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그리고 중국의 6.25 참전1. 들어가는 말북한의 기습 남침에 서울은 사흘만에 함락되고 남한은 UN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지역까지 밀리고 만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비롯한 38선 이남의 땅을 되찾게 되므로써 UN은 “한반도를 한국전쟁 이전의 상태-38선을 경계로 한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는 한국 지원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계속해서 북으로 진격해야 하는가에 대한 찬반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과 접하고 있는 동북지방(만주)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하였다. 중국의 동북지역은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중국의 전략요충지였고, 압록강의 수풍댐은 전력 공급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상실은 신생 정권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될거라는 것이 중국 지도부 내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미국에 대해 북진시 중국군도 참전하겠다고 하는 경고를 하며 반대를 하지만, 미국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결국 북진을 선택하고 UN 또한 이에 동의하게 된다. UN의 결정으로 북진이 이루어 지자 상황이 불리해진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동북지역과 자국의 안보문제, 또 신생정권으로서 전쟁이라는 국가 위기를 통해 인민의 단절을 공고히 할수 있을 것이며 불안정한 권력기반을 확립할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모택동의 판단 등에 따라 중국은 “항미원조지원군” 이라는 명칭으로 북을 도와 6.25에 참전하게 된다. 어쨌든 중국이 6.25 참전 결정을 내리기까지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그들에게 집적전인 개입요인을 제공한 것은 UN의 북진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북진에 대한 찬반 논쟁과 결정, 모택동의 정세판단과 압록강 횡단으로 시작된 중국의 참전, 그리고 중국의 인해전술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본 청천강에서의 첫 전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중국의 6.25 참전이 갖는 의의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 발표를 마치려고 한다.2. 북진에 대한 찬반논쟁 (38선 돌파 논쟁)(1) 반대① “38선을 돌파하고 북한의 영토를 들어가는 행위는 원래 유엔이 한국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을 때의 결의안을 깨뜨리는 일이다.”② “유엔군의 38선 돌파에 뒤이은 북진은 소련과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2) 찬성 ☞ 한국정부, 맥아더 장군 外① “38도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인민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침략할 가능성이 있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의결에 표명되어 있는 ‘ 이 지역의 평화’는 결코 오지 않는다.”② “유엔군의 군사 행동이 38선 이북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정부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유엔 결의안의 정신을 수행하는 것이다.”③ 한국정부 ☞ “38선은 적 남침으로 말미암아 이미 무너졌으므로 여건만 되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돌파할 수 있다”④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맥아더의 주장- 신생 중공의 정치적, 경제적 취약성 때문에 군사적 개입이 불가능 할 것- 만약 개입 의사가 있었다면 낙동강 방어선이나 인천상륙작전시 개입하였을 것- 설사 일부 병력이 개입하더라도 미 공군으로 쉽게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4) 결론: 북진결정① 미국정부는 처음엔 38선 돌파에 대해 매우 신중한 편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에서 성공한 후 작전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내렸다. 다만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을 지키면서 작전을 벌일 것을 맥아더 장군에게 당부했다.첫째, 소련군이나 중국군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만 북진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한만 국경선 또는 소 련과의 국경선을 넘어서서는 안된다.둘째, 국경 근처에서는 한국군으로 하여금 북한군 작전을 소탕하도록한다.셋째, 군사작전 종료 후 한국의 정치적 통일문제는 유엔의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②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9월 1일 연설 中“ 한국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통일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유엔의 지도 지침’ 아래 다른 나라와 더불어 그들이 그러한 권리를 향유하도록 우리의 몫을 다할 것이다.”