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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 로마제국 평가A좋아요
    Ⅰ. 서론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王政期)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共和政期)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帝政期)로 들어간다. 그러나 395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Ⅱ. 로마제국1. 왕국 시대주전 9세기부터 소아시아에서 에트루리안인(Etrurian)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오고, 주전 8세기에는 헬라인들이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로 이주해왔으며, 라틴 부족들과 로마인들도 이탈리아 중부와 티베르강 하류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처럼 로마는 여러 민족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국되었다(주전 8세기경).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왕인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가 폭정으로 추방되기 전까지의(주전 510년) 3명의 왕이 에트루리안인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제(王制)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왕은 군사 ·정치 ·제사(祭祀)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民會)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2. 공화국 시대왕제 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전 510년 왕정폐지 이후, 농토를 장악하고 있는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에서 선출한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공화국 체제를 운영해 나갔다고 한다.그 후 평민들의 신분투쟁의 결과, 주전 367년에는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치안관, 재무관, 감찰관, 호민관 등의 공직도 평민에게 개방되었다. 이렇게 공직을 가지게 된 평민은 귀족이 될 권리를 가지게 성공했다.(201 BC)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왕국 ·시리아왕국 ·아이톨리아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칼타고, 그리스,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을 차례로 점령하는 등(146~147BC)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그 후 로마는 100여년 동안 외침과 내란에 시달리게 된다(133-30BC). 내란의 이유는 복합적이었는데 첫째는 경제문제를 들 수 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둘째는 급격히 진행되는 헬라화 과정 때문이었는데, 헬레니즘의 새로운 가치관은 고대 로마의 낡은 가치관을 흔들리게 하였다. 셋째는 피정복지 주민들에 대한 찾취와 합리적인 행정의 부재로 인한 고통과 불만이었다. 넷째는 항존하는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력의 강화 때문에 사회적 불균형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의 과두정치가(寡頭政治家)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투표권에 의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공화제 말기의 ‘사병(私兵)’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무력투쟁이 많아진다.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층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낡은 도시국가적 제도였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엄존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또 이 무렵부터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된 실업가로서의 기사(騎士) 신분을 가진 자는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속주민(屬州民)을 착취하였다.지중해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는 정치가는 로마의 시정(市政)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대립하여 보수적인 원로원에 반역하고 오히려 민회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의 ‘부유한 자’를 살리려는 정치가는 공교롭게도 로마의 ‘부유한 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그룹과 충돌하였고, 그 때문에 로마 시정(市政)에서는 민중파가 지향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私兵)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주전 88년에는 본도(Pontos)의 왕 미트라다테스 Ⅵ세 유파토르가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로마에서 해방시키려 하자 로마는 술라를 파견시킨다. 그러나 마리우스파는 술라를 불신하고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기려 하나 술라는 이를 무시하고 미트라다테스를 격퇴시킨다. 그 후 정치보복을 한 후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진 사임했다(79 BC).한편 스페인에서 마리우스 파인 세르토리우스가 이베리아 국가를 세우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원로원은 술라의 양딸과 결혼한 폼페이를 파견하여 이베리아를 평정했다(77-71BC). 그 마지막 여왕으로 임명하고(47 BC), 그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원정을 통해 로마제국을 고대 문명의 중심지와 연합하려 하였으며, 슬라브족과 게르만족도 로마 공화국 안에 포함시키려고 하였으나, 주전 44년 3월 15일에 브루투스에게 암살되었다.케싸르는 몇 가지 개혁에 성공하였는데, 첫째는 행정부를 재구성하고 원로원 의원의 수를 900으로 늘렸으며, 둘째는 퇴역 장병들과 빈곤층을 정창시키고 빚을 탕감해 주었다. 