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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영화] 한국영화에 나타난 사회성과 신앙
    Ⅰ. 서론2004년 5월 22일 프랑스 칸에서는 우리 나라 영화계 사상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2등 상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예의 영화는 얼마 전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올드 보이 로 개봉 당시에 우리 나라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흥행 면에서나 평가 면에서나 돌풍을 일으키며 주목받았던 영화이다. 이번 수상은 우리 영화계로써는 대단히 의미 있는 일로, 한국영화가 올 들어 메이저 영화제에서 연거푸 주목을 받고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대상까지 거머쥠으로써 한국영화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영화제를 비롯한 국제 모임에서도 발언권이 한층 높아질 뿐 아니라 해외 시장 진출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영화계의 수준이 한단계씩 성장을 거듭하며 그 완성도와 재미를 한층 더해 가고 있는 것은 영화팬인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국제 영화제에서의 수상이나 해외로의 영화 수출은 타국의 사람들에게 우리 나라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하고 한국문화를 이해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그 배경이 되는 사회에 깃들여진 문화 및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함축적이고도 집약적인 성격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그 수준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우리영화 속의 우리네 삶의 모습과 정신, 혹은 지향점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비단 영화 평론가들의 평가 잣대로서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일반 민중에게 그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시대적 공간적 사회적 배경을 통해 당대의 주요 쟁점 및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번 과제의 주제를 한국영화에 나타난 우리의 사회성과 신앙 으로 택하고 여러 영화들을 망라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영화 라는 매개에 투영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관찰하기 이전에 우리 영화의성이 대부분이었다.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탱크의 시대 는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영구집권을 획책한 유신드라마 의 기세에 짓눌려 표현의 자유, 다양한 소재 등이 극악의 제약을 받으면서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같은 호스티스 영화와 여고 졸업반 (김응천) 같은 청소년 영화가 때아닌 호황을 누렸던 것이다.그러나 그 무렵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영자의 전성시대 (김호선) 같이 시대 내지는 사회 현실을 담으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로소 영화가 일반대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인식이 싹텄고, 그것은 비판적 리얼리즘에의 접근이자 한국영화의 새로운 변화이기도 했다. 바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였다.12·12 군사반란의 혼란 와중에서 밝은 1980년대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띤다. 여전히 탱크의 시대 로 70년대를 답보하고 있었지만 6·10 민중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열기는 역사의 아이러니인 6공화국의 5공청산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1988년 1월 영화각본 사전심의가 폐지되면서 이루어진 소재 개방은 76년 한국영화사의 큰 사건이었다.소재개방은 서울 무지개 (김호선)의 대통령 엽색행각과 구로아리랑 (박종원)의 노동문제, 그리고 1990년대 남부군 (정지영)의 빨치산, 부활의 노래 (이정국)의 5·18 광주문제로까지 확산되며 한국영화 활성화에 기여하는 듯 싶었지만, 1988년 올림픽 기간 중 미국 영화 직배라는 이미 예고되었건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자본·기술 등 정당한 게임의 룰이 없는 대결이 시작되었고 한국 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과적으로 90년대 후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외화를 앞서가는 수준이 되었다.소재의 개방은 한편으로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같잖은 영화의 양산을 낳았고 1992년 결혼이야기 (김의석)의 흥행성공 이래 계속되고 있는 코미디 영화와 함께 90년대의 큼 흐름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서편제 (임권택)의 1백만명 관객동원은 한국영화사의 또 다른 사건이 되면서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캅스의 조 형사와는 또 달랐다. 그 차이에서 10년 사이의 변화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것은 단지 사회의 변화와 함께 대중적인 한국 영화에 흐르는 시대정신의 변화가 끼어 들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투캅스 에서의 조 형사는 사회에서는 부패했으나 가정으로 돌아가면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된다. 그는 자신의 잘못도 알고 있기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교회에 가서 회개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의 부패는 가족의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롭게 잘 먹고 잘 살게 하녀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에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반면 공공의 적 의 강철중은 조 형사보다 훨씬 더 부패하고 타락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강철중의 타락의 동기는 조 형사와 같은 가족의 안온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그에게는 아내는 없고 어머니와 딸들은 있으나 부양가족을 돌보는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패와 타락은 투캅스 와는 달리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성화된 타락이며 일상화된 부패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강철중의 부패와 타락의 계기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또는 그것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볼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공공의 적으로 묘사된 부모를 죽인 범인(이성재)을 잡고자하는 욕망은 단지 나에게 해를 끼친 자는 반드시 내 손으로 앙갚음한다는 원칙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두 남성은 둘 다 타락한 인간으로 묘사되어졌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두 개의 악 사이에서 어느 쪽 악의 편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강철중이 쫓는 패륜아 범인은 IMF이후에 성공한 새로운 세대이다. 새로운 부의 상징이자 새로운 신흥 부르주아인 그가 더 큰 성공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부모를 죽인 후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단 한번도 진심으로 눈물 흘린 적이 없다. IMF 이후의 경제논리 속에서 태어난 냉혹한 이 새로운 인간의 유형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였고 그를 물리치려는 강철중에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 는 6·25 전쟁 당시의 상황을 그린 영화로 끔찍한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며 관객몰이에 성공한 영화이다. 