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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경제학] 적극적 우대조치 평가A좋아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의 의의1. 배경소수 인종과 여성처럼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온 집단에게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차별의 금지를 넘어 과거의 차별로 인한 현재의 악영향을 보상하고 구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등이라는 추상적인 명제와 현실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인식과 이에 대한 구제책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가 나타났다.2. 개념적극적 우대조치는 그 의미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어렵고, 또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아직까지는 통일적인 정의가 없다.적극적 우대조치에 대해 Greenawalt는 '일반적으로 과소 대표된 집단의 구성원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프로그램의 참여에 있어 더 높은 정도의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James E. Jones는, 적극적 평등실현조치가 '어떤 특정한 그룹 또는 그룹의 구성원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그 구성원에게 기회나 이익을 제공하거나 제공하고자 하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행위 또는 정책이다.' 라고 정의한다.적극적 우대조치를 협의로 정의하면, ' 적극적 우대조치란 진정한 평등이 실현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흑인이나 여성과 같은 특정 집단에게 우선적 처우를 함으로써 그들에게 행해진 과거의 편견적 관행을 시정하기 위해 사용자, 교육기관, 기타 조직이 행하는 노력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협의의 정의는 차별의 구제와 보상에만 중점을 둔 것이다. 또한 광의로 파악하면, 적극적 우대조치란 '공적, 사적기관이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받아 온 집단에게 차별지표로 사용된 속성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교육적 영역에서의 기회제공에 고려함으로써 차별의 결과를 구제하고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려고 계획된 우선적, 잠정적, 보상적인 평등실현정책'을 말한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의 개념은 차별제거를 위해서 인종과 성별을 먼저 고려해야 하고 그 외의 다른 방법은 효과가 없다는 명제를 성립시킨다.내 용Greena 제도의 관심대상이 된다.b) 비(非)구제적 목적노동시장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그리고 차별받는 여러 집단들(예; 여성, 소수 인종-미국의 경우)에 역할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 평등실현조치가 사용되어 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서 목적은 칭찬할 만한 것이나 노동시장에서의 다양성의 증진과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는 목적은 적극적 우대조치를 정당화하기에 부족하며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4. 적극적 우대조치의 내용과 형태적극적 우대조치는 고용이나 입학 등에 있어 일정한 몫을 배분하는 할당제와 어떤 비율의 장래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목표제, 그리고 국가유공자에 대한 고용우선권과 공무원 고용시험에 있어서의 가산점 제도도 그 내용으로 포함된다. 여기에서는 할당제와 목표제에 중점을 맞추어 설명하도록 하겠다.a) 할당제의 개념할당제는 피해자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기회나 이익을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는 기준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용이나 입학에 있어서의 특정한 할당(몫)과 관련하며 유연할 수도 있고 고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할당제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는 할당제가 자질없는 사람들을 사용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여성을 위해 의과대학 입학정원의 10%의 좌석을 남겨두는 것과 같이 고정된 몫을 주거나 그 고정된 할당이 여성에 의해 채워질 때까지 자질있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할당제의 유연성 또는 경직성, 영구성 또는 일시성에 관심을 두어, 할당제가 고용이나 입학 등에 있어서 자격없는 사람의 고정된 할당을 강요하지 아니하고 그 비율이 합리적 기준에 의해 유연하도록 설정할 때 그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다.b) 목표제의 개념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실시하는 데 있어 목표는 성실한 노력을 하면 합리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적극적인 수적 표적(numerical targets)이라고 한다. 즉. 목표라는 것은 주어진 노동시장 또는 대학 프로그램에 있어 남성 권력 중심부에 있는 다수 집단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출발부터 공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의 평등 원칙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개인주의가 강한 풍토에서 개인 간 기회의 공정성이 공감대를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접근은 차별의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 개인을 찾아내어 보상해야 한다는 이유로 집단적 보상을 반대한다.3. 