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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세전`을 통해 본 주체와 이데올로기 평가A+최고예요
    『만세전』을 통해 본 주체와 이데올로기Ⅰ. 서론Ⅱ. 『만세전』에서의 주체Ⅲ. 『만세전』의 주체와 이데올로기Ⅳ. 결론Ⅰ. 서론주체와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이해하고 작품과 연관시키기 전에 담론에 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담론이란 실제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발화된 언어와 그 발화의 방법을 의미한다.) 담론은 일상적 대화와 그 맥락뿐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씌어진 의사소통을 가리키기도 한다. 담론은 사회적 실천행위라는 차원에서 어떤 발화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발화의 형태는 그 의도에 따라 구별되기 마련이다.)주체와 이데올로기를 1920년대의 작품인 『만세전』에서 살펴보려고 할 때 주체의 위치나 사상 등을 언급하려면 이러한 담론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명확히 하고자 했고, 이를 바탕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알튀세는 주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 자유로운 주체, 일을 주도해가는 중심체, 행위의 장본인이자 행위에 책임을 지는 장본인, 둘째,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고, 그래서 자신이 행하는 복종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말이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모순되는데, 이를 알튀세는 정신분석학과 라캉의 ‘상상단계’라는 개념에 의거하여 설명한다.)라캉의 상상단계는 생후 6개월 내지 18개월 된 어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유래된다. 어린아이는 처음에 손이나 발 등의 부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상상계에서 보는 모습은 허구일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상상계에서의 주체성이란 결국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알튀세의 주장에 바탕을 두면 주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라캉의 ‘상상단계’에 의하여 설명되는 주체의 개념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허구로 보고 그 허구적인 모습을 주체라고 인식한다. 이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상을 『만세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품에서 주체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작가의 살아온 환경이나 역사적 배경 등은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알튀세가 정의한 ‘주체’의 개념에 의거해서 작품의 ‘이인화’를 보면, 동경에서의 지식인 유학생 이인화는 자유로운 주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식인 이인화는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하고, 그래서 자신이 행하는 복종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보여질 수 있다.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할 때, 동경에서의 이인화의 모습을 간단히 ‘자유로운 주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동경에서의 그와 조선에서의 그를 둘로 정확히 나누어 두 의미에 대입시키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이인화의 모습을 놓고 이렇게 이야기하고자 했다.『만세전』에서의 여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는 유학생 이인화의 내면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다. 이인화가 7년만의 귀로에서 확인한 바는 근대화, 도시화라는 명분 하에 착취당하고, 감시당하는 이 나라의 현실이었으며, 자신은 그 덫에 걸렸다는 것이다. 조선 땅의 곳곳에서 일제에 의해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지고 인권을 침해하며 대다수 민중은 의식 없이 식민지 종주국 일본의 정책에 호응하여 경제적 이익을 꾀하는 등의 변화를 오랫동안 조국의 현실에서 격리되었던 동경 유학생의 시선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이인화는 아내가 산후 유종으로 임종을 앞두어서 시급히 귀국을 해야 함에도 생명의 문제, 존재의 문제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경 시내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인화는 불안한 마음으로 거리를 배회하다 카페에서 아는 여자와 술을 마시기도 하고, 전차에서 내린 노동자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동경 시내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동경은 매순간마다 특별히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당시의 현실 때문에 결혼을 했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이 야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내 때문에 서울로 가는 것은 인사치레나 체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무의식에서의 자신의 생각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미루게 되고 일본에서 역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동경 유학생 이인화, 냉소적인 지식인 청년에게 일본 생활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기 위한 도피였으며, 이인화는 조선에 돌아와서 겪는 일들 덕분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이러한 이인화의 모습은 비단 이인화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 유학을 떠났던 지식인들이 자신들에게 개화의 길을 열어준 매개항으로서의 일본, 새로운 문명개화의 세계로 동경해온 일본이 무서운 지배자로 변해 버린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온다. 일본에서 말로만 듣고 생각했던 조선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또 일본에 의해 통제당하는 모습과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변해버린 조선의 모습에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유학생들은 제국주의 식민지 착취 구조 속에서 힘겹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그야말로 운명의 개인이 된 채로 조선에 돌아오게 된다. 1920~30년대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만세전』의 이인화와 비슷한 인물들을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염상섭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지식인 젊은이와 도시의 관계에서 소수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한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만세전』의 이인화는 당시의 지식인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망각할 수 있는, 조선의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일본에서의 그의 모습과, 일제의 지배 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에서의 그의 모습, 그리고 돌아오기까지의 갈등과정에서 보이는 지식인의 이중성,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변해버린 조선의 모습과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인화가 느끼는 감정, 혼란 등을 통해 주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Ⅲ. 