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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달심리학]아동증언
    아동증언1. 아동 성학대(성폭력)문제 현황 진단과 문제점1. 아동 성학대(성폭력)의 의의와 내용(1) 아동 성학대(성폭력)이란?아동 성폭력은 13세 이하의 아동을 대상으로 가해지는 성적행동. 가슴, 성기 애무, 강간 등의 직접 접촉 외에도 성기노출, 음란물 보여주기, 언어적 희롱도 포함된다. 아동 성폭력은 계획된 범죄이며 실수에 의해 발생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아동은 범죄자가 접근하기 용이하고 범죄사실을 은폐하기 쉽기 때문에 성폭력 범죄에 가장 노출되기 쉬운 위치에 있다.(2) 아동성학대 후유증정서적: 불안/강박증세, 무기력/우울증, 분노/적개심, 수치심, 죄책감, 낮은 자기존중감인지적: 해리(이인화 장애, 비현실화 장애), 부정, 감정억압, 인지왜곡, 환각신체적: 수면장애, 심인성 통증, 신체이미지 저하대인관계: 거부공포, 친밀공포, 과잉책임, 통제행동, 희생반복행동영역: 자해행동, 공격행동, 섭식장애, 알콜 및 약물남용성적영역: 성기능장애, 성정체감 왜곡2. 아동성폭력 피해 현황(1)외국: 미국의 경우, 매년 2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법적인 문제 연루, 이중 만3천명은 유아로서 성학대를 다루는 재판에서 증언하게 된다.(2)우리나라의 피해 현황① 서울고등법원에서 매 기일마다 1~2건씩. 심리에 들어가는 양상(김영흠, 어린이 성폭렴 사범 수사?공판상의 문제점, 1998, 김영흠)② 2000년 신고된 만 12세 이하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는 모두 530건으로 99년의 495 건보다 15.5% 증가되었음. 이는 최근 5년간 가장 높은 수치이며, 신고되지 않은 건수까 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3-4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2001년 5월 19일 경찰청 보고)③ 한 해 성폭력 피해자 25만명 중에 13세 이하의 어린이 성폭행은 30%를 차지, 그 중 7 세 이하의 유아 대상은 34.5% (한국 성폭력상담소, 2002)3. 아동증언의 중요성-아동성폭력을 비롯하여 각종 범죄에서 아동이 가해자, 피해자 혹은 관련 참조인으로 연루되어, 아동의 수 있도록 돕는 기법(뉴질랜드), 법정에서 증언하는 아동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한 효과 평가(영국), 법정에서의 경험이 아동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보다는 아동이 좀 더 생산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안하는 것에 주안점-아동증언의 연구 주제①아동증언의 신뢰성의 문제②아동증언의 효율성 향상 방안3. 암시적 면접(1)암시성(Suggestibility): 사람들이 사건 이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억 속에 포함시키는 정도-암시성의 내용(Gudjonsson, 1986)①암시성은 무의식적인 과정②사건 이전이 아니라 사건 이후의 정보에 의한 것③기억에 근거한 것(2) 암시적 면접의 위험성-유도질문: 질문의 제시방식을 조작하여 질문자체가 사건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는 형식의 질문-‘주어진 정보-새로운 정보’ 문장구조 내에서 듣는 이는 주어진 정보로 제시되는 정보를 실제 일어난 정보로 전제하고 새로운 정보에만 주의를 기울여 문장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아동에 미치는 유도질문의 영향과 아동의 피암시성김재연, 이재연. 유아증언의 신뢰성 연구, 아동학회지(2000), Vol.21, No.3실험: 만 5세 아동-40명, 만16세 고등학생 40명. 기억회상 자극물(그림카드, 장면과 사물)기억회상의 보고 결과 및 해석-개방형 질문: 개방형 질문에서 아동도 청년만큼의 올바른 회상 능력, 유아가 청년보다 잘못된 회상을 덜한 것으로 나타남-폐쇄형 질문: 아동도 청년만큼의 올바른 회상가능, 그러나 아동이 청년보다 잘못된 회상 더 많이 하여 정확성이 떨어짐.-유도형 질문: 아동이 청년에 비해 올바르게 회상한 비율이 낮았으며, 아동이 청년보다 잘못된 회상을 더 많이 하며, ‘모른다‘ 사용비율 현저하게 떨어짐.M(SD)M(SD)t아동(N=40)청년(N=40)개방형 질문정답률38.75(14.71)46.46(22.04)-1.84오답률11.88(14.97)37.50(50.00)-3.11무응답률61.25(14.71)53.54(22.04)1.84폐쇄형 질문정답률66.88(14.59)70.94(14. 면접자가 중요함을 시사3. 암시적 면접 기법(Suggestive Interviewing Techniques) 사용의 예①고정관념 유발(Stereotype inducement)-범죄혐의자의 특징적 정보를 사전에 제공(예>혐의자는 ‘나쁜’ 사람이다. ‘나쁜 행동’을 했다.②면담 분위기(Atmosphere of the interview)-고무적 환경 형성, 아동을 격려(예> 크기 웃어주기, 크게 고개 흔들어주기, “와, 대단하구 나!”-동조해주기③위협과 회유(Threats and bribes)-(예>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 집에 못간다→부모를 만나게 해준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④피면담자 조력자 선임(Co-opting cooperation)-피면담자가 중요한 사건조사에 조력자(예>경찰 뱃지 모형을 준다. 경찰서를 데려간다.)-친구들이 이미 사건 조사에 응했고, 아직 말을 안한 친구들도 조사에 참여해서 증언할 것 이라고 말한다.