수혜자의 과다포함인종이나 성을 이유로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수집단 내에서 이익을 받아온 자들까지도 적극적 조치의 혜택을 입을 것이므로 수혜자가 과다포함된다는 주장이다. 즉 이 조치가 우선적 처우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까지 이익을 주며, 사회적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가난한 계층이나 피해자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소수집단의 구성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하다. 그러나 이는 차별을 집단의 개념이 아닌 개인의 개념으로 보는데 관련한 것으로 적극적 조치로부터 수혜를 입는 자들은 그들이 과거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받은 차별을 보상받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혜자의 과다포함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찾기 힘들다.4.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역차별과거에 소수 집단이 차별받는 사실로 인해 사회적 차별을 야기시키지도 않은 무고한 다수가 희생되어서는 안되며, 과거 차별로 인해 반사적인 이익을 받았을 뿐인 다수를 차별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역차별의 주장자들은 오늘날의 교육과 고용에 있어 경쟁하는 백인들은 과거 차별뿐 아니라 비교적 최근의 사회적 차별도 야기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행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으며, 동조치를 실시하여 현재 다수 집단에게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면 그 자체가 역차별행위이고, 보상과 차별이 무한정 악순환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은 보상의 측면에 있어 현재의 차별이라는 부정의에 대한 책임은 사회전체가 지어야 할 몫이며, 현재 보상을 요구하는 차별을 한 사실은 사회전체의 책임이므로 보상의 개인이 아닌 사회전체가 하여한 한다. 그리고 이는를 위한 조치이기보다는 기회를 평등하게 배분하기 위한 제도하는 것이다.3. 사회적 효용론적극적 조치를 지지하는 논자들은 이 제도가 갖는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한다. 이 제도는 소수 집단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평등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수 집단 중심의 조직에 소수 집단의 문화와 다양한 견해를 끌어들임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베크 판결에서 데이비드 의과대학의 소수 인종을 위한 특별 입학 전형 절차를 정당화하는 이유로 제시되었다. 인종적으로 다양한 학생 집단을 형성하여 교육적 효과를 높이며, 의료계 내 소수 인종의 통계적 불균형성을 극복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사회적 효용론과 관련해서 강조되고 있고 특히 기업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는 내용은 조직 내부의 다양성이다. 조직이 다양한 인종과 성으로 구성될 경우,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점이 있는가? 관련 연구에 의하면,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집단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집단보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차이를 비교하고 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직은 급변하는 사회에 더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기 때문이다. 기업 조직의 경우 이러한 다양성은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면으로 적극 수용되고 있다. 특히 소수 인종과 여성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미국 사회에서 두 집단은 소지 집단뿐 아니라 생사 집단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기업의 경우, 조직 구성원의 다양성은 소비자의 요구와 취향을 빠르게 파악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적극적 조치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레이건 정부하에서 기업들이 나서서 반발했다는 사실은 흥미를 끈다. 타임(Time)사와 에이븐(Avon)사 등의 미국 대기업들은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지 않아 행정명령 제11246호의 적용을에서 1985년 5월 플란더스위원회는 지방자치위원회구성에 있어 위원의 1/3이상은 여성이어야 할 것을 법령에 규정하였다. 또한 평등기회 촉진을 위한 조치로 1990년 자문기구에서의 남녀의 평등한 대표성 증진을 위한 법안이 통과되어 공석에 대한 후보추천시 반드시 남녀가 포함되게 되었다. 1992년 여성의 각료는 18.7%, 공공행정직에서의 여성의 비율은 27.1%였다. 정당에서도 여성에 대한 할당제를 20~25%로 도입하고 있다.6. 독일연방의 제2차 남녀평등권법 및 각주의 남녀평등권법에 근거한 여성공무원 지원조치로서 여성이 과소대표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고위직을 포함한 채용, 승진, 훈련에서의 여성의 비율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해 동일 자격시 여성을 우대하게 하였다. 특히 바이에른주에서는 공무원 임용선발위원회가 여성의 50%할당제를 실시하였다. 정당에서는 녹색당이 가장 먼저 할당제를 채택하여 녹색당이 50%, 사회민주당이 40%의 목표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교육훈련분야에서는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주는 모든 직업훈련에서 50% 할당제를 실시하여 하며, 이울러 200인 이상의 모든 사업장에서는 여성 종업원에 의하여 선출되는 여성문제를 담당하는 기구인 여성담당관제도를 마련하게 하였다.7. 영국1975년에 제정된 성차별 금지법에서는 고용 뿐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일반적인 예외 규정인 긍정적 차별(positive discrimination)을 사용자, 노동조합, 직업훈련기관이 과거의 차별을 시정하기 위하여 특별히 여성 또는 남성에게 기회를 주는 각종의 편의 조치를 규정하였다. 정부부분에서는 정부위원회의 여성위원 확대를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 실시한 결과 여성위원 비율이 1987년에는 20.6%,에서 1990년 23.3%로 증가하였다. 정치부분에서는 1993년 노동당이 40~50%의 목표할당제를 결정하였고, 자유민주다도 연방 집행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위원의 33%를 여성으로 규정하고 있다.8. 미국미국은 1964년 공민권법 제 7편에서 고용상의 평등실현원한
