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나라의 경우 낙태와 관련된 법적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는 헌법, 형법, 모자보건법, 의료법이 있다. 그러나 법 해석 문제가 늘 그렇듯이 각각의 법은 낙태의 허용과 금지간에 상당한 갈등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도 "인간의 생명은 잉태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임된 태아는 새로운 존재와 인격의 근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므로 그 자신이 이를 인식하고 있든지 또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지에 관계없이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함이 헌법 아래에서 일반국민이 지니는 건전한 도의적 감정과 합치되는 바"라고 판시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이상 인간존엄의 대전제가 되는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울러 태아는 인간의 생명에 속하므로 '태아의 생명'도 당연히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태아의 생명이 절대적으로 보호된다고는 할 수 없다. 생명의 보호가 다른 법익에 대하여 예외 없이 우선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한 법질서가 태아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에 부합하는 규정은 보호하려는 법익, 침해의 태양과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고, 또 다양한 방식들이 종합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적 방법들이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한 실효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형법적 수단에 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형법의 특별법에 해당하는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내용과 헌법적 문제점을 검토하고자 한다.1.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내용과 문제점모자보건법에는 정당화되는 낙태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형법상 원칙적으로 금지된 낙태를 특별법인 모자보건법이 이를 허용하는 일정한 사유를 규정하고 있다. 동법 제14조는 다음과 같은 우생학적, 윤리적, 의학적 정당화사유가 있는 경우에 임신중절이 허용된다고 보고 있다.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무엇이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에 해당하는가의 여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자체가 낙태의 정당화 사유가 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져야 한다.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본인이나 배우자가 모자보건법시행령 제15조제3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염성 질환에 걸렸어도 태아도 같은 질병에 걸리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설사 태아가 그러한 질병에 걸린다 해도 얼마든지 치료하여 나을 수 있다.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성폭력의 직접 피해자인 여성의 행복 추구권이나 여성 결정권을 고려할 때, 강간에 의한 임신은 임신한 여자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요된 임신이므로 태아의 생명을 제거할 수 있다는 이론은 호소력이 있는 듯하다. 더구나 14세 미만의 소녀에게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만일 부녀의 인격권 때문에 낙태를 인정할 경우, 생명권은 다른 낮은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도 괜찮다는 혼돈된 가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이 문제는 생명을 파괴하는 낙태로써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예방적 성교육, 성폭력의 미연 방지와 미혼모 보호 대책, 그리고 입양 사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면서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한 경우법률에 의하여 태아의 헌법상 생명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또는 침해받는다 하더라도 가장 적은 수의 태아의 생명권이 침해받도록 입법자는 생명보호의무를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의 범위를 - 비록 우생 학적 또는 윤리적 사유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 획기적으로 축소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모체의 건강'이라는 개념은 추상적 개념이다. 여기에는 '산모의 생명'이 포함될 수도 있고 그러한 정도에 이르지 않는 경우도 포함된다고 할 것이다. 만약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는 당연히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산모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하여진 낙태는 정당화되지 않고 산모의 생명에 대한 심각한 위험의 경우 또한 산모의 건강에 대한 심각한 침해의 경우에 한정되어야 될 것이다. 렇게 본다면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제5호의 규정은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므로 이런 예외적 상황은 기대불가능성을 기준으로 그 범위가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6) 기타의 문제점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낙태의 사유를 확인하는 의사와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낙태 사유를 확인하는 사람과 시술하는 사람이 동일한 경우에는 낙태를 희망하는 산모의 의사(意思)와 많은 수익을 올리고자 하는 시술자의 이익이 일치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태아의 생명에 대한 보호는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모자보건법 제14조의 정당 화 사유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너무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사유의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자와 의사의 담합을 제어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낙태 사유를 확인하는 의사와 시술하는 의사를 분리할 필요성이 있다. 