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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문화가 일본에 끼친영향
    삼국문화가 일본에 끼친영향※차례머리말1.학문과사상2.역학·의학·기술3.예술분야맺은말머리말일본은 지리적 영향으로 선사시대로부터 한국을 통하여 대륙의 문화와 한극의 선진 문화를 받아 점차 개척해 나갔으며 농경사회를 이룩하고 부족국가를 세운뒤에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4세기 후반부터 불교를 수용하면서 사상·학문·제도·예술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하게 되는 삼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일본고대 문화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사상과 학문⑴유교의 영향삼국문화가 일본전수에서 가장 큰역할을 한 것은 정치적으로 친선관계가 유지되던 백제로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일본의 사서(史書)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고사기(古事記) 중권 응신천황(應神天皇) 20년 기유조(己酉條)에 백제의 조길왕(照吉王)(근초고왕)이 아지길사(阿知吉師)와 화이길사(和爾吉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는 바 이때 화이길사(和爾吉師)는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후일에 아지길사(阿知吉師)는 아직사사(阿直史寺)의 조(祖)가 되고 화이길사(和爾吉師)는 문창사(文倉寺)의 조(祖)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應神天皇)15년 갑진조(甲辰條)와 응신천황(應神天皇) 을사조(乙巳條)에서는 백제인 아직기(阿直岐)는 능히 경전(經典)을 탐독할 수 있는 자로써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그후 박사 왕인이 일본에 초빙되어 가서 경학(經學)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책의 내용을 주목해 보면 당시 일본에서 아라다 와께와 가무나기 와께를 백제에 보내어 학자를 구하니 임금의 명령으로 왕인이 논어(論語)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 갔는 바 그의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하여 응신왕(應神王)의 신임을 받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학문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학문을 전함과 동시에 유학을 전수 시킨 것임을 알 수있다. 이렇듯 백제로 부터의 한문과 유학사상의 일본전수는 곧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서 유교 정치이념의 이해를 가져 오게 되어 정치적이 측면에서 반영 되기 시작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추고천왕(推古天王) 11년조와 12년조에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성덕태자(聖德太子)(쇼도구다이시)가 12계관위(階冠位)와 17조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관위(冠位) 12계(階)는 덕(德)·인(仁)·체(體)·신(信)·의(義)·지(智)를 각각 대소로 나누어 12계(階)로 한 것인데 이것은 유교덕목 그 자체를 이용해서 만든 것임을 알수 있고 17조 헌법을 유가 사상에 입각하여 여러 신하들을 훈계하는 지배 원칙으로서의 제2조를 제외하고는 각조목의 대부분은 《논어》(論語)나 《효경》(孝敬)·《체기》(體記)·《관자》(管子)등에서 유교 사상적 내용을 따거나 구절을 이용하고 있어서 이것 또한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유학자들은 승려들과 더불어, 일본열도의 물질과 정신문화를 비롯한 생활 전반을 향상시키는 데 지대하게 기여하였다.⑵불교의 영향백제로부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관해서는 종래 552년으로 간주하였으나 538년이 타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552년에 백제 성왕이 달솔 노리사치계를 파견하여 일본왕에게 금동석가불 1구와 반개(불상 위를 덮는 비단으로 만든 일산) 약간, 경론 몇 권을 보냈다. 이후 백제로부터 승려와 사원 관련 기술자들이 끊임없이 파견되어 불교 신앙을 장려했으며 이후 일본불교는 교학(敎學)의 발전 , 승관(僧官)제도의 수립, 불교사상의 제반 생활과 문화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2.역학·의학·기술⑴역학《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에서 일식이나 혜성·유성·행성들의 운행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는 일찍부터 중국의 역법을 수용한 백제에서 천체를 관측하는 전문 관부와 학자가 양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발달된 천문학은 일본의 천문학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흠명천황(欽明天皇) 15조에 백제에서 역박사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원가력 시행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비조사(飛鳥寺)의 건립과 일치된 석가상이 백제인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역학의 전수는 554년에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백제는 고덕 관등의 역박사 왕보손을 파견하여 전임자와 교대하여 상주케 함으로써, 백제의 역학 지식은 일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602년에는 관륵(觀勒)이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역본 등을 전하고 가르쳐서 역법이 일본에 채용되었다.