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마 27:27~44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시키고 싶었으나 정치적인 권한의 문제로 인해서 사형을 실행하지 못합니다. 결국 당시 총독인 빌라도에게 가서 재판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재판이 아닌 일방적인 선고를 통해 예수님 입장에서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이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숙원 사업을 성취해내는 것이었습니다.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시키고자 했으나, 실제로 사형 권한을 가진 빌라도 앞에서는 신성모독이 아닌 ‘유대인의 왕’이라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꾸미는 자로 재판대에 세웁니다.이유는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국가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사회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한 노예를 처형하는 데 사용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사회질서를 훼손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인 사형의 권한을 가진 로마의 통치에 반항하는 자로 재판대에 세우면 더욱 확실히 처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십자가 처형은 잔인하고 고통스럽기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공포에 빠질 정도로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잔인한 방법을 통해 경고성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것이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막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선택한 방법입니다.십자가 처형은 단계가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처형 전에 이루어지는 채찍질과 고난을 모두 감당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 처형은 채찍질과 고난을 통해서 사람이 죽을만함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이 길어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를 죽이기 위해서 선택하는 방법입니다.십자가 처형 이전에 행해지는 채찍질과 고난의 강도가 너무 세서 대부분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리셔야 합니다.군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취급을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홍포는 왕이 입는 진홍색 왕복이며, 갈대는 왕이 들고 다니는 홀이며, 가시관은 왕관입니다. 이들은 왕처럼 꾸며 놓고 조롱하고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만족해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고, 그들은 조롱의 말을 던졌습니다. 40절 ‘성전을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42절, 43절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이러한 조롱 속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은 침묵하시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하십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 사명을 감당하시며,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몸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40절의 조롱 속에서 인간의 무지함을 발견합니다. 성전이 누굴 말하는지 모르니 ‘사흘 만에 헐고 짓는다’라는 개념을 애초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이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내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싹 쓸어 버릴 수도 있는 분이시지만 하지 않으십니다.42절의 조롱에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말을 하며 무지한 백성들에게 편승하여 메시아에 관해 연구하고 설명해줘야 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틀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백성들의 죄가 도말되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은 절대 안 내려오실 것입니다.43절의 조롱에서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예수님은 그분의 뜻을 확인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만이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예수님의 받으시는 조롱과 희롱, 모욕적인 언행은 누구 때문인가요? 바로 우리가 그렇게 조롱과 희롱, 모욕적인 언행을 받기에 합당한 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받았어야 했던 죄인이었습니다.그런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기에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지워 없애시기 위한 작전을 짜시고 수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책을 짊어 메시고 돌아가시는 것입니다.우리가 받아야 했던 십자가 앞에서의 희롱과 조롱, 모욕적인 언행과 가혹한 폭력을 우리는 단 1분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주님, 할만하신 게 아니라, 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옮겨주옵소서.’라고 소리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 준비[ 마 26:1~16 ]25장까지 감람산 강화에서의 사건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종말에 대한 경고와 인자가 오실 때 반드시 결산할 것이며, 결산을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게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당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길 소원합니다.24장 13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오늘부터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확증하시는 과정이기에 주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같이 하실 것입니다.26장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함께 시작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시나리오에서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잡아넣을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논의를 해보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을 것입니다. 어딜 가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약장수의 속임수에 끌려와 사기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로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당대의 최고 지식인, 종교인들과 담판을 벌이시는 모습을 경험했기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바로 며칠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해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였으니까요.그래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를 함부로 잡아넣지도,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이미 백성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세례 요한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었기에,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지명도는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입니다.5절에서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는 말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죽이고 싶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 일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게 번져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는가 봅니다.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할 때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정말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부분에서 담백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누가는 누가복음 22장 3절에서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여, 귀인을 만난 양 기뻤을 것입니다.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돈에 눈이 먼 가룟 유다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단돈 은 삼십, 30 세겔에 팔아 버립니다.계산해보면 1 세겔은 11.4그램, 30 세겔은 342그램, 돈으로 환산하면 약 91돈, 은 한 돈 시세가 4,260원, 그래서 은 30 세겔을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약 38만 8천 원 나옵니다. 