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중에 일본군이 한국인과 아시아인 여성들을 강제 연행하여 일본 국내와 중국, 아시아 각지에서 성적(性的) 봉사를 강요한 종군 위안부는 10∼20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전후에 온갖 다양한 논의가 행해져 왔으나 일본 당국이 그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문제가 치욕적인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일인만큼 실태가 밝혀지지 않은 채 지나왔다.그 후 1991년 12월 6일, 처음으로 '종군 위안부'였다고 밝힌 3명의 한국인 여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한국에는 약 2만명의 위안부 중에서 103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북한에서도 210명이 확인되었다고 한다.이밖에도 중국,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 인도 등 일본군이 진군했던 아시아 지역 13개국에서 피해자가 나타났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은 6건, 56명에 이른다. 종군 위안부 문제는 UN 인권 위원회에서도 다루어져 일본 정부에 국가적인 사죄와 보상 조치를 촉구하고 있다.◈ 위안소 명칭자료에는 '군(대)위안소', '특종위안소', '군특수위안소', '(군인)구락부', '오락소', '군인회관', '유녀옥(遊女屋)'등으로 위안소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난다.위안소 앞에 부대이름이나 지명이 붙는 경우도 있다. 위안소가 여러개 있을 경우에는 제1위안소, 제2위안소 등의 순번 혹은 동·서 등의 방위를 앞에 넣기도 했다.위안부의 명칭은 군자료에 '(군)위안부', '종업부', '특수부인', '특종부인', '특종부녀'로 적혀있다. 증언자들은 위안소에서 '하루코(春子)', '게이코', '노부코' 등의 일본식 이름을 주인이나 군인에게서 받아서 사용했다. 증언자들에게 기억나는 다른 위안부의 이름을 말해달라고 하면 대개 이러한 일본식 이름을 대는 것으로 보아 위안부들끼리도 이 이름을 부른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이름도 없이 번호로 불리기도 했다.군인들은 위안소를 '삐야(삐屋)'로 불렀고 '위안소', '빵 대한 일본군의 강간을 방지하고 군인들의 성병 감염을 방지하며 또 군사기밀의 누설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다.그러나 일본 군대의 경우 위안소를 두었다고 해서 현지민에 대한 군인들의 강간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고, 강간이 성행하는 한편 그들의 위안소 출입 또한 예사롭고 태연한 일이었던 것이다.근대 사회에 들어와서까지 공공연하게 '위안부'를 집단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은 일본군에만 있을 수 있는 그야말로 '특수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어느 일본군 의사과장(醫事課長)의 말에 의하면 1943년 1월 현재 일본군 장교이하의 위안시설이 북부 중국에 100개소, 중부 중국에 140개소, 남부 중국에 40개소, 남방이라 부른 동남아시아에 100개소, 남해(?)에 10개소, 사할린에 10개소 등 합계 400개소가 있다고 했다. 또 버마전선에서 포로가 된 어느 일본 군인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 1개 사단에는 5개소 내지 6개소 위안소가 있었고 여기에는 일본인 및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다. 일본 군대가 가진 '특수현상' 때문에 다른 나라의 군대에서 보기 어려운 위안소와 '종군위안부'가 있게 되었고, 침략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어 일본의 매춘부나 일반 여성의 동원만으로 수요에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게 한 것이다.◈ 누가 어떻게 '종군위안부'가 되었는가1) 유괴와 인신매매로 '위안부'가 된 경우일본군의 성적 대상이 된 여성을 처음부터 '위안부'라고만 부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료들에 의하면 '위안부'란 명칭 외에 기녀·취업부·매춘부·예기·창기·작부·여급·예창기 등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일반 사회에서 이미 매춘업이나 접객업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이른바 '종군위안부'로 전환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인의 경우 이미 매춘업이나 접객업 등에 종사한 여성들이 '종군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았으나, 특히 조선 여성의 그런 경험이 없는 여성이 '종군위안부'가 된 경화류병예방법」에서 '위안부'를 가리켜 "위생적인 공동변소"라고 불렀다. 중국 무린에 있던 일본군인 또한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불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안소가 있는 모든 곳에서는 모든 국적의 '위안부'를 '삐'라고 했다. 일본 군인에게는 이들 서민 출신의 여성이 인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일부로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점에서는 일본인 '위안부'들도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위안부'는 사람이 아니라 위안소를 찾는 남성들의 성욕처리 대상일 뿐이었다.여기에 보태서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에는 엄연히 차별이 있었다. 한 증언자는 패전 후의 귀국선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데, 조선인 '위안부'를 너무 함부로 대해서 증언자가 항의를 했더니 "사람 취급할 필요없다. 소나 말만도 못하니까.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맙게 알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교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는 등 예외의 경우가 있기는 하나 거의 모든 피해자는 전부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닌듯하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행패를 부리며 모욕스러운 요구를 할 때, "쎈삐 주제에" 혹은 "센징, 센징"이라고 업신여길 때라고 말한다. 