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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사] 송준길 평가D별로예요
    송준길(1606-1672)※목 차※1.대전시연혁2.머리말3.본론(송준길의 생애)4.송준길의 사상5.동춘당과 옥류각6.맺음말1.대전시 연혁대전은 남한의 중앙부에 위치하므로 중도라고도 일컬으며, 영남과 호남으로 통하는 삼남의 관문으로서 2000년말 현재 대전광역시의 면적은 539.83km2이고, 인구는 1,390,510명이다. 백제 때에는 우술군, 신라 때에는 비풍군, 고려 때에는 회덕현, 유성현, 진잠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 잠면으로 큰 변동없이 계속되어오다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 진잠군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4년 3월 1일 회덕군, 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종래의 회덕군과 회남면 지역(현재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을 중심으로 대전면이 신설되어 이 지역이 현재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대전면에서 대전읍, 대전부가 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 대전시가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대전직할시가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대전의 행정구역은 대전부가 1949년 대전시로 개칭된 때 35.7km2이었고, 1963년에 대덕군 유천면 전 지역과 산내면·회덕면 일부가 편입되어 88.21km2이었으며, 1983년에는 대덕군 회덕면·유성읍 전역과 구즉면·탄동면·기성면·진잠면 일부가 편입 203.80km2의 면적에 2구 60개 행정동으로 시세가 확대되었다. 2000년말 대전시 행정구역은 539.83km2, 동구·중구·서구·유성구·대덕구 등 5구 76개동으로 행정조직이 편성되어 있으며, 이중 면적은 유성구가 177.15km2로 가장 넓고, 인구는 둔산 신도시 건설 등으로 인구가 크게 유입된 서구가 477,978명으로 가장 많으며, 기존 도심인 동구·중구지역은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2.머리말송준길은 아호가 동춘당인 것 같이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온화한 천품을 지닌 옥같은 군자이다. 그는 타고난 효심는 원래 여산송씨의 한 갈래로 은진에 세거하다 선대를 실전하여 송대원이 시조가 되었는데 그는 고려조에서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피봉되었다. 송준길의 7세조인 송유가 태종조에 벼슬을 버리고 회덕에 숨어 산 이래 세거지가 되어 송촌이 형성되었다. 송준길의 선대에는 뚜렷한 현관이 발견되지 않는데, 조부 송응서가 군수를 역임하고, 부 송이창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또한 군수를 지내는 정도였다. 반면에 동춘당은 조부이래 명문가와 인척관계를 맺고있어 주목된다. 즉 조부는 당시 명문가인 광주 이씨 이윤경(1498-1562)의 사위였고, 부는 광산 김씨 김은휘의 사위였다. 김은휘는 곧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1526-1582)와는 형제간이었고 송이창과 김장생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서 김장생 부자와 송준길은 사제관계 이전에 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가하면 송준길 역시 남인의 명망가였던 정경세의 사위가 됨으로써 3대에 걸쳐 명문가와 혼척관계를 맺고 있었다.선조39년 12월 28일 진시에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家에서 아버지 송이창과 어머니 광산김시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 문묘에 배향된 삼현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천품이 온아하고 순수하여 탁이할바가 있었다. 3세때 부친이 친상을 당하여 회덕 송촌에 내려간 이래 주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그의 생애는 출사를 전후해 양분해 볼수 있고, 출사 이후는 다시 효종 초 징소에 의하여 청론(淸論)을 주도하다가 좌절을 겪은 시기와 효종8년(52세)에 재출사하여 효종과 현종의 지우를 받으며 활약하던때로 나누어 볼 수 있다.그는 9세때 비로소 독서를 시작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감이 있었다. 이때 수옹 송갑조도 그의 셋째 아들 시열을 함께 독서하게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글을 배울 때, 어른이 혹 일이 있어 궐과(闕課)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청하여 더 배우고 그렇지 못하면 밤잠을 못 이루었다시에 합격하였고 별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는 불운이 있었다. 22세에 부친을 여윈 뒤 우락재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25세(1630)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익위사 세마에 제수되었다. 