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환율제도가 경제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국이 어떤 환율제도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환율의 단기 변동성뿐만 아니라 중장기 환율괴리(misalignment) 정도가 달라져 물가 및 성장 등 거시경제성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환율제도에 관한 연구는 주로 변동환율제도와 고정환율제도가 물가 및 성장 등 경제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중점이 두어져 왔다.그런데 최근에 환율제도와 관련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1990년대 중남미, 동아시아의 외환위기 등을 계기로 환율제도 자체가 위기의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이다. 물론 위기의 원인이 다양하여 환율제도 자체가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많은 연구에서 자본이동 심화에 따른 국제금융시장 통합 증가 등 국제금융질서가 변하는 상황에서 느슨한 고정환율제도가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멕시코 위기(1994년말), 동아시아 위기(1997년말), 러시아 위기(1998년), 브라질 위기(1999년초) 등 최근의 위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제정적자의 심화, 금융시스템의 취약 등과 같은 요인도 있었지만 환율제도가 위기의 직접적인 촉발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한편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16일 외환위기를 계기로 원화절하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환율의 일일변동폭이 제한되어있던 시장평균환율제도에서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율제도의 변경은 여러 경제적 요건을 신중하게 고려한 결과라기보다 외환위기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외환위기 이후 자유변동환율제도하에서 환율변동폭이 크게 확대되면서 환율변동을 두려워하는 현상(fear of floating)이 나타나기도 하였다.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환율이란 과연 무엇이며, 환율제도의 고찰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의 환율제도를 분석함으로써 앞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본 연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우선, 있을 때 에는 IMF와의 협의하에 환율을 조절할 수 있다. 다섯째, 가맹국은 출자액에 따라 대외지급에 필요한 외국통화 를 IMF로부터 인출할 수 있는 인출권을 부여받는데 출자액의 25%까지는 자동으로 나머지는 IMF의 심사에 의 해 인출할 수 있다.에서 개최된 연합국 44개국 회의에서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가 창설되면서 국제통화제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브레튼우즈 체제 혹은 IMF체제의 주요 특징은 조정가능 고정환율제도인데 회원국의 국제수지가 기조적인 불균형 상태에 있을 경우에만 IMF의 승인에 의하여 그들 화폐의 가치, 즉 대미달러 환율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금본위제하에서는 금의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고정환율을 유지하였으나 IMF체제하에서는 정부가 외환안정기금을 이용하여 외환시장에 개입함으로써 환율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IMF체제는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크지 않고 서구제국의 흑자규모가 크지 않던 1950년대에는 원활히 작동하였으나 미국의 적자가 심화되고 서독과 일본의 흑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달러화의 투매현상이 촉발되면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1960년 마르크화, 프랑화 등의 절상, 1961년 금풀제(international gold pool){) 1961년 미국을 비롯한 8개 주요국들이 런던 금시장에서 금과 달러간 투기적 거래를 막기 위해 각국이 보유한 금을 영란은행에 맡겨 영란은행이 금가격을 1온스당 35달러로 안정시키도록 한 제도이다.