얼마나 조선 사람이라고 업신여겼으면 조선 사람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자기들도 '천황 폐하'의 자식이라고 했겠는가.일본군에게 조선인 '위안부'는 물건 중에서도 아무렇게 취급해도 되는, 그리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릴 물건이었다. 현재 경상남도 진해에 사는 정서운 할머니는 지금도 양쪽 팔에 작은 돌 같은 덩어리가 있다. 그의 배에는 커다란 도장 자국 같은 것이 두 개 있다. 할머니는 인도네시아 마낭에 있었는데 하루 평균 50명 정도의 군인이 들어왔다고 한다. 쉴새없이 들어오는 군인에게 기진맥진해서 기절을 하면 일본군인이 주사기로 마약을 팔에 쿡쿡 놓았다고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군인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마약주사를 놓았다고 한다. 마약주사는 '위안부'가 싫7월 23, 24일에 일본어 신문『경성일보』에 또한 '위안부' 모집광고가 났다. 이때는 나이가 17세에서 23세, 근로처는 후방 OO부대 '위안부'이고 월수가 300엔 이상, 전차(前借)가 3,000엔 가(可)였다. 소개소는 신정(新町)에 있는 금정(今井)소개소이다. 수입이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이 『매일신보』 광고와 크게 다르다. 전차가 3,000엔인 것 등으로 보아 일본 여성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매일신보』에 실린 '위안부' 모집광고는 '위안부'가 될 수 있는 여성은 물론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낸 광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감히 조선 여성을 '위안부'로 만들 수 있었던 조선인 업자들을 상대로 낸 광고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군에서 받았을 돈은 업자에게 갔고 조선 여성은 일본 어느 군수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거나 영문도 모르게 폭력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일본 정부의 대응과 민간 기금 방식1989년 말 이후 한국의 교회여성연합회 등 여성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할 때부터 일본 정부는 거듭하여 민간업자가 한 것일뿐 일본군이나 국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했다. 이러한 부인의 발언을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① 군대 '위안부'는 군, 국가와 관계가 없고 민간업자가 한 일(1990년 6월 6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 회에서 모토오카 쇼지 사회당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조사를 요청 받고 답변한 내용)② 당시의 관계자들로부터 사정을 들은 결과 후생성 근로국도, 국민근로동원서도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 전혀 관여한 바 없다(1991년 4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로 보이는 명부가 발견되었을 때 노동성 관리의 발언).③ 아무런 근거자료가 없다(1991년 11월 21일 전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 요시다 세이치가 언론에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 사실을 고백하여 보도되자 일본 외무성 관리가 한 말).④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국제법 위반으로 단정, 국가로서의 법적.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못박았다.그리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지적, 일본 정부에 6개의 항목을 권고했다. ( 1996년 2월 6일)① 일본 제국 육군이 만든 위안소 제도는 국제법에 위반된다. 정부는 그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② 일본의 성 노예가 된 피해자와 개개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③ 위안소와 거기에 관련된 활동에 관한 모든 자료를 공개하라.④ 피해자와 여성 개개인에게 서면으로 공개 사과하라.⑤ 교육의 현장에서 이 문제의 이해를 깊게 하라.⑥ 위안부의 모집과 위안소의 설치에 관여한 범죄자의 적발과 처벌을 가능한 한 행하라.아시아 각국은 일본 정부가 권고를 받아들여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해 왔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본 변호사 연합회와 지원 시민 단체 등이 성명을 발표, 정부가 이 보고에 따른 해결을 위해 자주적인 대응을 밟을 것을 요구하고. '국제 사회에서 일본이 명예로운 지위와 평가를 받을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소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하여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과 한일 기본 조약) 1965년 6월 22일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李東元),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金東祚)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晉一] 사이에 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협정부속서 2, 교환공문 9, 의정서 2, 구술서 4, 합의의사록 4, 토의기록 2, 계약서 2, 왕복서간 1)의 총칭이다.에 의해 이미 해결이되었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보고서의 내용이 객관성과 정확성에 문제가 있다며서 법적인 반론을 펴 나갈 방침을 강조했다.그후 국제 노동 기구(ILO))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및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국제연합의 전문기구.가 구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는 '강제 노동에 해당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다.