이후 내시교관, 동몽교관, 시직, 대군사부, 예안현감, 형조좌랑, 지평, 한성부 판관등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28세때 동몽교관에 잠시 출사하였으나 그해 6월 장인 정경세의 죽음이 있자 이를 빌미로 사임하였고, 곧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출사할 명분이 없다하여 향리에서 공부에 열중하였다.44세 때(1649)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만행을 자행하는데 대해 이미 대군시절부터 강한 복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청에 인질로 끌려가서 8년동안이나 볼모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곳의 지리, 정세 등에 밝았으므로 즉위와 함께 자신의 복수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효종은 먼저 조정에서 친청 세력을 배제하고 재야의 참신하고 절의있는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여 산림을 대거 등용하였으니 김상헌, 스승 김집을 필두로 한 이른바 산당의 출현은 북벌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는 부사직에 임용되었다가 곧 시강원 진선, 사헌부 장령, 집의로 승진되었다.이때 그는 청론을 주장하였던 바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던 김자점과 원두표의 당여(黨與)를 일시 탄핵하였는데, 김자점의 경우 그의 전권행위가 깊어가면서 이권을 노리는 추종자들이 세도를 망친다는 것이었고, 원두표에게도 또한 이권을 노리고 출입하는 자들이 있다고 싸잡아 공격했던 것이다. 이어 동년 11월에 당시 김자점의 귀양을 청하였던 바 이러한 일련의 태도는 낙당(洛黨)계열과 산인세력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상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그는 효종 원년(1650)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 정책을 밀고하여 청의 조사 사절이 줄을 이어 내려오는 등 사태가 급변하게 되자 산당계 다른 인사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 밖에 없었다제도의 변동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활약하였다. 효종의 두터운 신임하에 그에게는 직무와 무관하게 조정에 있을시에는 거의 경연, 서연 등 강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강관직에 겸대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는 그러한 기회를 잘 활용하여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이듬해(1659, 60세) 3월에 특지로 병조판서에 제수된 후 대사헌, 우참찬 등을 맡아 이조판서를 맡고있던 송시열과 함께 국정을 이끌면서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북벌을 당연히 국시로 삼아야 하되 당장의 북벌 시행은 불가하며, 민생의 안정을 이룬 후에 대지를 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민생을 살리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일에 부심하였다.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국가의 북벌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효종에 이은 현종의 그에 대한 대우는 지극하였다. 현종 즉위 2개월도 못되어 그는 이조판서에 발탁되었고, 효종의 만장(挽章)을 짓기도 하였다. 경연에 수시로 출입하는 가운데 그는 배불(排佛), 군정변통(軍政變通), 인물천거 등 제 분야에 걸친 주장을 개진함과 아울러 현종에게 도통지전(道統之傳)으로서 권면, 삼대의 지치(至治)실현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는 현종 원년 4월에 기해 예송의 연장 선상에서 비롯된 윤선도의 공척을 받고 조정에서 퇴귀하였다가 거듭된 현종의 징소에 응해 현종 2년 2월에 상경하였다. 이후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계의 계속된 상소로 사퇴하였다. 이후 참찬, 대사헌, 이조판서 등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현종 9년 12월에 찬선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도 경연의 구폐(久廢)를 들어 권학(勸學)과 아울러 현종의 우유부단함을 경계하였다. 이후 현종 10년 5월 다시 귀향하였다가 현종 11년 2월에 세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머물다가 다시 환향하는 등 잦은 출입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출사관은 이황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서인인 그가 남인 학파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이황을 존숭했던 것은 이황의 경우 동서로 분당이 나누어지기전의 인물이었다는 따라 위상의 변화를 보였다. 현종 14년(1673년)에는 그래도 현종과의 관계가 고려되어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인선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2차 예송이 대두되었고 남인이 승리하게 됨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숙종1년(1675년) 송준길은 삭탈관직을 당하였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1680년)으로 서인이 집권함으로써 관작이 다시 복구되는 등 영욕이 교차되어 당인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숙종 7년(1681) 회덕의 숭현서원에 배향되었고 그 해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문집도 간행되었다. 