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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정치의 현실과 전망
    한국의 정치현실을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다. 해방후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면서 발전해온 한국의 정치는 그 변화의 속도 만큼이나, 전근대적인 정치 후진성에서 첨단적인 모습이 공존하고 있으며 많은 모순점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제되는 한국 정치의 두드러진 몇가지 특징을 밝힌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와 전망을 제시 하고자 한다.1.한국 정치의 특징가. 권위주의 정치한국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권위주의라는 개념이다.권위주의란 지배자가 자신의 의지를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부과시킬 수 있는 전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체제라는 의미에서 1945년이후 한국정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해방 이후, 삼년간의 미군정을 거쳐 수립된 제헌정부부터 한국의 정치는 법적으로는 다원적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권위주의 체제가 유지되었다. 분단상황에 따른 군사적 위협에서 비롯한 안보문제와 조속한 경제 성장론에 바탕을 두고 권위주의 체제가 합리화되었다. 이러한 권위주의 체제는 1960년대부터 밀어부치기식 경제발전을 강행하여 성장위주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세력을 키우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즉 이러한 경제성장에 따라 시민사회가 활성화됨으로써 권위주의는 더 이상 자신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권의주의적 방식으로 억압한 결과, 사회에 근원주의적 저항정치인들을 대량 산출하게 된 것이다.나. 가부장제적 정치한국에 있어서 권위주의 체제를 지탱하게 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뒷받침 중의 하나는 가부장적 사고이다. 군주는 하늘이 내리고 군주와 아버지를 일치시키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은 50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에도 일상생활, 특히 정치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대통령을 국부로 지칭하며, 정치인이 국민의 심부름꾼이 아닌 군림하는 형태로 굳어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 가부장적인 사고는 정치를 남성의 고유영역으로 만들어 여성을 정치의 장에서 배척하여 여성의 정치참여율이 세계 각국 중 하위권에 머무르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 정치참여는 여성이 수적으로 얼마나 참여하느냐의 문제외에 평등한 참여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 실현정도를 재는 척도라 할 수 있다. 또 가부장적 가치관은 정치에 대한 공정한 비판과 이 비판을 통한 시민의식 고취, 정치의 발전등을 막고 있다.다. 부정부패, 타락의 정치한국정치를 규정하는 성격으로 단연 부정부패나 타락의 정치를 들 수 있다. 1948년 들어선 제일공화국이 부정선거로 인하여 그 막을 내린 것을 필두로 역대 한국의 정부는 부정부패, 타락으로 점철되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치자금에 있어서의 불법적인 조달, 흐르고 넘치는 불법적인 선거풍토등은 정치를 그 대상자인 국민에게 개방하지 않고 밀실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요한 정치사가 국회나 공식석상에서가 아닌 저녁의 술집에서 이루어지고 정치가와 관련된 수많은 비화들, 소문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극심한 불신풍토를 이루게 되었다. 정치가는 모두 도둑놈이고, 사기꾼이라는 말이 국민들 사이에 당연하게 흘러나오고 또 때때로 터지는 폭로사건에서 이 소문들이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정치, 또는 정치인은 일반국민들에게 심한 혐오의 대상이 되어왔고, 국민들 자신도 실제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라. 중앙집권적 정치한국에서의 중앙집권적 정치의 전통은 조선시대 오백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의 세력이 지방 곳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앙집권제는 행정의 효율성에서는 그 효과를 보여 왔지만 불균형적인 지역발달, 특히 지방행정의 중앙에의 종속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등의 서울 집중으로 고전을 겪고 있다. 90년부터 시작된 지방자치제는 이러한 중앙집권제의 폐단을 없애고 자치적인 지방의 균형적인 발달을 꾀하고 있지만 그 또한 큰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2.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그냥 아주 단순하게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외받지 않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통제할 수 있는 정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런 경제적, 정신적 소외를 막기 위해서, 정부는 경제적 성장과 평등 이라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을 수도 있는 두과제를 잘 조화시켜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비단 정치를 정부나, 지방자치 행정조직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전반의 문제점들이 오로지 정부주도로 이루어지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을 때 부패되기 쉬웠다는 것을 한국사회 현대사속에서 충분히 경험하였다. 따라서 이상적 정치는 정치기구에 통제당하면서도 정치사회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 시민사회의 형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부주도의 많은 사업들이 권력분산을 통해 지방, 도시, 마을 자치등으로, 민간 자율 사업으로 변해가야한다고 생각한다.가.권력분산과 자율적 질서 유지.정치는 단지 정치하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약 한시대에 있어 정치가 타락했고, 역사가 퇴행했다면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그 정치 아래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정치를 권력관계에 바탕을 둔다고 할 때 그 권력관계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책임이 있게 되는 것이다.