■ 프랑스의 기념일 및 민속절과 음식문화프랑스는 여러 민족과 문화가 섞여 있는 나라이다,그리고 프랑스의 축제는 대부분 카톨릭과 관련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국민 중약 80 % 가 카톨릭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제를 비롯해 국가에서 지정한 국경일이나 종교적인 기념일 외에 민속절이 있는데 여기서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1월■ 신년(1일) : 1월 1일 설날 0시가 되면 가족끼리 모여 음식을 나누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껴안으며 새해 인사를 나눈다. 거리에서는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크리스마스의 밤참이 가족들의 파티라면 섣달 그믐날 저녁의 파티는 친구들의 모임이다. 편지나 전화로 새해 축하 인사를 전하거나 연하장을 교환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세배 돈을 주며 수위에게도 약간의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주현절(6일) : 왕의 축일이라고도 불리는 가톨릭의 축일이다. 이날은 친구 간에 우의를 다지는 날로 갈레뜨 드 로아 (galette de rois) 라고 하는 원형의 케이크를 먹는데, 이 갈레뜨를 먹다가 세라믹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잠두를 발견하면 그 사람이 왕이나 여왕이 된다. 준비된 금종이 왕관을 씌워주며, 왕은 여왕을, 여왕은 왕을 선택하도록 한다.그러면 모두들 왕 만세, 여왕 만세를 외치면서 샴페인을 건배한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그들이 엘리제 궁이나 대통령의 사저에서도 이러한 행사를 계속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이 잠두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일년 내내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빵집에서는 1월 내내 왕관과 함께 갈레뜨 과자를 팔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2월2월 2일은 전처럼 넓적하게 부친 크레프를 만들어 먹는 날이다. 일년 내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손에 후라이 팬을, 다른 한 손에는 동전을 들고 크레프를 튀어 오르게 해야만 한다.2월 14일은 발렌타인 데이로 엥글로 색슨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연인들이 작은 선물을 주고 받는 날이다.마르디 그라 : 부활절 47일 전의 화요일. 행사로 니스의 카니발이나 레몬 축제가 유명하다.3월3. 22 이후 4. 25까지 춘분 이후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는 다음 일요일이 부활절 당일이다. 매년 변하는 이동 축제일이다. 그 전 금요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 부활절 다음날은 부활절 후 월요일이라고 해서 이 날은 법정 공휴일로 되어 있다.약 2주간의 휴가를 즐길 수 있다. 달력상으로 봄이 되는 것도 부활절부터다. 부활제는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길고 어두운 겨울로부터 벗어나 봄을 맞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활제를 전후로 각지에서 카니발을 개회하는데, 그 중 니스의 카니발은 세계적으로 이름나있다,4월만우절(1일) : 물고기 모양을 한 초콜릿이나 파이가 과자점에 진열된다. 이 날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며 즐거워하는데 이날 속는 사람을 구어로 "poisson d'avril"이라 부른다.*부활절 그리고 부활절 다음날 월요일은 가장 큰 기독교 축일이다. 공교롭게도 봄이 오는 날과 일치하여 3월 말이나 4월 초가 될 수 있다. 달걀 모양의 초콜릿을 보내는 풍습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종들이 로마에서 프랑스의 하늘로 날아오다가 초콜릿으로 만든 계란을 떨어뜨렸고, 이것을 아이들이 정원에서 주웠다고 한다.5월■ 노동절(1일) : 이 날은 뮈게라는 은방울꽃을 행운의 표시로 친척이나 친구에게 선물하는 날이다. 근로자들의 퍼레이드가 있으며 물론 노동절이라서 노동자들은 일하지 않는다.■ 제 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일(8일) :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며, 프랑스의 국경일이다.잔 다르크 제(둘째 일요일) : 오를레앙 지방의 축제가 제일 유명한데 잔 다르크 분장을 한 소녀가 행렬을 이끈다.승천제 : 부활절로부터 40일째 해당하고 매년 변한다.부활절 40일 후 목요일은 예수승천일이다.■ 성령 강림제 다음 월요일 : 부활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한다. 법정 공휴일이다.■ 성령 강림제 부활절로부터 7번째 일요일은 성신강림절이다. 예수승천일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기념하며 성신강림절은 성령이 내린 것을 기념한다.■ 어머니날(네 번째 일요일) : 카네이션은 없고 아이들의 취향을 노린 선물 전쟁으로 들뜬다.6월6월의 세 번째 일요일은 아버지날이다.7월■ 혁명 기념일(7월 14일) : 파리 축제로 알려져 있다. 이 날은 프랑스 혁명기념 일로 1789년 바스띠유 감옥을 파괴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다양한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있으며, 길거리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밖에 항구 도시에는 어부들의 축제가 있고, 포도 산지에는 포도 수확제 등이 있어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이 날은 프랑스 제일의 국경일로 삼색기가 공공건물과 버스 위에서 휘날리며, 각 군은 공화국 대통령 앞을 분열하고, 저녁에는 군중들이 광장으로 몰려 나와 불꽃놀이를 하며 춤을 춘다.8월■ 성모 승천제(8월 15일) : 성모 마리아의 몽소 승천절이라는 카톨릭 축일이다. 미사와 행렬이 성모를 기념하는 이날도 국경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바캉스가 끝나는 날이며, 약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바캉스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 달은 바캉스 시즌이 한창인 때다.9월10월11월■ 만성절(11월 1일) : 역시 국경일이다. 