(2) 의학백제에서는 일찍부터 의약에 관한 지식과 학문이 발달하였고, 또 그에 관한 제도도 정비되어 사비 도읍기에는 22개의 관서 중 내관 소속의 약부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소관 관청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의학기술이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의학과 약학이 분리되었고, 의료진으로는 치료를 업무로 하는 의박사(醫博士)와 약물(藥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채약사(採藥師)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백제의 의학은 약사의 비조로 알려진 덕래를 통해서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4년조에 백제에 의박사(醫博士)와 약물(藥物)을 요청한 사실이 보이며 15년조에는 백제에서 의박사(醫博士)와 채약사(採藥師)의 파견한 기록과 984년에 편찬한 《의심방》(醫心方)에서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이라는 의술서의 인용과 《신라약사방》(新羅藥師方)이라는 의술책이름도 보이고 있어 일본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수 있다(3)기술건축·궁전과 도성…백제의 건축술은 왕궁 축조를 필두로 하여 왕릉과 대규모 토목공사인 산성 축조에까지 발휘되었다. 그러한 건축술은 수학과 역학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아스카시대의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조메이 천황때에 구다라궁 건설을 비롯하여, 궁전과 공공건물의 건설은 백제계 이주민들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8세기대의 도성인 헤이조경은 중국의 것이 장방형인 것과는 달리 궁성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구획된 모양이 정방형인데, 이는 백제 사비도성의 영향으로 간주되고 있다.·산성 축조…일본열도에서 산성의 효시는 코고이시라고 불리는 축성연대가 분명치 않은 산성이다. 코고이시는 네모난 성돌을 한두 겹 포개놓은 열석인데, 기다란 이 열석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산성의 형태가 되겠는데 대부분 표고 3.400m의 가파른 독립된 산에 지형을 잘 이용하여 흙이나 석재로써 석벽을, 골짜기 아래로는 견고한 수문이나 성문을 축조하였다. 유사시 부근에서 농경을 하며 생활하는 주민들이 농성할 수 있게 되었다. 코고이시 주변에선 한반도의 산성들과 마찬가지로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코고이시는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전투방식이 낳은 독특한 군사요새로서 한국계 주민들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교량과 제방…백제에서의 교량은 498년에 웅진교를 가설한 데서 알 수 있다. 567년에 창건된 절터에서도 목교가 확인되었다. 물론 고구려 평양성에서도 목교의 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백제의 교량 건축과 같은 토목기술은 그 유구가 남아 있는 일본의 경우를 통해서 유추가 가능하며, 이곳을 개척한 백제인들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3.예술문화고대 일본에 있어서 불교문화(佛敎文化)는 조형적인 미술의 성립과 발달에 있어서 어느 한 나라만의 영향이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불교 문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사원과 불탑의 건축, 불상 조각, 불교회화, 불교적인 공예등 불교와 관련된 모든 불교예술은 삼국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2.06.01| 4페이지| 1,000원| 조회(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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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유교사 평가B괜찮아요
    한국 유교사一.유교의 수용1.삼국시대 유교의 수용(1).고구려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한족과 가장 강한 대립관계를 형성했던 만큼 일찍부터 중국문물의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았다. 고구려는 전반기 300여년 동안 한사군과 대치하면서 유교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한사군 시대의 유교사상은 원시 유가를 탈피하여 이른바 한학(漢學)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유교는 자연히 한학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경(五經-시경·서경·주역·춘추·예기), 삼사(三史-사기·한서·후한서)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는 고구려 전반기 유교는 이미 원시유교가 아닌 오경 중심의 한대 유교이며, 중국의 한학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372년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설치되면서, 유교는 고구려의 가장 중심적인 지배사상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태학·경당과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유학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광개토왕의 비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서는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유교사상은 원시 유교의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바탕 위에 한대 경학의 능률적인 전장 제도 가미하여 발전시킴으로써, 한 나라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2)백제의 유학백제를 구성하고 있던 마한인들은 전통적 풍속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유교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인 질서의식을 생활화하였다. 