    경영/경제| 2002.10.30| 15페이지| 1,000원| 조회(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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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유산] 한국의 풍속화 평가A좋아요
    목 차---------Ⅰ. 서 론. 조선 이전의 풍속화. 조선시대의 풍속화Ⅱ . 조선 후기 미술의 새 경향. 시대적 배경. 풍속화의 발달1.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2. 혜원 신윤복 (慧園 申潤福)Ⅲ . 결 론Ⅰ. 서론{ 풍속화란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의 정경을 소재로 그린 그림. 풍속화의 주 인공도 인물이지만 초상화처럼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풍속화의 주제는 자연과 사회를 배경 을 이루어지는 다양한 인간사를 표현한 것과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넓은 의미의 풍속화는 인간의 여러 가지 행사나 일상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즉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의 관혼상제와 세시풍속 같은 것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와 달리 좁은 의미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잡다한 생활모습, 양반들의 유한 농 사 풍경 따위를 다룬 것이다.풍속화는 인물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한대의 고분벽화와 당대의 궁중여인도가 발달한 데 이어 송나라 때부터 서민의 생활을 다룬 그림이 대두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도시 상업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끼요에(淫世 )의 형태로 풍속화가 유행하였다..조선 이전의 풍속화{ 조선 이전의 풍속화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 50여기의 고분 중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제작된 초기와 중기의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다실묘였기 때문에 벽 화를 그릴 공간이 충분했고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이들 벽화의 내용에는 행렬도, 수렵도, 무용도와 같은 각종 행 사를 그린 그림들과 부엌, 방앗간, 푸줏간, 마굿간, 등 당시 생활 과 직결된 내용들이 묘사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분군으로는 무용 총 쌍영총, 각저총,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불화 아래쪽 에 경작과 추수 하는 그림등에서 단편적인 예를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여러 기록화들에 풍속적주로 한량(閑良)과 기생들의 로맨스를 소재로 하였으며 산수를 배경으로 부드러운 필선과 세련된 색채를 구사하여 에로틱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폭넓게 사랑받았던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말기에 접어들어 김정희를 중심으로하는 남종문인화의 성행으로 급격히 쇠퇴하고 만다.본서에서는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 발달한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고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을 통해 풍속화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 조선 후기 미술의 새 경향. 시대적 배경조선시대의 후기는 한국의 문화나 미술사상에 있어서, 15세기 세종(1419-1450)을 전후하여 꽃피웠던 초기의 문예에 비길 만한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던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아끼고 그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세종대왕 때에 조선 초기의 최대 서예가 안평대군과 최고의 화가 안견을 비롯한 위대한 예술인들이 출현하였듯이, 문예의 중흥을 도왔던 영조(1725-1776)와 정조(1777-1800)의 재위년간에도 수준 높은 많은 예능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를 민족문화와 미술의 성숙기라고 본다면 후기는 그 부흥기라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 양 시기에 있어서의 미술의 발전은 모두 성군들의 덕치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시대적 여건이나 배경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도 사실이다.{ 후기에는 종래의 부당한 사회적 여건이나 정치제도의 개혁을 꾀하고 신문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여 제반의 학문적 연구에 실증적 태도를 취했던 실학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순조기에 이르는 동안 극성하게 되었다. 이는 비단 정치나 사회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에 걸쳐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의 대두와 변천은 동대의 미술의 추이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특히 사행으로 연경을 다녀와 청조의 문화를 우선하여 배울 것을 주창하였던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의 이른바 북학파들의 영향은 후기미술의 발전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진다. 