그 다음 날은 고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온 가족이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에 꽃을 바친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병력은 1억 1천만이었고, 세게의 주요 국가들이 모두 전쟁에 참여했으며, 전 인류의 5분의 4가 어떤 형태로건 전쟁에 관여 하였다. 교전국은 모든 물자와 거의 모든 인원이 전쟁에 휘말렸고, 전쟁 필수품 생산에 매달려야 했다. 그것은 병력, 물력, 국민의 노동력, 정신력, 과학적 지식과 기술, 고성능 병기와 고도의 전술 등을 총동원한 총력전이었다.Ⅰ. 대전 발발의 배경과 경위히틀러는 제 2차 세계대전은 파리강화호의에서 압제적으로 부당하게 강요된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가피한 투쟁이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연합국이 전후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좀더 냉정하고 거시적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적대감을 버리고 처리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 내정문제, 국제문제들을 정치적으로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데도 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실패들이 히틀러에게 권력탈취의 구실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물론 더 깊이 따지고 보면 경제적, 정치적 파국을 초래한 세계공황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히틀러와 스탈린은 마음놓고 인접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최신 기계화부대와 폭격기는 폴란드의 구식 무장군대를 곳곳에서 격파하고, 당시 병력과 장비가 빈약한 폴란드군은 독일군 침공 한달만에 굴복하고 말았다. 핀란드는 비록 공산국가인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완전히 서유럽 문명지향적이고 상당히 진취적인 민주정치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소련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더 많은 병력을 재투입하여 핀란드를 굴복시켰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곧이어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두 곳다 점령하게 되었다.Ⅱ. 서부전선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하는 길에 우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간단히 정복하였다. 최신예 기계화 부대와 우수한 공군부대가 전격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독일군에 반해 프랑스 군은 구식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침공을 받은 프랑스 지휘관들은 당황하여 반격전을 신속히 단행하지 못했고, 소속의 기갑부대들 마저도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영·불 양군간의 연락도 두절되어 효과적인 합동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고, 나치 동조자들의 음모와 선동 때문에 군대와 민간인의 전의가 상실되어 결국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Ⅲ. 독일의 영국 정복작전히틀러는 프랑스 정복 후 영국에 평화를 제의 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거부하고 강경한 항전결의를 보이자 난처해져서 군참모들로 하여금 황급히 영국 공략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바다사자 작전 과 기아전술 그리고 나폴레옹이 택했던 이집트 원정길 까지 총 동원 했었다. 하지만 영국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스페인, 프랑스의 비시정부, 이탈리아등을 친파 시스트 블록으로 만들면서 정치적으로 이집트와 영국을 제압하고 지브롤터와 몰타의 영국기지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3국의 독재자들은 히틀러가 원하는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무솔리니를 지원하면서 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인 리비아로부터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이 또한 영국군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Ⅳ. 동부전선- 독·소 전쟁소련에서는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소련은 1939년 8월 독일과 독 ·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40년 가을부터 발칸문제로 독일과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180만 대병력을 투입하여 소련을 기습 공격하고, 2개월 이내에 대소전(對蘇戰)을 승리로 이끈다는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방위력이 의외로 강하여 독일의 단기 결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더욱이 혹독한 겨울추위로 독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942년 독일군은 전선을 남방으로 확대하여 8월부터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남부전선에 그대로 묶여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때부터 소련의 전시체제가 확립되어 11월부터 소련군은 대반격을 전개하여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탈환하고, 독일군 점령하에 있는 동유럽 제국을 탈환하여 제2전선의 전개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다. 1945년 4월 하순 베를린에 진격하였고,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Ⅴ. 