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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산업의 성장과 그 요인
    ▶ 영화산업 성장의 내부환경 요인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조건은 많은 요인들로부터 찾을 수 있으나 대표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생산측면에서 질 좋은 영화가 양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신선한 기획을 바탕으로 재능 있는 감독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금융자본 등 양성화된 투자자본이 들어와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국내시장에서는 외국 직배사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메이저 배급사가 출현하면서 2000년 이후에는 CJ엔터테인먼트와 시네마서비스의 양강 구도를 형성하였다. 메이저사가 출현함에 따라 배급전략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스크린 수의 증대와 접근 편이성을 높인 인프라로서 멀티플렉스가 성공적으로 시장에 자리 잡았다. 그밖에도 한국영화에 관한 사항이지만, 스크린쿼터가 유지되어 한국영화의 자생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요인들을 크게 투자, 제작, 배급, 상영, 소비자의 5가지 요소들로 나누어 순기능과 역기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1) 투 자1990년대까지 한국영화 제작비는 지방 배급업자에게 선매(pre-sale)하여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를 전후하여 삼성, 대우 등 대기업들이 영화, 케이블TV 등 영상시장에 진출하였으나 IMF와 영화 산업에서의 실패로 인해 철수하였다. 그 후 2000년대 들어오면서 벤처 붐과 맞물려 투자할 곳을 찾던 투자자금들이 문화산업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1998년 미래창투를 시작으로 영상전문투자조합이 결성되면서 금융자본의 영화투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현재 영화에 대한 투자방식은 크게 프로젝트별 직접 투자와 투자조합을 통한 간접 투자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표적인 투자자본은 배급을 전제로 한 투자배급사의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성격의 벤처캐피털이 있다. 투자배급사들은 직접 투자와 투자조합에 참여하는 간접투자를 병행하고 있는데, 2002년 말 기준, 투자배급사가 투자한 영화제작비는 전체의 약 68.9%를 차지한다.) 규모가 큰 투자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 시네마서비스, 쇼박스 등있어 제작 역량의 강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반면, 최근 영화업체의 급격한 증가 현상은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1985년 제작 자유화에 따라 제작사가 설립될 수 있는 법적 여건은 풀렸으나 그 당시에는 제작사의 급격한 증가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부터 급격한 증가가 시작되어 2000년 이후 영화업 등록업체 수는 총 3천3백 건이 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활동업체 수는 20% 미만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도별 영화업 신고 현황연 도제작업수입업배급업상영업계2*************112,08720021,*************,35620031,5356803517393,305스타시스템에 대한 의존과 제작비의 증가도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순 제작비 증가와 광역개봉에 따른 마켓팅 비용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며, 주연 배우 개런티 상승 등도 전체 제작비의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3) 배 급한국영화산업 시스템에서 가장 최근에 급격히 변화한 것은 배급영역이다. 지역별 간접배급 방식에서 국내 대형 배급사들이 출현하면서 2000년 이후에는 실질적인 전국 직배의 배급망을 구축하였다. 직접배급방식을 확산되면서 배급체계의 투명성 확보로 영화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제작비가 증가하자 배급사는 보다 빠른 투자자금 회수와 흥행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광역개봉 방식을 택하게 되었고, 2000년 이후 그에 따른 마케팅 비용이 총 제작비의 30-40%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화제작비 및 마케팅 비용 변화추이국내 배급사들이 메이저화 되면서 투자와 배급을 동시에 확보하는 등 영화산업에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한국 영화 산업에도 미국식 배급 방식이 도입되어 개봉 전 많은 마케팅비용을 투자하고 많은 수의 개봉관을 잡아 초기에 투자금액을 환수하는 광역개봉이 멀티플렉스의 환경 속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상영주기가 전에 없이 짧아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90년513.6119.4415.86그러나 멀티플렉스의 등장이 다양한 콘텐츠들의 상영기회를 증가시켜 줄 수 있을 것이란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다양한 영화의 상영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멀티플렉스는 영화시장의 규모 확대측면에서, 접근성 향상, 문화공간화 등의 순기능을 하기도 했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술 상영관, 대형 상영관이나 단관 상영관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5) 소비자최근 들어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증가와 주 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레저나 문화 활동 등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특히 주5일 근무에 따라 영화를 포함한 전체 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 약 10%의 수요증가가 예상 된다). 