낙태 행위가 의사의 경제적 이득이 되지 못한다면 무분별한 낙태 행위가 상당히 자제될 것이기 때문이다.둘째, 정당화 사유를 확인하지 않았거나 또는 허위로 판단한 경우에는 이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2.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의 개선방안우리의 법 현실은 광범위하게 낙태가 행하여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전무한 형편이다. 따라서 사문화된 모자보건법의 규범력과 실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우선 현행 모자보건법을 개정하여 낙태죄를 보다 엄격하게 규정하고자 하는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형법 개정안 제135조가 그러한 취지에서 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실효성의 측면에서 낙태에 관한 처벌규정을 폐지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처벌규정을 폐지하는 것이 생명보호를 위한 입법자의 헌법상 의무와 합치하는 가의 여부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헌법은 생명에 대한 국가의 보호의무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1) 낙태금지법의 강화(형법 개정안 제135조)우리의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임신중절의 정당화사유를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고 보니, 불법낙태에 대한 처벌이 사실상 용이하지가 않고, 또한 현실적으로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관행이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현행의 모자보건법 제14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낙태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는 것으로 낙태의 자유화로 인식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태아의 생명보호에 대한 포기는 헌법 제10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위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경우 국가의 태아에 대한 생명보호의무는 산모의 자유의사에 호소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고 법적 요청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 경우 국가의 태아보호의무는 사실적 효력을 지향하고 의도하는 규범적 질서로서의 법의 특성에 부합하게 법적 효과가 따르도록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낙태는 결코 산모의 자기운명결정권에 의하여만 결정되어질 사항은 아니다. 낙태에는 인간존엄의 전제가 되는 태아의 '생명'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규범의식이 부족한 한국의 윤리적, 사회·문화적 여건에서는 낙태금지법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법의 교육적 기능을 고려할 때, 현행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서 낙태에 관한 처벌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낙태의 허용범위에 관한 모자보건 법 제14조의 정당화사유를 포섭하여야 한다고 한다.2) 새로운 시도 : '상담규정(Beratungsregel)'의 도입경험이 풍부하고, 이해심이 넓은 전문적인 상담가를 통하여 산모가 가질 수 있는 갈등과 어려움을 서로 논의하고 토론함으로써 산모가 낙태를 결정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태아의 보호를 위한 보다 나은 조치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국가가 산모에게 형벌이라는 일반적 위협을 가함으로써가 아니라 상담과 태아의 생명에 대한 그녀의 책임을 촉구함으로써, 경제적 및 사회적 장려와 이와 관련된 양질의 정보를 통해서 어머니로서의 임무를 회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혼인은 '성(性)과 성의 결합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해온 역사만큼이나 길다.근친근혼, 동성불혼, 동성동본불혼등은 고려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강화되어온 혼인규제의 내용들이다. 조선 초기에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동성끼리 혼인한 자는 각각 장 60대의 형에 처하고 이혼케 했다. 조선 중기까지 이러한 동성불혼 주장이 이어지다가 후기로 오면 동성동본불혼으로 변한다.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조선사회는 가정윤리나 가족제도, 결혼관등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법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에는 근친혼을 금했고, 상중(喪中)의 결혼을 금했으며 첩과의 혼인, 다른 신분간의 혼인을 금하였다. 또한 이조에 들어와서 처첩(妻妾)의 구별은 법률로써 정하고 일부일처의 혼속을 법률로써 근절(禁絶)하려고 했으나 특권계급에는 폐(廢)치 못한 제도로 첩제가 그대로 공인되었으니 일부다처의 혼속이 남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가문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가족은 혈연을 통한 가계의 유지가 우선적인 목표였으며 따라서 여성은 가계계승을 위한 아들을 낳아야만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다. 여성의 귀속적 지위는 성도덕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별을 가져왔다. 즉 여자만이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강력히 요구되었다. 결혼 후에 있어서도 처는 단지 가족계승자에 남아의 분만과 남편의 부모의 귀속자로서의 역할만을 대행하는 지위가 주어졌을 뿐이다.