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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정형화와 그에 따른 영향
    Ⅰ. 서론■ 움직이는 정형성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안경을 끼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경 너머에 있는 현실을 세상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안경의 색깔과 도수에 따라서 같은 현실일지라도 각각의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다른 굴절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과 도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말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관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미 세계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렇게 세계관의 안경을 통과하여 우리들에게 인식되어진 세상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다. 세계관의 안경을 투과한 세상은 이전까지 직, 간접적으로 경험되어진 인식의 결과물들의 준거의 틀에 저울질 되어지며 평가되어지고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좋은 혹은 나쁜 이미지로 인식되어지든지 혹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의 틀에 평가되어진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략적 인식의 모식도(?)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라 생각되어진다.복잡하고 다양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속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그 생각으로 말미암은 행동과 패턴의 틀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복잡하고 다양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사뭇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상업화와 도시화 현상을 뒷 배경으로한 인간의 획일화 현상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대량 생산된 옷을 입으며, 같은 식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생활의 패턴으로 하루를 움직이며 살고 있으며 심지어는 거의 비슷한 세계관들이 사람들의 인식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의 사고가 점점 획일화 되어가고 있으며 통일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성을 중요시하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한번반 더 생각을 해 보면 우리는 고유의 개성 보다는 무엇인가 정형적이며 획일적인 문화에 길들여져 있음을 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구분이다. 영화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이야기가 없는,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만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차츰 영화가 발전해 나가면서 영화에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구조)가 더해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영화에서 단순히 움직이는 그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처럼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관객을 끌 수있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대중의 욕구에 맞는 이야기의 생산에 골몰하게 되었다. 영화가 대량생산/대량소비되고 영화에 있어서의 내러티브가 발전하면서 일정한 줄거리, 시대배경, 등장인물, 스타일을 가진 영화가 관객을 많이 끌고, 이것이 이익을 보장한다는 확신이 들면 영화 제작자들은 이와 비슷비슷한 영화를 반복해서 만들어내게 되었고, 관객들 또한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와 흡사한 영화를 보면서 안전하게 영화를 소비할 수 있었다(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비슷한 영화들이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반복해서 생산되면서 이 영화들을 통칭하는 말이 여러과정에 의해-광고카피, 제작자의 편의, 신문 기자들의 말장난 등- 생겨나면서, 그리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장르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쉽게 말해 대중매체에서 영화를 광고하고 그 영화를 조금 더 많이 보게하려는 목적으로 영화의 장르를 편의상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편의 흥행한 영화가 있으면 그 영화를 예를 들어 액션장르라고 지칭하고 또 팔아먹어야할 영화가 만들어지면 이 영화도 지난 번 흥행한 영화와 같은 액션장르다라고 소개함으로써 영화를 쉽게 소개하고 지난 번 영화에 따라오는 기대효과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과 편리에 의해 수많은 과정을 통해 장르가 형성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장르의 생성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초기의 영화 연구자들은 장르의 관습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의 작품을 매우 천박하게 여겼는 ‘상호 작용성’이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알아보기로 하자.(1) 의사사회적 현상이 주장은 홀튼과 월(Horton and Wohl, 1956)에 의해서 제기된 이론으로써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객이 영상을 통해서 하나의 인간적 상호 관계를 갖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영상 사이의 상호작용은 마치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대화처럼 사회적이며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영상을 통해서 어떻게 대화하는지는 물론 다양한 사회양식 및 규범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골드센(Goldsen, 1977)은 텔레비전 시청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젼의 등장인물을 일상의 친구나 가족의 한 부분처럼 여길 수 있다. 즉 시청자들은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나 일관 된 언사, 언제나 영상을 보면 만나 볼수 있는 근접성 등의 요소는 텔레비전의 등장 인물들을 시청자의 친구나 가족과 같은 관계로 맺도록 하는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화의 경우에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이러한 의사사회적 현상은 영화가 한 사회의 윤리 도덕적 기준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영화가 대중들은 윤리기준의 변혁을 가져 올 수 있고, 가치판단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주의해야 한다.(2) 동일화 갈망 이론동일화라는 용어는 관객들이 영상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관점에 같이 공유하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들이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대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동일화 현상은 등장인물들과 동일해지고자 하는 감정을 갖거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을 따라 하고자 하는 성향을 나타낸다. 이것을 ‘동일화 갈망’이라고 한다.(Feilitzen and Linne, 1975). 동일화 갈망은 등장인물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여자보다 남자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동일화 현상은 패션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It Happened one night'에서 『클락크 게이블』들의 요구에 맞는 시나리오와 제작을 감행해야하고, 영화에 올바른 가치관을 그리는것보다는 대중의 흥미를 끌수 있는 내용들을 찍어 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바꿔 말해서 거대 투자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동일한 상품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동일한 욕구를 요구한다. 보다 많은 상품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팔음으로써 보다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기업성이 영화산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계를 획일화 시키고 흥미위주로 정형화시키는 이유가 된다.4. 흥미위주의 정형화 : 윤리적 책임 있다.