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볼링의 역사볼링은 매우 현대적인 경기여서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을 것이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현존하는 스포츠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BC 7000년 전의 이집트 고분에서 나무로 된 볼과 핀이 발견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경기가 행해졌는지 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볼과 핀이 볼링의 기원으로 간주 되고 있다. 역사상으로는 13-14세기 경 중세 유럽에서 처음 볼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볼링은 현재와 같이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종교상의 의식이나 점을 치는데 이용되었다.1) 케겔(Kegel)넘어뜨리기독일의 교회에서 성행하는 종교적 의식으로서, 케겔(막대기)을 악마로 간주하여 복도 구석에 세워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둥근 물체를 굴려 케겔을 넘어뜨리는 것으로써, 케겔이 잘 넘어지면 신앙심이 두텁고, 잘 넘어뜨리지 못하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므로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점치는 신중한 의식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케겔 넘어뜨리기가 재미가 있어서, 점차 신앙심과는 관계가 없이 취미로 즐기게 되었고, 흥미본위의 놀이로 되어 교회 밖으로 나와 널리 보급 되었다. 한편, 볼링을 하는 사람(Bowler)을 '케구'라고도 하는데, 이는 케겔에서 파생된 독일어의 흔적이다.2) 9핀 볼링1571년 마르틴 루터(Luther, M, 1483-1546)의 종교개혁 이후에 케겔 넘어뜨리기는 옥외에서 성행하게 되었는데, 루터 자신도 볼링을 무척 즐겼으며, 현대의 10핀 볼링의 모체가 된 9핀 게임은 루터가 발명한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지던 볼링을 루터는 핀 수를 9개로 정하고 다이아몬드(Diamond)형으로 세우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규칙을 정한 9핀 게임은 여러가지로 인기가 있어서, 곧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9핀 게임이 유행함에 따라 경기 장소도 초기에는 맨땅 위에서 볼을 굴리던 것을 바닥에 석탄재를 뿌리기도 하다가 판을 깔아 만든 투구대도 사용하게 되었으며,볼링계의 숙원사업을 이루었다. 2000년 5월 현재 전국에 약980여개 볼링장에서 약 600만명 이상의 동호인이 고정적으로 볼링을 즐기는 것으로 추산되고 이러한 발전으로 아시아 및 세계무대에서의 크고 작은 입상으로 한국 볼링의 위상을 드높였다.7) 한국 볼링의 국제화1974년 4월 문교부 승인을 받은 대한볼링협회는 1978년 7월 아시아 볼링연맹에 가입하였고, 1979년 11월 국제 볼링연맹(FIQ)에 62번째로 가입하여 국제적인 지위향상을 도모하였다. 1980년 2월 대한체육회 준 가맹단체로, 이듬해인 1981년 9월에 정 가맹단체로 승인 받아 1983년 전국체육대회에 시범종목으로 채택이 되었으며, 1984년 제 65회 전국 체육대회부터는 정식 경기 종목으로 채택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한 것은 볼링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이 된, 1978년 제 8회 아시안게임이었으며, 이 대회부터 우리나라는 개인 종합 경기에서 안 병구 선수가 금메달, 개인전에서 이 성진 선수가 은메달, 남자 5인조와 여자 5인조 전에서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8) 세계무대에서의 전적1986년 제 10회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어 금메달 2개와 동메달 2개를 획득하였으며, 1988년 제 24회 서울올림픽의 전시종목에서는 권 종률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 국위선양에 기여하였다. 특히, 1991년 싱가폴에서 개최된 FIQ(세계볼링연맹)토너먼트에서는 서범석 선수가 남자 개인전 및 개인 종합에서 동메달을, 여자 5인조 전에서는 FIQ 세계선수권대회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룩함으로써 세계대회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1980년대 이후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한 볼링경기는 최근 몇년동안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1985년도에 약 200만이었던 볼링 동호인이 현재에는 약 500만명 이상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와 더불어 증가하기 시작한 볼링 경기장도 전국적으로 약 450여개소가 설치, 운영됨으로써 볼링경기가 국민 생활체육으로 부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주의한다.4) 음주후 볼링을 하지 않는다.물론 음주한 사람에게 레인을 배정해주진 않지만, 음주후 볼링을 할 경우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 술냄새등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5) 지정된 자기 볼을 사용한다.볼링장에는 하우스볼이 비치되어 있다. 그래서 볼링은 아무런 준비 없이도 볼링장에 비치된 신발과 볼으로 볼링을 할 수가 있다.그리고, 볼링에 임할 시에는 볼링공을 가능한 한 개를 사용한다. 손가락 크기가 맞지 않아서 볼을 교체를 하는 경우 꼭 사용하던 볼을 치우고 가져다 놓는다.여러 명이 볼링에 임할 시 볼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볼을 항상 확인을 하고 다른 사람의 볼을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한다.또, 게임이 끝난 후는 자신이 사용하던 볼은 꼭 치우도록 한다.6) 반드시 볼링화를 신고, 볼링화에 물기 또는 이 물질이 묻지 않도록 조심한다.