셋째는 달력을 개정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하루가 추가되는 태양력을 도입시켰다.케싸르는 조카의 아들 옥타비우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그 후 옥타비우스는 가이우스 줄리우스 케싸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그는 정적인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키케로와 동맹을 맺었으나, 키케로의 세력이 몰락해 가자, 안토니우스에게 전향하였다. 이 때부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의 삼두정치를 시작한다(43 BC). 다음 해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이에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줄리우스 케싸르를 신격화하여 선포하였다.삼두정치꾼들은 여러 차례 권력을 분배한 결과, 안토니우스는 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 로마의 지배자가 되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지배하였으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다스렸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제거하고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서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어 로마 제국이 동 서로 양분되었으며 삼두정치의 임기도 연장되었다.안토니우스는 헬레니즘으로부터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사상을 도입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져(BC 41) 두 아이를 낳는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였던 본부인과 파경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반역으로 몰아 전쟁을 선포한 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다(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3) 칼리굴라(Caligula, 가이오, 37-41)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의 아들인 칼리굴라에게 권력이 계승되었다. 칼리굴라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는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쥬피터의 화신으로 믿고 모든 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까지 자신을 숭배하도록 요구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호위병들에 위해 살해당한다.4) 클라우디우스(Claudius, 41-54)칼리굴라를 살해한 친위대원들은 커튼 뒤에 숨어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의 손자였던 49세의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쿨라의 누이인 아그립비나와 결혼하고 그녀의 아들 네로를 양자로 삼고 그를 황제 계승 일순위로 정했다. 그러나 무능한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계승의 이행에 차질이 올까 염려한 그의 아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5) 네로(Nero, 54-68)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네로는 두 명의 근위대장의 반역에 직면하게 되고 원로원은 그의 직위를 박탈하였다. 그는 다음날 로마 근처의 별장으로 도주하여 자살하였다.6) 군웅활거(68-69)네로 사후 원로원은 반란의 주도자였던 귀족 출신 갈바(Galba)를 황제로 지명하였으나, 정치력이 미흡하여 곧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지휘자였던 비텔리우스는 그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고, 갈바는 오토(Otho)일당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비텔리우스는 로마로 진군하여 백년 동안의 평다.
    인문/어학| 2002.12.11| 8페이지| 1,000원| 조회(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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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국문학] 언어의 특성 평가B괜찮아요
    Ⅰ. 서론인간을 그 포착된 특징에 따라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 '도구를 사용하는인간(homo faber)',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 등으로 표현하는 일도 있지만, 언어에 주목하여 '말하는 인간(homo loquens)'이라고 부르는 일도 있다.) 『국어지식탐구』「국어교육을 위한 국어학개론」, 김광해 외, 박이정, 2002. p.19.이 언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수월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동물들도 의사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그것처럼 체계적이고 복합적이며 효율적이지는 않다. 동물들의 의사소통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본능적인 욕구나 희노애락의 단순한 감정표현 등을 드러낼 때 쓰이지만 인간의 언어는 본능적인 욕구나 감정표현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미래의 계획, 상상 등 표현의 제한이 거의 없다. 또한 인간은 순전히 미적인 이유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를 쓸 때 흙으로 모양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단어를 교묘히 다루게 된다.) 『언어의 이해』, 김혜숙, 태학사, 1997. p.21.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언어가 우리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매일 매일 쉽게 접하는 한 부분이므로 언어에 대한 사색의 필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인간 언어의 특성을 6가지로 나누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6가지 특성은 이번 논고를 작성하는데 참고한 도서를 바탕으로 하여 본 논자가 조금 수정하여 다루었음을 미리 밝혀둔다.