후기산업사회로 넘어들어오면서 자본주의사회는 권력이 자본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국가의권력이 약해졌다기 보다는, 사회구성이 고도로 복잡해져서 권력의 통제영역에 구멍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사실 한편으로는 정부의 통제능력이 약해졌다는 면에서 소통의 자유가 개선될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민간의 자율적 통제와 판단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부를 보면 아직도 권력을 집중화시켜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더 문제시 되는 것은 기성세대의 대부분이 이러한 틈새속에서 스스로 자율적 통제하는 운동을 하는 대신 박정희식의 강한 대통령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세대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정화하면서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운동은 하지 않고, 그 틈새만을 통해서 상업적 이용, 선정적인 이용을 도모하는 성향이 있다.이렇게 시민의식이 성숙되지 못한상태에서 얻어지는 자율은 시민 스스로를 정치의 노예 또는 자율속의 기회 주의자로 만들어 버릴 수가있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현재의 민주주의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계속되는 시민운동을 해나가야 한다. 이런 시민운동은 더 이상 맹목적인 민주주의의 제창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시민의 진정한 행복을위해 행해져야 할 것 이다.나.생활공간에서의 정치로.우리사회의 구조를 보면, 너무 중앙집중적인 성향이 강하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의 군사독재와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 탓일 것이다. 작은 공동체가 모여서, 더 큰 공동체를 만들고, 다시 모여서 더욱 큰공동체를 만들어, 결국 국가로 귀결된다기 보다는, 국가 대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부분이 우리사회의 상당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에게 있어 국가는 너무도 멀고, 너무도 큰 벽이다.현재 우리의 정치는 개개인을 직접적으로 얽어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은 그러한 정치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 소속감의 결여, 그로인한 소외감과 익명성에 바탕을 둔 기회주의, 걸리지 않기 위한 법, 정치에 대한 무관심 등을 낳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사회에 대한 국가 주도적 비젼이 통하지 않을 만큼 우리사회는 고도의 구조를 지닌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주도를 피하고 개개인들로 구성된 소공동체 안에서 사회운동과 경제운동이 직접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대사회적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여건속에서 몇 년전 시행된 지방자치제도는 우리사회에 걸맞는 정치 체제 변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터트리기 식으로 이루어져 문제점들이 들어나고 있다. 지자제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구성원관의 친밀관계 도모가 잘 이루어져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전혀 없고, 각정당이 땅따먹기식으로, 후보들은 국회의원으로 다가가는 한 과정으로 인식되는 지자제에서 현실적으로 그전 사회가 지녔던 정치적 벽을 해결하기엔 무리가 갔다. 게다가 그 지역사회 주민들을 기반으로 일을 해나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가시적인 벌리기식 사업을 하느라 그 지역사회의 재정을 무리하게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 등 앞으로 폐단이 지속적으로 들어날 것으로 예상이 되어진다.현재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도 지방자치구 보다 작은 마을 자치구가 필요하다. 100세대 이하의 친밀성.자율성.실질적인 의사소통 등이 확보되는 정치.생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에 필요한 인원과 재정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작은 단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함을 통해, 그들의 사회는 그들 스스로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공동의 책임을 지도록 해서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을 위해 일한 사람을 통해 마을 내에서의 위세.명예를 부여함을 통해 정치적 투명성을 보장하고, 직접적이고 자율적인 정치참여를 충분히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사회과학| 2001.06.21| 5페이지| 1,000원| 조회(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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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조선시대 양반여성 문화
    양반 여성-곽 여인의 일기를 중심으로 양반 여성의 일생을 고찰-양반 여성의 교육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유지에 필요한 규범 주입 정숙한 여인으로서 구비해야 할 덕성과 자질이 몸에 배도록 교육 받음 「내훈」「여사서」「사소절」등 음식상 차리기, 옷만들기 등 살림살이에 대한 교육 위주여사서 내훈곽여인의 일기정조 18년(1794) 내 나이 열두 살에 시집에 오게 되었다. 아버지 연세가 쉰하나라서 관에 고하고 정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19세로서 이름은 유식, 성은 이씨다. 할아버지께서 정혼자를 내가 열 살 때 결정했다. 혼례 때는 밑만 보고 있어 몰랐으나 실제로 보니 못생겼다.정조 18년(1794) 어제도 기제를 치렀다. 시집 온 지 두 달도 안 됐건만 벌써 5번의 제사를 치렀다. 게다가 또 얼마나 손님들이 오는지.. 밥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나가야 한다. 게다가 관계도 없는 환쟁이나 걸인들까지도 접대하려면 식량이 너무 많이 든다. 시어머니께 이 얘기를 하니, 접빈객도 제대로 못하는 양반 며느리는 자격이 없다며 화를 냈다.