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荀彧)은 조조의 참모였다. 그가 자원하여 조조의 신하가 되었을 때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내자방이로구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방이란 한나라 고조의 참모였던 장량의 자다. 조조에게 순욱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잘 드러내는 비유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지막에 창업공신을 모두 죽여버린 고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욱의 비극적인 최후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순욱의 자는 문약(文若)이고, 연희 6년(163)에 영천군 영음현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지명으로는 하남성 성도 정주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내려간 곳에 위치한 허창부근 중원땅이다. 순욱은 후한시대의 소위 청류(淸流) 에 속하는 명문가의 자손이다. 조부인 순숙은 순제에서 환제에 이르는 시기(125∼167)의 유명한 인물이였다. 청류 란 후한의 시조로서 한나라 황실을 제건한 광무제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정착시킨 유교를 신봉하는 엘리트 지식인. 관료층을 가리킨다. 이 청류들은 특히 환관들을 증오하여 환관들을 탁류 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청류 라고 불렀다. 순욱의 조부 순숙은 검, 곤, 정, 도, 선, 상, 숙, 부라는 여덟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모두 재능이 뛰어나서 팔룡(八龍) 으로 일컬어졌다. 둘째아들인 곤이 순욱의 아버지로서 제남(산동성)의 대신의 되었다. 팔형제중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여섯 번째 상인데, 순욱의 숙부다.순욱이 살았던 시대는 인물에 대한 품평이 왕성한 시대였으므로 이와 같은 가계의 전통이 그의 출세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그의 내면에 뿌리깊게 존재했던 질서의식 혹은 명분을 중시하는 의식의 근원도 청류파로서 그의 가문을 살펴보면 수긍이 된다. 그가 최후에 조조의 신뢰를 잃자 비장한 죽음을 택했던것도 이러한 명분 의식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남양의 하옹이라는 인재발굴의 명사는 일찍이 고향에 있을 때 순욱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왕자(王者)를 보좌할 재능이 있도다 라고 평했다.이 시대의 인물평에서는 용모도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삼국지]의 [순욱전]에서는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의 유력자에게 이주를 권하였으나 조상대대로 살아온 토지에 대한 집착으로 그들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영천 출신으로 기주 장관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사람들을 모집했다. 한복은 반동탁 연합군의 동맹자중 한사람으로 그 즈음에는 업에서 아군의 물자 보급은 담당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순욱은 한복을 따라 일족을 데리고 업으로 갔다. 과연 나중에 동탁은 동방으로 부장(部將)을 파견했는데 그때까지 영천과 진류(개봉의 남동쪽)에 머무른 사람들의 대부분은 살해당했다. 한편 순욱이 업에 도착해서 보니 반동탁 연합군 가운데에 내분이 일어나 원소가 한복의 기주 장관직을 빼앗아버렸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초평 2년(192) 7월이니까 순욱이 업에 도착한 것은 이 사건 직후인 듯 하다.이미 동탁 타도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세력 확대를 꽤하고 있던 야심가 원소는 순욱이 온 것을 대단히 기뻐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원소도 또한 청류파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청류파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순욱은 친형인 심뿐아니라 같은 영천 출신인 신평, 곽도 등의 사람들이 원소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원소는 대업을 이룩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주저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스스로 찾아간 사람은 다름 아닌 조조다. 조조가 매우 기뻐하며 나의 장자방일세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때는 초평 2년, 순욱이 29세 때이고 조조는 여덟살 많은 37세 때의 일이다.순욱이 왜 조조를 선택했을까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문제다. 조조가 진류군 기오에서 반동탁의 군사를 일으키고 분무장군이라고 자칭하기는 했지만 한나라의 위계질서에서 보면 관직은 효기교위에 불과했다. 원소가 발해군 태수이고 다른 반동탁 동맹자들도 주와 군의 목 혹은 자사, 태수라는 지위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조의 지위는 너무 낮았다. 그것은 단순한 명목상의 문제가 아니라 기반이 되는 근거지에 대한 지배력,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 등에도 관계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 그래서 조조는 도겸의 책임을 추궁하여 서주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구실이고 본래는 기반확대를 노린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평 원년에 조조가 서주를 공략하러 출정한 사이에 연주를 수비하고 있던 장막과 진궁이 모반을 꾀하여 여포와 결탁하고자 했다. 여포는 동탁의 부하로 용맹을 떨치던 장수였는데 배반하여 동탁을 죽였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다. 그 후 내부 항쟁으로 장안에서 쫓겨나 중원 땅에 터를 잡고 군웅의 한 사람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조조로부터 출정 후의 뒷일을 일임받은 순욱은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장막이 보낸 사신이 와서, 여포장군이 조조의 도겸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오셨으므로 식량을 공급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망설였으나 순욱은 곧바로 이것이 장막일당의 반란이라는 것을 깨닫고 신속하게 대처했다. 