숙종 46년(1720) 그의 연보가 완성되었고 영조 32년(1756)에는 문묘종사(文廟從祀)가 결정되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곳곳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는데, 동암서원 묘정비·숭현서원비·박팽년 유허비 등 많은 유품을 남겼으며 저서에 『동춘당집』·『어록해』등이 있다.4.송준길의 사상송준길은 존심과 인애를 위주로 하면서 예를 돈독하게 실천한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그가 쓴 송준길의 에서 "인애를 주로 삼고 예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논리가 지극히 바르고 은의가 두터워서 후세의 법도가 될 만 하였다." 라 하였고, 효종은 "(송준길은) 마음을 잡아 지킴이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이 한쪽으로 편벽 됨이 없다" 라 하였다. 송준길은 공자·맹자·주자로 전승되어 온 도통의 학맥을 존숭하였고, 율곡(이이)-사계(김장생)-신독재(김집)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의 학문체계에 충실하였다. 특히 예학에 주력하여 스승 김장생으로부터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 라는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김장생의 『억예문해』를 검토해 보면, 전체 542개 문항 중 44.3%에 해당하는 무려 240개 문항에 대한 문례가 송준길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문례의 내용이 매우 수준 높은 것인 점으로 보아 예학적 수준을 감지할 수 있다. 훗날 현상윤은 "(송준길의) 학문은 송시열과 경향을 같이 하여 주서와 심경과 근사록 등서에 치력하
    인문/어학| 2003.06.08| 6페이지| 1,500원| 조회(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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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일본부
    임나일본부※목 차※1.머리말2.일본측 견해3.한국측 견해4.맺음말1.머리말임나일본부는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의 의견이 대단히 상이하며, 또 서로의 역사를 희생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어떤 면에서는 팽팽히 맞서,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실제 당시의 역사적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빠져있는 느낌을 주며, 어느 것이 사실이냐에 무척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나로써는 남북한·일본 두 나라 학자의 주장과 의견, 그리고 그 논지를 파악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서 임나일본부설의 제기에서부터 이후의 학설을 정리해 보겠다. 또 두나라가 임나일본부의 증거로서 논란을 벌이고 있는 사료들에 대해 고찰해 보고 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글을 맺으려한다.2.일본측 견해임나일본부설은 왜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에 가야 지역을 군사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성립시킨후, 4세기 말 5세기초에는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대결을 벌이고, 5세기에는 왜의 한반도 남부 영유를 중국남조 송(宋)에게 인정받는 등, 임나일본부를 중심으로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흠명천황 23년(562)에 이를 신라에게 빼았겼다는 일본측의 주장인데 그들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규정이 애매한 임나일본부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몇가지 사료를 택하고 있다. 첫째, 광개토 대왕비문이다. 여기서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기사는 “신묘년(辛卯年)기사”이다. 그 본문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래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洙軍 討伐殘國”(「」안은 불분명한 글자, □는 보이지 않는 글자)로 되어있다.일본학자 스에마츠의 해석은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영락)6년 병신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라고 해석하고 있다.두번째, 일본서기를 들수 있는데,《일본서기》는 720년 천황의 권위가 확립된 이후 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역사서로서 신빙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후대의 윤색도 적지않게 포함되었으며, 특히 5세기 이전 기록은 일본학계에서도 신화적 전설로 간주되었다. '일본부'라는 명칭부터 모순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경에 비로소 성립되었는데 기년이 2週甲(120년)이 인상되어 있다는 점. 동시기에 편찬된 《古事記》에는 이와 관련되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를 전적으로 신빙하는 것은 문제이다. 일본서기는 역사성 자체를 배제하고 있다. 