볼링화에 물기가 묻을 경우 어프로치에서 슬라이딩이 안된다.그러면 브레이크가 걸려 중심을 잃게 되어 앞으로 넘어지게 되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신발 바닥에 이 물질이 묻지 않도록 조심한다.7) 투구후 커버나 스트라이크를 쳤을 경우 서로 축하해주고, 오픈을 했을 경우 서로 위로를 해준다.말 그대로 좋은 투구를 하였을 경우 축하 받고 싶은 맘은 누구나 있다.그때 축하 받음으로서 더 기분이 좋아지고, 다른 사람의 좋은 투구를 볼 때 자기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오픈을 하였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위로를 해줌으로써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말로도 하지만 간단한 행동으로 표현을 할 수 있다. 통상 서로 손뼉을 마주치는 것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8) 파울라인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9) 왼쪽 레인의 경기자는 오른쪽 레인에 있는 경기자가 먼저 던지도록 배려한다.10) 게임이 끝나면 자신이 사용했던 볼은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3. 볼링장의 시설1) 볼① 볼의 구조- 재질 : 볼의 표면은 경질 고무나 에보나이트로 되어있고, 내부는 합성 하며 어프로치를 기준으로 할 때 역삼각형의 형태로 핀들이 배열된다.맨 앞에 있는 핀을 헤드 핀이라고 하며 1번이고, 둘째 줄에 있는 핀들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2,3번, 셋째 줄에 있는 핀들은 왼쪽부터 4,5,6 순으로 번호가 정해져 있다.이웃한 핀끼리의 거리는 핀의 중심에서 중심까지 30.48cm 이고, 핀의 표면 중 볼록한 부분에서 볼록한 부분까지는 18.38cm이다. 따라서 볼의 지름이 21.5cm 이므로 평행으로 서있는 두 개의 핀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양 핀을 3.5cm 이내로 맞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3) 레인볼링의 투구대를 레인이라고 하며, 이 레인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규격에 의하여 만들어진다.① 레인실제로 볼이 굴러가는 바닥 부분이다. 넓은 의미의 레인은 어프로치까지 포함한 전체 길이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레인은 볼이 굴러가는 마루이다. 레인의 표면은 전후좌우를 모두 수평으로 깎아서 울퉁불퉁한 곳이 없도록 만들어 졌다.② 어프로치(approach)투구를 할때 스텝하는 곳으로 파울 라인의 뒤 끝까지 최소한 4.57m(15ft)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일반 볼링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레인의 길이는 4.87m(16ft)이다③ 스탠딩 스파트(standing spot)투구 동작에 들어갈 때 최초로 서는 발의 위치를 잡기 위한 것이다.④ 세븐 딜리버리 도츠(seven delivery dots)볼을 투구하고 난 후의 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둥근 표시이다.⑤ 파울 라인(foul line)엘리 베드(레인)와 어프로치의 경계를 표시 하는 검은 선으로 이것을 밟고 공을 던지면 파울이 되어 득점이 안된다. 이 라인의 폭은 약 2.5cm이다.⑥ 가이드 스포트(guide spot)레인 위의 파울라인앞 2.14m지점에 좌우로 다섯개씩 있는 둥근 표시이다. 이 스포트는 정확한 컨트롤을 하여 에임 스포트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⑦ 에임 스포트(aim spot)레인 위의 가이드 스포트보다 멀리 산 모양으로 늘어선 7개의 쐐기 형의 표시이다. 에임 스포트는 하팔과 손목이 굽혀져서는 안된다.다운 스윙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가 팔이 어깨에서 벌어지는 것이다.다운 스윙시 다리를 스치듯 볼이 이동되어야 다음 동작에서 일관된 전후 이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② 백 스윙(back swing)다운 스윙으로 운동량을 얻은 볼을 그대로 뒤로 걷어 올리는 것이 백 스윙이다. 백 스윙 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주의해야 한다.첫째, 백 스윙의 위치는 어깨의 선을 넘지 않아야 좋다. 많은 볼러들이 백 스윙이 크면 클수록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백 스윙이 어깨선 위에까지 이어진다면 오히려 역 효과를 낸다.진자 운동이 기점의 위치보다 높아진다면 반원을 그리면서 이루어지는 괘도를 이탈하는 것 처럼, 백 스윙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는 어깨선과 일치하는 정도이다.둘째, 백 스윙은 항상 일직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볼링은 전후의 운동력을 이용하는 것인 만큼, 스윙 자세가 좌우로 흔들리면 그만큼 스스로의 힘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백 스윙 뿐 만 아니라 모든 스윙 과정에서 항상 일직선을 이루어야 한다.③ 포워드 스윙(forward swing)포워드 스윙은 볼에 힘을 싣는 단계이다. 백 스윙의 정점에서 내려온 볼이 앞으로 향하려는 전진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곳이며, 진자 운동의 원리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이동한다.이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④ 폴로 스로볼이 포워드 스윙을 거쳐 이미 손을 떠난뒤의 자세인 폴로 스로는 릴리스와 깊은 관계가 있다. 볼을 놓은 뒤에 폴로 스로의 자세를 어떻게 취하는 가에 따라 릴리스에 영향을 준다. 폴로스로 자세가 정확하면 릴리스가 제대로 되고, 정확하지 않으면 올바른 릴리스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4) 스텝(step)볼링에서 스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처음부터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 처음에 스텝을 어떻게 익히는가에 따라 평생 폼(form)이 굳어질 수도 있다.스텝의 종류에는 일반적으로 3스텝, 4스텝, 5스텝의 세가지가 있다.① 3스텝제1보와 2보 사이에 푸쉬 어웨이.