『만세전』려고 했으며, 그렇게 하면서 개개인을 “그들이 경제적 범주를 인격화하고, 특정한 계급관계를 구현하는 한에서만” 다루었다고 본다. )또 알튀세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형성체로 구성되는 그런 주체성이라는 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또 그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에 대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는 재생산을 그리고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정확하게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의 재생산”을 응당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행가의 딸이니, 자동차 수리공의 아들이니 하는 식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미 할당되어 있는 위치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개인으로 태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말하자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이론을 중심으로 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만세전』에서 언급해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볼 때, 이인화는 동경 유학생으로 등장하고, 이인화의 형은 작품에서 교육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인화의 아내와, 유부남의 경제적 지원에 의지하는 타락한 신여성의 모습이 보인다.『만세전』에서 이인화의 형은 김천이 도시 계획이 진행되는 것을 이용하여, 토지로 거대 자본을 형성하는 식민지 정책의 적극적인 수행자이다. 선생으로서 첩을 얻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버는 인물을 통해 교육자의 부도덕한 측면과 자본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근대의 모습을 고발한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을 기회로 활용하는 인물인 이인화의 형은 식민지 국가의 백성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으며, 경제적인 부의 획득을 통해 욕망을 실현하려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감각만이 발달해 있다. 김천의 형이나 아버지의 경우 실제로는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하면서 겉으로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거나 봉건적인 삶의 태도를 고수한다.식민지 초반 중산층의 삶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만세전』의 인물들은 적당히 사회 변화의 기회를 이의 모습을 볼 수 없이 초라해졌고, 거리 밖으로 쫓겨난 듯했다. 대도시 부산에 생긴 일본식 이층집 유곽에서는 젊은 조선 여자들이 몸을 팔고 전차와 자동차도로는 일본과 조선을 왕래하며 사업을 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와 생활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온돌 대신에 들어선 다다미가 있는 일본 집은 조선인들의 의식을 변질시키는 단초이며, 작가는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변질되는 부산의 외형을 통해 변화의 이면에 숨어있는 어두운 부분을 제시한다.『만세전』에서 지방 중소도시 김천은 민족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우려도, 근대화에 대한 엄격한 인식도 없는 보수적인 인물이 거주하는 곳으로 별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식민지화가 이루어지는 지방의 현실을 보여준다.식민지 당시의 변화된 조선의 모습을 이인화의 눈을 통해 보여주면서 일본에서 조선의 상황에 대한 고민을 배제한 채 유학하였던 모습과, 조선에 돌아와 느끼는 식민지 지식인,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통해 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윤리의식을 느끼는 주체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알튀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이해하면서, 그렇다면 『만세전』에서의 이인화는 어떤 사회적 위치를 하고 있으며 이를 구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던 것일까? 이것은 이인화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고, 이인화의 가족들, 그리고 1920년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물음을 던져볼 수 있었던 내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이인화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조국의 현실에서는 이방인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 이인화가 그렇고, 그의 형이나 아버지 역시 교육자의 부도덕한 측면과 거대한 자본을 형성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신여성들에도 해당되는 말이다.이미 사회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인데, 제 3자가 되어 조국을 바라보는 듯한 생각이 들고, 직접 돌아와서 조국의 현실을 보고서야 혼란이 오는 이들의
    인문/어학| 2010.04.12| 8페이지| 2,000원| 조회(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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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 유정
    『유정』은 1933년 춘원이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10월1일부터 12월 31일까지 同紙에 연재한 작품이다. 흔히 이광수 문학연구에서의 대표작을 과 정도로 꼽는다. 그러나 “외람된 말이지만, 만일에 내 작품 중에서 후세에 끼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정』일게요. 그리고 또 외람한 말이나 외국어로 번역될 것이 있다면 그 역시 『유정』이라고 생각해요.(중략) 『유정』 속에 자연묘사에 이르러서는 나는 상당히 힘을 들였소이다.”라고 이광수는 말한다.또 이광수가 신문 연재를 앞두고 1933년 9월 22일에 조선일보에 발표한 자작의 辯을 보자.나는 인생 생활을 움직이는 힘 중에 가장 힘있는 것이 인정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높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도 인정인 것을 믿습니다. 돈의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군대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인정의 힘으로 할 수 있을만큼 인정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순전히 정으로만 된 이야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사랑과 미움과 질투와 원망과 절망과 회한과 흥분과 침을 등등, 인정만으로 된 이야기를 스고 싶습니다.