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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케팅 조사과성에서의 성공사례와 실폐사례 비교분석(싸이월드 vs 프리챌)
    마케팅 조사과성에서의성공사례와 실폐사례 비교분석≪싸이월드 vs 프리챌≫< 목 차 >>Ⅰ. 기업소개 ...... 1Ⅱ. 기업현황 ...... 2Ⅲ. 마케팅조사1. 마케팅 문제정의 . 22. 상황분석 ......2-1. SWOT 분석 . 32-2. 환경분석 ..... 33. 의사결정문제 ...... 8Ⅳ. 마케팅 방법-바이러스 마케팅 vs D마케팅 ..... 11Ⅴ. 성공요인과 실패요인 ............... 14(모든 비교는 싸이월드 --> 프리챌 순서입니다.)Ⅰ. 기업소개< 싸이월드 >㈜싸이월드는 1999년 설립되어 꾸준한 인터넷 커뮤니티 서비스 운영을 통해 축적된 우수한 능력의 커뮤니티 기획, 디자인, 개발 인력이 포진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업의 커뮤니티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전문업체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싸이월드(www.cyworld.com)는 실명제 인맥 기반의 가상사회, 신뢰기반의 정보공유를 컨셉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도와주는 범용 커뮤니티 서비스이다.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정의하며 시작되는 인맥, 각종 모임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클럽,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보와 지인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도구인 미니홈피, 나의 기분과 감정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미니룸 등 아는 사람끼리 더욱 친해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싸이월드 커뮤니티 컨설팅은 싸이월드 서비스 운영과 50개 이상의 외부 커뮤니티 구축자 : 1200만명- 현 매출 : 1억 5000 (하루)- 2003 년 대비 2004년가입자 증가량 : 333%- 1주일 페이지 뷰 : 39억회(2005년 1월 둘째주 기준)- 회원 가입자 수 : 1000만 명- 커뮤니티 수 : 112만개(다음은 140만개의 카페)- 매출액 : 105억(2002년 상반기)Ⅲ. 마케팅 조사1. 마케팅 문제정의< 싸이월드 >-긍정적 측면미니홈피라는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과 프리챌의 유료화 선언으로 인한 고객 확보가 용이하다.-부정적 측면충성도가 높은 고객이 부족하며 대기업의 벤치마킹이라는 위험성이 따를수 있다.< 프리챌 >-긍정적 측면프리챌은 커뮤니티 서비스를 주된 기능으로 하는 사이트로 2002년 최고 전성기를 누렸었다. 회원 가입자 수 1000만 명에 커뮤니티 수만 112만개에 달했다. (당시 다음은 140만개의 카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챌은 다음보다 단시간에 이룬 성과로 당시에는 커뮤니티에 대한 고객의 충성도가 훨씬 높았다.)-부정적 측면2002년 당시 자본금 60억 자본잉여금 340억 합쳐서 출자금이 400억인데 결손금 누적액이 216억이니 절반을 까먹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운영비 마련을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2. 상황분석2-1. SWOT 분석< 싸이월드 >Strength- 아바타와 아바타 꾸미기- 커뮤니티- 컨텐츠(스퀘어, 게시판 등등)Weakness- Privacy Communication,-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미약- 고객 행태상의 이슈Opportunity- 커뮤니티사이트의유료화 선두주자- 광고효과Threat- 시장 환경- 대체제의 존재< 프리챌 >Strength- 고객이 자신만의 공간 미니홈피-?선물을 통한 유대감 강화-?다양한 아이템의 제공-?관계위주의 서비스-?전자화폐 - '도토리Weakness- 기능 인지도 부족-?불안정한 서버 시스템-?보안의 문제-?높은 충성도의 고객이 부족-?프라이버시 문제Opportunity- 커뮤니티 솔루션에 대한기업체의 수요증가 - 제휴 붐- 온라인 커뮤니티의 인기, 충성넘어서 싸이월드의 명칭과 디자인만 조금씩 변형시킨 정도였다. 미니홈피와 마이홈피라는 명칭부터 비슷하고, 미니홈피에 들어가는 내용, 디지털 선물과 선물명, 2개의 캐릭터가 주인인 선물몰 등 세부적인 사항까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유사서비스로 보기 어려운 점은 프리챌이 이 서비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비스의 이름을 싸이월드와 같이 '미니홈피'라고 한 것에 있다. 이것이 서버에 올려진지 3시간만에 삭제됨으로써 분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에 대해 싸이월드 측은 프리챌의 '마이홈피 서비스'에 대한 서비스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싸이월드는 ?마이홈피 서비스는 지난해 9월부터 싸이월드가 제공 중인 미니홈피 서비스의 기능 및 배열 등 독창적 편집저작권을 표절"했으며 "벤치마킹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노력에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불건전한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싸이월드는 특허를 신청해도 조금만 변형하면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기 때문에 BM특허를 비롯한 어떤 형태의 법적 보호 장치도 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저작권 문제 역시 인터넷 서비스의 구성과 디자인의 유사성, 즉 사이트 기획이 저작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없다. 또한 프리챌은 법무법인을 통해 확인한 결과 저작권법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싸이월드는 자사 사이트를 '도용'했다고, 프리챌은 '벤치마킹' 수준이라 대치되던 주장을 하던 것이 결국 법적 공방으로 치달았다. 이 사건을 통해 '기획의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으며 싸이월드는 신생기업에게 불리한 법적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3) 사회적/문화적 환경사회, 문화적인 추세에 발맞춰 아바타가 한창 인기를 누렸지만 요즘은 이에 대한 흥미가 점점 가라앉고 있다. 