⑤지배적 이미지와 기억 작용(Guided Image or memory work)-시각화(Visualization)-아동에게 우선 어떤 일이 생겼다고 가정하고 기억하라고 권유, 사건의 심상을 만들어보고 세부사항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서는 면접자의 편향성을 확증하는 사건을 가 정하라고 주문⑥소도구 사용-해부학적 인형 사용* 고정관념(stereotype)과 반복된 암시아동 증언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는, 아동들에게 고정관념을 유발하였을 때와 반복된 암시를 받았을 때, 아동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동이 겪은 사건에 대해서, 사건을 겪기 전에, 아동이 이미 그 사건 속의 등장 인물이나 배경 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아동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있을까?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Leichman과 Ceci는 ‘Sam Stone 연구’를 실시하였다(Leichman & Ceci, 1995). 이 연구는 취학 전 연령(3세~6세)의 아동을 대상으로, am이 정말로 그런 일을 했는지 거듭 질문하였을 때도(예: “그가 정말로 그렇게 했는지 말해봐, 알았지?”), 통제 집단의 아이들보다 고정 관념을 유발한 조건의 아이들이 훨씬 더 많이 그렇다고 대답하였지만, 연령이 증가할수록 동의하는 비율이 줄어들었다.③ 고정관념 유발하지 않음 + 유도 질문을 받은 집단세 번째 조건의 아동들은, 유도 질문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고정관념은 유발시키지 않은 채, 암시성이 포함된 질문을 받도록 하였다. 즉, 두 번째 집단과는 달리, 3번째 집단의 아동들은 Sam Stone에 대해 사전에 들은 바는 없었다. 그러나 Sam의 방문 이후 10주간에 걸친 4차례의 인터뷰에서, 아동들은 매우 암시성이 높은 질문들을 받았다(예: “너는 Sam Stone이 교실에 왔던 것과 책을 찢었던 것을 기억하니? 그는 일부러 그런 거였니, 사고로 그런 거였니?”).그리고 마지막 5번 째 인터뷰는 앞의 두 집단과 같게 행하여 졌다. 3번째 집단의 아동들이 유도 질문에 동의한 비율은 다음과 같다.유도 질문 조건의 아동들 역시, 잘못된 보고를 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Sam이 찢었다는 데에 동의한 비율이 3-4세 아동은 52%, 5-6세 아동은 38%에 이르렀다. 아동들에게 Sam이 정말 했는지에 대해 다시 물어보았을 때도, 3-4세 아동의 10%, 5-6세 아동의 8%가 그렇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나이가 많은 아동일수록, 동의하는 비율이 적었다.④ 고정관념 유발 + 유도 질문을 받은 집단마지막 집단은, 두 번째 집단과 세 번째 집단에서 행했던 고정관념 유발 기법과 유도 질문을 모두 사용하였다. 즉, 네 번째 집단의 아동들은 Sam Stone의 방문이 있기 한달 전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Sam의 방문 이후에 가진 4 차례의 인터뷰에서도, 세 번째 집단의 아동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 암시성이 담긴 질문을 받았다.그리고 5번 째 인터뷰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동들이 5번 째 인터뷰에서 책과 곰 인형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동의한 전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또한, Sam Stone 연구는 아동들이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고, 아동 자신은 직접 그 경험에 참여하지는 않은 채 관찰자로서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아동의 증언이 필요한 사건들은 아동학대나 아동 성폭력 등과 같이, 비 일상적이고 충격적인(혹은 고통스러운) 사건이 더욱 많으며, 이 경우 특히 아동은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따라서 아동이 직접 경험할 수 있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연구하기 위해 아동이 소아과를 방문한 상황을 이용하였다(Bruck et al., 1995). 이 연구는 소아과에 방문한 아동들 중 취학 전 연령인 5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아동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한 집단은 중립 집단으로서, 소아과 방문 이후에 반복적인 암시나 암시가 포함된 질문을 받지 않았다. 다른 집단은 고통-부정 집단으로, 고통-부정 집단의 아동들은 소아과 방문 이후 암시적인 질문과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두 집단의 아동들은 모두, 소아과에 방문해서 일상적인 건강 진단을 받았다. 진단이 끝나면 여자 연구 보조원이 아동이 있는 방에 들어와서, 아동과 벽에 붙어있던 포스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 의사가 들어와서 아동들에게 약을 주고, 예방 접종을 실시하였다. 그 후 아동들은, 다른 연구 보조원에 의해 중립적 내용의 피드백(예: “다 끝났단다. 이제 집에 가도 되.”)이나 고통을 부정하는 내용의 피드백(예: “너 정말 용감했어. 주사가 아프지 않았나 보구나!”)을 받았다. 아동의 집단은 피드백의 내용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중립적 이야기를 들은 아동들은 중립 집단의 아동들이었고, 고통을 부정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아동들은 고통-부정 집단이었다. 그리고 아동들은 피드백의 내용과 상관없이, 연구 보조원에게 처방전을 받았다.이 일이 있은 후 일주일 뒤에, 아동들은 또 다른 보조원과 주사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리고 아동들이 얼마나 울었는지에 대한 면접을 받았다다.
