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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문화] 사조별 유럽 건축 양식
    I. 서론건축은 인류가 농경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농경의 발달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 고대 문명 발상지에 살던 사람들은 최초의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러한 도시들에 그들은 집과 궁전, 궁전 등을 세웠다. 이처럼 건축은 도시가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의 건축사를 나누어보면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나눌 수 있다. 유럽의 건축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들이 유럽의 건축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하게 된 배경들이 이러한 문명을 통하여 정착 생활에서 이루어진 건축들이 시초라는 얘기다. 이제 본론에서 위에서 언급한 유럽의 건축 양식의 배경과 각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등을 사조별로 살펴보겠다.II. 본론1. 고대 건축(1) 그리스 건축BC 7세기에서 BC 6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발달한 건축을 말하는 것으로, 서양문화의 근원인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서 로마 건축과 함께 고전주의 건축의 원형적인 양식을 말한다.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찍이 공공건축이 발달하였으나, 개인주택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각 도시의 아고라(중앙 광장)에는 의사당 재판소 외에 스토아 시장 신전(神殿) 등이 즐비하고, 신역(神域)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보고(寶庫)극장스타디움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스건축의 중심은 신전이므로 그 역사도 신전 형식의 발전에 비례하였다.그 건축에 있어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석재를 건축의 주재료로 이용하였으며, 특히 양질의 대리석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사용하였고, 따라서 석재를 이용한 석조 가구식 구조가 발달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온난한 기후를 즐기기 위해 야외생활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건물자체의 내부 공간 보다는 건물에 의해 형성되는 외부공간에 관심이 많았으며, 따라서 그리스 시대의 건축물을 보면 활발한 야외활동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외부공간이 발달하였다. 또한 외부 공간 구성요소로서의 건물의 기능을 중시하여 조작적 형태의 특징을 보이며,부분의 건축활동이 기독교에 집중되어 교회, 세례당 등의 기독교 건축물이 발달하였지만 기독교건축 이외에 건축분야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발달도 부진하였다.셋째, 교회 건축양식이 정립되었다.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를 교회 건물로 전용하였다. 하지만 급속한 교세확장에 비해 교회재정이 빈약하여 새로운 건물의 건설이 곤란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서 요구되는 집회공간, 제단, 사제석 등의 기능과 기존의 바실리카의 기능이 상호 유사하였다. 바실리카식 교회는 중세 교회건축의 원형으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고딕양식에 이르러 완성되었다.(2)비잔틴(Byzantine) 건축중세건축의 꽃인 비잔틴 건축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환도하고 동로마 제국을 건국한 330년부터 오토만 터어크 족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로마 지역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로마건축에 동양적인 건축요소를 혼합한 건축양식이다.건축양식의 특성으로 먼저 동양양식과 서양양식의 혼합을 들 수 있다. 동서교류가 활발했던 비잔틴 문화를 배경으로 동서의 건축양식을 혼용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사라센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양의 열주식 구조에 동양적인 돔 구조를 혼용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비잔틴 건축의 건축재료로는 목재가 귀한 지역이었으므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하여 석재를 부재료로 사용하였는데 벽, 아치, 보울트, 돔 등은 벽돌과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조적한 것과 기둥등 하중을 많이 받는 곳에는 석재를 건축 재료로 사용하였다.또한 얇은 대리석판, 색유리등은 실내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건축구조 아케이드 (Arcade)가 있는데 로마의 영향으로 아치, 보울트와 열주에 의한 아케이드를 널리 사용되었다. 