앞 선 두 영화와 맥을 같이 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요즘 이러한 시대극의 성공이 계속되는 추세로 그 여세에 다시금 힘을 가하는 영화는 바로 얼마 전 개봉한 효자동 이발사 이다.효자동 이발사 는 60-70년대 암울했던 한국의 정치 현대사를 풍자한 영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은 '그땐 그랬지'라는 아련한 향수를 느끼면서 극장을 나서게 했을 내용을 담고 있다. 간첩단과 내통한 사람만이 걸린다는 마루구스 설사병(마르크스를 빗댄 말)도 시대풍자극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성한모(송강호)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큼지막한 상처를 남긴 3.15 부정선거에서 적극적인 협력자의 역할을 하고 이승만이 개헌을 하기 위해 억지로 정당화시켰던 '사사오입의 논리'를 우스꽝스럽게 이용해 가정까지 꾸리게 된다. 영화가 시작 될 때 효자동 이발사 는 인물과 사건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자막을 달고 나왔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성한 목'을 유지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칼을 휘둘렀던 지식인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다. 과거 우리의 비정상적 정치구조를 조심스럽게 비판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의 사회문화적인 힘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2) 영화 속의 여성1980년대에 수난의 세월을 보내던 여성 인물들은 1990년대의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남성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전문직 여성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와 김의석의 결혼이야기 를 시작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로맨틱 코미디는 1990년대 중반까지 주요 장르로 소비되었다. 매춘만이 여성이 종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던 한국영화에 갑자기 전문직 여성이 등장하면서 매춘부는 영화 스크린에서 사라져갔다.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비극의 여주인공들이 애인 또는 남편과 대등한 자리에서 티격태격하는 코믹한 인물들로 환골탈태하게 된 모 지상주의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여성의 외모가 여전히 사회 능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발한다. 산부인과 는 출산과 자궁에 얽힌 이야기를 풀러감으로써 생리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그 생리적 활동의 결과 때문에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영화는 일상적 폭력, 특별한 폭력, 비만, 섹스와 출산, 혹은 섹스와 결혼 등 당대에 한국 여성들을 억누르고 있던 요소들을 나름대로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대부분 사회적 맥락에 연원을 두고 있고 실제 여성들이 겪고 있고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평등 속에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페미니즘 성향의 영화와 정 반대 되는 성향의 영화 스타일을 고수하는 감독으로 김기덕 감독을 거론할 수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여성 평론가들은 대부분 언제나 그의 영화에 혹평을 내린다고 한다. 그것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나타나 있는 여성에 대한 독특한 시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 속의 여성은 그의 영화가 거듭되어 가면서 약간씩 진보되어 가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억압되어있고 그 과거가 분명치 않으며, 그 우울한 표정의 근원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악어'에서 여자는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감독은 그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중간에 악어가 다른 남자를 만나며 그에 대한 의문점이 조금 풀리는 듯 하지만 의문점만 더 남길 뿐 충분히 대답하지 못한다. 여자는 악어에게 당하는 강간을 다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저항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악어가 없는 사이에 그곳을 빠져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남자에게 억압되는 여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남자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여성으로서의 형태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형태는 '악어'에서보다는 한
    인문/어학| 2004.09.04| 11페이지| 1,500원| 조회(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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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대사] 갑신정변의 정치적 의미
    Ⅰ. 서론우선 이 글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갑신정변이라고 칭해왔던 개화파가 1884년에 일으킨 정변에 대해 1884년 정변 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그러한 명칭으로 글을 전개해 나갈 것을 밝혀둔다.{) 주진오, 2000「1884년 정변의 정치구조 개편구상」『역사와 현실』47, 역사비평사 pp.217~218 각주인용그것은 정변이 일어난 1884년으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보다 훨씬 넘게 지나온 현재에는 '갑신'이라는 간지가 우리에게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갑오농민전쟁을 이제 1894년 농민전쟁이라 칭하는 것과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우리가 지금껏 배워왔던 1884년 정변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과 그로 인해 파생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역사 인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 비슷하게 보여진다. 그것은 부르주아 세력의 이해와 지향을 반영하고 있는 위로부터의 개혁 이라는 성격을 집중적으로 조명 받아 왔다는 것과 비록 한계는 있지만 근대화로 나아가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논점만을 가지고 정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학계에서도 지금껏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도하게 비판되어 그 실제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정변의 성격에 관해서 개화운동의 적절한 평가와 연구를 통해 그 참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그러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개화파의 연원과 분화과정을 통해 정변의 주도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하고 그러한 급진개화파의 대내외적 정치활동을 살펴보며 정변의 배경과 실패원인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더불어 당시 발표된 14개조의 정령을 분석함으로써 정변의 지향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 보고자 한다.Ⅱ. 본론1. 개화파 형성 분화 과정(1) 개화파의 분화에 대한 분석 성향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개화파 인사들을 1884년 정변의 참여여부,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나 수구의 침해를 용인하였다. 