    사회과학| 2006.01.02| 14페이지| 1,500원| 조회(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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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영화]역사 속 `진실` 찾기-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보고 평가A+최고예요
    상상력 없는 당신, 떠나라!-역사 속 ‘진실’ 찾기, 역사가의 상상력을 보여주다영화 은 상상력이 풍부한 역사가의 작품이다.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것은 장 드 코라스의 이라는 저서. 이 저서는 16세기 당시 툴루즈 고등법원의 판사였던 코라스가 다른 사람을 3년 동안이나 사칭하고 살아오다 덜미가 잡힌 사기꾼의 사건에 큰 감명을 받아 쓴 책이다. 한 소박맞은 아내가, 수년 동안의 가출 끝에 새사람이 되어 귀향한 남편과 알콩달콩 애까지 낳고 잘 살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더라는 것이 사건의 요지. 우리가 주목할 점은 원작이자 사료이기도 한 과 20세기에 만들어진 영화 이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원작에서는 사기를 친 악인으로 묘사된 가짜 남편 아르노가 영화에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착한 인물로 그려진다든가 코라스가 보기에는 나약하고 무지한 피해자에 불과하던 아내 베르트랑드가, 영화에서는 현실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능동적인 인물로 나타난다든가 하는 점이다.결국 이 영화는 사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텍스트가 생성된 사회적 맥락이라든가 텍스트의 구조를 파헤쳐 거기에 감독-혹은 역사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영화 은, 코라스가 자신의 저서에 명시하지 않았던 사실들, 가령 코라스 자신이 프로테스탄티즘을 신봉하고 있었던 사실이라든가 베르트랑드가 법정에서 갑자기 입장을 바꾸게 된 경위라든가 하는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나름의 상상력으로 사건을 다시 바라보고 있다는 소리다. 코라스의 종교는, 가짜 마르탱과 베르트랑드의 결혼 생활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부부의 애정에 기반한 화목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문제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독실한 신자였던 코라스가 가짜 남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충분한 까닭이다. 영화는 그러한 사실들을 구구절절 나열하진 않지만 엔딩 장면에서 “10년 뒤 코라스도 형장의 이 것은 의문의 여지가 충분한 대목이다. 그처럼 확고하던 주장을 어떻게 단 한 순간에 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코라스는 이에 대해 (적어도 겉보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여자란 “무지하고 현혹되기 쉬운” 존재인지라 베르트랑드가 속은 것은 당연지사, 한순간에 진짜 남편을 알아본 것은 “신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은 베르트랑드가 가짜 남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견지해 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료의 ‘재해석’이요, ‘재발견’이다. 물론 역사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사료의 구멍 메우는 상상력,과거의 ‘재현’인가, ‘창안’인가그런데, 이렇게 상상력에 기반하여 재구성한 과거를 정말 과거의 ‘재현’)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창안’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이 같은 문제는 미디어를 통해 역사를 재현할 때 부딪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징-역사의 재현이라는 측면보다는 내러티브의 극적인 요소, 즉 ’재미‘를 강조하는-때문일까, 혹은 재해석의 관점이 ’멋들어졌기‘ 때문일까. 영화 에 대해 이 같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한 역사가를 찾기는 힘들다. 그런 가운데 은 역사 공부를 위한 영화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많은 이의 찬사 속에서.재현의 문제에 대한 불만은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영화 제작에 자문역으로 참여한, 프랑스 근대사의 전문가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영화 속에 ‘재현’된 과거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영화가 가진 시?공간적 한계와 거기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왜곡이었다. 가령 게르 집안이 바스크에서 이주해왔다는 것을 생략함으로써 피에르 게르나 진짜 마르탱의 행위 동기를 불명확하게 해, 결국 이들을 악인으로 보이게끔 묘사했다는 점, 당시 농촌 사회에서 여성들이 재산권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베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상력의 장점, 개방성을 앗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이라는 동명의 저서를 써 냈다. 이 저작은 영화가 ‘잘라먹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되살려냄으로써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실험적 시도였다.이 책은 문학적 서사구조를 차용,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룬 저서들 뿐 아니라 당시 농촌의 관습, 재판 관례, 종교개혁, 농민들의 특성을 다룬 문학작품들까지 방대한 사료들을 토대로 과감할 정도의 상상력을 덧붙여 역사서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도록 책을 구성했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영화에서의 시도와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영화의 시도를 정교화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쨌거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열렬한 찬사를 받았고 미시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책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그러나 모든 역사가가 이와 같은 작업을 곱게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핀레이는 ‘마르탱 게르 다시 만들기’라는 논문을 통해 애초 내가 제기했던, ‘창안’과 ‘재현’의 문제를 수면위로 떠올리며 통렬하게 데이비스를 비판했다. 