이때 성안에 남아있던 병사는 소수였고 장교와 상급관리들의 대부분도 반란에 가담해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급히 사신을 보내 곧바로 동군 태수인 하후돈을 불러들여 그 날 밤으로 주모자 수십명을 처형했던 것이다. 거기에 예주 자사인 곽공이 수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입성했다. 곽공도 여포와 공모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곽공은 순욱에게 회견을 신청했다. 하후돈 등은 걱정이 되어 순욱에게 가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순욱은 이를 뿌리치고 의연하게 곽공을 만나러 갔다.곽공과 장막 일당이 평소부터 결탁하고 있었을 리 없어. 지금 그가 달려온 이유는 아직 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곽공이 반란 세력에 가담할 결심을 굳히기 전에 설득한다면 아군으로 삼지 못할지라도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야. 처음부터 의심해서 덤빈다면 오히려 곽공의 비위를 건드려 우리의 적이 되도록 조장하는 것이 될 것이야. 라는 것이 순욱의 판단이었다. 과연 곽공은 그때 태도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순욱의 태도에서 위축된 기색이 없자 견성 공략은 시기 상조라고 판단하고 군사2년(195), 순욱의 방책대로 연주의 농작물 수확이 끝난 다음 여포를 공격하여 패퇴시킴으로써 연주를 평정하는데에 성공했다. 이해의 10월, 조조는 헌제로부터 정식으로 연주목에 임명되었다.순욱이 정국과 함께 조조에게 강력히 권유한 중요 정책중의 또 하나는 건안 원년(196)에 헌제를 초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동탁이 장안 천도를 강행한 이래 헌제는 장안에 살다가 조정의 내분으로 흥평 2년 다시 낙양으로 돌아갔고, 연말에는 안읍(산서성 하현)까지 이동하였다. 다음해 건안 원년에 황제는 6년만에 황폐해진 낙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을 기회삼아 원소의 진영에서도 조조의 진영에서도 헌제를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원소측 진영에서는 더 이상 황실의 부흥도 어렵고 오히려 행동을 속박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비추어 반대론이 크게 일어났다. 조조의 진영에서도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순욱은 헌제를 봉대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그의 의견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옛날 춘추시대 때, 진(晋)나라 문공이 주나라의 양왕을 수도로 돌아오게 했을 때 제후들은 사물에 그림자가 뒤따르는 것처럼 진 문공에게 복종했습니다. 한나라 고조는 항우를 정벌하려고 할 때 먼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위해 상복을 입었으므로 그 결과 천하 민심을 복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천자가 수도를 떠나신 다음에 장군은 제일먼저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단지 산동에서 난이 발생했으므로 관우(함곡관의 서쪽)로 원정갈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곤란을 무릅쓰고 군대를 파견해서 황제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는 해도 마음으로는 황실의 일을 항상 걱정해오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장군이 천하를 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천자의 가마는 옛 서울인 낙양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만 낙양은 너무도 황폐해져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지식인은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울 것을 염원하고, 백성은 옛날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삼키고 있습있다면 처음엔 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하게 되었고, 재능이 없다면 처음엔 강하더라도 반드시 약하게 되었습니다. 한나라 고조가 힘을 떨친 예를 생각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라고 조조를 나무랐다. 그리고 원소가 질투와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약하다는 것과 군에 대한 통솔력이 약하여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단지 명문가의 배경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 다음, 조조의 재능을 일일이 열거하여 그의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선 여포를 공격하고 후에 원소와 대결할 것을 건의했다. 순욱은 상서령으로서 문서관리의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조조에게 올린 의견서 전부를 처분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그 책략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라가 창업했을 당시의 경험을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으면서 적 내부의 약점을 찾아내어 당면한 적을 상대로 전력을 집중하여 임하자는 것이 주된 방책이었던 것 같다.다음해 건안 3년(198), 조조는 남쪽에 장수를, 동쪽에 여포를 제거함으서 숙원이었던 서주를 평정하게 된다. 그런 다음 마침내 원소와 대결을 하게 되었다.건안 4년(199), 원소는 유주의 공손찬을 격파하고 유주, 기주, 병주라는 황하 이북지역에서 지배권을 구축했다. 빈정대길 잘하는 공융이 순욱에게 말하기를. 원소의 땅은 넓고 병사는 강하지. 그뿐인가? 전풍과 허유라는 지략가가 전략을 짜고 있고, 심배와 봉기라는 충신이 그 일을 맡고 있으며, 얀량과 문추라는 장수를 초빙해서 병사를 통솔하고 있다네. 승리는 어려우이! 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순욱은 반론을 폈다.원소의 군대는 많다고는 하나 군율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네. 전풍은 강직해서 윗사람을 거역하고, 허유는 탐욕스러워서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인물이지. 심배는 독단적이면서 무모하고, 봉기는 경솔하고 자신만을 믿는 사람이지. 원소는 심배와 봉기에게 부배중의 일을 맡기고 있지만, 만일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긴다고 해도 좌시하지는 않을걸세. 만일 관대하게 그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