이제 네티즌은 좀더 개성적이고 참신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만든 또 하나의 자기인 사이버 분신인 아바타는 이제 더이상 네티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이러한 네티즌의 요은 회원 수를 감당할 만큼의 빠른 서버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여 접속이 지연되거나 오류가 잦아서 이용자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 다음 까페는 시장에서 여섯 가지의 경쟁적인 위치 중에 지배적(dominant)이고 유능한(strong)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드림위즈드림위즈는 일상적인 일과 생활에 필요한 e-Life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탈서비스이다. e-Life 서비스에는 이메일, 메신저, 웹데스크, 검색, 클럽 등이 속해 있다. 보편적인 생활 정보와 서비스를 보다 편리하게 연결하고, 회원 개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능동적이고 지능적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드림위즈의 목표이다. 이메일 사용자들을 통해 클럽 사용을 유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낮은 인지도를 얻고 있다. 또 평범하고 진부한 컨텐츠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드림위즈는 기존 회원들의 영향으로 업계 2위라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프리챌 커뮤니티프리챌의 탄생 기반은 커뮤니티이다. 여기엔 게시판을 비롯해 20여 개의 기능이 제공되며 회원별로 권한을 따로 둘 수 있는 5단계 등급 관리 시스템이 포함되고, 커뮤니티 회원간의 편안하고 빠른 의사 소통을 위해서 e메일, 쪽지, 메신저, e카드 등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툴을 제공하고 있다. 프리챌의 백미는 커뮤니티라고 할 정도로 프리챌은 커뮤니티를 보다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 전문 사이트라는 인식과 함께 커뮤니티 이용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던 프리챌은 지난 해 11월, 유료화로 전환함과 동시에 많은 커뮤니티 회원을 잃었다. 이 때 감소한 회원 대다수가 다른 경쟁사로 옮겼는데 그 중 싸이월드가 대표적인 싸이트이다. 그러나 프리챌은 유료화 이후에 양질의 서비스로 높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회원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다.< 프리챌 >(1)내부적 환경커뮤니티가 핵심, 단기간에 최고 전성기(2)경제적 환경2002년 출자금 400억, 결손금 216억(3)사회9월 프리챌의 하루 방문자 수는 싸이월드의 6배인 180만명이었다. 누구 못지않게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리챌은 지금은 싸이월드가 메리트를 갖고 있는 커뮤니티 서비스의 세계 최강자였다.프리챌은 2002년 10월 회사의 운명을 바꿔놓을 ?위험한 도전?에 나선다. 110만개에 이르던 커뮤니티의 주인들에게 ?사용료를 내든가 아니면 방을 빼고 나가라?고 윽박지르며 홈페이지에 오롯이 쌓인 회원들의 ?추억?(글과 사진)을 담보로 매달 3000원의 월세를 받겠다고 천명한 것. 프리챌의 유료화 선언은 포털업계 전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비스 유료화는 포털업체들이 언젠가 이뤄야 할 공통의 관심사일 뿐더러 총대를 맨 프리챌이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볼거리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기대와 달리 프리챌은 처참하게 무너져버렸다. 초기엔 전체 커뮤니티의 40% 정도가 유료화에 참여하는 등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커뮤니티들의 활동이 떨어지고 추가 이탈이 이어지면서 하루 방문자 수는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전제완 당시 사장이 증자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러 구속되면서 프리챌은 일반으로부터, 또 언론으로부터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했다.깜짝 놀랄 서비스는 있을까프리챌의 유료화 선언 자체는 지금도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고객의 추억을 담보로 무리하게 추진된 유료화의 절차와 방법은 ?실패학 교과서?나 다름없다. 소비자들로부터 정이 완전히 떨어졌다는 반응을 듣고 있는 것. 웹칼럼니스트 양석원씨는 ?다른 곳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유료화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돈 내기 싫으면 나가라는 식의비감성적 접근도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꼬집었다.프리챌을 이탈한 네티즌들이 대거 똬리를 튼 곳이 바로 싸이월드다. 프리챌 회원들을 하나둘씩 빼앗아나간 싸이월드는 프리챌이 선택한 길과 정반대로 갔다. 평생무료 서비스를 발표하고 나선 것. 지금도 싸이월드는 아바타 도토리 등 프리미엄 서비스에 대해서만 과금을 한다. 프리챌의 실패를
    경영/경제| 2007.07.01| 17페이지| 2,000원| 조회(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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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방위정책의 변화