미국의 참전당시 영·불 연합군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패배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공군의 공습을 받고 수송선박들은 독일 잠수함 공격을 받아 침몰되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군 침공으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과 아시아 각국을 침공하고 있었던 시기로 연합국측은 곳곳에서 실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때에 미국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미국의회는 종래의 중립법을 개정하여 현금수송 방식 으로 무기거래가 가능하도록 조치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군수물자를 구입할수 있게 하였고, 심지어 공산국가인 소련에도 방대한 군수품을 공급하게 되었다.이때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1941년에는 일·소 중립조약 을 체결하여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미·일 협상을 하면서도 극비리에 진주만 공격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1941년 12월 8일 선전포고도 없이 급습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와 항만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태평양전쟁) 기습직후부터 일본은 미국의 전쟁준비 부족과 영국이 유럽 전쟁에서 수세에 몰려 고전하고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전격적으로 1942년 전반기까지 미국의 태평양 전초기지를 급습하여 모두 점령하였다. 1942년 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인 말라야,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그리고 타일랜드, 미얀마 ,홍콩등에도 침공하여 불과 반년만에 남방의 모든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여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Ⅵ. 연합군의 반격유럽전선이나 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전세를 만회하여 일대 반격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1942년 후반기부터였다. 영·미를 중심으로 26개국이 대 연합을 형성하였고, 합동 참모부 밑에 모든 군대와 자원을 통합하여 연합군의 합동작전과 반격작전을 확고하게 효율적으로 수행해나갔다. 동부전선에서 일대 전기가 된 것은 앞에서 한번 언급한거와 같이 스탈린그라드의 공방전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한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처절했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의 독일군의 불패의 신화도 결국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소련을 너무 과소 평가한 반면 독일군의 전투 능력은 너무 과신하여 무모한 공격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에 결국 130년전의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아 괴멸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평양 전투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마드웨이-과달카날 해전이었다.Ⅶ. 유럽에서 연합군의 승리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후에 스탈린은 베를린 총공세를 단행하여 1945년 4월 하순에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해지자 지하호에서 히틀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는데 오후에는 무솔리니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진다. 다음날 히틀러와 그의 처는 권총과 극약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파란만장의 정국과 인류의 대참극을 몰고 온, 희대의 독재자의 일생은 비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히틀러는 세계의 최대의 전쟁도발자이며, 13년간이나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리더로 군림하였고, 세계의 모든 강대국을 상대로 싸웠으며, 그가 부추겨 싸움터에 나가 전사한 사람들과 나치스의 강제수영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합치면 수천만명이나 된다. 그가 확신을 갖고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국가 사회주의도 나치즘도 인종우월주의도 그의 사망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송명유학사상』{『송명유학사상』Ⅰ. 새로운 철학의 출발2. 사대부계급의 대두와 송학의 이상♣ 노장, 도교의 비판- 황제라고 부르건, 왕이라고 부르건 그 칭호는 달라도 성인이라는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여름에는 홑옷을 입고, 겨울에는 모피 옷을 입는 것이 지혜라는 점과 같다 고 저자는 생각- 어찌 태고적의 일 없음을 그대로 하지 않는가 즉 예전 것을 그대로 하지 않는가 라는 뜻이다.: 이것은 겨울에 모피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향해 왜 간편한 홑옷을 입지 않는가 하고 꾸 짖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생각- 위의 두 단락은 요컨대, 노장, 도교의 원시주의, 반 문명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중국의 고대는 3황 5제 3왕 5패로 이루어지고 3황때 에는 완전히 태고의 일이 없 는 시대이므로저자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탓하는 것은 잘못된 일 이라고 지적을 하면서 고대 중국의 사상을 지켜오던 노장과 도교를 반 지적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불교의 비판{옛날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린다. 그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다스린다. 그 집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자기를 수양한가. 자기를 수양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한다. 그 마음을 바로 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진실 되게 한다.