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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중기 유교적 윤리에서 본 여성의 지위
    목 차Ⅰ. 머리말Ⅱ. 조선중기 유교윤리에 나타난 여성관Ⅲ. 조선중기 여성의 사회ㆍ경제적 지위1) 혼인제도로 본 여성의 지위2) 이혼과 재혼3) 死後養子 및 相續問題4) 호칭으로 본 여성의 지위Ⅳ. 조선중기 윤리 교육에서 본 여성1) 性行1 男女關係2 婦儀3 行動擧止2) 言語3) 정숙ㆍ정조관4) 시부모 모시는 도리와 敦睦5) 子女敎育의 태도6) 奉祭祀와 接賓7) 家事技術과 勤儉節約Ⅴ. 결론조선중기 유교윤리와 제도에서 본 여성의 지위Ⅰ. 머리말오늘날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측면은 여성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급격한 계층 간 이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과거의 다양한 신분질서, 위계질서, 권위체계, 억압구조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남녀간의 차이, 남녀관계에 대한 의식과 구조는 급격한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가장‘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들이다. 현대의 노년층 여성들은 조선시대의 남존여비의 陰陽論的 여성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조혜정, 『전통적 경험세계와 여성』(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또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전통적 여성행동 규범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박경자, 우암선생 계녀서에 대한 현대 여성의 의식에 관한 연구 , 『성신여자대학교 연구논문집』7, 1975. p.299∼357오늘날 우리는 전통사회에서 강조해 온 유교적인 여성인식들을 실제 생활에서 자주 접한다. 여자가 柔順해야지 그게 뭐냐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박복하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다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다 등등이 이에 속한다.한국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과 삶은 조선중기, 즉 17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 질적으로 변화한다. 여성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유교문화의 정착이다. 유교문화는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도입되어 생활에 접합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고 그 결과 17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생활세계의 규범으로 자리잡히게 되었다.지위조선시대에는 사회 분위기가 경제적으로는 집약적 농업 형태를 띠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과 그를 보좌하는 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도시 중심의 중앙 지배권과 토착 지방 세력 중심의 지역적 지배권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집약적 농업형태를 띤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력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곧 남성들의 협력이 강조된다고 설명되어질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부계 혈통 중심으로 조직하며, 남녀 유별의 관습을 통해 남성 지배적인 체제를 구축해 왔다.{ 조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7) p. 64-65이러한 국가 통치 이념하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공식적 위치는 보잘 것 없었다. 단지 노동력 확보를 위해 多産을 위한 출산기능이 존중받았을 것이다. 각종 교훈서를 통해 어머니, 아내 ,며느리로서의 의무만을 강조 받았을 뿐이며, 사회적으로 여성이 해야 할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조선시대 에서 봉건체제의 한 특징이라고도 할 부녀자의 사회적 위치는 男女七世不同席 이라는 유교적 도덕관에 의하여 유아 때부터 강조되었고 여성을 가문의 和樂을 책임 맡은 존재였다. 『사소절』에서 부인이 순한 성품을 갖춘 뒤에야 안으로 和順하게 다스리고, 안으로 和順하게 다스린 후에야 집안이 오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金德懋, 『士小節』, 金權鍾 譯解 (서울: 명문당, 1993) p. 198라고 말하고 있듯이 가정의 和樂을 위해서 부녀자의 성품이 교육되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지적인 영역의 학문보다도 가정 내에서의 모든 범절을 맡아 나갈 수 있을 정도의 德育 중심 교육만이 요구되었다. 만약 여성이 학문을 연마하게 되면 가정 내에서 남성의 위치는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그 원인에 해당하는 사항부터 아예 금지시켰으며,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할 수 없도록 여성들을 閨門안에 가두어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의 활동에 대한 제약은 없이 오로지 여성들을 단속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각종 여성 교훈서도 그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조선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七歲부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두 번째 경우로는 처를 심하게 구타하거나 칼로 상하게 하여 국가가 이혼을 강제한 사례가 있다. 마지막 경우는 처가 질투로 비 또는 비첩을 살해하였을 때 강제이혼과 함께 형벌을 가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한 질투에 의한 이혼 규정은 칠거지악에도 실려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살해라는 범법행위로 나타났을 경우는 이혼사유가 되었다.일방적 이혼에는 남편측의 일방적 이혼과 처의 요구가 있다. 전자의 경우 대게 처의 의무 불이행에 대한 제재로 간통과 도망, 남편에 대한 구타 時, 그리고 칠거지악의 내용들이었다. 