봉제사 접빈객봉제사: 불천위제사, 기제, 생신제, 사시제, 삭망 참례 등 일년에 40회 이상의 제사를 치름 접빈객: 새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이자 인간관계를 맺는 한 방안순조 1년(1801) 시집온 지 칠 년 째, 또 딸을 낳자 시어머니께서는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후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게다가 자꾸 다음에는 떡 두꺼비 같은 아들을 하나 낳아야 된다고, 나를 처음 볼 때부터 아들을 못 낳을 줄 알았다며 성화다. 할 수 없이 나는 귀숙일마다 합방을 하였다. 게다가 남근 모양의 아들 바위에 100일간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돌부처의 코를 갈아 물에 타 마시기도 하였다.조선시대의 아들선호 현상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들은 집안의 대를 이을 중요한 인물 주술적 힘을 빌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 태아감별법순조 2년 여러 방법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얼마 후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태동이 심하고 배가 편평하여 아들일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임신 기간 동안 개고기가 먹고 싶었지만 개고기를 먹으면 아이가 말을 못한다 하여 먹을 수 없었다. 「태교신기」를 보고 항상 몸가짐에 주의해야 겠다고 생각했다.순조 2년(1802) 어느덧 임신 9개월째이다 나는 두 달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어머니, 아버지를 뵐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 낳을 곳에는 이미 돗자리와 짚을 깔아놓았고 대들보에 줄을 매어 놓았다. 산파로는 경험 많은 이씨 할머니가 오실 것이다.사흘 전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은 후부터 나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아들은 시아버지께서 세상을 평화롭게 하라는 의미로 세평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 나보다 한 달 전에 출산한 여종이 있어 젖어미로 삼았다.순조 7년(1807) 세평이가 보고싶다. 하지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천자문 공부, 소학 공부 등을 하느라 나는 만날 수도 없다. 게다가 내가 세평이 얘기를 하면 시어머니는 아이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면 버릇 없어진다고 혼낸다.순조 8년(1808) 세평이에게 마마님이 드셨다. 복숭아 나뭇가지를 들게 하여도, 집안 사람들이 아무리 조심하여도 차도가 없다. 호구거리를 하였으니 순하게 치르겠지.순조 8년 세평이가 죽었다. 일곱살 밖에 안된 아이가 죽다니.. 마마신이 노여워 할까 두려워 땅에도 묻지 못하고 나무에 붙들어 매어 마마신을 떠나게 하였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었구나.. 불쌍한 세평이..순조 11년(1811) 최씨가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했어야 했다. 설마 나를 칠거지악 중의 하나인 무자(無子)라는 이유를 들어 내쫒을 줄이야.. 아버지는 이 일로 인해 노하여 사헌부에 남편을 고소하였다.칠거지악(七去之惡)시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것(不順父母) 무자식(無子) 부정(不貞) 질투(嫉妬) 못된 병(惡疾) 수다(多言) 훔치는 것(竊盜)첩정처외에 남편은 성적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첩 을 직접 선택 처첩차별 처첩갈등재혼 금지세 번 시집 간 여자는, 행실이 부도덕한 여자들의 명단인 자녀안 (恣女案)에 이름을 올리고 작위를 도로 빼앗으며 자식의 관직임용 금함 자발적 수절을 유도하기 위하여 정표정책을 실시함 후기로 가면서 극단적 행위를 한 여성들만 열녀가 되어 표창 받음간통사건에서 나타난 여성 억압간통자를 자녀안에 올려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함 간통자를 극형에 처하기도 함 집안 남자들에 의해 사적으로 처벌 받기도 함 하지만, 이와 같은 형벌은 대부분 여성에게 해당순조 11년 사헌부에서는 전례를 본 따 남편으로 하여금 다시 나를 들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최씨는 나만 보면 비웃는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내가 아들을 못 낳아서 그런지 나에게 자꾸 혼을 낸다.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 가슴이 답답해 죽고 싶다.삼불거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 가난했던 집안을 일으킨 아내 남편과 함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른 아내순조 12년 결국 씨받이를 통해 얻은 사내 아이를 양자로 들였다. 이름은 세현, 비록 내 자식은 아니지만 어린 것이 총명하다. 세현이에게는 친모가 누구인지 얘기해주지 않을 것이다.순조 27년(1827) 며느리가 지아비인 세현이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게으르며 투기가 심하다.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어야 하겠다.순조 29년(1829) 세현이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비록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내가 길렀으니 이 기쁨을 무엇에 비견할까. 친모가 천한 신분이라, 과거 응시 자체가 불가능 했을 것을 생각하면 응당 내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철종 5년(1854) 남편과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를 하였다. 남편과 애정 없이 산 60년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내 유일한 낙은 세현이였다. 나이가 들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곧 죽을 때가 다가온 것 같다.{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05.05.09| 25페이지| 8,000원| 조회(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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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 사실주의(미술)