즉 이들을 비롯한 사행원들의 손을 통해 는 점에서 각별히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이 시대의 풍속화는 비록 다루는 주제는 달라도 우리의 주변을 관찰하여 주제를 포착하고 그렸으며 사실적 표현을 기본으로 하되 예술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진경산수화와 기본적으로 공통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이 시대의 회화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며 역사상 가장 한국적인 회화라고 평가되어 마땅하다.이 시대의 풍속화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단원 김홍도, 긍제 김득신, 혜원 신윤복 등의 화원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풍속화의 초기단계에서는 윤두서, 조영석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리기 사작하여 그 기초를 다졌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기반 위에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탁월한 화원들이 출현하여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1.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김홍도는 영조 21년, 즉 1745년에 나서 정조 재위 이십사 년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까지 약 육십이 년간 이 땅에 살았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대체로 태평했고 나라 살림도 넉넉했으며 아무런 병란이 없었던 평화스런 시기였으니, 흔히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라고도 일컬어진다. 그것은 영조와 정조가 각각 오십이 년과 이십사 년간씩 오래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에 온 힘을 쏟았던 결과였다. 그가 살았던 세월이 좋았으므로 그의 그림에도 낙천적인 분위기가 떠돌고 무엇보다도 조선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엿보인다. 이것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이나 사실은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이다.김홍도는 화원(畵員)이었다. 화원이란 그림을 그리는 하급 벼슬아치로서 오늘날로 하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단 그 직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그에 해당하는 직책은 없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주된 사상은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그 이념하에서 정치는 학문을 닦은 양반들이 하는 것이었고, 그림 그리기 같은 특수 기예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화원은 중인해인 1800년 정초에 화원 김홍도를 잘 알고 있으며 삼십 년간 나라의 중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리게 하였다. 고 회고했다. 그것은 세 차례나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것, 창덕궁에 《해상군선도》라는 커다란 벽화를 그린 것, 또 국왕의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절 용주사의 대웅보전 불화를 제작한 것, 또『원행을묘정리의궤』나 『오륜행실도』같은 중요한 책의 삽화를 그린 것과, 정조가 평생 제왕학의 핵심으로 공부해 온 『대학』을 주제로 그린 《주부자시의도》등으로 대표된다.정조는 한편 자신이 직접 가서 볼 수 없던 금강산의 명승이며 단양팔경(丹陽八景) 등도 그려 오도록 분부했는데, 이때는 그가 지나는 여러 고을에 특별한 대우까지 당부하였다. 또 자신이 특별히 추숭(推崇)하던 임경업 장군의 초상화도 그에게 새로 옮겨 그리도록 했다. 이렇게 국왕이 각별히 아꼈던 까닭에 김홍도는 화원으로는 큰 출세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안동 지방의 찰방(지금의 역장 겸 우체국장과 유사함)과 충청도 연풍 고을의 현감까지 지냈던 것이다.{그의 작품 씨름은 씨름하는 두 사람을 화면 가운데에 그려놓고 구경꾼들을 씨름꾼 주 위에 원형 구도로 배치함으로써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주제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탁월 한 공간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구경하는 모습과 표정들도 사람마다 다양하고 개성있게 묘사했다.어떤 이는 소리를 내어 응원을 하는 듯한 모습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입을 다물고 진 지한 표정으로 관전하고 있는 모습이며, 또 다른 이는 한손으로 턱을 괴고 비스듬히 땅 에 기대어 구경하는 모습이거나, 또는 부채로 얼굴을 반즘 가리고 보고 있든가, 갓을 벗어놓은 사람, 갓을 쓴 사람, 엿을 파는 사람 등 나이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제각기 독특하게 그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사람들의 심리 적 움직임까지 읽을 수 있다. 김홍도는 에서 이 모든 요소들을 분명하면서도 힘있는 선묘로 예술적 깊이감이 우러나오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김홍도의 또 다른 작품인 는 전체 구도고 확신에 찬 먹선을 고도의 숙련된 솜씨로 사용하여 다양한 풍속의 심리적 정황을 예리하게 묘파해내고 있다. 김홍도의 이러한 기량은 신윤복과 김득신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시대 풍속화의 전성기를 낳게 되었다.2. 혜원 신윤복 (慧園 申潤福)혜원 신윤복은 정확한 생존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이나 김홍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신윤복은 김홍도에게서 받은 영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그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의 대가가 되었다. 