최석이라는 지위있고 명망있고 양심 날카로운 중년 남자와 남정임이라는 마음 깨끗하고 몸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의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인정의 슬픈 이야기를 써보자는 것이 이 『유정』이라는 소설입니다.나는 二十二,三歲의 도무지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열정에 타는 어리던 시절로 돌아가서 열정이 쏟는 대로 이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물론 작가의 애착이 작품성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인정의 슬픈 이야기”를 “열정이 쏟는대로”) 쓰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주제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얼마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한용환의 경우, 「有情」의 주인공과 「사랑」의 주인공을 비교하며 「사랑」의 석순옥이 사랑의 이상에 복종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최석은 그것과 투쟁하는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작품에서의 정임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으나 외모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여주인공 남정임의 성격은 수줍은 듯하지만 사실은 정열이 강하고, 자기의 생각을 현실적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의지력이 있다고 보여진다.그리고 최석은 정임에 대한 사랑을 자기의 정신력으로 제어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며, 현실적으로 어떠한 부도덕적인 행위를 극히 피하려고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러했다.최석과 정임은 아버지와 딸과 같은 위치에 서기 때문에 『유정』에서 남녀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서로 사랑해서는 안되는 관계이다.『유정』의 최석의 이야기가 왜 일인칭 서술자 의 이야기 틀 내에 배치되어야 했을까? 작품의 2/3 이상이 최석의 일기와 편지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로 최석의 서사 자체에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왜 최석의 서사는 그 자체로 만족하지 못하고 일인칭 서술자인 의 서사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유정』은 최석의 편지와 일기를 다루는 서사와 일인칭 서술자 가 이끄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고, 본고에서는 크게 최석의 서사와 의 서사로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우선 작품 『유정』의 플롯)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사건발단시베리아로 도피(逃避)해갔던 최석이 친구인 에게 편지를 부쳐온다. (도입부)최석이 어린 정임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처음 만난다.최석은 아버지, 정임은 딸에 해당하여 그들 사이의 신분의 차가 크다.장성한 정임이 동경유학을 떠난다.전개동경에서 정임이 발병하여 입원하였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최석이 도일(渡日)하다.정임의 나쁜 병실을 가장 좋은 병실로 옮겨주는 조처를 취해준다.정임의 동급생 김의 모략으로 정임과 최석이 간통하였다는 거짓말이 최석의 아내 귀에 들어가다.이에 최석의 아내는 질투에 불타 이성을 잃게 된다.가정파탄이 생기고 최석은 가정과 학교, 교회에서 배척받게 된다.최석이 학교에 사표를 내다,절정가정을 정리하여 재산의 처리를 마친다.최석은 가정을 출분(出奔), 동경을 거쳐 시베리아 행한다.시베리아의 삼림지대에서 자신과 격렬한 투쟁을 하는 최석.신에게 의지하려고 하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병중의 정임이 서울을 거쳐 시베리아로 최석을 찾아 나선다.험난한 여로 끝에 정임 일행이 시베리아에 도착한다.대단원그러나 폐렴에 걸려 신음하던 최석은 정임이 도착하기 직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정임은 시신이 된 최석과 상면한다.최석의 장사후 일행은 귀국하나 정임은 그대로 남는다.바이칼 호반의 마을에서 정임은 죽음을 기다리며 혼자 살아간다.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유정』은 일인칭 서술자인 가 최석과 정임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최석의 편지와 일기가 작품의 2/3 이상을 차지하면 그것이 가 이끄는 서사와는 독립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최석의 서사와 가 이끄는 서사를 나누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1. 의 서사 플롯의 서사는 스스로 남정임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에게 보면 편지와, 그기 죽기 직전에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고백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기 때문에, 최석은 사실상 자신의 경험에 대한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편지에 나타난 서술시간을 보면, 정임을 데려와서 기르다가, 가족과 학교로부터 정임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교장직을 그만두고, 동경에서 마지막으로 정임을 만나고, 만주를 거쳐 바이칼호에 이르게 되는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정리하자면 최석의 편지는 연대기적인 시간질서에 따라 정연하게 배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최석의 의지적인 행동과는 다르게 무의식적으로 분열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편지에서 부각되었던 의지적 측면과는 다르게 마지막의 일기에서는 무의식적인 내적 기질에 대한 토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최석이 궁극적으로 택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최석에게 “혼자 깨끗하게 이 생명을 마치게” 해주는 “구원의 손”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최석의 편지는 의식과 무의식 서사간의 은밀한 대립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최석의 일기는 죽음을 그 해결책으로 선택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도덕적 의지와 내적 기질이 서로 양립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대립 구조는 최석이 자신의 내적 기질과 의지적 행동 사이에서 자신의 적절한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분석적인 도덕논리로는 그 자신의 개인적 열정이 도덕적으로 용납될만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2. 서술자 의 서사 플롯의 서사는 일인칭 서술자인 가 최석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도입부분에서 시작하여, 일년전 최석의 편지를 받고 그것을 가족에게 보여주어 그들의 오해를 푼다. 서술자 는 최석을 찾으러 떠난 정임과 최석의 딸 순임의 뒤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나고 거기서 최석의 죽음을 통해 최석과 정임의 비극적인 관계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까지 서술한다. 그리고 그들에 관한 오해를 풀라고 독자에게 당부를 하고 마무리 짓는다.