아케이드를 열주에서 아치의 중첩에 의해 아치를 지지하는 기둥의 주두에 하중집중 현상이 발생하였다. 부주두의를 사용하여 아치의 집중에 의한 하중집중을 구조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기존의 주두위에 더 넓은 면적의 부주두를 첨가하여 이중고딕교회는 벽체의 진정한 해체로 투명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도시화로 인하여 성당은 주도적인 건설과제가 되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보다 독일 에서 가장 신비감이 드러난다. 포인티드 아치는 버건디(burgundy)지방의 리브가 있는 포인티드 보울트 노르만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플라잉 버트레스는 외부에서 아치와 견줄만한데, 로마네스크에서는 보강기둥이었지만 고딕에서는 하중을 전달하는 역할이 주가 되었다. 육중한 벽체는 4개의 피어로 지지되어 좁고 길다란 클리어스토리가 가능하게 된다. 이로 인해 높이와 채광을 동시에 해결하며 공간적 신비감에 도달한 내부가 된다.건축실례로는 밀라노 성당(Milano Cathedral, 1386-1577)이 있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되었지만 후기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평면 87미터x147미터, 천장높이 45미터로서 이탈리아 중세 고딕성당 최대의 규모이다. 무수한 유럽도시들은 아직도 중세의 환경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중 시에나(Siena)는 그것이 중세의 도시화가 시작된 이탈리아에서 고딕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특별히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시에나는 고딕도시이며 역사적 상황 때문에 오늘날까지 자체의 성격을 보존해왔다. 13-4세기중 시에나는 커다란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하였으며 시민들은 그 도시에 대한 특별한 자존심을 가졌다. 그들은 더욱 아름다운 건물들, 가로들, 그리고 광장들을 가진 도시는 없다고 확신했다. 1393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1348년 흑사병으로 주민의 3/4이 사망했을 때 이 위대한 시대는 막을 내렸다. 시에나는 Y형 능선체계를 형성하도록 중앙의 결절점(Node)에서 만나는 세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다. 가로들이 만나는 곳, 즉 중앙에는 공공의 광장이 있는데 이것은 Piazza del Campo의 거대한 사발모양을 하고 있다. 바로 곁의 가장 높은 곳에 성당이 놓여 있다. 그 성당은 모든 것의 가장 위에 솟아 있다.이 위대한 중세의 건축들은 건물가 생략되어서 세 부분만 갖게 된다. 고딕은 조각적인, 즉 빚어서 만든 듯한 건축이다.여러 개의 조각품들이 건축과 일체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피어, 입구 양측의 기둥, 창문틀 같은 모든 건축적 요소들까지도 새겨졌거나 빚어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그려져 있는 그림까지 고려한다면 고딕의 성당은 명실공히 '종합예술작품'으로불릴 만하며 이것은 예술사상 탁월한 업적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 솔즈베리성당 웨스트민스터사원과, 프랑스의 파리 노트르담성당(1163~1235) 샤르트르대성당(1194~1260), 림즈대성당(1212~1300) 등이 유명하다.3. 근세 건축(1) 르네상스 건축중세시대의 많은 문화적 특성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있어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는 분명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들은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이 인류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에 대해 '암흑시대'라고 표현하였으며 그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중세로부터 발전해 나간다는 것은 곧 고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으며, 고대 로마에서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해주었던 교훈들을 다시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르네상스 시대의 교육자들은 청렴, 독신, 은둔 등을 주장했던 중세사상으로부터 등을 돌렸으며 그 대신 가정 생활을 찬양하고 재산을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 당시의 이탈리아는 사회적으로 가끔씩 혼란스럽기도 했으나, 개인 생활에 있어서는 절제가 주요한 미덕이었다.이 시대는 그리스도교 신의 존재를 경건하게 인정하는 인본주의의 시대였지만, 그 한편으로는 고대 이교도 세계의 여러 지적인 입장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인본주의자들은 사후세계의 천국을 준비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본주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결과론적 논리에 따라 살아가이 양감적(量感的)이고 감각적이었으며, 조각적 이어서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이 양식은 후기에 이르러 감각적 표현 위주에 몰두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전성기 바로크는 프랑스의 루이 11세 집정기간이며, 프랑스 바로크 최후의 단계는 로코코 양식이 되었다.