가 제국주의를 통한 아시아와의 교류를 통해 아시아의 발전단계를 한단계 높였다는 것의 반증으로도 일본은 큰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일본의 도시 발전을 요약하고 정치적인 측면보다 일본의 경제와 관련된 부분을 더 크게 다루도록 하겠다.우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이 통일되기 이전의 15∼16세기 중엽 즉, 전국시대의 일본도시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도 교토와 사카이등의 대도시와 각 지역 거점의 전국시대 城下町이 많이 발달했었다.교토와 나라는 이전의 정치도시에서 상업도시로 발전해 나갔고 하카타와 사카이가 동아시아 각국과의 무역 중심지로 크게 발전했다. 사카이는 16세기 중엽 국제무역과 국내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16세기말에는 총포가 일본에 전래된 이후 총포생산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하카타는 일본의 국제무역중심이 되었다.전국시대 도시들은 전국大名가 거주하는 성주위에 발전했다. 이를 城下町이라 부른다. 다이묘들은 家臣團을 결집하여 城下町에 거주토록 하였다. 1485년 야마구치에서도 하급家臣들이 야마구치에 거주토록 하고 휴가를 얻어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는 사료에서 알 수 있듯 家臣들의 城下집중은 일부 지역에서 일찍부터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이것이 참근교대제의 원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전쟁을 위한 병량미와 무기조달을 위해 대상인을 보호육성하면서 領國내의 유통질서를 재편성하여 城下町은 領내유통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城下町은 거의 모든 家臣과 상인이 城下町에 거주하던 근세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할수 있다.그리고 이 시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寺內町으로 일종의 종교 소도시로 종교적인 집회소로 이용되었으며, 시장의 중심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서양의 중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전국시대가 끝나고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이 통일되었다. 그는 통일후 1584년 오사카에 일본 전국을 지배하기 위한 대규모의 수도를 새로이 건설하여 교토의 조정과 주요 사원 그리고 사카이와 오사카주변의 주요 상인촌도 모두 오사카로 옮겼다. 또한 성 주위에 여러 다이묘의 거주지를 설정하고 해안으로 연결되는 곳에 상인거주 구역을 설치해 교토와 사카이의 상인을 이주시켜 전국규모의 중심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공업자들의 거주구역도 따로 설정했다. 또 상인거주 구역에는 무사계층의 거주를 금지해 신분에 따른 거주공간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오사카로 본거지를 옮긴후 교토에 주라쿠성을 건설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에는 조선침략을 대비해 규슈의 북단에 위치한 나고야에 대규모의 성곽을 건설했다. 오사카성을 비롯한 이들 대규모 성곽의 건설에는 지방 영주들이 동원되어 공사를 도왔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4년 본격적으로 지배지역의 토지조사를 시작해 1598년까지 일본전역을 실시했다. 조사의 목적은 농업을 안정시켜 세입을 늘리고 무사들의 농민지배를 막아 무사의 힘이 커지지 않게 하여 반란의 소지를 없앤다는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1588년에는 무기몰수령을 내려 농민의 무기소지를 금지하고 동시에 농민과 무사의 신분구별을 명확히 했다.그는 이러한 농촌정책을 실시하면서 1585년부터 권력의 안정을 위해 대대적인 성곽파괴와 지배자의 재배치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지배자를 家臣으로 삼고 이들을 城下町에 결집시켜 군사적인 안정을 꾀하고 다이묘의 반역가능성을 막았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도요토미보다 대대적이고 조직적으로 주요 도시를 직접 지배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부터 교토, 사카이, 아마가사키, 나가사키등을 모두 직할도시로 삼았다. 이는 이들 도시가 보유한 상업 및 수공업의 기능을 독점함으로써 오사카를 근거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사카 전투후 전국에 一國一成令 을 반포하여 다이묘가 살고 있는 성 이외의 支成은 모두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같은해 새로운 성의 수축을 금지하고 성의 수리도 반드시 허가를 얻어서 하도록 규정했다. 이것은 지방영주의 군사저항력을 줄이는 측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역내 支成들에 거주하는 세력을 다이묘가 거주하는 城下町으로 이주시켜 지방 다이묘영주들의 지역내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근세 도시중 에도는 將軍이 거주하는 정치의 중심지였다. 에도는 18세기 중엽 인구 110만의 도시로써 세계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소비중심도시로 자리잡았다. 町人의 7할이 세입자였으며 이들의 직업은 대게 영세상과 날품팔이였으며 이들은 거대한 도시 하층민의 사회를 형성했다. 한편 이들 도시 하층민과는 반대로 임대업이나 금융업을 하여 부를 축적하는 자들도 많이 나타났다. 오사카는 일본 경제의 중심지로서 에도에 대한 소비물자의 중간 공급지로 급속히 발전했다. 오사카는 일부 무사를 제외하고 모두 町人들이 생활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1765년 인구가 42만으로 제일 많았고 19세기 중엽에는 오히려 31만으로 줄어 들었다. 