이런 창조적인 배움이야말로 미술에 있어서 매우 바람직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신윤복의 풍속화를 주제와 기법 면에서 살펴보면, 신윤복은 김홍도가 서민층의 풍속을 주제로 했던 것과는 달리 양반계층의 풍속을 주제로 했는데, 주로 남녀간에 연애를 하는 모습이나 양반들이 기녀들과 즐기고 있는 모습들을 화폭에 담았다.신윤복이 그림에 사용한 선은 김홍도에 비해 가늘고 유연하며 섬세하여, 이러한 선의 특성이 형태를 보다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예를 들어 김홍도는 눈을 그릴 때 간결하게 형태를 단순화시켜 심리적 특징을 요점적으로 드러내는 데 비해서 신윤복은 눈의 모양을 세밀한 선으로 일일이 다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다른 풍속화에 비해 색채효과가 보다 산뜻하고 또렷하며 원색을 과감하게 즐겨 사용하곤 했다. 그 당시 어떤 정통화가보다도 색채표현을 중요시했던 사람이 신윤복이었다. 그가 색채효과를 중요시했던 이유는 에로틱한 분위기를 그림 속에 살리는 데 원색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윤복은 풍속화에서 인물들의 배경을 중요시하여 배경풍경을 항상 그려 넣었다. 신윤복은 배경풍경을 주제를 살리는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이 점은 김홍도가 그의 『풍속화첩』에서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풍경을 생략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신윤복의 《단오풍정》은 그의 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작품이다
    인문/어학| 2002.06.19| 7페이지| 1,000원| 조회(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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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유산] 한국의 풍속화전을 보고
    {한국의 문화유산 레포트 답사 감상문중앙박물관 주최 『朝鮮時代 風俗畵展』을 둘러보고...지난 5월 29일 3·4교시 수업을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뭔가 의미있는 문화유산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떠 오른 것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지건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나오다보니 '왕궁 수문장교대식 을 재현하고 있었다. 월드컵의 영향인지 4개국어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 "우리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행사가 많아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항상 이런 국제적 대회를 하다보면 항상 우리 국민들은 1등 국민들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면 역시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수문장 교대식을 뒤로 하고 박물관 2층으로 들어가다보니 역시나 월드컵을 기념하여 오는 3월 12일부터 7월 14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조선시대 풍속화전을 개최하고 있었다.'역시나 여기도 대한민국 땅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획전시실로 들어갔다. 우선 너무나 반가운 그림들이 많았다. 과거 국사책에 나오던 김홍도의 [서당]이나 김득신의 [파적도] 등은 너무나 낯이 익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아는 그림들이 줄지어 죽 걸려있는 모습을 보니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헛배우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시실을 둘러본지 1분도 가지 않아 사라졌다. 정작 눈에 익었다뿐이지 김홍도가 어떤 사람인지 김득신이 누군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내가 아는 것이 정말 없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고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조선시대 그림이라고 하면 검은 먹으로 정신 수양을 위해 난을 치는 모습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전시실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현대의 기록화와도 전혀 차이가 없어 보였다. 풍속화라는 것이 그 시대의 일들을 사실적이고 기록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조선후기의 풍속화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그런 그림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김홍도의 그림들이었다. 가장 눈에 익은 것도 있었지만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표정이나 동작의 묘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그 중에서도 씨름은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평균이하의 심미안을 가진 나의 능력으로 전문적인 그림 구도에 대한 것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묘사한 그림속에서 그 시대상을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씨름의 그림에서 특히나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우측에 벗어 놓은 두 켤레의 신발이었다. 그림으로 보아 하나는 짚으로 만든 것 같았고 나머지 하나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것 같아 보였다. 분명 그 신발은 씨름 경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신발일 것이다. 