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감33세에 러시아 왕위에 오른 예까쩨리나 2세는 아무런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여왕이었다. 러시아가 아닌 독일의 작은 공국의 공주로 태어난 그녀는 1744년 15살 때 뾰뜨르 3세와 결혼하고 러시아 군주의 아내로서 삶을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그녀의 위치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을 뚫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으며 계몽사상의 관심을 기우리면서 황실 내에서 자신의 편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1762년 그녀는 성공적인 쿠테타를 지휘함으로서 예까쩨리나 2세로 등극하였다. 러시아의 왕실 출신이 아닌 그녀가 쿠테타를 통해 등극했다는 것은 그녀가 어떤 정통성을 지니지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을 건설함으로서 자신의 정통성 확보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은 새로운 러시아 건설과 왕위 계승의 상징성을 지니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떠한 부분에서 기마상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는지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샹뜨 -뻬쩨르부르그의 탄생과 뾰뜨르 대제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뾰뜨르 1세 즉 뾰뜨르 대제가 개혁한 행정, 사법, 교육, 외교, 군사, 문화 등과 갖은 모든 종류의 국가 업무는 러시아인들의 삶의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으며, 모스끄바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개막이었다.)러시아의 역사학자 랴자노프스끼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역사학자 미하일 빠고진(1800~1857)의 진술을 인용 “빠고진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잠자리에 들 때가지 뻬째부르크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빼쩨르부르그의 모든 일상생활은 뾰뜨르 대제의 근본적인 개혁에 의해 모스끄바 공국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은 삶을 시작한다” 라고 기술 했다. 이와 같이 러시안인들의 생활은 러시아식 습관과 관습이 아니라 새롭게 학습을 통해 익혀진 인위적인 내용으로 가득차고 종교적인 신앙의 교리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기술들이 우위에 서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뾰뜨르 대제는 이러한 변화의 선봉장이자 개혁가였던 것이다.이런 뾰뜨르 대제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달렸다. 뾰뜨르 대제는 암흑과 싸우는 광명의 투사로 그려보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존경받고 찬미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제국 정부와 그 정부의 이데올로기스트들에게서도 그러했다. 반대로 그의 그러한 개혁에 반대했던 무리들은 구신도와 제대로 말 못하는 일반 민중들 중의 얼마간의 구성원들 외에도 슬라브 파와 같은 공상정인 낭만주의적 지식인들은 뾰뜨르 시대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그들 민족의 삶의 진정한 원리들과 방식을 발견했다고 상상했으며 대제의 존재를 왜곡자이며 파괴자로 간주했다.)어떠한 평가가 있던 그의 업적이 러시아를 모스끄바 중심의 러시아와는 다른 새로운 러시아로의 개혁이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새로운 러시아를 창조했으며 계몽군주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어둠에 빛을 가져다준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뾰뜨르에 관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시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은 그의 개혁과 그 국가의 필요성과 위대성을 역설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그 인간적인 희생을 한탄하면서 그의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 때로는 학술원 회원, 때로는 용사, 때로는 선원, 때로는 목수 전지전능한 영혼을 가진 그. 한 영원한 일꾼이 왕좌 위에 있었다.’ 라고 평가하며 그의 개혁을 정당성을 말하였다.1703년부터 뾰뜨르 대제가 건축을 시작한 쌍뜨-뻬쩨르부르그는 뾰뜨르의 개혁의 상징이었다. 대제는 그 나라 북서부의 맨 끝 구석에 거의 접근할 수 없는 늪지대에 전쟁보다도 훨씬 능가하는 인명을 희생시키고서 썅뜨-뻬쩨르부르그를 건설하였다. 그것은 네바강 어귀의 늪지대에 건설된 러시아적 모더니티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뾰뜨르 대제가 서구적인 근대성을 체험하면서 인위적으로 건설한 도시이기에 모스끄바와는 달리, ‘인공 대 자연’, ‘서구 대 러시아’, ‘옛것 대 새로운 것’ 사이의 문화적 대립체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그래서 중세 모스끄바의 일명 ‘목조도시’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근대의 산물인 쌍뜨-빼쩨르부르그의 ‘돌의 도시’로 변화되었고, 이는 따뜻한 감정의 도시는 차가운 이성의 도시로, 가슴의 도시는 이성의 도시로, 여성적인 도시에서 남성적인 도시로, 모스끄바가 정교의 슬라브적인 전통을 간직한 비잔틴 문화 지향의 도시에서 쌍뜨-빼쩨르부르그의 서구의 모더니티를 통해 형성된 라틴 문화지향의 신도시로 변화되었다.)이상의 점에서 봤을 때 새로운 러시아를 열어낸 뾰뜨르 대제를 그의 상징인 썅뜨- 뻬쩨르부르그에 구시대의 기독교에서는 이단시 되었던 조각의 형태로 예까쩨리나 2세가 건설함으로서 그녀가 무엇을 가지려했는가는 자명해 보인다. 계몽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를 개혁하려 하였던 그녀는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한 뾰뜨르의 계승자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상 ‘18세기의 유명한 세 명의 “철학적 절대군주들” 중에서 예까쩨리나는 가장 놀라운 행적을 뽐낼 수 있었다’라고 말한 구치의 평가처럼 뾰뜨르 이후 침체되어 있었던 러시아의 개혁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행하고 계몽군주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뾰뜨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의 문화적 의미?