    인문/어학| 2010.04.12| 4페이지| 1,000원| 조회(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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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이광수의 「民族改造論」1. 서론2. 연구사검토3. 민족개조론에 대하여4. 결론5. 참고문헌1. 서론『민족개조론』)은 변언(弁言)으로 시작하여 본론, 결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본론은 다시 上, 中, 下로 나뉜다. 上은 민족개조의 의의와 역사상으로 본 민족개조운동의 실례와 갑신이래의 한국의 개조운동을 말하고, 中에서는 민족개조는 도덕적일 것과 한국민족의 개조는 절대로 긴하고 급하다는 것과 민족성의 개조의 가능성을 말하고, 下는 민족개조의 내용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연구사 검토에서는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신일용의 ‘춘원(春園)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평(評)함’과 신상우의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독하고 그 일단을 논함’, 정명환의 ‘이광수의 계몽사상’, 비교적 옹호하는 입장에서 바라봤다고 생각되는 김경석의 ‘민족개조론독후감’과 안병욱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 최근의 연구로 김형국의 ‘1920년대 민족개조론’과, 전승주의 ‘이광수와 민족개조론’ 부분을 검토하고자 한다.그리고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도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여 그와 관련된 영향관계나 이광수의 작품 등과 연결시켜 바라본 시각도 많이 있지만,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것은 이광수의 논문 ‘민족개조론’의 내용에 국한시키고자 했음을 밝혀둔다.2. 연구사검토사회주의 운동가인 신일용의 ‘춘원(春園)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평(評)함’)과 신상우의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독하고 그 일단을 논함’) , 정명환의 ‘이광수의 계몽사상’), 김경석의 ‘민족개조론독후감’), 안병욱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김형국의 ‘1920년대 초 민족개조론 검토’), 전승주의 ‘이광수와 민족개조론’)을 중심으로 연구사 검토를 하고자 한다.신일용은 ‘춘원(春園)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평(評)함’의 서두에서 개조(改造)라는 말은 엇드케 해석(解釋)해야 적당할넌지라고 말하면서 평을 시작한다.신일용은 민족성의 개조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이다. 순수하대사조의몰이해자, 2. 자유의의의불지자, 3. 근세역사에 맹목자라고 단정짓는다. 2. 자유의 의의 불지자에 대해 신일용은 앵글로 색슨 족의 자유가 실용상의 자유라는 춘원의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론 없는 실제는 무계획적이고 무목적한 무의식적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영국민이 단체를 위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는 생활상태는 춘원의 주장의 반론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전자와 후자를 연결시킬 수 있는지 억지스럽다. 그리고 영국의 경제적인 통계를 객관적인 자료(자본주의 국가에서 소수에게 편중되는 부의 퍼센트)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 역시 춘원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일 뿐이지 명확하고 객관적인 근거로는 여겨지지 않았다.김경석은 글에서 민족을 개조함에는 민족성의 근저인 도덕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춘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본인도 가장 힘차게 외치는 바라고 강하게 말한다. 그리고 춘원의 개조는 가능하다고 한 것에는 동의하지만 가장 용이하다고 단언한 것은 너무도 경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민족개조사업이 백년 이백년의 영구한 사업이요, 선각자의 뜨거운 정성과 끌는 땀과 우리의 피와 기름과 살로야 어찌 이를 곤란한 사업임을 이를 용이하다고 단언하느냐고 말한다. 또한 김경석은 개조의 내용에 대해 삭제할 것은 없지만 위생과 운동을 체격의 개조로 위생과 운동에 힘쓴다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새롭고 우수한 민족을 창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느끼며 개조주의의 내용에 너어 실행케 하지 않음이 유감이라고 말한다.이러한 김경석의 주장은 춘원의 그것에 비해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도 지적될 바이지만, 이는 춘원이 개조의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김경석은 개조의 방법제시에 있어서 종교(특히 기독교)의 정신과 주의를 전파하고 타락된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주장하고 있다. 김경석은 춘원의 ‘민족개조론’에 대해 옹호하는 듯한 투로 이야기하면서 춘원의 글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안실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문학적인 입장에서 신문학을 개척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이다. 그는 ‘무정’과 같은 신문학으로서 최초의 장편소설을 썼고 또한 단편소설도 개척했거니와 동시에 그는 신문학의 이론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었다”) 춘원의 ‘신문학의 개념’이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백철이 말했던 것처럼, 정명환도 그의 계몽사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갖지만, 초기의 이광수의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바이다. 이는 정명환 뿐만 아니라 ‘민족개조론’을 비판하고 있는 다른 연구자들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정명환은 이광수가 민족을 위하는 길과 정치적 현실을 구분해서 생각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하등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다만 문제는 정치적 현실을 넘어서서 베풀어진 혼란과 모순에 가득찬 이 선각자의 갖가지 변언이 1920년대까지는 무비판적으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고 이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긴다. 첫째는 대결과 비평 없이 사상이 받아들여진 당시의 풍토는 이광수 자신으로 하여금 신사상의 메씨아로써 군림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또한 그의 내부에 있어서 서로 융합되기 어려운 제개념과 이념이 충돌 없이 공서하는 것을 가능케 해줌으로써, 그의 무근거한 낙관주의를 길러주는 동시에 계몽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비 발전되는 길을 가로 막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광수와 독자사이에는 단순히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만이, 즉 일방적인 수용관계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식수준이 지극히 낮은 독자=피지배자에게는 그 무질서한 단편 하나하나가 신문명을 위한 계시의 언어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것을 존속시켰다는 마이너스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이광수가 친일을 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정명환의 말처럼 이광수와 독자 사이에는 교육자와 피교육자만의 관계였을지는 모르겠었는지도 궁금했다. 