Ⅱ. 언어의 특성1. 이원성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어야 하고 이를 실어 나르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즉 소리와 의미가 결합되어야만 언어로서 기능을 하게 되며 따라서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둘 가운데 하나만 가지고는 언어로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이를 언어의 이원성이라고 한다.) 위의 책, 김광해 외. p.29.가끔씩 텔레비전을 보면 개그맨들이 거짓 외국어를 개그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있다. 외국어와 비슷하게 소리를 내서 얼핏 들으면 진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외국어와 소리가 비슷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단지 소리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공부하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의미는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맞는 소리를 모르기 때문이다.'의미' 와 '소리'가 음성언어의 필수 조건이라면 문자언어에서는 '소리' 대신 '문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수화 역시 '소리' 대신에 '동작(표정을 포함해서)'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언어들 역시 이원성을 충족하고 있다.2. 분절성분절성에 관해서는 두 가치 측면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우선 세상 사물이 특별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표현하는데, 이를 언어의 분절성이라고 한다.) 위의 책, 김광해 외, p.34.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배'라고 할 때, 어디까지가 '배'이고 어디부터가 '허리' 혹은 '가슴' 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배'가 특별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이를 분절해서 '배'라고 부르는 것이다.두 번째 측면에서의 분절성은 언어가 일정한 단위들로 나누어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분절성을 마르티네는 '이중 분절'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언어학개론』, 성백인·김현권, 방송대학교출판부, 1997. p.9.이 역시 예를 들어보면 '나는머리가아프다'라는 음성 연속체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나', '는', '머리', '가', '아프-', '다'와 같이 분절되어야 한다. 이렇게 음성 연속체가 의미를 지닌 단위로 분절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칙이 필요하고,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분절된 의미를 지닌 단위를 '단소'라고 부른다. 음성 연속체가 이와 같이 단소로 분절되는 과정을 '1차 분절'이라고 한다.단소는 다시 하위 요소로 분절된다. '나'가 /ㄴ/과 /ㅏ/로 분절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음성들 각각은 그 자체로서는 음성 형태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뜻을 구별하는 기능만을 지닌 음성들을 '음소'라고 하고, 1차 분절의 단위인 단소가 음소로 분절되는 과정을 '2차 분절'이라고 한다.) 위의 책, 성백인·김현권. pp.9∼10 참고.3. 자의성앞에서 언어의 이원성에 대해서 설명할 때, 언어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을 '소리'와 '의미'로 들었다. 소쉬르는 우리가 청각이나 시각을 통해 직접 지각할 수 없는 부분, 즉 의미를 시니피에라고 불렀고, 이 부분을 알려주는 직접 지각할 수 있는 부분, ,즉 소리를 시니피앙이라고 불렀다.) 위의 책, 성백인·김현권. pp.10∼11 참고.그런데 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를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개인이 제 뜻대로 바꾸어 사용할 수 없기에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들의 관계가 처음부터 필연에서 유발된 것은 아니다.언어의 자의성은 같은 시니피에의 단어가 다른 나라 언어들에서 얼마나 다르게 소리가 나는지를 비교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말(馬)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ma, 일본에서는 uma, 미국에서는 horse 라고 소리를 낸다. 또한 같은 나라의 언어라고 해도 그 시기에 따라 같은 시니피에의 단어가 다른 시니피앙을 가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어의 어원을 연구할 때 찾아보기 쉬운데, 예를 들어, 지금은 강(江)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전에는 '까람'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시니피에를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시니피앙이 같지는 않다. 같은 시니피에라고 해도 시니피앙은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가 자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위의 책, 김광해 외. pp.31∼32.4. 추상성'진실, 허위, 지배, 복종'등의 단어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형상이 눈앞에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대상 자체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을 개념어, 관계어라고 부기도 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오랜 시간동안 고도의 언어 훈련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언어적 성장을 이루기 전에는 정확히 이해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다. 인간이 이같은 추상어들을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은 지극히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의 산물이다.) 위의 책, 김광해 외, pp.36∼37 참고.
