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로드웨이와 뮤지컬★목 차1. 뮤지컬이란 대체 무엇인가!2. 뮤지컬의 구성 요소들1) 가사에 관하여2) 극본에 관하여3)안무에 관하여4)연출에 관하여5)음악에 관하여3. 뮤지컬의 음악구조4. 뮤지컬의 특징5. 천의 얼굴을 가진 공연예술의 심장부, 뉴욕 브로드웨이6. 오프와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그리고 런던1)오프 브로드웨이는 '작은 브로드웨이'2)브로드웨이로 향하지 않는 오프 브로드웨이3)오프와 오프-오프의 형성, 극장 밖으로4)카페 치노, 카페 라 마마5)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 오프-오프 브로드웨이6)오비상7)침체기의 브로드웨이를 건진 런던 뮤지컬8)브로드웨이의 재도약7.참고문헌♠ 뮤지컬이란 대체 무엇인가! ♠뮤지컬은 미국의 대중연극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는 뮤지컬 코메디나 뮤지컬플레이의 약칭. 또는 음악적인 상연작품을 뜻하는 Musical production, Musical Theater(음악적인 무대연예)의 약어이다.이 용어가 언제부터인지 흥행계, 극장인, 저널리스트 등에 의해 쓰여 지면서 좁은 의미로는 오페레타에서 뮤지컬 플레이에 이르는 음악적인 작품을 가리키며 널리는 레뷔, 보드빌 등 극의 성격을 갖지 않는 작품도 포함하여 뮤지컬이라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연극과 가곡이 주체가 되고 음악, 무용, 미술, 조명 등이 거기에 가세하는 종합적 대중연극의 한 형식"을 가리킨다.오페라나 오페레타에서는 음악이 우선하는 데 비해, 뮤지컬은 극적 요소가 우선하지만 음악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시 되는 특성이 있다. 오페라는 대사를 포함한 극 전체가 작곡되어 있지만, 뮤지컬에서는 노래를 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대사도 있으며, 그 대사는 상황의 설명이나 감정의 고양을 묘사할 때에는 노래로 이행한다. 이야기하는 대사의 표현에서 가창이라는 음악적 표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뮤지컬 특유의 공상적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 차원이 탄생하는 것이며, 거기에다 무용까지 추가되면 그 설득력과 매력은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이같은 음악적 확대표현이 바로 뮤지컬의 특그 밖의 작품으로는 , , , 등이 있다.과 은 프랑스인인 알란 부빌과 클로드 미쉘 쉔베르 팀의 뮤지컬이다.이밖에도 , , , 등등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요즘은 과거의 작품들을 리바이벌하여 상연하는 붐이 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초기 거쉬인의 작품인 , , 등이 큰 성공을 이루고 있다. 전반기의 대작위주에 비해 최근에는 소극장중심의 뮤지컬도 성행하고 있으며 5~60 년 고풍 노래들을 모아 짜집기를 한 뮤지컬들도 성공을 이루고 있다우리나라에서 뮤지컬과 유사한 형태의 극양식이 선보인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서구 음악극을 모방하여 가수의 노래에 연기와 무용을 추가한 30년대의 악극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공연도중에 막간을 이용하여 변사나 삐에로 같은 출연배우들이 짤막한 코미디나 만담, 가요, 숨은 장기 등을 보여주는 막간극이었는데, 이것이 의외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자 독립적인 오락물로 공연하게 되었고, 노래, 춤, 코미디 등이 연관 없이 나열되던 종래의 형태에서 벗어나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를 갖추면서 가극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1930년대에 들어서 대중극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가극은 연극시장, 태양극장, 협동무대, 낙랑좌 등에 의해 더욱 연극적인 양식으로 다듬어졌으며, 명칭도 악극으로 바뀌었다. 악극은 1930년대의 동양극장을 무대로 당시의 흥행극단들이 공연하여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었다. 조선 악극단, 반도 가극단 등 대표적인 악극단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던 악극은 195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우리나라에는 1962년에 예그린 악단이 창단되면서부터 현대적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었다. 창단 후 연극형태의 음악극을 공연하던 예그린 악단이 본격적인 뮤지컬 공연을 시작한 것은 최창권 작곡의 "살짜기 옵서예 "를 공연하면서 부터이다. "살짜기 옵서예"는 음악, 무용, 연극 등 각분야의 전문인과 인기배우들이 동원되어 당시 관객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 뒤 예그린 악단은 국립 가무단(1976)을 거쳐 국립 예그린 예술단으로 활동할 때까지 , 현대무용을 응용한 춤은 물론, 요즘에는 길거리의 일상적인 춤도 등장한다. 화려한 으상을 차려 입은 궁중 무용도 나오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을 무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뮤지컬에서 무용은 한마디로 대단한 볼거리 중의 하나다. 그러나 무용 역시 작품 전체가 지향하는 주제 의식과 분위기를 떠나면 그것은 하나의 댄스에 불과하지 뮤지컬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춤은 아닌 것이다.뮤지컬 공연의 구성상에 등장하는 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극의 처음 부분에 소개되는 것으로 댄서들이 언제, 어디서 쇼에 등장할 것인지를 보여 주기 위한 오프닝 넘버, 또 혼자서 인물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독무(Solo), 둘이 상호 보완적인 움직임과 애정의 몸짓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듀엣(Duet)등이 있다. 극중 남녀 주인공의 화합 대립을 표현하는 앙상블(Ensemble), 장엄한 스펙터클 장면을 만들기 위한 군무인 프로덕션 넘버(Production Number), 액션을 강화시키거나 논쟁이나 대립을 유발시킬 때 사용하며 대개 크로스 오버(Cross Over)의 위치에서 상연하는 발레 시퀸스(Ballet Sequence)등이 있다. 