이 부분은 필자가 무지한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과격한 표현을 쓸 정도의 강력한 주장이라면 개념 정의와 근거 제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신상우는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독하고 그 일단을 논함’에서 우선 개조가 용이치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춘원이 ‘무지몽매한 야만민종이 자각업시 추리하야가는 변화와 같은 변화외다’라고 기술한 것은 어떤 신념과 관찰과 증명으로 공론적, 정평적으로 인쇄하여 책으로 만들어 조선민족에 공(公)한 것인지 묻고 있다.그리고 신상우는 논문에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없시추리하야가는 변화와 같은 변화’라 쓴 것에 대해 조선민족의 도덕적생활, 국가적 생활,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사적인 것을 조목조목 의견을 말하면서 무지몽매한 야만인이 아니라 서론부터 결론까지 일관되게 말하는 것 같다. (이는 결론부분의 파손으로 인해 이렇게 정리하였다.)본인도 ‘민족개조론’의 민족성의 개조는 용이하다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민족성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민족성 개조의 용이성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신상우의 주장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춘원이 선택한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부분에 대한 근거를 찾는 것에만 지면을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김형국의 경우는 ‘문화주의와 민족개조론’이라는 제목에 ‘민족개벽론’(이돈화, 김기전), ‘민족문화와 민족개조론’(안확), ‘민족심리학과 민족개조론’(이광수)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이 세 부분을 구별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 민족개조론은 개조사상의 한 유형으로 한국 지식인들에게 수용되었던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세 부분으로 나누었던 것처럼 개조의 방법, 서구문화에 대한 지향성, 개조의 주체와 대상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출된다고 보고 있다. 이광수와 이돈화는 서구의 정신과 문화를 개조요 조직적인 변경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이라 하였다.역사상에 나타난 민족개조운동에서는 소크라테스는 매일 아테네 청년이 많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 대화법을 응용하여 첫째, 청년이 가진 사상이 그릇됨을 자각케 하고 정의와 奉公(봉공)의 개념을 주립하기로 일을 삼았다. 이렇게 매일 1, 2인씩 접하여 일생동안 아테네 민중의 사상을 개조하여 하였다. 그는 독약을 마시는 날까지 민족개조사업에 진력(盡力)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실패했다. 그가 단체를 깨닫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이러한 단체가 왜 그런 위력이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신사상을 받은 신인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그 환경에 처하여 그 사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다. 둘째, 동사상을 표방하는 다수인의 언어나 행동의 일치로 세상에 드러나서 유력한 선전의 효과가 있는 동시에 단원 자신에게도 일종의 자부와 자신이 생김이다. 셋째, 다수인의 능력과 학식과 기능과 금전을 모두어 위대한 세력으로 그 사상의 향상과 실현에 관한 사업을 경영할 수 있음이다. 넷째는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단체의 생명은 무한하여 영구히 그 사상을 보존, 선전, 실현의 사업을 경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 방법을 채택하였더라면 그의 이상인 아테네인의 구제를 성취했으리라 단언한다고 말하고 있다.中에서는 ‘민족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의 개조는 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는 얼마나 시간을 요할까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민족성의 개조는 가능한가’에서 춘원은 우선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는 르봉박사의 설을 근거로 하여 설명한다. 근본적 성격은 좋지만은 부속적 성격이 좋지 못한 경우와, 근본적 성격 자신이 좋지 못한 경우의 두 가지를 말하면서 조선인의 근본적 성격에 대해 한문식 관념으로 말하면 仁과 義와 禮와 勇이고, 현대식 용어로 말하면 관대, 박애, 예의, 엄결, 자존, 무용, 쾌활이며), 이러한 성격이 잘못 발휘되어 나타나는 결점이 허위와 나타다.
    인문/어학| 2010.04.12| 10페이지| 2,000원| 조회(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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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동자문답`과 야뢰 이돈화의 `도척
    「공자동자문답」과 야뢰 이돈화의 「도척」1. 서론2. 이돈화와 「도척」3. 「도척」에서의 4. 「도척」에 나타난 이돈화의 사상적 영향5. 결론6. 참고문헌1. 서론 전승에는 공자는 깎아 내리고 동자는 내세워서 성인의 편재성을 입증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결국 이 유형은 전혀 예기치 못한 존재를 통해 기존의 이념의 비판하고 일상적 지혜를 우의하는 의사성자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국문본에서는 다시 공자가 동자의 재치를 인정하고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성인다움의 풍모를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이는 을 하나의 서사체로서 수용해 온 한국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명권 중간부에 처해 있는 한국의 서사 향유층은 반공자 의식은 크지 않지만 숨어 있는 지혜에 대한 대안적 의의는 오히려 강화시켰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도척」은 이돈화가 잡지와 신문에 연재한 녹음량화(綠陰凉話)이다. 이돈화는 근대적 계몽가로서 천도교 이론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잡지와 신문에 같은 작품을 중복 연재하였다. 전체 구조는 『장자?도척』편의 줄거리를 공자의 일생과 관련시키면서 도척과 공자라는 두 주인공을 대비한 것이었고, 그 중간 과정에 공자와 동자의 문답을 끼어 넣은 것이다. 여기서 동자는 도척의 등장에 앞서서 공자의 자본주의가적 태도를 비판하는 숨은 지혜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상감상문 3편도 이 같은 사상적 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朝鮮農民」에는 이돈화의 「도척」에 대한 감상평이 “도척비평당선논문”)이라는 이름으로 세 편 실려 있다. 