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아동 사회성 향상 프로그램1.사업의 배경 및 필요성발달 장애아동이 증가하면서 학령인구 중 특수교육 대상이 되는 장애아동은 4.2%- 487,968명-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들 중 특수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은 10.3%에 불과하다.(문화관광부,2000). 학령기 장애아동과 학부모의 참여욕구에도 불구하고 특수교육의 혜택을 받는 학생은 매우 제한적임을 볼 수 있고, 지역 내 일반 초등학교에서 특수교사 2명이 특수학급을 편성하여 학습도우미실이 운영되고 장애아동에 대한 사회통합의 욕구도 증가하고 있지만 장애아동의 실질적인 통합을 지원하기에는 구조적,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 다양하고 체계적인 사회통합 프로그램 접근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본 복지관에서는 2003년 3월부터 장애아동의 원활한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연령과 발달수준에 적합한 다양한 사회기술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실질적인 사회통합을 유도하고자 하였다.2. 프로그램 구조타기관 의뢰, 연계pg목표의 구체화개입계획(우선순위결정)프로그램 적용(개별/소그룹/통합)종결, 타기관의뢰, 가정연계초기단계평가단계실행단계관찰/상담대상자선정사례회의재사정3. 사업의 목적 및 목표1) 사업의 목적발달장애 아동의 사회성향상을 위하여 지역사회와의 끊임없는 접촉을 시도하고 지역사회로의 원활한 통합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정서적인 문제로 부적응을 경험하는 아동에게 심리적 환경 개선 및 사회적, 정서적, 인지적 측면에서의 전반적인 발달상의 어려움을 적절한 발달지원을 통한 지지적 서비스를 제공하여 가족의 기능을 강화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결과목표하위목표목표1심리정서적인 문제를 완화하고 아동의 긍정적인 발달을 돕는다.- 아동 수준에 적합한 개별 및 다양한 집단활동을 통한 문 제행동에 대한 개입- 감각통합훈련 및 인지활동목표2다양한 사회기술의 경험을 통하여 사회통합의 기회제공- 일상생활 기술훈련- 방과후 아동과의 통합을 통한 또래관계 형성- 기관 내 행사참여 및 현장학습을 통한 다양한 경험의 기 회 제공목표3지역 내 자원 연계를 통하여 상담사업을 활성화한다.- 아동발달의 원활한 장단기 개입계획을 위한 caseconference를 통한 안정적인 관리- 용마초등학교 특수학급과의 연계를 통한 대상자 의 지속 적인 관리를 유도한다.- 프로그램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와 유관기관과의 협조를 통하여 대상자를 확보한다.2)사업의 목표4. 사업의 기대효과1) 전문적인 아동상담 사업의 기초를 마련한다.2) 가족 내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로 부모의 양육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3) 구체적인 치료교육에 대한 협조체계를 통하여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유도하여 지속적인 아동개별관리로 case 안정화를 도모한다.
제 12장 근대국가의 전개2000421079, 이지연1. 자유민권운동과 입헌국가의 성립1. 사족의 발란- 실패2. 자유 민권운동- 성공( 국회개설)사족의 반란중앙집권에 의한 통일국가의 건설과 부국 강병책의 강행에 동반하여 신분상의 특권을 빼앗긴 사족(士族)은 정부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조선 출병을 둘러싼 논쟁에서 패한 사이고 타카모리 등은 모두 사의를 표하고 정부를 떠났다. 정한론자{ 막말, 메이지 초기의 조선 침략론. 메이지 초년, 기도다카요시 등이 보신전쟁에 동원했던 군병 을 전용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한론을 주장한 바 있다. 황실 , 봉칙 등 일본 국왕의 위상을 나타내는 표현과 관련하여 조선과의 구굔교섭이 난항을 겪자 이 주장은 강화되었다. 정부는 사이고 다가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등의 정한론이 일단 받아들였으나,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내치가 선결문제라고 주장함으로써 결정은 번복되고, 사이고 등은 하야 했다. 이 사건은 자유 민권 운동과 사족 반란의 출발점이 되었다.들의 사임은 그를 지지하는 불평사족을 격분시켜 무력으로 정부에 반항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어 1876년 가록(家祿)의 폐지가 결정되자 사족은 점점 궁지에 몰려, 10월에 구마모토(熊本)의 신푸렌(神風連)의 난, 야구마구치(山口)의 하기(萩)의 난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1877년 2월에 가고시마에서는 사이고 타카모리를 옹립한 불평사족들이 거병하여 불평사족 30만의 병력으로 큐슈로 북상하여 구마모토에 이르렀지만, 정부군에 의해 결국 패하고 이후 사족에 의한 무력반란은 종식되며 언론에 의한 저항으로 바뀌어나갔다.