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시, <아들에게> 읽기아들에게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鈍(지둔)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入場(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구근) 같은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다 빈 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드러내지 않기 - 사라짐의 기술』(위고, 2017)은 처세술에 관한 책이다. 처세술? 저 흔한 ‘자기 계발서’에 지친 사람들에 한해서만 정확히 이 책은 ‘처세술’에관한 책이다. 우리의 고전들이 그러하듯, 이 책을 통과한 우리들은 홀연, ‘다른’ 삶의 가능성에 마주하게 된다.‘드러내지 않기’는 표면적 단어의 뉘앙스가 풍기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절연’ 혹은‘세상을 배척하는 일’이 아니다.
1.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어떤 ‘경계’에 관한 영화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은 헤어지지 않은 상태’와 ‘이제 곧 헤어지게 될 상태’라는 두 의미를 동시 에 품고 있다. 이쪽이면서 저쪽이고 또한 이쪽이 아니면서 저쪽도 아닌 것들은 그래서 조금 불안하고 많이 위태로운 것들이다. 이 짤막한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감상평이다. 글 자체가 스포일러이니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아래를 보지 않을 결심을 하시기 바란다. 2. ‘경계’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 사이에 존재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산에서 시작해서 바다에서 끝난다. 그 공간에 '삶과 죽음'이라는 이항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서 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대사가 직접 등장한다.) 영화는 탕웨이 의 남편이 산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하는데 사망 시간의 단서가 되는 시간은 ‘오전 10시’다. 이 시간 역시 어떤 경계의 시간이다. 아침도 아닌, 그렇다고 낮 도 아닌, 어떤 경계의 시간. 박찬욱은 이런 식으로 사소한 장치부터 거의 모든 영화적 장치들을 ‘사이’와 ‘경계’에 두고 있다. 3. 영화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부산에서의 박해일의 후배 형사(고경표)가 ‘의심이 라는 안개’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포에서의 박해일의 후배 형사(김신영)는 ‘믿음이라는 안개’에 휩싸여 있다. 후배 형사들이 하나의 확신에 사로잡혀 보지 못하는 것은 사건뿐 만이 아니다. 고경표든 김신영이든 두 사람의 ‘진짜 관계’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영화 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의심과 믿음 그 사이 어딘가 박해일과 탕웨이의 사랑은 안개처럼 떠다닌다. 사랑은 이렇게나 다루기 가 어려운 물질이다.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 겠는데 너희들은 좀 알겠니?’.
죽음의 지형도 - 기형도論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기형도프롤로그대체로 인간은 세계와 동사(動詞)로 접속한다.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가로놓인 세계 속에서 노동하며, 투쟁하며, 사랑한다. 노동과 투쟁과 사랑의 대상은 자신이 마주하는 대상 세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로 여럿 동사들에 의해 세계와 접속하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시인에겐 여럿 동사들이 ‘쓴다’라는 행위로 종합된다는 사실이다. ‘쓴다’는 행위는 대상세계에 투사된 서정적 자아의 감각과 인식을 그 자신에게 회수하는 노동의 행위이며, 세계와 합치되지 못하는 인식과 감각의 불협화음을 이미지와 운율, 화법 등 여럿 시적 장치에 의해 돌파해나가는 투쟁의 행위이며,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사랑하는 행위이다.김수영이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의 ‘온몸’은 바로 이러한 종합된 행위로서의 ‘쓴다’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했을 때의 ‘온몸’은 어떠한 비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온몸’으로 세상과 접속한다는 의미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이러한 사정은 기형도에게서 가장 극렬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기형도 시에 도저하게 흐르는 세계에 대한 부정의식은 대체로 ‘쓴다’는 행위로 모아지며 그의 시에 특징적으로 표출되는 죽음에 대한 집요한 의미의 그물망은 ‘쓴다’는 행위가 다다른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약하자. 기형도에게 있어 ‘쓴다’는 말은 노동하며, 투쟁하며, 사랑한다는 의미였다. 기형도는 끊임없이 쓴다는 행위를 통해 세계의 변증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변증이 실패로 돌아간 자리에 ‘죽음’의 이미지와 의미들이 소란한 고요로 남게 되었다.세계, 변증이 불가능한기형도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소멸의 대상들과 그 소멸의 징후 앞」)을 가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는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 대개의 부정(否定)이라는 것은 그 부정과 대비되는 어떠한 원형적 모태의 세계와 갈망의 세계를 갖게 마련이다. 