먼저 ‘盜?一篇을 읽고’에서는 4가지의 인물을 통해 공구의 부정적인 모습과 도척의 긍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盜?과 孔丘의 思想可否’에서는 공구의 사상이 세상을 건지는데 합리치 못하다는 것과 동시에 도척의 사상도 可하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盜?의 讀後感’은 도척의 사상을 시인하며 공구의 사상을 배척하는 입장이다.「朝鮮農民」의 “도척비평당선논문”) 중 ‘盜?一篇을 읽고’에서 황승봉은 “도척은 세상을의 이돈화는 야뢰(夜雷) ·백두산인(白頭山人) ·저암(猪岩). 도호(道號) 두암(豆菴)이라는 호를 갖는다. 1902년 동학(東學)에 가입하여 천도교 회지인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 사원이 되고, 19년 손병희(孫秉熙) 등이 일제에 의해 감금된 후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靑年敎理講硏部)를 만들어 교세확장에 앞장섰으며, 20년에는 천도교청년회로 개편 조직했다.잡지 『개벽』을 창간하여 편집을 주재하면서 1926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회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전개와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했다. 1923년 김기전 · 박내홍 등과 천도교청년당을 창당하고, 후에 천도교의 지도관장(知道觀長) ·대령(大領) ·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 ·장로(長老) 등을 지냈다.이돈화는 1910년 8월에 창간하여 1938년 9월에 폐간된 『천도교회월보』에 180편 가까운 글을 발표했다. 천도교를 선전하거나 새롭게 해석하고, 다른 사상과 연결시켜 근대적이고 세계지향적인 종교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힘썼다. 또 『개벽』의 창간을 주도하여 1926년 8월호 통권 72호로 폐간될 때까지 계속 편집인을 맡아 많은 글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계와 사상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이돈화는 『개벽』 종간 직전의 1926년 4월호로 창간하여 해방 직전인 1945년 1월로 일단 중단된 『신인간』의 발행인과 편집인을 계속 맡음으로써 명실공히 천도교의 대표적 이론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다.주요 저서로는《인내천요의》, 《수운심법강의》,《신인철학》, 《천도교창건사》,《천도교체계약람》,《천도교리독본》,《수도요령》, 《새말》,《福念》, 《敎政雙全》, 《黨志》,《천도교요의》, 《天道敎史傳》,《東學之人生觀》 등과 같이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도척」은 이돈화가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장자?도척』편의 줄거리를 공자의 일생과 관련시키면서 도척과 공자라는 두 주인공을 대비하고, 그 중간 과정에 공자와 동자의 문답을 끼워 넣어가며 전개시킨다.이돈화는 1925년 ‘적자주의에 돌아오라’라는 글에서 『장자?도척』편에 대味)에서 선생과가큰이는 사람의천성(天性)을도척하는한사람으로볼수잇습니다 웨그러냐하면 이제선생이말하는선왕(先王)의도(道)라든가 또는 충신효자열녀(忠臣孝子烈女)라든가 인의오륜(仁義五倫)이라든가하는 것이 태반는사람의천성(天性)에순응(順應)된것이안이오 그를거역하여가지고 사람의천성을대적(對敵)케하는방법임으로써임니다~ 선생과가튼인의의주인공의설법에말미어 모다그천성을일허버리고 불상한정원의화목(花木)이되야잇는셈입니다」하고 동자(童子)는말이맛츠자 다시일어공손이절하고 동(東)으로향하야달아나는데 서산에떠러지는해빗이 가벼이동자의등우에빗치워잇슬뿐이다.)자공(子貢)이공자를향하야 「선생님그동자(童子)가무엇을배우는사람입니까」하고물엇다 공자는 초연히낫빗츨고치며 「그들은다-무위자연(無爲自然)의도(道)를공부하는자들이니 우리에뚜여남이십배(十倍)나되나니라 그러나그들의말은너무도고상하야사람을가르침에맛지안이하니 그대들의알배안이니라」하고 두사람을재촉하야배에올나동으로행하야길을떠낫다)공구(孔丘)와 동자(童子)의 문답에서 발췌한 부분을 보면, 동자의 물음에 대해 “물을만한 것이 못되고, 알아서 소용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너무 고상하여 사람을 가르침에는 맞지 아니하다”고 하면서 “가던 길을 떠났다”고 한다.이는 공구(孔丘)와 동자(童子)의 문답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도척을 찾아 오릉(五陵)을 찾아 떠나는 공구(孔丘)의 생각을 기술한 부분이나 공구(孔丘)와 도척(盜?)의 문답에서 역시 이러한 작자의 의도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공구(孔丘)는 맛츰인재를구하는마음이 급급한이때라 한번도척(盜?)을달나여 제자를삼으면 크게소용이되리라하야 긔어히 도척(盜?)을한번맛나 인의의도를말하리라결심하고 제자들에게그뜻을말하고 이를후에행장을수습하야가지고 오릉(五陵)을향하야떠나게되엿는데 이에종자(從者)로동행한제자는 안연(顔淵)과자공(子貢)이엇다.)저의뜻을순종치안이하면 안될것이니까 먼저저를 조흔말로칭찬하야주고 뒤에소원을말하리라하고 한참침묵하엿다가 천천이말을내여 「장군 공구(孔丘)는일즉듯자온즉 천하에생각하여서는 도저히 그 원인을 알 길이 없는 것이라. 가령 사람의 한 신체의 중에서 손이나 발이나 귀나 눈이나 그러한 한 부분을 떼어 가지고 그것을 생각하여 본다 하면 언제까지든지 그의 존재가치를 알아낼 길이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한다. 또 1925년 ‘적자주의에 돌아오라’라는 글에서 장자의 을 언급한다. 소유충동과 소유욕의 발동이 없는 것이 곧 적자주의라고 말하면서 당시 이돈화의 사상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이나 시각적인 면에서 고심하고 있었고, 이에 관련된 주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품 「도척」에서 동자가 공자에게 질문하는 부분에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위에서 언급한 부분에서도 이돈화가 을 「도척」에 삽입한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지만, 또 이돈화가 「別乾坤」에 1926년 12월부터 1927년 7월까지 발표했던 작품 「西王母」)에서 목천자의 ‘周遊天下’에 대한 언급과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도척(盜?)」의 의 여행 중에 공자와 동자의 만남을 삽입한 것은 그가 작품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준다.4. 「도척」에 나타난 이돈화의 사상적 영향‘개벽’이 폐간된 1926년 무렵을 고비로 해서 1920년대 후반부터 이돈화는 윤리, 도덕 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 사상의 영역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고,) 1926년 무렵부터 이돈화는 폐간 직전의 『開闢』지면과 새로 창간된 『朝鮮農民』, 『別乾坤』 및 종교월간지인 『新人間』등에 이야기체 글쓰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야기체 글쓰기는 소재와 문체 등에서 이전과 달리 평이하고 흥미위주의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변화는 운동정세가 악화되고 대표적 啓蒙讀物이 쇠퇴함에 따라 노동자, 농민대중을 독자층으로 전취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이는 『開闢』지의 「도척」과도 무관하지 않은 변화이다.이돈화는 천교도 선교자에서 사회사상가로 이행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대정신에 합일된 사람성주의’)라는 글에서 보면, 그는 자신이 퍼이에르바흐의 유한적 인식론자 되는 여러 선배에게’, ‘문명화한 야만인’, ‘갑오동학과 계급의식’에서 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 작품 「도척(盜?)」