“자유민주사회가 가진 최대의 위험은 정치적 압제나 탄압이 아니라, 무한한 오락의 즐거움이다.”는 닐포스트만의 말을 기억한다. 분명 흥미위주의 정형화된 현 영화계는 지금 우리의 윤리도덕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보편화되고 정형화된 영화의 형성기반은 새로운 세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내지는 가치체계를 선정적이고 획일화된 방향으로 구축시킨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영화의 틀은 고정화, 고질화되어 참다운 영화의 형성을 가로막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한다. 영화의 오락적 측면이 수용자의 정서함양과 올바른 놀이문화를 위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선정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예전보다 더 강한 자극과 흥분은 오락의 법칙이 되었다. 왜냐하면 문화상품은 반복해서 사용되지 않는데다가 이미 그 내용과 형식이 표준화, 정형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정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5. 흥미 위주의 영화 정형화 : 상호작용의 실례이처럼 영화는 점차적으로 산업화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그 파급효과를 전세계에 뿌려나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들을 바꾸어 놓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영화와 관객,사회에서 나타나는 상호적인 작용에 의해 낯설었던 세계관이 어느사이에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그로 인한 악순환 본다면 갈수록 깡패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엔 단지 깡패라는 아이콘을 사용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깡패를 아름답고 멋있는 존재로 미화시키며 포장해 가는 우리 영화를 볼 수가 있다. 급기야 평범하던 고등학생이 깡패가 되어가는 과정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려 한 때 우리나라 학생들의 되고싶은 인물 1위가 ‘깡패’ 혹은 ‘조폭’이 되는 엄청난 결과까지 낳게 한 영화 ‘친구’에 이르러선 더 이상 깡패 영화가 단순한 영화적 소재가 아니라 깡패에 대한 사회적인 이미지와 인식을 바꾸어 놓는 역할들을 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두사부일체’에서는 이 깡패가 학교를 지키며 학생들에게 얻어맞는 선생님을 구하는 ‘멋진 놈’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실 세계 속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영화라는 ‘허구’를 빌려 이야기를 창조해 내고 그 영화의 영향으로 인해 있지도 않은 현실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엄청난 일들을 영화가 해 내고 있다. 실제 깡패들의 세계 속에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의리나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만이 엄청나게 부각되어 깡패에 대한 나쁜 다른 모습들은 철저하게 감추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관객들에게는 현실과 허구를 착각하게 되는 결과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액션 영화 하면 깡패영화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이러한 영화산업의 실태는 관객들에게 가장 호응이 좋으며 어렵지 않은 흥행을 약속받는 최고의 소재로 깡패가 이미 자리매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산된 깡패영화를 관객들은 또 보게 되며 더 나은,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이러한 상호적인 작용에 의해 영화에 대한 획일화와 정형화가 더욱 더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한 영향은 이미 사회적으로도 검증된 바 많은 탈선과 범죄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 한편이 사람의 행동을 바꾸거나 하진 않는다. 하나의 범죄나 탈선을 보면 그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인문/어학| 2009.08.29| 12페이지| 1,500원| 조회(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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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새들백 교회 이야기 평가A+최고예요
    제1부 - 3부1. 요약 및 논평제 1 부. 서론저자는 서론에서 새들백교회의 설립과정과 모든 교회가 원하는 부흥에 대한 새들백교회의 원리와 방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닉워렌 목사는 새들백교회를 세우면서 자신의 준비되는 과정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미국에 초점을 맞추었고, 새들백지역으로 인도하셨다고 했다.저자는 교회를 세우기 전에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교회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의 대형교회인 새들백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있었던 어려움들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성장하는 교회는 5가지 측면이 있는데, 교제, 제자훈련, 예배, 사역 그리고 전도가 그것이다.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8가지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대형교회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극복할 때 교회성장을 이루는 첫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될 것이다.첫 번째는 대형교회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출석인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석인원에 집중하는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교회가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성장은 교회의 건강의 결과이다. 메시지가 성경적이고, 사역이 균형잡힐때 교회는 건강해지고, 그에 따라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두 번째 모든 대형교회의 성장은 소형교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정말 이렇게 성장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지 수족관의 고기를 옮기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세 번째는 우리는 양과 질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신화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교회의 양과 질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다. 질이 높아지면 양은 자연적으로 같이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는 결신자를 전도하는 일도 집중해야 하고, 그들을 질적으로 잘 키우는 일에도 집중해야 해야 하는데, 예배, 사역, 전도, 교제, 제자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다섯가지는 어느 하나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강조되어져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세우고, 훈련하고 그들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한다. 사람들을 끌어들여 교인으로 ‘소속’시키고, 그들을 세워 ‘성숙’에 이르게 하고, ‘사역’을 위한 훈련을 하고 ‘선교’를 위해 내보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이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일이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는 모든일에 방향, 활력, 범위, 추진력을 가져다준다.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그 목적을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정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느헤미야 원리’는 느헤미야가 52일간 완성한 성벽의 공사에서 중간쯤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비젼을 새롭게 일께워준 원리로 26일마나 한번씩 의미를 되새겨 주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전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비전과 목적을 전달하는 방법은 성경, 상징, 구호, 이야기들, 구체적인 행동지침등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개인화 하는 것이다. 