그나마 이것은 살 때 기준이고요, 가지고 있는 것을 팔 때는 시세가 700원 더 낮아서 약 31만 원밖에 안 나옵니다.돈에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자기 스승을 채 40만 원도 안 되게 팔아 버릴까요. 출애굽기 21:32에서는 노예가 일하다가 소에 받쳐서 죽게 되면 소의 주인이 노예의 생명 값으로 주는 금액이 30 세겔입니다.예수님이 노예가 되어 무가치하게 당시 종교 기득권자에게 팔려 가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셔야 했습니다. 앞에서 율법상 일하다 소에 치여 죽은 노예의 생명 값이 30 세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소 주인이 소를 관리하지 못해서 이웃 노예가 죽게 되면 30 세겔을 주인에게 주게 되어 있고,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소를 반드시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노예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팔려 갔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죽을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가격을 지급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은 30 세겔에 팔려 가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이 예언의 성취대로 예수님을 노예 취급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그러니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염소와 같은 자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그들이 ‘영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미 심판하셨습니다.우리는 가룟 유다가 한 행동만 보면 너무 화가 납니다. 속된 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화가 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릅니다. 이런 반응을 보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나님의 자녀요, 의의 열매요, 의의 도구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그러니 우리는 불의의 도구가 아닌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을 해야 하며, 삶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사람들에게 덕이 되어야 함은 물론, 주님의 이름이 최소한 더럽혀져서는 될 것입니다.마태는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돌아가실 사건에 대해 기초 작업의 과정과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사람들과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마침 한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이 장면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나 봅니다. 그 여자를 향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야지”라고 하면서 여인이 경솔하고, 구제하려는 마음도 없는 무정한 여인으로 책망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최고로 칭찬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려고 하지 말고 자신들의 힘으로 할 것을 요구하시며, 이 여인의 행동을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해주십니다.그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인의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단지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기쁨을 만끽하는 행동이었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높아지길 원했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물론 공의회 회원이자 아리마대의 부자인 요셉이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리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절차상 아직 향유는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3일째 되는 날, 즉 부활하시는 날 몇몇 여인이 향품을 사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해서 갔을 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 마 23:29~39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내용입니다. 먼저는 29절~36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번째 저주하시는 내용이며, 37절~39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한 탄식인데, 이 부분은 병행 성경인 누가복음 13장에서의 위치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예고를 하신 이후에 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순서상 의미가 상통합니다.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저주하시는 내용이 점점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과 불법을 행하는 모습을 지적하신 후에, 그들이 했던 종교 행위에 대해서 악하다고 정죄하셨습니다.예수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32절에서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죄악상을 지금도 여전히, 앞으로도 이어갈 것을 비난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렘 7:25(“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이자,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더불어 오늘 본문에서 의인 아벨과 역대하 24장에 등장하는 사가랴의 죽음까지, 주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끊임없이 죽이는 유대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죄악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과거와 현재였으며, 앞으로도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죄악의 열심을 완성하는 듯 보입니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외식하는 것이 몸에 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의 무덤을 비롯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들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발뺌을 했습니다.30절에서 자신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으나 자신들이 만약 그 시대의 사람들이었다면 조상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조상의 죄악과 연관 없음을, 자신들은 거룩함을 강조합니다.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파훼하십니다. 30절에서 선지자들의 죽음이 자신들의 조상 때 있었던 것을 인정했기에 그들은 결국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증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조상이나 너희들이나, 너희의 과거나 현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오히려 너희 죄악의 분량을 채우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종과 선지자들을 죽였던 조상들과 같이, 아니 더욱 악함으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 열심을 냈으며, 결국 성취해냄으로 32절의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합니다.예수님의 독설과 저주는 33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이전에도 자기 종과 선지자를 통해서 37절 말씀처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하셨습니다.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는 선지자, 지혜 있는 자들, 서기관들을 보내더라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스토커같이 따라다니며 박해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있기에 33절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의 피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더럽혀졌습니다.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으로 회개와 은혜를 허락하고자 하셨으나 그들은 끝까지 부인합니다.결국 그들은 모두 황폐하여 버려질 것이며,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믿으며 기다렸던 자들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찬양하며 경배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그의 권위와 심판의 무게 앞에 무기력한 자, 죗값을 치러 지옥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것은 굉장한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선택되어 하나님을 믿게 하셨다는 것은 큰 은혜이지요. 