의 실시, 1968년 금의 이중가격제(two system for gold){) 1967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악화되면서 국제적인 금매입 현상이 발생하여 금풀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안정 을 찾은 국제금융시장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기존의 금풀제 참가 7개국은 1968년 워싱턴 회의를 통해 7개국간 금거래에는 종래의 온스당 35달러의 공정가격을 적용하되 금시세는 시장의 수요공급에 따라 결정 되도록 하여되고 중앙은행이 밴드 방어를 주저할 때 환율제도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보여줌슬라이딩 밴드(sliding band)·외환당국은 중심환율이 장기적으로 조정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힘·이 시스템은 인플레이션이 놓은 경제에 적용될 수 있는 밴드시스템임·세계 인플레이션 평균보다 더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국가들은 심각한 실질 평가절상을 유발하지 않을 수 있는 밴드를 채택할 수 있음·중심환율의 조정시기와 규모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상당한 불확실성을 초래하며 이는 때때로 놓은 금리변동성을 야기함·표준적인 밴드시스템에서와 같이 적정 밴드폭을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이스라엘은 1989∼91.12. 동제도와 비슷한 시스템을 채택한 바 있음·이 시스템과 관련된 불확실성과 변동성 때문에 크롤링밴드제와 같은 여타 대안보다 덜 매력적임크롤링 밴드(crawling band)·중심환율이 시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crawl)하는 밴드 시스템임·크롤레이트를 결정하는데에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사용될 수 있음- 과거지향적 크롤(과거 인플레이션 기초) & 미래지향적 크롤(목표 인플레이션 기초)·인플레이션이 높은 국가는 중심환율을 큰 폭으로 조정하지 않는 밴드시스템을 채택할 수 있음·크롤레이트를 정하는 기준을 선택하는 데에 심각한 위험이 수반됨- 과거지향적 접근은 상당한 인플레이션 관성을 초래함- 인플레이션 목표를 잘못 정하는 경우 과도한 평가절상과 투기압력을 야기할 수 있음·이스라엘은 1991년 12월에 이 시스템을 채택하였음- 칠레는 1986∼98년 중반까지 밴드폭이 넓어지는 시스템을 채택한 바 있음- 이탈리아는 1979∼91년 사이에 이런 유형의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였음크롤링 페그(crawling peg)·명목환율은 장기적으로 정보변수(인플레이션 시차변수)에 의거 조정되며 좁은 범위내에서만 변동이 허락됨·이는 tablita제도°로 알려져 있음°남미 국가들 사이에 앞으로의 자국통화의 평가절하 계획하여 경기주체의 환율기대심리를 관리함으로써 환율안정과 인플레이션 억제를 도모하는 제도임·인48년 12월에 대충자금환율의 설정과 1949년 6월에 공정환금률과 일반환금률로 구성되는 복수환율제도의 채택 등으로 인해 환율은 공정환율을 중심으로 다기화 되었다. 그러다가 동란기(1950. 6.∼53. 7.)를 거친 후 기존의 복수환율들이 단일환율로 통합된 것은 1961년 2월에 외환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새로 채택된 환율은 형식상 기분율과 증서율로 구분되었는데 기본율은 정부가 결정한 달러당 1,250환으로 정부예산편성에만 국한하여 적용되었고 증서율은 경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가 신축성 있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증서율은 달러당 50환이였다. 그리고 모든 외환거래에 적용되는 환율을 은행률이라고 하였는데 은행률은 기본율과 증서율을 합한 것으로 하여 달러당 1,300환으로 책정하는 한편 종전의 예치집중제도를 폐지하고 거주성에 따라 예치집중제와 매상집중제를 병행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에 운용되어 왔던 공정환율을 중심으로 한 환율제도는 고정환율제도로서 거래내용 또한 UN군 대상금거래와 같은 무역외거래가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환율이 국내 인플레이션을 반영할 수가 없었다. 인플레이션의 누적적인 압박으로 수차례의 평가절하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통화개혁 조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정부는 고정환율제도를 폐기하고 다음과 같은 단일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였다.(2) 단일변동환율제도(1964. 5.∼1980. 2.)정부는 1964년 5월 3일을 기해 종전의 공정환율기준 1달러당 130원의 고정환율제도를 폐지하고 달러당 255원을 하한으로 하는 단일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는 동시에 외환증서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의 취지는 그 동안 환율을 고정시킨 결과 실세를 반영시키지 못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율을 외환시장에서 외환증서의 수집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률로 결정토록 유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제반 여건이 구비되지 못하여 그 실시를 보지 못하고 1(1990. 