뾰뜨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에 대해서 이덕형 교수님께서 주장하신 대로 “계몽주의자 디디로의 친구이기도 했던 팔코네는 ‘청동 기마상’을 말 탄 ‘성자 게오르기’가 창으로 용을 무찌르는 중세의 이콘 성상화의 모습처럼, 바위를 딛고 앞발을 공중에 들고 있는 말과 그 안장 위에서 오른 손을 앞으로 쳐들고 있는 뾰뜨르 대제의 모습을 청동으로 주조 러시아의 미래를 상징했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말의 뒷발은 뱀을 밟고 있어서 성자 게오르기가 용을 창으로 무찌르는 것과 동일한 상징적 효과를 제시하고 말을 탄 뾰뜨르 대제가 응시하고 있는 네바 강은 이 도시와 러시아의 미래를 상징하고, 말발굽 밑의 뱀은 그 미래를 방해하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반대자를 상징하고 있다.)청동 기마상 내부의 문화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러시아의 이중 신앙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중 신앙’ 체계란 비잔틴으로부터 동방정교를 수용하면서, 여기에 루시의 동슬라브적인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접복되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러시아적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베르자예프가 말하는 러시아의 ‘기독교적 동양’이라는 의미이다. 동시에 이것은 슬라브의 자연관이 지중해 문명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고유의 독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신앙 체계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슬라브의 자연신과 기독교 성인을 일치시키고 있고, 기독교의 핵심적인 삼위일체의 교리를 범신론적 세계관의 제신들을 통해 이해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이중신앙이 잘 녹아 있는 것이 바로 이콘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콘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인 것이다.이콘은 비잔틴 정교회에서 ‘그림으로 된 신학’ 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을 상징하는 중요한 그림이다. 이콘은 정교회에서 이콘과 성경의 표현의 방법과 기호만 다를 뿐 그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글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을 계몽시킬 수 수단이자 신비적 체험과 기적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라고도 생각했다. 이콘의 주제는 주로 그리스도와 성보, 수호천사. 성인들의 일대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이콘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콘은 정교와 더불어 발칸반도에 이어 러시아 남부지역에도 확산되어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공인함으로 러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 비잔틴 교회의 상징적인 이미지인 이콘은 러시아의 정교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이교도적인 범신론과 자연신을 숭배하던 동슬라브적 전통에 가미 된 민족적 특징이 이콘에 나타남으로서 러시아의 이콘은 비잔틴과는 다른 그들의 신앙체계를 상징하게 되었다.이중 신앙적인 종교적 의식 속에서 러시안인들의 성인 숭배의 토착화 현상이 이콘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러시아에서 최초의 성인으로 추대 받은 모리스와 글렙 이후 그리스도의 길을 뒤따르고 있는 러시아 성자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으며 러시아 인들은 성인을 그전에 섬기던 신과 동일시함으로서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였다. 천둥과 번개의 신인 ‘빼룬’을 ‘선지 엘리야’로 간주하고, ‘볼로스‘는 ’성인 블라스‘가 된 것처럼, 성자들의 존재는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농사의 풍년을 관장하는 기능과 활동의 의미로 통해 다가갈 수 있었다.성인 숭배와 이와 관련한 이콘 이것이 바로 에 나타나고 있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성자 게오르기가 용을 죽이고 있는 모습의 이콘이 청동기마상에 형상화함으로서 과거와 구습의 러시아를 격퇴하고 새로운 러시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러시아 민중의 의식 속에 그들의 이중신앙체계 속에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러시아는 성자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모습과 동일화되고자 하는 삶의 한 방식이었다면, 이러한 성자들의 삶과는 대별되는 반 그리스도적 인물의 이미지도 러시아 정교 문화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반 그리스도의 이미지 역시 종말론적 관점과 연관되면서 러시아의 정교 문화 속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말하는 반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이 닥치면 지상에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여 유혹하기 시작하는 데, 이때 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물을 말한다. 끼예프 루시의 정교 수용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와 민중들의 정교 신앙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러한 반그리스도의 도래가 예견되기도 했다. 몽고 다따르의 침입은 동쪽에서 찾아오는 ‘황색의 반그리스도’로 간주 되었으며, 17세기에 들어와 정교회를 개혁한 니꼰, 러시아 제국의 수도를 모스끄바에서 빼쩨르부르그로 옮긴 뾰뜨르 대제 역시 러시아의 반 그리스도로 간주 되었다.
