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五四’신문화운동에 대해 논하시오.中?은 신해혁명으로 아직 정치 경제적으로 철저한 반제, 반봉건을 청산하지 못한 불완전한 혁명의 산물인 '民?'을 달성하였지만, 군벌의 지방할거와 세계열강들의 中?에서의 이권독점 등으로 인한 반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같은 상황은 신해혁명을 새로운 中?의 탄생으로 환영하였던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中?인들은 새로운 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변혁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정신혁명을 제창하게 되는데, 이로써 이 신문화운동이 일어난다. 이 신문화운동 기간 중, 日本의 대中? 21개조 요구에 대한 철회운동으로부터 반일운동이 전개되고, 특히,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북경소재 각급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을 五?四 事件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五?四 運動이라 함은 두 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좁은 의미로의 五?四 運動은 1919년 5월 4일 이래 약 2개월간 전개된 五?四 애국 운동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五?四사건을 전후한 시기(1915년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신문화운동을 가리킨다. 신문화운동이 청년, 학생층에 미친 영향이 애국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五?四사건을 거치면서 신문화운동이 확대, 발전됨으로써 양자는 상호 관련이 깊다.五?四 運動이라는 용어는 五?四 事件 직후 학생층과 보도기관에서 北京의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난 후, 北京의 학생데모에만 적용되던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用語는 이후 전개된 일련의 政治的 事件을 지칭하게 되며, 결국은 당시 5월 4일 일어난 '五?四 事件'과 동일한 개념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이 五?四 運動이라는 말은 '北京?生聯合?'가 1919년 5월 18일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中?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사건이었던 五?四 運動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학생들은 五?四 運動 전 기간에 걸쳐 운동의 추진 그리고 주동세력이었으며 상인과 노동자 등 中? 전 계층을 계몽하여 운동에 참가하게 만든 주역이었다. 특히 북경대학생들이 이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五?四학생애국운동에 선봉적 역할을 하였으며 북경대학은 상해 전국학생연합회가 성립되기 전까지 학생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북경학생들은 신문화운동의 영향 하에 전 지역으로 학생들을 선동하여 학생애국운동이 반제?반봉건운동으로 전환되는 사상적 기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이 五?四 運動은 우리나라의 3.1운동과 비교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5.18 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五?四 運動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이것이 우리가 五?四 運動을 조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이 五?四 運動은 中? 시대사 연구에 있어서 中? 현대사의 출발로, 革命史에서는 신민주주의혁명의 시발로 간주되고 있다.五?四 運動을 革命史에서 中? 新民主主義의 출발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五?四 運動은 러시아 10月 革命 이후에 시작되어 10月 革命의 영향을 받았다.둘째, 五?四 運動에서 中? ?動者階級이 ?立的인 力量으로 政治的 무대에 등장하여 이미 부르주아계급, 소부르주아계급의 추종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셋째, 指導 思想面에서 볼 때, 五?四 時期에는 비록 中?共産?은 없었지만, 이미 러시아 革 命에 찬성하는 초보적인 共産主義 思想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다.이런 이유를 들어 五?四 運動은 中? 新民主主義 革命의 시작이며 ?民主主義 革命의 연속이 아니라 받아들여진다.끝맺으면서..오늘날 五?四 運動은 中?에서 ?年節, 대만에서는 文芸節로 각각 기념행사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는 中? 근대사에서 현대사로의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五?四 運動은 이전에는 소수의 혁명가의 무장봉기나 정객, 군벌의 세력다툼에 불과했던 정치운동을 ?生, 商人, ?動者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시위, 파업, 불매 등을 통해 정치세력화 하였다는 점에서 中?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辛亥革命이 공화제의 수립이라는 외형만 갖추는데 그친 미완의 革命이었다면, 五?四 運動은 그 내실을 다지는 진정한 혁명이었으니, 그것은 이 운동에서 ‘반제?반봉건’이라는 中?