-「大學」중에서 -- 「大學」에 나와 있듯이 유교는 천하를 평안케 하려는 공부인데 비해, 불교는 다만 한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다.*『대학』- 유가(儒家) 경전의 하나. 원래 《예기(禮記)》의 한편이었으며, 대략 진·한(秦·漢)시기의 유가의 작품이다. 일설에는 증자(曾子)가 지었다고 하나 《대대례기 大戴禮記》 중의 《증자입사 曾子立事》등의 편을 볼 때 사실이 아니다. 송(宋)에 이르러《예기(禮記)》중에서 《대학(大學)》을 뽑아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用)》과 함께 배열하여 4서(四書)로 정하였다. 순희(淳熙; 1174∼1189) 때 주희(朱熹)는 《사서장구집주 四書章句集注》를 만들었으며 《대학》이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등의 항목이 있으며, 남송(南宋) 이후 이학가(理學家)들이 윤리, 정치, 철학을 이야기 할 때 기본 강령이 되었다.{춘 추논 어시 경중국의 제후라도 오랑캐의 예법을 취한다면, 그를 오랑캐로 취급오랑캐의 임금이 있다고 해도 문명한 나라에 임금이 없는것보다 못하느니라융적을 응징하고 형서를 징계한다.- 위의 내용처럼 오랑캐에 대한 차별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오랑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 중국 또한 오랑캐가 되지 않았을까!*『춘추』- 유가 경전의 하나. 춘추(春秋)시대에 대한 편년체의 역사서.공자가 노(魯) 사관이 편찬한 《춘추(春秋)》를 토대로 정리·수정해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노 은공(隱公) 원년 (전 722)부터 노 애공(哀公) 14년(전481)까지 242년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춘추》는 간략한 내용 속에 칭찬하고 깍아내림의 깊은 뜻이 담겨 있어 후세에 춘추필법 (春秋筆法)으로 칭해진다. 《춘추》의 내용을 해설한 책으로 《좌씨 左氏》, 《공양 公羊》, 《곡량 穀梁》등 삼전(三傳)이 있다. 고대에는 《춘추》의 경문과 삼전 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각 전 옆에 경문을 나누어 싣고 있다.*『논어』- 유가 경전의 하나. 서한(西漢) 때에는 금문본(今文本)의 《노론 魯論》과 《제론 齊論》, 그리고 고문본(古文本)의 《고론 古論》의 3종류가 있었으며, 지금 전해지고 있는 《논어》는 동한(東漢) 정현(鄭玄)이 여러 책들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서 모두 20편이다. 공자의 제자 및 재전제자(再傳第子)들이 공자의 언행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서 공자의 담화(談話),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제자들 서로간의 대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한(東漢) 때 칠경(七經)의 하나로 되었다. 남송(南宋) 순희(淳熙; 1174∼1189) 때 주희(朱熹)는《대학 大學》, 《중용 中庸》, 《맹자 孟子》와 《논어》를 합하여 《사서 四書》라 하였다. 주석서로는 삼국(三國) 위(魏) 하안(何晏)의 《논어집해 論語集解》, 남북조(南北朝) 양(梁) 황간(皇侃)의 《논어의소 論語義疏》, 송(宋) 형병(邢昺)의 《논어정의 論語正義》, 주희의 《논어집주 論語集注》, 청(淸)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 論語正義》등이 있다.*『시경』- 중국 최초의 시가집. 본래는 《시(詩)》라고만 불렸으나 유가 경전의 하나가 외면서 《시경(詩經)》이라고 높여서 불리게 되었다. 춘추(春秋) 시대에 편찬되었으며 모두 305편이다. 크게 《풍 風》, 《아 雅》, 《송 頌》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풍》에는 15국풍(國風)이 있고 《아》에는 《대아 大雅》, 《소아 小雅》가 있으며 《송》에는 《주송 周頌》, 《노송 魯頌》, 《상송 商頌》이 있다. 이것들은 주(周)초에서 춘추 시대에 이르는 기간의 작품들로서, 섬서(陝西) · 산서(山西) · 하남(河南) · 산동(山東) · 호북(湖北) 등지에서 채록된 것이다. 《사기 史記》등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을 공자가 산정(刪定)했다고 하나 근래에 들어와서는 대부분 이를 의심하고 있다. 《시경》중 민간의 시가들은 주왕실에서 파견한 행인(行人) 혹은 주인(週人)이 수집했으며 이를 채풍(采風) 이라 불렀다 한다. 《시경》속에는 이른바 남녀간의 정사를 노래한 것도 있으며, 당시의 정치적 혼란이나 백성이 겪은 압박과 고통을 드러내는 것도 적지 않다. 또 서주(西周) 지배층들의 제사 광경을 묘사하거나 그등의 업적을 천양한 작품들은 주의 발흥과 주 초기의 경제 제도 및 생산 상황에 관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형식상으로는 4언(四言)이 기본 율조를 이루고 있으며 부(賦) · 비(比) · 흥(興)의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중 특히 뛰어난 시편들은 생생한 묘사,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 자연스러운 리듬 등으로 하여 풍부한 예술적 감동을 안겨다 준다. 한(漢)에 이르러 《시경》의 연구는 노(魯) · 제(齊) · 한(韓) · 모(毛) 4가(家)의 경향으로 대별되었다. 그 중 노·제·한 3가는 금문시학(今文詩學)으로서, 서한(西漢) 때에는 박사(博士)를 두기도 했으나 위 · 진(魏 · 晋) 이후 점차 쇠퇴했다. 삼가시에 관해서는 청(淸) 왕선겸(王先謙)의 《시삼가의집소 詩三家義集疏》가 비교적 완비된 집주본이라 할 수 있다. 《모시 毛詩》는 고문시학(古文詩學)으로 동한 이래 성행하게 되어, 위 · 진 이후 통용되는 《시경》은 모두 《모시》였다. 《모시》에는 동한 정현(鄭玄)의 《모시전 毛詩箋》, 당(唐) 공영달(孔潁達)의 《모시정의 毛詩正義》, 청(淸) 진환(陳奐)의 《시모씨전소 時毛氏傳疏》등의 주석서가 있다. 송(宋) 주희(朱熹)의 《시집전 時集傳》은 《모전 毛箋》과 《정전 鄭箋》을 함께 채택하였으며, 일부 삼가시의 설을 취한 곳도 있다.저자는 유교와 불교의 근본 정신을 비교하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 더 나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마저 버리고 다만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하는 불교를 오랑캐의 가르침이라 하여 비판하고 있다.♣ 선왕의 도- 이른바 선왕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선왕의 가르침에 대하여 학문은 오경, 혹은 팔경 법은 예악형정이며, 그 백성은 사, 농, 공, 상등 그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과 대표하는 것들을 예로 들며 선왕의 가르침을 중 시하는 의견을 보임