따라서 1870년대 중반까지의 농민소요{ 이와 별도로 과중한 조세를 부담하고 있던 농민들은 징병제와 학교비(고액의 수업료) 부담에 반발하여 각지에 신정부반대의 격렬한 소요를 일으켰다.및 사무라이반란과는 대조적으로, 1870년대말에는 지방조직과 신문, 잡지를 통한 정치적 선동 또는 정부에의 직접 청원 등의 방법을 통하여 보다 평화적인 형태의 정치적 저항이 두드러졌다.국회개설의 건립 백서]를 제출하고 이 건백서가 신문에 기재되어 전제 정부에 대한 의희의 개설을 바라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 입지사(立志社)를 시작으로 많은 지방정치 세력이가 만들어지고, 또 각지에서도 자유 민권을 주장하는 정치결사가 나타났다{ 이타가키, 카타오카켄키치 등에 의한 코오지(高知)의 입지사/ 코무로 시노부가 가담한 토쿠시 마(德島)의 자조사(自助社), 코오노히로나카 등이 창립한 후쿠오카(福島)의 석양사(石陽社) 등 이 유명하다., 1875년 2월에는 각각의 정치 결사의 대표가 오사카에 모여 애국사(愛國社)를 결성하였다.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정부측은 반정부 여론을 완화하기 위해서 1875년 4월 오사카 회의를 열어 정부의 중심이었던 내무대신 오쿠보 토시미치가 이타가키 타이스케 및 대만 출병에 반대하여 하야했던 기도 카요시도와 오사카에서 회합하고 그들을 참의(參議)로 정치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기도가 말한 점진적 입헌정치체제로 합의를 보았다.그러나 정부는 곧 1875년 6월 신문지 조례, 참방률(남을 비방하는 것을 금하는 법률)을 공포하고 출판조례를 제정 등 반정부 여론을 강하게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타가키는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정부를 떠나게 된다. 이 시기는 민권운동이 침체되게 된다.자유민권운동{ 프랑스의 민주주의 혁명과 영국의 의회정치 흐름을 이룬 근대적 정치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 고 있었다.의 발전침체되었던 민권운동은 1878년 애국사의 재흥대회가 오사카에서 열리면서 다시 시작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만을 품은 사족이 중심이었으나, 이때부터는 지조의 경감을 요구하는 지주, 부농과 정부의 정상(政商)보호 정책에 불만을 품은 중소 자본가 등도 참가하여 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자유민권파는 1880년 애국대회 결의에서 새로이 국회기성 동맹을 조직하고 정부에 국회개설 청원서를 제출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다. 전국 수십만 인민의 서명을 받아 대표자가 정부에 청원서의 수리를 바라며 국회 개설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는 처 신문지조례, 출판조례와 함께 자유민권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조례. 정치 결사, 집회를 신고제로 하고, 정치결사간의 연락이나 옥외집회를 금지했다. 또한 제복경관을 회장에 파견하 여 퇴거, 해산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군 관계자, 경관, 교원, 학생의 정치 결사 및 집회참가를 금지했다.를 발표해 집회와 결사에 심한 제한을 가하였다.국회개설 운동은 나카에 쵸민, 우에키 에모리 등의 논설이 신문, 잡지 등 언론 기관에 의해 활발히 발표되면서 이에 자극을 받은 각지의 사족(士族)이나 호농(豪農)들이 결사를 만들어 학습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몰두했다. 이러한 것들이 추진력이 되어 자유 민권 운동이 고조되고 빈번하게 연설회가 개최되며, 모여든 많은 청중들은 연사의 열변에 박수 갈채를 보냈다. 즉 지역 속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 문화상황이 태어났다. 이들은 정부가 심하게 동요하고 헌법제정에 대한 기본 방침을 확고히 할 수 없었던 1880년 전후의 시기에는 갖가지 헌법안(憲法案)이 私的으로 기초되었다.(私議憲法) 그리고 민권론자들의 안은 대체로 국회 중심의 입헌 정치 체제를 요망하는 것이었다{ 1. 우에키: 국회를 민선의 1원만으로, 정부가 헌법에 위반하여 인민의 권리를 해쳤을 때 국민저 항 가능.2. 오다 다메쓰나: 남계의 황위 계승자가 단절되었을 때 일반 인민들의 투표에 의해 통령을 뽑 을 수 있다는 규정을 제안.3. 기시다 도시코: 남녀펑등을 위한 전국 여성의 분기를 촉구..1881년 자유 민권 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정부 내부에서는 참의(參議) 오쿠마 시게노부가 국회의 조기 개설과 의원내각제를 주장해서 이토 히로부미 등 실장파(-사쓰쵸마와 쵸슈번 출신)와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 무렵 호카이도에서 관유물 불하사건{ 혹카이도의 개척사의 관유물을 사쓰마 출신인 정상(政商) 고다이 도모아쓰에게 부당하게 헐값 으로 불하하려 했던 사건.