(3) 로코코 건축로코코는 바로크가 매우 둔중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서 세련된 아름다운 곡선으로 표현되었고, 여성적인 인상을 주었으며,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궁전의 싸롱에서 애용되었는데, 귀족계급 부인들의 장식품 등 기호, 취미에 영합되어 성행하였다. 이탈리아의 G.베르니니, G.포르타, D.조바니, C.마데르나가 초기의 건축가였으며, F.보로미니, A.포조 등의 다재다능한 건축가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F.블론델, J.H.망사르가 대표 건축가이며, 이 시기의 건축물로는 베르사유궁전과 앵발리드사원 등이 있다. 로코코의 건축가로는 A.메소니에와 G.보프랑이 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말에 이르는 근대 과도기의 건축의 시기는 바로크 건축에서 근대 건축에 이르는 과도기적 건축양식인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절충주의의 진통기를 겪고 나서 근대 건축에 이르게 되는 시기였다. 신고전주의란 바로크에 반발하여 그리스 고전양식을 모방하여 고전성에 복귀하고자 하는 양상을 말하는데, 프랑스에 있어서는 루이 15세의 최후 20년간과, 루이 16세 및 나폴레옹 통치기간에 행하여졌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유럽 최강국이 강대한 자본국가로 번영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세 아래서 존스, C.렌에 의하여 신고전주의는 발전하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자유주의 사상에 의한 사회변혁 때문에 생긴 건축적 표현으로서, 고딕과 같은 중세로의 복귀적인 양상이었다. A.퓨긴과 W.퓨긴은 신고전주의를 개척하여 노팅엄성당(1842~44), 성 어거스틴 성당(1846~51)의 작품을 남겼다. 바리경의 영국 국회의사당과 K.F.슁켈의 베를린 위병본부(1816), J.나시의 버킹검 궁전 등이 그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이다.4.
    인문/어학| 2004.11.21| 10페이지| 1,000원| 조회(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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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경제의 시간적 격차 평가A좋아요
    I. 서 론97년에 발생하였던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서구의 비판과 더불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들의 급속한 압축성장에 따른 문제점들이 계속적으로 비판되고 있다. 특히 세계 제 1의 산업경쟁력을 가진 일본마저도 현재 경제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일본의 경제 발전과정들을 배우고, 수용하였던 많은 아시아국가들에게는 현재 어려운 경제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하지만 과거 30년 이상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왔던 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자원부족국이면서도 막강한 산업경쟁력을 갖추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한국과 일본의 경제발전과정과 발전구조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경제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Ⅱ. 본 론 (한일경제의 발전과정 및 구조)1. 일본경제의 발전과정 및 발전구조1) 고도경제성장기 (1956∼1973년)1951년∼53년에 생산과 소비의 양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던 일본경제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세계사에 유래 없는 고도경제를 이루었다. GNP(국민총생산)의 규모도 선진각국을 차례차례 추월해, 1968년 이후 미국 다음으로 자본주의 여러 나라 중 제2위의 지위를 점하고 「경제대국」이 되었다.1965년 불황이전의 고도경제성장의 전반기에는 神武경기(1955∼57년)와 岩戶景氣(1958∼61년), 올림픽경기(1962∼64년)의 사이에 鍋底불황(1957∼58년)과 62년 불황이 발생해 3∼4년마다 경기 침체가 보여진다. 이것은 경기 과열이 수입의 증대를 초래해, 거기에서 발생한 국제수지의 핍박에 대처해, 3∼4년마다 금융긴축이 행해졌기 때문에 이 현상을 가리켜 「국제수지의 천정」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일본의 주요산업이 1960년대 중반쯤부터 국제경쟁력을 강화한 배경에는 무역자유화와 자본자유화의 진전에서 볼 수 있는 개방경제체제로의 이행이라는 사정이 존재했다.전후일본에 있어서 1949년 「외국 외국환0년)1오일 쇼크와 경제성장률의 저하1974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첫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한 이후, 이른바 「저성장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저성장시대」의 막이 열린 것을 고하는 것은 1970년대의 초에 연달아 일본경제를 급습했던 2개의 쇼크였다.