혁명의 과제가 명확히 제시되고 이를 자각한 각 계층의 대중운동으로서 추진되었으며, 이를 통해 단결의 역량이 얼마나 강한가를 깨닫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서론[좁은문]은 작가 앙드레 지드의 자전적 요소가 짙은 작품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는 정신과 육체의 갈등 속에서 이 양면성을 수용해내지 못하는 주인공의 고뇌를 통해 지드의 사상을 살펴보는데 주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이 레포트는 그와 달리 [좁은문] 의 등장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외면적으로 드러난 자아와 타자의 관계 속을 흐르는 심리 과정을 추적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특히 한 자아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욕망을 근거로 하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는 대상관계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그 출발점이다.우리는 인간이 출생과 함께 모체로부터 분리될 때 경험하는 심적 외상이 ‘결여’로서 인간 내부에 자리 잡아 인간의 무의식과 그의 욕망의 근거가 되며, 이같은 상실이 어떻게 대상관계에 작용하는가를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 그리고 그들이 다른 등장 인물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알수있다.본론잉태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 첫발을 내딛는 출생은 하나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동시에 모체로부터의 분리라는 하나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같은 출생의 심적 외상의 의미에 대해 프로이트는 출생이란 곧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이며 여기에서 인간은 최초로 불안을 경험한다고 말한다.출생은 우선 어머니와의 일체의 상태에서 육체적으로 분리된다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가지며, 자신의 일부였던 어머니가 타자로 자리잡게 되는, 대상의 직접적인 상실을 뜻한다.이러한 출생은 상실된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며 이후 한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의 기저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출생에 동반되는 근원적 상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아이가 출생 이후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상실의 상황은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된 후에도 인생의 상이한 시점에서 여러 가지 다른 상실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실의 두려움은 반복적으로 재현된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같은 불안이 새로 만들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근원적 상실의 두려움-출생때 처음 경험한 불안-이 재현되기 때문인 것이다.언어학적 법칙을 통해 프로이트에로의 희귀를 주장한 라깡은 프로이트가 말한 분열의 개념을 발전시켜 인간을 갈라진 틈새에 존재하는 ‘결여의 존재’라고 표현한다. 출생 때 경험한 ‘근원적 상실’은 아이에게 ‘결여’로 무의식화 되고, 이 결여를 보상받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출생의 상실로 인해 소외된 존재인 인간은 자신과 인간은 자신과 일체였던 대상과 합일하여 자신의 결여를 보상받기 위해 그의 어머니를 욕망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원하기에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그러므로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어머니상의 모습으로 내면의 영상을 형성하고, 그 내면상을 쫓아서 자신의 결여를 메꾸어 줄 잃어버린 대상을 찾아 나선다.그러나 자신의 내면상을 쫓아 상상 속에서 어머니와의 합일 시도하려던 아이는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인 근친상간의 금기에 부딪치고, 자신의 상실을 어머니 대신 보상해 줄 대체 대상을 구하게 된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사회 질서, 법, ‘아버지의 이름’ 으로 요구되고, 거세당할 두려움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와의 합일을 포기하며,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아이는 사회의 질서에 편입하게 되고, 자신을 아버지에게 동일시해 간다.그러나 사회 질서로의 진입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인간은 소외되어 간다. 사회의 질서와 자연인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분열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라깡은 이를 상징세계와 상상세계의 틈새에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이라고 설명한다.이미 어머니와의 분리를 통해 상실을 경험했으므로 어머니를 대체한 대상을 다시 잃는다는 것은 근원적 상실이 재현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같은 상실의 재현은 인간에게 심리적인 죽음의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므로 상실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대상관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 가는 타자와의 관계는 이러한 자신의 결여를 타자에게서 보충받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고, 타자를 대체물로 삼아 자신의 상실을 메꾸어 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이처럼 존재의 결여는 욕망의 구성 요소가 된다. 