그는 데이비스의 작업이 역사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 즉 창안이라고 단언했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페미니즘적 성향”을 투영시켜 베르트랑드의 의도를 과대해석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사료의 범위를 보다 확대시키고자 했지만 그 과정이 매우 “주관적”인지라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데이비스가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녀는 ‘‘절름발이에 대하여’’라는 반박글을 통해, 사료의 범위를 좁게 보는 핀레이의 편협한 시선을 비판하며 자신의 재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역설했다. 덧붙여 자신에게 가해진 ‘페미니스트의 혐의’에 대해서는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스스로의 시각이 아닌 “당시 인물들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았다고-혹은 바라보고자 했다고- 말했다.상상력에 기반해 구성한 과거는 역사의 ‘재현’인가, ‘창안이, 데이비스 모두 과거의 재현을 ‘복원’에 가까운 개념으로 생각하는 듯 보이나, ‘복원’ 자체가 최소한의 ‘객관성’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둘의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결말을 짓게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과 해석이라는 과정 자체가 그렇지만, ‘사료의 확장’-역사가의 ‘상상력’의 개입-과 같은 민감한 부분은 더욱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서 보다 충분히 논의하기로 한다.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우선, 사료의 범위라는 첫 번째 문제부터 풀어보자.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 언급되었던 ‘미래의 역사가’를 떠올리게 된다. ‘빈 칸’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역사가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한정된 사료 뿐. 이 때 그/녀의 선택지는 어디까지를 사료로 인정하느냐의 문제다. 사료를, 블로그에 쓴 나의 글에 한정하느냐, 당시 또래들의 문화, 성향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영화로까지 넓히느냐에 따라 과거의 진실을 얼마나 포착하느냐도 분명 달라질 것이다. 만약 사료의 의미를 보다 넓게 잡는다면, 그리하여 상상력의 여지를 더욱 늘린다면 그 결과물로서의 과거는 창안이 아닌 재현이 될 터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핀레이처럼, 경직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료라는 개념 자체도 임의적인 것일 뿐더러, 사료로 인정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만 가능하다면 오히려 다양한 자료들로 “사회적 맥락의 빈칸을 채워나가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주장처럼, 이러한 상상력의 확장은 개방성을 보장해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줄 터이다.두 번 째 문제, 과거의 ‘재현’이 갖는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보다 어려운 문제다. 재현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복원해내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데이비스와 핀레이 모두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두 사람이 부딪치는 것은, 상상력이 이러한 복원으로서의 재현에 기여하느냐 혹은 방해하느냐의 야만 하는가? 또 역사가의 상상력은 복원으로서의 재현을 돕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에 앞서, 작년 절찬리에 상영된 드라마 을 잠시 살펴보자. 드라마 은 다들 알다시피, 을 담당한 PD가 메가폰을 잡고, 등의 오락프로로 잔뼈가 굵은 김영현 작가가 대본을 썼다. 여기서 명확히 알 수 있는 바, 불황으로 어수선한 사회에 ‘단비같은’ 영웅을 제시하고, 일단은 재미로 시청자들을 휘어잡겠다는 의도가 충분히 보인다. 게다가 TV 드라마답게 상업적이고 대중성을 지향하느라 내러티브 자체의 비약도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미덕은 충실한 고증을 거쳤다는 점이다. 작가가 인정했다시피 은 중종실록의 몇 줄 기록에 근거해, “90%이상 허구적 상상력”-그것도 재미를 목적으로 한-으로 메운 작품이다. 결코 ‘복원’에 충실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소리다.사실 장금이란 인물의 삶 자체만 놓고 보면 이 드라마는 완전히 ‘거짓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TV 화면 너머로 재구성된 조선시대가 우리에게 일말의 진실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참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드라마에 묘사된 민중들의 삶이라든가 왕의 노리개로 알려진 의녀나 궁녀가 당대의 전문직 여성으로서 수행했던 역할이나 소명의식, 신분? 성별 등과 같이 이미 주어진 제약 속에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취해왔던 능동적인 피지배층의 역동성을 떠올려보라. 이러한 요소들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충분한 고증을 거쳤을 뿐 아니라, 기존 영웅중심적?남성중심적 역사관 아래서는 묻혀있던 역사적 ‘진실’들을 발굴해냈다는 점에서 ‘참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역사의 재현에 있어 ‘창안’과 ‘재현’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이미 어떤 과거를 재현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부터 주관적인 선택이 개입되고 어떤 사료를 선택할 것인가에 있어서도 주관이 배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재현’이라는 개념에 이미 ‘창안’의 요소가 내재되어 ?