3. ∼ 97. 12.)시장평균환율이란 은행간 시장에서 거래된 현물환율을 금융결제원의 자금중개실을 경유한 은행간 외환거래량으로 가중평균하여 산출되는 원화의 대미달러화 환율을 말하는데 이는 당일 외환거래의 매매기준환율이 된다. 만약 전일 은행간 거래규모가 전년도 일평균거래 규모의 50% 수준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전전일거래와 전일거래를 합산한 실적을 토대로 당일 시장평균환율을 산출토록 하고 있으며 은행간 거래환율의 일일변동허용폭은 시장평균환율의 일정범위{) 시장평균환율이 처음 실시되던 1990년 3월 2일의 일일변동허용폭은 0.4% 이내였으나 그 후 1991 년 9월 2일에 0.6%, 1992년 7월에 0.8%, 1993년 10월 1일에 1.0%, 1994년 11월 1일에 1.5%, 1995년 12월 1일에 2.25%, 그리고 1997년 11월 20일에는 10.0%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대만의 과 거 중심환율제도와 유사한 환율제도로서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조치로서 환율의 일일변동허용폭을 계속 확대하였다. 대만은 과거(1982. 9. 1.∼89. 4. 1.)에 은행간환율의 일 일변동허용폭을 중심환율의 2.25% 이내에서 유지하다가 1989년 4월 3일부터 이를 폐지하고 환율 이 외환시장에서 외환수급에 따라 결정되는 자유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하였다.이내에서 거래당사자인 은행이 자율적으로 결정토록 하였다. 엔화, 마르크화 등 달러화 이와의 기타통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국제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해당통화의 대미달러화 환율로 재정하여 결정하였다.{) 재정률(cross rate)에 의햐 결정되는 기타통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에 대한 산출은 대미달러화 환율 (/$)을 국제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해당통화의 대미달러화 환율로 나누어 구한다.시장평균환율제도는 제한적이나마 외환시장에서 외환의 수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므로 환율의 가격기능을 제고시키고 외환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하였으나 제도 자체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였다.
고대 수공업에 대해서고대 수공업의 편성, 발전, 조직, 생산형태에 관한 조사목차.제1장. 서론: 고대사회와 고대 수공업 & 고대 수공업에 대한 연구 방향과 범위제2장. 본론1. 고대 수공업의 개념2. 고대사회의 성장과 수공업의 경영형태3. 각종 수공업의 발전4. 관영수공업의 발전제3장. 결론 : 고대 수공업과 고대사회부록. 참고문헌제1장. 서론 : 고대사회와 고대 수공업 & 고대 수공업에 대한 연구방향과 범위고대문명의 발생은 도시와 시장의 등장, 인구의 집중과 분화, 그리고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수공업과 상업이 농민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되어 가는 방식은 고대문명의 성격이나 유형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한다.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이, 노예 또는 그러한 처지의 수공업자와 상인을 농업 노동으로부터 분리시켜 재화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고대국가에서는 왕권이 주체가 되어 공동체적 농업생산 양식으로부터 수공업자를 독립시켜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동양 고대국가의 수공업은 시장의 통제나 도량형의 결정 등과 함께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련 하에 편성되게 마련이다.{) 朴南守. 『新羅手工業史』(신서원. 1996). 13쪽고대 삼국 수공업의 연원은 이미 삼한시대부터 비롯하며, 이러한 사실은 각종 고고학적 유물 등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변진(弁辰)의 철생산 관계기사나 한인(韓人)들이 베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는 기사,『삼국유사』의 석탈해 야장설화(昔脫解 冶匠說話){) 남해왕 때 … 그 동자(脫解)가 지팡이를 짚고 두 명의 노(奴)를 거느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 석총을 만들어 7일 동안 머물다가 성 안의 거처할 만한 곳을 찾으니, 한 봉우리가 삼일월(三日月)과 같으며 그 형세가 가히 오랫 동안 살만한 땅이었다. 산을 내려가 물으니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계책을 세워 몰래 여탄(礪炭)을 집 옆에 묻 어두고 이른 아침에 그 집 대문에 이르러 이는 우리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집이다. 