후자에 대하서는 처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사만으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고, 다만 남편이 도망하였을 경우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관에 신고하여 이혼할 수 있는 규정과 남편이 처를 구타하였을 경우 남편의 동의를 얻어 이혼할 수 있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합의 이혼은 그 실행이 가능하기는 했어도 대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실시되었어도 합의하에 끝난 일이기 때문에 문제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축첩은 고려말의 다처행위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지만, 이것은 명실상부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다. 우선은 처첩제를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균형한 일부일처제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여성에게는 재혼, 이혼의 모든 상황에서 평등하지 못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3) 死後養子 및 相續問題상속인 및 상속 순위를 살펴보면 그 一순위는 자녀이다. 자녀가 공동 상속이며, 이 경우 여자의 在家與否를 不問하고 지녀가 피상속인보다 먼저 사망한 때에는 사망 자녀의 직계혈속이 대신 상속한다. 다음으로 자녀가 없는 夫 또는 妻가 사망하면 그의 배우자가 상속한다. 상속인에게 자녀가 없을 뿐 아니라 배우자가 없을 때에는 피상속인의 本族이 상속하게 된다. 즉 상속 재산은 본시 피상속인이 夫祖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피상속인의 가장 친근한 本族인 동생(형제자매 한 가정 내에서 부녀자의 부드럽고 조용한 성품이 곧 그의 자녀나 남편 나아가서 가문의 발전에 영향을 기치며, 여자의 평소 부지런하고 절제할 줄 아는 생활태도가 곧 가문의 興亡盛衰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겠다. 여성의 행실에 대해 당시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던 남성들조차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것을 요구했다고 생각된다. 항상 여성들의 생활 전체를 감시하듯이 구속하였고 억압했으며, 남성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1 男女關係조선시대 여성에게 가장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貞節ㆍ守節에 관한 정조관념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조선시대의 여성들을 교육시켰다면 그 목표를 꼽을 수 있는 것이 烈女, 나아가서 賢母良妻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수절하는 여성에게 열녀비가 내려지기도 했지만 조선 건국 초기를 거쳐 중기 정도 되면 여성의 정조ㆍ수절은 의무를 넘어 하나의 체질화되어 간다. 따라서 열녀비를 세움으로써 다른 여성들을 굳이 교화시키지 않더라도 조선시대에는 여성으로 자라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녀를 삶의 목표로 지향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여자의 행실 중에서 가장 강조하고 주의시켰던 부분은 남녀관계에서의 주의사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內外法으로 이름 지워지는 여성행동의 규제는 여성을 안에 꼭꼭 가둬두면서 他家의 남성들에 대해 여성의 존재 자체를 비밀시 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남녀가 서로 볼 수도 없었으며, 외출이라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같은 집안의 남매간이라 할지라도 7세 이후엔 같이 자리를 하지 못하도록 교육하였고, 여자의 경우 10세 이후엔 모든 생활이 閨門안에서 이루어져 남녀가 분리되어 자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가르쳐 사대부의 남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여자와 함께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하였다.자연히 남녀간의 관계에서는 인간적인 대면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여자의 인간관계는 가족과 가문의 사람으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과거의 양반임을 자칭田을 그대로 소유할 수 있으나, 재혼할 경우에는 이를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변원림, 『역사속의 한국여인』(서울: 일지사, 1999) p.119따라서 정조관은 사회적 통념이라서 따르기도 했겠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수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더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재혼한 여인의 자손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도 벌을 받아, 1522년에 한 관리가 젊어서 과부가 된 딸이 불쌍하여 재혼을 시켰는데, 이를 국가에서 알게 되자 그의 관직을 박탈하였을 뿐 만 아니라, 일생 동안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부모뿐만 아니라 과부와 결혼하려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아, 70세가 넘은 한 功臣 젊은 과부와 결혼하려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변원림, 『역사속의 한국여인』(서울: 일지사, 1999) p.116-117세종은 여성들을 유교적인 열녀로 교화시키려고 고금의 정녀 혹은 열녀의 행적을 골라, 16년(1434)에 『三綱行實圖』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 서적에서 모범이 될 만한 忠臣ㆍ烈女ㆍ孝子 등을 고른 것인데, 여기에 실린 사람들은 각각 35명씩 되고 있다. 성종 8년에는 부녀의 再嫁를 금하는 명을 내리어 재가한 자의 자손은 벼슬에 천거하지 말도록 하는 율령을 지었다. 또한 사회 분위기가 재혼하여 낳은 자손 및 失行婦女의 아들은 모두 벼슬에도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 전반기에 실시됐던 여성교육의 내용은 대게 문란했던 여성의 행실을 바로잡고자 貞節을 강조했던 것이다. 국가에서도 여성들에게 정절관념을 심기 위해 여성 교훈서들로 한글로 번역하여 평생을 한 명의 지아비를 섬기며 과부가 되더라도 수절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가르치게 했다.중기로 접어들면서 여성들에 대한 교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현모양처의 여성상을 강조하게 되었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대부가의 여성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까지 정절 관념은 일반화되어져 갔다.처녀와 순결과 과부의 정조는 이다.