    사실주의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5년 쿠르베가 당시의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즘’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보였다.기존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쿠르베는 노동자의 모습과 뚱뚱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고, 밀레는 육체노동의 찬양을 그리며 화면에서 귀족을 밀어내고 농부들을 서사시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미에는 부르주아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하였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사회적인 배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때는 풍경화조차도 낭만파 풍경화와는 달리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하나가 되었다.쿠르베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비평에 맞서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과 함께 레알리즘의 의 방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쿠르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얼리즘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는 과 이 있다. 특히 에서 그는 매장의 세속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이 풍경을 사회공동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든, 또 내세와 어떤 관계를 가지든 상관없다. 매장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만이 이 그림의 요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회화적 리얼리즘이다. 쿠르베와 더불어 리얼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도미에와 밀레이며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자 현실의 규명이며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사실주의 화가들에게 풍경은 숲속의 빈터나 수풀 언저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하며 가기 쉽고 갖기 쉽기 때문에 현대의 도시인에게는 하나의 경고와 책망이 되었다. 이러한 하잘 것 없는 주제의 , 베르메르, 렘브란트, D.벨라스케스, 그리고 F.고야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 적 맥락에서 사실주의는 19세기 언어적 산물로서 1821년에 샹플레리에 의해 제안되어 19세기 중엽에 하나의 예술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당시 사실주의는 예전의 모방이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예술의 실재에 대한 의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립됨에 따라 모방만큼이나 애매한 것이 되었다.20세기에 들어 추상과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재현 적인 경향에 대해 ‘사실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사실주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극단적 사례를 미술적 사실주의라는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언어가 결합된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당시 미술과 비교해 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당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연과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의 고조, 계몽주의 사상의 파급,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와 실증주의 철학의 확산, 산업 혁명,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작용하였다.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앵그르와의 천사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기도 하였다.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는 ‘미술에 있어서 성 토마스’ 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토마스의 의심과 같은 맥징들이 사실주의의 정치적 근원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반 사실주의적 태도를 취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편견들을 미학적 논쟁의 전개로써 은폐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사실주의는 모든 이상과 윤리를 배제하고 갖은 추악하고 비천한 것, 병적이고 음란한 것에 탐닉하여 현실을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것으로 모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꺼린 것은 사실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모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모방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그들은 사실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이루어 놓은 미의 가치관을 파괴하며, 수많은 혁명과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850년까지 거의 변함 없이 심미적 이상만을 추구하던 작가들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투쟁하는 무기로써 사용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를 않는 예술 사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 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데 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작에 미술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대표적 미술가쿠르베 ( Gustave Courbet : 1819.6.10~1877.12.31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 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 돌 깨는 사람> (1849), 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 화가의 작업실> 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 가에 손수 가옥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 센강변의 처녀들> (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친 바다 풍경, 나부 등을 제작하였으나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 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 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1866) (1866) (1868) (1876) 등이 있다.