뮤지컬 한 편을 감상하면 대개 이런 요소에서 춤이 등장한다. 뮤지컬의 춤은 가사와 대사로 표현되는 것 외의 감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육체와 영혼, 자유분방한 감정 표현과 절제된 행동,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의 표현 등이 춤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현대 뮤지컬에 있어서 무용의 이미지는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관객들이 보는 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안무가는 작품의 성격에 따른 다양한 춤을 고안해낸다. 코러스들뿐만 아니라 연출의 작품 해석, 기타제반 사항인 음악, 장치, 조명, 의상, 분장, 소품 등의 모든 극적 요소를 감안하여 이들의 유기적 결합을 시도하고 의도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해낸다. 좋은 뮤지컬 안무가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사나 노래 없이 오로지 춤 동작만으로 된 장면은 전적으로 안무가의 몫이 되며정, 대단원(결말)의 단계로 진행된다. 하지만 뮤지컬은 여기에 음악과 춤이 더해진다는 특징이 있다. 공연의 본질적인 면에서는 연극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양식은 사뭇 다른 셈이다.1890년대 런던에서 코믹 오페라와 발레스크로부터 발달한 뮤지컬 코미디는 희극적이며 낭만적인 대본과 캐취 송(재미있고 외우기 쉬운 노래)그리고 앙상블을 이룬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의 영국 뮤지컬은 각 막마다 오프닝 코러스를 포함하여 약 20개 정도의 악곡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2막 구조로 되어 있다. 막 사이의 피날레, 독창과 중창들(종종 합창의 후렴이나 춤의 반복이 함께하는)그리고 소곡과 한 구절까지도 연주되는 코믹 오페라의 형식을 띠고 있다. 현대 뮤지컬도 이러한 음악적인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음악의 양식이 다양해지면서 뮤지컬 음악의 구성도 자유롭고 다양하게 발전 하였다. 최근 뮤지컬에는 록과 랩, 재즈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음악들이 극속에 스며들고 있다. 구체적으로 뮤지컬 음악에 있어서의 구성 요소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서곡(Overture) - 극이 시작하기 전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음악에 미리 익숙하게 하고 또한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감정을 정돈케 하는 역할을 한다.2) 오프닝 넘버(OPENING Number) - 오프닝 코러스(Opening Chorus)라고도 하며 서곡이 끝난 후 연주되는 곡 혹은 코러스들의 합창을 일컫는다. 이곡의 역할은 관객의 관심 집중, 분위기 안정, 상황 설명 등이며 따라서 대부분 힘차고 활력 있는게 특징이다.3) 제시(Exposition) - 앞으로 진행될 극중 상황 이전에 어떤 배경과 상황이 선행되었는가를 설명하여 주는 곳이다. 뮤지컬에서는 주로 노래를 통해 전달되며 정확한 가사 전달과 분명한 발음이 특히 요구되는 부분이다.4) 프로덕션 넘버(Production Number) - 대체로 1막의 중간 부분 그리고 1막의 끝에 나오는 곡이다. 2막의 첫 부분에 두는하튼의 밤거리를 밝힌다. 브로드웨이 무대를 벗어나 예술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들을 보려면 오프 브로드웨이를 찾으면 된다.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란 `브로드웨이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브로드웨이의 상업적 연극에 반발해 시작된 새로운 연극의 경향. 브로드웨이 외곽에서 성행했다. 문학적 가치나 사회성 있는 작품을 공연하는 등 보다 모험적이며 무대 기술면에서도 실험적인 게 특징. 1910년대 말 소극장운동으로부터 태동해 60~7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대사가 없는 행위 연극, 즉 넌 버벌 퍼포먼스이다. 공사판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탭덕스], 탭댄스의 진수를 선보인 [스텀프], 동원 할 수 있는 온갖 사물들을 이용한 [튜브스]등이 오프 브로드웨이의 대표적인 히트작들이다.흔히 브로드웨이는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상업적인 뮤지컬로 대표되는 브로드웨이, 예술성과 흥행성을 갖춘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는 오프 브로드웨이,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실험극들이 주로 오르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가 그것이다.한편, 뉴욕 브로드웨이의 시상 제도로는 유명한 '토니상'이 있다. 뮤지컬을 제작하거나 출연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상을 받고 싶어 한다. 때로는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잡음도 있지만 이 상의 권위는 대단하다. 세계 뮤지컬사를 빛낸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상을 수상하였고 뮤지컬 스타들 역시 이 상과 인연이 깊다.토니상에는 작품상, 주연남우상, 주연여우상, 조연남우상, 조연여우상, 연출상, 각본상, 작사.작곡상, 안무상, 의상상, 장치상, 조명상, 리바이벌상 등의 부문이 있다. 최초의 토니상 수상작은 1949년의 [키스 미 케이트]이면 토니상 최다 수상 작품은 지난 1964년에 공연된 [헬로우 돌리!]로 당시 총 11개 부문 가운데 10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남태평양](1950), [아가씨와 건달들](1951), [왕과 나](1952), [마이페어 레이디](1957), [사운드 오브 뮤직](1960), [노력하지 않고식이다.