그 지명이나 인물대신에 그들의 지명과 인명을 삽입하여 그들의 역사로 치장하고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납득이 어려울 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부분이 허다하다.세번째로,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보존하고 있는 칠지도이다. 이것은 75센티미터로 칼날 양측에 교차된 세걔의 날이 붙어있는데 일본사학에서는 여기에 새겨진 앞면에 34자, 뒷면에는 27자, 총 61자의 명문에서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앞면에는“泰和 四年 四月 十一日, 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世)벽百兵, 宣供供侯王□□□□作”이라되어있고, 뒷면에는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라고 쓰여있다. 일본측의 초기 해석에 의하면 이 명문의 연대는 모두에 나오는 연호를 '泰和4年'으로 읽어 동진의 太和4年으로 비정하면서 369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供供侯王'이라는 구절에서 供을 '바친다'라고 해석하여 을 주장하였고, 그후 수정된 해석에서는 '侯王'을 '제후인 왕'으로 보아 동진이 백제를 통하여 제후인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을 제출하였다.3.한국측 견해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는 일본부를 두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우리측은 "5세기까지 일본열도에는 통일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한반도에 진출할수 없었다."는 것이 한국측의 견해이다.앞서 언급한 스에마츠의 주장에 대해 정인보는 주어인 고구려가 문장 중간에 생략되었다고 보아,“왜가 신묘년에 오자,(고구려가)바다를 건너 (왜를)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해석했다.정두희,이기백은“왜를 (고구려가)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칠지도의 경우 일본측은 백제가 왜왕에게 봉헌하였다는 백제봉헌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측 견해는 이와 상반된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하였다는 백제하사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표면의 '侯王'과 이면의 '百慈王(?)世子奇生聖音(?)'이 倭王'과 동등한 위상을 갖고 있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김태식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 사료인 는 8세기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 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하여졌다고 보이고,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이나 왜국전의 문헌 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았다.
    인문/어학| 2003.05.10| 3페이지| 1,500원| 조회(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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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고대사] 로마 공화정의 발달과 몰락 평가A좋아요
    로마 공화정의 발달과 몰락◎목 차◎1.머리말2.초기 로마사회:왕정기3.공화정의 발달1)공화정의 구조2)신분투쟁4.영토팽창과 그 영향1)이탈리아의 통일과 조직2)해외로의 팽창과 그 영향5.공화정의 위기와 몰락1)그라쿠스 형제의 개혁2)내란과 몰락6.맺음말1.머리말로마 공화정기에 로마인들은 무력에 의해 지중해 세계와 그 광대한 후배지를 정복하여 통일적으로 통치하였다. 로마인들은 무력에만 능하였던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평화를 유지하고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함으로써 법률과 행정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로마인들은 예술, 건축, 문학, 철학, 등에서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업적을 모방하고 더욱 정교화한 결과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업적을 모방하고 더욱 정교화한 결과그리스인의 유산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본문은 도시 로마의 기원에서부터 공화정의 몰락까지 로마사의 주된 흐름을 왕정과 공화정 체제의 특성과 공화정의 발달과정을 고찰해가면서 서술해가기로 하겠다.2.초기 로마사회:왕정기도시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이름에서 기원하였으며 라틴족의 로마인들이 후에 로마의 기원이 된 팔라티움 언덕을 기준으로 한 인접 구릉지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까지 소급된다. 농경과 목축을 행하던 촌락민들이 기원전 750년경에 이르면 장차 도시 로마를형성할 몇몇 구릉지대를 각각 장악하였다. 이들 개별 촌락들이 성정하여 기원전 7세기 동안에 하나의 도시국가 로마로써 통합된다.그 후 도시 로마는 팔라티움 언덕의 남부와 동부 및북부의 정착지들을 흡수하여 규모가 커지게 되었으며 일정한 경계에 의해 주변영토와 구분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기원전 500년경까지의 로마는 왕정체제하에 있었다. 