    Ⅰ. 들어가면서일본이 자위대의 활동 범위와 그 역할을 과거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확대?강화시키고 있고, 그에 따른 관련법의 정비에 착수함으로써 일본의 방위정책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20세기 전반기에 군국주의자들의 주도에 의하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근성을 드러내더니, 그 후반기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건설에 주력하여 집단적인인 중상주의국가로서 경제대국을 추진한데 이어 이제는 세계적인 기술.경제 대국으로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휴의 근대화 과정에서 항상 군사적인 기습공격으로 빈약한 자원을 보충하여 경제를 발전시켜 왔고,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지원하에 경제발전 우선정책을 곳하여 이제는 미국과 유렵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일본은 그에 걸맞는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를 지향하고 있다.일본은 9. 11 테러사건에 대한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공격을 자위대가 지원하기 위한 ‘테러 대책 특별조치 법안'이 2001년 10월 18일 중의원을 통과시켰고, 이어 10월 29일에는 참의원을 통과하여 성립되었다. 또한 같은 날 일본 내 미군 시설 등을 자위대가 경비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위대법’ 개정안과, 의심스런 선박에 대한 선체 사격을 허용하는 ‘해상보안청법’ 개정안도 참의원을 통과하여 성립되었다. ‘테러 대책 특별조치 법안’의 중참 양원 통과는 자위대의 전시 해외파병의 길이 열렸다는 점과 ‘신가이드라인’에서 논란이 되었던 전수방위원칙의 포기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좀더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의 방위정책에 대한 분명한 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자 중의원 ‘헌법조사회’는 10월 25일 전쟁 포기와 전력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9조 문제에 대한 검토를 처음으로 시작하였다.또한 일본 정부는 2001년 12월 22일 동중국해에서 발생한 괴선박 침몰사건을 계기로 연안경비를 강화하기 위한 법 정비와 아울러 유사사태(일본에있다.(1)전수방위전수방위란 상대방으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 비로소 방위력을 행사하고, 그 방위력 행사의 형태도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도로 제한한다는 것이다.(2)국사대국이 되지 않는다.이는 자위를 위한 필요 최소한도를 넘어 타국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일본이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3)비핵 3원칙의 견지이는 핵병기를 보유하지도, 제조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가리킨다.(4)문민통제의 확보이는 군사에 대한 정치 우선, 또는 군사력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정치통제를 가리킨다.2. 방위정책의 실제그러나 위와 같은 일본의 방위정책의 기본이 실제로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우선 전수방위에 대해 알아보면 일본 자위대의 해외임무 확대와 더불어 자위대의 조직 및 장비가 현저히 변화하고 있고, 첨단 장비로 무장된 긴급 출동부대의 창설을 서두르고 있으며 해상타격력 강화와 장거리 보급능력 강화 등 지역분쟁 대처형 으로 군대의 조직과 장비를 정비하고 있다. 또한 타 지역에서의 작전을 고려한 조직의 편제 및 장비의 강화와, 위와 같은 장거리 수송능력과 작전 능력의 강화를 위한 군사장비를 갖추는 등 전수 방위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군사대국이 되지 않겠다는 원칙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래 국사대국이란 용어자체도 정확한 개념정의가 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그 기준이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군사정책 변화는 미국이나 러시아에는 위협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을 비롯한 기타 국가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나머지 비핵 3원칙과 문민통제원칙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Ⅲ. 방위정책의 변화 - 적극적 방위정책기(1990년 이전)일본의 방위정책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하에서는 일본 방위정책의 변화과정을 소극적 방위정책기(1990년 이전)와 적극적 방위정책기(1990년 이후)로 나누어, 각각의 방위정책의 내용 및 배경 등을 알아본다.1. 소극적 방위정책의 요인(1) 국제적. 특히 한국, 북한, 중국 등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하였던 국가들은 끊임없이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방위정책의 변화는 물론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일본의 정책노선이나 국가적 성격에 대해서까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2)국내적 요인첫 번째는 평화헌법이라는 법적 제약 요인이다. 즉 일본국 헌법 제9조에 의해 일본 자위대의 활동이 전수방위로 제한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금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두 번째 요인은 정치적 제약 요인으로 사회당의 존재이다. 소위 ‘55년체제’ 하에서 사회당은 혁신정당으로 자민당의 보수적 정책노선을 상당 부분 견제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담당하였다. 특히 방위정책에서 미?일 동맹과 자위대의 군사적 성격을 비판하는 자세를 오랫동안 견지하였고, 특히 개헌을 통한 자위대의 위상 제고나 방위력 강화에는 강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여론을 조직하고 리드함으로써 정부의 개헌시도나 방위력 강화 노력을 무산시켰다.세 번째로는 제도적 제약 요인으로 중선거구제 선거제도이다.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후보자들이 후원회 조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선거에 임하게 된다. 그럴 경우 후원회는 개인이나 중소기업 경영자, 건설업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후원회 회원들의 이익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라 방위력 증강이 필요하게 된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Kent Calder 1988 : 10장).