日本の休み....(公休日)■ 1월 1일: 元日(がんじつ:설날)쇼우가쯔라고도 부르는데,새해를 맞이하는 신년의 첫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서로에게「おめでとう ございます.」라고 새해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처럼 손윗 사람에게 세배는 하지 않고, 나이에 관계없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세뱃돈은 미리 세뱃돈용 봉투에 넣고, 받는 사람 이름을 적어 건네는데 보통 사회인이 되기 전까지는 세뱃돈을 받는다. 연말연시 5일 정도는 슈퍼마켓이나 일반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1주일분 정도의 장을 미리 보아 둔다. 그리고 12월 31일에는 「お節料理」라는 설날 요리를 3일분 정도 만든다. 요즈음에는 오세치요리(おせちりょうり)를 만들어 파는 가게 가 있어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다. おせちりょうり는 작은 생선, 밤, 검은 콩, 토란, 달걀, 청어알 등을 재료로 한다. 청어알은 알이 많기 때문에 자손 번창을 뜻하며, 검은 콩은 마귀를 쫓는 것으로 간주되고, 밤은 황금색이라 돈, 즉 재산 형성을 의미한다.또, 설날 아침에는 한국의 떡국에 해당되는「오조우니(おぞうに)」를 먹고, 신사나 절에 가서 새해의 소원을 빈다. 그리고 특히 1일, 2일, 3일은「三が日」라고 하여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가족들과 신년의 시작을 축하하고 1년의 계획을 세운다.신사나 절에 가서 신년 첫 참배를 하고 그 해의 운수를 점쳐보기도 한다.그리고, 새해를 맞이하여 일본의 다른 어떤 명절과 경축일 보다 다양한 전통장식, 게임, 의상 등을 볼수 있는 날이다.■ 1월 15일: 成人の日(せいじんのひ:성인의 날)만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며, 새로 성인이 된 젊은이들에게 이제 어른이라는 자각을 심어 주기 위해 제정된 공휴일이다. 이 날 지방자치 단위별로 성인식이 열리며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きもの나 정장차림으로 참석한다.만 20세가 된 것을 축하하는 성인식이 행해진다. 여자들은 사진관에 가서 기모노를 입고 성인식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2월 11일: 建國記念日(けんこくきねんび:건국기념일)일본의 1代 천황인 신무천황이 즉위한 날이라고 한다(日本書紀의 기록: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 건국의 뜻을 기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자는 취지로 1966년에 공휴일로 추가 되었으나,일본국내에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개천절과 비슷한 국경일이다.■ 3월 21일경: 春分の日(しゅんぶんのひ:춘분)밤과 낮의 길이가 꼭 같아지는 날이다. 춘분을 중심으로 7일간을 피안(彼岸)이라 하며, 조상의 묘소에 성묘(はかまいり)를 하여 조상의 혼령을 위로한다. 피안이란 건너편 물가라는 말로서 현세에 대해서 저쪽 세상, 즉 극락 정토를 가리키며, 불교의 축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특히, 피안에는 맵쌀과 찹쌀을 섞어 쪄서 빚은「오하기(おはぎ)」란 떡을 먹는 풍습이 있다.■ 4월 29일: みどりのひ(녹색의 날)자연과 친해짐과 동시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풍요로운 마음을 기리는 날이다. 원래 일본 쇼와(昭和)시대(1926-1989) 천황의 탄생일 이었으나 천황의 별세 후, 「녹색의 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탄생일을 공휴일로 정해서 기념한다. 더불어 연호도 함께 바뀌게 된다.■ 5월 3일: 憲法記念日(けんぽうきねんび:헌법기념일)1947년 5월 3일 현행 일본헌법이 제정되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의 제헌절과 같다.■ 5월 4일: 國民の休日(こくみんのきゅうじつ:국민휴일)5월 3일과 5월 5일의 양 경축일 사이에 끼어 있어, 3일간의 연휴를 만들기 위해 공휴일로 지정한 날이다.■ 5월 5일: 子供の日(こどものひ:어린이날)코도모노히. 탄고노셋쿠(단오절)이라고도 한다.원래는 남자아이들의 경축일로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이다. 한국의 어린이 날과 같다.이 날은 어린이들을 위한 명절이자 국경일이기도 합니다. 정원에 잉어 모양의 깃발(코이노보리)을 달고 "고기쯔닌교우" 라고 하는 인형을 방에 장식하기도 한다.■ 7월 20일: 海の日(うみのひ:바다의 날)바다의 은혜에 감사하고 해양국 일본을 기리기 위해 1996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연간 2000시간 이상 일하는 일본 근로자들의 근무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공휴일이 없는 6월, 7월, 8월의 중간에 해당되는 7월20일을 바다의 날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9월 15일: 敬老の日(けいろうのひ:경로의 날)다년간에 걸쳐 회사를 위해 노력해 온 노인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의 장수를 축하하는 날이다. 지방자치 단위로 고령자를 초대하여 연예회를 열기도 하고, 기념품을 증정하기도 한다.노인에게 감사하고 노인을 존경하는 날.■ 9월 23일경: 秋分の日(しゅうぶんのひ:추분)밤과 낮의 길이가 똑 같은 날.춘분과 마찬가지로 조상을 공양하는 날이다. 피안(彼岸)이란 불교용어로 수 많은 번뇌를 버리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춘분과 추분 양일(兩日)은 태양이 정 서쪽으로 지기 때문에 서쪽에 정토가 있다고 믿는 신앙(서방정토)과 연결되어 조상을 공양하는데 적절한 날로 꼽는다.