라국가권력간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며, 이에 미루어 고대 수공업의 일 단면을 밝히고자 한다.제2장. 본론1. 고대 수공업의 개념고대 수공업은 그 경영주체와 생산관계에 따라 관영수공업과 사영수공업 그리고 농민수공업으로 구분된다. 관영수공업은 왕실 및 국가의 수공업적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이를 설립하고 생산을 관리하는 수공업을 뜻한다. 사영수공업이란 개인이 수공업장을 차리고 경영하며, 그 생산물을 대가를 받고 판매하는 수공업을 말한다. 대체로 고대에서 이러한 사영수공업장의 소유주는 중앙귀족이나 지방의 성주로 보이며, 일부 민간이 소규모 작업장을 차리고 생산·판매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농민수공업은 농민들이 자가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가내부업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국가에 대한 공물로서 생산제품의 일부를 수납하기 위해 행해졌던 수공업을 일컫는다.{) 조기준, 『한국경제사신강』, 75∼76쪽 참고.이러한 고대 수공업에 대해 학자들은 그동안 그 분류와 개념에 있어 다양한 생각과 의견들을 가져왔다.『삼국사기』직관지(중)에는 신라의 내성(內省) 산하 110여개의 대소 관사가 전하는데 그 가운데 물품생산과 관련됨 직한 관사가 30여개가 존재한다. 초기 백남운은 우리나라의 고대사회를 노예제사회로 보고『삼국사기』직관지를 근거로 궁중과 관청이 경영했던 각종 수공업부문을 궁정노예·관노비 및 준노예 곧 노예적노동담당자들이 생산을 주도하고 그 생산물품을 중국에 대한 세공품(歲貢品)·교역품 등 국가공용이나 왕실·귀족에 대한 현물지급에 충당되기 위한 궁중수공업 또는 관영공업으로 생각했다. 한편 일본인 학자 미이께 겐이찌(三池賢一)는 내성산하 관사를 분석하면서 본피궁(本彼宮)을 수반으로 하는 조하방(朝霞房)·염궁(染宮) 등 25여개 생산관사의 직원구성과 특징을 당나라 공부(工部)에서 천하의 백공(百工)이나 둔전(屯田)·산택(山澤)의 정령(政令)을 관장 하는 것이나 소부감(小府監) 조직에 비교해 설명하였으며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의 견해를 수용하여『삼국사기』지과 봉건국가의 일부 수요를 충적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던 만큼 그 규모가 아 무리 컸다 해도 생산적 소비와는 관계가 없었고 아울러 당대의 사회 및 경제적 발전과는 인연이 먼 것이었다. 넷째. 관청수공업은 전업수공업자 및 농민수공업자들의 노동력과 원료의 수탈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므로, 관청수 공업의 발전은 곧 민간수공업자들의 영락을 의미하며 사회경제적 발전의 억제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수공업자 들은 신분적으로 양인·평민을 비롯하여 노비신분 수공업자들과 성수공업자 등 피압박·피착취 대중으로 구성 되었으며 이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그들의 신분적 구성에 따라 달랐다.최근에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단계서부터 이미 농업으로부터 분리된 전문 수공업자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정되면서 이들의 국가적 편성을 신라의 수공업 경영형태 로, 그 성립이나 발전과정을 신라 사회의 성격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생각이 박남수의『新羅手工業史』에서 제기되었다.{) 금속기 특히 철기생산을 기초로 하여 성장한 고대국가에 있어서 무기의 제조, 관청·사원의 건축으로부터 이에 부수된 각종 조형예술품에 이르기까지 수공업자의 생산물 아닌 것이 없으며, 농업의 재생산 자체도 수공업부분 의 독립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농민이 다루는 호미·낫과 수레의 부품, 또는 농촌여 성이 필요로 하는 칼·마치·바늘 등까지도 모두 전문수공업자를 전제로 한 철제품이었다. 石母田正, 『古代史 講座』, 學生社, 1979, 6∼12面박남수는 신라의 수공업 경영형태를 크게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사원수공업·민간수공업으로 나누고 민간수공업은 다시 농민수공업과 일반 민간수공업, 귀족들의 사영수공업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그는 궁중수공업 을 국왕이나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궁중 자체 한에서 생산하는 수공업형태 라는 의미로 통일하여 사용했으며, 관영수공업 은 종래에 관청수공업 또는 관영공업 등으로 불리던 것을 국가(官)가 장인을 확보하여 필요한 물품생산을 운영·관리하는 수공업형태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또한 사원 말하고, 진한인 1만 5천명과 변 한포(弁韓布) 1만 5천필을 대가로 치루었다. … [『三國志』권30, 魏書30, 東夷傳 韓]나『삼국사기』의 가배(嘉俳)설화 {) 유리이사금 9년(A.D.32) 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이를 둘로 나누어 왕녀(王女)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고 붕당을 만들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이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마(麻)로써 길쌈을 하고 을야(乙夜)가 되어서야 마치게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내 어 이긴 편에게 바치며 모두 춤과 노래 및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부른다.