    인문/어학| 2002.12.11| 5페이지| 1,000원| 조회(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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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문화] 관례와 계례 평가A+최고예요
    1. 관례, 계레의 의미옛날에는 여자 15세, 남자 20세에 이르면 성년례 의식이 있었다. 남자는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고 관을 씌운다는 뜻으로 관례라 했으며, 여자는 머리를 올려 쪽을 지고 비녀를 꽂는다는 뜻으로 계례라고 했다.이 성년례는 혼례와 깊은 관계가 있어 대체로 혼례 직전에 행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 관례의 의식에서 「다례」를 행하였는데 조선시대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하면 관자(冠者)가 조상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에 배례(拜禮)할 때 다례를 행하였다. 이 관례에 다례를 행하던 뜻은 다나무처럼 늘 푸르게 선비의 지조를 지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새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 성년례(관·계례)는 그들이 성년이 되었음 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우는 예로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관례와 계례의 참뜻은 머리모양을 바꾸는 외형적인데에 있지 않고 어른으로서의 책무(責務)를 일깨 우는데 있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이 바뀐 현대라 하더라도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우는 의식은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성년례를 성년의 날 (5월 셋째 월요일)에 행한다.2. 전통 관례와 계례의 절차(1) 관례의 절차1) 시기(時期) : 15세부터 20세 사이에 정월 달 중에서 날을 정해 행한다. 정월에 성년식을 하는 이유는 그 해가 시작되는 때에 어른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5세 에서 20세 사이에 행했던 까닭은 남자는 양이고 20은 음수여서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20세를 적정 연령으로 보았으나 20세 이전에도 혼인을 할 수 있으므로 최소 연령을 15세로 한 것이다.2) 계빈(戒賓) : 관례 의식을 집행할 어른을 빈(賓·主禮)으로 모신다.3) 고우사당(告于祠堂) : 3일 전에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에 아뢴다.4) 진설(陳設) : 관례를 행할 장소를 정하고 기구를 배설(配設)한다.5) 시가(始加) :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고, 어른의 평상복을 입힌 다음 머리에 관을 씌우고, 어린 마음을 버리고 어른스러워질 것을 당부하는 축사를 한다.6) 재가(再加) : 어른의 출입복을 입히고 머리에 모자를 씌운 다음 모든 언동(言動)을 어른 답게 할 것을 당부하는 축사를 한다.7) 삼가(三加) : 어른의 예복을 입히고 머리에 유건(儒巾)을 씌운 다음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을 당부하는 축사를 한다.8) 초례(醮禮) : 술을 땅에 세 번 조금씩 붓고, 천지신명에게 어른으로서 서약을 하게 한다.9) 관자(冠字) : 이름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항시 부를 수 있는 이름인 자(字)를 지어 준다.10) 현우존장(見于尊長) : 어른으로서 웃어른에게 뵙고 인사를 올린다.(2) 계례의 절차1) 시기(時期) : 여자는 음이고 15는 양수인 까닭에 음다움은 양과 합하는데 있다고 여긴 때문에 대개 15세 되는 해의 정월에 날을 정해 행한다. 원칙적으로는 혼인을 정하면 하였으나 15세가 자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15세에 계례를 했습니다.
    인문/어학| 2002.12.11| 3페이지| 1,000원| 조회(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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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국문학] 경기체가 평가A좋아요
    Ⅰ. 서론우리 나라의 시가문학은 원시가무에서 출발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여러 형태의 시가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면서 존재해 왔다. 그 중에서 경기체가(景幾體歌)는 엄격한 형식과 특이한 표현법으로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역사적 전환기에 정치와 문화를 담당했던 신흥 사대부 특유의 사유 방식을 표출하고 있어서 그 성격이나 특징이 비교적 선명한 문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그 독특한 형식미로서 일찍부터 학계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조란, , 부산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5, p.1경기체가를 논하기에 앞서 고려가요라는 명칭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 창작, 향유된 시가에는 사뇌가, 시조, 가사, 민요, 한시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를 고려가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의 시가를 범칭할 때에 고려가사, 고려 가요 또는 고려 장가(長歌)라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 그리고 , , 따위의 한문계 시가들을 경기체가, 경기하여체가, 또는 별곡체라 불러 왔고 , , , , , , 따위의 시가군을 불러 고려 속요 또는 고속가(古俗歌)라 하여 왔었다.)