각 부분별로 자세히 보면 과 같다.주5일 근무가 도입되기 시작한 2001년, 30대와 40대 남성의 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각각 2.14회와 3.2회로 전년 대비 70~90% 늘어났다.) 여가시간의 증가는 여행, 운동 등 적극적인 야외활동을 하는 계층의 영화관람 횟수가 줄어들 수도 있지만, 영화를 레저의 하나로서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 군을 두텁게 하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주5일 근무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미치는 영향구 분영향도비 고극장고가족관객 증가비디오저DVD로의 대체가속DVD고대여시장 활성화음악저주5일 수업과 관련공연/이벤트고금요일 공연, 장기공연 활성화게임중PC방 수요증가방송중위성/케이블 가입증가출처:고정민, 정연승, 위의 글.① 간접배급1950년대 말에 형성되어 90년대까지 유지되어 온 간접배급 체계는 지역별 블록 부킹(block booking) 방식의 단매체제이다. 이는 한국영화산업에서 가장 최근까지 지속되었고 늦게 변화한 영역으로 입도선매 식 단매라 불린 간접 배급질서이다. 이는 제작사가 지역 배급사와 맺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전국은 서울변두리, 부산 경남, 광주 호남, 대구 경북, 대전 충청, 경기 강원 등 6개 상권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지역 배급업자는 제작사에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지역 판권을 구입하여 해당 지역의 상영권을 확보하전에 시나리오만을 보고 입도선매했고, 그 결과 그들의 입김이 영화의 질을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타 배우만을 고집했고 저질 신파류의 장르영화 양산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둘째, 영화의 흥행수익을 제작자본에 재투자 할 수 있는 순환구조를 차단하여 지방 흥행사의 배만 불렸고 영화산업은 더욱 영세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흥행에 성공해도 수익은 지방업자들이 거둬들였고 제작사는 개봉관 수익만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제작에 재투자할 수 있는 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이 형성된 것은 지역 간접 배급구조가 안정화된 60년대초반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영화계는 배급 흥행의 제작회사와는 전연 별개의 독자적인 지방흥행사들의 손에 쥐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대구, 부산, 서울의 개봉 수입 이외의 이윤은 지방 흥행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즉 제작회사의 자본으로 들어와야 할 돈이 중간업자에게 흘러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개정영화법의 시행령에 지방흥행사들의 배급을 금지하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현 제도 하에서는 공문서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재개정영화법의 시행령을 대폭 수정하여 배급망을 확립하는 것이 영화계 재생을 위해 시급한 문제였다.당시의 제작자도 증언하듯이 지역별 간접배급 방식은 위험성이 높은 영화의 흥행부담을 분산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제작사는 시나리오를 개발한 후 지역별로 분할되어 있는 지방 흥행사들과 접촉하여 해당 지역의 상영권을 판매하였고 이를 통해 대부분의 제작비를 충당했다. 지방배급업자는 단순한 흥행사라기보다 제작 투자자이기도 했으며 흥행결과에 대한 책임을 공동으로 지는 존재였다.● ● 한국영화 배급사 연구이 점은 간접 배급질서를 재평가하는 핵심적 사안이다. 지역 배급사의 흥행자본은 80년대 이후 비디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에서 투자하기 이전까지 영화산업의 유일한 제작자본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산업에서 제작-배급-상영을 아우르는 수직통합체계)를 실현한 년 이후에는 완전폐지되었다. 94년 이후부터 프린트 벌 수 제한은 폐지되었고 이는 전국적 확대 개봉의 법적근거가 되었다.현재 주요 배급사의 실질적인 모태가 된 서울극장 중심의 ‘충무로 배급라인’은 미국 4개직배사가 국내의 배급업자를 통한 배급대행의 길을 택하면서 형성되었다. 서울극장은 90년이후 97년까지 20세기 폭스,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직배영화를 대행하였다. 이 직배사들은 서울극장 측에 배급 대행료로 작품 당 2천만 원을 지불하고, 종전에극장과 부율에 따라 공동 부담하던 선전비 일체를 전담하였다.) 서울극장이 한국 내 배급을 책임지는 에이전시의 역할을 했던 셈인데, 선전비 일체를 배급사가 부담한 것과 별도의대행료를 지급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이를 통해 구성된 ‘충무로 배급라인’이라 불린 전국적 배급체계는 서울극장과 지역 배급사들의 느슨한 망을 총칭하게 되었다. 지역별로는 경강 중앙영배, 경남 부산흥업, 경북 대구시네마, 호남 무등영화사, 충청 대전영화사, 서울 변두리 시네아스트 등으로 구성되었다.1970년대 말에 전반적인 위기를 겪고 몰락해가던 지역 배급사들은 흥행성 높은 직배영화를배급하는 ‘충무로 배급라인’에 포함되면서 지역 메이저 배급사가 되었다. 이 라인은 96년 를 계기로 시네마서비스의 배급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배급체계에서지역 배급사의 영향력과 역할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제작사와 지역 배급사의 관계가 아니라 중앙 배급사와 지역 배급사가 맺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간접배급 방식도 사전 일괄판매가 아니라 상영 후 정산하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지역 내 배급을 담당하는 정도의 역할인 것이다. 지역 배급사의 역할이 달라진 것은 80년대 말 이후 비디오 시장이 형성되면서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에 유입되면서 비롯되었다. 삼성, 대우, LG 등의 가전 3사는비디오 소프트웨어를 확보하기 위해 비디오 판권구매를 통한 제작투자를 시작했다. 이후 90년대 대기업의 영상산업 진출과 제작투자가 이어지면서 지방의 함)