짚보다는 천이나 가죽이 비쌀테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분명 다른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씨름을 한다는 것으로보아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사회에서 두 사람은 같은 신분적 계층에 속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계층 속에서 경제적 능력을 차이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김홍도의 또 다른 그림 [우물]에서도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히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사회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에서 나오는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천민은 아닐 것이 확실한데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낙네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있다. 아낙네 또한 가슴이 반쯤 보이는 저고리를 입고 남자의 그런 모습이 싫지많은 않은 표정이다.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보다는 어느 정도 자유분방한 남녀관계를 엿 볼 수있다. 특히나 기녀라는 특이한 신분이긴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에서 이런 사회상들을 엿 볼 수 있었다.그리고 관에 소속된 화원(조선시대 궁정화가)들의 기록화들도 아주 사실적이고 원근에 충실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런 풍속화들이 영·정조이후 조선말기에 들어 김정희를 필두로 하는 남종문인화에 밀려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또한 이런 풍속적 자료들이 좀 더 많이 남아있다면 문헌에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당시 일반적인 백성들의 생활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문/어학| 2002.06.19| 2페이지| 1,000원| 조회(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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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유산] 의릉 답사기 평가A+최고예요
    의릉을 다녀와서....학교 정문을 나와 신이문역쪽으로 약 10여분을 걸어가니 의릉 표지판이 나왔다. 외대를 다니면서 의릉이 이렇게 가깝게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너무나 깔끔한 모습에 감탄하면서 수업 시간에 배운 조선 왕릉의 기본 형태를 되새기면서 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바로 홍살문이 나왔다. 너무나 깨끗한 모습에 만든지 얼마 돼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는 것이 나오자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홍살문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은 팔각 기둥이었다. 경복궁에서 보았던 천원지방(天圓地方)은 아니었지만 주역의 팔괘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어설픈 추측을 하면서 홍살문을 지났다.홍살문을 지나니 호수를 지나는 곧은 다리가 나타났다. 수업시간에 배웠던 홍살문전에 나타나는 금천과 금천교가 없어서 이것이 바로 금천과 금천교의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지만 금천이란 흐르는 물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물이 고이는 호수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경복궁의 향원정에서 보았듯이 이런 호수는 궁의 후원에 있는 게 더 적당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예쁜(?) 다리를 지나 정자각으로 들어갔다. 물론 왕이 들어가는 옆 길로 들어갔다. 과거의 왕들도 다니지 않는 길을 내가 당당히 앞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자각의 측면으로 들어가니 멀리서 보기보다는 의외로 정자각이 컸다. 물론 내부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텅빈 정작각안에 음료수 병이 나뒹구는 모습에 정자각 뒤에 누워계시는 분들에게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정자각의 기둥들의 초석은 천원지방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네모난 돌 위에 둥근 돌을 올리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누가 보수했는지 모르겠지만 지붕의 용마루 부분등을 희뿌연 시멘트로 발라 놓은 모습은 눈살을 지뿌리게 했다. 그리고 처마부분에 각종 상서로운 조각들이 놓여있었는데 왼쪽 부분의 조각들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있었다.그리고 정자각에서 좀 독특한 형식을 보았다.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네 개의 기둥들은 바깥쪽으로 네모난 기둥을 하나 더 덧대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정자각 옆으로 나온 지붕을 받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정자각 뒷편으로 높다란 언덕 위에 두 개의 능이 앞 뒤로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주의를 빙둘러 놓은 목책으로 능 가까이 가보지는 못 했지만 때 묻은 무인석과 깨끗한 문인석(아마 나중에 다시 만든 것 같은)을 볼 수 있었다.능은 일반적인 형태와 다른 약간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왕의 무덤은 뒤쪽에 그리고 왕비의 무덤은 앞 쪽에 있었다. 표지판의 설명에 따르면 풍수지리학적으로 정혈에서 벗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렬로 배치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풍수지리가 중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석물들을 보고 싶었지만 그렇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호해야할 유물이라는 의미에서는 능 주위로 접근하기 못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그 자리에 누워계시는 분들에게도 좀 더 올바른 방법일 것 같다.