그러나 그 은혜는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이라고 하는 책임감을 동반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분이 달라졌기에 세상에 허점을 보이면 안 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이긴 하나 대충 살아가길 원하고, 영적으로 게으른 자들이 되어 자녀 된 기쁨만 누리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마 26:57~68 ]우리는 가끔 예배 시간에 말씀 봉독 후에 ‘아멘’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이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난에 관한 말씀인데 감히 아멘이라고, “네~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습니다”라고 하기에 마음이 불편합니다.빌립보서 1장 29절, 30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구원만이 아닌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이시기에 더욱 그렇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 후반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30절 말씀처럼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싸우신 영적 전쟁을 치러내야 합니다.그러니 오늘 말씀을 모두 읽고 난 이후 그리스도의 육체적, 정신적 고난에 ‘아멘’하심으로, “주님 우리도 그 고난에 동참하길 소원합니다. 그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지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영광 돌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잡혀 가심을 보고 (56절)“예수를 버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도 예수님 앞에 특별히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여서 그런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며 재판이 이루어지는 대제사장의 집까지 쫓아갑니다.여러분, 기억하시죠? 이 베드로는 단 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셨을 때 자기는 (35절)“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었던 자입니다. 예수님의 실제적인 고난에 직면하게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망가버립니다.심지어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 백성들의 장로들, 그들에 의해 청부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자신의 단호한 믿음을 보여주려고나 한 듯이 예수님의 행적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칼을 뜬금없이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리죠. 그랬던 베드로가 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잡혀가심을 바로 옆에서 직면한 베드로는 겁이 많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잡혀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가 설명됩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멀찍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안에 거리상의 개념도 있지만 두려움에 대한 뜻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 두려움은 ‘점점 크게, 심히 두려워하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그러니 베드로가 왜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지켜보기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직전에 몇 차례에 걸쳐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하셨기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도망가지도 못하고 멀리서라도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죠. 마치 상관없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연기하면서요.심장이 심히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는 예수님이 어떻게 될까 봐 두근거렸을 겁니다. 몇 시간 전처럼 패기 있게 칼을 뽑아 들고 예수님을 구하러 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 봐 그는 마음이 두근거려서 힘들었을 것입니다.빌립보서 1장 29절, 3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면서 우리도 베드로와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길 원합니다. 아니, 그 기쁨 안에 있다고 안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예수를 통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다고, 안타깝다고 말을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기쁨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는 너무도 인색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주님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죠. 그런데 이처럼 거리를 둘 때 원칙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실까 봐 그렇게 하면 안 사이기에, 장로와 목사이기에 우리는 체면을 구기면 안 되는 차원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모범적인 신앙인’으로서 남게 됩니다. 가식적이거나 외식적이지 않으면서도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도 않는 중간자적인 입장, 애매한 위치, 그럴싸해 보이는 신앙인으로 남길 원하는 것이죠.왜 이런 상태가 될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베드로의 모습에서 답을 찾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의 기쁨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이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빠지게 되지요.그래서 이 선물을 풀어 볼 때 모든 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죄를 씻어 주심을 감사하다고 눈물, 콧물 다 짜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물의 포장을 다 뜯고 나서입니다.선물의 포장을 막상 뜯고 나니, 받을 때는 엄청난 기쁨과 은혜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어서 (박목사의 경험상) 지나가던 차에 부딪혀도 살 것 같은 풍성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선물 상자 한쪽에 같이 포장된 ‘희생, 헌신, 봉사, 고난’ 등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이면의 세계를 만났을 때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겨낼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부딪힘으로 괴로워하게 됩니다.이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설 때 그리스도인은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될 텐데, 넘어서지 못할 때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타협’입니다. 적당히 거리 두면서,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에게도 비난받지 않으면서 그들과 동화되어가고, 교회에 있을 때는 동역자들과 이질감과 괴리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이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은 신앙과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답을 찾은 사람은 괴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엔크리스도(?ν Χριστ? / in Christ)’-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면서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과 같은 속사람고 생각하시나요? 경각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 내지 못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소리를 들으세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6)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권면하시죠. 둘 중의 하나를 하라고. 이 말은 차가운 신앙을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죠?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입니다.주님은 우리가 뜨거운 신앙생활을 갖길 원하십니다. 베드로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두려움에 떨며, 그리스도인도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을 부인하는, 이도 저도 아닌 괴물 같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십니다.오늘 본문 59절 이후 68절까지 나오는 자들이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당대의 모범적인 신앙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들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내가 복음’을 만들었던 자들이, 성전을 더럽히고 성도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기 배 불리기에 정신없었던, 그렇게 신성모독을 밥 먹듯이 행하던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보다 더 나아가 걷어내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하고자 모였습니다.희한한 재판입니다. 증거와 증인을 가지고 죄를 증명해야 하는 것인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아 왔습니다. 