조선 초기이후는 남편이 사망했을 때 재혼하지 않아도 열녀가 됐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 열녀측에 끼워주었다. 또 남편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살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과부로 살던 중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등 극단적 행위를 한 여성들이 열녀로 표창받았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부부유별' 이라하여 음양의 원리에 의해 남자는 하늘, 여자는남자(대개 가난한 사람)에게 딸을 주어 데릴사위로 삼아 그의 노동력을 빌고, 양자는 같은 성씨에서 따로 취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데릴사위 혼속은 조선시대 특유의 것으로 추정된다. 예서란 대부분 집안이 가난한 어린 남자를 여자집에서 맞이하여 성장한 후에 혼인시키는 것으로, 고려·조선 시대에 일부에서 하던 혼인 형태이다.‘민며느리[預婦]’와 반대인 경우이다. 고려시대 때 몽골에 처녀를 바친 공녀(貢女)와 조선시대의 왕가간택제도에 연유한 것으로서 혼인 후에 서양자 또는 솔서의 형태로 이행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제도들은 노동력 부족과 가난 등 경제적 여건이 그 배경이었다.우라나라는 혼례에 관한 한 오랫동안 유지해온 관행과 풍속이 있었다. 그것은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풍속으로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1년 혹은 그 이상을 처가에서 머무는 혼인 방식을 말한다. 이를 솔서혼속(率壻婚俗)이라고 하며, 고구려에 있었다는 서옥제(壻屋制)도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집 근처에 가서 신부를 자기 집에 데리고 와 혼례를 갖는「주자가례 」의 친영(親迎) 방식과 대조적이다. 친영은 신부가 신랑집에 와서 혼레를 올리는 중국의 혼인풍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친영은 그들의 고유풍속을 유지하면서 신랑이 신부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아가 옴으로써 음(陰)에 대한 양(陽)의 적극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우리의 오랜 관행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갖고 일정 기간을 그곳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귀여가의 혼속은 부계친족의 자녀들의 각자의 외가에서 성장하는 기회를 주게 됨으로써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결집력있는 족결합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왔기 때문에 조선 초부터 종법을 준수하려는 사족들에 의해 시비거리가 되었다.기록상으로 보면 세종 17년(1435) 3월에 파원군(坡原君) 윤평(尹 )이 태종의 13녀인 숙신옹주(淑愼翁主)를 친영한 것이 사상 최초이었으나 당시는 이와 같은 왕족의 혼인에나 솔선하따르게 하는데 급급하였다. 특히 이때는 성리학과 예학이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가 이 무렵의 예학인 셈이다.지배계층의 예로 규정되어 시행된 것이 조선 초기인데 반하여 일반서민의 예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는 이미 예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사대부들의 가정을 중심으로 유교식 혼례 절차가 엄격히 지켜진다. 당시사회적 규범의 척도가 되었던 유교식 혼례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혼례식만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가가 혼담을 건네기 시작하면서 혼인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지배계층의 예로 행해졌고, 서민들은 조선 말기에 가서야 혼례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전통시대 혼인에 대해서는 혼례 의식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만 연구가 되어 있을 뿐 혼인생활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특히 양인(良人) 신분에 대해서는 그나마 이들에게 혼례라는 의식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혼인을 공인받는 절차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진 것이 없다. 이것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인 신분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이들의 생활 양태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같은 양인 신분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생활수준과 경제력은 각양각색이었다. 양반가의 노비들은 개인적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가정을 거느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반해, 양인신분이면서 남의 집 소작인으로 겨우 생계나 유지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또 체면치레도 못하는 몰락한 양반보다 경제적으로는 월등한 지위에 있었던 양인도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렇듯 양인 신분은 한마디로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다.그러나 혼인이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조선조 신분의 벽은 매우 두텁고 단단했다. 양반은 몰락해서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우면 가문의 격이 낮으면서 경제력이 있는 공로를 인정받아 재산상속을 받고 적자녀에 의해 사후봉양을 받는 등의 권한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양인 신분의 첩이 양반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세전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첩 혹은 서모에 대한 일시적 배려일뿐이었다.양인이 자신보다 격이 낮은 노비 혹은 천인 신분과 혼인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호적이나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종종확인되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의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당사자간의 의지로 결합되는 경우도 있지만 노비를 소유한 양반 계층에 의해 조장되는 사례가 허다했다.