도미에 ( Daumier, Honore Victorin : 1808.2.20~1879.여인> < 3등열차> <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 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밀레 ( Jean Franiois Millet : 1814.10.4~1875.1.20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48년 살롱에 출품한 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 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 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 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 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 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 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68년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 씨뿌리는 사람> (50) < 이삭줍기> (57) < 걸음마> (58) < 만종> (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밖에 < 우유 짜는 여인> <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대표적 작품{쿠르베화가의 아 미술관
    예체능| 2004.06.22| 8페이지| 2,000원| 조회(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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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인생'감상문
    영화 인생 감상문영화 人生'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중국의 공산화와 그 이후의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한 평범한 가족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진지하게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주변의 변화에 적응해 가는 아주 현실적인 삶을 그린 영화였다.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하나로 일치될 수 없는, 그러나 격동의 세월로부터 독립적일 수도 없는 한 가족의 삶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보통 역사와 정치는 일반인들의 생활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그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실제로 역사와 정치가 사람들의 인생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잔잔하지만 설득력 있는 어조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념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동시에 알려주고 있다.처음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에 40년대라고 나오며 과거 중국의 도박장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그 가운데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사람, 바로 주인공인 부귀이다. 빼빼 마른 몸에 빡빡 깎은 머리, 참 볼품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박장의 모든 이들은 그런 부귀를 상전 모시듯 떠받든다. 이 장면에서 이미 부귀와 그의 아내 가진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박에 미쳐 집을 통째로 용이 에게 빼앗겨 버린 부귀...집을 빼앗김과 동시에 부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의 부인(가진)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된다. 이미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부귀이지만, 고통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그는 남은 노모를 모시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부귀를 떠나갔던 부인(가진)이 돌아와 부귀는 어느새 다시 아내(가진)와 딸(봉하), 새로 태어난 아들(유경)과 함께 생활한다. 아들의 이름을 불도(不賭: 도박을 안 하겠다는 뜻)로 지었다면서 영화 전반에 걸쳐 이름이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한 가족의 웃음은 화합이며, 밝은 미래가 시작되는 듯했다. 서서히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그는 직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집을 앗아간 용이를 찾아가 그림자 극 상자를 얻게 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상자지만, 그것은 그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며, 그의 인생, 기쁨 즉 전·후반에 걸쳐 부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부귀는 그림자극상을 빌려가서 그림자극단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간다. 부귀는 조금씩 한 푼, 두 푼 모아가고 아내는 어머니를 보살핀다. 그림자극단은 이 곳, 저 곳 떠돌아다니며 극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자 극을 하고 있던 춘생의 앞으로 칼이 천을 가르고 들어온다. 그리고 부귀와 춘생 모두가 국민당으로 강제 징병이 된다. 그리고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 부대가 내전에서 패하게 되고,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가 중국을 점령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사방이 군인들로 깔려 있었다. 