1. 한국한국의 전통사회 가족제도는 주로 확대 가족이었다. 이러한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제에서는 선조숭배(先祖崇拜)가 중요한 덕목이다. 따라서 주택에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나 재실(齋室) 등 가묘(家廟)가 도입된다. 가묘제(家廟制)는 고려 말 정몽주가 향교를 신설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를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후, 중인 이상 계급은 사당을 정침(正寢)의 동쪽에 별동으로 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와 함께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 아래서는 각 세대(世代)가 사용하는 공간을 잘 조절하여 하나의 주택으로 통합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따라서 주택의 공간구성에서 세대를 적절히 분리하고 한편으로는 원활히 통합하려는 의도가 나타난다.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은 각각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공간으로서, 대청에 의해 적절히 분절되어 배열된다. 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사용하는 큰 사랑방과 아들이 사용하는 작은 사랑방이 나란히 자리잡는다. 이같은 부계 직계가족의 전통은 마을을 구성하는 데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씨족(氏族)마을 또는 동족(同族)마을이라는 독특한 한국의 마을유형은 바로 이러한 종법(宗法)제도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자리잡은 씨족마을은 우리 나라 전형적인 마을유형으로 자리잡아 근대화시기까지 지속되게 된다. 1930년의 임시 국세조사를 보면 한국 마을의 반 이상이 씨족마을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통사회의 가족제도인 확대가족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산업화가 되고 서구화가 되면서부터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가고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전통적 가족제도를 대가족제도라고 부르지만,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대가족이란 장남은 물론 차남들의 가족 모두가 같은 호구를 이루는 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할아버지-맏아들-맏손다의 직계3대만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한국의 가정들은 대가족이 아닌 ‘직계가족'혹은 ‘확대가족'에 속한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대가족제도'를 운영했던 중국과는 달리, 한국은 직계 확대가족제를 선호해원리로 하는 가족으로 변용하였다.3. 미국미국의 가계나 가족은 구조면에서 단순하였으며, 조직면에서 현대의 가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함께 사는 가족의 가장 전형적인 단위는 핵가족으로서, 절대로 친족을 포함하지 않고 부모와 자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산업 사회 이전의 높은 사망률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들의 손자세대와 겹쳐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산업화가 과거의 대가족 제도를 파괴했다고 논쟁하는 것은 하질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그러한 대가족 유형이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에 있어서 지금 우리 시대의 것과 현저하게 다른 것은 그들 가족이 확대된 친족을 포함하진 않았지만 친척이 아닌 개인이나, 하숙생, 세든 사람, 도제, 하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친척이 아닌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가족 구성의 경향은 가정을 사적인 은둔지로 강조하는 현대와는 대조적으로 과거의 가정은 핵가족이라는 좀더 제한된 범위를 초월하여 포괄적인 기능과 활동의 무대가 집합된 곳이었다. 가정은 생산의 장소였으며, 연고자가 없는 고아나 노인, 여인등 공동사회속에서 의지할곳 없는 사람들과 하인, 도제등에게 거주지로서 제공되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가정은 1920년대까지 친척이 아닌 사람들도 함께하는 숙식의 장소로 지속되었다.19C와 20C를 거치는 동안에 인구의 3분의 1 내지는 4분의 1 이 다른사람의 집에서 하숙생으로 살거나, 생활의 어느 기간동안은 하숙생이나 셋방인을 두고 있었다. 도시의 가정에서 하숙생활이나 셋방 살이를 하는 것은 세대간 교환의 중요한 형태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로는 주택공급이 많아지고 가족의 사생활에 대한 가치가 증가하면서 흑인가족들 사이에서는 예외이지만, 하숙생과 셋방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함께살기는 실제로 대부분의 큰 사회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함께살기의 사라짐으로 가족은 도시의 삶에 적응성을 주는 탄력성의 몇가지 중요한 원천을 잃어버렸다. 이와같이 미국의 가족생활에서연성과 고독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 대리가족 분위기의 삶인 것이다.1. 한국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과 우리나라 건국이념에 부합한 국민교육제도의 근간이 되는 교육기본법의 제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12월 31일에 법률 제86호로 교육법이 제정ㆍ공표되었다. 교육법의 제정으로 새로운 교육제도의 근간이 확립되었다. 그 가운데서 학제는 군정당시의 그것과 현실과의 타협으로 이루어진 과도적 영태로 난착되었다. 우리의 학제는 교육법 발표후에 몇번의 개정을 보았는데 6ㆍ25동란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 3월에 수정을 본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이라는 학제가 1951년 3월 20일자로 교육법이 개정 공시됨에 따라 중등교육제도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2. 일본인본인은 교육을 좋아한다고들 한다. 메이지유신후 정부는 교육의 중요성에 눈을 돌려 1872년에 학제를 발표하고, 30년후인 1902년에는 이미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90%를 넘었다. 