아침식사의 중요성아침식사는 하루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한다. 밤 동안 휴식에 들어갔던 대뇌기능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침식사가 건강에 좋으냐 나쁘냐를 두고 엇갈린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일률적인 견해보다 각자의 조건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비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소년과 50대 이후의 노년기의 사람들에게는 아침식사는 건강에 도움을 준다. 계속 성장 발육단계에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충분한 영양의 보충이 필요하고 50대 이후의 노년층은 체내의 칼슘이나 비타민 등이 쉽게 빠져나가므로 이를 자주 보충해줘야 하기 때문이다.중년기의 비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거르기보다 영양식을 삼가고 야채나 우유 등으로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보충하면서 대사기능을 자극하는 것이 무난하다.아침은 대뇌가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신체는 철저하게 이 대뇌의 지배를 받는다. 이 대뇌를 자극시키는 아침 일이 바로 아침식사다. 안면근육의 운동은 대뇌의 자극에 좋은 청량제가 된다.잠을 자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적긴 하지만 신체의 각 장기는 계속 활발한 신진대사를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를 칼로리로 따져보면 3백∼5백kcal나 된다. 이는 가벼운 한끼 분의 식사에 해당하는 양이다. 만약 아침을 거르고 점심까지 기다린다면 저녁식사 이후 점심까지의 공복은 신체생리상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직장인들의 40%가 조식을 거르고 있고 점심도 간단히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습관이 오래가면 영양의 불균형상태는 건강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간단히 하는 사람일 경우 저녁식사를 많이 하게 된다. 한꺼번에 많은 식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지방이나 탄수화물과 같은 영양소를 축적시켜 비만을 초래한다.낮 동안에는 축적가능성이 있는 영양분이 노동이나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로 소모되기 때문에 축적되는 일이 적다. 결국 아침식사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가령 한창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이나 육체 노동자들은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기 때문에 고른 아침의 영양식이 한 잔, 빵 1조각, 치즈 1조각만 먹어도 아침에 필요한 칼로리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아침을 거를 때 생기는 또 다른 문제는 비만. 아침을 거르다 보면 자연히 간식을 먹거나 폭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복감이 느껴져야 식사를 그만두게 되므로 위장이 점점 늘어나 먹는 양도 늘게 된다. 부득이 아침을 걸렀을 때는 간식으로 우유 1잔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1.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점에 대하여 정리해 보자.2. 아침 식사를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차이를 경험했는지 생각해 보고, 차이점에 대하여 토의해 보자.3. 바쁜 아침 시간에 좋은 간편하면서도 영양가 있는 식사 계획을 세워 보자.(3가지 유형 정도)아침식사 꼭 합시다.1. 아침식사, 그 전통문화 대 외래문화의 비교1) 우리나라 전통의 아침식사가 가지는 의미는?요즘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하자는 뿌리 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식습관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는 매우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였고, 농업 일이라는게 아침 일찍 시작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땀흘려 일한 후에 먹는 아침식사는 하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생일잔치 등에 손님을 초대할 때에는 꼭 아침에 정했던 것입니다.2) 서양의 아침식사가 가지는 의미는?이에 반해 서양의 식습관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정찬은 곧 저녁식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각종 연회도 밤에 이루어져 저녁에 갖가지 기름진 음식으로 포식을 한 후 곧 잠자리에 든 그들이 아침에 눈뜨자마자 대하는 아침은 충실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닝 커피 1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거나 여기에 토스트 한쪽이라도 더해진다면 양반이었던 것입니다.3) 그 결과는....?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급속히 물밀려 들어오던 한 때 [서양화=선진화]라는 그릇된 의식이 팽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산업구조 자체가 많이 변하였고, 그로 인해 아침식사 경시풍조도 자연스럽게 배어 든방법입니다. 되도록 복합당질 식품으로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예) 복합당질 - 밥, 빵, 감자, 고구마 등지방은 적게 : 아침부터 지나친 지방을 섭취한다면 위에 부담을 주고, 또한 아침은 뇌의 에너지 원인 당질을 공급한다는 의미가 크므로 지방이 들어간 음식은 적게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단백질은 적절하게 : 단백질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식품입니다. 예) 달걀, 생선, 육류... 단, 혈중 콜레스테롤이 높은 사람은 단백질 식품 중 콜레스테롤 함량이 많은 식품의 잦은 섭취를 피해야 합니다. 예) 오징어, 새우, 달걀...비타민과 무기질을 풍부하게 : 아침을 거르면서 다이어트를 하면 아침식사로 얻을 수 있는 필수 영양소를 놓치게 됩니다. 