③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의 제5차 유엔총회 기조 연설 中“ 유엔군의 군사 행동은 38도선 이북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정부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유엔 결의안의 정신을 수행하는 것이다.”3. 중국군의 정세판단모택동은 중국이 개입하더라도 미국이 유럽안보를 희생하면서까지 대륙으로 확전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여 중국군이 개입시 그들의 작전목표를 달성할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곧 겨울이 되면 압록강, 두만강의 결빙으로 병참선 유지하기 쉬운 반면, 유엔군의 기동은 북진할수록 어려워질 것이며, 북한지역의 험준한 산악지역은 산악전과 유격전에 능한 중공군에게는 매우 유리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4. 항미원조지원군 (중국의 전략)중국은 북을 도와 참전하면서 ‘항미원조지원군(抗美援朝志願軍)’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는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 원조를 스스로 원해서 참여한 군이라는 뜻으로 조국전쟁에 개입하면서도 미국과의 전면대결을 피하려는 인상을 나타내기 위해 고도의 전략차원에서 당시 중국군에게 부여한 명칭이며 이러한 명칭 때문에 중공군 개입 규모 판단시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5. 압록강 횡단 ( 1950년 10월 19일 )모택동은 1950년 10월 18일, “우리는 한반도의 북쪽을 향하여 계획된 4개군과 3개 포병 사단을 이동할 것과 그리고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내일 (19일) 저녁에 첫번째 부대는 안동(현재의 단동)과 지안 사이의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 절대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여라. 모든 부대는 매일 저녁의 어두움을 이용하고 새벽 4시에는 그 자리에 멈추어라. 새벽 5시부터는 모든 부대는 은폐하고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라. 경험을 얻기 위하여 첫날 (19일) 밤에는 2개 혹은 3개 사단 정도만 압록강을 넘고 그 다음날(20일) 밤에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하라. 이후로는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팽덕회와 가오강이 직접 부딪혀 가며 상세하게 전쟁을 지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압록강 횡단에 대한 재확인 명령을 전문으로 발하였다.개입경로를 살펴보면제13병단제38군, 42군 : 만포전 - 강계 - 회천, 장진호제39군, 40군 : 수풍 - 운산, 온정제50군, 66군 : 신의주 - 대령강 상류제9병단 : 중강진 - 장진호입한 과정을 세부적으로 알아보면, 먼저 제13병단의 6개군중 10월 17일부터(주 : 모택동의 명령상에는 18일 늦어도 19일 부터는 도강하라고 하였음) 압록강을 도하한 제39, 40군은 수풍을 경유 운산, 온정에 전개하고 제38군은 만포진-강계-희천의 청천강 계곡접근로를 이용했고 제42군은 만포진-강계-장진호의 산악접근로를 이용,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제9병단의 이동을 엄호하였다.10월 27일 부터 입한하기 시작한 제50, 66군은 신의주-안주 축선과 신의주-구성-태천-용산축선을 이용하였다. 또한 UN군의 빠른 진출속도와 상대적으로 수송이 늦어짐에 따라, 제9병단은 11월초 중강진으로 입한하여 제2차 공세부터 참전하였다.6. 청천강전투 (1950, 인해전술)한편 한국군과 유엔군은 이러한 중국군의 압록강 도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북으로 진격한다. 북한군의 저항이 약하게 있긴 했어도 진격은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압록강에 거의 다다를 때 까지 중국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중국군의 경고를 단순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감히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자만심과 방심, 그리고 곧 전쟁이 끝나 크리스마스에는 다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다 10월 25일경 청천강에서 중국군과 충돌하지만 그때까지도 유엔군은 적 규모와 기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본격적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은밀한 곳으로 자취를 감춘 중국군에 대하여 겁먹고 전투를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해 11월 24일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을 재개했다.그러나 25일 밤 청천강 북방과 묘향산 지역 일대에 숨어 있던 중국군으로부터 크게 기습을 당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중국군은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어대고 야수처럼 괴성을 지르며 쇄도해왔다. 야간에 방어하는 측의 불안감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고도의 심리전과 함께 인해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이 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로 인한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11월 말부터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무조건 철수하고 보자는 심리에 빠졌으며, 12월 15일경에는 모두 38선 이남으로 철수했고 1951년 신정 때는 다시 중국군 공세를 당하여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까지 물러섰다. 그후 한참 지난 다음에야 충격에서 벗아나기 시작하고 간신히 38선을 회복하기에 일렀다.