반면, 1900년대에 중등교육의 기회를 가진 사람은 같은 연령 인구의 1할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그후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진학률은 계속 상승하며 현재는 중학교 졸업생의 96%이상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가운데 5할 가까이가 대학등 보다 높은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일본인이 교육을 좋아하는 배경에는 호기심이 강한 민족성, 외래문화를 섭취하면서 문화를 고양시켜간 지리적 조건, 다양한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다신교적 성격, 문학과 학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유교적 전통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일보의 학교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가 4년인 6ㆍ3ㆍ3ㆍ4 제이다. 우리나라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단기 대학은 2년내지 3년이고, 의학, 치의학 및 수의학 과정은 6년, 대학원의 석사과정은 표준2년, 박사과정은 표준 3년으로 되어있다. 단, 의학 치의학 및 수의학은 박사과정만으로 4년이며 초등학교에 취학책에 더욱더 빅차를 가하였다. 이 법률안에 따르면, 모든도시는 이후, 40년 이내에, 실질적으로 미국의 모든 식민지들은 매사추세츠 주를 모범으로 삼고 이시책에 부흥하였다. 아동 교육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학교와교수를 확보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수천개의 교구를 설정하고, 공유지를 학교부지로 설정하며, 시설을 잘 갖춘 수많은 학교건물들을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일단의 교육자와 교육 행정가를 교육시키고 고용하여 마침내는 미국인 아동들이 그들의 어린시절의 상당 부분을 공립학교에서 보낼 것을 요구했다. 1980년대까지 미국내 모든 주는 6세에서 48세 사이의 아동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했는데, 수많은 주가 이러한 학교 교육을 받을 권리를 확대하여 5세 아동을 포함시키고 상한선을 대학 2학년까지로 하였다. 1980년 당해연도 미국 젊은이를 100면 단위로 볼 때, 그 가운데 75명이 적어도 12년간의 학교 교육울 이수하였고, 1200만명이 계속해서 상급학교인 대학교로 진학하였다. 19C말 이후로 미국인들은 그들의 교육제도는 보통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데 일치된 의견을 모았다. 또한 미국인들은 그들의 교육제도가 분권화 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해왔다. 실로 미국의 학교제도는 전혀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대신에 미국의 학교 교육은 광대하고 복잡하며 중복되어 겹치는 잡동사니 같은 개별교에 의해 이루어 지는데, 각교구는 선출되거나 임명된 위원들로 구성된 지방 교육 위원회의 지시를 받는다. 지난 100년동안 미국인들은 그들의 학교가 특히 고등학고 단계에서 종합교육 시스템을 갖출 것으로 생각해왔다. 달리 말하자면, 미국사회에서는 학교 교육이 엄격하게 제한된 교과과정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신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에 대한 선택권을 주자는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그들의 학교 교육제도가 전문교육자와 교육 행정가의 손에 의해서 운영되고 봉사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의무 교육법의 등장이후 그와 같은 상황은 융개방이 행해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외국기업들과도 경쟁해야 했고 돈에 목마른 재벌들은 '월스트리트'의 이해와 맞아떨어져 외자를 급속히 유입했다. 정부는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규정에 맞도록 규제완화를 추진했고 이것은 금융개방과 세계화와 맞물려 기존의 정부 주도형 한국경제 시스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즉 한극 정부는 IMF구제금융을 받을 때 총부채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고 정부와 재벌관계가 급속히 변했으며 재벌의 이해관계자도 종전의 정부뿐에서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추가되는 등 다양화됐다. IMF위기 중에 한국 정부는 두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금융기관을 정리한 후 한국 정부는 대마불사(大馬不死)정책을 포기했음을 공언하고 금융기관은 재벌로부터 소유권이 독립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 후 재벌의 정리는 이처럼 새롭게 태어난 금융기관에 맡긴다는 식이었다. 금융기관이 재벌을 정리할 유인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등의 한계는 있다. 둘째, 이것이 한국 정부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정부가 직접 기업 구조조정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단축된다는 이점이 있지만 이미 붕괴된 한국시스템을 재생한다는 점에서 잘못된정책이고 재벌간 빅딜은 이런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2. 일본일본은 잘 짜여진 구조로 이루어진 하나의 건축물이다. 그러한 건축물을 받치는 커다란 기둥은 정부이다. 정부의 기둥옆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기업이다. 이들은 일본이라는 건축물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한단계씩 건물높이를 올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기둥사이에는 서로의 의견을 수렴하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는 등의 정책네트워크가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정책네트워크는 전후 일본을 일약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만들었고 이는 곧 전세계적인 정보수집망을 갖는 당연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정책네트워크를 지탱하는 두 기둥의 역할을 알아보면,첫 번째, 정부 즉 통산성의 일본 경제발전 과정의 전략적 특징은 정부주도의 국부증대전략이라는 한다.