에서의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생각해보겠다.1925년의 ‘사람성과 의식태의 관계’에서 “사람성은 앞으로 나아가 신세계를 창조하는 능동성이 있는 동시에 뒤로 물러가 금수성에 물러앉는 능동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이 사람과 금수의 분기점입니다.”) 라고 말한다.1925년에 쓴 ‘재외 동포에게-특히 지도자되는 여러 선배에게’)라는 글에서는 “조선인은 민족적으로 무산계급입니다. 전부가 소작농민입니다. 조선 사람에게 매인 소작인도 많겠지마는 외국 사람에게 매인 소작인도 적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조선은 경제적 파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찌사나 어찌사나 하는 동안에 경제적 파멸은 더욱 혹독하아지게 됩니다. 그럴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부자 사람에게 매여 사는 머슴이 벌면 벌수록 부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는 것과 같이 한 민족으로도 빈약한 민족의 처지가 일개 소작인의 처지와 같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1926년에 도척을 쓰게 된 배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1926년에 쓴 ‘문명화한 야만인’) 에서는 “민중을 속이고 사회를 속이는 일시적 혜교로 한때 한때의 민족을 구하고자 하는 점에서 그들의 심리에는 항상 조그마한 불안적 공포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만족에서 무슨 불시의 변동이나 생기지 아니할까 혹은 타인 또는 동류배가 자기의 지위를 엿보는 불행이 오지 않을까 불시의 풍우로 기성의 토담이 헐어지지 아니할까 하는 공포를 가지고 일생을 전전긍긍하고 소심익익하여 대용에 겁먹고 소분에 노하는 비겁한 성질을 기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도척에서 비춰지는 공자의 성격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1920년대 이돈화의 이론적 공헌으로는 천도교적 사회개조의 이론을 형성하고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으로부터 문화주의 철학 및 사회개조론 등을 수용해서 인내천 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을 정리하
    인문/어학| 2010.04.12| 12페이지| 2,000원| 조회(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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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식민지적 근대성 연구 평가A좋아요
    1930년대 식민지적 근대성 연구Ⅰ. 머리말최근 ‘근대성’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많이 전개되었다. 기존의 논의들은 대부분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 노력을 파괴하거나 왜곡했다는 시각으로 근대성과 전통, 진보 또는 후진성 등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 서술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근대화 노력을 파괴하거나 왜곡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식민주의와 근대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필자는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말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근대성의 개념은 역사적인 진보의 의미를 갖고 있었고, 식민주의라는 말은 퇴행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보와 퇴행의 결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식민주의라는 말과 근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그리고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그랬던 것처럼 1920~30년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차별과 억압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다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식민적 근대성에 대한 이전의 논의를 쉽게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다.당시의 상황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근대성 수용은 원천적으로는 서구적 기원을 갖는 것이겠지만, 그 논의에 대해서는 일제와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근대화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Ⅱ장에서는 1930년대의 작품인 채만식의 「탁류」의 도시 군산을 중심으로 과연 당시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 노력을 파괴하거나 왜곡했다는 시각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Ⅲ장에서는 당시의 상황과 문화적인 면에서의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필자의 입장은 우선 한국인이 싫든 좋든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사상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이 어떤 이에게는 긍정적으로, 다른 이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당시의 민족주의 역사관의 입장에서만 문학을 평가하는 이전의 논의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일본사회 일부에서의 식민지적 근대화와는 입장이 다르다.Ⅱ. 「탁류」의 근대 도시현대 도시 공간에서 인간은 시각에 의존한다. 도시라는 인공적 공간에서 새로운 길, 건물, 교량 등의 시각적 요소들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충격을 준다. 당시의 작가들은 도시화 혹은 초기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어 가는 식민지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이에 대응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탁류」)에서의 군산이 그렇다.작품에서 정주사는 도시를 문명의 상징, 진보와 문화의 결정체로만 인식한다. 용당에서 군산으로 이주한 정주사는 과거의 도시에서 미래의 도시로, 전근대적인 공간에서 근대적인 공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야 나엇느니라 하니 옛날이 그리웟다’는 정주사의 회한을 볼 때 정주사에게 군산이란 도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무계획적이고 관음적인 도시생활을 하는 정주사는 용당이라는 전근대적 공간을 그리워한다. 도시는 식민지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 구성인의 대부분인 하층민에게는 궁핍한 삶을, 자본가에게는 엄청난 부를 주었고, 계급적 갈등, 계층의 반목과 도덕적 타락, 가치의 혼란을 주었다.)채만식은 근대화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외감을 ‘탁류’에 형상화하고 있다.작가는 은행이나 미두장처럼 돈이 모이는 곳에 도시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돈을 향해 모여드는 사람을 통해 당시의 현실을 말하려 했다. 