    인문/어학| 2006.01.02| 7페이지| 1,500원| 조회(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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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영화]단스 영화평 평가A+최고예요
    ∥영화평∥끈끈한 생의 의지“19세기 후반 노동운동을 하던 신부에 관한 이야기”어지간하면 영화를 볼 때 사전 정보를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 기를 쓰는 괴벽이 있으니,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나 쓸데없는 기대치를 갖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다. 일단 무슨 무슨 영화라더라, 라는 소문을 듣고 나면 내가 먼저 만든 이미지 속에 영화를 맞춰보는 우를 범하기 십상. 그럴 땐 재미도 반감된다. 등장인물,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장면 장면을 쫓는 그 맛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쏠쏠한 재미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를 보기 직전, 스트레이트로 내 귀에 핵심적인 줄거리 정보가 꽂히고 말았다. 비참한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온정주의적이면서 헌신적인 신부가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이야기겠구나. 전형적인 영웅담이겠지, 뭐. 어쩐지, 김이 새는 듯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단스가 영웅임은 틀림없었지만, 온정주의적이기 보다는 노동자들의 자발적 역량을 신뢰하고, 때로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모습도 보이는 영웅이었다. 또, 노동자들 또한 동정심을 자아내는 수동적 캐릭터이기보다 생동감있는 능동적인 캐릭터에 가까웠다. 오우, 이 정도면 괜찮은데?, 92년을 말하다본격적으로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밖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영화가 제작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어차피 영화 속의 역사는 영화가 제작된 시기인 ‘현재’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니 말이다.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잡으면서, 유럽에 정치?경제적 위기감이 팽배하던 1992년이다. 같은 해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EU를 창설하여 똘똘 뭉쳤더랬다. 자, 이처럼 자유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무한히 승리하는 것처럼만 보였던 이 시기에, 왜 하필이면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는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던 걸까? 대충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소련의 붕괴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이데올로기는 위축되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불평등의 심화와 같은-이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는, 자본주의가 갓 자리잡아가면서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던 시기인 19세기 말을 무대로 삼아,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영화 속에 재현된, 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과 강인한 생명력, 이념?종교를 초월한 노동자?지식인들의 연대, 이것이 바로 가 당대에 제시한 대안이었다. 여기서 연대의 기본 조건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하느냐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더라도, 이 문제의식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외적 정보가 워낙 부족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영화 내부의 많은 장치들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노동자의 자발적 역량 믿은 단스우리의 주인공, 단스 신부는 당시만 해도 높은 지위라 할 수 있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 하지만 돌출적 행동으로 교단 내에서는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 인물로, 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또, 그는 탈권위적인 인물이기도 한데, 이러한 면모는 강론 시 관례적으로 사용되던 라틴어가 아니라 플란다즈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다른 가톨릭 사제나 지도급 인사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어린 소녀의 비참한 죽음과 이 소녀의 죽음이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현실, 비참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노동자 가정의 모습에 분노한 그는, 신문에 실태 폭로 기사를 쓴다든지 미사 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을 강론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모순에 저항한다. 하지만, 기대를 걸었던 의회 조사단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자 직접 정당을 만들어 입후보 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코 ‘온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노동자들을 조직한 적도 없고, 구체적인 행위에 가담한 적도 없다. 그가 한 일이라곤 오직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이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권리들이 당연한 것임을 일깨워 준 것이 전부다. 그는 스스로 투쟁하는 노동자의 역량을 믿었고, 그랬기에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뿐이었다. 이러한 요인은 영화의 다른 큰 축인 노동자들을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나름의 능동성을 갖춘, 적극적인 주체로 표현하는데 기여한다.노동자는 ‘능동적 행위주체’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이들에게서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처절한 사투다. 열악한 노동환경, 생존을 위협하는 저임금, 18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 등으로 그들의 삶은 고난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삶의 에너지야말로 투쟁의 원동력이다. 일단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목표가 되자, 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억울한 아이의 죽음에 항거하기 위해서, 또 보통선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파업도 불가한다. 