네 번째로는 경제적 요인으로, 일본국민들은 평화헌법과 미?일 동맹체제 하에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함으로써 현상에 만족하였다는 점이다. 즉 일본국민들은 60년대 이후 고도성장과 70년대 이후 안정성장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정치적 안정과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됨으로써 개헌이나 방위력 증강 같은 기존 제도나 정책의 변화를 원치 않았다.다섯 번째 대하여 냉전체제하에서의 동서대립의 격화가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고, 특히 소련의 조재가 일본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방위력 정비계획에서 목표로 하는 방위력도 이러한 위협에 대처 할 수 있는 대항형의 ‘소요방위력’을 화보하는 것이었다.(2)방위계획의 대강이어 1976년에는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시행 될 ‘방위계획의 대강’이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일본정부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은, 동서간의 무력충돌이나 대규모 무력분쟁의 가능성은 적고, 또한 한정적 무력 분쟁의 가능성은 있으나 미 . 소 . 중의 균형적 관계와 미 . 일 안보체제는 국제관계의 안정유지와 일본의 안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본이 보유해야 할 방위력에 관해서도 군사적 위협에 직접 대응하는 방위력보다는, 스스로가 힘의 공백을 이루어 일본 주변 지역에서 불안정 요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독립국으로서의 필요 최소한도의 기반적인 방위력을 보유한다는 구상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방위계획의 목표는 한정적이고 소규모의 침략에 유효하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방위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1990년 이전의 일본 방위정책은 이렇게 국내외적인 제약요인, 때로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적극적 방위정책의 추진을 어렵게 만들었다.Ⅳ. 방위정책의 변화 - 적극적 방위정책기(1990년 이후)지난 수년간 보여준 일본의 방위정책은 그 변화의 방향성과 속도에 있어서 이전 50여년과는 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분석 수준의 변수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있다. 냉전의 붕괴라는 세계정치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미 일본 방위정책의 변화는 예견된 것이라든가, 냉전기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정책 변화와 요구가 일본의 정책변화를 초래했다든가, 일본의 국내정치적 변화가 새로운 방위정책을 요구하고 있다는 가설들이다. 문제는 각 주장들이 논리적 일과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상호간 비교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이들 사이의 일관성 있 것은, 국제사회로부터의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영역에서의 역할 증대 요구로서 냉전의 종결로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도 국제사회를 불안정하게 한다는 점은 일본에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9. 11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이 신속하게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공격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군을 지원하기 위한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것은 걸프전에서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세 번째 요인으로는 이 시기에 일본에 대한 직?간접적인 안보위협이 가해졌다는 점이다. 1993-4년의 북한의 핵 개발과 NPT 탈퇴 소동으로 일본 국민들은 북한의 핵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구나 1998년 8월, 북한 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날아 태평양에 떨어진 사건은 일본국민들을 경악케 하였고, 뒤이어 1999년 3월에 발생한 북한 간첩선의 일본영해 침범사건은 일본의 위기관리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의 정치?군사적 대국화에 따른 경계심리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중국의 군비계획은 우려의 대상인 것이다. 대만의 민주화를 저지하는 중국의 행동, 일본의 항의를 무시한 중국의 핵실험, 실패로 끝난 장쩌민의 방일 등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위와 같은 중국에 대한 인식을 한층 강화시켰고, 일본은 물론 21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패권을 다투게 될 것으로 내다보는 중국에 대하여 상당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2)국내적 요인첫 번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일본인들의 의식 변화이다. 걸프전으로 촉발된 일본의 국제공헌 논쟁에서 국제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서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보통국가론은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국제질서의 개편 과정에서 일본의 상대적 지위 향상을 배경으로 점차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두 번째 요인은 정계개편에 따른 사회당의 몰락과 자민당 주도의 연립내각이다. 1993년 자민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급격한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민당있다.