제1쇼크는 1971년8월의 「닉슨·쇼크」이다. 이것은 당시 미국대통령 닉슨이 금을 달러와 교환정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강력한 달러방어책을 내세운 것으로, 고정외국환상장제로부터 변동외국환상장제로의 이행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경제는 고도성장기에서는 1달러 360¥이라는 사실상 엔저의 고정외국환상장 하에서 국제경쟁 상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왔기 때문에 닉슨·쇼크에 있어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잃는 것에 대해 당시 일본경제계는 큰 불안감을 가졌다. 그러나, 무역자유화 자본자유화의 위기감을 배경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활발했던 대형설비투자와 노사일체의 생산성 향상운동이 예상이상으로 일본기업이 국제경쟁력을 높여왔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은 순조롭게 신장했다.제2의 쇼크는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을 발단으로 일어난 오일쇼크이다. 고도성장기의 일본은 메저라고 불려지는 구미 대 석유회사를 통해서 중동부터 싼가격의 원유를 대량으로 수입해, 그것을 경제성장이라는 문자그대로 원동력화 했다. 석유쇼크에 의해서 원유가 저가에서 고가로 180도 전환했던 것은 닉슨·쇼크의 경우와 는 달리, 일본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전달했다.1970∼73년에는 고도경제성장의 종언을 아직 확실히 자각하지 않았던 경제계도 오일쇼크를 거쳐 마침내 저성장시대의 도래를 통감하도록 되었다.1973년∼74년의 제1차 석유쇼크에 뒤따라 1978∼80년에도 제2차 석유쇼크가 발생했다. 제2차 석유쇼크는 일본경제 저성장시대를 장기화되었지만, 그렇더라도 그 충격의 정도는 제1차석유쇼크의 경우에 비교해서 적었다. 왜냐하면, 제2차 석유쇼크 당시는 국민적 규모로 반에너지, 탈석유운동을 진행해, 여러 가지 면에서 제1차 석유쇼크의 「학습효과」가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히 구미각국의 사이에서 무역 마찰이 현재화되도록 되었다. 무역마찰의 확대는 1981년을 시작으로 자동차 대미수출 자주규제 같은 경제문제에 대해 정치의 개입이 종종 발생했다. 거기에서 일본의 기업은 무역마찰을 회피하기 위해서 해외직접투자를 과감히 행해 새로운 대응을 보이기 시작했다.3산업간, 기업간의 격차의 확대고도 경제성장기에 비해서 안정성장기의 일본에서는 산업간과 기업간의 격차가 확대되었더라고 말할 수 있다. 오일쇼크 후 급성장을 거둔 것은 전기기계, 수송기계, 일반기계 등의 조립가공산업이었다. 이들의 산업은 소형자동차, 소형기계 등의 에너지 소비가 적은 제품의 개발, 에너지 비용의 상승을 최소한으로 누르는 공정의 개선 등을 계속 진행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수출 확대의 중핵을 맡았다.한편,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너지 다소비형의 재료산업중에는 오일쇼크이후,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것도 출현했다. 알륨제련업이 에너지 비용상승으로 수익기반을 잃었음에도 계속해서 고도성장기의 각광받는 산업의 하나였던 석유화학공업도 구조불황업종으로 속해, 1983년에 제정된 「특정산업 구조개선 임시조치법」의 대상업종으로 지정되었다.안정성장기에는 산업간격차 만이 아니라, 동일업종내의 기업간 격차도 넓어졌다. 이것은 오일쇼크이후의 엄격한 경영환경의 아래에서 기업능력과 기업노력의 유무가 그대로 업적에 반영된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3) 일본경제의 실패기 (1990년대)1991년 2.9%, 1992년 0.4%, 1993년 0.5%, 1994년 0.6%"로서 0%대의 경제성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셈이다. 93년말부터는 잠시 불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회복력은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이후 일본정부의 수요확대정책 등에 힘입어 성장률이 1995년 2.8%, 1996년 3.2%로 다소 높아져 경기회복을 보였지만, 1997년 하반기부터 아시아 통화위기의 영향 및 버블 후유증이 현재화하는 가운데 다시 침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7년 4/4분기 이후 1998년 4/4분기까지 5분기동안 연속 마이너수 있다.2. 한국경제의 발전과정 및 발전구조1) 1945-1950년의 한국경제1945-1950년 사이에 진행된 주요한 경제적 움직임으로는 노동자 자주관리운동과 농지개혁이 있다. 노동자 지주관리운동은 해방 직후 일본인이 소유하던 기업체에 대하여 그 기업체 노동자들이 그 재산을 지키고 관리하려고 했던 움직임이다. 