당장 먹을 것이 떨어지더라도 이들은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고픈 배를 움켜쥔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약자이지만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 의지를 가진 ‘주체’로 재현된다.그런데 모든 노동자가 이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관리자나 경비대는 자본가의 손발이 되어 같은 노동자들을 핍박한다. 중간관리자인 슈미터의 경우 일상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을 학대하며, 억울한 아이의 죽음을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가 하면, 네티를 강간하는 등 악랄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자신의 조그마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단순한 ‘하수인’을 넘어서 ‘과잉충성’의 태도까지 보이고 있다. 경비대 역시 자본가의 이해를 위협하는 이들에게 테러를 가하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은 궁핍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지켜나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자신의 가족, 친구, 이웃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자신의 계급의식을 버리고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배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또 다른 모순이다.“길은 달라도 걸음은 함께”종교?이념 초월한 연대노동자 외에도, 단스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양심있는’ 부르주아 엘리트인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에서 보기엔 “지옥에 떨어질 것이 틀림없는” 사회주의자. 이들은 단스의 가톨릭 사회주의와 다른 이념적 좌표를 각기 가지고 있지만, 노동자의 권익 향상이라는 동일한 목표 앞에서 기꺼이 단스와 연대한다. 이러한 연대를 보다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얀과 네테의 결혼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념의 차이라든가 경비대인 동생, 중간관리자인 슈미트 등의 물리적 핍박에 의해 방해받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한 장소이자 마지막 장면으로 등장한 곳이, 배가 고파 호랑이 우리에 있는 고기를 훔치려다가 죽은 소년의 무덤이라는 점이다. 착취당하는, “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이 종교, 이념 모든 것을 초월해 연대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인문/어학| 2006.01.02| 4페이지| 1,000원| 조회(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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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영화]<블러디 선데이> 영화평
    ∥영화평∥공포와 폭력, 약자의 기억으로 바라본“어떠한 시위?집회도 불허하겠다”는 영국정부의 고압적인 기자회견, 평범해 보이는 두 연인이 나누는 다정한 키스. 대조적인 두 장면이 교차하며 영화는 시작되고,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블러디 선데이’, 비극적인 일요일이 어떻게 저 다정한 두 연인의 일상을 망쳐놓을 것인가. 이미 제목에서 예고된 결말을 기다리는 심정은 가시밭길만 같다. 주인공들의 일상이 현실감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이 깨어졌을 때의 충격은 크다. 그런 점에서,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장면 장면을 포착하고 엔딩을 제외하곤 배경음악을 단 1초도 사용하지 않은 기법은 관객들의 심장을 쥐락펴락하기 충분했다. 관객들에게 허구적인 재현을 (순간적이나마) 마치 사실인양 믿게 하고, 그리하여 더욱더 큰 공포와 긴장, 슬픔으로 몰아넣은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영화가 다루는 것은 1972년 1월 31일 일요일, 북아일랜드의 데리라는 소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다. 이 날 데리시에는 전쟁터에나 출몰할 법한 공수부대가 나타나 평화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단 한 시간 만에 13명이 죽고 14명이 다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은폐로 이 사건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있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80년 광주인 셈이다. 그러나 진실을 기억하는 이들과 이를 파헤치려는 이들이 있는 이상, 어떤 역사적 음모도 세월이 지나면 드러나기 마련. 이 사건 역시 그러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작이라는 기치 아래 탄생한 이 영화는 바로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고야 마는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준다. 다만, 이 때 구성되는 ‘진실’이 어떤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누구의 시선에 의해, 누구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되었는지 여부에 따라 진실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약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블러디 선데이영화의 시선은 언뜻 ‘공정’해보인다. (이 때 공정하다는 말의 의미를 양적인 것으로 단순화한다면 말이다.) 순진한 17세 소년 제리, 하원의원이자 시민권협의회 대표인 아이반 쿠퍼로 대표되는 시민 측뿐 아니라 젊은 공수부대 병사 로마스, 영국군 책임자 맥클레란 여단장 등 영국군 측의 시선 또한 골고루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시민 측과, 군인들 중에서도 비교적 상식적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편이던 로마스의 시선이다.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시민들이 선량하고 소박한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군인들이 상대적으로 거칠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거나 무자비한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똑같은 비중으로 다뤄진다하더라도 중요도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요컨대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은 약자의 입장에 있는 시민들이다.평범한 청년들, 테러리스트가 되다…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폭력그렇다면 개개의 인물은 무엇을 표상하는 걸까? 우선 제리를 살펴보자. 