왕정의 실체를왕과 원로원 쿠리아회를 중심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왕은 초기 로마국가의 통일과 권력그리고 권위를 상장하였다. 왕위는 종신직이었으나 세습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또한 왕은 스스로 신의 후손임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왕은 그리을 행하는 민주적인 민회와는 거리가 멀었다.쿠리아회는 혈연의 끈을 통해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민회로서 수동적인 기구일뿐이었다. 또한 쿠리아회는 왕이 취임할 때 신의 전조를 확인하고서 왕에게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의식을 행하고 충성과 복종의 맹세를 하였다. 초기 혈연적 유대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쿠리아회는 시민의 유언과 양자상속을 확인하는 기능도 지녔다. 이 초보적인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 이르면 정치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된다.왕정의 정치사회적 제도들은 기원전 6세기에 씨족과 원로원의 권한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된다. 로마는 에리투리아인들의 영향을 받아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급속히 발달하였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폴리스가 되었다. 에리투리아 도시들을 모방하여로마에 많은 공공건물과 광장이 세워지고 외국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거주지역이 마련되고 왕정말기 카르타고와 해외무역을 하기에 이른다.이런 바탕에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군사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왕은트리부스별로 시민을 등록하고 군대소집과 징세를 위해 시민들의 재산과 연령등을 면밀히 평가하는 센서스 제도를 확립하였다. 세르비우스왕은 재산 상태에 따라 스스로 무장한 전체시민들로부터 병사들을 소집하는 새로운 시민군제, 즉 중무장보병 밀집대의 전술을 도입하였다. 강력하던 왕정은 기원전 6세기말경에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이행하게 된다.기원전 525년경에 에트루리아인들의 도시연맹은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 쿰마이를 장악하려다군사적으로 심각한 패배를 당하게 되어 육상통상의 단절을 가져왔고 이민족의 침입으로교역 중심지로서 번성하던 로마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가하게 되어 과잉인구와 실업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왕의 억압적 통치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으려 봉기하여 왕을 추방하였을 것이다.3.공화정의 발달1)공화정의 구조참주처럼 군림하던 왕을 추방한 로마의 귀족들이 왕정을 폐지하고 수립해간 정체가 공화정이었다. 공화정이라는 말은 '공공의 재산' '공공의 일'을 의미하였정을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왕정기부터 귀족들의 협의체로서 기능하던 원로원은 공화정 초기에는 왕정기처럼 콘술의순수 자문기관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원로원은 헌정상으로 기원전 339년까지는 민회에서 통과된 법을 비준하고 선출된 정무관들을 인정하는 권한을 지녔다. 또한 원로원은 재정통제권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이나 공공사업에 등에 대한 국고의 지출을 결정하였다.공화정기의 민회로서 켄투리아회가 주목된다. 공화정 초기에 가장 중요한 민회가 된 켄투리아회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왕의 군사적 개혁결과 창설되었다. 켄투리아회는 선거와 입법 및 재판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즉 켄투리아회는 임페리움을 지닌 정무관인 콘술에 의해 소집되어 고위정무관들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켄투리아회는 제출된 법안에 대한 가부, 전쟁이나 평화에 대한 결정, 대외조약 비준 등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또한 범좌에 대한 재판을 하였다. 그런데 켄투리아회에서 시민 개개인의 투표는 쿠리아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속한켄투리아 집단의 찬부를 결정할 뿐이었고, 한 켄투리아가 한 표를 나타내는 집단 투표제가이용되었다. 켄투리아회는 모든 등급의 시민을 포함한 민회였지만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고실제로는 상위 켄트리아들에 속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부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결국 로마 공화정에서의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란 지배귀족들간의 효울적인 권력분산의 특성을 보여준다.2)신분투쟁평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의 요구가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기원전 494년 정치군사적 투쟁의 형태를 띤 최초의 분리운동을 전개하였다. 