이 일어나 정부에 심한 비난이 집중되었다. 이토 등은 오쿠마를 정부 공격의 주범으로 보고 하야시켜 정부 내부를 단속하는 동시에 칙 있었다. (메이지 14년의 정변)이에 국회기성 동맹은 정변 이후 이다가키를 총리로 하여 자유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고, 이어서 이듬해 오쿠마 시게노부를 당수로 영국식 온건한 입헌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입헌 개진당이 결성되어 주로 도시의 실업가와 지식인의 지지를 얻었다.재정개혁메이지 정부는 서남전쟁(西南戰爭){ 1877년 가고시마, 사학교파를 주축으로 규슈의 사족이 일으킨 반정부 전쟁으로, 일반사상 최초 의 내전. 가고시마의 난 이라고도 함. 메이지 유신 후 사무리아 계급은 사족이라는 새로운 신 분으러 국민화 되었다. 사족이라는 호칭은 호적에 기재되었지만, 신분상의 특전을 없었다. 사 족은 일정한 가록을 받았으나, 1876년 이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족의 목락은 촉진되었다. 과거 의 특권을 박탈당한 불평사족들의 반란이 종종 일어났는다. 그중 최대이자 마지막 반란이 서 남전쟁이다. 정부는 이 전쟁에서 승리햄으로써 권력 기반읫 확립에 성공했고, 이후 국내에서 정부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사라졌다. 이후 반정부운동의 주류는 자유민권운동으로 넘어가고, 운동의 주력은 점차 사족으로부터 호농상층으로 옮겨갔다. 또 이 전쟁을 통해 근대적 편성과 장비를 갖춘 징병제 구낼가 사족 군대보다 우월함이 입증되었다.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액의 불환지폐(不換紙幣-본위화폐와 교환할 수 없는 지폐)를 남발하였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물가의 급등을 초래하였으며 세입은 실질적으로 감소하여 정부는 재정난에 빠졌다. 이에 정부는 1880년 정변 직후 재정개혁을 착수하여 오쿠마 시게노부에 대신하여 대장경(大藏卿)이 된 마쓰가타 마사요시는 지방세의 증세에 의한 수입증가와 관영공장의 불하에 의한 지출 등의 긴축을 실시하면서 불환지폐의 정리에 착수했다. 1882년 중앙은행으로서 [일본은행(日本銀行)]을 설립하여 지폐 발행권을 통일시킴과 동시에 지폐의 태환화폐(兌換貨幣-본위화폐와 교환할 수 있는 지폐)의 발행권을 주고 화폐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 결과 일본 은행은 금융의 중심이 되고, 화폐발행권고 통화는 수축되었지만 동시에 물가의 하락도 두드려져서 중소상공업자나 농민층이 몰락하여 토지를 상실하여 소작농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1884년 전후 농촌은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자유민권운동{ 자유민권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운동으로 보는 설(히라노 요시따로,핫또리 시소)-메이지유신을 부르조아 혁명이라 하는 입장의 것으로 메이지유신 이후의 반드시 진보적이라고 할 수 만은 없는 본질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었던 운동(가지니시 미쓰하야, 가또 도시히꼬-예전부터 전해오는 공동체적 조직을 유지하려는 호농(豪農)이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를 강행하는 중앙입권적 번벌정부에 저한항 비근대적인 반정부 운종으로 보는설(히도리다꾸야)종합해 보면 자유민권운동은 국회 개설, 국약헌벌(국민의회에 의한 헌법 제정), 지조 경감, 지방 자치 , 불평등한 조약 철폐라는 5대 요구를 내걸고 형성되어 가고 있던 절대주의적 천황제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게 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74년 민선의원(民選議院)설립에 대한 건백서 제출을 자유민권운동의 개막이라고 한다면 1880,1881년은 이 운동이 이양된 시기, 1884년의 격화된 여러 사건은 운동의 전환점을 이루고, 1887년의 불평등조약 개정안 반대, 3대 사전 건백 운동으로부터 초기의회에 있어서의 민당(民黨)의 투쟁이 종막된다.의 격화정부는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정당에 대한 회유와 분열공작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전제정치에 대한 자유당원의 저항도 격렬해지고, 각지의 관헌과의 충동사건이 일어났다. 거기다 재정개혁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해 일부 급진적인 당원 가운데는 압제 정부의 전복과 자유 정부의 수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기도하는 자들도 나타났다.자유당 수뇌부는 이와 같은 급진적인 행동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또 농촌에서는 지주층과 소작인, 빈농층의 분열이 심해져서 지주층이 운동으로부터 몸을 사리게 되었다. 여기에 정.