지나다니는 군 차량을 보며 춘생은 운전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하자 부귀는 자 기에겐 처자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몇 십만 명이 되는 줄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갇혀있는 그들은 노전이라는 그곳 생활에 능숙한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된다. 친구를 찾으러 와서 도망치지 않고 있다는 노전과 함께 생활을 하게된다.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추위에 떨다가 일어난 아침, 흰눈이 온 강산을 뒤덮은 그 들판 위엔 끝없이 펼쳐진 국민당군의 시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얼어죽고, 병들어죽고, 내버려진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국민당군이 죽고 도망간 그 공백을 차지한 것은 이번엔 공산당군이었다. 이제 부귀는 공산당군을 위해 그 그림자극을 보여줌으로써 생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전쟁은 끝나고 부귀는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아침에 뜨거운 물을 가가호호 배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린 딸 봉하는 병마의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지만, 똑똑한 아들 유경이랑 네 가족이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읍장이 찾아와서 부귀가 돌아온 것을 환영해 준다. 어느 날 부귀의 집을 갖게되었던 용이의 소식이 들려온다. 주지라는 것과 더불어 국가에서 집의 반환을 요청함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며 간부를 폭행하고 집에다 불까지 지르는 반혁명 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악질반동자라는 죄를 얻고 사형에 처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부귀는 용이가 총살을 당하게 된 것을 총성으로 듣고 겁을 먹는다. 혹시나 자신의 신분이 지주는 아닌가 해서 불안에 떨다가 아내에게 혁명 증서를 보여주고서야 자신들이 보통인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화면에 50년대라고 나오며 집집마다 내 놓은 세간을 용광로에서 녹여 제철 생산 목표량이 연간 1,070만 톤에 이르게 된다. 철을 헌납 받으러 온 읍장에게 공동식당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유경은 동네 아이들이 누나를 새총으로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 얘들과 싸움을 하지만 3명이나 되어서 작은 몸짓의 유경이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식당에서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유경은 고춧가루를 마구 넣은 국수를 들고 가서 누나를 괴롭힌 일당중 한 명인 아이 머리 위에 부어버린다. 그것으로 인해 공동식당은 소란스러워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부귀는 유경을 혼내주고 때린다. 집에 와서 부귀는 부인(가진)에게 유경이는 누나를 괴롭힌 얘들을 혼내준 것이라는 것을 듣게되고 유경에게 미안해하며 그림자 극을 보러 오라고 한다. 유경은 끝까지 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가진이 아버지를 골탕먹이러 가자는 말에 같이 가게된다. 그림자 극을 재밌게 보던 유경은 한참 후에 아버지께 미리 준비해왔던 식초와 고춧가루를 마구 풀어놓은 차를 드리고, 이를 마시고 실수를 하는 아버지를 보고 마냥 즐거워하면서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집에서 자고 있는 유경에게 친구들이 찾아와서 구장님이 학교에 찾아오신다고 학교로 모두 나오라고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가진은 좀 쉬게 하자고 했지만 부귀는 이런 곳에서 떨어지게 할 수는 없다면서 만두를 도시락으로 싸서 유경을 업고 학교로 간다. 유경이를 업고 가면서 부귀는 열심히 살아서 닭을 거위로 만들고 거위를 양으로 만들고 양을 소로 만들자고 말한다. 소 다음은 공산주의라는 말도 함께 말이다. 그림자극을 하고 있던 부귀에게 구장이 차를 후진하다가 유경이 차가 부순 돌에 의해 즉사했다는 소릴 듣는다. 부귀는 유경의 시신을 보며 통곡하고 가진은 유경의 시신도 보지 못하고 유경이를 그냥 보내야만 했다. 순식간에 그들의 행복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유경의 상을 치르는 중에 구장이 찾아오는데 그는 다름 아닌 부귀의 옛 동료인 춘생이었다. 부귀와 가진은 춘생을 원망하며 목숨하나를 빚진 것을 잊지 말라고 하면 돌려보낸다. 화면에 60년대라고 나오며 읍장이 찾아와서 그림자 극상은 반혁명의 잔재라면서 태우게 한다. 봉하의 혼사소식에 진전이 들리고 공장의 지휘를 맡고 있는 만이희라는 기술자를 사위로 맞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만이희는 부귀의 집을 수리해주고 그 당시 중국인의 우상인 모택동의 벽화를 그려준다. 얼마 후 봉하와 만이희는 혼인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사위 만이희가 찾아와 부귀 내외에게 봉하의 임신소식을 전하고 결혼식날 찍었던 사진을 전해준다. 그리고 춘생의 소식을 전해준다. 춘생이 주자파로 몰려서 비판 대회가 열렸었다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전하고 그날 밤 춘생이 부귀에게 찾아와 예금증서를 받아달라고 하며 아내의 자살 소식 등을 전하면서 잘 지내라고 안부를 전하고 예금증서를 받은 셈치자고 하며 돌려주는 부귀의 위로의 말을 들으며 떠나간다. 며칠 후 봉하는 출산을 할 때가 되지만 병원 의사들은 모두들 주자파로 몰려서 학생들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만이희는 밖에서 왕교수를 병원으로 데리고와서 비판대회를 하는 척 하면서 병원 안에 있게 한다.그리고 부귀가 왕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3일 동안이나 왕교수가 굶었다는 사실을 알고 만두를 사다준다. 그 도중에 봉하는 출산을 하게된다. 처음에는 산모와 아이가 모두 건강한 줄 알았으나 산모는 곧 심한 출혈을 하게 된다. 그래서 왕교수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왕교수는 만두를 너무 급하게 먹어서 채하는 바람에 산모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부귀 부부에겐 두 명의 자식 대신 손자와 사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네 식구가 점심을 행복하게 먹는 장면에서 여운을 주며 인생 이라는 영화는 막을 내린다.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병아리가 크면 닭으로 변하고, 닭이 크면 양으로, 양이 크면 소로 변하게 되어 있단다.