주체의 욕망의 ‘실재’ 대상을 무의미한 그 무엇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욕망 그 자체의 구성 요소가 되는 ‘존재의 결여’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욕망에 의해서 주체와 상실된 대상의 관계가 가시 이루어진다고 해도 욕망이 충족되기는 불가능하므로 욕망은 영원한 것이 된다. 욕망은 절대적인 결여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결론인간은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상실은 우리 존재의 원천적 단절, 즉 모체로부터 분리된 불완전의 구조 자체라고 보아도 좋다. 이 생리학적 불완전성이 결여 자체가 된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과 자궁 보호막에서 분리되면서 아기는 이미 자기 자신의 일부분을 잃어버린다.그리고 인간은 이 결여를 보상해줄 수 있는 대체물을 찾아 자신의 상실감을 보상 받으려고 한다. 만족스러운 대상을 발견할 때까지 대체물을 찾아 가는 이 과정의 에너지원은 무의식 속의 욕망이 담당하게 된다.결국 욕망의 토대가 되는 것은 존재의 근원적인 결여다. 욕망은 바로 아기가 그의 모체에서 분리된 최초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원천적 인간의 체험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제롬으로 하여금 계속 알리사를 찾아 가게 만드는 동기도 결여에서 생긴 상실의 대체물로서 욕망의 대상을 찾아 자신의 불완전성을 보상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이때 욕망의 달성 과정에서 초자아는 부모의 가치관, 사회, 질서, 법, 종교 등의 형태로 개입한다. 다시 말해 초자아는 주체의 내부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외부에서 영입된 이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주체는 현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지드의 욕망과 초자아의 가치 사이에 존재한다.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의 기능이다. 자아는 욕망과 초자아 사이에 위치하면서 무의식의 욕망과 이를 반대하는 초자아의 이상과 양심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내면의 정신 속에 있는 것과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을 잘 구별하고 조절하는 합리적 기능을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 주체는 대상과 잘 융합하든지 타협하여 성공적으로 현실 사회에 적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문제는 자아가 이 초자아라는 이물질을 주체 본연의 모습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주체를 경각시키거나 위축시킬 때 생겨난다. 알리사와 제롬의 경우가 바로 이와 같다. 그들에게 초자아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사회분위기인 청교도적 사고다. 그런데 이 사회의 분위기 자체가 그들 내부에 자리잡아 팽창되고 비대해짐으로써 그들의 내면을 왜곡하고 점령해 버린 것이다.
많은 음악회를 봐왔지만 두성악가가 하는 리싸이틀은 처음 접해보았다.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기대 그이상이였다.짤막하고 다채로운 레파토리로 구성되어 2시간이 넘는 긴시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특히 이재환교수님의 좌중을 압도하는 그 특유의 무대매너!무엇이 그렇게 수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즐겁게 만드는 지는 알수 없지만 시종일관 교수님의 무대는 확실히 소프라노 잔나 꾸에니에 비해 더 눈길을 끌었다.소프라노와 바리톤이 번갈아가며 무대에 서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잔나꾸에니의 무대는 바리톤에 비해 지루한 느낌이 들어서 ‘오늘 컨디션이 안좋은가?’ 라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지휘자가 잔나 꾸에니에게 너무나 훌륭한 무대였다고 말해서 우리가 무식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하지만 확실히 목소리가 바리톤에 비해 답답하고 시원시원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장르상의 문제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게 무지한 나의 느낌이였다.이 리싸이틀에서 또 크게 자극을 받은점은 바로 드럼과 오케스트라의 조화였다.나름대로 음악회도 많이 보고 오페라도 봐왔지만 드럼의 등장은 처음이였다.처음 콘서트홀에 들어왔을때 무대위의 드럼을 보고 그 쓰임새가 무척 궁금했다.나중에 그 드럼은 관객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원래 드럼이 자주 등장하는 지는 잘모르겠지만 그 파격적인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케스트라의 근엄하고 웅장한 고전적인 색채를 절대 깍아내리지 않으면서도 그 특유의 발랄함과 리듬감으로 오케스트라를 한층 더 멋스럽게 꾸며주었다. 그리고 신기함때문인지 신나서인지는 몰라도 드럼이 등장하면 관객의 집중도가 100%에 가까웠다.이 리싸이트홀은 신나서 좋고 귀에 익어 더 즐거운 서곡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그리고 베르디의 오페라 의 ‘까를로는 우리들의 영원한 제왕’ 이 연주되었는데 슬픈 멜로디는 관악기의 무거우면서 장엄한 소리로 한층 더 빛이 났다. 그러다가 무반주로 합창이 나오고 그다음 솔로가 조용한 현악기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곡이였다.