    사회과학| 2006.08.30| 10페이지| 1,000원| 조회(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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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산업의 문제점과 전망
    영화 산업의 문제점과 전망영화의 총 제작비는 매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제작비가 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래의 표에서 보다시피 마케팅비의 상승인데, 순 제작비가 2배정도 늘 동안에 마케팅비는 거의 4배에 가깝게 상승하였다. 영화의 광역 개봉이 일반화되었고 초반 관객몰이가 곧 흥행으로 이어지므로 엄청난 마케팅비를 요한다. 이런 광역개봉의 일반화는 저예산 영화나 예술영화들은 영화시장에 진입하는데 장벽으로 작용하며, 궁극적으로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한다.{구분199819*************2평균제작비151921.527.533순제작비12141516.821.5마케팅비356.510.711.5제작편수4349596578연간총제작비6459311,2691,7882,574(표단위 : 억원)또한 한국의 순제작비 구성 비율을 보면 프로덕션에 제작비가 집중되어 있다. 또한 그 중에서도 배우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20%를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주연 배우에게는 12.3%가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투자되는 비용은 4%밖에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프리-프로덕션의 역할은 중요하다. 시나리오 등의 개발이 필요하고 또 시나리오에 맞게 장면의 기술적인 장치나 카메라의 움직임 등을 정확하게 확인한 상태에서 프로덕션 단계에 진입해야만 촬영이 지연되는 것으로 인해 예산이 낭비되거나 초과 노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단계에 대한 투자가 너무 낮으므로 프로덕션 단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많다. 배우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문제인데 우리 나라에는 실력있는 주연급 배우가 많이 모자라서 배우의 몸값이 지나치게 높지 않나 추측할 수 있다.{구분비율pre-production시나리오3.1%개발비0.9%4.0%production주연배우12.3%연기(조연 및 엑스트라)9.6%제작(부)3.6%연출(부)3.4%필름2.6%촬영7.1%조명5.7%녹음1.2%미술(세트제작비 포함)18%특수효과3.8%로케이션 진행비11.1%진행비5.9%84.3%post-production현상0.8%음악2.9%녹음2.8%옵티컬0.8%편집2.0%진행비2.4%11.7%총계100%총 제작비 대비65%{구분기준값기준율비고평균제작비33억원한국영화평균입장요금6,071원문진기금 제외부가세607원10%극장배분2,732원5:5한국영화부율배급수수료219원8%배급수수료율 5-10%의 중간값제작사/투자사매출2,513원금융비용, 경상비 미포함손익분기 전국관객수130만명손익분기 서울관객수50만7천명전국관객수의 39%영화의 제작비 대비 손익분기 관객수는 서울 관객수 기준으로 했을 때 50만 7천명이 다. 2002년의 총 제작 편수는 78편인데 그 중에서 서울 관객이 50만명 이상인 한국영 화는 아래 표의 12편이다. 물론 창구화 전략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생각한다면 손익분기 관객수가 낮아지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영화는 손실이 생긴다.{번호영화명관객수(명)1가문의 영광1,605,7752집으로1,576,9433공공의 적1,161,5004광복절 특사1,056,21152009 로스트 메모리즈856,1506색즉시공774,2697몽정기763,1908폰755,4379연애소설589,74310YMCA야구단560,00011챔피언557,54612오아시스537,068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겉보기에는 우리 영화시장이 규모가 커지고 많은 성장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제작 시스템의 체계적인 구축과 배우들 발굴, 스텝들의 처우개선. 제작관행의 합리화 등이 필요하며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 예술 영화등에 대한 자금의 투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영화의 수익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상영만으로는 부족하다. 투자한 자본이 헛되지 않도록 해외에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영화시장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며 앞으로 충분히 성장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사회과학| 2006.08.30| 2페이지| 1,0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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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산업]한국 영화산업과 정부청책 평가A+최고예요