발표 길라잡이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봉건양반사회를 뿌리로부터 흔드는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의 태동기인 조선후기 이후 나타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농업에서는 이앙법의 보급, 농법 개량, 상품작물의 재배 등을 바탕으로 농업경영상의 변화가 전개되었고, 일부 농민들은 부농층으로 성장하였다.이와 같은 새로운 현상은 종래의 사회계층 구조를 변질시켜 마침내 신분제의 동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한편으로 부를 축적한 농민이나 상인, 독립수공업자들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신분을 얻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계에서 배제되어 몰락한 양반의 경우 생계유지를 위해 농업이나 상공업 등 생계에 직접 종사하는 경우도 늘었다.이런 변화의 모습은 당연히 당시 회화나 문학작품에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양반이 몰락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작품과 서민의식이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을 각각 찾아보면서 당시의 변화상을 느껴보도록 합시다.1조 몰락한 양반의 모습 찾아보기1풍속화 ,민화2문학작품3 기타자료2조 서민의식이 성장한 모습 찾아보기1풍속화, 민화2문학작품3 기타자료각 조는 조선 후기 작품들을 살펴본 후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변화에 관련된 부분을 찾고 그에 대한 설명을 써보세요!!^^ 발표 3일전에 발표할 내용을 ............(.교사 홈페이지나 메일)....로 보내주세요!!참고도서교실밖 국사 여행, 역사연구소, 사계절우리역사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전국역사교사모임, 푸른나무, 97한국사 새로 보기(1.2),전국역사교사모임. 우리교육. 97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우리 역사 (1.2.3)역사문제 연구소. 웅진, 93사료로 보는 우리 역사, 전국역사 교수 모임, 푸른 나무, 92역사 신문(1-6) 역사신문 편찬 위원회, 사계절 92미술로 보는 우리역사, 전국 역사교사 모임, 푸른 나무 925교시 국사 시간, 유종배, 역사넷, 2000심마니 한국사, 전국역사교사모임,몸소 나아가서 경의를 표하였다.그러나 그는 살림이 가난해서, 해마다 관가에서 환자를 타 먹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쌓이고 보니, 천 석이나 되었다. 관찰사가 여러 고들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관청 쌀의 출납을 검열하고는 매우 노하였다."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을 이렇게 축냈단 말이냐?"명령을 내려 그 양반을 가두게 하였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길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겼다. 차마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두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양반은 밤낮으로 훌쩍거리며 울었지만, 아무런 대책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욕하였다."당신이 한평생 글읽기를 좋아했지만, 관가의 환곡을 갚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구려. 쯧쯧, 양반 양반 하더니 한푼 어치도 못 되는구려."그 마을의 부자가 가족들과 서로 의논하였다."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언제나 높고 영광스럽건만,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언제나 낮고 천하거든. 감히 말을 탈수도 없고, 양반만 보면 저절로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 밑에서 절해야 하지.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면서, 우리네는 줄창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하거든. 마침 저 양반이 가난해서 환자를 갚지 못해 몹시 곤란해질 모양이야. 참으로 그 양반이라는 자리도 지닐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 내가 그것을 사서 가져야겠어."부자는 곧 양반의 집을 찾아가서 그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청하였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부자가 곧 그 곡식을 관가에 보내어 갚았다. 