인구는 도시의 흥망정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므로 오사카는 18세기 중엽이 경제의 절정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19세기 들어 도시가 쇠퇴하게 된 것은 에도 주변의 새로운 경제권 형성 등으로 오사카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오사카 인구의 6할 정도가 借家人으로 에도와 비율이 비슷했으나 이들은 제유, 주조, 조선, 동제련 등 도시공업에 종사하는 직인이 많은 것이 특색이었다. 교토는 인구 30∼40만의 도시로써 직물기술과 염료기술을 독점했으며 고급미술품을 생산했다. 교토는 에도나 오사카와는 달리 중세말이후의 자치조직인 町組 가 아직 남아 있었으나, 본래의 자치조직에서 幕府의 행정단위로 편입되었다. 이렇듯 3개의 도시는 거대한 소비도시이자 상공업 중심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 간토지역이 에도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에 자극받아 生絲와 견직물 및 여러 생활 필수품을 에도시장에 공급하면서 이들 지역에서 상품생산이 활발해졌고, 아울러 이들 물자의 운송을 위한 하천의 교통도 발달했다. 그리하여 오사카에서 유입되는 물자의 비중이 줄어 들어 오사카가 쇠퇴하게되었다.근세 일본 대도시의 가장 큰 문제는 물가였다. 그당시 인플레이션은 곧 쌀값의 인상이었으므로 농촌에 흉년이 들면 생산량이 부족해져 물가가 급등했던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도시상인의 매점매석이 꼽히고 있으나 영주들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화폐유통량을 늘린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쌀값이 폭등하자 주로 에도에서 도시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폭동이 일어났었다. 幕府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에도의 도시하층민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흉년에 대비한 곡식 비축계획을 세우고 町會所를 설치해 적립금을 모아 하층민에게 低利로 융자하는 제도를 마련했다.근세의 대도시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지방城下町에 대해 살펴보자. 영주들은 城下町에 모인 무사들의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상인과 직인을 집주시켰다. 그리고 무사나 상인, 직인의 집에서 일할 奉公人도 많았다. 그리고 잡다한 직업에 종사할 다수의 하층민이 城下町에 모여 있었다. 城下町의 町人은 家臣團의 무장력을 유지시키는 일을 했다. 영지내 곳곳에서 대장장이로 도검류나 농기구를 생산하던 수공업자들이 城下町에 모여 성곽을 수리하거나 영주들의 무기를 정비하는 일을 담당했다. 근세에 칼을 만드는 기술은 전셰계에서 일본이 가장 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領國시장과 전국시장의 형성에 따라 城下町의 특권상인이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城下町의 대표적인 예로 가나자와와 오카야마가 있다. 우선 가나자와는 원래 寺內町으로 발달한 도시였는데 1583년 이곳에 城下町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영지내에 많은 소도시가 있었지만 幕府의 一國一成令 에 따라 領國내 많은 소도시의 성은 파괴되고 무사들은 가나자와로 이주했다. 그렇지만 성이 파괴된 소도시에서도 상업과 수공업의 중심지 역할은 계속되었다. 근세 藩의 가장 큰 관심은 미곡의 판매였다. 가나자와는 영지내 미곡을 자신의 영지내에서 우선 적정이상의 가격으로 소비시키기 위해서 17세기 후반 다른 지역의 미곡이 가나자와藩 영지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藩내 미곡의 영지외 반출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항구를 통제하여 미곡 이외의 모든 상품에 대해서도 移出入을 통제했다. 가나자와 藩은 폐쇄적인 藩경제를 오사카를 중심으로하는 전국시장과 결합시켜 상업 이익을 극대화했다. 이처럼 가나자와 城下町은 농민들의 상업 통제를 기반으로 성립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지방 城下町의 예로 城下町 오카야마를 살펴보자. 오카야마에는 藩政초기부터 특권상인이 존재했으나 이들의 독점적인 영업은 제한당했고 도매상을 통한 물건 구매시에도 藩은 감찰관을 두어 가격을 감시했다. 이처럼 城下町 오카야마도 상업의 통제를 통해 領國의 중심시장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世界 大恐慌의 주된 原因과 影響{{{{目 次§머리말Ⅰ. 대공황의 배경 - 1차대전∼1929년1. 미국2. 유럽3. 금본위제Ⅱ. 대공황의 발생과 경과Ⅲ. 대공황의 원인1. 금본위제도의 재건 및 유지를 위한 긴축정책2. 부의 집중화 현상3. 미국의 지도력 결여Ⅳ. 대공황의 영향Ⅴ.케인즈 경제학(일반이론)의 탄생{§맺음말{§참고자료{{§머리말경제현상은 어디까지나 역사현상이지 자연현상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수립 및 미래예측을 위해서는 역사적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 대공황은 근대경제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 과제를 통해 대공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살펴 보았다. 그런데 저자에 따라서 대공황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이 객관적인 내용은 당연히 동일하지만 주관이 개입되는 특히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는 각자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정답이 없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주장들을 중심으로 글을 썼다. 물론 이 글이 전부 내 생각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자료들중에서 그대로 찾아 쓴 부분도 많다. 그렇지만 많은 자료중에서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Ⅰ. 