능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아주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왠 탑이 하나 호수의 왼편에 있었다.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탑이 있었다. 경종이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조선시대 임금님의 무덤에 탑이 놓여있여 있었던 것이다.정말 신기한 발견이라는 생각에 탑으로 가보았지만 어떤 안내 문구나 설명도 없었다. 분명히 누군가 어디서 옮겨다 놓았을 것이라고 보았을때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일본이 떠 올랐다. 경복궁에서처럼 우리 나라의 정기를 훼손시키기 위해 정체불명의 탑을 왕릉에 갔다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괜시리 욕이 나왔다.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탑이 일본이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답사가 끝나고 나중에 알았지만 의릉이 일반에 공개된 것이 1996년부터였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국가정보원(구 안기부)가 이곳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 탑이 옮겨졌다고 한다. 국가의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그분들의 노고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은 해야겠지만 왕릉에다 탑을 갔다 놓은 그 분들의 몰상식함은 이해할 수 없었다.역시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의릉에는 참 다양한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특히나 탑옆에 앵두나무까지 있었다. 답사 도중에 앵두를 따 물에 씻어서 맛있게 먹었었다. 앵두를 먹으면서 왕릉에 과실수도 심었었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경종 임금님이 앵두 나무를 좋아했었나보군 하며 웃으며 넘어갔었지만 능 안의 많은 나무들도 과거 안기부분들이 심어다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인문/어학| 2002.06.19| 3페이지| 1,0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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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 입문] 근대적 예술 체제의 성립 평가C아쉬워요
    근대적 예술 체제의 성립근대적 예술 체제의 성립의 시발은 회화가 시에 못지 않은 의미와 자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끈질긴 주장을 통해서였다. 회화가 시에 같다고 될 때 시 류의 활동과 회화 류의 활동간의 긴밀한 유대가 성립됨으로써 그들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동일한 활동이라는 이론의 수립에로 까지 확대 발전되었다. 이렇게 다른 부류에 속한 활동이 같은 동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쌍방의 활동이 다 같이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공통적인 요소 때문이었다. 이 미는 이념의 이름으로 또는 보편적 자연의 이름으로 시론과 화론 에서 옹호되고 있는 개념이었다. 음악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따라서 시, 음악, 회화, 조각, 건축 등의 인간 활동은 미를 공통으로 목표하고 있는 것이라고 되었다. 그렇다 할 때 원칙적인 입장에서 그들 활동은 다른 활동들과 구별되어 그들만의 체제를 구성시켜야 된다고 논의가 전개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beauty와 art를 결합시켜 놓고 있는 어법의 미적 예술 (beaux-arts)라는 말이 채택되게 되었다. 이 말은 1660년 이후부터 유행되기 시작하여 1690년경에는 책에 표제로까지 이용되게 된다.5) 그러나 이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곧 그 때부터 5가지 예술의 근대적 체제가 확립된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그러한 체제를 지지하고 있으나, 실제적인 체제의 형성은 또 다른 문제로서 오랜 지적 노력의 과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로 이런 노력은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다.17세기 동안 유럽 문화의 선두주자 역할은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넘어갔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여러 가지 관념들과 경향들은 프랑스 고전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변모되어 후기 유럽인들의 사고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시에 관한 이론이 융성했고, 루이 14세 때부터 회화와 음악도 꽃피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예술들의 융성은 제도적으로도 뒷받침되어 다양한 아카데미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태리 모델을 따르고 있었지만, 정부가 주도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1635년에 설립된 Academie Francaise를 필두로 1648년에, 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1660년에서 1680년 사이에는 더 많은 아카데미들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시각 예술에 관한 중요한 이론서, 비평서 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미를 추구하는 활동으로서의 예술이란 별도의 체제가 확립되기는 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자유로운 아트임을 주장하는 한에서였다. 신고전주의 이론가들에 의하면, 이상적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의 활동이란 과학이나 다름없는 이성적 작업이다. 따라서 과학과 예술은 보편적 자연의 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다. 