그는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붙잡혀서는 안 된다는 약간의 강박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국놈’들이 싫은데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에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집회에 참여하지만, “가볍게 걷기만 하는 것”이 그 날의 목표이며 집회가 끝나면 신교도인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그는 무척이나 소박한 인물이다. 그러나 제리는 공격명령을 받은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에 무기력하게 목숨을 잃고 말며 죽은 후에는 폭탄테러범으로 조작된다. 그의 비극은 그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데 있다. 집회 전날에도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전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죄목이라는 게 집회에 나가 “돌만 조금 던진 것일 뿐”이며, 진로에 대한 나름의 고민도 있는 ‘평범한’ 젊은이가 과격한 테러분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해당했다는 점이 바로 비극인 것이다. 이러한 제리의 캐릭터는 그 외에도 무수한 죽음들-특히 노인과 어린 아이의 죽음-과 결합되어, 무수한 데리시의 청년들을 불법 무장단체인 IRA에 가입하도록 이끈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를 잡게 만든 것 또한 폭력이라는 것, 즉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덧붙여, 제리의 여자친구는 종파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처음에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은 종파 간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제리가 올 수 없게 되고 여자친구가 발길을 돌림으로써 신교도-구교도 간의 화해는 더욱 요원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 역시 영국군의 무자비한 폭력의 결과다.또 다른 시민 측 인물인 아이반 쿠퍼는 제도권 내의 변혁을 꿈꾸는 인물로, 간디나 마틴 킹 루터의 비폭력 투쟁원칙을 고수하고자 하여, IRA나 과격한 시민운동가와는 마찰을 빚기도 한다. 하지만 블러디 선데이를 겪은 후 “더 이상 IRA에 가입하겠다는 청년들을 훈계할 자신이 없다”며 좌절하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민들과 친밀한 관계라든가 신교도이면서도 구교도의 시민권 쟁취를 위해 힘쓰는 정의로운 모습을 띤다는 점에서, 다소 냉정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IRA 조직원이나 과격한 시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그가 ‘패배’하고 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평화 투쟁의 원칙을 완고하게 지켜내던 인물마저 좌절시킨 것 또한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일관되게 폭력이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한편, 공수부대원 로마스는 등장인물 중 가장 큰 성격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동료들 중에는 유일하게 이성을 잃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본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물고 동료들의 거짓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블러디 선데이를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그가 보인 태도가 제리의 시체에 폭탄과 총을 넣는 기만적인 다른 군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어떻게 진실이 은폐되는지,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가해질 위해 내지는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이기적 동기가 그에게 진실을 외면하도록 했다. 비교적 상식이 남아있던 인물마저 몸을 사리게끔 하는 어떤 힘, 그것이 이 사건의 본질은 아니었는지. 이것은 로마스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을 움직인 무서운 힘이기도 했다.무엇이 그들을 움직였나…‘공포는 나의 힘’각기 다른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코드이자 이들을 움직였던 무서운 힘,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모든 인물들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리는 “다시 감옥에 가지 않을까?”라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누나, 여자친구 등 제리의 주변인물들도 모두 “제리가 잘못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이반 쿠퍼역시 “시민들이 다치지 않을까?”, “일이 잘못되어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따위의 공포를 느꼈다. 이들의 공포는 아마도, 그들이 줄곧 받아온 차별, 폭력 등에 근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시민권 쟁취’라는 대의명분 하에 시민들을 함께 행진하게 만든 동기이기도 했다.시민들 뿐 아니라 심지어 공수부대원들에게서마저 공포가 읽힌다. 이들이 저지른 무참한 학살의 동기도, IRA가 영국군에게 자행하는 테러를 보며 느낀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 역시 군중이 자기에게 가할지 모르는 위해에 대한 공포 등에서 비롯된 분노였을 수 있다. 물론 군인들에게 이런 공포를 심어준 것은 영국 당국이나 언론이 끊임없이 세뇌시켰을 이미지, ‘위험한 군중’, ‘무자비한 IRA’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끔찍한 살육과 학대의 기저에는 (세뇌된) 무의식적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역사적으로 수차례 확인했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야만’에 대한 공포가 원주민 대학살로 이어졌다든가 국가가 만들어낸 위협적인 북한의 이미지가 무시무시한 한국의 레드콤플렉스를 이끌어낸다든가 하는 사례들을 통해서 말이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법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분노로 바꾸어 표출하고, 그럼으로써 상대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면 공포가 해소된다. (혹은 된다고 믿어진다.) 요컨대 공포는 인간이 잔혹성을 이끌어내는 좋은 동기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끔 정치적 목적 하에 의도적으로 조장되기도 하는 것이다.맥락 사라진 역사의 현장…‘구체적’ 역사도 사라져영화는 ‘객관성’을 가장한 다큐멘터리 기법을 통해 이 같은 현장 속 공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어떤 차별과 폭력, 이미지-이 공포를 자아냈는가?”라는 질문은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근원’, 즉 역사적 맥락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설정 안에서 분쟁이 지닌 역사적 맥락까지 모두 담아내기는 무리였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바라볼 때 피할 수 없는 단순화의 오류는 역사를 다룬 영화의 경우 때에 따라 치명적일 수도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들에게 블러디 선데이는 어떤 사건으로 기억될 것인가?
