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정치적 기술(political skill)-붕당과 탕평 정치를 통해본 보수와 진보의 갈등-01022181 장 윤 선조선조의 붕당이란, '같은 정치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붕당을 형성하고, 붕당들 상호간의 비판과 견제 속에서 공론을 형성하고 사사로움을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시작되었지만 숙종조 말기와 영조조 전반기에 들어서 세력을 구축한 노론의 이분법적 태도가 지배하면서, 공론을 앞세운 붕당 사이의 비판과 견제 그리고 공존의 원리를 특징으로 하는 붕당정치가 부정되었다. 또한 붕당간의 치열한 당쟁과 숙종대에 있었던 수 차례의 환국조치는 붕당원들의 대내적 단결을 가져왔지만 그것을 동시에 대외적 경직성을 초래했다. 어떤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 보다는 어느 당파에 속한 사람의 주장인가가 더 중요해졌으며, 자신이 소속한 붕당의 당론에 대해서는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 공론 정치의 기치 하에 성립된 붕당 정치론과 정론 제시를 근거로 성립된 사림의 정치 참여론은 경직된 당론의 대결 속에서 점차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다.이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탕평론이다. 정조는 에 나오는 성왕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정치적 재량권을 확대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그가 본 성왕은 도덕적 모범이라기 보다 정치와 외교는 물론 담력에 있어서도 특출났던 '비범한 정치가'였다. 또한 성왕은 "팔짱끼고 앉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소극적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의 한복판에서 정치의 중심을 세우고 신민의 정점과 개성을 살려 그들에게 오복을 베풀어주는 적극적인 정치가였다.이러한 국왕 중심의 정치론은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신하 중심의 정치론, 즉 붕당정치론의 부정이었고, 새로운 정치질서 창출에 대한 요구였다. 따라서 국왕 정조를 중심으로 한 탕평론자들과 노론 신하들을 중심으로 한 붕당론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정조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탕평정치를 내세우고 국정운영의 능동적 주체로서 성왕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숙종조 이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당쟁기'로 불리는 선조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각 붕당은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각 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역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군자유붕론'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붕당관을 계승한 노론은 숙종조 말기와 영조조 전반기에 일당적 지배체제를 구축한 가운데 '노론=군자당, 기타=소인당' 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당론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군자당론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문제점을 드러냈다. 왕권의 심각한 약화와 당쟁의 이념전쟁화가 그것이다. 이 같은 사대부들의 군신공치주의와 붕당정치론에 대해 국왕들은 다양하게 반응하였는데, 숙종의 경우 선조와 비슷하게 주도 붕당을 번갈아 교체하는 방식으로 막강해진 신권을 견제하게 하였다. 그런데 숙종의 물갈이식 정국변동은 오히려 붕당간의 대립을 가열시켰으며, 각 붕당원이 자신의 생존과 가문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당론을 충실히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숙종조의 박세체는 이러한 군신관계의 위기 속에서 붕당정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론만이 군자당이하는 주장을 부정한 선구적 탕평론자이다.정조시대 탕평파의 대표적 인물인 체재공은 강력한 국왕 중심의 통일된 정치를 주장했다. 정조 역시 "세상 다스리는 요체"가 바로 탕평에 있음을 강조하였다.이에 비해 노론 계열의 인물들은 정조의 턍평책을 외면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정조는 노론의 이분법적 붕당관 때문에 "좁은 나라에서 색목을 이유로 사람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보고, 탕평책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붕당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그는 또한 극심한 당쟁 속에서 "스스로 충신과 역적의 의리 사이에서 보존하지 못할까봐 당초부터 함구하는 것"이 하나의 풍토를 이루고 있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정조가 정치의 표준을 바로 세우는 한편, "두루 포섭하고 공평하게 등용하는" 탕평의 이념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정조는 집권 후기에 접어들어 자신의 정치운영 방식을 한의학의 용어인 '이열치열'과 '대승기탕' 으로 지칭하곤 했는데, 전자가 숙종조의 ' 환국방식의 탕평책' 과 대비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영조의 '완론 중심의 탕평책'에 대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정조의 정치운영방식은 대국의 정치에 해당하는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이다. 