1959년 당시 우즈 호울 회의에서는 미국 전체를 흔들고 있었던 교육과정의 개혁에 관심 있거나 관여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육과정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찾으려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의 종합 보고서적인 교육의 과정이 브루너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브루너는 그동안의 교육과정에 대해서 비판하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능력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 지식교육의 강조하는 새로운 내용중심의 교육과정을 제안한다. 그동안의 실용중심의 교육을 넘어서서 지식의 구조를 찾고 그것을 교육시키자는 것이 바로 브루너의 생각이다.그렇다면 브루너가 말하는 구조란 무엇인가? 그는 생물학과 수학 그리고 언어 학습에서 구조에 대한 예를 언급하는데 필자는 언어에 대한 브루너의 말을 통해 구조에 대해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브루너는 모국어 학습이 바로 구조의 학습의 대표적인 예로 지적한다. 어린이는 일단 한 무장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다음부터 급속도로 많은 문장을 만들어 나간다. 뿐 아니라 문장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형식을 바꾸는 규칙까지 적용한다. 예를 들어 ‘개가 사람을 물었다.’ 라는 문장을 익히면 그 외에도 이것을 사용해서 더 많은 문장을 활용하고 더 나아가 ‘사람이 개에게 물렸다.’ 라는 의미가 같은 문장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구조상의 규칙을 알고서 이러한 규칙을 사용하는 것이다.구조는 학문마다 독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브루너는 특히 과학이나 수학에서 학문의 구조를 이야기 하는데 그는 인문학이나 언어교육에서는 학문의 구조가 있고 이것을 알고 나면 그 외의 것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내용 중심 교육의 정당성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의 교육을 언급한다. 공립학교의 재능 있는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과의 간격은 엄청나다. 학교에서는 개개인이 자기능력이 되는 한 빨리 나가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심화프로그램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가난한 지역의 학교에서는 실행되기 어렵다. 이에 이들 모두를 포괄하고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구조의 학습어린이의 사고를 어른의 사고로 발전시키기 위해 같은 내용을 점점 더 높은 수준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제시할 필요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직관에 대해서 말한다. 직관이란 그럴 듯하지만 아직은 확정되지 않는 원리나 지식을 말하는데 직관을 통해 발견해 낸 지식이 타당한지 밝히는 것이 바로 분석적 사고이다. 즉 직관적 사고는 분석적 사고 이전의 사고이며 생산적 사고의 기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세가지 주제의 핵심을 이렇게 말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교구에 대해서 언급한다.첫 번째로 브루너의 구조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생화에 쓰이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실생활에 일반적 전이가 이루어 져야 한다. 일반적 전이가 학습의 연속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까닭은 교과구조의 파악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디어로 학습을 배치해야 한다. 그럼 그런 아이디어는 누가 제공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부분에 정통한 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기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과정이 전면적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지적활동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게 된다. 한 분야에 대한 아이디어를 통달하기 위해서는 일반적 원리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학습에 대한 태도와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한데 대표적인 것이 발견학습이다. 학생들에게 기본적 기조는 제시하되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재미있게 꾸밀 수 있다. 그럼으로 학생들은 발견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교과의 기본적 구조를 가르치는데 관련된 적어도 네 가지 일반적 주장을 뽑아 낼 수 있다. 우선 기본적인 사항을 이해하면 교과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력은 전체적으로 구조화된 형태로 들어가 있지 않는다. 셋째로 기본적인 원리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적절한 훈련의 전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된다. 그동안의 연구인 삐아제의 연구를 살펴보면 아동은 전조작 단계와 구체적 조작 단계, 형식적 조작 단계를 어치면서 이루어지는데 인지발달의 첫 단계인 전조작 단계는 학령 전기 아동이며 외현적 활동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이해한다. 구체적 조작 단께는 초등학교 입학 후 이루어지는데 외현적 특성을 갖는 동작과 더불어 사물의 특성을 변형하고 조직하는데 내면적 특성을 갖는다. 세 번째로 형식적 조작 단계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서 가설적 논리적 명제와 추상적 실재를 형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발달 단계에 맞추어서 학습을 하면 다소 어려운 이론도 아이들은 학습을 할 수 있게 된다.교과를 학습할 때는 획득과 변형 그리고 평가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학생들은 교과의 구조가 잘 세워져 있을수록 긴 에피소드도 재미있게 학습 할 수 있게 될 것이다.그는 마지막으로 나선형 교육과정을 제시하는데 동일한 학습요소로서의 지식의 구조를 계속적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학습자의 인지발달단계에 맞추어 점점 폭넓게 심화시켜 초보지식에서 높은 지식으로 이어지게 구성하는 것이다.세 번째 장에서는 그는 직관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는 교과내용에 관해서 직관적인 이해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 공부와 시험은 형식으로 언어화 하는 능력이나 공식을 재생하는 능력이 강조되는데 이것이 직관적 이해에 방해가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형식적으로 표현 못하는 직관적인 천재와 표현은 잘 하지만 사실은 직관적 이해 즉 생산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학문은 모두 직관적 이해의 생산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직관적 이해는 분석적 이해 보다 우리는 잘 알 지 못한다. 그러나 직관적 이해와 분석적 이해는 모두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직관적 이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면 우리는 분석적 이해를 통해 그것을 구조화 시키고 분석한다. 