    독후감/창작| 2004.06.22| 4페이지| 1,000원| 조회(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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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상문] 고양이를 부탁해 평가A좋아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를 보고'고양이를 부탁해' 라는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음짓고 있다. 미래에 대한 아무 걱정이 없는 맑은 얼굴로 뽀얗고 가느다란 다리를 움직이며 놀이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나서 각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이 영화에서의 고양이 는 바로 그녀들 자신일 수도 있고, 우리가 점차 잃어가고 있는 순수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그러다 문득 고양이가 창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창은 세상 밖과 세상 안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누구나 일정 시기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세상 안과 밖의 차이는 이미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엄청 나다. 세상 안에서 바라보던 세상 밖과 실제의 세상 밖은 너무나 다르다. 사람들은 그런 엄청난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지만, 그런 장벽을 뚫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영화는 이제 갓 스무살이 된 5명의 여고 동창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착하지만 엉뚱한 그리고 항상 씩씩해 보이지만 언제나 마음둘 곳 하나 없는 태희(배두나), 밝은 모습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당당해 보이지만 정작 슬픔을 가장 많이 안고 있는 혜주(이요원), 그림을 잘 그리지만 지치고 힘들어 이제는 더 나아갈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지영(옥지영), 항상 명랑한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는 학교 다닐 때는 그토록 친했던 친구들이지만, 스무살이 되면서 길이 달라진다.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에 의해서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간다. 학교라는 울타리가 그들을 보호할 때는 그들은 항상 하나였지만,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그들은 한 명의 개개인이었다. 특히 학교 다닐 때 절친했던 혜주와 지영은 졸업후 다른 생활, 다른 아픔들로 사이가 많이 멀어져 가고 점점 달라져 가는 모습들과 자신의 입장들을 서로 이해해 주기 바라는 모습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번씩 만나자는 처음의 약속도 시간이 갈수록 점차 잊혀져 간다. 그래도 그들은 친구이다.영화 속에서 그들이 동대문 패션몰에서 옷 구경을 하다가 제각각의 개성대로 하나씩 흩어져간다. 그건 우린 함께 있는 친구이지만, 우리 각자에겐 자신들만의 길이 있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꿈이자 비정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혜주는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을, 그림을 잘 그리는 지영은 디자이너를, 항상 엉뚱한 태희는 선원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고 그들의 꿈은 꿈일 뿐 현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혜주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것이 지영은 집안의 가난이 그리고 태희는 가족들의 무시와 무관심이 그들의 꿈을 이루기 힘들게 했다. 그들이 꿈꾸는 현실과 실제의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또다른 세상으로 떠난다.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아픔을 철저히 감추는 지영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친구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면 그만큼 외롭다는 생각을 덜 했을꺼 같다. 반면에 공감도 갔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라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엉뚱하면서도 멀어져 가는 친구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인 태희에게서 우리 주위에 꼭 한명은 있을만한 푸근한 친구의 이미지를 느꼈다. 태희 역할을 연기한 배두나 만큼 20대의 무관심과 미래에 대한 침착한 꿈을 표현할 수 있는 연기자도 없을 것이다. 태희는 남 어려운거 보지 못하고, 친구 어려움은 다 해결해주고 싶어하고, 친구들 사이의 다리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맘씨 착한 친구이다. 스무살 때 뿐 아니라 지금도 내가 이렇게 되고 싶어했는데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엉뚱하거나 허황된 꿈을 꾸는 그런 것들은 빼고 말이다.혜주를 보면서 지금의 내 자신을 많이 돌아 보게 되었다. 난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난 지금 변화를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난 지금 성공을 꿈꾸고 있는지 난 지금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스무살이란 나이는 과연 이 영화에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공식적으로는 이제 성인이 되는 나이, 하지만 사회가 처음인 이들은 불완전해 보이고 누군가의 가르침과 손길이 필요해 보이는 어쩐지 불완전해 보이는 성인이다. 아마도 스무살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어렸을때나 청소년기에는 부모라는 커다란 울타리가 버팀목이 되어 의지가 되지만 막상 스무살이란 청소년기의 딱지를 떼고 성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면 더 이상 부모에 대한 의존 가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어리광을 부릴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성인의 모습도 아닌 어중간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스무살 이었을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고 생각했던거 같다.
    독후감/창작| 2004.06.22| 2페이지| 1,000원| 조회(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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