믿는자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책임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성도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 성품의 본보기가 되고, 은혜의 사역자가 되고, 사랑의 사신이 되며, 그 이름을 찬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개인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이것이 책임이면서 동시에 특권이라는 것도 인지해야 한다.느혜미야의 원리를 기억하며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가능한 지속해서 전달해야 한다.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 위한 세 번째 단계는 교회를 목적에 따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목회자의 지향점에 따라 전도를 강조하는 영혼구원형 교회, 임재와 능력을 강조하는 체험형교회, 교제가 중심이되는 가족 재회형 교회, 제자는 그 일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어떻게든 해 보려했던 지금까지의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단지 파도타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움에 허덕일 수 있는 일인데 더군다나 파도타는 것까지 걱정을 한다면 무엇하겠는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나는 남들보다 지금의 수준에서는 더 많은 경험들을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에 그다지 민감하지 못한 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경험하기에는 시간도 적을뿐더러 그럴 가능성과 기회도 굉장히 적다. 많은 것들을 혼자 경험하려 하지 말고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다른 이의 경험이란 것이 꼭 말로써만 전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책으로, 그의 삶으로, 그에 대한 평가 등 많은 종류의 방법으로 전달되어질 수 있을 것인데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나의 경험에만 의지하고 의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야구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중도하차는 의미가 없다. 단지 배우지 않은 것보다 낫고, 전혀 변하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식의 말을 하자면 할 수 없지만, 실제적인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는 진보는 없는 것과 같다라는 생각이다. 천천히, 오래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결국엔 홈베이스를 밟아야만 점수가 인정된다. 꼭 점수를 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야구를 좋아했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야구에서 점수를 내려면 한 사람만이 잘해서는 점수를 낼 수 없다. 타자가 있어야 하고 주자가 있어야 하고 그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규칙에 맞추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 냈을 때 비로서 점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던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자리에 맞고 역할에 맞는 일을 해 낼 때 나에게도 홈베이스를 밟을 수는 글의 내용들 속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글 자체에서도 저자는 살만 발라내어 받아들이고 뼈는 버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면에 있어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고 느껴진다. 또 이런 생각이 단지 억측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들과 많은 사람들이 새들백교회를 본받으려 하고 무조건 따라하기가 한참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물론 비단 새들백교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교회의 성장으로 인해 좋은 모델을 제시함에 있어서 그 모델화가 성경화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책 안에서도 주지해 주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통해 ‘이렇게 해야 하는거겠지’하는 마음으로 맹목적인 따름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저자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일테고, 그런 문제는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책임일 것이다.제4부 - 5부1. 요약 및 논평제 4 부. 군중을 끌어들이기예수님의 사역은 군중을 모으는 사역이었는데,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군중을 끌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사역은 군중을 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군중을 끄는 예수님의 방법은 먼저, 불신자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죄인의 친구로 불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닮아야 할 것이다. 많은 교회가 사랑보다 성경이나, 신학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전도된 성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런 것 보다 사랑해 준다는 것이 교회를 출석하게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교회가 성장하고,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인의 이름을 외우는 노력,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다가가려는 노력, 진정으로 사람을 만져주고, 사랑해 줄수 있는 노력,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목사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해야한다.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를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 분위기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음향 이나 좌석과 같은 문제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구도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기대감을 갖을 수 있도록 하고, 예배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축제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사막에 있는 하나의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처럼 사방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물을 제공하는 일을 교회는 감당해야 할 것이다.이밖에도 교회는 구도자들이 처음 교회에 와서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실족치 않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평가와 구도자 예배의 목적에 대한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음악을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전도대상자에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교회는 어떤 형시에 억매여서 찬송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탬포와 가사를 바꾸면서까지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음악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말씀이 주는 것과는 또다른 위력이 있음을 알고, 비교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음악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전도를 위한 예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일 것이다. 교회를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자를 위한 예배에서는 강해설교가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이때는 강해가 아니라 비교인들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가지고 그 내용을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보여줌으로 그들의 주의를 사로잡고, 편견을 버리게 하며, 성경에 대해 없었던 관심을 끌어내는 설교가 필요하다. 즉, 실제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사람들의 실제적 필요를 적용을 통해 하나로 묶는 설교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회는 성경을 선택하는 것, 성경을 비치하는 것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또, 목사는 설교제목 선정이나 시리즈 설교등 자신의 설교스타일을 구도자에 맞추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제5부. 교회를 세우기예있다.