양천교혼이란 평민인 양인과 더 낮은 신분인 천인이 서로 혼인하는 것을 말하며, 이 두 신분 사이에 태어난 소생들은 16∼17세기까지만 해도 '병산(幷産)'이라 칭했다. 아마 남녀가 함께 아이를 낳았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양반들간에 낳은 자식도 '병산'이라 하였다.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서로 다른 신분간의 결혼은 원칙적으로 불법이었다. 양천교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양반의 이권이 최대한 보장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은연중에 불법이 묵인 혹은 용인되기도 하였다. 양인이 천인이 되면 군역이나 부역 부담자가 줄게된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자주 금지령을 내렸지만 관행화되어버린 양천교혼현상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예외조항이 생겨나게 되었다. 양반이 양인 혹은 노비를 첩으로 얻을 경우 그 자녀들은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양인으로 인정하는 것도 예외적인 조치의 하나였다.국가적 차원에서 양천교혼이 문제된 것은 일반 평민과 노비가 결혼했을 경우이다. 이 경우 노비세전법이라는 관습법에 의해 신분과 소유권이 결정되었다. 일천즉천(一賤則賤),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이 그것이었다. 일천즉천은 부모 가운데 한쪽이 천인이면 그 신분은 천인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종모법이란 노비끼리 결혼하여 낳은 자식의 신분은 말할 것도 없이 천인이며, 소유권은 어머니 쪽의 주인하더라도 문집, 족보 등에서는 빼버렸으며 분재기를 비롯한 고문서나 일기류 등에 조금 나오는 정도이다. 대개 비는 유희의 대상이었으며 혹 자녀가 출생하더라도 체면을 위해 그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 통레였다. 노에 비해 비는 혼인의 범위가 매우 넓어 전 신분층에 걸쳐 있었다.이러한 혼인의 범위는 신분이 귀한 쪽으로 올라갈수록, 특히 영성의 혼인 폭은 좁아지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양인 여성의 경우 노와 혼인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양남과 혼인을 많이 했고 야반이나 중인의 첩이 되기도 했다. 중인 여성은 신분내혼이나 양반의 첩으로 들어갔으며, 양반 신분의 여성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신분내혼으로 양반 가문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혼인 절차나 격식에서도 신분이 귀한 양반은 정혼하고 일년정도를 묵혔다가 혼례를 거행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았지만, 신분이 내려올수록 사회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지 못해 격식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비 등 최하천의 경우는 아주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소반에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혼인 당사자 둘이서 혹은 가족이나 이웃 앞에서 부부가 됨을 알렸다.15∼17세기는 노비제의 전성기였다. 전 인구 가운데 적게는 3할, 많게는 4할까지가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가 고려시대부터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고려 말기 14세기부터 노비인구는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많은 비중을 차지한게 된 것은 15세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왜 이런 중대한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가지 현상으로서 노비가 양인 신분과 혼인하는 양천교혼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양천교혼은 국가정책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왕조는 양천교혼을 사실상 허용하는 방임정책을 취하였다. 노비가 양인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들은 모두 노비신분에 속하였다. 어머니든 아버지은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들은 모두 노비신세를 면할 수 없 있다.
제 8요일을 보고 나서...다니엘 오떼이유와 파스칼 뒤켄느 주연, 자코 반 도마엘 감독 제 8요일. 정신 지체아 인 '조지'와 자신의 일만을 중요시하는 '아리', 이 두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며칠을 함 께 보내며 서로에게 동화되어가는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지 냈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이 영화를 먼저 본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도 전에도 특이한 제목 때문에 알고는 있었던 영화였다. 제 8요일... 어떻게 보면 아리 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아무생각없이 순수한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날 이된다. 이 영화에서 조지역을 맡은 다니엘 오떼이유가 다운증후군과 흡사하게 생겼 다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실제로 다운증후군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조금 놀라웠다. 그런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세일즈 기법 강사인 아리는 가족보다는 일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부인 줄리는 남 편의 차가운 성격에 지쳐 잠시 별거중에 있다. 항상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식당에 서 간단한 식사를 한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의를 한다. 이 장면에서는 7시 30분 을 가리키는 시계를 여러번 보여주며 아리가 얼마나 계산적으로 살아가는지를 강조 하고 있다. 