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서 본 실학의 생성Ⅰ. 실학의 개념과 구분실학이라는 말은 각 시대마다 그리고 학문의 대상과 형태에 따라 여러 의미가 있어 왔다.일반적으로 실학이란 중세사회 해체기인 조선후기의 역사적 산물로서 부정적인 현실을 개혁하고 새 사회를 이룩하려는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창출된 사상 체계였다고 정의되고 있다. 즉 실학은 사회발전이론의 성격을 띤 현실개혁 사상이며, 허(虛)에 대한 실(實)을 의미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협의의 개념이다.실학의 구분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천관우는 근대지향성과 민족의식을 특징으로 들고 이에 충족되면 실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또한 근대 지향적 성격을 갖추거나 혹은 민족적 의식을 갖추었어도 실학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었다.실학은 실학자들의 활동시기와 학문지향의 차이에 따라 전기 실학파 (유형원, 이익, 안정복 등)와 후기 실학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김정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실학자는 아니었으나 제한적으로나마 실학의 학문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율곡 이이와 중봉 조헌을 한 부류로 묶어 볼 수도 있다.Ⅱ. 실학의 생성배경조선 초 중기의 학자 중 이이, 조헌 그리고 이수광 등은 일찍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에 대한 시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인 바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점차 교조화 되어가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우선 나타난 것이 주관적 실체적 유학체계인 양명학의 도입과 이론적 모색이었다. 주자 성리학의 근본적 변화 요구에서 나온 것이 실학이다. 18세기 후반에 실학은 조선후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갖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곧 유교사상의 자기반성과 극복과정의 산물이었다. 실학의 중심과제는 조선 후기의 제반 사회문제를 어떠한 방향에서 해결하느냐에 집중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것에 관심이 두어졌고 특히 농촌 경제와 농업경영에 초점이 모아졌다.Ⅲ 집권세력의 잘못된 국제정세 판단에 의해 표방되어진 친명반청 정책은 조선사회를 전란으로 몰아 넣었고 이로 인해 민생 파탄은 더욱 심각했다. 18세기에는 존명반청 사상의 순기능마저 한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조선의 지배적 사상체계였던지라 북학파에게는 강한 이념적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감히 견해를 피력했고, 이는 가히 혁명적 개혁의지를 표방한 것이었다.연암 박지원은 성리학의 역기능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했다. 북학이 등장하던 당시의 조선사회는 중세사회 해체기로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하에서 존명반청의 성리학적 흐름을 차단하고 민족적 자각 속에 실용적 입장을 고취하며 사회를 복구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북학이 제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담헌 홍대용은 그의 화이론(華夷論) 을 밝힘에 있어 종래의 문화가치 위주의 화이론에서 탈피하고 지계(地界)에 따라 조선=화, 청=이 라는 기존의 사고를 조선=이, 청=이 로 변화시켰다. 이같은 인식은 19세기 후반의 국가 평등 관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한편 정약용의 와 유득공의 를 통한 민족의식의 표현은 북학파의 또 다른 민족주의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다산은 한국 고대국가의 흥망성쇠에 관한 해석에서 도덕주의적 해석방법을 피하고 철저히 물질적·제도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다산은 강역고에서 마한과 백제사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한 것은 중국이라는 의미를 자기 중심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가 중심국가가 중국임을 설파한 것으로 이전까지의 전통적 접근과는 달리 하는 북학파의 새로운 인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이상에서와 같이 북학파는 조선사회의 전통적 화이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관념적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탈중화하려는 주체성의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민족과 민중의 복지를 위한 길로 상업주의를 선택하고, 중상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적·유교적 국가에서 탈피하는 새로운 부국 강병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더구나 이들의 1915 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이라는 저서에서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역사를 해석하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여 주체의식을 뚜렷하게 보이는 등 민족자존적 성격을 나타냈다.다산 정약용은 「척발귀론(拓跋鬼論)」에서 중국과 이적(夷狄)의 관계를 정통 성리학의 대중국관과는 다른 인식과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담헌 홍대용도 지원설(地圓設)과 지전설(地轉設)을 주장한후 ,화이의 구분을 상대화시킴으로써 화이사상을 비판하였으며,더 나아가 탈 중화적 사상을 지향하였다.이와같은 그들의 화이론은 물론 자신들의 북학론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이론은 법이 좋고 제도가 좋으면 오랑캐의 것이라도 배워야한다. 