    차 례1. 국내영화산업의 경쟁력○영화상품의 특성-정보재상품의 특징○영화산업의 경쟁력-경쟁력의 정의○경쟁 요소의 정의-영화산업의 경쟁요소-요소조건1)인적자원2)인적자본3)자본4)영화인프라(1)제작인프라(2)인력양성 및 교육 인프라(3)상영 인프라○수요조건-시장규모○정부의 관련 정책-영화산업정책 개요-정부정책이 경쟁력 효과에 대한 평가-정부정책의 경쟁력 분석1)한국영화산업의 발전 요인(1)공급부문의 혁신주도형 성장(2)정부의 역할(3)국산 콘텐츠에 대한 강한 지지 세력의 형성○경쟁력 향상의 주요 과제2. 영화산업의 수출방향3. 세계영화시장 상황1. 국내영화산업의 경쟁력○영화상품의 특성:영화는 예술이며 동시에 다양한 파급효과를 지닌 정보재상품이다. 영화산업 특징의 하나는 외부경제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영화수출은 국가이미지 제고를 통하여 국가브랜드 가치를 높이며, PPL효과에 의한 국산상품의 구매력을 높이고, 한류붐에서 보이듯 외국관광객 유치효과도 매우 크다.-정보재상품의 특징:1)먹거나 사용함으로써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눈과 귀로 인지함으로써 소비되는 유형의 재화이며, 어떤 유통경로를 가지든 상품의 특성이 정보라는 것이다. 즉 일반 상품과는 달리 무형의 지적재산(저작물)이며, 이는 특허 등과 같이 유형물에 고정되는 산업재산권과는 구분된다. 전형적으로 영화, 음악, 책 등은 정보재상품에 속한다.2)영화가 정보재이기 때문에 영화산업이 일반산업과 다른 다양한 속성을 가지게 된다. 영화가 정보재인 이유는 영화가 담긴 매체 자체가 상품이 아니라 그 매체 속에 담긴 콘텐츠 즉, 영상정보가 바로 상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화 타이틀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의 가격이 2만원이라면,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보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비티오테프의 원가는 불과 몇백원, 몇천원에 불과하며 가격의 대부분은 그 속에 담긴 영화 컨텐츠에 대한 댓가라는 것이다.○영화산업의 경쟁력:-경쟁력의 정의:경쟁력이란 시장에서 경쟁상대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 힘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상품에 대한 와 시장조직 수요조건 등 경쟁여건 그리고 정부정책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한국영화산업의 경쟁력이라고 하면 한국영화산업을 구성하는 개별 단위의 총체적인 역량과 상호간의 네트워크, 조직 구조, 정부정책 등 질적인 연관관계까지를 포함한다.영화상품의 경쟁력에 있어서 가격경쟁력은 시장에서 큰 의미가 없다. 이는 정보재들이 가지는 전형적인 특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비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가격으로 영화를 소비하기 때문에 가격을 비교하여 더 싼 영화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결국 가격 경쟁력이 아닌 품질경쟁력 즉, 소비자들이 얻은 영화의 질적인 만족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경쟁 요소의 정의공급측면에서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정의 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생산요소, 수요조건, 관련 및 지원산업, 기업전략-구조-경쟁 그리고 정부의 정책 등이 포함된다.-영화산업의 경쟁요소:영화산업은 산업적 특성면에서 재조업 및 여타 서비스업과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전혀 상이한 측면도 있다. 영화산업의 경쟁요소를 제조업의 경우와 간단하게 비교해 다음과 같다. 영화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경쟁요소는 스타, 시나리오, 특수효과 등 기술, 전문제작 인력, 마케팅 능력, 배급망 등과 산업 내 경쟁조직 등이다.-요소조건:영화산업의 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투입요소는 크게 자본, 인적자본, 전문노동력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생산함수에는 노동과 자본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창의적인 노동력이라고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이를 지식자본 또는 인적자본이라고 할 수 있으며 , 여기에는 연기자, 연출자, 시나리오작가 등 창의적인 지적능력과 조명, 촬영, 미술, 음악 등의 전문영역의 지적능력과 기술 등도 포함될 수 있다. 특히 영화산업에서는 이러한 인적자본이 영화상품의 질적인 수준과 상품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1)인적자원영화업계 전문가들은 영화제작업계의 인력현황은 상당히 풍부한 편이지만 일반 인력들의 경우 대부표준계약서제도의 도입 등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2)인적자본영화산업의 지식자원 또는 인적자본은 영화산업에 참여하는 인적자원에게 체화된 전문적인 지식 또는 능력을 의미한다. 오늘날 인적자본은 다른산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생산요소로 간주된다. 특히 영화산업과 같은 분야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국내 영화산업의 인적자본의 수준을 경쟁력과 결부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해보면, 전체적으로 질적인 수준은 영화계와 소비자가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지만, 연출자를 제외하면 연기자나 시나리오작가 등은 양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3)자본국내 영화산업의 발전과정에서 자본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본에 대한 평가는 자본의 절대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자본의 유출입 경로와 자본의 주체 변화 등 자본과 관련된 매커니즘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현재 영화산업의 자본투자자는 크게 창투사, 영상전문투자조합, 배급사, 기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자자본이 충무로자본에서 대기업자본으로 전환되면서 영화 투자시스템은 한 단계 발전하였으며, 대기업자본이 창투사와 영상전문투자조합으로 대체되면서 다시 한번 발전하게 되었다. 