가령 만해 시에서의 ‘님’의 세계, 백석 시에서의 유년의 고향, 초기 김지하 시의 민주주의, 이성복의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와 황지우의 ‘율도국’ 같은 세계 말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그러한 자아와 세계가 합일되는 세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이 불가능하고 시인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여행자」)라는, 변화에의 열망에서 패퇴한 좌절과,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라는 아픈 독백을 거쳐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라는 부정적 자기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시인의 인식, 그 소름끼치도록 견고한 묵시록의 종지부가 바로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가 아닐까? 기형도의 시에서, 기형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고통의 땅에 자신의 발을 묶은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오래된 서적」)라고 말한다. ‘독서행위’는 기형도가 절망의 세계에서 하나의 탈출구로서 자주 문을 두드렸던 곳으로 보이는데 그곳조차 ‘죽은 자들에 대해 추억이 바쳐지는 곳’(「흔해빠진 독서」)이다. 그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흔해빠진 독서」)의 궤적을 읽는 행위는 곧바로 시인 자신과 동일화되는데, 다시 한번 시인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영혼‘(「오래된 서적」)을 발견한다. 이러한 일련의 ’독서시편‘들은 타자와의 소통 불가능성을 더욱 공고하게 시인이게 각인시킨다. 시인의 고립은 심화된다.‘쓴다’의 지형도이 견고한 죽음의 세계에서 시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쓴다’라는 행위이다. ‘쓴다’라는 행위는 개별자로서의 주체종이는 푸른색이다.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전문.시인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포용하는 음악의 이미지는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의 경험을 가능케한다.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는 행위는 ‘사랑을 잃고’ ‘쓰는’ 행위와 정확히 대응한다. 이러한 쓰는 행위는 ‘텅 빈 희망’속으로 시인 자신이 걸어 들어가는 행위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인 듯 보인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시인이 시인 자신을 투사하는 매개체, 즉, 자의식의 투영 공간으로서의 종이이다. 시인이 자신의 ’몸 전부가 가볍게 튕겨지는 때‘를 경험한다는 것은 ’푸른 종이‘ 위에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통째로 ‘쓰는‘ 것이다. 이러한 종이 이미지는 그의 등단작 「안개」에서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으로 나타나고 「조치원」에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하지만 이미 고통의 세계에 너무 익숙한 시인은 다시 한번 견고한 기억의 벽에 부딪친다. 그 기억이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와 같은 의식이다. 변증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기형도의 시세계는 더욱더 견고한 - 그 어떠한 것의 틈입도 거부하는 - 부정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부정의 세계는 ‘노인들’로 상징되는 ‘죽음’의 영역에 다름 아니고 그 노인들이란 다름 아닌 ‘병든 아버지(들)’의 세계이다.‘쓴다’의 지형도가 다다른 ‘병든 아버지(들)’, 즉 노인들의 세계는 변증에 실패한 시인의 의식이 다다른 지점이다. ‘쓴다’라는 행위를 통해 시인이 접속하는 세계의 군상들은 ‘누가 떠나든 죽든/우리는 모두 위대한 혼자’(「비가 2」)이며 시인은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라고 선언한다. 즉, 시인 자신뿌리를 두고 있고 이 ‘병든 아버지’가 확장된 것이 바로 ‘노인들’이다. 기형도에게 있어 ‘노인들’은 인간의 성숙한 양태로서의 존재도 아니고 생을 달관한, 그리하여 자상하고 너그러운 인간의 모습도 아니다. 다만 추악할 뿐이다.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전문.‘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 즉, 봄나무는 흔히 새생명의 등가물로 비유되지만 기형도에게 이러한 봄나무는 다만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죽음의 상관물로 작용한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세계에 자신을 위치시킨 시인은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자각한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은 ‘병든 아버지’에서 촉발된, 시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어두운 생의 파편들의 집합체이다. 가난하고 늙은 생명체, 즉,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시인을 지배하는 의식은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죽어 있는 것뿐’(「나무공」)이라는 도저한 부정 의식이다. 노인들의 세계는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고 이러한 고통 속에서 시인은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물 속의 사막」)고 쓴다. 이 견고하고 추악하고 낡은 세계가 ‘쓴다’의 지형도가 지시하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보이는 청년들’(「조치원」)과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書記’(「기억할 만한 지나침」)가 살고 있는, 고통과 불행이 유일하게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쓴다’는 행위가 지향하는 지점은 시적 자아가 세계와 투쟁하고 사랑하며 얻어낸 ’고통의 연대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쓴다’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목표이지만 기형도에게 있어 ‘쓴다’는 행위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갇혀 있게 하는’ 그런 의식으로 보인다. ‘쓴다’는 행위가 종국에는 시인 자신이 도저한 불행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행위로 보이는데, 이러한 행위는 불행하게도 어떠한 모색과 전망을 찾지 못하고 좌초하고 만다. 