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주적의식과 입장을 강조하였다. 만일 이들의 화이론이 단순히 중국을 배우자는 논리적 근거로서만 가능했다고 하면 이들의 주장역시 정통 성리학에서 보여 주고 있던 모화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과 사상은 이같은 한계를 뛰어넘어 민족자존의 의식을 획득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점에서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보다 분명하다고 하겠다.2.민본 . 위민의 개혁사상실학자들은 백성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민본주의적인 정치제도를 제시 하였다. 다산의 도덕관. 윤리관은 현실적으로는수기(修己)보다도 치인(治人)의 측면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는 통치자의 치민윤리(治民倫理)와 통치의 실질적 수단인 제도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의 저서인 「경세유표」,「흠흠심서」, 「목민심서」등이 바로 제도 개혁과 치민윤리의 재확립에 역점을 두고 쓰여졌다. 다산의 윤리사상, 민본적 정치사상, 경제사상등은 항상 중민복지를 최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요컨데 다산의 정치사상의 근간은 하향적 전제정치 보다는 상향적 민본주의 정치적 입장이었다는 것이다.이것은 구체적으로 민권옹호, 백성평등, 민주주의적 협의, 덕치적 왕정의 지향, 민에 근거한 통치권 모색 더한 자로 불무농(不務農)을 지적하였고, 여섯가지 좀으로 노비. 과거. 문벌. 기교. 승니. 유수(遊手)를 들었다. 여기에 과거를 포함시킨 걸을 보면 성호가 과거제도에 대해서 얼마나 비판적이었는지를 알수있다.한편 성호는 과거제도의 운영뿐만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도 얼마나 비판적이었다.그러나 성호 이익의 제도개혁 사상도 역시 전근대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성을 갖고 있었다. 즉 그의 제도개혁사상은 성리학적 사회기반과 관료적 봉건사회속에서 낳아 성장하고 발전하여 온 시대적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성호는 농업을 강조함으로써 상공업을 천시하는 성리학자의 전통적 관념을 극복하지 못하였다.4.군사개혁사상실학자들은 민중과 직.간접으로 관계되는 군정(軍政)에 대해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6세기이후 조선왕조의 군정문란이 시작되었고 그 폐해는 군포수납과정에서 족징. 인징 등의 방법을통해 극심한 모습을 나타냈다. 이에 실학자들은 이같은 문제들의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의 군정개혁론은 2개의유형으로 살펴 볼 수 있는데, 병농일치제 개혁론과, 호포제 내지 구전제 개혁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학자들의 병농일치제 개혁안은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안과 연결된다.유형원은 토지소유를 근거로한 군역부담원칙을 세웠다. 그는 군포제(軍布制)의 폐지와 봉족제도 원칙의 농병일치제 개혁을 제시하였다. 성호이익도 같은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그때까지 제외되었던 천인도 군역에 복무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형원과 이익의 군역개혁론은 양반층의 군역부담에는 반대함으로써 개혁상의 비형평을 노정하였다.그러나 이와같은 제 실학자들의 반상 구별 없는 호포제와 양반담역론에 근거를 둔 구전제 주장등은 결과적으로 봉건적 신분제를 변동시키는데 영향을 주는 개혁사상인 동시에, 이 시기에 진행되고 있었던 봉건사회의 이완 내지 해체를 설명하려는 신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들의 군사개혁론은 비로소 현실성과 시대성이 반영된 정약용에 이르러 어느정도 한계성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정약용할 것을 주장한 것,농가 매호에 주는 일정한 농지를 영벙 전으로 지정하여 매매를 금지하되, 그 나머지 토지는 매매를 허락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는 것매매가 불가능한 영업전과 매매가 가능한 기타 토지 소유의 평등 강조정약용 : 여전제(閭田制){) 약 30 가구를 하나의 최소 행정 단위인 여(閭)로 구성하고, 여장의 통솔 관리하에 여민이 토지를 공동소유. 공동경작하며, 작업량에 따라 공동 분배하게 하는 제도다산의 여전제는 농민의 전(田) 10분의1을 공전으로 하여 이를 공동으로 관리 . 경작케 할 것과 일정한 경작지를 정하여 공동수확. 공동분배하게 하는 것에 의한 공동농장제를 구상하고 구체적으로는 정전제(井田制)의 필 요성을 역설둘째, 북학파. 이용후생파박지원 : 한전론(限田論)으로 농기구 개량. 영농방법혁신. 관계시설 확충을 기할 것을 주장박제가 : 소비와 생산의 관련을 통한 상업으로의 전환에 주목유수원 : 농업의 전문화. 상업화.기술혁신 강 이와 같은 두 가지의 토지개혁론의 흐름에도 에도 조선후기는 지주층에 의한 토지 겸병이 본격화 되고 있었고, 토지문제에 대한 개혁적 해결책으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정전론. 균전론. 한전론 등이 제시 되었다.2. 상업진흥사상초정 박제가는 실학의 대표적 저서인 「북학의」를 저술하는 등 18세기 후반상업적 측면을 강조한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초정은 서얼이라는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농민과 상공인에게 유익한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청의 문물제도를 배워 생산기술과 도구를 개선하고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을 장려하는 것이 첩경이라며, 상업의 우위를 주장하였다.초정은 상공업 발전을 위해 청나라와의 통상 강화를 주장하고 소비를 통한 생산증진과 물화의 상통으로 민중의 부를 증진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수요를 개발하는 것이 공급을 자극하는 일이며,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이 가능하니 더욱 기술을 개선하여 정교한 물건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이 가능하니 더욱 기술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