군수는 매우 놀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직접 양반에게 찾아가 위로하면서, 환자를 갚은 사정을 물으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벙거지를 쓰고 베 잠방이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엎드려, '쇤네'라고 칭하면서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며,"선생께서 어찌 이다지도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는지요."하였다. 양반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황송하옵니다.서 지난날 그들이 호령하던 농민과 함께 일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상민들이 양반을 업신여겨 농을 걸고 말을 놓는다하여 시비가 붙는 일도 많았다. 이들은 이미 벼슬하는 관리도 아니요. 책을 읽는 선비도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과 별차이가 없었던 것이다.실제로 위와 같이 자기의 양반신분을 사고 팔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일은 일어났다. 양반들은 돈을 받고 평민이나 노비에게 자기네 족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지체가 낮은 집에 돈이나 땅을 받고 딸을 시집보내거나 그 집안 지체를 높여준다든가 하는 일은 많이 있었다.나라에서도 돈이 필요하면 양반을 팔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양반들이므로 양반들 스스로 양반을 팔아먹은 것이다. 돈 씀씀이가 헤퍼지고 사치스러워진 왕실과 관리들은 공정가격까지 정해 놓고 양반을 팔아먹었다.박지원의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돈으로 사고 파는 물건이 된 양반이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냐? 양반이랍시고 콧대를 높이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양반들아 그까짓 양반가지고 잘난 체 말라는 충고를 하고자한 것이 아닐까?ⅱ 하회별신굿놀이 중에서도 말뚝이가 양반에게 반항하는 장면이 보인다.1양 반 : 말뚝아, 말뚝아, 야! 이놈 말뚝아―(말뚝이는 알아듣고도 들은 척도 안하다가 서서히 샌님 옆에 다가가서)말뚝이 : 예―잇! (앞으로 절하다 말고 뒤돌아 엉덩이를 디민다. 장단이 멈춘다.) 말뚝이 대령이요. (채찍을 양손에 잡고 고개를 숙였다 쳐들며 대답한다.)양 반 : 야라야히, 듣거라! 날이 저물었으니 사처를 하나 정하라.말뚝이 : 예―잇, 사처를 하나 정하랍신다. (채찍을 어깨에 걸쳐 메고 빈정대는 투로 말하며 앞쪽으로 걸어 나오면서) 제기럴(땅을 치며) 우리집 샌님인지 댄님인지 졸님인지 하는 놈이 날 부르기를 말뚝아, 꼴뚝아, 깍뚝아 하고 오뉴월 장마통에 나막신 찾듯이 막 불러제끼더 니만 겨우 사처를 하나 정하라구 (채찍을 내려 흔들며) 흥, 하기야 장님이 개천나무라 소용 있나? 내가 제 집에서아, 저 밑에 선 저 도령님이 남 보 기에는 빨아놓은 김치가락 같고 밑구멍에 빠진 촌충 같아도 평양감사 갔을 때에 병풍 뒤에서 낮거리하여 낳은 도령님이니, 인사나 탱탱 꼬라 올려라.말뚝이 : 예, 올소이다. (손에 쥔 채찍으로 양반들 면상을 좍 긋는다. 양반들 아야 아야 소리 르 지른다. )양반 : 이놈들 시끄럽다.말뚝이 : 날이 뜨뜨부리하니 양반의 자식들이 흔터에 강아지 새끼 모인 듯이 물끼에 송어리 모인 듯이 연당 못에 줄남생이 모인 듯이 모두 모두 모여 제 의붓아비 부르듯이 말뚝아 부르니 듣기 잔히 아니꼬바 못 듣겠소.→서민의식이 성장하면서 서민 문화 중 탈춤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 속에서 우리는 농민들이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그 동안 농민들에게 호령하며 갖은 수모를 주던 양반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즉 그만큼 양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ⅲ 이런 모습은 고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소장 고문서 no.221624통문 초본이 산에 사는 양반 김낙원은 세력이 없고 가난하여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근신하는 터인데 뜻밖에 한마을에 사는 상민이 이세적의 4부자 광원, 광득, 광복에게 세상에 다시없는 변을 당하였다. 이세적 부자는 평소 패악하고 흉측한 무리로 함부로 날뛰어 불법한 일을 많이 저지르므로 상하 민인을 막론하고 모두 호랑이 같이 무서워하여 감히 상대하지를 않았다. 김생도 역시 시골에 외롭게 살며 힘이 없으므로 비록 한 동네에 살지만 항상 피해 왔다. 그런데 김생의 논이 광원의 논 아래 있으므로 물을 대려면 광원의 논을 거쳐야 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순리여서 마침 날이 가물어 저의 종이 위의 논으로부터 물을 대었다. 그러나 세적의 큰 아들인 광원이 저의 종에게 와서 이는 필시 너의 상전이 시킨 일이다.