프랑스 영화의 과거와 현재I.서론II.본론1.프랑스 영화의 역사1) 영화의 탄생2)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영화3) 초현실주의에서 누벨마그직전까지의 영화4) 누벨마그 영화5) 누벨 이마쥬 영화2.프랑스 문학과 영화의 관계사3.깐느 영화제4.국가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 영화III.결론I. 서론저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볼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프랑스 영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영화라는 것이 문화에 속할 수 있는지 우선 문화에 대한 정의부터 찾아보았습니다.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는 저서 《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1871)에서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를 내렸다.일반적으로 문화는 ① 구미풍(歐美風)의 요소나 현대적 편리성(문화생활 문화주택 등),② 높은 교양과 깊은 지식, 세련된 생활, 우아함, 예술풍의 요소(문화인 문화재 문화국가 등)③ 인류의 가치적 소산으로서의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등을 가리킨다.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즉, 문화라는 것이 제 소견에 있던 단지 예술작품이나 건축물 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든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문화라는 것이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고 영화도 그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음을 알고, 프랑스의 영화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습니다.우선 영화라는 것에 대한 역사를 알아보고, 어떻게 발전 했으며, 지금은 어떤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영화가 시대별로 어떤 특성을 띄고 제작 되었는지도 알아보았습니다.지금의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영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세계에 존재 했거나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 함직한 사건이나 사실을 재구성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상상력에서 나온 허구의 세계나 사건을 영화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과거에는 어떠했으며 지금 프랑스에서는 어떤 영화들이 상영되고 인기가 있는지도 알아보았습니다.그리고, 프랑스에서 열리는 국제 영화 축제인 칸 영화제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 영화가 국가에 지원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받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이제 본론에서는 조사한 결과들을 소개할 것입니다. 본론의 내용은 대부분 다른 곳의 내용을 옮겨 온 점도 있고, 제 생각을 전달하기 보다는 사실에 기인한 정보를 전달하는 구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가독성을 위해 존대어로 수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마지막 결론부에서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제가 생각하는 프랑스 영화에 대해 느끼고, 프랑스 영화가 바뀌어가고 앞으로 나아갈지도 모르는 방향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II. 본론1. 영화의 역사1) 영화의 탄생1895년 12월 28일, 영화 탄생 및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1864 - 1948)는 바로 위의 형이었던 오귀스트 뤼미에르(1862 1954)외에도 아버지 안뜨완느 뤼미에르와의 협력으로 오늘의 영화를 탄생시켰다.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영화적'시도들은 있었다. 영화의 발명물체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재현코자 하는 인간의 꿈은 태곳적부터 있어 왔다. 지금부터 2 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파냐 알타미라의 라스코 동굴에는 다리가 8개인 황소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인류의 그와 같은 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초에 24개의 정지된 화상(畵像:frame)을 연속적으로 돌려 인간의 잔상 현상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가 발명되기까지는 기원 2세기부터 시작하여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되었다.구체적으로는 완구식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치인 타우마트로프(thaumatrope)나 페나키스트로스코프(phenakistroskope), 그리고 주트로프(zootrope) 등 19세기에 들어와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기계가 나타났지만 영화의 발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진술의 발명이었다.1823년 프랑스의 N.