김옥균은 청국으로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독립을 주장하며 시무개화론자들의 입장 혹은 변법개화파이지만 독립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윤중의 입장과 대립하였다.당시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충분한 경제적, 인적 자원의 확보가 절실했는데 그를 위해서는 봉건적 수탈구조가 반드시 혁파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왕실과 민씨척족들은 봉건적 수탈 구조 안에서 부를 축적해 나가며 사복을 채우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재정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그러한 상황하에서 김옥균 등의 세력은 정변 정령에 나오는 문벌의 폐지, 지조법의 개정, 관리의 중간수탈을 막고 국가재정을 호조로 일원화하는 것 등을 명시해 부르주아적 발전의 물적 토대를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에 필수인 기간산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이를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과 차관교섭을 벌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 상황 안에서 개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변법 즉 정치체제의 개혁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미국 등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근대적 정치제도를 이룬 나라를 견문하고 온 홍영식이나 서광범 등에 의해 그러한 변법적 인식은 더욱 공고해졌고 그것은 결국 정변으로 표현되었다.자신의 세력기반이 대중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문벌세력이 강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개혁을 이루기 위해 14개조 정령을 통해 문벌폐지를 주장하였다.{) 하원호, 위의 책 pp. 14~172. 급진개화파의 정치외교활동1876년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원산, 인천의 3항이 차례로 개항되자 조선정부는 국제정세에 밝은 관리들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의 요인들은 점차 정부조직에로의 진출이 한결 용이해졌다. 그들은 정부조직 내에서 개화정책의 상당부분을 담당할 수 있었으나,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로 하여금 개화의식을 갖도록 유도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갑작스레 부각되는 이동인을 경계하게 되고, 그가 점차 급진개화파 쪽으로 경도 되는 것 같자, 그를 살해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광린, 1973『개화당연구』,일조각 p.101~108 박병주,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1881년 정부의 공식사절인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시찰단의 귀국 후 작성한 보고서와 견문록은 조선정계에 개화혁신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 주었으며 관찰을 마치고 돌아 온 신물들이 정부요직에 현저히 진출함으로써 당시 격렬했던 척사와 개화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권력기반이 강화되었던 것이다.여러 번의 기회가 무산된 후 김옥균이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은 1882년 4월이었다. 공식적인 사절로서는 아니었지만 왕의 특명을 받고 갈 수 있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일본의 근대적인 변모를 관찰하는 것이었으나 차관교섭과도 상당히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1882년 3월 25일刊), 이광린. 1973,『개화당의 형성』일조각 p.121, 박병주, 위의 논 문에서 재인용. 이 신문은 당시 부산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간행되었던 신문이었다.개항이후 국가의 재정지출은 날로 늘어갔으나 봉건적인 사회·경제적 모순이 극에 달했던 당시에 세입을 증대시킬만한 세원은 별로 없었으므로 국가재정난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화폐를 발행하여 재정을 보충하는데 급급하였다. 이에 외교에 능한 급진개화파 세력은 화폐남발을 비판하였고, 국왕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의 1차 일본 방문은 이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동료 서광범 등을 비롯하여 유학생들까지 수십 명을 동반하여{) 이현희, 1983, 『한국개화백년사』, 을유문화사, p.120 박병주,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일본으로 건너 간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민간지도자들과 정계 인물들을 만나 동북아정세를 논의하며 변모하는 일본국정도 시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김옥균이 차관교섭에 성공한 경우는 임오군란 후 1882년 10월 수신사절로 재차 일본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의 대원군 납치 후 고종은 기무처를 설치함으로써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신기선 등을 감생청에 임명해 개혁세력의 발언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들은 불필요한 기구의 폐지, 문벌의 폐지를 내세우며 몇몇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정변 주도세력들이 내세운 문벌의 폐지 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하겠다.그들은 외교를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과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내아문)을 설립하고 삼군부와 기무처를 내아문에 합쳤으며 업무분장 방식은 6조 체제를 따랐다. 또한 계속해서 5사체제에서 6사체제로, 내아문의 의정부 편입, 우정국, 박문국 등의 독립관서 분리 등 관제개혁을 계속해 나갔다. 이 시기의 이러한 정책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집행기구의 궐내 설립을 통한 왕권의 주도권 행사, 행정개편을 통한 불필요한 기구의 정비. 인재 등용의 개방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외아문에는 조사시찰단 출신이 거의 배제되어있고 내아문에도 후에 정변을 주도할 세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점 등을 함께 추론해 볼 때, 이러한 구상이 정변의 주도세력인 개화파만의 생각이 아니라 왕실과 척족세력, 동도서기론자들도 그러한 구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주진오, 위의 책 pp.220~224(2) 국외적 배경 및 실패원인정변 주도세력들은 개국론을 거치며 동도서기론으로 발전해온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사상적 구조 안에서 성장하며 출세가도 위에 있던 부류이다. 그러나 이들은 흔히 여기던 바와 다르게 실학, 북학론, 개국론의 발전과정으로 이어지는 사상과는 관계가 적다. 그들은 주로 일본을 출입하며 일본의 조야 관료 및 지식인들과 교류해 구미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았고 나아가 과거의 중국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고 만국공법적 국제질서로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바로 설 것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근대화의 모범으로 삼았던 일본의 명치유신과 집권층이 모범으로 삼았던 청의 양무운동이 서로 달라 충돌은 불가피했고 차관교섭 또한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정치적 과 『고종실록』과의 내용의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 국안에는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갑신일록의 내용이 고종실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다.