대공황(大恐慌)의 배경 ― 1차대전∼1929년1. 미국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을 거치면서 유럽세력은 인명, 자산등 국력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1차 대전의 이득만을 챙긴 미국이 급성장하여 미국의 중심국화현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보면 미국의 수출은 전쟁전보다 6배가 증가하였고 전쟁전에는 순채무국이였던 미국이 순채권국으로 전환하였으며 미국의 금 보유량이 전 세계은행보유량의 약 37%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의 산업구조도 변화하여 내구소비재, 서비스업, 소비재 산업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인데 20년대말에는 신호등에서 차량정체현상이 나타났을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는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급속하게 진행되심부 나라들의 경제 정책 기조는 전체적으로 보아 확장적이라기보다는 긴축적이었다. 한편에서는 영국처럼 물가가 충분히 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전전(戰前)의 금 평가를 회복했기 때문에 국제 수지가 불안했던 나라들이 긴축적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처럼 상황이 정반대인 나라들이 물가 상승, 투기 발생을 우려해서 불태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태화 정책(sterilization policy)이란 해외부문으로부터 외자유입이 늘어 국내 통화량이 증가하고 물가가 상승할 경우 이를 상쇄시키기 위해 취해지는 정책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중앙은행이 각종 통화채(債)를 발행해 시중의 자금을 회수한다든지 재할인금리를 인상하거나 지급준비율을 올리는 등의 정책을 말한다. 즉, 불태화 정책의 수단은 일반 통화정책과 일치하나 통화정책의 목적이 해외부문에서 비롯된 통화증발을 억제하기 위한 것일 때 불태화 정책이라고 부른다.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경제규모가 작기 때문에 공공차관이나, 상업차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등으로 외자가 들어올 경우 들여온 규모만큼 국내 통화량이 늘어난다. 이 때 각 국 중앙은행은 이렇게 늘어난 통화량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불태화 정책인 긴축정책을 쓰게 된다. 불태화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국내금리상승을 가져와 오히려 외자유입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자국의 불태화 정책은 적자국의 국제수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적자국들에게 금본위제의 유지를 위한 더욱 강도 높은 긴축을 강요했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긴축 분위기 속에서 결국 대공황이 일어났다. 만일 미국이나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확장 정책에 나섰더라면 영국 같은 나라들은 더 낮은 강도의 긴축 정책을 가지고도 국제 수지를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자국들의 긴축 정책은 흑자국들의 확장 정책에 의해 상쇄되어 세계 경제 전체에 미치는 정책 충격의 효과는 중립적이었을 것이고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감소의 영향도 있었다. 또 수출 수요 감소 이외에도 해외 경기 침체가 미국 증권 시장에 미친 심리적 충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요인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다.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대외 무역의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간기(interwar period) 미국 국민 소득에서 차지하는 수출 및 수입의 비중은 5% 정도에 불과했고 1930년 미국 실질 GNP 감소분의 불과 2%만이 순수출감소에 따른 것이었다.1929년 10월 주식 가격 폭락으로 본격화된 미국의 대공황은 193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동안 생산이 계속해서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했다. 미국 경기가 정점을 통과할 무렵인 1929년 7월에 비했을 때 3년 뒤인 1932년 7월 미국 공업 생산 수준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생산자 물가 지수는 40%나 하락했다. 1929년 5.3%에 불과하던 미국 실업률은 1933년 37.6%나 되었다. 미국 불황이 이렇게 전례 없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은행 공황때문이었다. 대공황기 미국에서는 네 차례의 은행 공황이 발생했는데 은행 공황으로 예금인출소동(bank-run)이 벌어진 결과 예금 통화가 파괴되고, 따라서 통화 공급이 급속히 감소하고 금리가 상승해서 경기가 악화되었다. 또 은행 공황은 투자자와 소비자들의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함으로써 총수요를 위축시켰다. 마지막으로 은행 공황으로 은행의 금융 중개기능이 손상되어 투자 수요가 더욱 위축되었다. 미국의 중소 기업들은 주식을 상장하거나 사채(社債)를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고 주로 은행 대출이 거의 유일한 자금원이었는데, 오랜 동안 거래해 오던 은행이 도산하자 중소 기업들이 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투자 활동이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투자는 수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써 수요를 위축시킨 것이다.