단지 질서의 상이한 측면이 각각 과학과 예술 속에서 드러났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술과 과학은 각기 자기 고유성을 주장하기 위해 양자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야 할 단계가 왔다.이러한 문맥에서 프랑스의 신구 논쟁 (Querelle des Anciens et Modernes)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구 논쟁이란 완전한 예술의 규범을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이제껏 찬미되어 마지않던 고대와, 과학을 발전시킨 근대 시기를 비교하는 중에 고대인들이 우월하냐 근대인들이 우월하냐하는 문제로 시비가 붙은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근대인들은 고대와 근대의 여러 분야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지식과 문화를 분류하는 체계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두 번째로, 다양한 분야에서 고대와 근대인들의 주장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수학적 측정과 지식의 축적에 근거하는 분야에서는 근대인의 진보가 명확히 설명되지만, 개인적 재능이나 취향 같은 분야에서는 서로의 우세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예술과 과학의 분리가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근대적 예술의 개념이 잉태되어 갔다. 18세기 문턱에서 근대 예술 체제로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18세기 초엽 아마추어, 저술가, 철학자들은 시각예술과 음악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추어 저술가들의 예술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이 시기에 쓰여졌고 또한 널리 읽혀졌다. 이러한 추세는 근대 예술 체제가 정착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근대 예술 체제의 개념이 먼저 파리와 런던의 문화 서클에서 논의되고 많이 회자됨으로써 자라나게 되었고 구체화되었다.6) 18세기 중엽에 나온 중요한 논문과 저술들은 이런 문화적 기후에서 나온 의견들을 반영하였다. 아카데미에서 논의되는 주제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예술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 지배적이었다. 거기서 강연된 강의들이 나중에 책으로 출판되어 시, 시각예술, 음악간의 연관성을 강조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신구논쟁과 이러한 아카데미 경향은 뒤보 (Abbe Dubos 1670-1742)의 중요한 저술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뒤보에 따르면 우리에게 대상의 미를 알려줄 수가 있는 것은 오직 감정뿐이고, 이성은 예술작품의 감상에 필요한 것도 충분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학 이론의 문제가 출발하여야 할 곳은 상상과 감정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제 예술은 상상적 창조와 감정의 환기라는 근대적인 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자유로운 예술의 체제 속에서 함께 묶여 있었던 과학의 군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근대 예술체제를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은 Charles Batteux (1713-1780)에 의해서 딛어졌다. 비록 그의 체제의 많은 요소들이 이전 학자들에게서 빌려 온 것이지만, 그는 예술체제 만을 전적으로 다룬 첫 번째 사람이다. 바뙤는 근대 예술체제를 거의 최종적인 형태로 분류하였다. 그의 저서 Les beaux arts reduits a un meme principe (1746)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레스의 시론으로부터 근대적 예술의 체제론을 출발하여, 그들 시론의 원리를 다른 예술들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쾌를 목적으로하는 미적 예술 (beaux-arts)를 유용성 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용한 기술로부터 구별시켜 놓고 있다. 전자에 음악, 시, 회화, 조각, 춤을 포함시켜 놓고 있다. 이 쾌와 유용성을 결합하고 있는 세 번째 그룹에 웅변과 건축을 들고 있다. 이런 방식은 바뙤 만의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고대에서도 비슷한 분류가 발견된다. 그만의 새로운 점은 '미적 예술 (beaux-arts)'이란 명칭에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시각 예술과 언어 예술, 음악 등 많은 면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는 예술들을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이라는 하나의 원리하에 단일한 집단으로 묶은 것이 무엇보다도 새로운 점이었다. 바뙤의 구분은 신속하게 인정받았다. 그의 저서가 출판된 지 2년만에 영어 번역판이 나왔다. 독일에서는 네 가지의 번역판이 나왔다. 미적 예술, beaus-arts란 명칭은 프랑스어로부터,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등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파되었다.바뙤의 체제는 이후 디드로 (Diderot), 몽테스끼외 (Montesquie), 달랑베르 (D'Alembert)등의 백과전서학파의 손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손질이 가해지게 되었다. 이 중 달랑베르는 바뙤가 미적 예술에서 제외시켰던 건축을 모방적 예술 하에 다른 예술들과 함께 포함시킴으로써 5가지 근대 예술체제을 최종적으로 완성시켰다. 백과전서학파를 통하여 바뙤 이후의 근대 예술체제는 유럽 전역에서 그 위치와 권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예체능| 2002.05.29| 3페이지| 1,000원| 조회(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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