학생들에게 이러한 직관적 이해를 가르치고 분석하게 하는 것을 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학습 방법하며 배울가치가 있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친다면 학생들에게 학습 과정에 몰두 할 수 있게끔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습의 동기는 관객 시대의 특징인 수동성을 지향하고 학습내용에 대한 내재적 흥미의 기초에서 유발되어야 한다. 실력지상주의의 위험 신호와 새로운 형태의 경쟁 사회는 이미 눈에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실력지상주의가 오히려 학습의 동기를 올바르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인문학 등의 위기를 가져오고 과학 등의 학문에만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력지상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치열한 경쟁, 과학과 기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 인문학 무관심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이러한 부분의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교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교구는 교사가 사용하는 도구로서 충실히 활용되고 사용될 뿐이지 교사가 교구에 함몰되어 교구를 해석하고 자동화도구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교사는 자동화 도구 등의 교구들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더 좋은 수업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이번 학기 수업을 듣고 타일러의 교육과정 그리고 브루너의 교육과정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의 과목인 인문학의 실용성과 교육과정 속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타일러의 교육과정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과를 경험 중심적인 교육과정에 넣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용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들의 경험을 어떻게 역사에 녹여낼 수 있을 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무수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역사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역사적 사고력이라든지 역사적인 통찰과 같은 어려운 것들은 나도 모르게 배제 시키려 하였고 학생들의 경험에서 이해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중심으로 역사를 교육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을 갖고 생각을 하였다. 학생들의 관심은 사실상 역사의 내제적인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고 사회적인 관심 또한 그러했다. 오히려 역사 과목의 가치는 입시의 한 요소로 도리어 이전의 역사는 거의 의미를 잃었다. 그리고 정치나 사회 경제의 부분 부분의 단편화된 역사 외의 통사와 종합적인 역사 그리고 근대 이전의 역사는 실용성이 없어서인지 주제 선정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교육 과정에서 그러한 역사는 필요가 없는 것일까?이러한 의문들 속에 브루너의 교육과정을 읽으며 나는 다시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내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역사를 왜 배우는 가를 생각해 보자. 우선 나는 역사를 왜 공부하게 된 것일까?대학에 들어와서 직업을 선택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사실 내가 선택한 과목에 대해서 잠시나마 회의를 갖았다. 나는 왜 나의 성적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간호대나 전문직의 과를 선택하지 않고 사학과를 지망한 것일까? 의대나 간호대를 졸업하면 얼마나 실용적인가? 아픈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학과를 갔었어도 미래 사회에 발맞추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사학과에 오고 싶어 하는 많은 학생들은 부모님의 반대를 겪는다. 먹고 사는 문제에 전혀 해당하지 않은 그런 과를 왜 가느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친구들은 역사를 사랑했고 역사를 공부하며 좋았다.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역사를 선택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공부하는 과에 가는 것은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나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의 이야기가 그것을 대변할 것이다. “삶이 힘들어서 역사공부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료를 읽으며 맡았던 고서의 냄새가 역사로 돌아오게 만들었다.”나는 역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내용 그 자체에 발견의 기쁨과 희열을 느꼈다. 그렇기에 역사가 너무나 재미있었고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삶이 힘들 때 역사를 왜 택했을까 고민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자체의 재미에 빠진다.그렇다면 역사의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역사가 가지고 있는 연구 구 다.