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김생은 행패가 두려워 문을 닫고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하였다. (중략) 광득이 김생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욕하기를 너 빨리 나오지 않으면 너의 집 안방을 부숴 버에서 조선후기에는 서민 계층이 향유하는 서민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민중들의 비판의식도 성장하여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시켜나갔다 민중의 비판의식은 한글소설,판소리, 탈춤, 풍속화,민화 등 문화 활동을 통해 민중 내부에서 급속한 공감대를 넓혀갔다. 민중은 양반을 풍자할 뿐아니라 민중적인 정서와 가치를 창조하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조금씩 열어가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ⅰ 홍길동전(줄거리)주인공인 길동은 홍판서와 시비(侍婢) 춘섬(春纖) 사이에서 태어나 늘 천대를 받고 자란다. 그는 총명한 재주에 학식이 뛰어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법과 둔갑술(遁甲術)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사람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집을 뛰쳐나와 적굴(賊窟)에 들어가 괴수가 되어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한다. 각 지방의 탐관오리(貪官汚吏)들과 토호(土豪)들의 불의(不義)의 재물을 탈취하는 등 양반계급을 괴롭히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조정의 회유로 부득이 형조판서까지 되었으나 마침내는 고국을 하직하고 난징[南京]으로 가다가 율도국에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嫡庶)의 신분차이의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의 혁명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서얼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소설로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를 제재로 삼았다는 데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ⅱ춘향전너도 남의 집의 귀한 딸이구나. 하늘이 정하신 우리 둘이 만났으니 천년 만년 즐겁게 지내보자.춘향의 하는 짓을 보자. 예쁜 눈썹을 찡그리며 붉은 입술을 반쯤 벌려 가는 목청을 겨우 열고 옥 같은 목소리로 말하기를,충신은 두 임금을 모시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옛글에서 일렀으니, 도련님은 귀한 공자요, 소녀는 천한 계집입니다. 한번 정을 붙인 후 이 때문에 버리시면, 일편단심 이 내 마음 외로이 빈방을 지키며 홀로 누워 우는 한은 어찌하겠습니까. 내 신세를 내가 아니며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분부는 마시옵소서이도령 이르는 말이네 말을 들어보니 어찌 ..
프로그램 제목 : 신뢰 게임(trust game)Ⅰ. 프로그램의 목적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체간과 신뢰적인 정감을 경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을 신뢰했을 때 자신의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상대방을 신뢰하고 신뢰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고 또 이를 극복하여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Ⅱ. 이론적 배경신뢰 게임은 신체접촉에 의한 감정교류도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심리적 거리를 없애고 신뢰감을 깊이 체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오감 즉, 눈, 귀, 코, 혀, 피부는 우리의 체험을 가장 확실하게 해주는 감각기관인데 그 중에서도 피부는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피부접촉에 의한 촉감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다.에릭슨은 그의 인성 발달 8단계에서 첫 단계가 출생부터 1년까지 신뢰감 대 불신감 이 발달하는 단계라고 했으며 이 단계에서는 어머니와의 관계의 질이 음식이나 애정표시의 절대량보다 중요하다 라고 말했다. 또한 어머니의 보호가 적절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긍정적이고 계속적일 때 신뢰감이 발달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 불신감이 발달한다고 했다.