    사회과학| 2007.07.01| 7페이지| 1,5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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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에 대한 나의 생각
    세계화에 대한 나의 견해세계화란 일반적으로 국가와 국가 간 국경이 무너지고 문화, 경제, 정치 등이 상호 침투하여 국민국가의 경계가 사라져 가는 현상을 말한다. 많은 미래 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세계가 “국경없는” 하나의 사회,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이른바 지구촌 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 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시대가 “교과서에서의 전망” 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현실” 이 되어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교통, 통신 분야의 급속한 발달은 지리적 거리의 장벽을 제거하면서 전세계가 동시적 생활권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사회’로 급속히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타결, WTO 체제의 규범 등 새로운 개방적 국제경제 질서의 대두와 함께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자본과 상품의 교류는 물론이고, 인력과 기술, 정보 그리고 문화의 이르기까지 인간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자유로이 교류, 교환되는 개방된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세계화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국가간 교류를 제한해 온 장벽이었던 국경의 개념이 점차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되면서 이미 예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제 미국이나 중국 등의 값싼 농산품, 호주의 쇠고기 등이 우리시장에 자유로이 진출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국가들의 거대한 기업들, 은행 및 보험회사들, 첨단장비와 의료기술을 갖춘 대형병원들, 교육기관들 등이 우리 사회에 진출하여 영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 및 중국 등지의 노동자들이 취업을 위해 우리 나라로 이동해 오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국민들과 기업들 및 상품들이 세계각국에 자유로이 진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과 기업들, 그리고 상품들도 우리사회에 자유로이 참여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세계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화가 가져올 경제적 이익이 경제 민족주의에 비해 월등히 크다고 말한다. 또 발전을 위한 어느 정도의 경쟁 체제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경영자문화사인 Kearney가 내놓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0개의 변수를 기초로34개국에서의 지난20년 간 세계화를 측정한 결과, 세계화의 속도가 빠른 나라일수록 경제 성장이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화의 결과로 부유층에 대한 불평등의 폭은 넓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성장의 가속화가 소득을 증가시켜 실제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점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예로 90년대 중국의 경우 세계화로 소득분배는 악화 됐지만 총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최저 빈곤층의 실질구매력은 30%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이 같은 세계화의 물결은 한편으로는 세계 각국의 국민들과의 상호교류와 이해를 증대시켜 장기적으로 인류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기업간, 국가간 관계를 세계적 범위에서 무제한적인 치열한 경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즉 가격과 품질, 기술, 서비스 등의 제 측면에서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과 국가들은 이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으며,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적 상황이라는 IMF 사태는 당시 한국이 추진해온 세계화가 얼마나 허구였나를 백일하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란 그저 국내 기업이 외국에 공장을 짓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쯤으로 여겼을 뿐, 무지막지한 개방압력, 혹은 무한 경쟁 체제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결과이다. 이는 정경 유착과 관치금융 이라는 고질을 고치지 않은 채 입으로만 외쳐댄 세계화가 한국을 외환 부도 직전까지 몰고 간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이나, 뿌리깊은 한국적 기업문화와 세계 경제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는 진단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IMF가 주문했던 재벌기업의 책임경영체제, 전면적 구조조정과 투명성 확보, 신속한 고용조정에 의한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전근대적 금융제도의 자율성과 효율성 제고 등은 세계화 시대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게을리 했거나 무시한 결과로 IMF 사태가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세계화라는 미명아래 글로벌 스탠더드와 초국적 자본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자본은 세계화의 당위성과 불가역성을 강변하고 있지만, 세계화가 초래한 어두운 그림자를 무마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세계화의 문제로 가장 먼저 지적 될 수 있는 것은 불평등의 문제이다. 세계화는 지난 10여 년간 성장과 발전을 지속시켜온 동인으로 자리잡았지만 그 혜택이 한 부분으로 집중되는 현상에 대한 반성과 시정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평등이 새삼스럽게 문제시되는 것은 세계화의 진행이 초래하는 문제점들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가속화하는 격차를 두고 위기의식이 거론되고 있고, 차츰 그 공유의 폭도 커져가고 있다.