기록에 남겨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았을 때, 정변세력들은 민씨척족을 제외한 다른 외척세력과 종친 및 대원군 세력, 동도서기론자들과 연합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거꾸로 정변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협소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또한 정변세력이 살해하고자 했거나 살해했던 민영익,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윤태준 등이 어떤 면에서 연합정권을 이루려 했던 세력보다 더 수구적이며 방해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유는 찾기 어렵다. 문호개방 이후 척사위정론자들과 대원군의 탄압을 받으며 왕실 중심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어찌보면 정변세력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단지 청의 양무운동을 근대화의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 청과의 사대관계를 통해 열강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는 점이 그들의 입장과 대립되었다는 이유로 살해하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주진오, 위의 책 pp.233~2404. 정령의 내용과 분석(1) 정령반포 사실여부의 논란당시의 14개조 정령의 반포 사실여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김옥균의 『갑신일록』도 소략해서 기록한 내용이므로 14개 조항 외에 더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령의 반포 여부에 대해서 야먀베 겐타로는 부정의 입장을, 이노우에는 몇몇의 내용만을 인정하였다. 또한 신기선의 국안을 토대로 정변 당시에 정령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한 연구가 있기도 하다. 갑신일록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는 판단도 있다. 갑신일록은 김옥균이 망명당시 기록한 것으로 일본 정부가 정변에 깊이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신했다는 것과 더불어 자유민권운동 세력과 정변이 무관함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
    인문/어학| 2004.09.04| 13페이지| 2,000원| 조회(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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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지리] 인구변천이론
    ▶ 들어가며인구는 인간생활의 중요한 기제이다. 적정한 규모의 인구는 규모의 경제를 가능케 해서 경제발전을 가져오지만, 과잉인구는 식량난, 주택난, 빈곤, 환경파괴와 같은 문제를 야기하여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인간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또한 출생, 사망, 인구이동과 같은 인구학적 현상들은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세계의 인구는 여러 종합적 원인들로 인해 늘 변화하여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 각 지역의 인구가 변천해 온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널리 적용되는 하나의 모형으로서 세칭 인구변천이론(人口變遷理論)이라 불리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서구 학자들이 Marx의 상대적 잉여연구설 을 거부하고 Malthus의 인구증가와 식량증가와의 관계에 동의하면서, 저개발국가들의 출생률이 낮아지기는 희망하는 속에 지난 200여 년간 서구 유럽에서 경험한 인구학적 패턴에서 나타난 변화를 모델로 삼아 발전시킨 이론이다. 다시 말해 인구변천이론은 역사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변천한 인구현상을 관찰한 결과, 즉 경험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본래 인구변천이론은 기본적으로 출생과 사망의 추세에 따른 인구성장의 변동을 유형에 따라 분류한 순수한 인구학적 요소만 가지고 인구성장을 이해하고자 한 이론이지만, 실제의 연구에서는 공업화 및 근대화에 따른 사회변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이론은 역사적 맥락에서 인구의 성장을 조망하고 인구변동의 전사회적 결과에 관심을 갖게 하며 20세기에 들어와 인구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인구변천이론의 핵심적 내용은 무엇인지 고찰해보고, 이 이론을 토대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인구변천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문1. 인구변천이론의 이해지난 100여 년 동안 유럽에서 나타난 인구현상은 출생률이 저하되면서 사망률과 출생률과의 차이가 줄어들어 있는 후기확장(late expanding)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출생률이 감소되는 이유는 도시화·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연령이 높아졌으며, 자녀에 대한 가치관 및 가족계획, 피임법의 보급에 기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개발도상국들 가운데서 현재 경제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이러한 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제4단계저출생률과 저사망률을 경험하게 되는 단계로 인구증가 면에서는 안정된 저위정지(low-stationary) 단계라고 불린다. 인구변천을 이미 다 끝낸 서부 유럽, 북미, 일본 등의 선진공업국들이 이 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단계에서 출생률의 변동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경기 변동이나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녀의 가치에 대한 의식구조가 변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구변천이론은 인구성장과 경제발전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제1단계에 속한 나라들은 주로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국가들로서 최근 사망률이 다소 감소되고 있으나 아직도 25∼30%로 높은 편이며, 문맹률도 70%를 상회하며 경제발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지역들이다. 제2∼3단계에 속한 나라들은 대부분은 농업위주의 경제체제가 산업화·도시화의 경제체제로 바뀌어가고 있는 나라들이다. 제2단계에 속한 나라들은 아프리카 일부 지역, 남부 아시아, 동남 아시아와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서 1인당 GNP가 매우 낮은 편이다. 제3단계에 속한 나라들은 동부·동남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일부 국가들로서 아직도 한편에서는 자급적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급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되는 복수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제4단계에 속한 나라들은 상당히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비율도 매우 낮다. 제2차, 3차 및 4차 산업활동이 지배적이며, 교통통신분야의 발달이 현저하다. 현재 우리 나라도 4단계에 접어들었으며, 강력한 인구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중국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회의적인 질문을 하였다. 첫째는 멀지 않은 장래에 과연 출생률을 저하시키는 데 필요한 전제적 상황, 즉 출생률의 감소를 가져올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느냐는 충족성에 관한 질문이다. 