아리도 부인과 자식들과 다시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줄리의 집 으로 여러번 찾아가지만 그녀는 아리와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저녁. 빗속을 차로 가르고 달리면서 아리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갑자기 달려든 개 를 치고 놀라게 된다. 그 개는 정신지체자인 조지의 것이었다. 조지는 어머니가 4년 전 돌아가신걸 알고 있지만 다시 보고 싶어 요양원에서 탈출하여 예전에 함께 살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리는 조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할 수 없이 함께 그 집을 찾으로 떠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래 서 누나를 찾아 갔지만 누나는 눈물을 흘리며 여기를 떠나라고 한다. 정상적이지 못한 동생을 저렇게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는 그녀가 너무 이기적인게 아닐 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동안 조지를 돌보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까지 했는지 가슴이 아팠다. 며칠을 함께 보내며 둘은 서로에게 동화되어갔고 오히 려 아리가 조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전 나무 그늘 아래 풀밭에 누워서 아무말없이 새 우는 소리, 바람부는 소리와 같은 자 연의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는다. 조지가 1분만 딱 1분만 더 이렇게 있자고 하는데 이 1분이라는 시간이 참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마친후 조지는 다시 요양원으로 돌 아가고 아리도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자꾸 방황하게 된다. 이럴 때 조지가 요양원 친구들을 이끌고 회사로 나타나 아리의 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함께 간다. 줄리의 집앞 바닷가에서 펼쳐진 멋진 불꽃놀이 덕분에 줄리와 어린 딸과 아들은 아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 조지는 친구가 이렇게 행복해진 모습 을 보고 난후 이제 자기는 아리에게 짐만 될뿐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결심한다. 초 콜릿을 너무 좋아하지만 알러지가 있기 때문에 먹지 못했던 것을 풀어보려는 듯 초 콜릿 한 상자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다 먹고 난후 새처럼 날 듯이 뛰어내린다. 그 토록 그가 가고 싶어하던 엄마의 품으로 ....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삼국지를 한 번도 안 읽어 본 사람과는 얘기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얼핏들은 것 같아 '과연 어떤 내용이길래 그럴까' 라는 호기심으로 책 표지를 열게 되었다. 10권이나 돼서 처음에는 부담감이 컸지만 겨울방학동안 한 권씩 한 권씩 읽다 보니 삼국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푹 빠지게 되었다.그럼 삼국지의 배경을 살펴보자.후한도 말기에 이르자 황제 측근인 환관과 외척간의 대립이 격화된다. 특히 12대 영제가 등극하면서 이 대립은 절정에 이르러 유혈사태가 거듭된다. 영제는 이러한 환관과 외척간의 유혈대립에 기가 질려 정치에 흥미를 잃는다. 정치는 오로지 환관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관직을 파는 등으로 축재에만 골몰했던 것이다.황제가 매관매직을 하고 있는데 나라가 온전할 까닭이 없는 법. 결국 정치의 부패는 민중의 불만을 불러왔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사회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종교에 빠지는 경향을 보인다. 후한 말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북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태평도(太平道)', 한중을 중심으로 퍼지는 '오두미도(五斗米道)' 등이 민중, 특히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이들 종교 가운데 특히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장각을 교조로 하는 '태평교'였다. 장각(張角)은 184년(中平 원년)에,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 누런 하늘이 온다. 갑자년이 되면 천하는 대길이다!" 라는 주장을 앞세워 신도 수십만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스스로 천공장군이라고 호칭하면서 민중을 모아 놓고, "한나라의 운명은 이미 다했다. 성인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 너희는 의인을 좇아 태평시대를 즐겨라." 라고 선동했다. 장각의 연설에 호응한 민중이 무려 40만-50만명. 이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들은 누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맸기 때문에 '황건적의 난'이라 부른다.태평교의 교조인 장각과 그의 형제 장보(張寶), 장량(張梁)은 전국시대의 조나라 땅에서 태어났다. 맏이인 장각은 어릴 적부터 수재로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과거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어느날 약초를 캐려고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짚은 남화노선(南華老仙)을 만난다. 그 노인은 장각에게 '태평요술'이라는 책을 주면서, "이 책을 잘 읽고 익혀 세상을 구하고 도를 개척하여 선을 베풀어라." 하고 당부했다. 그날 이후 장각은 그 책을 탐독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도술까지 깨쳤다고 한다. 때마침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장각은 두 동생을 데리고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고,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태평도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황건적의 기반을 구축한 것이었다.황건적들은 각지의 관아를 불지르고 태수 현령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한왕조는 겁에 질려 벌벌 떨 뿐 실권을 잡고 있는 환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영제는 환락과 재물에 눈이 어두운 황제였으므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황후 하씨의 오빠 하진(何進)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토벌군을 편성했다. 