양반을 읽고..과제를 하기 위해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이라는 책을 샀다. 하얀 표지에 빨간 네모 그리고 빨간 네모 안에 양반이라는 하얀 글씨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책은 하얀 표지와 빨간 색이 양반의 정절과 정의를 표현하는 것 같아서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본사람이 쓴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책을 교수님께서 과제로 주셨다는 점에서 더더욱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왜 이 책을 읽게 하셨는지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원래 이 책은 저자가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소개를 하기위해 한국 전통의 핵심인 양반을 소재로 쓴 책이다. 저자는 일본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양반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지만 그 단어의 어려움 가운데 한국 전통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양반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양반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양반의 정의는 한 마디로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신분을 의미하는 양반의 의미를 말한다.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 시대 사회의 지배 계층을 말한다. 그러나 양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법제화된 지배 계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반은 사회관습을 통해 형성된 계층이요. 그렇기에 양반과 비양반 경계는 매우 상대적이요 주관적인 것이다.그렇다면 사회 계층상 양반이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양반을 두 개로 나누어야 한다. 재경양반과 재지 양반이다. 재경양반이란 수도인 서울이나 그 근처에 사는 양반을 의미하고 재지양반이란 지방의 농촌에 거주하는 유형이다. 이 중 재경양반은 전주이씨와 파평윤씨, 안동김씨 등이 있는데 이라든지 윤이라는 것은 성을 의미하고 전주와 파평과 같은 것은 조상의 출신지인 본관을 의미한다. 재경양반의 경우 정부 권력의 변화에 따라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그 가계가 뚜렷하고 관료를 많이 배출한 양반이었기 때문에 쉽게 인지가 된다. 그러나 재지양반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재지양반을 알아내기 위해 재지양반이 되기 위한 조건을 살피면 과거 합격자 이거나 당대에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집락(세거지)에 거주하고, 양반의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대대의 결혼 상대는 양반의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들을 조건으로 찾을 수 있다.그러나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재지양반의 조건은 제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층은 굳건히 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고. 하위계층에서 양반계층이 되기 위한 지향화의 문제가 있었다.그렇다면 재지양반은 어떻게 형성된 걸까? 안동 권씨를 통해 살펴보면 양반층은 15세기 무렵에서 17세기 무렵 광범위하게 일어난 사회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재지양반층의 모체는 고려 시대 토착이족 세력이다. 그런 그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권력이나 학문적 명예를 쟁취하고 다시 세거지에 정착을 한다. 그리고 정착지에서 그들의 권력을 확고히 다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재지양반이 형성된다고 생각된다.재지양반의 경제적인 기반을 살펴보자. 경제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분재기라는 것이다. 분재기는 재산 상속 때 작성된 문서인데 작성 목적과 시기에 따라 허여문기와 화회문기 별급문기로 나뉜다. 여기서 허여문기는 생존 중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작성되는 것이다. 화회문기는 양친이 사망 한 후 상속 문서를 삼년상이 끝난 후 상속이니 모여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별급 문기는 부모의 생존 중에 아들과 손자 중에 특정한 자 또는 본래 상속 자격이 없는 자에게 특별히 주는 경우에 작성된다.분재기를 통해 살펴보면 권벌가의 첫 번째 경제 기반은 노비 소유이다. 권벌 들은 상속을 받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상으로 받기도 하면서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였다. 그것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소유함으로서 소유한 농사일에 종사 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궐벌가의 두 번째 경제기반은 농지이다. 권벌들은 노비와 같이 상속과 농지 개발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였다. 그들은 직영지를 직접 관할하여서 농사를 관리하기도 하였고 땅을 대여하여서 농사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지금 까지 양반을 지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러한 양반의 이미지는 훨씬 후대에 성립된 것이고 16세기 무렵 양반은 노비를 사용하여 직영지를 경영했던 것이다.재지사족들은 농사를 통해 이윤을 높이기 위해 황무지 개간을 독력하고 각종 고도의 농사법을 도입하였다. 권벌이 소유했던 광대한 농지 가운데 개발로 획득한 것이 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전기 많은 땅이 미개발지였는데 권벌들은 이런 지역을 많은 수의 노비를 사용하여 개발한 것이다. 그들은 산도 개발하였으며 간척도 동원하였다.다음으로 양반의 생활을 알아보자. 이를 알아보는데는 일기류가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쇄미록을 통해 16세기 양반에 관하여 알아보겠다. 우선 그들은 지방 관아와는 떨어진 농촌에 거주하면서 스스로를 형성해 나갔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 했던 개발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출신 모체인 이족층과의 구별을 위해서 이기도 한다. 일기를 살펴보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봉제사. 접빈객’ 이 매우 중요했다. 선물경제가 발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 한 것은 아니다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 노비의 지휘와 감독 등 또한 해야 했으므로 그의 생활은 분주하였다. 양반의 일상생활 중 중요한 것은 노비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던 양반은 노비를 통해 농사 및 상공업 집안의 잡일과 선물 운반 등의 중요한 일들을 행했다. 그렇다면 노비와 양반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노비들은 소유자의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었고 독립된 인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도망가면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꼭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면에서는 몹시 꿋꿋하게 살았고 지위의 향상의 가능성을 지녔다. 