    인문/어학| 2002.12.06| 22페이지| 2,000원| 조회(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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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레니엄 원효 평가B괜찮아요
    한국 불교의 성사 원효....원효(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 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儒家와 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원효의 깨달음의 시작.... 그의 사상원효의 행석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海路로 해서 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 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이 이야기를 통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원효의 행적.... 그의 저술활동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와 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원효학문의 이론....영향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인문/어학| 2002.05.08| 6페이지| 1,000원| 조회(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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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에서의 상퀼로트의 역할 평가A좋아요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상-퀼로트 (Sans - Culotte)의 역할◎서론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다양한 계급의 제 혁명을 포괄하는 하나의 복잡한 대사건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대혁명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되는데 그것은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주도하였으며 이후의 세기에서 부르주아지의 전반적 성장을 위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평가함에 있어, 이들의 권력 획득을 가능하게 하였던 비부르주아적인 요소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789년 영주제적 제 권리의 폐지 선언을 낳았던 농민층의 봉기와 더불어, 도시민중을 대표하는 상-퀼로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부르주아지는 귀족계급 타도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퀼로트는 혁명초기부터 열성적으로 혁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또한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확고한 지지 세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진행 과정을 통해 획득된 정치적 경험과 구단위의 다양한 기본조직들을 통해 혁명적 사상들을 접하게 됨에 따라 상-퀼로트는 점차 자체내의 고유한 성향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상-퀼로트 투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혁명의 실천방법을 둘러싸고 상-퀼로트와 자꼬뱅의 충돌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그렇다면 프랑스혁명의 전개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구제도 말기인 1787년부터 테르미도르반동에 의해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가 몰락한 시기인 1794년까지 기간 동안에 전개된 상퀼로트운동에 대하여 사회·경제적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구제도 말기 상퀼로트의 불만과 저항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깊은 원인은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 즉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귀족적·봉건적 성격의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이 만연된 절대주의(絶對主義) 체제와 특히 신분제도의 모순이 심했다.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시민 계급은 계몽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이 소유한 교육·부·재능·야망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우를 요구(국가 행정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고 문벌보다 능력과 업는 출생률이 현저히 감소했다. 매년 상당한 차이를 보이던 사망률은 1778년에는 33%까지 낮추어졌다. 평균수명도 대혁명 전야에는 29세로 높아졌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영양실조, 기근, 그리고 전염병에 의한 대위기가 사라진 데에서 비롯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는 18세기 후반의 중요한 특권이었다. 도시와 민중계급에서는 현저한 인구증가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인구증가에 의해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이것은 물가상승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이러한 경제적 위기의 시기에 식료문제나 임금문제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났는데, 주로 밀과 빵을 사려는 도시나 그 근교의 영세소비자들에 의해서였다. 농촌의 경우 구제도 말기의 프랑스는 경작방법이 뒤떨어지긴 했으나 대체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도의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상주의자들에 의한 1787년의 곡식매매에 대한 자유판매정책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양의 곡식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국내의 예비용 저장곡식이 감소되었다. 이 정책으로 북부지방의 중요한 생산물인 밀의 값이 2배이상 올랐고, 1788년에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으로 곡식생산이 감소되어 곡물가격과 빵값이 12수에서 12월에는 13, 14수로 인상되어 7월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때까지 계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이러한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대책은 조세의 평등이었다. 구제도 말기에 물가가 65% 상승 한데 비하여 같은 기간에 귀족이나 특권계급이 토지재산에서 얻은 수입은 98%나 증가하였다. 마침내 이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여 왕실의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1787년 2월 국왕 루이 16세는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였다. 