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2000, p.111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용어를 중심으로 한 갈래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2 1+2조윤제 장가 경기체가이병기 별곡 별곡체정병욱 청산별곡류 한림별곡류 별곡이명구 속요 경기체가 고려가요북한문학사 고려인민가요·고속가 한림별곡체·경기체시가 고려국어시가최철 고려국어가요 경기체가 고려가요) 최철, 《고려국어가요의 해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 p.7이 중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인가에는 각각 문제가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이명구의 논의에 따라 고려가요를 속요와 경기체가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고, 이 시기 시가의 갈래와 명칭을 일단 정하기로 한다.본론에서는 경기체가의 정의와 분류, 형식과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고과 , 이 있다. 은 무신란 이후에 관직에 진출하게 된 신흥사대부의 득의에 가득찬 세계관을 과시한 노래이다. 은 안축이 44세에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 지방의 뛰어난 경치에 감흥을 받아 지은 작품이고, 은 작자의 고향인 죽계(竹溪), 곧 순흥의 뛰어난 경치를 노래한 작품이다. 안축의 작품은 객관적인 자연을 찬양하되 그 동기에 있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흥을 표출하려 하였으며, 분위기에 있어 서정적인 경향이 강하다.이 시기의 작품은 새로이 일어나는 세력의 당당한 포부를 정서적인 바탕으로 하는 신흥사대부들의 작품이되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경향을 띠고 있고, 형식적인 전범이 되는 작품이되 부분적으로 형식적인 규범에서 일탈하여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는 생동력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2) 세종대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작품태조 태종대의 을 비롯하여, 세종대의 , , , , , , , , , , 그리고 세종 세조대의 이 있다. 이 시기는 신흥사대부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는 시대로, 나라를 지탱시키는 근간이 되는 이념적 틀을 제시하려는 강한 지향성을 보이며, 시의 내용에 있어 교술성이 다분한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유교적 이념을 제시하거나(, , ), 왕조의 도읍지를 찬양하거나(), 조정의 중추인 관부를 찬양하거나(), 임금을 찬양하고 송축하는 악장(,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질적인 작자층인 승려에 의한 작품도 등장하게 되는데, 미타신앙을 배경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작품(, , , )과 깨달음의 과정을 노래한 을 옮긴 작품()으로 나뉜다. 사대부의 세계관을 근간으로 하는 경기체가가 불교노래로 편입된 것은 세종 세조대가 외유내불의 특성을 강하게 보인 시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이 시기 작품의 형식은 개별작품에 따른 개인적인 변용의 가능성을 살리기보다는 획일적이고 규범적인 틀을 확고하게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교술적인 내용을 획일적인 형식 속에 담으려 했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이 창조적이지 못하고 생까지 남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지은 것이다. 유배 생활 중에는 부모상을 당하고도 가보지 못하는 슬픔을 겪었다고 하는데 내용에서는 전혀 그러한 고난과 슬픔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을 방불케 하는 풍류가 엿보이므로 김기동, 김창규는 이 노래를 과 같이 풍류시가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조란은 작품 속의 자유분방함은 애써 신선 세계같은 자연에 눈을 돌리고 비현실적 낙천적 풍류 생활을 그려 냄으로써 그의 실생활에서 오는 우수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체념이었다고 본다.은 지방 유생으로 어렵게 진출하여 벼슬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자 관직에서 물러나 태인에서 후학의 양성에만 힘쓰던 정극인이 성종 3년(1472)에 임금이 그 공을 인정하여 삼품교관(三品敎官)의 벼슬을 내리자 이에 감동하여 지은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정계에 나아가 성실히 뜻한 바를 실천하고, 만년에 그 대가로 성은을 입고 자연에 묻혀 아무 근심없이 살아가는 느긋한 만족감이 한껏 드러나 있다. 에 대해서는 뒤의 작품론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위 세 노래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은 겉으로는 풍류적이요 안으로는 체념적 성격의 문학이고, 은 자기 인생에 대한 만족감을 잘 드러내고 임금에 대한 성은도 잊지 않는 연군적인 성격의 문학이며, 은 은둔생활의 즐거움을 표출한 은일적(隱逸的) 성격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한 가지 공통점은 셋 다 주어진 여건에 잘 적응하는 생활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들에서는 도피의 성격은 찾아볼 수 없다.