그들 중 다수가 가족을 형성하고 있었고 스스로 독립된 경영을 하고 있었다. 쇄미록에 보면 노비들은 자기의 밭을 가지고 주인의 밭과 함께 경작하고 자신의 물건도 주인의 물건과 함께 파는 상행위를 하였다. 자연히 그들은 자신의 것 보다 주인의 것들은 소홀하였는데 이에 양반들은 분노하기도 하였다. 노비와 양반은 단순 지배 피지배 관계를 떠나서 서로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사이였으며 노비가 도망갈 경우 그것은 더 했다.양반은 사회적 결집과 동시에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각종 조직을 결성했다.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향안조직과 향약을 알아보자. 향안이란 각 지방마다 작성된 양반의 명부이다. 그들은 이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엄격한 자격 심사를 하였다. 고위고관이 되었다고 해도 향안 입록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향리나 서얼 등을 엄격히 제안을 가했다.양반과 밀접한 그들을 통재함으로서 양반의 신분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물론 16새기 이전까지 양반과 향리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폐쇄적인 계층성이 잘 보이지 않으나 후에 가면 자신들의 계층을 엄격히 하려 하였다. 향안 등록자들은 수령을 돕는 향소에 들어가서 향리층을 감독하고 지방통치의 일익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향안조직에게 또 중요한 것은 지방의 풍속과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위해 향약을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또 자신들 내부에는 향규를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향간조직 뿐 아니라 그들은 사적인 혼인관계를 통해서도 그들의 세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한 서원을 만들어서 교육과 제사를 통해서 결집하였으며 동족집락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세거지를 확실히 하였다.이렇게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발달하던 양반층은 17세기 후반이후 더 이상의 경제력의 상승을 하지 못하게 되는 한계에 봉착한다. 이에 상속제도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남녀 균분 상속에서 남자 균분상속으로 바뀌고 장남우대 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그들은 주자학의 이론을 이용하여 경제력 저하에 따른 상속제도의 변화를 꾀하려 하였다. 상속의 변화에 따라 족보의 변화도 일어났는데 남계 혈연집단에 의해 구성된 동족 집단의 결합강화가 그것이다. 초기 족보는 혼인관계를 통해 다른 유력 혈연집단과 결합된 위세를 보이려 했으나 후기의 족보는 동족 집단으로서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작성하였다. 이에 기여를 한 것이 문중집단의 형성이다. 그들은 문중집단을 만들고 더 나아가 문중의 재산을 만들어서 동족을 더욱 결합하려 하였다.
중국에서 민족 반역자를 어떻게 처단하였는가?아편전쟁(1840~1842) 이래 중국은 오랫동안 민족존망의 위기에 놓였었다. 따라서 외국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어 솔선하여 민족의 이익을 팔아넘기는 한간은 매국노 ?스파이 ?민족의 배반자로서 매도(罵倒)되었다.특히, 만주사변(1931~1932) 이후 망국(亡國)의 위기가 강하게 의식됨에 따라 일본에 협력하는 자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 시기의 한간으로서는 만주국 의 국무총리로 있던 정샤오쉬[鄭孝胥], 기동(冀東) 반공(反共)자치정부의 인루겅[殷汝耕] 등이 있으나, 아무래도 최대의 한간은 제이차 세계대전 중 일본측에 붙어서 괴뢰정권인 국민정부(國民政府) 의 수반이 된 왕자오밍[汪兆銘]이다.이런 한간의 처단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 왕자오밍 즉 왕조명은 병으로 죽었다.중화 민국 34년 일본이 대동아 전쟁 에서 패배하자 일본과 같이 멸망한 중국의 왕조명 국민 정부 관계자를 한간 재한 이라는 이름 하에 엄하게 단죄하였다. 이시기는 중화민국 35년 4월부터 중화민국 37년 9월까지 2년 5개월 간이었다.한간재판- 한간 재판은 민국 35년 4월 상순부터 각 성의 고등 법원에서 일제히 열렸다. 남경의 일례를 보면 수도 고등 법원은 4월 1일 성립하여 동월 27일 조펀궁의 동원제 1법정에서 조침 원장 이첨 수석 검찰관 그 외 정부 및 각계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선서식을 열고 시작하였다. 한간 사냥은 1급 거물로부터 2급 3급 등 범위가 무한히 확장되었다. 군경, 정치 경제 문화계를 시작하여 각계의 대 소 피고는 매일 트럭으로 각 고등법원 간수소로 보내졌다.군 수뇌 총살- 군사 한간은 전국 14개 소의 군사 법정에서 처단되었다. 주요 피고로는 엽봉 양규일 호유곤 능소 항치장 장유윤 심보용 이폐제 등이었다. 6월 24일 정오 양규일 호육곤 능소를 시작으로 하여 9월 18일에는 엽봉 그리고 뒤이어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총살형이 치루어 졌다. 이혜제는 10월 24일 징역 10년 공권박탈 6년을 선고 받았다.진공박- 그는 자신은 화평항전이라고 주장하며 기소에 대응하였지만 사형이 선고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자백서와 답변서를 보고 동정을 보냈지만 그는 사형으로 이끌어 졌다.저민의 - 그는 사형에 만족하며 사형에 처해졌다,진벽군- 종신 금고형이 결정된 진벽군은 소주 사자구 강소 제 3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옥중 생활 15년의 고통을 감내한 그녀는 마침내 1959년 6월 17일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매사평 - 통제 경제의 책임자로 알려진 매사형은 사형에 계속해서 재심을 요구하였지만 허사로 돌아가소 우화대 형장에서 처형되었다.양홍지-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 상해의 제람교 감옥 안의 형장에서 병약한 몸을 기댄 체로 탄환은 그의 머리를 부수어 놓았다.무빈- 처형, 온종요 - 82세에 옥사 왕한장- 징역 12년 공권박탈 10년, 고대춘 - 사형 진군혜 - 징역 14년 공권박탈 19년 오송천- 무기징역, 팽년 - 사형 장극- 징역 2년 6개월 공권박탈 2년그밖에 남경 정부 요인들과 왕조명 일족 ,경제계, 문화계, 화중 화남의 요인, 화북에 일본에 협력했던 모든 이는 한간 재판을 받고 사형 혹은 무기징역 혹은 징역을 선고받았다.국민정부의 한간재판국민정부의 재판형식을 국가가 기소권을 독점하고 피고를 관의 힘으로 체포 기소하여 재판 판결 형을 집행하는 방식으로 규문주의 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보면 꼭 그렇게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종전후 중경에서 군통국 국장 대립이 들어와서 미리 준비해둔 블랙리스트에 근거하여 군대의 손으로 한간을 사냥하였다. 