중국사료인 『주서(周書)』 백제조를 보면, 여인들이 혼인 여부에 따라 옷과 머리 모양을 달리하고 조정에 배례하고 제사드릴 때 등의 복식의 규정 등으로 보아 당시 백제인들이 엄숙 단정한 예법 질서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령과 법제에 있어서도, 유교의 경전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강조되던 여인의 정절과 3년상의 제도를 시행했음을 볼 수 있다. 행정단위와 군사조직이 5분법으로 구성된 것 또한 유교의 오행(五行)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3).신라1).유교 수용신라에서는 일찍이 6부 촌장들이 모여 덕망있는 자를 왕으로 것이 없다”,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명제는 이와 같은 생각의 표현이다. 즉 인간사회는 천이 제시하는 질서나 명령을 순응해야 하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큰 재앙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인군(人君)은 천을 대신해서 인민(人民)을 다스리는 자이므로 천의 뜻을 따르고 천이 제시하는 절대적 질서에 순응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천의 의사표시는 민의 의사, 곧 여론으로서 표현된다. 『서경』(書經)에서 하늘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민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맹자』(孟子)에서 “인민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하였고, “걸(桀)·주(紂)가 천하를 잃은 것은 그 인민을 잃은 것이고 그 인민을 잃었다는 것은 인민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의 여론은 바로 천명이며, 군주가 여론을 무시하면 그것은 곧 천명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천이 군주에게 주었던 명령을 철회하게 되고 그 군주는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에 방벌(放伐)과 선양(禪讓)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 성립된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유지 강화하기 위해 유교사상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왕건이 후백제와 신라의 잔존세력의 존재를 감안하여 대외적인 명분, 즉 신국가 성립의 불가피함을 인정받고, 또 국왕으로서의 즉위를 하늘의 뜻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궁예의 폭정을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할 것”으로 단정한 것이나, 태조의 추대공신이 “혼군(昏君)을 폐하고 명군(明君)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라고 하여 왕건에게 “탕(湯), 무(武)의 일을 행하라”고 했던 ‘방벌적 혁명론’(放伐的 革命論)은 유교정치사상의 천명론(天命論)을 근거한 것이었다. 즉,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방벌적 혁명론은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국왕에 오른 것,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천명에 의해 불가피하게 행한 것으로 설명하게 되어,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정당화시키고, 그 권력의 정통성 왕들의 조세경감·권농정책·사면 등은 이와 같은 민에 대한 배려를 의식적으로 감안한 조치였다. 고려시대의 일반 민은 신라 하대의 일반 민보다 한층 더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되어 있었다. 물론 중세사회 내부의 민의 성장이지만 생산력의 발전과 후삼국의 전쟁과정에서 보여준 민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고려왕조의 지배층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정책 속에 반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왕조는 토지분급제와 신분제를 통해 지배질서를 운영했다. 지배질서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물적 토대로서 양인확보가 필요하였고, 양인농민의 경제력 향상이나 신분상승은 원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확보한 기득권을 계속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민에 대한 배려로서의 민본론은 이미 신분제를 전제한 이상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고려시대의 민은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도 아니고, 기본적인 생활기반을 갖춘 자립적 농민도 아니었다. 일반 민은 정치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통치행위의 객체로서 공과(公課)·공역(公役)의 제공자에 불과했다. 국가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의식은 국가의 통치객체이며 국가의 재정적 기반이 민이기 때문에, 그들을 일정한 장소에 안집시켜 국가의 존립에 기여하게 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민본론을 말하지만 신분제의 폐지, 토지개혁을 단행하거나 근본적인 세제개혁을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기득권을 전제로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일방적이고 제한적인 조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에 대해 국가의 조치는 소재지 관에서 양식과 종자를 주어 농경을 권장한다든지, 조세를 감면한다든지, 의창곡을 내준다든지 하는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대책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민본론은 국가입장에서 인민들의 생활에 대한 항구적인 경제생활의 보장이나 인격 자체의 존중보다는 일시적인 굶주림의 모면 또는 이념적인 허구, 즉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였다.