이 좌초된 의식 속에서, ‘불안의 짐짝들에게’ ‘감시당해온 불안’ 속에서 시인은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라고. 누추한 육체를 거느리고 있는 시인 자신, 그러니까 조로(早老)의 인식이야말로 ‘쓴다’는 행위가 귀착될 수밖에 없었던 귀결점이 아닌가 한다. 기형도에게 있어 삶 자체는 ‘긴 겨울’이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일’(「노인들」), 즉 죽음뿐이다.죽음의 지형도기형도에게 ‘쓴다’의 지형도의 입구는 가난한 유년 시절의 체험과 불구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세계의 견고한 부정성이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로 압축할 수 있는 노인들의 세계를 통과하여 ‘쓴다’의 지형도는 ‘죽음’이라는 출구로 완성된다. 일반적으로 타나토스 즉, 죽음에의 열망은 역설적으로 강렬한 생명력을 환기한다. 많은 시인들이 ‘죽음’을 이야기할 때 그 죽음은 ‘삶’을 통찰하고 죽음에의 열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환기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죽음이다. 즉, 죽음에 대한 의식은 삶의 의미를 되짚고 자신을 성찰하는 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고은이 ‘겨울 문의여, 죽음이 우리를 다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한다.
運命愛1. 소 개보통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운명 내지 운명주의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것, 우연적인 것, 그리고 창조적인 것이란 거의 말살되어버리고 마는 데 반해서, 니체의 의 사상에 있어서는 그 개인적인 것, 우연적인 것, 그리고 창조적인 것이 그대로 하나의 필연적인 것과 혼연일체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의 사상은 또한 그의 시적인 주서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제1편 제1장속에 표명되어 있는 하나의 정신적 최고단계이며, 창조적 정신단계의 상징으로서의 “신성한 긍정”이라는 구절과도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는 개념이라고도 보아지거니와, 저 스피노자의 라는 말과도 유사한 것으로 보아지며, 아울러 그것은 또한 개인에다 그 중심을 두고 있는 모든 역사관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니체는 그의 모든 자기에 관한 문제들을 이 사상에다 아주 밀착시켜 버렸던 것으로 보아진다. (박준택 저, 니체사상과 그 주변, 대왕사, 1990, p. 206)2. 원문인용새해에-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자기의 희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그 자신에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 역시 내가 오늘날 자신에게 원하는 것, 올해 나의 머리에 스치는 첫 번째 생각-즉 어떤 사상이 앞으로의 나의 생활에 토대가 되며, 보증이 되며, 달콤함이 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법을 더욱더 배우고자 한다. 때문에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다.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나는 추한 것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비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대체로 언젠가 나는 긍정만 표시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영숙 옮김, 즐거운 지식, 청하, 1989, 제4부 No.276)3. 해 설① 고대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운명관니체사상 속에 내포된 그 운명관의 형성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고대그리스 비극 속에 표현되어 있는 운명의 개념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물론 그가 아주 젊은 시절 필로로그로서 학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고대그리스 고전연구에 골몰했던 탓이라고 여겨진다.그러나 그 고대그리스 비극 속에 나타나 있는 운명의 개념 또한 매우 다의적인 것이어서 그저 일률적으로 언급할 수가 없는 터라고 하겠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표현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은 또한 호머 이전과 호머 이후와의 사이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즉, 호머의 작품에 있어서 나타난 운명, 즉 주로 Aisa, Moira라는 용어로서 표현되기도 하는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직접 작용된다고 하는 그 운명이란 신들의 의사와 아주 동떨어진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그것은 바로 그 신들의 의사에 반해서 그리고 혹은 그것을 아주 초월해서 있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은 아무래도 호머 이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호머 이후에 나타나는 운명은 主神 제우스로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뚜렷한 객관적인 것으로서 나타나 작용하는 존재였던 것이다.