(8) 불교적인 송축 및 포교의 노래이 노래들은 내용면에선 송축의 불찬가로, 기능 목적면에서는 포교의 불찬가로 보았다.① 안양찬, 미타찬, 미타경찬작자는 세종 때의 스님인 함허당 기화이다. 그가 살아온 억불정책이 강했던 시대로 보아 불교의 폐단과 핍박을 실제 체험하면서 올바른 포교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면서 불교를 옹호하고 중생을 인도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② 서방가작자32, 김문기, 앞의 논문, p.276 재인용① 연장체의 시가이다.② 전대절과 후소절로 되어 있다.③ 제 1-3행은 3음보격, 2p 4-6행은 4음보격으로 이루어진 6행시이다.④ 제 4행과 제 6행은 '위(偉 혹은 爲) / - 景 / 긔엇더 / 힝니잇고'로 4음보를 이루는 것이 원칙이다.⑤ 제 1, 2행은 3 3 4란 음수율에, 제 5행은 4 4 4 4 란 음수율에 매우 익숙하다.이상과 같은 경기체가의 형식적 특성을 토대로 경기체가의 율격 구조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임기중 외, 앞의 책, p.33, 성호주, , 《수련어문론집》13, 부산여대, 1986, pp.51∼52 재인용.제 1행 : 3 3 4 (3음보) ─┐제 2행 : 3 3 4 (3음보) ─┤ 전대절제 3행 : 4 4 4 (3음보) ─┤제 4행 : 위 / OO경 / 긔엇더 / 힝니잇고 (4음보) ─┘제 5행 : 4 4 4 4 (4음보) ─┐제 6행 : 위 / OO경 / 긔엇더 / 힝니잇고 (4음보) ─┘ 후소절이는 경기체가의 율격을 음수율보다 음보율을 위주로 파악한 결과이다.4. 경기체가의 특징경기체가는 구문 구조상 서술적 연결이 생략된 명사 혹은 단구형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압도적이다. 또 한 연의 중간과 끝에 삽입된 "경(景) 긔 엇더힝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 혹은 유사 문장이 그 연의 전체 사설을 집약해 주는 역할을 한다. 원래 경기체가는 단순히 율문으로 표출된 서정시가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최근에는 경기체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 외적 세계를 작품 안에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작품에서 특별히 창조한 세계상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세계상은 작품화되기 이전에 가졌던 문자 그대로의 외연적 의미를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하며 그 장르적 성격을 교술(敎述)로 규정하자는 주장도 있다. 후기 경기체가에서 서정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경기체가는 교술이 주된 장르이되, 서정성이 복합된 장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내용면에서는 문학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원문 및 현대어 풀이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四六(사륙): 사륙변려문. 문장의 한 종류. 한편 전체가 대구로 이루어지는 문체로 한문에서만 볼 수 있다. 대구를 많이 사용한 문체를 이렇게 부른다.李正言 陳翰林 雙韻) 雙韻(쌍운) : 서로 각기 다른 운을 택하는 일.走筆) 走筆(주필) : 구상이나 퇴고 없이 생각나는 대로 곧바로 운문의 형태에 맞춰 작품을 완성하는 일. 작가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행해졌다.沖基對策) 對策(대책) : 과거 시험 때 보던 과목의 하나. 문제를 내걸어서 그 대책을 논술하는 양식.光鈞經義 良經詩賦위 試場ㅅ景 긔 엇더힝니잇고(葉) 琴學士의 玉荀門生 琴學士의 玉筍門生위 날조차 몃부니잇고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변려문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주필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풀이, 김양경의 시와 부아, 과거 시험장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엽) 금의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 금의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아, 나까지 모두 몇 분입니까唐漢書 莊老子 韓柳文集李杜集 蘭臺集 白樂天集毛詩尙書 周易春秋 周戴禮記위 註조쳐 내외온景 긔 엇더힝니잇고(葉) 太平廣記) 太平廣記(태평광기) : 송나라 태평흥국 2년(977)에 태종의 명에 의해 지어진 일종의 설화, 민담집.四百餘券 太平廣記 四百餘券위 歷覽ㅅ景 긔 엇더힝니잇고당한서, 장자 노자,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이백과 두보의 시집, 난대집, 백거이의 문집시경 서경, 주역 춘추, 대대례, 소대례를아, 주(註)마저 줄곧 외우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엽) 태평광기 400여 권, 태평광기 400여 권아, 두루 읽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眞卿書 飛白書 行書草書篆 書 書 虞書南書羊鬚筆 鼠鬚筆 빗기드러위 딕논景 긔 엇더힝니잇고(葉) 吳生劉生 兩先生의 吳生劉生 兩先生의위 走筆ㅅ景 긔 엇더힝니잇고안진경 서체, 비백체, 행서 초서전주체, 과두체, 우서, 남서체를양털붓, 쥐털붓을 비스듬히 들어아, 내려찍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엽) 오생 유생 두 선생의, 오생 유생 두 선생의아, 붓 놀리는 모습, 그것이 되어