두 번째는 만약 그러한 출생률의 감소현상이 일어난다고 가정할 경우, 인구변천의 초기단계에 있던 당시 유럽국가들에게서 급격히 감소되는 사망률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 급속한 속도의 출생률 감소가 적절한 시기에 일어날 수 있겠는가하는 적절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특히 선진국가들과 개발도상국가들간에 자연증가로 인한 인구수의 절대적인 규모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과연 개발도상국가의 인구성장 딜레마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고, 또한 개발도상국가에서 적절한 시기에 출생률을 저하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필수적으로 수행하여야 되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인구변천이론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높은 경제발전수준을 이룩하는 것이 출생률을 저하시키는 전제적 조건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구변천모델은 유럽,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경제·사회·인구학적 현상간의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결과로서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인구변천법칙을 적용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현재까지의 인구변천을 겪고 있는 사회의 경험과 이 이론이 제시하고 있는 변천의 양상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은 확언할 수 있다.3. 인구변천이론과 그 실제성지금부터는 위에 나타난 인구변천모형이 어느 정도 실제 인구의 변천과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스웨덴의 인구변천과정과 비교하여 보기로 하자.181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스웨덴의 인구변천은 1860년까지 노우테스틴이 주장한 인구변천의 제2단계인 전기과도기 성장 단계를 거치고, 1860년에서 1930년까지 유배우출산율이 높은 수준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낮은 수준으로 하강하게 된 시기를 인구변천의 출발시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대부분의 서구지역 국가들에서는 출산율 하강의 시작이 1900년을 전후하여 약 40년이란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음이 통계를 통해 밝혀졌다.자세히 밝혀보자면, 1900년도 이전 20년 그리고 1900년도 이후 20년에 걸쳐 출산율 하강이 시작되었고, 가장 먼저 출산율 하강이 시작된 곳은 프랑스이며 가장 늦게 출산율이 하강하기 시작한 지역은 아일랜드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아일랜드의 미혼율이 여타의 어느 지역보다도 높았고, 비교적 늦게까지 유배우출산수준이 높았던 현상은 다른 지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에 비해서 잉글랜드나 웨일즈지역의 유배우출산율 하강은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긴 하지만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늦게 유배우출산율의 하강이 시작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업화나 공업화라는 단일요인이 출산율을 하강시키는데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산업화의 영향이 프랑스를 휩쓸기 훨씬 이전에 이 지역의 출산율이 하강하였다는 사실은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경제적인 요인과 결부되어 출산수준의 하강을 초래하는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들 서구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에서는 아직도 출생률이 40~50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어, 이미 인구변천을 종료한 서구 및 몇몇 선진국가들의 출산수준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음을 〈표2〉가 지적해 주고 있다.{지역출생률19801994(후진지역)케냐말라위나이지리아우간다에티오피아세네갈555250504948444744514643(선진지역)프랑스영국이탈리아일본벨기에스웨덴덴마크독일 스위스*************110(서독)8*************31012〈표2〉각국의 출생률 격차유엔의 추계에 따르면 2000년까지 아프리카 대륙의 출생률은 42.6의 수준에, 남미지역의 출생률은 25.5의 높은 수준에 머무를 것이지만 북미의 출생률은 14.3, 생잔율이 증가하여 Cm은 상승하는 반면에, 희망하는 가족의 규모는 적어서 Cd는 하강하기 때문이다.제3단계는 Cm이 Cd를 약간 능가하게 되며, 마지막 제 4단계에서는 Cm 이 Cd를 훨씬 능가하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자녀의 수보다는 실제로 원하는 자녀의 수만큼만 갖게 된다는 것이다.이와 같은 Tabbarah의 모델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달라지는 출산의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특히 이 모델에서는 이상적인 가족규모라는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 상당히 획기적인 사고이다.그러나 Tabbarah의 인구발전모델에서도 검토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가족의 규모를 결정짓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도시화, 교육수준, 소비수준 등과 같은 요인들이 규명되어야 하며, 또한 이 모델이 예측력을 갖기 위해서는 이들 사이에 상호관계성 및 인과관계가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Beav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상적 가족규모 라고 생각되는 자녀의 수는 선진사회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무계획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코 이것이 개인의 의사결정의 결과라는 가정이라든가 또는 어떤 하나의 규범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위에서 설명되어진 바와 같이 사회 경제적인 발전과 이상적인 가족규모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5. 우리나라의 인구변천1920년 이래 시작된 우리나라의 인구변천과정은 인구변천모델에 적용시킬 경우 비교적 잘 부합되지만, 선진국에서는 15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인구변천과정을 우리나라는 불과 60 여 년 동안에 이룬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걸어왔던 인구변천의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그 내용을 단계별로 살펴보도록 하자.제 1 단계 ( ~1930년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인구특징은 다산다사(多産多死)형 이었다. 인구 1000명당 40~45명 이라는 높은 출생률을 나타냈으며 사망률도 인구 1000명당 30명을 상회하여 인있다.
    인문/어학| 2004.06.10| 11페이지| 1,500원| 조회(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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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조선)] 19세기 전반의 국내정국과 사회혼란 평가A+최고예요