예) 채소류 - 콩나물, 시금치, 도라지, 양배추... 과일류 - 딸기, 포도, 오렌지, 사과...섬유질을 되도록 넉넉하게 : 섬유질은 체중조절과 규칙적인 배변 및 변비 예방에 도움을 주므로 충분히 섭취합니다. 예) 녹즙, 과일쥬스보다는 생채소, 생과일, 해조류로. 흰밥보다는 잡곡밥, 식빵보다는 통밀빵으로...충분한 칼슘, 우유와 함께 : 우유에는 뼈를 튼튼하게 하는 칼슘이 충부하게 들어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좋은 식품입니다.. 식사의 종류1) 식사의 제공시간에 의한 분류1 조식 -아침시간에 제공되는 아침식사를 말하는데 서양식 조식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미국식 조정식 : 1쥬스류 2곡물요리 3달걀요리 4빵 5음료-. 유럽식 조정식 ; 대륙식 조정식이라고도 하는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는 아침식사 형태로서 달걀요리가 제공되지 않고 쥬스, 빵, 커피 정도로 간단히 먹는 아침식사를 말한다.-. 비엔나식 조식: 달걀요리와 빵 그리고 커피정도로 간단히 먹는 비엔나식 조식을 말한다.-. 영국식 조식: 미국식 조정식에 생선요리가 포함되는 아침식사를 말한다.2 브런치- 아침과 점심을 겸하는 식사로서 브런치는 브렉퍼스트와 런치의 합성어이며, 주로 점심시간(정오 12시) 전까지 제공하는 아침과 점심을 겸해서 먹는 가벼운 식사를 말한다.3 에 앉아 집필과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래도 피곤한 줄 몰라요. 30대 남성 못지 않는 능률을 올리며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건강법'안씨의 체격은 키1m65cm,몸무게 57kg 정도. 그는 자신이 개발한 '삼위일체 건강법'을 실시한 이래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져본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약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人命在天' 이지만 지금의 컨디션을 유지하면 앞으로 1백50세까지는 무난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건강에 대해 이처럼 자신감을 가지게 만든 '삼위일체 건강법'은 과연 어떤 것인가.그의 '삼위일체 건강법'은 除毒,자연식,운동법으로 요약된다. 즉 나쁜 음식, 술, 담배, 등으로 인 해 몸 속에 쌓인 독을 제거해 피를 맑게 한 다음, 피를 더럽히지 않게 자연식을 하고 깨끗하게 된 피를 순화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안씨는 제독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연 생수를 마시고 아침 굶기를 권한다. 그 에 따르면, 인체가 오전에는 배설하고 오후에는 흡수하는 생리작용을 하기 때문에 아침을 먹게 되면 독이 빠져나가는 데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침을 굶으면 제독 효과를 보는 것은 물론,위 장에 피를 보내지 않고 모든 피를 두뇌활동에 쓸 수 있어 일의 능률이 곱절 이상 증가된다고 한다.안씨는 세계 제1의 자연건강 학자인 일본의 西勝造씨가 연구 실험한 결과, 하루 두 끼를 먹었 을 경우에 몸에서 빠져나가는 독소의 양을 1백%로 했을 때 세 끼를 다 먹으면 75%만 빠지고 한 끼를 먹을 경우에는 1백27%의 독이 빠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즉, 단식 기 간이 길어짐에 따라 체내의 독이 점점 더 많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하지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백미식, 밀가루 음식,기타 공해식을 하면서 하루2식,1식을 하면 영 양실조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현미 중심의 자연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침 을 굶으면 첫3일간 된다는 것이다.그는 부식으로 멸치 무 콩 미역 생선 김 식초 마늘 깨 등을 권한다. 특히 콩과 멸치 식초는 중 요하다는 설명. 콩은 쇠고기나 우유,달걀보다 월등히 질이 좋은 단백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콩을 원료로 한 된장은 체내의 독소를 몰라내 암 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멸치는 칼슘이 풍 부한데,칼슘은 뼈 이 손톱 발톱을 조성하고 혈액을 정화하며 정신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또한 양조 식초는 몸의 피로를 유발하는 젖산을 없애 노화를 방지해 주며 주성분인 초산은 스트 레스를 해소하는 부신피질호르몬을 생성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 현대인들은 특히 멸치와 양조 식초를 충분히 섭취하는 게 좋다고 한다.양조 식초는 몸의 피로를 유발하는 젖산을 없애 노화를 방지그는 육류 등 칼로리가 높은 음식은 되도록 피하도록 권한다. 칼로리가 낮은 식사를 하는 사람 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적고 오래 산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장수국인 일본의 중. 노년 층이 거의 저칼로리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육류는 옛날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명절 때나 먹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흰쌀 흰 밀가루 흰 설 탕 흰 소금 흰 화학조미료 등 흰색이 될 때까지 가공한 5종의 식품을 '독약'이라고 표현할 만큼 싫어한다.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이 부족한 이 식품들이 현대인의 만병의 근원인 저혈당증의 주법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소금의 경우를 봅시다. 소금의 성분은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등인데 인간바 보들이 맛이 있게 하기 위해서 다 깎아내 버리고 짜디짠 나트륨만 남겨 놓고 정제한 것이 요즘 우리들이 먹는 흰 소금,즉 정제염입니다. 이 흰 소금에는 나트륨이 99. 5%나 들어 있습니다. 이 나 트륨 덩어리인 정제염이 우리 몸 속에 들어오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칼슘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을 용해해서 오줌이나 땀을 통해 몸 밖으로 배설시켜 버립니다. 칼슘 마그네슘은 바로 우리 몸의 필 수불가결한 영양소인데 말입니다. 칼슘이 부족하면 뼈와 치아가 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