    독후감/창작| 2005.11.28| 15페이지| 1,000원| 조회(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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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문화신학[폴틸리히와 개혁주의 입장]
    과 목 명 : 현대신학세미나지도교수 : 문석호교수님학 과 : 신학과학 번 : 981030이 름 : 민경우틸리히의 문화신학과현재의 문화신학목 차221. 서론2. 폴틸리히의 문화신학(1) 틸리히의 출생과 일생(2) 배경4(3) 존재의 신학3. 틸리히의 문화와 종교(1) 종교6(2) 문화4. 니버의 문화이론(1)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2) 문화의 그리스도(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4) 문화와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9(5)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5. 개혁주의적 문화신학(1) 하나님의 창조와 문화명령(2) 타락으로 인한 변질11(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문화회복6. 교회의 문화신학의 폐단(1) 교회들의 불법 소프트웨어 사용실태(2) 이러한 실태의 원인13(3) 교회 내 불법소프트웨어 사용보고7. 결론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문화계에 있어 가장 큰 이슈로 떠올려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거짓말을 고발한다는 ‘다빈치 코드’일 것이다. 출판년도에 미국에서만 700만부 이상이 판매되며 전세계적으로 몇 천만부 이상의 판매부를 올린 초특급 베스트셀러이다. 해리포터 시리즈 출간 이후 판매량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넘어선 첫 번째 책도 물론 다빈치 코드이다. ‘기독교의 거짓말’이라는 민감한 소재와 주제 때문에 국내에서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구분 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었다. 출간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의 Top10 안에 아직까지 그 이름이 건재하다. 또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힘입어 엄청난 양의 디지털문화가 생겨났지만 그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올바른 문화적 사명을 가지고 그러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입으로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선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 들어가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우리내의 실태를 보면 현재 문화신학에 큰 병폐가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신앙과 종교, 기술과 문화로 대립되어지던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시각들과 방향들 속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생각되었으나 양대 세계대전이 보여준 것은 극도의 비이성적 상황이었다. 이 시대를 카뮤나 싸르트르와 같은 작가들은 신의 침묵과 광기의 시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시대를 향해, 특히 비판적 지성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Tillich은 새로운 변증적 사명에서 기독교 사상을 모색해야할 사명을 느꼈다.② 신학적 상황 : 기독교의 초자연성과 역사성에 대한 회의에 근거하여 도덕과 정신운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바꾸어 놓은 자유주의의 시대가 앞서있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하르낙의 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교회 공동체가 만든 경건한 사고의 산물로 보았다.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은 칸트처럼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모두 거부하고 감정적 절대의존과 의지적 도덕종교요 인간의 경험으로써의 종교를 말한다. 알버트는 역사적 예수를 찾기 포기하고 역사적인 기독교 아닌 삶으로써의 기독교를 중시한다.이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 신앙과 성경적 신앙을 보수하는 운동이 프린스톤신학교를 보루로 하여 1927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분립 이전까지 워필드나 메이첸 등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그러나 자유주의는 이성주의의 몰락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다. 이미 1919년에 바르트는 30대의 신학자로서 로마서 주석을 내어 (Welt ist Welt, aber Gott ist Gott)로 대변되는 초월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틸리히 역시 이 시대를 신학적 위기의 시대로 인식한다. 전통적인 성경적 계시의 신학이나 logos 신학 (즉 철학적-이성적 신학), 그리고 자연신론(Deism)과 윤리적 신학 모두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기독교는 어떤 사상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존재(Being)의 신학을 말했다.(3) 존재의 신학존재의 신학은 위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틸리히의 새로운 신학의 필요에 부응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입각한 삶의 자세, 존재를 향한 같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파생되어지는 생각인데, 생명은 모든 곳에서 자신을 창조하며 자신을 초월한다. 정신으로서의 생명에 있어서 자기 창조는 문화라고 일컬어지고, 자기 초월은 종교라고 일컬어진다.종교에는 2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넓은 의미의 종교란 어떤 궁극의 것에 관하여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되풀이한다면 종교는 어떤 궁극적인 것에 관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또 종교는 어떤 것을 무조건으로 중대하다고 하여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거나 그에게는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는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에 의하여 움직여지게 된다. 그는 그것을 향해 나아갈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가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에 관계 없이 그는 그것을 그의 신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종교를 이야기 할 때 무신론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한 의심, 신에 대한 의심까지도 무조건적으로 진지한 일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종교적이지도 않으며 무신론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왜냐면 그의 진지함의 절대성 그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부정하고 있는 신적인 것에 대한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좁은 의미의 종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며 알고 있는 종교이다. 