직접 간접으로 조금이나마 일본이나 왕정부와 관계가 있었던 사람은 가차없이 투옥했다. 체포된 피고는 충분한 조사도 받지 않고 군인은 군사법정으로 민간인은 법원으로 보내졌다. 재한 자체도 소위 형식적인 것으로 급속히 처형이 집행되었다. 예를 들어 남경정부 주석 진공박은 공판이 한번 밖에 열리지 않았다. 이에 대량 도살이 행해졌다. 뿐 아니라 탐관오리가 많아 재판의 경중이 돈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였다.중공지구의 한간재판중공은 항일 구국 10대 강령을 발표 했는데 그 중에 다음 조항을 언급하고 잇다.“ 한간의 재산을 몰수해 항일 경비로 한다” “ 한간 매국노 친일파를 숙청해 후방을 강화한다” 지나 사변이 무력전의 단계를 지나 지구전의 단계로 들어가고 나서 민족의 이간을 막기 위해 반항간은 더욱 치열해 졌다. 중공은 진짜 한간에 대해서는 단호히 견지했지만 일본군의 분열 책동에 의해서 한간이 되었던 사람은 다시 중앙지구로 복귀할 수 있도록 관대한 태도를 나타내다. 중공의 한간 제거 공작의 본질은 대일 본전마을 목적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중공에게 한간은 인민의 적이었다. 중곡은 지나사변을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봉건주의적 침략전쟁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고 후자를 훨씬 증오하였다.
도자기(陶瓷器)2000310437 노상래2000310509 김지영2000310523 양정아2000310421 권기봉옛 도자기는 우리 민족 문화 유산의 하나로서 그릇이지만 그릇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옛 도자기를 이해하고 감상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지만, 차츰 박물관을 드나들고 그 특징들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친숙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도자기를 이해하는 지름길의 하나는 옛 도자를 제작하는 가마의 작업장에 가서 제작 과정을 지켜보고 배우는 것이다. 물레를 돌려 원하는 형태를 만드는 일은 보기에는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실패의 연속이고 문양을 새기는 일 역시 쉽지 않다. 한밤 가마에서 불을 때는 장인과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익어가는 도자를 지켜보는 일은 신비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하나의 도자가 완성되기 까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지를 안다면, 완성품으로서 박물관에서 대하는 도자가 얼마나 새롭고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고려, 조선 등 도자가 만들어진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사상이나 종교적인 면, 생활에서의 쓰임, 기형, 문양 등에 보이는 특징에 관해서 배우면 배울수록 도자가 새롭게 보이게 될 것이다.도자기는 원래 도기와 자기라는 별개의 두 유형을 따로 칭하던 것을 현대에 이르러 합쳐 부른데서 기인한다. 도기란 도토(陶土)를 가지고 도공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도기 가마에서 구워낸 그릇으로 흔히 질그릇이라고 불리 운다. 자기란 자토(瓷土)를 가지고 사기장(沙器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자기 가마에서 구워낸 그릇으로 흔히 사기그릇이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우리 옛 도자기라고 하면 으레 고려청자, 조선 분청자와 백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옛 도기를 포함해야한다.우리 옛 도자기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길은 많은 부분의 종합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마치 좋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기까지 많이 듣고 생각하고 체으로 장례를 화장법을 택해 뼈 항아리 양식이 시대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이 되면 도장무늬 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어 지는데 입큰병 등 청자와 유사한 것들이 주로 제작되어 고려 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4.고려시대고려는 통일신라로부터 매우 평온한 방법으로 왕조를 이어받았으며, 정신문화인 불교사상은 고려예술을 낳은 모체가 되었다. 10세기 초에는 그때까지 만들어지던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에서 벗어나 자기(瓷器)로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용도와 실용적인 형태로의 변화는 고려자기의 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시도된 연유계의 시유도기(施釉陶器)와 회유계(灰釉系)의 시유도기의 영향이 컸다. 사학자에 의하면, 이 무렵에 중국 만당(晩唐) 또는 오대(五代)의 두 계통으로 청자기술이 한반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 황허강[黃河] 유역의 북방계 청자기술이 서해 연안 중부지대에 이식된 것으로서 인천 경서동, 충청남도 보령 서산 지방에 분포된 산화소성(酸化燒成) 또는 중성소성(中性燒成)으로 보이는 조질(粗質) 청자요지가 그 계류이고, 또 하나는 중국 남부 항저우만[杭州灣] 연안의 웨저우요계의 환원소성(還元燒成) 청자기술이 남부 서해의 전통적인 고대 한국-중국 문화 교통로를 통하여 10세기 전반기에 남부 지방인 전라남도 강진, 전라북도 부안 등지에 전파 확산된 것으로 짐작된다.이렇게 시작된 고려자기의 발달은 10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제조기술이 발달되어 청자류와 함께 환원소성에 의한 백자기술이, 한편에서는 신라 이후의 회청색 토기들과 경질회유(硬質灰釉)와 연질연유(軟質鉛釉) 등이 꾸준히 양산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려시대의 도자기는 토기 청자기 백자기, 연유에 의한 유색(有色) 도기 등이 순조롭게 제작된 문화진작(文化振作)의 시기로 볼 수 있다. 11세기까지는 중국 웨저우요의 양식이, 11세기 말엽부터는 룽취안요[龍泉窯]의 기형과 유조(釉調)가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북방계의 딩납치되어 작업이 곤란해져서 자연히 정지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이러한 수난을 딛고 일어나 다시 시작된 것이 조선시대 도자기의 특징이며, 색을 피한 평범하고 소박하며 큼직한 순백의 자기를 소생시키게 하였으며, 그 형이 지극히 서민적이고 분위기가 원만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려 말 퇴락된 청자의 맥을 이은 조선청자와 청자에서 일변한 분청사기, 초기의 고려계 백자, 원(元) 명(明)계 백자, 청화(靑華)백자의 영향으로 발달된 백자가 있고, 이 밖에 흑유(黑釉) 철채(鐵彩) 철사유(鐵砂釉) 등이 있으나 대별하여 분청사기와 백자기로 구분한다.1. 