이열치열의 통치방식이란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반역자와 대비시켜 다스리고, 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일종의 대국의 통치방식을 뜻한다.왕위에 오른 정조는 이 같은 정치관에 따라 자신의 독특한 이열치열식의 대국적 정치를 추진하였다. 이열치열식 탕평책은 과거 당쟁이나 역모에 연루되어 침체되어 있는 정치범들을 재등용하는 '소통의 정치'로 나타나기도 해다. 이 같은 소통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치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고 침체되어 있는 인재를 적극 등용하려는 정조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정조의 이 같은 이열치열의 탕평책은 시비론적 차원에서 벗어나 우열론의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세채가 말한 이 같은 우열론은 주희의 기본원칙, 즉 "붕당별로 의리와 인재를 분별한다"는 분별론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붕당간의 인재를 조제한다"는 이이의 절충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열치열의 탕평책은 이이의 이 같은 절충론과 박세채의 우열론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서, 이념적 대립구도로 경직되어 있던 당시의 정국에서 벗어나 실제적 우열의 차원에서 유능한 인재를 초당파적으로 골라 쓰도록 하는 조치로 나타났다.또 다른 정조의 정치 운영방식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중재의 리더십으로서 대승기탕의 탕평책이다. '대승기탕'의 탕평책이란 매우 능동적인 인사정책으로서 국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맞서게 하되 두 정치세력을 매개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제3의 세력을 함께 등장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각기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가리킨다.정조는 오랜 당쟁으로 인재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대부의 원기가 크게 침체된 것을 당시의 심각한 병통으로 간주하고 이를 대승기탕의 탕평책으로 치료하려고 했다.정조는 한마디로 ‘진보적 개혁을 꿈꾸면서 보수적 개혁을 추진’한 정치가였다. 정조시대에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 개혁 추진을 용이하게 하는 길이었다면, '탕평'은 보수적 개혁의 성격을 가진다. 붕당의 폐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정조는 탕평을 통해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탕평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크고 공평하게 쓰겠다는 통치관이다. 즉 인사가 만사라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것은 제도개혁보다 인사정책이 강조되는 개혁이다. 인사 중심의 개혁인 탕평은 그래서 보수적 개혁이라 할 수 있다.영조의 탕평을 보면, 권력은 임금에게 집중시키되 관직을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온건파에게 고루 배분했다. 이때에는 온건파 집단이 개혁을 주도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개혁 주도세력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권력의 균형있는 배분을 중시하는 영조와는 달리 정치원칙을 근본적으로 바꿔 정치집단을 개편했다. 즉 관직 나눠먹기에서, 정책을 가진 새로운 정치집단이 국가운영의 장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중요한 일일수록 서로 부딪히고 싸울수록 좋은 방향으로 해결이 나는 법이다. 다만 싸움에도 원칙은 있어야 하니 정정당당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그렇다면 탕평을 통해서 정조가 달성하려 했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패러다임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쓸데없는 시비논쟁이 꽤 많았다. 또한 당시는 시비논쟁으로 당파끼리의 숙청이 심했던 때였다. 정조는 피를 부르는 시비논쟁을 멈추고 정치원칙을 가지고 싸우는 발전적인 정치문화를 달성하고 싶어했다.정조의 탕평책은 집권세력인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른 인사를 등용하여 정치운영의 세력을 넓힌 점 등 비교적 잘 진행되는 듯이 보였으나 정조가 죽은 뒤에는 급격히 퇴락하여 세조정치로 넘어가게 된다.그렇다면 정조의 개혁은 왜 실패하였을까? 그 이유는 대개혁이 필요한 역사적 시기에, 정조는 개혁세력을 키우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실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정치적 기술을 가지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