    인문/어학| 2002.12.11| 28페이지| 1,000원| 조회(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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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학원론] 유대 지방 로마 지사(총독)들의 활동
    Ⅰ. 서론성경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생각할 때 신약성경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의 역사를 이해함으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였는데 이스라엘만은 다른 정복지역과는 다른 대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로마의 원로원에서 대리 지배자로 보내는 총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왕을 세워 통치하게 하였는데 처음으로 세운 왕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으로 있었던 헤롯 대왕이다.헤롯 대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팔레스틴)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는데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켈라우스가,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 이두래와 드라고닛은 그 동생 빌립보가 통치하였다(눅3:1).헤롯 대왕의 아내 말라게에게서 난 장자 아켈라우스는 B.C.4년에서 A.D.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였는데(마2:2) 그의 통치가 너무 억압적이었기에 유대와 사마리아의 귀족층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위협을 내세워 아켈라우스를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에 아켈라오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유대는 로마 총독의 순회 통치 지역으로 편입된다.한편 후에 갈리굴라 황제의 마음을 산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Ⅰ세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와 빌리보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한 갈리굴라의 후계자 클로디우스 황제가 즉위하자 그가 황제가 되는 것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하여 전에 아켈라우스의 영토였던 유다, 이두메, 사마리아까지 받게 되었다. 이로써, 41-44년까지 4년동안 아그립바 Ⅰ세는 헤롯 왕조의 면모를 다시 회복하는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그러나 헤롯 아그립바 Ⅰ세가 44년에 죽자 로마는 아그립바 Ⅰ세의 영토까지 로마 총독의 순회 통치지역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유대 전체가 시리아로 편입 되어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본론에서 다루어지는 유대 지방 로마 행정관들의 정치 기간 동안의 황제들을 살펴보면 클라디우스, 네로, 갈바, 오도, 비텔리어스의 활거, 베스파시안 등이다.Ⅱ. 유대지방 지사들의 활동1. 코포니우스 지사와 세금 문제옥타니아누스는 아칼라오스를 해임하고 그가 통치하던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를 로마의 직접 통치 지역에 포함시킨 후, 그것을 시리아 총독의 관할구역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직속 지사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게 하는 이중 관리체제를 운용하였다.초대 지사는 코포니우스(Coponius)로, 그는 15년까지 6년 동안 지사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황제 직속으로 자신의 구역을 관리하였으나, 군사문제와 세금문제 등은 시리아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이스라엘 지역은 11개의 최고체제로 분할된 다음, 유대와 사마리아에 자치의회를 두었으나 중요 문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에 회부되었으며, 사형문제는 지사가 주관하는 법정에서만 다루어졌다.지사에게는 세금 징수의 의무가 있었는데, 직접세는 유급 관리들을 통해, 간접세나 관세는 세리들에게 하청을 주어 징수하였다. 지사에게는 대제사장 임명권의 권한도 있었으나, 성전 제의나 율법 준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지사의 행정 기구는 가이사랴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중요한 축제 기간에만 예루살렘에서 체류하였으며, 그 대신 예루살렘에는 상설수비대와 로마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코포니우스는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 조사와 재산 조사를 위해 시라아 총독 구레뇨를 유대 지방에 데리고 왔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인구조사 사건을 예수의 탄생과 연결시키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주후 6년에 탄생한 것이 된다.이 당시의 대제사장은 여호와살로 그는 유대인들이 저항을 막았으나 에스기아의 아들 유다가 바리새인 사둑과 함께 인구 조사는 노예제도를 의미하며 외국인 통치자에게 세금을 바치는 행위는 십계명의 첫 항목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선동하였다. 이에 이들은 세금납부를 피해 숨어 살게 되고 그들의 저항은 지하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조세퍼스는 세금과 관련한 저항운동을 열심당의 행동 개시로 본다.