통상적인 개념은 사제, 승려, 사원, 예배 행위, 신화, 교의, 제전 등을 동반한 역사적인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 통상적인 의미의 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또한 이 문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의 이름으로 문화의 전체에 대하여 항의할 권리는 아무도 가지지 않는다고 보통 말들을 한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종교가 만일 문화의 일부 이상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주장하는 경우에 종교와 문화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문화와 종교 사이의 모든 충돌과 모순은 문화와 좁은 의미의 종교, 통상적입장은 초기 기독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초대 기독교가 정착될 상황이 기독교에 극히 적대적이었으며 초대교회 역시 소종파에 머물러 있어 교리 외의 문제에 대해 폭넓은 생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첫 번째 유형이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이다. 이는 자신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인 권위만을 인정하고 문화에 대한 충성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면 세상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가치에 관련된 문화인 반면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에서는 국가와 교회와 재산제도, 경제제도가 모두 악의 소굴이라고 보게 하였으며 또 철학, 과학, 예술 등도 다 정죄의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이 유형이 비록 기독교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와 그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할지라도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이 유형을 나타내는 극단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이 표면적으로 배척하고 있는 문화, 또는 문화의 어느 부분을 언제나 자신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부하여도 세상 속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문화를 전혀 이용하지 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 문화의 그리스도이 유형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정반대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갈등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 유형 속에 속하는 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문화를 해석한다. 즉 문화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가장 잘 일치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문화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동,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등에서 문명 안에 있는 최선의 것과 일치된다고 보이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조화시킨다. 일종의 종합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함께 수용하고 조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3) 문화 위에 있는 혁자이다.이 변혁주의적 문화신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변혁주의적 문화신학은 적극적인 창조론을 주장한다. 변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하나님의 구속활동 속에 전적으로 흡수시켜 버리지 않고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이원론자들이나 바르트 학파 또한 하나님의 창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더 크게 치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로서 창조와 구속, 성육신과 속죄를 한 주제로 이해하듯 성육신을 창조의 세계 속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한 행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인간들의 문화적인 활동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변혁주의적 문화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존재론적 신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이성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죄의 부패성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죄의 치명적인 영향은 개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구조 속에 침투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변혁신학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의 변질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다. 즉 악이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할 때, 의지적인 결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인간 문화도 전도된 의지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패하게 된 질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에 대한 변혁의 적극적인 동기가 나타나게 된다. 셋째, 인간의 부패성은 변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실현되지만, 그리스도 재림과 더불어 온전히 실현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그 정도로 분리할 수 있듯이 변혁시켜 나갈 수 있는 문화의 변화성을 분명 인정하는 것이다. 이 논리 속에서 우리는 문화는 변혁해 나가야 할 우리의 과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다.이상의 문화이론들 중에서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은 개혁주의적인 신학사상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와 문화를 동었다.