[『三國史 記』권1, 新羅本紀1]를 보면, 기원전후 무렵 진한소국이나 사로국 수장들은 노(奴)나 부민(部民)을 집단으로 사역시키는 생산방식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민간인과 노(奴)는 한노(漢奴) 호래 {) 주.11 참고와 같이 농경에도 사역되기도 했겠지만, 가배(嘉俳)설화 에서처럼 수공업생산에도 충당되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또한 이들을 부릴 수 있는 수장들은 삼한의 신지(臣智)나 읍차(邑借) 등이나 신라의 거서간(居西干)·이사금(尼師今)과 같은 지배층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소국지배층이 지배하던 상고기의 소유방식은 A.D.3∼5세기에 이르면 변화를 받게된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황건적의 난(184) 일어나고 그 후 성시(成市)를 중심으로 한 성시수공업(成市手工業)과 이를 기반으로 한 채광·야철업이 동시에 몰락했는데, 이는 중국 전역의 철부족 현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은 당시 낙랑과 대방 2군에 교류가 잦았던 변·진한 지역의 철에 관심을 갖게된다. 이것은 곧 변·진한지역의 철생산을 자극하였고, 삼한에 철의 소유를 통한 영역국가로서 고대국가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는 나라에서는 철이 나는데, 한과 예가 모두 이로부터 (철을)취한다. 각 저자에서의 매매는 모두 철을 사용 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三國志』권(食邑)으로 삼도록 했다. 아들 무력(武力) 은 신라에 벼슬하여 관직이 각간(角干)에까지 이르렀다.[『三國史記』권4, 新羅本紀, 법흥왕 19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곧 관영수공업과 민간수공업의 발전과 성립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3. 각종 수공업의 발전1 제철 및 금속세공업한민족의 철기사용은 고조선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서 철기의 제작은 B.C. 3세기경으로 알려져있다. 신라 지역에서는 2·3세기 무렵 이미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철생산이 발전하였고, 이는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삼국지』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철생산 관계기사나 석탈해의 야장설화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3∼4세기 무렵 왜에서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일컬었고, 눌지왕 18년(434) 백제에게 황금·명주를 답례품으로 증여하고 있어{) 『三國史記』권3, 新羅本紀3, 눌지왕 18년.금·은 등의 생산도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수공업에서 철기의 생산은 야철(冶鐵)기술의 발달에서 기인한다. 고대 야철흔적은 출토되는 로지(爐址), 고풍관 (鼓風管), 철재(鐵滓) 및 철기(鐵器)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흔적은 패총, 유적지 및 고분에서 찾아진다. 철재가 출토된 곳으로는 김해(金海)패총, 부원동(府院洞)패총, 성산(城山)패총, 고성(固城)패총 등이며, 철기유물은 함흥 이화동(梨花洞)유적, 함남 영흥군 소라리(所羅里)유적, 평양 정백동(貞栢洞)유적, 황해도 황주군 천주리(天柱里)유적, 황해도 안악군 복사리(伏獅里)유적, 황해도 은파군 갈현리(葛峴里) 및 금대리(金大里)유적, 황해도 재령군 부덕리(富德里)유적, 황해도 백용군 석산리(石山里)유적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밖에 삼국 및 신라통합기의 고분에서도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제철업의 발달과 더불어 금, 은, 동 등 금속제품을 가공하는 금속세공업도 이 시기에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는 이 시기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장신구류와 불교 의식용품·생활용구류·장식구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2 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