드디어 이 공연의 주인공중 하나인 소프라노 잔나 꾸에니가 등장했다. 베르디의 ‘천사중의 성녀’라는 곡으로 힘찬 합창이 먼저나오고 그다음 피아노와 솔로가 나왔다. 힘찬 합창과 고운 여성솔로의 조화가 잘어우러진 웅장한 느낌의 곡이였다.그리고 등장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던 이재환교수님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제목이 영어여서 외국곡인줄 알았는데 첫소절이 ‘봄바람’ 으로 시작되서 깜짝 놀라 팜플렛을 한번 더 보았다. 임긍수의 ‘사미인곡’이라는 한국노래였다. 처음 접해보는 노래였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친숙한 느낌이였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특유의 구슬픈 가락이여서 그랬던 듯 싶다.그다음은 소프라노가 그 유명한 푸치니의 를 불렀다. 나는 잔나 꾸에니의 무대중에서 이노래를 제일 잘불렀던 것 같다. 바리톤의 힘차고 내지르는 시원시원한 소리에 밀려 시종일관 지루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 노래만큼은 오히려 조용하면서도 힘을 발휘했다. 얇고 고운 목소리지만 힘이 느껴졌고 조용히 진행되지만 무언가 호소력이 느껴졌다.이 무대가 끝나고 드러머가 등장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다음 노래를 보니 조두남의 - 고개가 끄덕여졌다. 왠지 드럼과 뱃노래가 잘어울릴것만 같은 느낌.. 아니나 다를까 드럼이 쿵짝쿵짝 나와 신이나고 흥이 절로 났다. 지휘자도 흥이나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춤추듯 지휘했다. 후렴구가 ‘헤이야~’ 로 매우 인상깊고 외국사람이 많았던 이 공연에서 정말 빛이 났던 무대였던 것 같다.그다음은 베르디의 오페라.드러머가 들어갔는데 왠일인지 아까 의 솔리스트가 드럼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나역시도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이어서 잔나꾸에니가 여성솔로와 등장했다. 진짜 오페라처럼 여자둘이 서로 노래를 주고받으면서 연기도 곁들여서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매력적인 피콜로의 예쁘고 창창한 소리가 빛나는곡 “집시들의 합창” 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중간부분에 가서는 모두 객석에서 '아~‘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관객들은 언제나 자기가 아는곡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법이다.(^^)정말 많이 들어왔던 유명한 곡이였다. 합창이 웅장하면서도 매우 신나는데 이부분에서 솔로가 자세를 잡더니 보면대를 쇠막대기 같은것으로 엇박자로 쳤다. 드럼의 등장에 이어 이 깜찍한 아이디어에 두 번 놀랐다. 신선한 발상이 아닐수 없다. 이곡은 한마디로 신난다고 밖에 말할수 없는 곡이였다.네 번째곡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는 빛나고’ 에서는 남자둘이 쿵짝짝 3박자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고 후반부에 여자둘이 살금살금 걸어나와 노래를 불렀다. 바리톤의 풍부하고 깊은울림의 목소리가 잘드러나는 멋진곡이였는데 이번공연중 앤딩이 제일 멋진곡이였던 것 같다.드디어 인터미션- 친구와 함께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자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를 쳐버리는 것이 너무 귀에 거슬렸다. 이 투덜거림은 공연이 끝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3층에는 유독 많았는데 좀 분위기가 산만하기도 했다. 관람매너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했다.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잔나 꾸에니가 슬픈느낌의 노래를 불렀다. 이곡은 오페라의 중 ‘사막에 나홀로 버려졌네’ 였는데 별 특징 없이 잔잔하고 애절한 노래였다. 더욱 슬픈건 마농레스코의 내용을 알지 못해서 곡에 몰입을 할 수가 없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는 점이다.이 노래가 끝나고 또 드럼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드럼만 나오면 신나하고 시선을 집중했다. 이재환 교수님의 관중을 압도하는 제스처와 표정, 그리고 화려한 드럼연주로 많은 박수를 자아냈다. 다시 베르디의 를 가지고 등장한 잔나 꾸에니.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이곡은 그냥 잔잔하고 별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곡이였다.
레포트를 쓰려고 음악회를 찾았는데 욕심을 부리느라 시기가 자꾸 늦쳐졌다.클라리넷이라는 악기에 별관심이 없었는데 기악반주 수업을 하면서 클라리넷에 매력을 느꼈다. 그냥 그런 관악기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까이서 반주를 하며 들어보니 따뜻하고 호소력이 느껴지는 소리를 내면서 내성적이지만 힘차게 뻗어가는 악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나의 과제곡인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1번의 악보를 받아 처음 쳤을때는 솔로와 반주의 조성이 틀려서 치면서도 이게 무슨 곡인가 했는데 클라리넷과 같이 맞춰보고 또 혼자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곡이라는 것이 느껴졌다.그래서 레포트를 쓸 때도 이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싶어 여러 음악회를 알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찾을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2번을 연주하는 음악회가 있어서 보러가게 되었는데 그 음악회가 예술의 전당 리사이트홀에서 하는 이승신 클라리넷 귀국독주회였다. 