친일파 청산 차원에서 친일파들이 소유하던 기업체에 대해서도 전개되었는데 미군정은 이 운동이 자본주의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강력하게 억압하고 그리하여 1946년 5월경에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그리고 해방 이후 남한 농민들은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고 북한에서는 1946년 초에 부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런 농지개혁의 결과로 한국에서는 지주계급이 몰락하였고 이는 한국자본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이 밖에 이 시기에는 공업생산이 급격히 위축되고 실업자가 범람하고 물가가 폭등하였고, 그리하여 일반대중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하였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생산도 회복기미를 보여 갔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2) 1950년대의 한국경제1950년대 한국경제 변화의 주요한 계기는 귀속재산 불하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귀속재산 불하는 귀속재산 즉 일본인이 소유하던 재산을 한국인에게 불하한 것인데, 이는 한국의 자본가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원조는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한 구호물자 제공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6.25 후에는 경제복구를 위해 제공되고, 1958년에 정점에 달하였다가 그후 감소되어갔다. 미국 등이 이렇게 원조를 제공한 것은 한국경제가 불안정해지면 북한에 의해 병합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최소한의 경제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또 미국에서 남아도는 잉여농산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원면, 사탕수수, 밀 등의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으로서 1950년대에는 방직, 제당, 제분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수입대체공업이었던 셈이다. 또 정부는 원조실시였다. 제1차 계획은 4.19 혁명의 정신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자립경제의 달성을 내걸었다. 그리고 화폐개혁에 의해 숨겨졌던 국내자금을 동원하여 공업화를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다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공업화가 애로에 직면하자 박정희 정권은 정책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립경제가 아니라 외국자본주도, 수출주도, 국가주도의 공업화를 지향하는 것이다.그리고 1950년대의 수입대체공업화가 봉착한 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수출공업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수출은 국내시장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임과 동시에 부족한 외환을 조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를 위해 수출금융에 특혜를 제공하고 수출실적에 따라 수입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한편 이러한 공업화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밀고 나가기 위하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 이외에 은행을 이용하였다. 이 밖에 박정희정권은 농촌의 피폐를 몰아내기 위해 고리채를 정리하였다. 이는 1950년대의 농민생활의 악화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정책이었다.4) 1970년대의 한국경제정부는 1973년에 중화학공업화선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화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경공업제품의 수출만으로는 수출이 한계에 직면하였다. 둘째로 경공업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재를 외국에서 수입함으로써 국제수지가 만성적인 적자를 누적하고 있는 구조를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로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자주국방을 위해 무기생산 즉 방위산업에 나서게 되었다. 넷째로 국제분업구조가 변화하는 가운데 선진국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분야가 발생하고 여기에 한국이 끼어 들 여지가 발생하였다.이러한 정부주도 공업화에 참가하지 못하면 정부로부터 제공되는 특혜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므로 기업들은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대기업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학공업화 과정을 거쳐 재벌이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재벌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영/경제| 2003.06.06| 6페이지| 1,000원| 조회(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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