    인문/어학| 2005.11.28| 15페이지| 1,500원| 조회(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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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소피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소피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접급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에 앞서서 그 둘 사이의 어려운 문제들을 먼저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너무나도 먼 시대적 차이 때문에 그 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공통점들과 차이점들까지도 현재 우리들의 판단과 배경만으로는 정확하게 그 차이나 공통점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규정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상인 것에 빗대어 이 둘을 비교분석한다는 것은 더 규정하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를 규정하지 않고 하나의 사상으로 정의하지 않는 것을 그 본연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하고 있으니 산발적이며, 자기 분산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른 무엇과 비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 아닐 것으로 보여진다. 이 2가지의 어려움을 전제로 하고 이제부터 소피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교분석을 시작하고자 한다.소피스트먼저 소피스트에 대해서 살펴보자. 소피스트라 하면 흔히, 궤변론자 라고 이야기 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비방 당했던 존재들이라고 쉽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스가 중심이던 자연철학이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옮겨지면서 아테네의 정치체제이던 민주주의에 부응하여 변증술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지금의 민주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그 당시의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특정 소수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그 특정소수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고 변론을 해서 국가로의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에 이 당시 젊은이들의 관심은 온통 변론술과 출세에 필요한 종합적인 지식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타고 나타난 것이 바로 소피스트들이다. 이들은 입신출세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변론술과 출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치면서 적지않은 돈을 받는 사람들로서 그 근원적인 목적은 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철학자들이 만물의 아르케가 뭐냐? 는다. 이렇듯 가르침과 삶의 본질이 다른 이들을 우리들은 궤변론자들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소피스트들을 향해서 "부유하고 뛰어난 젊은 사람들을 돈을 받고 낚는 사냥꾼"이라고 말했으며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피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비방하였다. 이러한 많은 비방들과 비평들 속에서도 철학사에 있어 그들의 존재는 무시하지 못할 새로운 존재들인데, 그것은 바로 철학적 관심과 탐구의 대상을 더 이상 자연이나 우주에로 제한시키지 않고 인간으로 바꾸고, 초월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옮겨놓은 것이다.소피스트들은 우주와 자연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그러한 것들에 대한 탐구보다 인간자체에 대한 탐구로 정의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을 알려져 있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이 척도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개인적 인간 한명, 한명이 모두다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평가의 기준은 없고 개인이 모든 사물과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었다. 즉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경험과 유용성에 의해서 사물과 현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실판단은 각자 개인들에 의한 것들이 되어지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도덕 기준들은 없어지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보다 더 나아가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존재론적 무정부주의)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인식론적 불가지론) 알 수 있다 해도 남에게 전할 수 없다(상대주의) 를 이야기 하였다. 이는 후에 플라톤에 의해서 부정되어지는데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적인 생각을 존재론적 측면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라는 것은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느 단체 안에서 정의란 것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호나 결정을 강요하는 가장 강한 자의 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일원적이거나 절대적인 권위와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포스트모더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시작되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대두된 현상이다. 20세기 전반부를 풍미한 사조나 시대정신이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20세기 후반부를 풍미하는 사조나 시대정신은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은 최초로 문학과 관련하여 이합 핫산에 의해 1971년 처음 사용되었고 그것은 곧 사회, 화학, 심리학, 철학에서도 쓰여졌다. 시각 예술에서는 찰스 젱크스가 1970년대의 건축 상황을 특징짓는 말로 처음 기용되었던 것이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 픽업되어 미술에도 적용, 올해로 1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어휘가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술가, 비평가들 사이에서 모더니즘, 또 모더니즘의 대명사라 볼 수 있는 아방가르디즘이 쟁점의 표적이 되었고 문제시된 모더니즘을 대체하기 위한 문화적, 지적 작업이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파생된 개념들이 수정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어휘들로 표명되었고 모더니즘이란 말도 재검증이 요구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초창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문학과 관련된 개념으로 이해되고 논의되어 왔다. 사실 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해 온 사람들은 주로 문학 이론가들이거나 비평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단 문학 한 영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모더니즘의 회의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결국 그 등장의 배경은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였던 것이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 명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읽을 수 있는 보편사가 아니며 단순히 문화의 한 사조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삶의 양식과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라는 사상사의 축약. 