코포니우스의 후임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15-26년)로, 그는 착취를 일삼았으나 디베료 황제는 총독을 자꾸 바꾸는 일은 주민들을 더 착취당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그대로 두었다.2. 본디오 빌라도(26-36)와 예수재림주후 26년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지방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아그립바 1세의 평을 빌어 그를 살펴보면, 본디오 빌라도는 고집이 세고, 굽힐 줄 모르며, 엄격한 데다가 뇌물을 좋아하고, 거만하며, 화를 잘 내며, 강탈과 살인을 일삼는 등 극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경멸하여 로마 군기를 예루살렘 성안에 가져가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에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항의를 하자 대량 학살은 자기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한 나머지 생각을 돌렸다.빌라도는 의거를 일으킨 주동자들을 학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예수를 처형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수도를 건설한다며 성전 금고를 침범하기도 하고, 예루살렘에 황금 방패를 시민들에게 정성을 드리게 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또한 어떤 사마리아 예언자의 예언대로 민중들이 그리심산으로 집결하려고 무장을 하자 학살을 단행하는 등 그 악명이 높아지자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그를 면직시켜 로마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빌라도의 정치 생명은 주후 36년에 막을 내렸다.그러나 주후 37년, 디베료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리굴라는 자신이 신으로 숭배되기를 원해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는 민중들의 궐기로 이어져 동상제막이 지연되다가 41년 갈리굴라가 암살 당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석하였다.3. 파두스와 유대지방 행정개편아그립바 Ⅰ세가 41년부터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전 지역을 통치하다가 44년에 사망하자 이스라엘 전 지역이 유대 지사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스라엘 전 지역의 첫 지사는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 44-46)로 그의 통치 시기 때 드다 사건이 발생한다. 드다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요단강으로 가서 여호수아처럼 자신이 요단강을 가르겠다고 장담하다가 지사가 보낸 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만다.파두스의 후임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로 그는 유대 상류 가문 출신으로 후에 이집트의 지사도 지냈다. 그는 철저하게 로마에 충성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의 아들들을 체포하여 십자가에 처형했다.4. 쿠마누스와 유대 사마리아 분쟁알렉산더의 후임은 쿠마누스(Cumanus, 48-52)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 한 유대인 순례자가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로 가려다가 살해당하였다(51).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공격하여 방화와 학살을 감행하자 시리아 총독 콰드라투스가 개입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대표 및 쿠마누스 지사를 로마로 노배 협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제사장 요나단과 막강한 실력자 파라스가 그의 형제이자 해방노예인 벨릭스를 황제에게 유대 지사로 추천해주는 조건하에 중재하여 분쟁이 해결되었다.5. 벨릭스와 열심당원들쿠마누스의 뒤를 이어 벨릭스(Felix, 52-?)가 지사가 되었는데, 그는 해방노예 출신으로 기사계층 인물들만 배출되면 지사의 전통을 깨뜨렸다. 벨릭스 시대에 그의 무력함으로 인해 열심당이 처음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소요와 난동을 일삼았다. 그러자 벨릭스는 열심당의 지도자 엘르아잘을 속임수를 써서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고, 수많은 당원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열심당원들은 혁명당원들로 단도를 숨겨 가지고 다니면서 로마에 협력하는 자들을 암살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들을 단도를 가지고 다니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식카리라고 불렀다. 식카리들의 희생자에는 대제사장 요나단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광야로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다고 선동하여 민중들을 사막으로 끌고 가기도 하였다.
    인문/어학| 2002.12.11| 4페이지| 1,000원| 조회(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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