새로운 투자시스템의 도입으로 제작자들이 안정적으로 투자를 확보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였고 투자규모의 확대를 통하여 대형 영화를 제작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관객들을 흡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4)영화인프라영화산업의 인프라는 크게 촬영소 등 제작 인프라, 인력양성기관, 상영을 위한 상영관시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1)제작인프라중요한 제작인프라인 영화촬영소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자체 등 공공부분에서 설치 운영하는 경우와 민간에서 설치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연간 60~70편에 이르는 국내 영화제작 규모로 보면 크게 부족한 규모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2)인력양성 및 교육인프라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영화가 높은 성과를 거두고, 영화 등 연예산업관련학과가 학교의 홍보 등에 도움이 된다고 간주되면서 다수의 학교에 관련학과를 설치하여 영화관련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익성이 높기 때문에 시장기능에 의해서 민간부분의 투자가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TV의 보급 이후 극장으로 대변되는 상영인프라가 위축되어 온 것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국가에서는 1980~90년대에 멀티플렉스의 도입이 확대되면서 극장 수는 감소하였지만 스크린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멀티플렉스 스크린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기준 전체 스크린의 50%를 넘어섰으며 멀티스크린의 보급 확대는 영화산업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긍정적인 영향은 영화시장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멀티스크린 자체가 국산영화만의 발전을 촉진시킨 것은 아니지만 영화인구의 확대에 영화소비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영화를 소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품질이겠지만, 쾌적한 환경과 다른 여가문화서비스를 결합적으로 제공하는 편의성 또한 영화 소비를 촉진시키는 요인이다.○수요조건-시장규모1)미국영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배후시장이 매우 넓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미국시장 자체가 세계 최대의 시장이며, 그리고 영화와 같은 정보재에 있어서 영어권 국가들은 미국 내수시장이나 마찬가지로 간주할 수 있다. 게다가 높은 영화소비문화도 한몫한다.2)내수규모는 영화산업의 경쟁력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시장은 인구규모 및 국민의 연평균 영화 관람횟수 등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국내시장규모는 경제를 이루기가 어렵다. 이러한 국내시장규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수출전략이 필요하다.○ 정부의 관련 정책-영화산업정책 개요과거 정부의 영화산업 진흥정책은 극단적인 시장개입에 의한 내수시장 보호정책이었다. 그러나 1995년의 영화진흥법은 영화산업정책을 규제정책에서 진흥정책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 문화산업을 국정지표로 삼으면서, 영화산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크게 제고 시켰다. 당시 정부의 영화산업정책은 1,500억원 규모의 영화진흥기금을 토인력, 인프라, 예술영화 등의 육성을 통한 간접적인 지원이기 때문에 영화산업계에서 정부의 지원정책을 체감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정부정책이 경쟁력 효과에 대한 평가정부의 영화산업 관련 정책은 영화업계 종사자의 평가와는 달리 국내 영화산업의 경쟁력 향상에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부 정책이 첫째, 영화 현장인력의 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둘째, 스크린쿼터 정책을 유지해 왔으며 셋째, 국민의 정부시절 국정지표로서 문화산업의 발전을 강조하였던 점에서 드러난다.-정부정책의 경쟁력 분석1)한국영화산업의 발전 요인우리 영화산업이 거둔 최근 수년간의 성과는 첫째, 공급측면에서 발생한 산업내 혁신 둘째, 정부의 영화산업정책 셋째, 수요측면에서의 한국영화에 대한 강한 지지력을 갖는 소비계층의 형성 등이다.(1)공급부문의 혁신주도형 성장:혁신의 기폭제는 영화산업에 대한 진입장벽의 철폐에 의한 대기업자본의 진출에 있다. 이는 1985년 제5차 영화법의 개정에서 시작된다. 당시 주요 개정의 내용은 영화업의 허가제에서 등록제로의 전환, 검열제도에서 심의제도로의 전환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어서 1986년에 수입자유화가 허용되면서, 헐리우드 직배사의 진출근거가 되는 외국인 영화사설립허용이 포함됨으로써 국내 영화산업에는 자유경쟁이 가능하도록 진입장벽이 크게 완화되었다. 진입장벽의 철거가 즉각적인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산업 내 역동성을 형성하는 발단이 되었다.(2)정부의 역할:영화산업정책을 내수시장 보호정책에서 산업육성정책으로의 전환이라는 명시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추진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진입장벽의 철폐는 산업 내 주체들의 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진입자들에 의한 상호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국내 산업진흥정책들은 주로 시장가격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개입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산업에 대한 진흥정책은 시장개입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산업육성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아카데미나 영상원과 같은 교육기관을것이다.