    조선시대 삶과 문화 - 19세기 전반의 국내정국과 사회혼란★ 目 次 ★1. 서론2. 國內靖國1) 정치(1) 정치기강의 문란 - 세도정국(勢道靖國)의 성립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②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③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절정(2) 정부의 대책 - 세도정권의 미봉책(彌縫策)①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② 삼정이정청 설치③ 삼정이정청 추진의 실상과 한계2) 사회·경제 - 삼정(三政)문란① 전정(田政)② 군정(軍政)③ 환곡(還穀)3) 사상① 민간신앙(民間信仰)의 발생② 천주교(天主敎)의 전파③ 농민층(農民層)의 동학(東學)사상④ 중인들의 개화사상(開化思想)⑤ 유생들의 위정척사(爲政斥邪)3. 社會混亂1) 민란(民亂)과 변란(變亂)의 발생 배경 및 발발(1) 인동에서 일어난 변란(2) 단천과 북청의 민란(3) 곡산 민란(4) 홍경래의 난(5) 진주 민란(6) 광양 변란(7) 이필제의 난2) 민란의 의의4. 결론- 1 -1. 서론(緖論)19세기 전반기는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전단하던 세도 정치 시대였다. 세도 정치의 특징은 왕권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권력이 하나의 문중(門中)이나 특정한 개인에게 이양되어 버린데 있다. 세도 정치는 그 이전, 즉 18세기 특히 그 후반기의 역사 전개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정치 체제라고 볼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당쟁(黨爭)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약간의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조(英祖) 때에 와서 탕평책(蕩平策)이 거론된 것은 실질적으로 큰 효과가 없었다 하여도 붕당 중심의 정치 현상에 대한 반성내지 반발(反撥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출현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대두는 구세력에게 당쟁적인 차원이 아닌 새로운 위협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대한 일정한 긍정적인 자세와 수용 태세로서도 그러하였고 특히 토지 및 농촌 문제에 대한 이해와 상공업(商工業) 및 대외 무역(貿易)의 발전을 추구한 점에서도 그러하였다. 다년 헌종이 즉위하고부터 다시 풍양 조씨 세도가 전개되는 기반이 되었다.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헌종을 보필한 조인영은 이조판서직에 오르고 조카 조병현이 형조판서가 되어 인사, 형사, 재판권을 장악, 강력한 척사(斥邪)정책을 펴나간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자도 많았는데 조정에서 언론을 맡은 관료와 재야(在野)의 유생들이 평소의 혐의와 원한에 따라 천주교를 기화(奇貨)로 삼아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歸養) 보내지는 등 척사정책이 정치 보복의 수단으로 오용(誤用)되기도 하였다. 기해박해(己亥迫害)는 1838년 겨울에 시작해 1840년 봄까지 1년 넘게 지속되었는데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의 집안이 득세해 척사정책에 적극 관여하였고 평소 천주교 배척에 소극적이던 안동 김씨에 대한 정치적 반격으로써 풍양 조씨 세도가와 그를 후원하던 정치세력의 주도를 꾀할 수 있었다. 조인영은 1841년 영의정이 되어 조씨 세도를 구축하였으나 1849년 헌종이 죽자 풍양 조씨의 가문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풍양 조씨는 벼슬로 보면 명문임에 틀림없다. 조상경 이후 직계로 7대에 걸쳐 이조판서가 게속해서 배출되었고 안동 김씨 일당 전제의 견제 세력이 되어 정국 안정의 도모를 꾀하기도 하였다. 풍양 조씨가 실각하고 안동 김씨가 독주했을 때 오히려 정국은 혼미에 빠졌고, 철종 말기인 1862년(철종13)에는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나 여흥 민씨에 비해 장기간 정치 전반에 걸친 완벽한 세도는 부리지 못했다.③ 안동 김씨 세도의 절정 (철종 대)1849년(헌종15) 6월 헌종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독단으로 순조의 아들인 철종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가계 상 철종은 헌종의 아저씨뻘에 해당하였고 아저씨가 조카를 이은 꼴이 되어 왕통상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안동 김씨는 항렬의 순서로 따져 헌종과 익종을 제치고 철종의 아저씨뻘인 순조를 바로 잇게 해 수렴청정을 하제시키며 권력적 수탈을 방지하는 선에서 현상적 치유를 꾀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결렴화, 금납화 추세에 편승한 전전 폐단은 그대로 재현되었다.군정(군정이정책)의 경우는 우선 중앙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헐역(歇役) 및 피역(避役)의 여러 형태를 모두 폐지함으로써 지방 단위로 지속되어온 '군다민소'의 폐단을 시정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전의 군역제를 그대로 시행하거나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제도(동포제) 중 지역민이 원하는 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동포세의 경우도 마을에서 부담해야할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원하는대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동포세는 마을의 군역부담을 마을민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되므로 군역세의 신분적 차별을 완화시키는 내용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군정이정책은 군역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은 아니였으며 민란의 수습책으로서도 불충분한 소변통론적 지향을 보이고 있으나 그 가운데 동포제의 실시를 공식 인정한 것은 군역이 점차 신분적 부세의 성격을 벗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6 -환정(환정이정책)에 대해서는 환곡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그 동안 환곡세로 담당하던 재정부분을 전결에 옮겨 받도록 결정하였다. 결국 정부가 마련한 삼정이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농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환곡을 없애고 환곡이 담당하던 재정분은 전결세에 덧붙이기로 파한귀결론 이었다. 파환귀결은 환곡제를 영원히 폐지하고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모곡 수입의 감소에 대한 급대는 8도(道) 4도(都)의 모든 시기실결(時起實結)에 1결당 2냥씩 거두어 보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남은 환곡은 일단 돈으로 거우었다가 다시 곡식을 마련하여 유지키로 하였다. 빈부의 다과의 구별이 어려운 호를 대상으로 한 호검(戶 )이 아니라 토지를 대상으로 한 획기적인 조치였으나, 절목이 반포된 뒤 환곡에 재정을 의지하던 아문에서 반대를 하고, 농민들도 정부가 환곡제도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이전에 이서배가 중간에서 가로챈 환곡 원곡을 농 운영에서 해결해야 했으므로 결국 농민들에 대한 수탈의 강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환곡부담자 중에서도 향촌사회의 유력자인 양반지주·토호들은 환곡부담에서 벗어나 결국 분급대상자의 축소로 잔여 농민들에게 부담이 편중되었다. 게다가 정규 이자곡 외에도 부가적으로 징수하는 수량이 증가하여 실질적으로 고리대화함으로써 환곡의 운영은 극히 문란한 상태가 되었으며 농민들의 궁핍화를 가속시켰다. 삼정(三政)의 문란과 부패는 어느 시기나 나타났던 것이지만 특히 세도(勢道) 정치 아래에서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수령·아전들의 횡포와 그 운영상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조세 수취가 신분제와 지주·전호제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결국 조선 후기의 경제변동 속에서 몰락하고 있었던 농민들은 정치적 혼란과 결부되면서 진행된 삼정의 문란으로 더욱 궁핍해져 갔던 것이다.3) 사상(思想)① 민간신앙(民間信仰)의 성행사회가 변동하고 기존의 가치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비기(秘記)·도참(圖讖) 등 예언사상이 유행하였다. 이는 주로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에 근거해서 병화·전쟁을 암시하고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며 동시에 은신·피난처까지 예시하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행한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는데 이것은 이씨 왕조의 멸망과 정씨의 왕조 개창을 예언하면서 전란 발생시 피난처 '10勝地'를 밝힌 책이었다. 예언사상은 양반사회의 모순이 첨예화(尖銳化)되는 19세기 초엽부터 현저하게 나타나 정부를 비방하는 익명(匿名)의 방서(榜書)·괘서(掛書) 사건이 빈발하였고 그 현실부정적 성격은 당시 민중봉기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예언사상이 정치적·사회적 성격을 띤 것이라면 이것과 짝하여 민간에 깊이 침투해 있던 무격신앙(巫覡信仰)은 개인적·구복적 성격의 민간신앙이었다. 