하진은 군사적 재능은 물론 통솔력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노식(盧植), 황보숭(皇甫嵩), 주준(朱雋) 등을 중심으로 삼군을 편성하여 황건적을 토벌한다.떠오르는 해처럼 기세좋게 진격을 계속한 황건적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숫자는 비록 많았으나 어디까지나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통솔자가 없으면 언제 뿔뿔이 흩어질지 모르는 무리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황건적에게는 대군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과 전략에 뛰어난 참모가 없었다. 초기에는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관군이 출동하면서부터 모든 약점이 한꺼번에 노출되어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조인 장각이 병으로 죽는다. 결국 그해 10월 황건적의 난은 완전히 평정된다.황건적의 난 평정에는 나중에 '삼국지'를 수놓게 되는 많은 영웅들이 참전하고 있다. 유비, 손견, 조조, 동탁, 원소 등등... 특히 조조는 황건적 1만여 명의 목을 벤 공적으로 제남지방의 재상으로 임명된다. 손견도 난 평정 뒤 별부사마(현대의 연대장쯤)가 된다. 반면 유비는 별다른 상을 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조조, 손견에 비해 몇 걸음이나 뒤처진 것이다.내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가장 이끌렸던 인물은 바로 제갈공명이었다. 약간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등장하기를 얼마나 고대하며 읽었는지 모른다.그 큰 중국의 땅덩어리를 셋으로 나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라와 나라가 생기기까지의 공백을 유비와 조조, 손권은 땅을 셋으로 나누어 채웠다. 촉, 오, 위. 이 세 나라들 중에 유비를 제일로 치는 것일까? 진나라를 세운 것은 위인데... 유비를 제일로 치는 이유는 인재가 곁에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있다. 단지 조조, 유비, 손권은 꿈이 크고 남다른 포부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삼국지라는 소설, 아니 사실 속에 숨겨진 뜻이 무얼까? 나는 '갈 길을 개척하며 실패해도 포기하지 말고, 도와줄 사람을 찾아 목적을 달성하라' 인 것 같다. 수많은 싸움에 지고 또는 이기면서 너그러움 속의 매서움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용기와 의리를 잃지 않고 천리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용기 등이 우리가 배울 점이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마음 속의 꿈을 키우지 않고 있다. 열심히 꿈을 키워 모사이던 장수이던 지도자이던 큰 사람이 될 생각은 안하고...처음에 유비에게 한 젊은 선비가 찾아와 지혜로운 말 한 마디를 건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후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약간의 미련이 남았었다. 하지만 뒤에서 그가 제갈공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 추측이 맞아서 정말정말 기뻤다. 나는 어쩌면 제갈공명이라는 인물에게 반했는지도 모른다. 앞날을 내다보고 대비할 수 있었던 밝은 지혜, 평등과 사랑으로 백성들을 돌보던 인간애, 부와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는 검소함... 한 마디로 내가 본 제갈공명은 완벽한 인물이었다. 혹시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추구하고 바라던 인간적인 관료상이 바로 제갈공명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제갈공명의 지혜와 인품은 매우 많은 감동을 주었고 제갈공명은 내 인생의 목표적인 인물이자 절대로 잊지 못할 인물로 내 기억속에 남아 있다.그런데 제갈공명이 죽을 떠는 너무 슬펐다. 죽을 병의 원인이 과로라니 너무나 허무했다. 또 촉나라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였다. 그가 죽으면서 한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죽어가면서까지 선주에 대한 의를 저버리지 않고 나라를 생각하는 모습에서는 슬픔도 안타까움도 아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위,촉,오의 운명이 엇갈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사람은 조자룡이다. 비록 나에게는 제갈공명에 관련되는 사건들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지만 조자룡 역시 매우 많은 내용이 기억난다. 혼자서 적의 대군 속을 주군의 후손을 안고 헤쳐나가는 의리와 용맹은 가히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 번 섬긴 이를 절대 배신하지 않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움에 임하는 모습에서 나는 내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처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 최고가 되려고 노력한다면 상산의 조자룡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내 미래도 밝을 것이다.주인공인 유비에게서는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라 분명히 그 시대의 관우, 장비, 조운, 제갈공명 및 그 이하의 장수들도 그랬을 것이 틀림 없다. 단호함이나 판단력이 없어서 나이가 들어서도 근거지 하나를 잡지 못한 것, 여자를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어떻게 그런 지도자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혼란의 시기에 어을리지 않는 것 같았다.그러나 나는 결코 유비가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겉의 부드러움 속에는 무서운 야심과 밝은 생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그의 인품 앞에서는 녹아 사라지고 심지어 장점으로까지 보였다. 바로 이것이 유비 밑의 장수들과 백성들이 그의 흐지부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않고 진정으로 존경하는 이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