『아Q정전』이해하기…드디어 『아Q정전』을 읽었다. 중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줄 곧 읽어보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비록 과제 때문이긴 하지만 마침내 『아Q정전』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아Q정전』이라면, 청소년 권장 도서 중 하나로 이전에 이미 읽었던 『폭풍의 언덕』, 『대지』 등과 함께 서점 한 켠에 나열되어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장국영 주연의 『아비정전』이라는 영화와 같은 내용인 줄로 착각하고 만 어이없음 덕분에, 조금 억지스럽지만 이미 중국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 정도였다가, 중국에 관심을 갖고 나서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언제 배웠는지는 몰라도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루쉰의 작품이라는 것, 무엇보다도 그 안에 당시 중국의 사회상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때 이와 더불어 이 소설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중국 사회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어야 했는데, 다 읽고 난 다음에서야 절실히 느꼈다. 어쨌든 중국학습사이트에 가보면 여지없이 올라와 있는 이 소설의 원본과 수강신청 때 중국사회론 계획서 과제에 『아Q정전』에 관한 것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서 이번 학기에 꼭 읽고 넘어가야겠다고 진작에 맘을 굳혔었고, 그만큼 기대가 컸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이해하게 될거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생각들 때문에 몇 장 되지도 않는 이 책을 지금껏 읽지 못하고 벼루며 기대감만 키워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허탈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말았었다. 뭔가 큰 게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중국 사회의 무언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내 머리 속엔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었고 내 맘 속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단지, 어떤 식으로 독후감을 써야 할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이 책을 읽고 난 후, 처음엔 허무했다. 허탈했다. 그러다 내 지식의 미비함을 탓했다. 자료를 찾으면서 보니 남들은 이 소설을 다 이해한 듯 보였는데 내가 그러지 못한 것은 중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면서 느낀 거라면, 아Q가 참 괴짜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일반 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행동을 해서,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그러는 데는 뭔가 큰 이유가 있을 거라고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고, 단지 마지막 죽을 때 까지 그냥 괴이하게 바보같이 살다가 어이없이 죽어버린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아Q에 대한 소설로만 정의 내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 소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으로 자료를 찾다 보니, 같은 소설을 읽고 나서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따라 이해의 폭이 달라지고 같은 곳에 있더라도 내가 돌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사전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보석들만 잘 찾아내서 가지고 간다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지식이라는 것이 맘 먹는 다고 해서 한 순간에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책과 좀 더 가까워지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안타깝지만 역으로 이 소설을 이해해보기로 맘 먹고 자료를 찾았다.자료를 찾으며, 첨부터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닐 꺼라 생각했던 아Q라는 이름에 조차도 그 안에 내포하는 바가 있었다니 말이다. 아Q라는 이름의 '아(阿)'라는 글자는 타인을 부를 때 상대방의 이름 앞에 붙여 친근함을 나타내는 접두어이고, Q는 Question과 통하는 말로, 결국 아Q라는 인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 즉 자기정체성이 모호하여 이리 저리 휩쓸리는 인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내가 읽은 내용과 충분히 매치가 되었다. 엉뚱하게 느꼈던 아Q의 모습이 이런 거였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번엔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소설 후반에 보면 혁명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내용도 혁명과 관련해서 쓰여있는데,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안에 분명 이 혁명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서야 했다. 내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난 이 혁명이 무슨 혁명을 말 하는지도 몰랐었고, 자료를 찾으며 비로소 신해혁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세계사 시간에 신해혁명에 대해 배우면서 그 때 루쉰에 대해 들어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해혁명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를 제일 좋아했던 덕에 그래도 대강 어떤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이 작품제목에 대한 이해에 이어 작품배경까지 알게 된 것이다.
1. 배 경 건륭(乾隆) 중기 이후 정계와 지방행정의 부패, 가경(嘉慶)초에 폭발한 백련교(白蓮敎)의 반란 등으로 인해 청조 정규군인 팔기(八旗)와 녹영병(綠營兵)의 무능과 부패가 드러났고, 향촌사회는 지주, 부상(副賞), 고리대업자, 관료가 토지를 집적한 결과, 전호와 자작농이 몰락하여 사회불안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인 왕조말기의 체제 이완과 사회불안이 청조하에서 보다 심각한 양상을 노정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강희(康熙), 건륭기의 안정을 배경으로 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면적의 증가는 거의 정체에 가까웠다고 하는 데 있다. 18세기 중엽의 1억 8천만 인구가 19세기 중엽에 4억 가까이로 증가하였지만 경작지는 7억 무(畝)에서 7억 3천 무로 거의 멈춰 있었다. 더욱이 19세기초 이후 아편유입의 격증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말미암아 은가가 등귀하였으며 따라서 납세수단으로 사용되는 은과 일반시장의 거래수단으로 사용되는 동전의 교환가치가 1:2에서 1:3으로 등귀함으로써 일반농민의 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각 성은 중앙정부의 징수나 행정비의 부족에 대응하기 위하여, 소농민에 대해서는 부가세를 징수한다든지, 은과 동전의 환산률을 시장시세보다 높게 하고 향신에게는 낮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약자에게 더욱 중압을 가하였다. 더구나 1830년대로부터 1840년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수재·가뭄·메뚜기피해가 빈발하였는바, 재정난과 관료의 무기력에 의한 관개치수의 방치와 어우러져 각지에 대재해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토지집중과 유민의 발생이라는 18세기 후반 이래의 특징적인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