이렇게 무작정 잡아 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들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음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흔들어놨기 때문입니다. 교회 위에 자신들의 권위를 세워놨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애초에 그들의 권위는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눈에 가시를 넘어서 반드시 뽑아내 버려야 할 악성 잡초 같은 존재이겠지요.60절에서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어도 예수님에게서는 혐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요? 그게 실제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증거로 가지고 온 것들, 증인으로 나서서 님은 너무도 쉽게 하시면서 백성들의 목자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니 거짓 증인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아니 떠들면 떠들수록 예수님의 정당함과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증명할 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신성모독은 있을 수가 없지요.결국 그들 중 수괴(두목)가 나섭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증명하라고 난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는 증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으나, 이 대제사장의 도발에는 반응을 보이셔야 했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이루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감옥에 가두길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신성모독 죄명을 통해서 사형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지만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인류 죄사함을 성취하셔야 하기에 그들에게 반응을 보이십니다.66절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너희 눈에 보이는 내 겉모습을 보면 인정하기 힘들지? 그런데 반드시 내가 다시 올 때가 있을 텐데, 그때는 누가 봐도 하나님의 아들로, 심판주로 이 땅에 올 것이다”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에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분노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형시키기에 충분하니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67절과 같이 육체적인 고통, 68절과 같이 정신적인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괴롭힙니다.우리는 ‘자기 옷을 찢으며’ 분노하는 대제사장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에서 소개된 자기 옷을 찢는 행위는 감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옷을 찢는 경우와 회개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취한 행동이었습니다.대제사장이 옷을 찢은 이유는 감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이며,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고 니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반응[ 마 27:45~61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인간의 죄 용서를 위해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립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부터 총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는 중입니다.지금 예수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치가 넘는 고통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채찍질로 살이 터지고 찢기고, 찍혀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절대로 쓰러질 수 없었으며,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그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손과 발을 관통하는 커다란 못에 의해서 온몸이 고통으로 전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절대로 쓰러질 수 없었으며,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을 대적하고 있는 모든 사람,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아주 간단히 역전 시켜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그분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모진 고통과 가혹할 만한 폭력을 모두 온몸으로 받아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이 받지 않으시면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모두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로 인해서 자신과 멀어진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사랑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너무 불쌍한 나머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어린양의 제물로 희생함으로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육체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가운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육체적인 한계를 견뎌내셔야 했고,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영적인 고통도 견뎌내셔야 했습니다.이 모습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을 버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들의 죗값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 삼아 번제로 불태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들은 끝까지 무지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라는 발음 때문에 그랬는지, 엘리야를 찾는다고,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고 하는 무지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가장 강력한 구원의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가장 절정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무지한 인간들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욱 확실히 알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이 인간들이 얼마나 무지하냐면, 예수님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분의 숭고하신 사랑의 순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구원하는지 보자니요. 이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낱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한다고요? 논리적이지 않은 이 말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무식함을 증명하는 행동이었습니다.예수님의 호흡이 흐려집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둔해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직감하시고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7마디의 말씀 중에서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는 50절에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이 땅에서의 십자가 사역을 마무리하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반응하였습니다. 땅과 바위가 반응합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백부장을 비롯한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반응을 보였습니다.첫 번째 반응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현상은 더 이상 성전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물로 드리는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더 이상 동물 제사가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임재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의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들과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무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두 번째 땅과 바위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남으로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1절의 바위는 52절의 무덤을 막고 있는 바위로, 그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에 있는 자들을 무덤에서, 죽음에서 해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