무엇보다도 빈부격차의 문제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선, 후진국간의 소득 격차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을 크게 압도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나라에서 승자 독식사회의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다. 세계화 이후 국가간의 빈부 격차는 최근 세계은행이 발표한 ‘세계화 평가’에서 잘 나타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 생계비가 1달러 수준에 불과한 절대 빈곤층이 1998년 12억 명인 것으로 집계돼 거의 변화가 없듯이, 자유 경쟁의 원리가 풍미했던 1990년대의 세계화가 인류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이렇듯 세계화가 가져오고 있는 문제는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에는 세계화에 대항하는 “반세계화”물결이 거대한 흐름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계화라는 대세를 향해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세계화를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세계화”, 즉 ‘자본에 의한 전세계 석권’이라고 정의한다.이들 주장의 핵심은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이익을 무시한 채 선진국들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세계화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화를 표방하는 국제 금융기구들이 외채가 있거나 대외신용도가 낮은 국가들에게 자금을 대여하는 한편, 그 대가로 해당 국가의 자원과 노동력을 다국적 기업에게 개방하라고 강요하면서 결국에는 일반 대중의 삶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사회과학| 2007.07.01| 3페이지| 1,000원| 조회(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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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경제사]동북공정, 한중일관계, 청일전쟁
    세계경제론1. 동북공정개념중국은 2002년 2월 공식 출범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 왜곡을 본격화함으로써 12년 한?중관계사에서 최초로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였다.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줄임말로,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실질적인 목적은 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 특히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다. 연구는 크게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누어 진행된다. 주요 연구과제는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연구, 중국과 한반도 관계사 연구, 한반도 정세 및 변화와 그에 따른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관한 영향 연구 등이다. 특히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 북한과 한국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3국은 엄연한 한국사의 실체이고, 고구려나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영토로 삼았던 국가들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다.역사왜곡 내용중국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통일적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관점에 기반 해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여기에다 중화문명의 유구함과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을 내포한 ‘신중화주의 문명사관’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인 중국을 형성하는 데 공헌한, 현재 중국의 국경 내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민족이고, 그들의 역사 또한 중국역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고구려 수도가 평양으로 천도되기 이전의 역사는 중국 역사이고심지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은 동북지역에 한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는 한편, 북한의 개혁개방을 동북지역의 개발과 연계시키고자 한다.? 대한반도 영향력 확보 - 동북공정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동북아의 중심국으로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장기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면서 한반도 영역까지 중국의 역사적 연고권을 부여한 점에서 볼 때, 동북공정은 향후 한반도 유사시에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대처방안1. 장기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은 수세적이면서 동시에 패권추구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으며 2006년까지 예정되어 있다.2. 한?중 양국의 합의를 고려하여 동북공정에 대한 직접적 대응은 학술적으로 하되, 장기적?포괄적?국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3. 정치적 차원의 간접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 북한체제의 급격한 붕괴를 막고, 북한의 경제가 중국에 종속되지 않도록 남북경제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통일 이후의 영토문제를 대비해 간도협약 및 국제법에 대한 관심을 증대해야 한다.4.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이 패권화 할 가능성에도 장기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 동북아 지역에서 전개될 중?미간의 갈등 및 협력관계를 잘 활용해야 한다.2. 청일전쟁과정 및 결과1)대만사건:1868년 일본 명치유신, 1871년 일본 이홍장과 통상우호조약, 1872년 유구(오끼나와)를 잠정적으로 유구번으로 고치고 번왕을 봉함, 대만에서 목단사사건이 일어남(왜구의 표류-대만 고산족에게 피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의도적인 요구, 1879년 일본 유구에 진출-유구번을 충승현으로 승격.2)이리국경문제:신강지역, 회교도 잦은 반란, 1867년 천산북로 회민들 이리지역 공격 점거, 1871년 러시아 질서유지 명목 남하, 좌종당 신강지역 진출 1876년 진압, 1881년 러시아와 이리조약 체결.3)마가리사건:1875년 영국-버마 라오스 캄보디아 교통로 개설, 북경직임이 보이며, 변법파가 등장하기 시작, 동시에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한다.