이러한 입장을 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후기현상이나 그것보다 한결 더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흔히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미국의 네오리얼리즘 이론가 제럴드 그래프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서구 세계를 풍미해 온 몇 몇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붕괴되고 교체되지 아니하며 계속 계승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모더니즘과 조금 더 과거론 낭만주의의 전통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두 운동의 기본 전제들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극한 점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종의 돌파구로 파악하는 일부 이론가들의 태도를 가리켜 그가 '신화'라고 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한편 다른 쪽의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는 별개로 의식적 단절이나 비판적 반작용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상에 따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지금까지의 다른 사상들과는 구별되어져서 그 자체로의 독특하고 새로운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뒤이어 나타난 전혀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내세우는 이론가들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탈모더니즘'이니'반모더니즘'적인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리 레빈(Harry Levin)은 이라는 글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우리가 여전히 모던의 상황에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휴머니즘이나 계몽주의의 자식들이 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비이성적인 것의 힘을 규명하고, 또 고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지식의 전유물이 되어왔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반지성적 풍토를 가져오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우리는 해리 레빈에게 있어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단순히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을 명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모던의 계급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계급의 대두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억압된 것의 복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억압이라 함은 쉽게 말해 강한 것에 의해 눌려져 왔던 약한 것들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다수 민족에 대한 소수민족의 억압과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억압의식,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압 등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 역시 개인을 중시하며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 확산된데다 따른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기본사상은 절대적인 응집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때이던지 가장 커다란 축이 있어서 그 축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생각들과 사상들이 발전해 나아가고 거기에 대한 변화로 새로운 기준이 되는 축이 발생한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통합이 없고 절대적인 확실성이 없다.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모습 자체를 자랑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극대화된 개인주의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이러한 특징은 결국 아무런 기준도, 절대적인 규칙도, 지켜야 할 통합성도 없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딱 잘라 말하기에 가장 어려운 이유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소피스트와 포스트모더니즘언뜻 보아도 둘 사이에는 상당히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정의하기가 어려운 포스트모더니즘과 무언가를 비교한다는 것이 조금은 무리일 수도 있으나 몇가지 현상들과 본질들에 있어서 비슷한 요소들을 정리해 본다.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는 2가지 방법 중에서 첫 번째라고 생각했을 때의 유사점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사상들을 계승하거나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인간중심적인 사상은 그 전까지 있었던 자연에 대한, 우주에 대한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전에 있었던 자연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실제 예로 파르메데네스의 일자에 대한 논의에 반박하여 고르기아스가 아
    인문/어학| 2003.04.28| 8페이지| 1,000원| 조회(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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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하나님과 문화 평가A좋아요
    수많은 권위를 가진 신학자들의 입을 빌어 하나님과 문화의 관점에 대해 여러 의견들을 수렴하면서도 편집진의 의도대로 옮겨간 책의 내용들을 볼 때에 다시 한번 느껴지는 것은 정말 완벽한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문화라는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인데도 이렇게나 사람들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그 중에 같은 목표와 초점을 가진 신학자들의 논문을 모아논 본 책에서조차 같지 않은 의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볼 때에 더욱 그렇다. 막연하게만 생각해 오던 문화에 대한 개념. 나부터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지 않았던 터라 이 책에서 나오는 수많은 의견들과 논리들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 때로는 이 사람에게, 때로는 저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내 머리 속에서 찬성표를 던지는 것을 보며 우선은 내가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책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요약하는 것은 포기하고 이 책을 읽으며 내 맘 속에 가장 큰 반향을 준 몇가지 문제와 의견들에 대해 내 의견과 소감을 담는 방식으로 앞으로의 서술을 이어갈 것이다.우선은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진 하나님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 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수없이 이야기 되어져 왔으며 매일 읽는 성경 속에서도 매일 만나는 너무나도 가깝고, 그렇기에 조금은 소홀해져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와 생활의 접합이 있지만 전능하시고 초월적인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수박의 겉을 보고 수박을 판단하려는 것처럼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란 것을 또한 고백한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 해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하게, 완벽하게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에 비해 문화 란 하나님에 비해 훨씬 가볍고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는 단어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단어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세상에 팽배해 있는 문화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며, 관심조차도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신앙에 대해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원적인 것을 수용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를 가졌다는 이야기로 다원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카슨의 이야기를 쭉 살펴보면서 가장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은 너무 학술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원주의라는 단어 하나에 있어서면 3가지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르는 한계에 대한 설명들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하나로 통일시키지 않고 따로 따로 떨어진 상태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보고 기둥이라고 이야기 하는 장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사회와 생활들이 다원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학문적으로 규정하고 정의되어진 사상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학술적인 사람들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와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단어와 현실에 대해서 카슨이 설명하는 것처럼 뼈에 와 닿게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모습이다. 