1. 역사인도네시아는 지구상에서 몇 안되는 원시 인류(자바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인도네시아인의 뿌리는 기원을 전 후로 한시기에 옮겨온 많은 인도인들이 힌도교와 불교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토착 문화를 꽃피움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7세기 후반 남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스리비자야(srivijaya)왕국이 탄생하고 자바에서는 불교 왕국인 샤이렌드라 왕국에 이어 마타람 왕국(힌두교)이 일어났다. 하지만 힌두교는 마자파히트(majapahit)왕국을 끝으로 이슬람교로 대치된다. 당시 이슬람교는 초기의 과격함을 버리고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힌두교는 발리 섬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 유럽의 세력이 이 지역에 미치기 시작하였고, 1621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도네시아 여러섬들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유럽제국주의의 오랜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점령과 패퇴의 와중에 독립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으로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마침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내었다.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 인간애, 민족주의, 의회정치, 사회정의 등 사회규범으로 정한 5대 원칙(판칼리사, pancalisa)을 중심으로 인종 갈등, 민족 분규, 지역 갈등 등을 해소하고 광대한 국가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2. 인구와 언어인구는 약 1억 9500만 명으로 세계 제4위, 17,508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최대의 군도국가이지만 전 인구의 60%가 자바, 마두라 섬에 집중되어 있어 이 지역의 인구밀도는 세계최고이다. 말레이계 인종이 국민의 대부분이지만 그 밖에 주요 종족만도 70이상을 헤아릴 수 있다. 공용어로는 바하사 인도네시아어가 장려되고 있다. 말레이지아어와 같은 뿌리를 가진 바하사어는 단순화된 구어체 형태여서 배우기가 수월하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간단한 언어인데, 우리로서도 그저 발음 기호를 읽둣 따라 읽기만 하면 될 만큼 쉽다.3.문화인도네시아 문화는 오랜 전통에서 우러나온 문화의 다양성을 자랑으로 하며 현재에도 일상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문화는 많은 종족 만큼이나 다양하고, 전통, 언어, 방언들이 각자의 특색을 갖는다. 또한 아닷(ADAT)이라는 관습법을 갖는데 이또한 지역마다 다르다. 현대화는 도시생활의 겉에만 이루어져 있다. 결국 아닷(ADAT)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연관된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농경문화를 기초로 하는 인도네시아 문화도 상인들와 인도, 중국, 아라비아, 유럽의 선교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최초 서구의 영향은 16세기 초 여행을 목적으로 온 포루투갈 사람에 의해 도래 했으며, 그 후에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들어왔다. 과거에 인도네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는 힌두교로써 라마야나 마하브라히타 힌두 서사극은 인도네시아 문화 양식에 종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문화의 정수로 손꼽힌다. 전통적인 관습은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종교의 다양한 의식과 축제에서 유래된다. 삶을 이끄는 기본개념은 서로간의 이해와 도움, 협조 등으로 대표되며, 단적인 예로써 주거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건설할 때도 이러한 개념들을 생각한다. 인도네시아 법률체계는 오래된 네덜란드 형법에 기초한다. 그 아닷(ADAT)법률은 상속행위, 가족생활 같은 사회문제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서부 수마트라에서는 모계중심의 가족생활을 하며, 발리에서는 4등급의 카스트 제도, 이리안 자야, 칼리만탄과 술라웨시는 북 수마트라의 바탁(BARAK)씨족과 같은 부족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아닷(ADAT)법률은 다른 회교국가와는 달리 여성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한다. 석기시대부터 수준높게 개발되어 온 예술과 자바인들의 관습에서 온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문화는 이리안 자야 고원지대에 격리되어 있는 부락들에서 흔이 발견되는 것이다.4.종교인도네시아인의 약 85%가 회교도이며, 12%정도가 기독교인이다. 3%가 힌두교와 불교이고 나머지는 그들의 토속신앙을 믿는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종교가 회교이지만 이 나라의 법률은 네덜란드에서 영향받은 서구의 형법에 기초한다. 그래서 회교의 교리대로 처리되는 것은 많지않다. 인도네시아의 기본 정신은 판칼리사 (pancalisa)로서 예배의 자우를 보장 할 분 아니라 생활윤리와 가치관을 제공해준다. 회교가 가장 보편적으로 된 이유는 지난 10년 동안 폭넓은 선교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주종교로 갖고 있는 곳은 북부 술라웨시, 말루크, 플로레스, 티무르, 이리안 자야 뿐 아니라 회교지역인 북수마트라의 바탁인에게도 전파되었다. 발리는 힌두교와 그들의 전통신앙에 기초한 그들만의 토속신앙을 갖는다. 정부는 회교,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종교휴일을 공식 인정했다. 일요일은 인도네시아의 정기휴일이며, 금요일에는 정부기관이 오전 11시 30분에 문을 닫는데 사원에서 단체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원과 교회는 인도네시아의 모든 도시와 큰마을에서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종교에 따른 차별은 없지만, 출생신고 때 신생아의 종교를 지정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종교를 물려받게 된다.