니에프스와 다게르 등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1878년 미국인 E.마이브리지가 24장의 달리는 말[馬]의 모습을 촬영한 데 이어, 프랑스인 J.E.마레이가 사진총(寫眞銃)을 고안해냈으며, G.이스트먼이 셀룰로이드에 의한 '롤 필름(roll film)'을 제조한 데 힘입어 미국인들이 주장하는 최초의 영화라는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1891년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하였고, 1894년에 에드윈 홀란드 형제가 에디슨의 활동 사진기를 이용하여 영상들을 관람하게 했다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지금의 영화예술이 주는 요소들을 갖추지 못한 이 사건은 뤼미에르의 업적과는 다르다.< 키네토스코프 >위의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적어도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분명 영화장치의 발명은 에디슨이 먼저 한 것 같은데 왜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는가 하는 점이다.에디슨의 키네토폰(촬영기)과 키네토스코프(영사기)는 '블랙마리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왠만한 방 하나는 가득 채울 정도니 야외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뤼미에르 형제의 씨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했으며 따라서 야외 촬영이 가능했다. 씨네마토그라프는 촬영과 영사를 동시에 할 수 있었고 수동으로 작동해 전기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키네토스코프보다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에디슨의 장치들은 부유한 계층의 그것도 동시에 두 사람이상은 볼 수 없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장치였다면 뤼미에르 형제의 장치는 대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 장치가 심지어 에디슨 마저 뤼미에르식 영사를 따라간 것이다. 그래서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수여했다고 볼 수 있다.뤼미에르 일가의 가장 안뜨완느는 일찌기 사진사업에 뛰어들어 떼돈을 번 재능있는 사업가였다. 그의 "안뜨완느 뤼미에르와 그 아들들"이라는 회사는 당시 유럽 최대였으며 300명의 고용인을 가지고 있었던 대단한 규모의 회사였는데,1894년 에디슨의 활동사진이 유럽에 알려지고 당연히 이에 관심을 갖게 된 앙뜨완느는 아들 루이에게 연구를 맡긴다. 만 30세의 루이는 밤잠을 설치던 끝에 1초에 16개의 영상을 얻기에 이르렀고 1895년 2월 13일 리용시에 루이는 정식으로 15년 특허를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했다.루이 뤼미에르는 자신이 고안한 촬영기로 3월 19일에 처음으로 영화를 찍는다. 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 3월 22일에 드디어 최초의 '영화적 행동'을 하게 되는데, 파리에 상경하여 파리에 있는 공업 진흥회 건물에서 소수의 관리들 및 아카데미 회원 앞에서 최초로 을 상영한 것이다.그리고 12월 28일 토요일 저녁. 카푸친느가 14번지 그랑 카페의 한 살롱을 빌려 1프랑의 입장료를 내고 처음 일반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난생 처음 스크린에서 10여편의 영화를 보게 된 관객들의 반응은 환호 그 자체였고, 바로 그날 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하지만 영화라는 이 신종 '돈벌이'에 눈독을 들인 사람들은 비단 뤼미에르 형제만은 아니었다. 타고난 사업가였던 마법사 조르쥬 멜리에스(1861 ~ 1938)는 '스타필름'을 설립하고 자기만의 스튜디오를 지은 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1896년 첫해에만 80여편의 영화를 촬영한다. 역시 그의 마술사로서의 재능을 이용하여 영화에서 최초의 특수효과(트릭)를 사용하여 환상적이고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찍어냄으로서 영화사상 최초의 '시네아스트'로 등극한다.이 두 사람은 프랑스 영화의 근본적인 두 축을 형성한다. 하나는 뤼미에르 형제의 리얼리즘(다큐멘터리, 르포르타쥬) 등 현실임직함(vraisemblance)을 추구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상상력(imagination)의 열매인 허구(fiction) 지향의 멜리에스 쪽이다.이에 자극을 받아 영화의 기업성에 착안하여 1896년 10월에는 아직까지도 프랑스 영화계를 휘어잡고 있는 고몽 영화사가 레오 고몽(Leos Gaumont)에 의해 설립되고 다음해에는 샤를르와 에밀 파테가 파테영화사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1902년에 멜리에스는 지금까지도 그 혁신적인 특수효과와 시도,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상업성으로 자주 이야기되어지는 을 개봉한다. 30개의 씬으로 구성된 상영시간 21분의 이 영화는 전 세계로 배급되어 폭발적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특히 파테사는 1910년경까지 멜리에스를 능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화사까지도 앞지르는 맹렬한 기세로 영화산업을 정착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필름 다르사(Film d'art)도 발족하여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의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영화를 제작, 대중적인 흥행물로부터 영화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제1회 작품은 1907년에 제작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