이 음악회를 보고나서 나의 반주가 얼마나 미숙한 반주였는지를 톡톡히 느끼게 되었다.처음 연주한 곡은 Darius Milhaud의 Duo Concertant pour Clarinette et Piano였다. 활기찬 느낌의 곡으로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주제선율이 번갈아 나오는 대화풍의 기법이 사용되어 반주라기 보다는 듀엣에 가까운 느낌으로 곡이 연주되었다. 내가 기악반주법시간에 해오던 반주와는 차원이 틀린 것을 첫 연주에서부터 느꼈다. 나는 반주를 할 때 솔로악기를 위해서 그야말로 ‘반주’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반주자는 클라리넷과 동등한 위치에서 소리에서도 뒤쳐짐없이 연주를 했다. 나는 행여나 클라리넷의 소리보다 크게 들릴까봐 조심스럽게 치는 경향이 있었고 이 부분에서 지적을 받았었는데 이 반주자는 정말 ‘거침없이’ 반주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두 번째 Arthur Benjamin의 Le Tombeau de Ravel이란 곡은 라벨의 느낌이 나는 곡으로 첫곡보다는 피아노반주가 내가 생각하는 반주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곡이였다. 음산하고 우울한 선율에서는 어두운조성의 코드진행으로 피아노 반주가 클라리넷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또 물방울을 표현하는듯한 선율에서는 스타카토로서 장난끼 있게 분위기를 잘 내어주었다. 이곡에서는 비록 피아노가 주제선율을 동등하게 진행하는 구성은 아니였지만 무엇보다도 피아노반주가 빛이 난 연주었던 것 같다.잠시 휴식시간후 Willson Osborne의 Rhapsody for Clarinet곡이 연주되었는데 이곡은 무반주곡으로 그 느낌이 매우 고요했다.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수 있는 Johannes Brahms의 Sonata for Clarinet and Piano in E flat Major, Op.120 No.2 가 연주되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연주하는 소나타 1번과 더불어 이 소나타 2번은 브람스가 자신이 존경하였던 Muhlfeld(클라리넷 연주자)를 위해 작곡한 생애 마지막 실내악 곡이다. 이곡은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위한 곡으로 피아노가 반주만의 역할로서보다는 듀오소나타의 성격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19세기 후반의 낭만주의 음악가인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고전주의의 전통적인 질서감각과 낭만주의의 자유로움을 공유하는 작곡가라 평가받는다. 그는 절제된 고전주의적인 형식미를 추구한 반면, 과감한 반음계주의를 사용한 낭만주의의 화성적 어법을 동시에 사용했다.브람스는 음악사에 있어 실내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관현악의 나이팅게일(The nighitingale of the Orchestra)'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클라리넷 악기에 상당한 매력과 애정을 보인 작곡가이며, 모차르트와 베버의 뒤를 이어 클라리넷 음악을 발전시킨 작곡가로 평가된다.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제1번 바단조 Op.120은 그의 생애 말년에 작곡된 곡으로, 그의 음악을 소규모 실내악의 편성 안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곡이다. 브람스는 이곡을 자신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리하르트 뮐펠트(Richard Muhlfeld, 1856-1907)에게 악보를 주었고 마이닝겐의 누이동생 저택에서 클라리넷은 뮐펠트가, 피아노는 브람스가 직접 연주하여 초연되었다.이 곡은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고전주의 소나타형식의 전통적인 구조를 지키며, 낭만주의의 풍부한 화성과 서정성을 지닌다.또한 브람스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독특한 양식에 화성과 리듬등이 특징적이고 원숙한 기법들이 반영되어 있어 큰 의의를 지닌다.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속에서 고전적구조와 낭만적 서정이 조화를 이루는 브람스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화성적인 특징은 조성에 있어서는 근친조의 범위를 넘어 이명동음 전조등의 조성으로 급격한 반음계적 조옮김을 하여 생동감있는 색채감을 보인다. 또한 빈번한 반음계적 화성진행, 부속화음, 증6화음등의 변화화음, 장단조의 혼용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직적인 선율사용에 있어서 3도, 6도등의 병행, 옥타브 중복의 선율을 선호하였다. 3화음을 각 성부에 빈틈없이 채워 풍부하고 격렬한 음향을 추구하여 브람스만의 독특한 음색을 자아낸다.브람스의 개성은 선율이나 화성에서보다 리듬의 측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브람스의 리듬사용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셋잇단음표로 선율을 강화하고, 반면에 당김음을 사용하여 격정을 완만하게 하는 기법이다. 둘째, 음표를 반복하여 길게 늘임으로써, 가락의 리듬을 변형시키는 기법이다. 셋째, 각자와 일치하지 않는 불규칙한 리듬을 사용하여 마디의 존재를 희미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각 악장의 주제는 화성과 리듬이 단순한 선율로, 반복과 클라리넷과 피아노 두 악기간의 응답을 통하여 주제선율을 전개하였다. 주제선율은 조성의 음계가 한층 단순해지며 전체적으로 경제적이고 압축된 구성을 이루고 있다. 각 주제간의 관계는 매우 밀착되어 있으며, 주제를 구성하고 있는 모티브의 활용은 곡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