1. 단편적인 역사..약 3만년 전 북미대륙은 동식물만 존재했던 땅이었다. 북방 아시아로부터 이주해온 황인종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들은 부족을 중심으로 광활한 영토에서 사냥과 수렵으로 삶을 영유하며 독특한 문명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갈색 피부에 거칠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 톡 튀어나온 광대뼈,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는 것들고 미루어 몽골로이드 계의 인종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서 건너온 것일까?이에 대한 학설은 구구하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학설에 따르면 , 처음 그들은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로 그들의 생활 터전인 초원지대가 고갈되어 갔다. 이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엄청난 위험이며 모험이었다. 그들은 험한 산맥이 가로박고 있는 길을 위해 북동쪽으로 트여 있는 베링해협으로 발길을 옮겼다. 베링해협은 1년의 반 정도는 얼음으로 뒤 뎡여 있기 때문에 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 중 알래스카였다.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 놓은 몽골리안 중에는 알래스카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좋은 생활터전을 찾아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동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생활에 필요한 기술들을 발전시켜 서서히 문명을 형성해 갔다.A.D 6세기와 12세기 사이 중남미 일대에는 1500만에 가까운, 북미는 100만에 이르는 인구가 거주하게 된다. 이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유럽인들에 의해서이다. 선진문화를 앞세운 유럽인들이 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인도의 일부로 착각하면서 부른 '인디언'이란 단어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현재 미국을 완성시킨, 그리고 이끌어 나가는 미국의 백인 사회의 주류는 영국계라고 이야기된다. 17세기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 그 땅에 살아온 인디언들은 이 영국계 백인들에 의해 멸망사를 장식하게 된다. 영국인이 최초로 영속적인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성공한 것은 1607년 체사픽 만 연안의 제임스 타운에서 였다. 처음에 인디언은 백인들을, 즉 유럽인을 환영하였다. 체사픽 만에 도착한 영국인에게 포하탄 부족은 우호적으로 접근하였다. 1614년 존 롤프가 포하탄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와 결혼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1818년에 포하탄 추장이 죽고 담배 경작이 성공하면서 수 많은 영국인들이 체사픽 만 지역에 이주하자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는 호전적으로 변해 갔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 때문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던 인디언들이 순식간에 몰사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다 못한 젊은 새 추장 오페칸카노우는 부족을 이끌고 백인 부족을 습격하여 백인 주민의 1/3가량을 샐해하였고, 그 보복으로 영국인들이 인디언 대량 살육 전쟁을 감행하였다. 1620년과 1630년 사이 버지니아의 민병대에 의해 인디언들의 대부분이 몰살되였다.결국 1646년에 영국 식민지와 버지니아 원주민 간에 공식 협상이 이루어져 서로간의 영토를 나두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땅이 백인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이 것은 북미 대륙에서 백인들과 인디언과의 협상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되는데 ,인디언들은 이러한 협상을 통해서 자꾸만 서쪽으로 서쪽으로 밀려나게 된다.영국인들은 처음부터 인디언과 분리하여 생활하였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영국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편견과 사회구조상 -인디언 부족들은 모계 중심적이며, 자연을 숭배했다-의 차이에 있었다. 또한, 종교적 문제이기도 했다.1860년경, 인디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백인들 사이에 서부 개척 열풍이 불게 된다. 대서부의 개척에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에 몰려온 광부들이었다. 이들 광부는 1848 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의 금을 캘리포니아에서 캐냈다. 또한 1858년에 콜로라도의 파이크스 피 크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10만여 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어 덴버와 같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골드러시'가 끝난 후 대부분의 광부들은 농부로서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서부의 텍사스로부터 캐나다에 이르는 대평원에서는 전후 20여 년에 걸쳐 소의 방목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소값은 동부 시장에서 마리당 40달러를 호가하였으나 텍사스에서는 3~4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몰이를 전문으로 하는 카우 보이들이 목축업자들에게 몰려왔고 그들도 나중에는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광부와 목축업자들에 이어 대서부에 옮겨온 사람들은 1862년에 제정된 자작농지법에 의한 농민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국유지에 5년간 거주하며 개척에 종사하면 160에이커의 토지를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1870년대 말부터 서부의 대평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0여년 동안에 대평원을 거대한 농경지대로 바꿔 놓았다.