유아기에 잦았던 신체접촉은 우리가 자라면서 그 횟수가 줄어들고 접촉 범위도 안기, 업기에서 볼에 입맞추기 손잡기 등으로 좁아지고 나중에는 아예 없어진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대인관계에서 신뢰감을 확인할 수 없게 되므로 자연히 남과 거리가 생기게 된다.또한 과학물질 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사람들과의 접촉은 사무적이거나 스쳐가게 되고 만다. 심지어 만원 버스나 전철에서 신체가 그렇게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감정의 교류는 없는 상황으로도 알 수 있다. 현대인은 대중 속에서 사회 구조상 고독감과 불신감을 체험하게 된다.존 나이스빗은 그의 책 제 4의 물결 에서 고도의 기술 사회일수록 깊은 접촉이 필요하다 라고 했다. 내가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으로 접촉을 시도하면 상대방도 나를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신체접촉에 의한 감정교류가 언어로서의 감정 교육보다 더 빨리 가슴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언어로서 전달하기 어려움 감정의 한계를 신체적 접촉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과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Ⅲ. 프로그램의 실제1. 프로그램의 대상인터넷 자원봉사 동호회 모임의 자원봉사자들의 off-line 모임.2. 프로그램의 목적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모인 이 동호회는 on-line상에서 서로간의 정보나 봉사의 계획들을 상의하기 때문에 off-line상에서 모임을 열었을 때 서로간의 어색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임은 봉사를 하기 위한 모임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임이 중요하며 서로간의 신뢰성이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회원들간의 신뢰와 친숙함은 봉사를 할 때도 서로를 이해하고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관계형성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따라서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구성원들에게 서로간의 신뢰성을 심어주고 서로를 이해하며 자원봉사활동을 보다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3. 프로그램의 내용1) 프로그램 운영방법1 소요시간 (약 100분)·신문지에 올라서기 10분·뒤로 넘어지기 30분·요람 태우기와 천국여행 30분·세면 및 정리 30분2) 준비물운동복(간편한 옷), 신문지(2인 1장), 매트리스3) 프로그램 과정1 도입같이 어울려 인간적 평등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을 심성수렴의 목적이다. 서로간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신뢰하고 신뢰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도록 경험해 보기로 한다.2 전개* 안마해 주기와 신문지에 올라서기1 옆 사람의 허리에 손을 얹고 둥글게 원을 만든다.2 자신의 오른쪽 사람을 안마해 준다. 다시 왼쪽 사람을 안마해준다.3 둘씩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신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신문지를 나누 어준다.4 신문지를 크게 펴고 둘이 함께 위에 올라선다.5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올라선다. 다시 반으로 접어 올라선다. 계속적으로 되풀 이한다.6 신문지 크기가 발바닥만 해질 때까지 계속 되풀이하다.이 때에는 서로간의 안고 한발을 들게 되거나 한사람이 업고 한 발로 서게 된다. 한 팀씩 30초 정도 있도록 확인한다.* 콩쥐팥쥐와 뒤로 넘어지기1 새로운 사람과 다시 짝짓게 한다. 이때 체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짝짓기하도록 한다. 서로 등을 맞대고 팔을 끼게 하고 한 사람이 자기 짝의 등에 평안하게 업고 흔들어주고 굴러준다. 이때 업힌 사람은 온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즐긴다. 이 동작이 끝나고 나면 역할을 바꾸어 준다.2 한 사람은 뒤로 넘어지고 상대방은 뒤에서 안전하게 받쳐준다.이때 넘어지는 사람은 두 팔을 벌리고 허수아비처럼 온몸을 뻗뻗하게 한다. 뒤에 서 받아주는 처음에는 어깨를 받쳐주고 두 번째에는 좀 더 뒤에서 받아주며 마지 막에는 겨드랑이를 두 팔로 안아 주어 깊이 넘어지게 한다. 넘어지는 사람은 발끝 을 들고 뒤꿈치로만 버틴다.이때 미끄럼 방지를 위해 양말을 벗고 만족한 수준에 이르도록 철저히 실시한다. 3단계가 통과되면 바꾸어서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