미국에서 은행 공황이 네 차례 거듭되면서 불황이 심화된 데에는 연방 준비 이사회의 정책 실수가 있었다. 은행에 대한 신뢰의 위기 재앙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공황의 진짜 원인일까?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소득의 불균등이 아니라 ‘부의 집중화’또는 ‘편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1929년에 절정에 도달하여 대공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소득의 불균형 역시 상당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 하나만으로는 심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의 총수준은 어느 시대에나 국민소득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1920년대에 부의 분배에 있어서 갑작스럽고 급격한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를 다음 페이지의 표를 통해 살펴보자.{{{※최고부자 1%가 차지하는 부의 몫{{{연도 미국의 성인 혹은 가족 1%가 차지하는 부의 몫{{{1810 21.01860 24.01870 27.01900 26.0∼31.01922 31.61929 ※36.31933 28.31939 30.61945 23.31949 20.8{{{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22년에는 미국의 부 전체 중 31.6%가 1%의 미국가정에 편중되어 있었는데, 그로부터 겨우 7년 후인 1929년에는 36.3%로 늘어났던 것이다. 부의 편중은 어떤 전례없는 교란이나 잘못된 재정정책이 없으면 그 비율의 변화속도가 굉장히 느린게 보통이므로 이러한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물론 29년과 33년 사이에도 이러한 비율이 엄청나게 감소하였는데, 이것은 대공황의 직접적 결과로 많은 부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갔음을 말해 준다. 1920년대에는 7년 동안에 부의 불균형이 급격히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9년에는 최고 부유가정 1%의 몫이 역사상 최고치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의 불공평한 분배와 경기후퇴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후퇴기와 불황간의 차이를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후퇴기는 총수요의 감소 때문에 GNP가 떨어지기 시작하거나 또는 GNP의 성장이 노동력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여 실업율이 증가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 이에 반해 공황은 후퇴기가 금융제도의 붕괴를 수반하여 은행을 악화시키고 투기를 조장하는 그 당시에 우세한 부의 편재현상의 정도에 따른다. 은행 하나가 파산할 때마다 총예금액과 통화공급이 감소하게 되고, 이것은 또한 총수요와 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고도의 부의 집중이 취약한 은행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보다 심각한 경기후퇴를 가져오는 것이다.자본주의하에서는 부의 편재가 장기적으로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부의 편재가 극도로 심해지고, 따라서 동시에 취약한 은행의 수가 아주 많아지게 되면 어떠한 경기후퇴기에도 금융체제가 붕괴될 수 있게 된다. 부의 편재가 가져오는 또 다른 직접적 결과인 투기 거품의 폭발은 단지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한다. 통화공급, 총수요, 생산량 및 고용률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되고, 통상적인 후퇴기가 불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투기의 거품이 극도로 팽창됐다가 터지게 되는 날에는 대공황이 유발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많은 재산이 씻겨져 나가 부의 집중이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부의 엄청난 불평등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로 유산상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므로, 부가 상속되어 그것의 분배가 몹시 불평등하게 되기까지는 보통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야 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수많은 경기후퇴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황이 대게 한 세대 혹은 두 세대마다 드물게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인 것이다. 위의 표는 1929년에 부의 편재가 가장 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에 의한 투기적 대부 역시 그 당시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므로 1929년에 평범한 경기후퇴가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재난으로 전환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1980년대에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지만 1930년대 이래 부의 편재는 일반적으로 감소현상을 보여왔다. 이것이 1973년과 75년 사이에, 그리고 1980년과 1982년 사이에 심각한 경기후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대공황을 모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193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