이는 천지만물에 모두 귀신이 있어서 이들의 조화를 통해 인간사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정해진다는 고대 이래의 신앙 형태로서 조선 후기까지나 이들은 서양 근대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니 이는 전통적인 유교윤리는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동양의 정통적 정신을 지키되 서양의 새로운 문물은 받아들이자는 이론)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당시 정계를 주도한 민씨 일파도 청을 통해 서양문물의 우수함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화사상은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정부의 주요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기본방향이 되었다.⑤ 유생들의 위정척사(爲政斥邪)문호개방 이후 개화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11 -이 위정척사운동은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당시 이항로(李恒老)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내세우며 양이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양물을 배척하고 통상을 반대하였다. 그는 존체통(尊體統)·개언로(開言路)등의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국가의 내면적 단결을 강조하였다. 이 때 기정진(奇正鎭)도 같은 내용의 척사론(斥邪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의 주장은 당시 대원군의 쇄국(鎖國)·척양(斥洋)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화·통상의 추세에 따라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자 최익현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5불가소(不可疏)를 올렸고 이어서 경기·강원 유생들의 절화소(絶和疏)가 잇달아 올려졌다. 그러나 국왕과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개항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의 양상도 달라지게 되었다. 1880년(고종 17)에 김굉집이 을 일본에서 들여와 왕이 개화의 필요성을 고취시키고자 이것을 관리뿐 아니라 유생들에게 까지 돌려 읽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1881년에는 격렬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상도 유생
    인문/어학| 2003.10.14| 19페이지| 1,500원| 조회(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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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이해교육] 세계 시민교육을 위한 국제이해 교육 평가A+최고예요
    국제이해교육의 탄생배경에는 전쟁이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재난과 파멸 그리고 아픔을 겪으면서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재발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결의를 하게되었는데 그 결의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국제연합'이었다. 이와 같은 평화의 열망은 전후 유럽의 지성계를 휩쓸었으며 그 물결은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 즉 유네스코의 설립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창기 유네스코 활동은 교육 과학 문화를 통하여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바로 국제이해교육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그러한 국제이해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첫째 국민간의 이해이다. 타 국민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없애자는 것으로 이를 제거하려는 노력에서부터 국제이해교육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인간의 존엄성 인정이었다. 사람마다 여러 다른 점으로 인하여 차별대우를 받을 수 없으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강화함으로써 그들 기구들이 추구하는 평화의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미 세계화를 통해 국가 간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세계단일화'의 시대에 들어섰다. 세계화의 양상과 과정은 바로 국제이해교육의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유네스코에서 상용되어져온 국제이해교육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는데 이는 바로 국제이해교육의 개념변천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이해교육이 포괄하는 개념상의 영역을 제시해 보자면, 국제이해 및 협력교육, 평화교육, 인권교육, 민주주의 교육, 관용교육의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국제이해교육의 활동은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국제이해교육의 목표와 목적에 근거하여 활동되어져야 하는데 Pike & Selby는 인가의 잠재력 차원을 고려한 후, 국제이해교육의 목적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였다.첫째로, 세계체제 의식면에서 학습자들이 하나의 세계체제 모형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세계체제의 특성 이해 그리고 자신들의 역량과 잠재력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습득둘째로,와 지구개발과 사조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정의, 인권과 책임성의 개념을 공감적으로 이해하여 지구상태와 지구개발과 사조들을 이해하는데 적용할 수 있게 하며, 건강한 지구에 대한 관심을 미래지향적으로 숙고하며 개발하기.넷째로, 참여의식과 준비 면에서 개인 각자가 선택한 행동이 지구촌의 현재와 미래에 집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하며, 민초에서 세계적인 수준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데 필요한 사회 정치적 기술을 배양하기다섯째로, 과정 면에서 학습과 인성개발은 고정되거나 최종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계속적인 여행이라는 점을 배우며, 새로운 여행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모험적이지만 새 생명을 활기 있게 불어넣는 일이라는 것을 배우기 등 다섯 가지 면에서 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그러면 국제이해 교육에서 학습되어야 할 그 내용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지식의 영역, 태도와 가치 영역, 기능의 영역으로 분리에 영역에 따른 제반 내용들을 학습하게 된다.내용을 학습하게 되면 거기에 따른 평가가 뒤따르게 되는데 국제이해 교육의 평가는 학습자가 얼마나 세계수준의 안목과 타인 지향적인 가치인식, 존재하는 지구촌의 문제를 공감하고 있으며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함양한 사람이 되어 있느냐의 상호인식과 공감의 깊이의 수준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국제이해교육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스스로 내면화하여 현장의 실제적인 삶에 응용하여 보다 더 나은 모습의 양태로 자기주변의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실천적 효과가 있는 교육방법이 선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의 원리가 적용 될 수 있어야 하는데1)현실성·실천성의 원라, 2)다양성의 원리, 3)적절성 및 효율성의 원리, 4)내면화 및 자발성의 원리, 5)인격체 존중의 원리, 6) 참여 및 상호학습의 원리-협동학습의 원리, 7)유희·오락성의 원리, 8)지역성의 원리, 9)목적의 원리, 10)통합성의 원리, 11)포괄성의 원리, 12)기회제공이해교육의 이념을 추출해 내는 일은 국제이해 교육의 자강 정통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헌장 전문에는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의 옹호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유네스코라는 국제기구의 탄생과 존립의 이유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명구이다. 