    경영/경제| 2006.08.30| 10페이지| 1,000원| 조회(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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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유득공과 발해고
    - 柳得恭과 渤海考-《目次》Ⅰ.머리말Ⅱ. 柳得恭의 生涯와 時代的 상황1. 榴得恭의 生涯2. 時代的 상황Ⅲ.柳得恭의 歷史認識과 著述Ⅳ. 「渤海考」Ⅴ.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영재(?齋) 유득공(柳得恭:1749~1807)은 조선후기 북학파의 실학자였으나 이용후생)의 방법보다는 우리 역사의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시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발해고』는 그가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의 사료를 광범하게 섭렵하여 그 동안 매몰된 발해의 역사를 고증한 결실다. 이는 처음으로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편입하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그의 역사인식과 저서인 『발해고』에 대하여 살펴본다.Ⅱ.柳得恭의 生涯와 時代的 상황1. 生涯유득공은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른바 4검서(檢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또한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는 4가(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행장(行狀)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많다. 현재로서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가 지은 부친 밎 숙부의 묘지명, 모친의 행장, 그리고 그의 글속에 여기저기 나타나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고작이다. 그의 자(字)는 혜풍(惠風), 혜보(惠甫)이고, 호(號)는 영재(?齋), 영암(?菴),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 은휘당(恩暉堂)등이 있다. 특히 고운당은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교서관동(校書館洞, 지금의 충무로2가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당호(堂號)이다.부친 유춘(柳瑃)이 16세 때에 한 살 위였던 남양 홍씨와 결혼하여 8년만인 1748년 11월5일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게 된다. 이 때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柳三益)과 외조부인 홍이석(洪以錫)이 서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먼인사들과의 교육 기에 접어든다. 이 당시에 그의 숙부와 더불어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등과 일문을 이루면서 서로 고유하였다. 25세 때에 기자(箕子)로부터 후백제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나라 한시들을 모은 『동시맹』(東詩萌))1권을 엮고 서문을 지었다.이듬해인 1773년 윤3월에 그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유람을 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긴다. 그리고 이 해 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공주를 유람하였고, 늦봄에 다시 공주 유람을 떠나 역시 기행시를 남긴다. 이러한 옛 도읍지에의 여행은 뒤에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짓는 모태가 되었다.두 번에 걸친 공주에의 유람 중간인 1774년 봄에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로서 영조50년에 해당한다. 그가 32세이던 1779년 6월1일에는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마침내 관료로서의 활동기에 접어들게 된다. 35세 되던 늦봄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머물면서 서적들을 조사하였다. 이윽고 37세 때(1784년)에 검서관을 그만두고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나가면서 지방관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무렵 포천이 고향인 12세 아래의 성해응(成海應))과 교유가 시작되었던 듯하다. 이 해 윤3월에는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였다. 이듬해에는 양근(陽根, 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 때인 1789년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司?寺) 주부로 옮겼다. 이 후에도 그는 관직생활 중 연행을 통하여 『난양록』(?陽錄),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등의 저술활동을 펼치고 1801년 그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지주였던 모친의 사망을 기점으로 그의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서울 근교와 한강 상류를 유람하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여유 있게 지냈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그는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성해응 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활동이 특출했으므로 북학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청(淸)의 황금기에 이룬 대 출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정조의 배려로 중국의 발전된 문물로 수용하자는 북학 자들의 활동은 종래의 어떤 주장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혁신적이었다.Ⅲ. 柳得恭의 歷史認識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료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에 중국의 서적들이 다양하게 인용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사실성이 뛰어나고 음향성이 탁월한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대한 정통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고증학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청나라 고증학으로부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지은 역사서에 이러한 태도가 곳곳에 배어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이처럼 그가 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우리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을 자주 찾아내곤 하였다. 예를 들어 『이십일도회고시』에서 한(韓)을 주제로 삼을 때에는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다가 말년인 1798년 와서 『시경』(詩經)에 기록된 한후(韓侯)를 비로소 발견하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3한을 논하면서 이를 다룬 사람이 없다고 지적하였다.한편, 그는 중국과 조선 외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언급한 것만 하여도 만주, 몽고, 회회(回回), 안남(安南, 베트남), 남장(南掌, 라오스), 면전(緬甸, 미얀마), 서양의 홍모번(紅毛番, 영국)과 아란타(阿蘭陀, 화란)도 있다. 그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 일변도의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발해고』에서 일본 사료까지 인용할 수 있었다.이상과 같이 그 나름의 역사 인식이년(568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승려를 도인(道人)이라 한 것은 6조시대의 풍습이며, 진흥왕이 이 곳까지 개척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누락되어 있다고 적시한 것은 주목된다. 그는 우리의 풍습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초로 세시풍속을 기록한『경도잡지』를 저술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항(?)