다원주의의 한계에 대해 3번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영역에서 중립적 사람들이 대다수 인구에 비해 훨씬 좌경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비단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논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힐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나름대로의 자기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란 것은 좀 더 커다란 하나의 사상이나 흐름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단지 종교적인 이야기만 하더라도 예전부터 있어왔던 불교나, 힌두교, 기독교 등의 서로 다른 종교들만을 놓고도 다원주의라고 이야기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 본 논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원적으로 된 것은 아니다. 다양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의 그룹을 이루며 자기들만의 의견을 나누고 하는 사람들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만큼의 소수이 인원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하다. 이렇게 고쳐 말한다서 패커가 칼 헨리에게 양해를 구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의 논문에서 문제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패커는 우리 사회가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저축보다는 소비를 권장하고 자기 발전보다는 자기만족과 오락을 권장하여 쾌락주의로 빠져든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 문제로 인식하고 의견을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다원주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다원주의가 뉴에이지적인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보편적이며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멋들어진 사상이긴 하지만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느끼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지식층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한다. 물론 그 지식층에 의해서 계속적인 교육과 계몽이 있다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동화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지 않은가. 미래에 대한 걱정에 앞서 이야기한 것이라면 또한 내가 제기하는 반론이 허무맹랑해 보일수도 있겠으나 내가 문제시 삼는 것은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다원주의라고 이야기할만한 사상이나 움직임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다양화에 대해서는 다들 느끼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위나 규모에 있어서 작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대중매체란, 대중 전달의 도구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과 라디오, 시청각 기록들, 인쇄물들(서적, 신문, 잡지)을 통제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회로 정의하는 13번째 그리스도아 문화 : 그리스도인과 대중매체 에서 폴랜드의 주장에 대해서도 온전히 수긍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한쪽 부분으로만 생각들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분명 폴랜드의 주장처럼 현재 대중매체는 이때까지 없던 좋지 않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선정적이며 노출적인 영상들을 통하여서 순결함에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으며 잘못된 진리들에 대해서도 교회적인 정화나 편집없이, 아무 여과없이 전파되어서 구미에 맞기만 하면 그러한 잘못된 진리들이라도 받아들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진리들이 그들의 생활과 삶을 주관하게 된다는 것과, 영적으로도 그리스도와의 의사 전달을 할 지닌 존재이므로, 어떤 아름다운 것을 창출할 능력과, 그 안에서 즐거워할 능력을 다 소유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람이 분명 죄로 인해 악의 모습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하는 전적인 부패상태에 있으나 모든 요소요소가 완벽하게 부패한 것은 아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인간이 멸망하고 완전하게 악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본인의 형상의 잔재를 사람들에게 남겨 두셨는데, 그 중에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양심이다. 그 양심으로 인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되도록이면 좋은 일, 선한 일을 할려고 하며 그로인해 사회의 질서가 어느정도 유지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에겐 아직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남아 있기에 어떤 아름다운 것을 창출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능력을 사용하여 대중매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고 그 분이 영광받으실 수 있는 기반과 상황을 만들어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악의 세력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좌절하여 그대로 주저앉는 것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로부터 받은 명령을 기억하여 대중매체라는 새로운 자연과 환경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어 가며 그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아름다운 정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 상태에까지 이른다면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혁명적인 복음전도의 계기를 한번 더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최고의 제자들을 길러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였고, 만약 우리가 대중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다면 기독 역사상 최고의 전도사역이 이루어질 것이다. 대중매체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절감하고 있는 우리들이라면 그것이 선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의 굳히고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만이 성경적으로 가능하고 합당한 정치체제이며 공산주의를 비롯한 다른 체제는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그들 나름대로의 정처체제는 분명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지금의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산주의의 그것과 닮은 모습이었다. 또한 구약 시대 전기의 선진들은 대부분이 씨족 중심의 체제에서 살았다. 또한 숫자나 규모가 많이 커진 구약 시대 후기의 선진들은 왕권체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왕건체제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씨족 사회에서도 그러하였으며, 초대교회의 공산적인 삶 가운데서도 그러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선 그들의 정치적인 체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옳다 그르다하고 구분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떠한 모델이나 모습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닌 그냥 나무에 달리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여 잘잘못을 따져야 하겠으나 공산주의를 사용한다고 해서 성경을 가지고 그들에게 분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효율성이 없는 것이고, 그 본연의 의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의 연약함에 연유한 것일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로 믿을 수 있는 성경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성경에서조차 이야기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형태나 모델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정치에서나 경제에서나 9번째 모더니스트가 직면한 법의 위기 에서 필립존스가 이야기한 법에 대한 부분에서도 역시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신앙관과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바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일체의 비결을 깨달아 생각하고 21절
    인문/어학| 2002.12.15| 6페이지| 1,000원| 조회(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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