고려청자의 기원과 발생고려의 대표적 문화유산이 고려청자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청자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청자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하여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것은 청자의 기원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나 금석문 등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처음 고려청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한 일본학자들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시대에 중국의 청자를 배우고 그 기술이 공교해 진 것을 보면 고려도경의 시대인 1123년 보다 50여년 전인 문종 연간에 생긴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후 1965년 인천 경서동의 녹청자 가마터 발굴결과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후삼국 시대에 중국 북방의 청자기술을 받아 중부 한국에서 초보적인 조잡한 녹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그 후 강진 일대에서 양질의 청자가 제작되자 녹청자는 사라졌다는 견해로 청자제작 시기가 9세기말~10세기 초로 앞당겨졌다. 또한 성당(盛唐)대에 중국 월주요 청자가 완성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이를 모방하여 흥덕왕(826~835)대에 청자가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이 제시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남 강진 대구면 일대의 소위 햇무리굽 청자완이 출토되자 중국 월주요 청자의 햇무리굽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장보고에 의해 청해진 시절 강진 일대에서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해 9세기 전반 강진, 완도의 청자 제작설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하였다. 9세기 들어 선종의 유입으로병립된 상태였고 정치적으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내란기였다.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한 고려는 문물제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성종 대 이르면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어 전제왕권이 강화되어간다. 이 시기에는 여전히 통일신라 토기 계통인 회청색의 경질토기가 일상용기의 형태로 변형되고 연유의 기술이 계속 개발되어 갔으리라 본다.성종 11년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는 국가의 일대 위기를 겪는다. 거란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지만 이 가운데서도 고려도자의 기술은 10세기의 기술을 발전시켜 본궤도에 올라 발전해 나간다. 그러나 11세기 전반 까지도 고려청자는 양산의 단계도 아니었고 상류층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청자의 생산은 특수행정구역으로서의 所에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중기(약1047년경~1146년경): 성숙기 , 비색청자 전성기이 때는 고려의 문물제도가 오나성된 가운데 공예 기술도 성숙하여 인종 초에는 청자의 가장 큰 특색인 비색이 절정기를 맞이한다. 북송과의 계속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청자기술이 향상되어 새로이 여러 기법이 사용되고 鐵畵 기법도 등장한다. 또한 초기의 특징이었던 해무리굽은 차츰 좁아지기 시작하고 유색은 청색이 많은 청록, 담청록, 암록 등이 된다. 상감청자의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2세기 전반인 예종, 인종 년에는 비색순청자의 전성시기로 볼 수 있다.-후기(약 1147년경~1274년경): 상감청자 발생, 발전, 전성기1170년을 고비로 문신 귀족문화에서 무신 귀족문화로 전환하며 도자기에서는 청자발생으로부터 12세기 전반까지 계속 발전해 온 순청자가 비색의 절정기를 이루며 차츰 무늬 시문 기법에 독자성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상감청자로 발전하며 새로운 도자기술을 보인다. 특히 청자 기와에 대한 기록과 유물을 살펴보면 12세기 중엽의 청자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청자기와의 무늬는 숫막새기와에는 모란, 당초, 연화무늬가, 암막새기와에는 당초무늬 등이 각각 양각, 음각, 반양각, 민무늬 등의 기법으로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시문되어다양하고 종전의 기형에 변화 문양 표현 기법과 내용 다양*용운리 9호 출토 청자편11세기 후반 ~12세기 초 -세련기: 유연한 곡선 주조의 고려적인 풍모 정착 유약. 태도 의 질과 번조 기술, 문양표현 기법과 문양자체가 또한 진일보* 청자광구병(11세기 높이 30.4 해강 고려청자 연구소)* 청자병형주자( (11세기 높이 21 호암박물관)*청자과형주자(11세기 높이 5.3 국립중앙박물관)12세기 전반 - 고려 순청자의 절정기(상감기법의 숙련기)순청자의 세련순청자: 청자표면에 아무 문양이 없는 것과 음각. 양각을 하거나 상형등을 지칭하여 상감문양과 같이 청자 태토에 다른 색의 자토나 백토를 사용하거나 철화와 동화와 같이 산화철분이나 산화동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은 제외된다.특유의 비색! : 시육된 유약의 두께가 얇고 비취옥과 같이 녹색 유약 내에 미세한 기포과 많아 반실투성으로 태토가 은은히 비춰보인다.기면정리도 매끄럽고 전체적으로 각 부위가 서로 잘 조화되어 균형이 잘 잡히면서 준수하고 생동감이 넘친다.-청자 발생기 :소문청자 성행 11~12세기 : 음각 양각 기법 성행고려 청자의 종류1) 소문청자-청자를 대표-청자에 아무 문양이 없는 것-자연스런 조화와 균형이 고려적 조형의 틀을 이루고 있음*청자과형화병( 12세기전반 ,국보 제94호 높이 22.8 인종장릉출토 ,국립둥앙박물관)⇒가장 기본형2)음각청자-10세기 푸기부터 장식문양이 새겨지기 시작 ! 간단한 음각 기법인 연판문과 가는국화당초문 국화 모란등의 식물과 앵무새, 원앙등동물문양 새김 뇌문대, 당초문대, 여의두 문대, 연판문대등의 주변문양-가늘고 예리한선 점차선이 부드러워집 굵은선 등장 반양각으로 변함*청자음각연화당초문매병 (12세기 전반 국보 제97호 높이 43.9 국립중앙박물관)*청자음각모란당초문과평주자 (10세기~11세기 높이 18.8 국립중앙박물관 )3) 양각청자-문양주변을 조각칼로 파내어 부조와 같이 양감이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음각으로 역부조한 도법에서 찍어 내어 양각을 하는 방법-주로 11세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