이 고구려의 온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고, 옥저의 민며느리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단오절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발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국 시에 대한 일방적인 모방에서 벗어난 그의 문학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제 그가 인식하였던 한국사 체계를 살펴보자, 그가 『사군지』(四郡志)에서 언급한 한국사 체계는 한백겸(韓百謙)의 영향이 컸던 것을 보여준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과 남쪽의 역사를 구분한 것은 그의 영향이 분명하다. 그가 일찍부터 한백겸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31세에 『동국지리지』를 보고서 『이십일도회고시』를 썼던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이십일도회고시』를 쓸 때만 하여도 주제가 한반도 안에만 국한되었고, 더구나 한강 이남의 역사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발해고』와『사군지』는 한강 이북의 역사로 중심이 기울면서 북방의 역사에 중점을 둔 역사서다. 따라서 그간에 역사 인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그가 북방의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나약해져 버린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발해고』서문에서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데에 대해 통탄하였고, 『사군지』서문에서는 조선의 숭문억무 (崇文抑武)정책을 비판하면서 북방 영토를 강건하고 상무적(尙武的)인 기질의 고향으로 생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에서 신기한 공을 세운 사람들로서 을지문덕, 안시성 성주, 강감찬, 김윤후, 박의(朴義)를 열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가운데서 주로 『신당서』에 의존했고, 간혹 미비한 점은『요사』등에서 보충하여 『발해고』를 편술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권으로 된 『발해고』와 4권으로 된 『발해고』각기 필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는데에 비하여, 4권본은 『영재서종』(?齋書種)에 수록되어 있다. 이 두 필사본을 검토해본 결과 1권본이 유득공이 처음에 썼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성해응 서문에 발해 역사를 엮어서 1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유득공 자신의 서문에 밝힌 군고, 신고, 지리고 등 9고의 목차도 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4권본은 아직 학계에 소개가 되어 있지 않은데, 유득공이 언젠가 내용을 수정하고 증보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4권본에는 다소의 변화가 보인다. 우선, 전체 분량이 증가하였다. 특히 지리고의 내용을 대폭 늘려서 보완한 것이 주목된다. 다음으로는 구성이 달라졌다. 서두에 실린 내용이 달라졌고, 본문에서도 의장고, 물산고, 국어고가 삭제되어 있다. 저자의 서문은 1784년 윤3월에 지은 것으로서, 여기에는 이 책을 지은 경위와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이 채글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검사관으로서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 있다. 박제가가 서문에 암시하고 있듯이 유득공이 『이십일도회고시』를 쓸 적에는 한반도 안의 역사에만 국한되었고, 여기서 나아가 한반도 밖으로 시야가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발해고』이다. 그의 나이 31세에서 37세 사이에 의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이 책은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책 이름을 굳이 고 (考)자를 붙인 이유가 그의 서문에 적혀 있다. 아직은 자료 정리에 그치고 있을뿐이지 역사서로서의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군고」에서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속말말갈인으로 규정하여 대씨가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한 서문의 내용과 모순을 일으키고 잇다. 또한 서문에서 표방된 남북국시대론에 걸맞은 내용이 본문에 보적이다.
    인문/어학| 2006.08.30| 8페이지| 1,000원| 조회(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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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고와 유득공
    1) 生涯유득공은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른바 4檢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또한 漢文學史에서는 4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行狀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많다. 현재로서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가 지은 부친 및 숙부의 묘지명, 모친의 행장, 그리고 그의 글 속에 여기저기 나타나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고작이다.그의 字는 惠風, 惠甫이고, 號는 ?齋, ?菴, 歌商樓, 古芸堂 등이 있다. 특히 고운당은 운동이라고도 불리던 校書館洞(지금의 충무로2가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堂號이다. 부친 유춘이 16세 때에 한 살 위였던 남양 홍씨와 결혼하여 8년만인 1748년 11월 5일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게 된다. 이 때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과 외조부인 홍이석이 서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장기는 그가 태어나서부터 20세 전후까지를 이른다. 그가 5세 때 불행히도 그의 부친이 27세를 일기로 요절하였고, 7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동작나루를 건너 南陽의 白谷에 있는 외가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외가는 무반 집안이라 외숙들이 말달리고 매사냥하며 호기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모친이 그가 10세 되던 해에, 대대로 글짓기를 업으로 삼은 집안이니 이곳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서울의 옛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거의 폐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모친이 삯바느질로 끼니를 마련해가면서 그로 하여금 이웃글방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18, 19세 때에 이르러 시짓기를 배워서 일찍이 능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술회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그의 숙부였던 유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그는 20세 이후 북학파 인사들과의 교유기에 접어든다. 이 당시90년의 1차 연행이다. 연행에서 돌아온 뒤인 47세(1794년)에 가평군수로 부임하였다가 6월에 파직당하였다.서울로 돌아와 7월에 다시 검서관에 임명되었고, 49세 때인 1796년 8월에 通政大夫, 정3품)에 올라 五衛將에 임명되었으며, 처인 전주 이씨는 숙부인의 爵을 받았다.53세(1800년)에 豊川都護府使로서 지방관으로 나갔으나, 이 해 5월에 정조가 승하하게 된다. 그를 아꼇던 정조가 돌아가자 결국 이듬해 정월에 부사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풍천에서 돌아와 막 쉬려고 할 즈음인 1801년 정월 말에 왕명에 의해 주자서 善本을 구하러 2차 연행 길에 오르게 되며, 그 뒤 『燕臺再游錄』을 저술하였다.