니체가 영향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고대그리스 비극 속에 나타나 있는 에 있어서 그것을, 즉 적극적인 생의 고양에로 지양되어지는 바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본다.② 니체의 소포클레스 이해와 해석니체는 소포클레스의 한 비극작품에 있어서 주인공 외디푸스 왕의 고뇌 속에 있어서 너무나도 심오한 인간적인 淨化의 과정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 때 운명은 하나의 어마어마한 초월적인 존재로서 표현되어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염세적인 분위기에서가 아니고, 주인공 속에 있어서 하나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성격을 매우 강력하게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즉, 비극에 있어서의 에 있어서 모든 고뇌를 견뎌내는 어마어마한 영웅적 성격은 바로 그가 가장 강조하는 점이라고 하겠으며, 동시에 그 고뇌에 의한 정화야말로 바로 그가 소포클레스 및 기타 비극작가들을 흥미있게 보는 점이라 하겠다.물론 그의 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있어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결코 어떤 외적인 운명을 그저 받아들여서 복종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숙명론이 아니다. 도리어 강렬한 자기 개체형성의 형식이 그의 심오한 운명애 사상이라고 보겠으며, 그래서 저 외디푸스왕은 이와 같은 운명의 가장 웅변적인 告知煮이라고도 보겠다. 그의 운명애는 우선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있어서처럼 모든 고뇌를 견뎌내는 영웅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보겠다.③ 니체의 초기작품에 나타난 운명관(1)「운명과 역사」: 이 논문 모두에서부터 벌써 반기독교적인 의문부를 던지면서 언급하기를 “자유의지는 구속없는 것, 자의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중략)....그러나 운명이란 하나의 필연성이다. ...(중략)... 운명은 자유의지에 저항하는 무한한 힘인 것이다. 운명없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마치 실재적인 것이 없는 정신이 惡이 없는 善처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대립이 비로소 고유한 성질을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 것이다.여기서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자유의지에 대립하는 하나의 필연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며, 그러면서도 운명을 자유의지에 대항하는 무한한 힘이라고도 보았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신은 죽었다”의 싹을 엿볼 수 없다 하겠고, 따라서 그의 운명론 또한 그리스트교적인 섭리와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기도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그의 운명관은 그리스트교적인 섭리사상에서 그 스스로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2)「자유의지와 운명」: 그는 “개인적인 자유의지와 개인적인 운명과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두 적대자인 것이다. ...(중략)... 자유의지는 ...(중략)...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말하며,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운명이라는 것을 무의식적 행동시에 우리를 인도하는 원리로 알고 있는 것이다....(중략)... 운명 없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며, 숙명론적인 원리는 인간을 자동기계로 만들어버릴 것이며, 숙명론적인 원리는 인간을 자동기계로 만들어버릴 것이며, 숙명론적인 원리는 인간을 자동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훗날의 로서의 그의 운명애의 사상의 싹을 여실히 엿볼 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이 초기 작품에 있어서의 그의 운명론도 그저 단순한 우연으로서만의 숙명 그것이 아니고 필연과 자유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운명론이라 하겠다.④ 긍정적 원리로서의 (1) 하이데거는 “1880년부터 1883년까지 니체는 자기자신을 발견하였다. 즉, ...(중략)... 자기의 사색의 결정적인 근원을 발견하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앞 절에 있어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의 운명애라는 용어가 맨처음 등장하였던 「즐거운 지식」의 제4서가 이루어질 무렵 그의 사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에 처해 있던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그의 모든 오늘날 문제시되는 사상들이 그 운명애사상과 더불어 형성되었고, 완성되어진 것으로 보아진다.(2) 야스퍼스의 말처럼 “니체의 운명론은 신에 대한 기독교적인 의지의 부자유와 같이 소극적인 표현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 세계에 있어서 인식된 모든 필연성을 포괄하는 본래의 드높은 적극성”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고, 또한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였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긍정적 운명관인 그 운명애사상에는 하나의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저 비극적 영웅에 있어서나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매우 의욕적인 역동성마저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보겠으며, 따라서 “운명애는 이른바 인식된 필연성 아래에 소극적으로 복종하는 대신, 오히려 운명의 필연성을 의식하는 자유로운 적극성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