    인문/어학| 2006.01.02| 5페이지| 1,000원| 조회(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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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영화]<메트로폴리스> 영화평
    ∥영화평∥‘정치적으로 올바른’ 미래를 원한다-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말한 영화,1926년에 제작된 는, 회화와 건축을 전공했다는 감독 프리츠 랑의 이력에 걸맞게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잘 만들어진 조형물을 보여주는 것 같다. 표현주의적 요소라고도 불리는 과장된 연기, 진한 화장,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구성된 세트와 조명 등이 미래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의 이름을 빌려, 감독은 슬쩍 자신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로마제국을 연상시키는 자본가들의 낙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하에 자신들의 도시를 이루고 사는 노동자들과 달리 자본가들은 ‘아들의 클럽’에서 유희를 즐기며 안락한 생활을 하는데, 정원의 구조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의 의상, 동성애적 코드 등은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던 로마의 귀족들을 떠올리게끔 한다. 이러한 설정은, 노자 갈등이 심화되던 시대상황을 노예제라는 좀더 극단적인 형태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 계급에게 가르침을 전달하고 성녀로 추앙받는 마리아는 마치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데 그런 그녀가 ‘중재자’로 지목하는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는 마치 구원의 상징인 예수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연상은 마리아와 프레더의 만남이 주로 납골당, 교회 등에서 이루어짐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마리아의 가르침, 즉 온건한 노자 화해가 노자 갈등의 ‘성스러운’ 대안이라는 감독의 주관이 반영된 설정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1920년대의 사회적 문제였던 노자 갈등과 (감독 나름의) 해법을 다루고 있다.나찌즘을 예언한 영화?이 영화를 좋아하는, 혹은 의미있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미래라는 설정을 빌리긴 했지만) 당대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데다 후에 등장할 나찌즘까지 ‘예언’-이것이 통찰의 의미라는 가정 하에-하고 있다며 그러한 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전자의 문제는 일단 차치해 두고 후자의 문제부터 보자면, 나는 이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평가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선동에 의한 군중의 광기 어린 모습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정말이지 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선동이 군중들의 변덕과 광기를 얼마나 폭발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괜히 히틀러가 이 영화를 좋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타고난 선동가인 히틀러에게, 냄비 근성의 군중들은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나찌즘의 징후를 예언한 격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이 군중심리를 묘사한 것은 나찌즘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노선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다. 중재자를 통한 온건한 노선을 지지하는 그로선, 노동자들의 폭력적 봉기는 어리석은 군중심리, 그 이상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으리라.폭력적 봉기 혐오한 프리츠 랑프리츠 랑이 영화를 만들던 1920년대 초반, 독일의 정세를 이해한다면, 이것이 그다지 비약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독일에서는 노동운동 내 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이 주창한 수정주의가 득세하면서 사민당은 급격히 우경화되기 시작했고, 당내 좌파들은 떨어져 나와 독일 공산당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독일 공산당은 너무 빨리 봉기를 일으키는 등 좀 ‘오바’했고, 때문에 그다지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기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반면 우경화된 사민당은 제 1당으로 부상하는 등 크게 성장했다. 집권당이 된 사민당의 주요 노선은, 우파적 색채가 강한 ‘노사협조주의’였다. 이것은 가 던지는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노선이다. 뒤에, 이 같은 사민당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히틀러의 집권에 일조했다고도 하지만 우리의 프리츠 랑 감독은 그것까지는 미리 예측못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거기까진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히틀러에게 그토록 감명을 주었던 이 감독이 하필이면 유태인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중요한 건 프리츠 랑이 당시의 주류적 관점- ‘노사협조주의’-을 적극적으로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노동자, 자본가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일지 언대 서로 화해하고 협조하면 노자 갈등은 원활히 해결될 거라는 지극히 ‘순진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 급진적 좌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유혈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은 그에게 상당히 혐오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노동자의 봉기를 ‘폭동’으로 묘사하고, 노동자 집단을 ‘위험한’ 군중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철 지난 러다이트 운동의 부활,“왜 그들은 기계를 파괴하려 했나?”자, 이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왜 이 영화에 묘사된 노동자의 봉기는 하필이면 기계 파괴의 형태로 나타났을까? 1920년대쯤 되면 노조, 노동자 정당운동 모두 한창 활발할 때고 심지어 분파까지 일어날 정도로 문제의식의 수준도 꽤나 높아졌을 때라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몇 십 년이나 지난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시키는, 이런 묘사를 사용했냐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술 문명에 대한 감독의 양가감정과 노사 협조의 당위성에 대한 강조이다. 기계의 속도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어야 하는 종속적인 노동자, 기계를 통제하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자본가 프레더슨의 모습은, 분명 고도로 발달한 기술문명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게 될 위험에 대한 감독의 우려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심장기계가 파괴됨으로써 노동자의 도시와 자본가의 도시가 모두 위기에 처한다는 설정은, 기술문명이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양가적 믿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는 화해해야만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계가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자본가도 (노동자가 생산하는 수단인) 기계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 이미 언급한 적 있듯, 대중에 의한 폭력적 노동운동에 대한 ‘혐오’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봉기가 꽤 빈번하고도 격렬하게 일어났던 탓일까, 감독은 노동자들을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기계를 파괴하는 이들로,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애꿎은 기계를 적으로 돌리는, 좁고 피상적인 문제의식은, 이미 러다이트 운동 당시 맹렬히 비판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를 연상시키는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이뤄지는 노동운동의 수준을 폄하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거,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다.약자의 관점이 ‘사회적 의미’ 있어이쯤 되면 앞서 문제 삼았던 기존 비평 중 전자를 논할 수 있을 듯하다. 단순히 사회문제를 다뤘다는 점만으로, 그것을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문제는 ‘다뤘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다뤘냐는 것이다. 의 문제의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노자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단절이므로 이것을 해소해줄 수 있는 ‘중재자’가 있다면 충분히 ‘화해’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화해는 필수적이기 까지 하다. 기술문명은 생존의 일부, 즉 이미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이것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노동자, 자본가는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체제적 현실 인식은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균형한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많은 경우 친자본적일 수밖에 없는 중재자를 통해 (영화에서도 프레더는 자본가의 아들로 그려지지 않던가.) 이루어지는 ‘화해’가 과연 평등한 것일 수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의미라는 것은, 미처 관객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약자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질적 공정성을 담지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 아무리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여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 영화가 너무도 불공정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영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6.01.02| 4페이지| 1,000원| 조회(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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