평민들의 군사적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귀족들은 국가와 군대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기원전 494년 평민출신의 10명의 호민관직이 기원전 471년에는 트리부스 평민회가 창설되었다. 초기에 호민관직은 재산과 야심이 있는 평민들이 보유하게 되었다. 트리부스 평민회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되는 호민관은 평민들의 엄숙한 서약에 의해 그 신하였다. 또한 부채노예제를 인정하고 채권자들의 권리를 엄격히 규정하였으며 정해진 기간내에 부채를 변제하지 못하는 채무자를 나포, 포박하거나, 살해. 외국에 노예로 매각하는것등은 귀족들의 재산권을 옹호하였음을 보여준다.로마가 일련의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중무장 보병의 부유한 평민은 그들의 역할에 맞는 정치적 권이를 요구하게 되고 오랜 정치적 투쟁 끝에 귀족들이 평민의 지도자들과 타협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 개혁이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다. 이 법은 칸슈러 트리뷴은 선출하지 않고 다시 매년 2인의 콘술을 선출하며 그 중 1인은 반드시 평민출신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가난한 평민들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재도모 하였으나 부채노예에 대한 가혹한 법은 폐지되지 않았다. 고위 정무관을 역임하고 나서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게 된 유력한 평민들은 오비니우스법을 통해 원로원내에서 그들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법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평민출신 원로원 의원들이 혈통귀족 출신의 원로원의원들과 나란히 원로원을 구성하고 동일한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그 후 기원전 326년의 포이텔리우스 법은 12표법에서 명백히 규정되넜던 부채노예제를 폐지하였다. 유력한 평민들의 최종적인 정치적 목적은 신분투쟁의 종결로서 간주되는 기원전 287년경의 호르텐시우스법에 의해 달성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의 내용은 귀족과 유력한 평민들이 위기의 순간에 최종족으로 타협한 결과였음을 보여준다.4.영토팽창과 그 영향1)이탈리아의 통일과 조직로마인들은 신분투쟁기동안 자신들의 국제를 형성해가면서 일련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기원전 493년에 로마인들은 라티움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라틴연맹과 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동맹의 양 당사자가 병력의 절반씩을 제공하고전리품도 절반씩 나누기로 한 이 동맹의 체결은 로마의 팽창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이었다. 한편 강력하던 에트루리아 인들이 쇠퇴한 것 시작한 것 또한 로마의 전략적 지위를크게 강화시켰었지만 로마 민회의 투표에 참여할 수 없던 반시민의 도시들 - 이들 도시는 자치권이 허용되었지만 로마가 요구하면 군대를 제공해야 하는 등 완전한 로마시민들이 가진 부담을 지녔다 하여 'municipes'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로마는 여러 동맹국들에게 서로 다른 의무를 부여하고 그들 상호간에 동맹을 체결하지 못하게 하는 등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정치원리에 입각하여 성공적으로 이탈리아를 통제하였다. 특히 로마가 다양한 형태로 로마시민권을 개방한 것은 외교적 조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로마시민으 증가를 위한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강력하고 융통선 있는 정책을 통해 형성된 이탈리아 동맹체가 로마를 지중해 세계에서 주요 강국의 하나가 되게 하였고, 그것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2)해외로의 팽창과 그 영향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33년 사이에 로마 공화정은 여러 면에서 전성기였다. 이 기간에로마 공화국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으로 하여 점차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거의 끊임없는 계속된 전쟁들은 단기적으로 사회적 안정에 기여하였다.특히 새로운 정복지의 일부에는 식민시들이 건살되었고그것은 토지를 갈망하는 빈민들을 만족시켰다. 식민시 건설의 결과 수만명의 로마인들이 새로운 식민지들로 이주하였으며, 그것은 라티움 지역의 토지부족을 완화시켰다. 제 2차 포에니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한 후 로마의 군사력은 동시대 그리스인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 정복의 결과 지중해 세계의 거대한 富가 로마로 유입되었고 富의 유입은 부자와 빈민의 차이를 더욱 증대시켰다. 기원전 218년의 클라디우스법은 원로원 의원들이 상행위를 위해선박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기원전 170년까지 일련의 식민지건설은 몰락한 농민들을어느 정도 흡수하였고, 이 시기에 주로 북부 이탈리아에 건설된 식민지들은 소농층의 육성을 위한 목적에서 건설되었다. 그러나 그 후 식민지 다.
    인문/어학| 2003.05.02| 7페이지| 3,500원| 조회(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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