재상 깔론느는 인지세를 확장하고 토지소유자들에 대해 토지세를 부과하려는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명사회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여 동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5월 25일 명사회는 해산되고 귀족혁명이 뒤따르게 되었는데 이를 가르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사에 의하면 상퀼로트는 빵을 사기 위해서 그들 수입의 50%를 소비해야만 했다. 빵값 인상과 함께 민중의 생활을 어렵게 한 것은 낮은 임금이었다. 농촌에서는 계속되는 흉작으로 생활에 타격을 받아 도시로 모여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노동자 인구는 증가되고 그에 따르는 직장 공급은 쉽지 않은 상태여서 낮은 임금의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워 실업자의 수만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은 부르조와지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상퀼로트가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모두 귀족계급의 탓으로 돌려졌기 때문에 3부회에서 귀족계급에 대항하는 부르조아지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었다.이러한 불만을 배경으로하여 1789년 4월 28일에 생-앙뜨완느(Saint -Antoine) 교외지역에서 레베이용폭동(Revolte Reveillion)이 일어났다. 이것은 혁명의 첫 번째 거대한 민중폭동으로 불리워지는 한편, 구제도의 마지막 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생 -앙뜨완느지역에 350명의 직공을 가진 공장주인인 벽지제조업자 레베이용(Reveillion)과 초석제조업자인 앙리오(Henriot)가 선거연설에서 그들의 노동자들이 한 달에 15수의 임금이면 넉넉히 살 수 있다는 민중의 빈곤에 대한 파렴치한 발언을 함으로써 임금노동자들의 반감을 사게되어 일어난 것이다. 레베이용폭동은 그 동안 계속되어 온 빵값의 인상과 낮은 임금으로 인한 임금노동자의 누적된 사회적 불만이 터진 사건으로 당시 노동자층 3/4이 높은 생활비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이들의 불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레베이용폭동은 상퀼로트 중 임금노동자가 하나의 사회적 그룹으로서 대두된 사건이기도 하였다.마침내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서 3부회가 소집되었고, 이제까지 국왕과 귀족사이의 투쟁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부르주아지가 혁명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부회의 소집을 계기로 하여 대표선출과 투표방법의 문제에서 귀족과 부르조아지간에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고, 고등법해 매우 조직적인 형태를 띄었고 수많은 문서, 세금서류, 장부들이 불태워졌다. 7월 8일에는 샹드마르스(Champ de Mars)에 있던 수비대에게 혁명책자를 판 신문배달부가 체포되었고 11일 밤에는 무장시민과 프랑스 수비대와 지방의 빈민들이 무기를 구하기 위해 파리 북방에 있는 생 - 라자르(Saint - Lazare) 수도원을 습격하는 등, 파리 각처에서 무기를 찾기 위해 민중의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화약 무기제조업장의 상점이 곳곳에서 약탈을 당했다. 훗날 파리 총포제조업자들이 국민의회에 제출한 총 손실액보고가 115, 118 리브르에 달하는 것을 보아도 이 폭동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알 수 있다. 7월 12일 파리에 알려진 네케르(Necker)의 파면소식은 민중으로 하여금 무기상점을 약탈하도록 자극하였고, 무장을 더욱 재촉하게 하였다. 이런 소란상태에 놀란 파리의 선거인은 13일 상임위원회를 세워 무분별한 무장을 막고, 시민의 공공안정을 위한 부르조아지 민병대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14일 민중은 전면무장을 요구하며, 무기를 구할 목적으로 폐병원에 침입해 10문의 포와 28,000정의 소총을 탈취한 뒤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이 곳은 전에는 국사범을 가두었던 절대왕정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인해 그 곳의 수비병과 유혈충돌을 벌인 민중은 98명의 사망자와 73명의 부상자를 내고 바스티유감옥을 함락시켰다. 파리와 지방 도시들의 반란은 농촌에도 번져갔다. 농민도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들고 자기들의 바스티유 감옥인 영주의 성곽을 습격하여 토지 문서를 비롯한 영주의 봉건권 문서들을 볼살랐다. 만일 귀족이 이에 저항하면 피로써 보복하였다. 농민 반란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전국 곳곳으로 번져갔다. 농민도 파리의 폭도와 꼭 마찬가지로 잔인하였다. 국가의 공권력은 마비되었고 폭력과 공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져갔다.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명은 이제 정치 혁명으로 끝났다는 우파의 생각을 명확히 표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좌파의 과격한 사회혁명적인 태도에 단호히 맞선 것이었다. 여기서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깨어졌다. 또한 바렌느 사건이 있기까지 민중은 왕에 대한 고래의 신앙과 개혁에의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왕정의 폐지나 공화정의 수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혁명에 소극적이었던 민중도 왕과 왕의 지지세력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자기들의 이익에 일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 돌변하고 있을 때 민중의 마음을 더욱 돌아서게 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91년 8월 25일의 필니츠선언과 9월 3일에 발포된 헌법의 반민주성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필니츠에서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루이 16세의 왕위를 위협하는 혁명에 반대한다는 뜻을 천명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무력 행사에 유럽 각국 군주들이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프랑스 왕은 자기들의 군사 행동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당사자들은 이 성명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하나의 협박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은 모양인, 그것이 프랑스 국민에게 준 심리적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프랑스 국민과 파리시민이 어떤 기분으로 필니츠의 성명을 받아들였겠는가를 이해하기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샹드마르스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의 빵값이 안정된 상태였다는 것을 생각할때, 높은 빵값이나 기근에 의한 굶주림이 주요 동기가 되었던 다른 상퀼로트운동과는 달리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 특색이다.바렌느 사건은 국내에 끼친 영향 못지 않게 국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왕과 망명귀족의 끊임없는 반혁명음모는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인문/어학| 2002.05.08| 10페이지| 1,000원| 조회(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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