고려사회는 천의식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인민에 대한 편리함을 도모하는 민본론로기로 존재해왔는데, 불교는 이미 사상 자체에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부적격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민의 저항의 논리로 쓰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층은 공·맹 이래 자발적으로 지배체제에 순종하는 사상체계인 유교를 보다 철저히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원에서는 이미 송대의 주자학을 관학화하면서 지배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또 원은 원과 주변국가의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그것을 주변국에 인위적으로 전파시키고 있었다. 고려지배층의 주자성리학 수용은 이 같은 내적·외적 조건에 의해 용이하게 진행되었다. 고려의 주자성리학 수용자들은 중소 재지지주적 기반을 가지면서 대토지소유자인 보수귀족층을 비판하였다. 그것은 보수귀족층과 결합된 사상이 불교였으므로, 불교와 불교신봉자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당시 불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의 소유자였고 부역을 피하는 민의 은거지였다. 불교는 중앙권력층과 일체가 되었고 불교사원은 대장원주가 되어 있었다. 신흥세력(선진적 지배층)은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소유권적 토지지배를 견지하였으므로 전호농민(佃戶農民)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하였다. 이들은 중앙귀족에 의한 농장의 발달, 수취체계의 중첩화로 야기된 일반 민의 유망을 막고 대장원주이며 중앙권력층인 세신거실(世臣巨室)들과의 이해의 대립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진적 지배층은 주자성리학의 철학체계와 현실대응 논리를 통해 불교가 효·충·예의 가족·사회·국가의 윤리보다는 자기만의 해탈을 강조하고, 불교사원은 권세가의 대토지소유와 마찬가지로 인민과 토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사회모순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자(朱子)의 권농문(勸農文)을 통하여 지주와 전호의 의무관계를 규정하여 지주적 토지지배관계를 유지, 강화하려 하였다. 선진적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투쟁은 불교와 일체화된 중앙권력층 내지 대장원주인 세신거실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며, 불교에 대한 승리는 사상적 승리인 동시에 정치사회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을 받아한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 것은 당연했다. 온건개혁파의 사상은 「춘추」를 중시하였으며 인간의 본성과 성리학 본연의 왕도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둔 채 제도운영상의 문제점만 개혁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급진개혁파의 사상은 「주례」를 중시하였으며 제도개혁과 왕도, 패도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때문에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왕조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바로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국세력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유학과 육학, 여학 등에 관심을 보였으며 나아가 불교와 도교, 민간신앙적 요소까지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15세기 학자들이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등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정도전은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보면 우주론에서 심성론,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체계적인 성리학적 이론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 이후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권근이었다. 그는 조선 초기의 성리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속에 이기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수양론 등 이후 사상계의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모두 포괄함으로써 조선에서 성리학이 뿌리내리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문물제도 정비에 힘 쏟으며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이 시기 사상계의 경향은 세조 대에도 지속되었다. 이에 비해 김시습 등 세조집권에 반대하고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도교, 불교 등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사상적 조류를 이루는 삼교회통사상의 단초를 열어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학자들과 교류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쳐 그 뒤 조선 성리학에서 의리와 도덕성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며 강조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성종 대에하였다.
    인문/어학| 2002.06.01| 12페이지| 1,000원| 조회(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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