백인들의 서부개척 과정에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인디언에 대하여 미 연방정부 는 전쟁 전부터 일정한 거류지를 결정하여 백인들과 격리시켰고 인디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필요할 때에는 반강제 적으로 조약을 맺고 그 땅을 점유하곤 하였다.1862년에 미네소타주의 수우족이 반란을 일으켜 수백명의 백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미정부는 수우족 전체를 다코 타 지방으로 추방하였는데 1874년 사우스다코다의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많은 백인들이 몰려들었고 수우족은 자신들의 지역을 침범한 백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으며 1876년 6월에는 수우족을 토벌하려던 카스터 중령의 기병 7연 대 264명이 수우족에게 전멸 당하기도 하였다.인디언들의 조직적인 반항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최후를 장식한 것은 애리조나에 근거를 둔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용감하고 잔인했던 아파치족도 미육군의 위세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1886년 오 클라호마의 지정 거류지로 되돌아갔다. 아파치족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인디언과 백인과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미 연방정부는 1887년에 도오즈 개별토지소유법을 제정하여 인디언들이 농업으로써 자신들의 생활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891년에는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1894년에는 모든 인디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보호 구역으로 쫓겨난 인디언들의 대부분의 세대들이 술과 놀음 등으로 페인이 되어 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러한 인디언들 중일부 젊은층들이 재산과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채 자신들의 영토를 합법적으로 되찾아 가고있는 것이다.2.문화알래스카에서 칠레까지 넓게 펼쳐진 그들의 영토만큼이나 인디언의 문화는 매우 다양한 면을 보여 준다. 한때는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인디언 문화였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로 이어졌다.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민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베풀었지만, 탐욕스러운 백인은 그 호의를 증오와 전쟁으로 되돌려 주었고, 그들의 터전과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러한 미국의 인류문화유산지는 메사베르데 국립공원과 차코 국립역사문화공원을 비롯하여 8곳이 지정 되어 있는데 대부분 인디언과 관련된 유적지가 주류를 이룬다.문화와 역사의 공간 차코오랜 전쟁을 하면서 백인들은 전쟁을 예방하고 인디언의 삶을 개선한다는 이유로 보호구역을 만들었다. 약 200개에 이르는 인디언보호구역은 대부분 로키산맥 서쪽과 미시시피 강 사이에 건설되었다.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지나 뉴맥시코에 접어들면 차코 국립역사문화공원(Chaco Culture National Historical Park)이라는 싸인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미국 최초의 인류문화유산지역으로 지정된 차코 인디언 유적지로 향하는 길은 옛날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던 길을 조금 넓게 만들었을 뿐이다.반경 20km에 흩어져 있는 차코 인디언 유적지 중 가장 큰 규모는 순환도로 외곽에 위치한 차코 인디언 성곽도시이다. 외부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성곽은 높이 6∼8m에 둘레는 2km 가 넘는다. 성으로 들어가려면 커다란 사다리를 이용하여 지붕위로 올라간 후 다시 사다리를 타고 좁은 돌 사이를 내려가야 한다.외부에서 보면 매우 폐쇄적인 모습이지만, 차코 인디언 유적지는 내부로 들어서면 규모와 정교한 건축 술에 새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성곽의 중심은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리던 신전을 중심으로 적의 침입 에 대비한 여러 개의 망루와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졌다.차코 인디언 유적지에는 크고 작은 유적물이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위에 건설한 거대한 성곽과 더불어 복잡하게 설계된 주거용 집이다. 차코의 주택은 공동체 공간과 가족 단위의 독립된 방으로 구성 되어 있다. 집의 모양은 정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돌로 쌓아올린 모습이 너무 신기해 정신없이 촬영을 하다 입구를 잃고 헤매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아름다운 차코의 성곽을 한눈에 보려면 마을 뒤쪽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가야 한다. 100미터가 넘는 절 벽이 2킬로미터쯤 이어지는 차코의 바위산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좁고 가파른 암벽을 지 나는데 산으로 오르는 사이사이에는 차코인디언의 영웅 묘지와 작은 유적지를 여러 곳 만날 수 있다. 산에 올라 바라보는 차코 인디언 유적지는 감탄사 외는 별다른 표현어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