유네스코는 세계평화를 위한 기구이며 이를 이룩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평화에 대한 인간의 마음을 길러주는 교육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유네스코 헌장 제1조에서는 "이 기구의 목적은… 정의, 법의 지배 및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을 함양하기 위해 교육, 과학 및 문화를 통해 국민간의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평화와 안전에 공헌하는 것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정의, 법의 지배와 아울러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 존중을 평화와 안전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부인되고 인간의 기본적 원리가 침해되는 상황에서 평화의 실현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국제이해 교육이란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지향하는 교육이다. 유네스코 헌장 전문에도 "서로의 풍습과 생활에 대한 무지는 인류 역사를 통해 세계의 제 인민 사이에 의혹과 불신을 초래한 공통적인 원인이며 이 의혹과 불신 때문에 제 인민의 불일치가 너무나 자주 전쟁을 발발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전쟁과 평화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유네스코의 시각과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제이해교육은 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교육이며, 관용의 정신을 지향하는 교육이고, 세계문제의 공동 해결과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교육이다.국제이해 교육의 실제에서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세계는 다극화, 문명화됨으로써 많은 방향의 서로 다른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7,80 년대에 들어와 독재에서 민주체제로 이행한 나라가 증가함으로써 서구적인 인권개념과 민주주의가 세계를 장악하리라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으나 아시아 이용하는데 대한 반발이 강화되고 있다.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서구문명의 보편성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문명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어느 한 문명이 보편성을 강요할 때 문명간의 충돌이 발생하고 그것은 비극적인 인류의 대규모 전쟁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얘기이다. 모든 문화는 타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불변의 문화, 고정적이고 정체된 문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세계인류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면 모든 문화에 대한 존중, 문화의 다름을 관용하는 것에 대한 존중으로 귀착되게 마련이다. 문화의 다양성과 다원성은 생물학적 다양성의 장점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다원주의의 장점은 그것이 인류경험, 지혜, 행위가 축적된 보물들과 직접 관련하여 있다는 에 있다. 타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자문화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문화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문화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상치되지 않는다.그러면 UN과 NGO를 통해서는 어떻게 세계이해를 할 수 있을까?UN의 목적은 세계 모든 나라들을 한데 모아 정의, 인간의 존엄성, 모든 이들의 행복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평화와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하는데 있다. UN은 모든 국가가 국제적 문제를 다룰 때에 전 세계의 상호 의존성과 국가이익이라는 양 측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UN은 주요기관인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기능정지), 국제 사법 재판소, 사무국 등으로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UN헌장 제7장에 기초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권한을 바탕으로 규정과 관례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 사항으로는, 1)집단 안보, 강제조치 활동, 2) 평화유진 활동, 3) 평화 강제 활동, 4)제재활동, 5)평화조성 및 예방 외교활동, 6) 평화구축 활동, 7) 군축, 군비통제 활동 등이 있다. 위의 국제통화기금 즉, IMF의 구제를 받은 경험이 있다.탈냉전시대의 국제연합은 평화유지를 위한 유엔 상비군의 설치 문제, 안전보장이사회의 대표성 개선 문제 재정 확보문제 등 다양한 사항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 연합의 집단 안전 보장체제는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나 국제연합 군대의 지휘문제, 전쟁목표의 설정문제, 예산지원문제 등 개별국가의 이해관례에 따라 국제연합의 평화회복 활동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새삼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반면 시민들은 다원적이고 상호의존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세계의 변화는 더 이상 주권국가 원칙이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지구시민사회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지구시민사회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형성된 인류적 연대망이다. NGO는 이러한 지구시민시회운동을 대변하는 주체이다. NGO란 즉 비정부 기구란 뜻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정부에 속하지 않는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시민 집단을 말한다. NGO활동은 이익단체가 오직 구성원들의 이익과 복지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정치정당은 권력 획득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NGO는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지구적인 목표는 인간 존엄성, 지속 가능한 개발, 문화적 가치의 다양성이며 그들의 업무는 그 범위가 매우 넓고 다양하다.새로운 미래세계를 내다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미래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인생을 올바로 살아가기란 거의 어렵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미래를 그려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수요 핵심적인 미래세계의 내용으로서는 컴퓨터와 생명공학 그리소 환경생태문제가 인류사회의 특징을 형성해 나가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축약된 가상을 해볼 수 있다. 미래는 인터넷을 통한 전자시대로써 그 정보의 방대한 양과 신속성의 용이함을 누릴 수 있고, 바이오 생명과학의 시대로써 인간복제도 실현 가능한 세계이다. 첨단 자동화로 우리는 손가락 까닥할 필요 없이 편가.
    교육학| 2002.12.14| 5페이지| 1,000원| 조회(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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