변혁의 두개의 방향이 보인다- 개량주의 변법파와 혁명주의 혁명파가 등장한다. 동시에 민중들에 의한 반제국주의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함.출처:http://deer.sangmyung.ac.kr/~jbkim4/9.htm3. 한?중?일 관계경제동북아 경제의 역동성? 중국의 고도성장에 따른 동북아 경제력의 급증 - 동북아 지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중 중국, 한국의 경제성장이 현저하다. 동북아 지역의 경제력 증대에는 중국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외국인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992년 이래 최소 7%이상의 연평균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지역으로 외국 기업의 투자가 보다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제조업에 있어서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수출시장에서 동북아 경제권의 영향력 증대 - 중국의 고도성장은 수출증대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동북아 경제권의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있다. 아울러 한?중?일간 경제 관계가 보다 심화되어 지역협력의 필요성을 더욱 성숙시키고 있다. 중국의 수출증대는 세계 시장과 미국 및 일본 시장에서의 시장점유율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으며, 한국은 세계시장 점유율을 소폭 증가시키는 데 그치고 있으나 일본은 그 점유율이 다소 하락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중국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동북아 경제권의 외환보유고 증대 - 동아시아 경제권에서 고도성장을 경험한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현재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다른 지역경제권의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2003년 현재, 세계 전체 외환보유고 3조 1000억 달러 가운데 한국이 1550억 달러, 중국이 4080억 달러, 일본이 6630억 달러를 보유함으로써 한?중?일 3국이 전체의 약 40%를 보유하고 있다.한?중?일 교역구조? 교한?중?일 3국간에는 과거에 비해 경합관계가 증가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보다 심화된 측면이 있지만, 이런 경합관계의 이면에는 산업 내 무역을 통해서 서로 상대국의 제품을 필요로 하는 보완성 역시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한?중?일 3국간에 존재하는 경쟁과 협조 가능성은 지역경제협력을 통해 상호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중?일의 외국인 투자동북아 지역의 한?중?일 3국 가운데에는 중국이 주로 외국인 투자시장으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어서 2003년 현재 7조 9200억 달러 규모의 외국인 투자 누계액 가운데 4870억 달러가 중국에 투자되어 6.2%를 점유하고 있으며 한국은 474억 달러로 0.6%, 일본은 844억 달러로 1.1%를 점유하는데 그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2003년 현재 홍콩, 마카오, 버진제도를 통한 우회적 외국인 투자가 각각 33.9%, 10.8%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이 미국, 일본, 대만 등으로 각각 7.8%, 9.4%, 6.3%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중국 투자는 중국의 외국인 투자의 1%밖에 점유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한국 입장에서는 가장 큰 외국인 투자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정치(청와대 브리핑에서 관련내용 캡쳐)△ 문 : 아세아+3 회의에서 안보와 경제문제가 논의됐다. 라종일 보좌관은 안보보다 경제로 기우는 것 같다고 한다. 국내에 돌아가면 경제와 안보가 최대 관심사가 될 것인데, 그 비중과 방향은?△ 대통령 : 일반적인 국내 안보와 경제정책이 아니고, 아세안과의 관계 속에서 경제와 안보 말한 것이죠. 아세안과의 관계에서 경제와 안보 모두 다 논의되고 있다. 더 큰 비중은 역시 경제문제다. 아세안은 한국에게 있어 교역에서는 5번째 지역, 2번째 건설시장, 3번째 투자지역이다. 전체 아세안의 경제 덩치가 크지 않아 소홀하기 쉬우나 한국의 경제상대로 큰 비중을 갖고 있다. 장차 빠른 속도로 성장할 지역이고, 역내 결속도 강화되고 있어 장차 경제 파트너로 대처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뒷날 경쟁력과 잠재성장력을 훼손할 수 있다. 일회적 각성제 투입 같은 정책은 절대 하지 않겠다. 그래서 기술혁신, 시장개혁, 정부개혁을 비롯한 사회 제도와 문화혁신에 노력하겠다고 말해왔다. 기술혁신은 인재양성이라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포함한다. 현재 대학교육이 교육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바뀌는 것보다 인재양성과정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기업에 필요한 경쟁력 있는 인재양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문 : 다자외교 최초로 했는데, 양자외교와 다른 점을 느꼈을 것이고, 한·중·일 정상을 재차 만났는데 위안화문제로 긴장도 있었는데, 이야기를 소개해 달라△ 대통령 : 준비하면서 참모들에게 결국 “나는 배우네요”라고 했다. 실무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사전협의하고 이렇게 해서 의제가 마련되고,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몇 가지 의제에 대해 합의와 공감을 짚어나가는 것이 다자 정상외교인 것 같다. 대체로 한국정부가 가진 외교역량과 참모진의 노력에 의해 다자외교가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다자외교에서는 민감하게 이해관계 놓고 다투는 일은 적어, 새로운 미래 내다보는 각국 외교당국자의 안목이 나타나는 게 인상적이다. 각국이 다자대화 틀 속에서 신뢰받고 인정받음으로써 국가이익을 증대하는 여러 노력을 하는 것 같다. 한국 정부 외교팀도 상당히 준비 잘 해 대체로 무난히 됐다. 특별히 이전 정부가 한 것이지만 아시안 비전그룹, 연구그룹 등 두 가지 성과가 좋은 평가 받았다. 후속조치에 대해 각국이 서로 분담해서 적극 해나가는 것을 볼 때 지난번 정부가 아세안+3 정상외교 마당에 상당히 훌륭한 준비를 했다고 느꼈다. 우리도 부담된다. 다음 정부에 좋은 성과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 개인의 철학과 전략적 마인드, 지혜가 번득이는 것이 보여 배울 점이 많았다. 여러 사람이 각국의 상황을 토대로 철학적 비전 전략을 말하는데 새겨 들어야할 좋은 내용이 많았다. 다행은 아세안 국가가 돈이 많지 않아 살기에 급급할 것으로 보이나, 그.