그는 60세를 일기로 1807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나, 서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香山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으니, 이 곳은 그의 부친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2) 歷史 認識과 著述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섭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료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에 중국의 서적들이 다양하게 인용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한편, 그는 중국과 조선 외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언급한 것만 하여도 만주, 몽고, 회회(回回), 안남(安南, 베트남), 남장(라오스), 면전(미얀마), 대만, 일본, 유구가 있고, 서양의 홍모번(영국)과 아란타(화란)도 있다. 그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 일변도의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발해고』에서 일본 사료까지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 간략히 소개한 것과 같이 그 나름의 역사 인식이 형성되었던 배경에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문학적 관심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면 이제 그의 역사 인식이 어떠한 것이었강 이북의 역사로 중심이 기울면서 북방의 역사에 중점을 둔 역사서다. 따라서 그간에 역사인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북방의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나약해져 버린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발해고』서문에서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통탄하였고, 『사군지』서문에서는 조선의 ‘崇文抑武’ 정책을 비판하면서 북방 영토를 강건하고 尙武的인 기질의 고향으로 생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기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을지문덕, 안시성 성주, 강감찬, 김윤후, 박의를 열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외적을 무찌른 사람들이니 이로부터 가히 그의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만주족이 중원으로 들어와 점차 상무적인 기질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을 건륭제가 한탄하였던 사실을 인용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3) 渤海考그가 역사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으로 인해서이다. 역사학계에서의 연구가 모두 이 책에 집중되어 왔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권으로 된 『발해고』와 4권으로 된 『발해고』가 각기 필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는 데에 비하여, 4권본은 『?齋書種』에 수록되어 있다. 이 두 필사본을 검토해본 결과 1권본이 유득공이 처음에 썼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서해응 서문에 발해 역사를 엮어서 1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유득공 자신의 서문에 밝힌 군고, 신고, 지리고 등 9고의 목차도 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조선고서간행회 간행본은 1권본 필사본을 저본으로 해서 활자화 한 것으로 박제가와 유득공 자신이 쓴 서문만 붙어 있으나, 서해응이 지은 서문도 따로 전해지고 있다.저자의 서문은 1784년 윤3월에 지은 것으로서, 여기에는 이 책을 지은 경위와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이 책을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검서관으로서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 있다.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서해응의 서문에 그가 지리학에 밝았다고 한 것은 적절한 지적일 것이다.이 책에는 모두 22종의 책이 인용되었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서구가 일본인들의 시를 모아서 엮은 『日東詩選』에 서문을 썼고, 이 책의 편찬보다 뒤의 일이지만 왕명을 받들어 이덕무와 함께 『國朝兵事』(1791년)를 엮으면서 일본의 兵制도 포함시켰으며, 이덕무의 『??國志』에 서문을 써준 바도 있다. 이와 같이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로서는 이들의 역사서를 인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나, 일본 자료를 토대로 「國書考」라는 독립된 항목을 설정할 정도로 자료 이용의 범위가 확대된 사실도 역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국내 자료로서 눈에 뜨이는 것은 『영순태씨족보』인데,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는 족보는 여기에 거론된 것이 아니고 거꾸로 『발해고』를 바탕으로 재작성된 것이다.그가 사학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문에 나타난 혁신적인 발해관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여기서 고려가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넣어 ‘南北國史’를 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서두를 꺼낸 뒤, 발해를 세운 대씨가 고구려인이고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가 버렸지만, 고려가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이제는 이 땅을 도로 찾으려 하여도 근거가 없게 되었다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렇게 그가 발해 옛 땅을 되찾자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북방영토에 대한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발해사를 나름대로 체계화시키고자 함으로써, 그 자신을 한국사학사 한가운데 우뚝 세우는 데에 그 누구도 주저하지토벌하여 영토를 확장시키니, 당에서 조서를 내려 검교사공으로 높이였다. 대조영 이래 자주 여러 생도를 경사의 태학에 보내어 고급의 제도를 연구하게 하니, 이에 이르러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고, 땅은 5경 15부 62주를 보유하게 되었다. 숙신의 옛 땅을 상경으로 삼아 용천부라 하여 용주, 호주, 발주의 3주를 관할하게... ... 안원부는 영주, 미주, 모주, 상주인 4주를 관할하게 하였고, 또 영주, 동주, 속주의 3주는 독주주로 삼았는데, 속주는 그 속말강에 가깝기 때문이니, 대개 이른바 속말수 이다. 그 예악과 관부제도는 대체로 중국을 모방하였다고 하겠다).다음은 유득공의 『渤海考』 이후 저술인 한치윤의 『海東歷史』이며, 이곳에는 世紀11에 渤海편을 두고 기술하였고, 발해고에서 로 정안국을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世紀16에 정안국을 별도의 세기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기사의 내용면에서 『渤海r考』와는 큰 차이는 나지 않지만, 편년체의 구성으로서 년도의 기술이나 그 구성에서, 그리고 각기 기사마다 그 출처를 밝히는 등 『渤海考』보다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살펴 보건데, 발해는 본디 흑수말갈의 속말부로 高句麗에 신하로 소속된 나라이다. 옛 숙신씨의 지역에 살면서...... 東史 를 보면, 대조영은 본디 高句麗의 옛 장수로, 唐이 고구려를 멸한 뒤 백성들을 농우와 하남 지방으로 옮기자 백성을 거두어 모아 도망쳐 태백산에서 근근히 보존하였다. 그 뒤 高句麗와 말갈의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사방 5천리로 5경과 15부를 두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는 諸國들을 모두 차지하였다. 대종 대력 8년 문왕 37년 12월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대력 2년에서 10년까지 매년 혹 두해마다 한번씩 혹 한해에 두세 번 조겅이 오기도 하였다. 덕종 정원10년 문왕 58년 3월에 대흥무가 졸하였다. 사사로이 시호를 문왕이라 하였다. 대흠무의 아들 대광림이 일찍 죽어서 족제 대원의가 즉위 하였는데, 의심이 많고 포학하여 1년 만에 나라 사람들이 다.
    인문/어학| 2006.08.30| 8페이지| 1,000원| 조회(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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