외형적으로는 군산 인구의 8~90%가 살고 있는 산동네 사람들의 빈한적 삶에서 시작하여 정주사 집안의 궁핍한 풍경으로 축소시켜 가는 것을 통해 도시의 표층에서 심층으로 다가갔다. 당시 수출 물량의 90%이상이 쌀이고 또 쌀 수출 물량의 90% 이상이 일본으로 수탈되다시피했던 군산을 통해 작가는 식민지 도시의 부정적 측면을 표현했다. 작가는 군산을 일본 통치하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식민지 도시로 인식했다. 「탁류」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는 군산은 식민지적 침탈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장소로서, 채만식은 조선의 근대화가 식민지적 종속의 심화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군산의 도시 구조와 근대적 시설들은 도시적 삶이 질서와 합리적인 사회 구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 권력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도시 상징을 이용해서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조작하려 했다. 도시의 외양은 풍요로워 보였지만 식민지하 경제는 오히려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근대화가 일어나면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생산과정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은 자본이다. 그리고, 「탁류」에서도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생산과정을 지배, 통제하고 있는 것은 자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도 시대에 따른 특수한 근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일제 시대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근대성이 형성되고 있었고, 일제에 의해서 그것이 식민주의적으로 변형된 것)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1920~30년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차별과 억압을 통해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다는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보다 당시의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해 일제 시대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근대성이 형성되고 있었고, 일제에 의해서 그것이 식민주의적으로 변형된 것)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Ⅲ. 매체와 식민지적 근대성1920년 이후 통치 정책을 바꾸어 조선 총독부는 이전의 무단통치 정책을 포기하고, 문화통치 정책을 실시하여, 식민지의 문화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장려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렇게 양보를 하는 한편 일본인들은 경찰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정보 수집과 감시 기능을 높임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를 강화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정책으로 1927년에 한국에서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라디오 방송은 식민지 시대에 근대 대중문화를 창조하는 중요한 생산력이 되었다. 비록 이러한 문화가 식민 통치하에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우위의 산물이긴 했고, 일제는 뉴스미디어와 학교 교육과정을 엄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조선인을 충성스런 식민지 백성으로 사회화하는 데 이들을 활용하였다.) 라디오 방송은 ‘낮에는 신문이고 밤에는 유성기’가 되어 각종 흥행물의 유포에 한 몫을 담당했다. 이러한 흥행물의 범람과 대중문화의 형성 과정 속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가장 맨 처음 음반에 수록된 것이 가곡, 잡가, 타령, 민요 무가, 재담 등 민중이 즐기던 전통적 공연물이었다는 점이다. 매체는 근대적인 것이었지만, 매체에 담긴 내용은 전통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다. )방송 뿐 아니라, 1920년대 후반 신문과 잡지 이외에도 보급이 확산된 유성기, 영화, 연극은 민중의 새로운 오락거리가 되었고, 각종 흥행물을 유포시킴으로써 축제의 감각들을 부활시켰다. 후원자의 지원을 받아 공연되던 대중 연희들은 상업적 상품이 되어 근대적 유통체계에 편입되었다. )마이클 로빈슨은 라디오가 단지 일본의 정치적 통제와 동화정책을 촉진시키기 위해 수입된 강압적인 근대 기술의 하나였다고 단순하게 파악하는 기존 연구를 비판한다. 라디오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새로운 문화 유형과 기술을 전파하고 조선의 문화적 삶을 변형시켰으며, 한국에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근대성의 구조를 형성함과 동시에 일본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독립된 한국어 방송과 같은 자율적 영역이 주어졌을 때, 전통음악 장르의 부활, 천박한 유행가를 둘러싼 식민지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문화적 정체성 논쟁 등을 일으키면서 조선인 내부에서 독특한 문화 건설 기능을 했다고 정리한다.)이러한 부분들을 생각해 볼 때,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해 단순히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근대화 노력을 파괴하거나 왜곡했다고만 바라보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Ⅳ. 맺음말Ⅱ장에서는 채만식의 「탁류」에서 군산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식민지적 근대성의 양상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해 논의되었던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인지 살펴보았다.한국의 근대성에 대해 논의할 때 반드시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1930년대의 「탁류」 등의 작품만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간과하고서는 이 시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식민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일제 강점기 시기에 우리들이 싫든 좋든 근대성 속에서 20~30년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이에게는 긍정적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한 구조일 것이고 그에 따른 영향이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할 때 식민지적 근대성을 꼭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한국이 근대로 나아가는 길에 개입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인들이 근대성을 그저 수동적으로만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문/어학| 2010.04.12| 4페이지| 1,500원| 조회(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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