    경영/경제| 2006.06.13| 7페이지| 1,000원| 조회(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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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대동아공영권
    대동아 공영권'대동아'란 동아, 즉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1940년 7월 일본이 국책요강으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는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같은 달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그 이전에도 일본은 중국의 둥베이 지방, 즉 만주를 침략하기 직전인 1931년에 일본·조선·만주·중국·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일본과 만주가 블록을 결성해야 한다는 '일만(日滿) 블록' 같은 슬로건을 선전하고 있었다. 일만 블록의 슬로건은 만주를 점령한 후인 1933년에는 중국을 합한 '일만지(日滿支) 블록'으로 발전하였으며,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일본·만주국·중국이 주도하여 '동아 신질서'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일본 외상은 담화를 발표해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그 요지는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결성이란 일본·중국·만주를 중축(中軸)으로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타이·말레이시아·보르네오·네덜란드령 동인도·미얀마·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정치적·경제적인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블록화였다.그러나 실제로 대동아공영권에서 일본이 한 일은 피점령국의 주요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식민지와 점령지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허황된 슬로건으로 끝났다.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어교육이나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점령지 곳곳에 일본 신사를 세우고 강제로 참배하게끔 하였으며, 천황을 현인 신으로 숭배하게끔 하였다. 또한 공용어로 ]·한국·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또 영일동맹(英日同盟)에 의해 동(東)아시아에서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얻어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대전 후 구미제국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호헌(護憲)·보통선거 등의 운동이 일어났고 평화주의·국제주의의 풍조가 활발해져서 정당내각(政黨內閣)이 탄생하였다. 또 노동운동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다이쇼[大正:明治 다음의 왕(1912~1926)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쇼와[昭和:大正 다음의 천황(1926∼1989) 또는 그의 연호] 초기에는 세계적 불황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본의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륙침략을 꾀하였으며, 점차 군국주의·국수주의의 경향이 강해져갔다.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우고 다시 중국과 충돌하여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 등과 대립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임진왜란먼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요인으로는 정치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군국주의적인 패권야욕과 제국주의적 영토팽창, 그리고 국내적 불만 전환을 위함이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막바지에 이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아우르고 류구국(琉球國;현 오키나와), 고산국(高山國;타이완), 루손(呂宋;필리핀)을 공략한 다음 천축(天竺;인도) 땅까지 지배하에 놓고 명의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통국(一大統國)을 건설한다는 야심에 차 있었던 것이다. 흔히들 이에 대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나 '몽상' 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군사적 현황을 비교하면 일본이로 군사적 요인을 들어보자. 국내의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므로 통일이 종결된 이후에 휘하 무장들이 삼삼오오로 단합을 하여 저항세력으로 변할 경우 전통적인 가신집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지배권 유지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가장 손쉽게 잠정적인 적대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써 외국원정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이것으로 임진왜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정치·경제·사회·군사적 요인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임진왜란의 목적을 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내리고자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위의 여러 요인을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남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전이요, 일차적으로는 조선을 점령하여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다.영향조선에 끼친 영향정치상에 있어서는 비변사가 강화되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 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비변사는 원래 변경의 방비를 위한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자 그 기능이 더욱 커졌다. 이전에는 군사 문제에만 관여했으나 이제는 국정의 전반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졌으며 비변사가 국가의 모든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 제도는 양인인 농민이 군역의 의무를 지는 병농 일치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로, 궁궐의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던 중앙군은 중위. 전위. 후위. 좌위. 우위의 5위를 기간 보대로 하였다. 이러한 군사 조직의 개병제 원칙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잘 지켜졌으나, 16세기 이후 현역 복무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 다른 사람을 대신시키는 등 점차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종래 군사 제도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월급을 주고 군인을 고용하는 군대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그 뒤 계속해서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을 설립하여 5군영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지방에는 속오군을 창설하였다. 한편 여러 무기도 제작되었다.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이 화차를 발명하였으며 .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 문화로는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 술은 유치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 국가로 성장하였다.왜란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 도자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 간조선 유학자들에게 의하여 발달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차차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이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경과 : 한-중-일 국제전 - 임진왜란은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 한편 해상에서는 경상 우수사 원균이 패하여 많은 함선을 잃었으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순신은 평상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1차는 옥포에서, 2차는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3차는 한산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했다.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했고,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고 남진해 왔다. 서울에 모였던 왜군은 함경도에서 철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여 남은 선박 12척으로 해군을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 끝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도망가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한일합병한일합병 -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이르는 말.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한국정부를 위협하여‘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일제는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 일제는 한국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한 일제는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한국 안에서 배제하였다.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한층 강화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8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한국식민지화에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한국군다.
    경영/경제| 2006.06.13| 7페이지| 1,0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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