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 Chagall, Marc , 1887.7.7~1985.3.28 ]꿈이 아니라 삶이다샤갈은 1887년 7월 7일 비테부스크의 유태인 거주지에서 대가족 의 일곱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감옥과 정신병자 수용소 뒤에 있 는 가난한 이 유태인 지구에서 꼬마 샤갈은 마치 운명의 상징처럼 구유통 위에 눕혀지게 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주위에서 큰 불이 났 었기 때문이다. 비테브스크 에서의 생활은 가혹하고도 추웠다. 그의 아버지 자카르는 청어 창고의 사무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이타는 소규모의 잡화상을 운영하는 여자였다. 거칠고 말이 없는 성격의 부 친은 전형적인 경건한 유대인의 모습으로 전통대로 매일 아침 교회 당에 다녀오곤 했다. 그는 시적이지만 침묵을 지키는 아버지였다...'한번도 자른 적이 없는 수염. 잿빛이 도는 밤색 눈동자, 황토색으로 그을린 주름진 피부. 노랗게 떴어도 맑은 그의 얼굴엔 가끔 미소가 떠올랐다.' 가끔씩 일을 마치고 돌아와 호주머니에 얼은 배 조각을 꺼내 나눠주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그 달콤함을 샤갈은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말하고 있다.그렇게 샤갈은 주민 5만여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유대인인 비테브스크의 모습을 일생동안 사랑스러운 어린 시절의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가족들을 모델로 삼는다. 가족들은 그의 내면세계를 이루었고, 그의 그림세계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신의 그림의 밑바탕이 된 가난하지만 따뜻한 어린 시절에 대해 기술하고 그의 자서전도 그의 부모님께, 아내에게, 고향에게 바친다..로 시작하고 있다.화가의 길로1895년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그 때 당시 샤갈의 아이는 8살이었다.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던 몽상가인 샤갈은 가수, 무용가, 음악가, 시인 그리고 화가가 되기를 동시에 갈망했다. 부모가 문맹이었던 어린 마르크는 유대인의 전통적 초등학교인 체다르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히브리어와 성서의 역사를 배었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의 비종교적인 학교에 다니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 즈반체바학교를 다니며 교장인 박스트 밑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는 그에게서 진정한 유럽의 숨결을 느끼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샤갈은 러시와의 예술계와 자신의 시대에서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져 가고 있었다.‘샤갈은 내 애제자이다. 그는 내 설명을 경청하고 나서 붓과 파스텔을 손에 쥐고는 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그의 독특한 개성과 기질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레온 박크스트---“ 그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위에 있는 것이든, 바다속에 있는 것이든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 ” (신명기)화상을 해석하고 예술이론을 공부하는데 만족할 수 없었던 샤갈은 기존의 예술단체나 집단을 모두 거부했다. 1905년 이즈음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봉기 이후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화가들은 보다 혁신적인 프랑스의 경향을 받아들인 아방가르드 그룹으로 재 결집 되고 샤갈은 야수파 이후의 최근의 조형예술과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까지 접할 수 있었다. 1910년 후원자에게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샤갈은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하게 된다.그는 당시의 다른 서구 화가들처럼 옛날의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할 기회가 없었다. 강의실의 의자보다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그는 미학의 틀을 그들에게 얻었고 그의 색채에 대한 갈망을 해방시킨다. 그는 고향을 떠나 고독했지만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는 눈부신 색체의 마술사가 되었고 놀라운 속도로 야수파의 근대성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그는 자신의 지나친 사실주의적 묘사를 경계하여 큐비즘에서의 구도의 분할을 차용한다. 프랑스에서는 많은 외국출신예술가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열정의 시인들과도 친분을 갖게 되며 그는 이전 작품에서 탈피, 큐비스트의 분적과 그것의 결과물, 색채의 분할을 시험했다. 파리는 러시아 청년의 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자유, 사랑의 빛깔’을 구현해 좋은 것으로 비쳤다. 그렇지만 25살의 청년인 그는 어정적으로 이러한 일들에 착수하지만 곧 환멸과 쓰라림 속에서 손을 뗀다. 자유아카데미에서도 샤갈은 공개적으로 적의를 표시한 동무들에 의해 축출되고 유대인 극장 치장을 둘러싼 반응은 샤갈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의 내적인 갈등은 그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망명길에 오른 샤갈은 파리로 간다.팔레스타인으로의 여행1930년대의 주요 창작물인 의 삽화작업으로 열중하는 샤갈은 정식으로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성서를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기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후일 샤갈은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샤갈은 그림의 소재를 찾는다는 과제도 잊고 어린시절부터 동경해온 유대의 나라에 푹 빠져든다.파리로 돌아와 구약성서에 나타난 창조주의 메시지를 판화의 선으로 옮기는데 열중하게 되는 샤갈은 창세기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성상화를 선택하여 쉬지 않고 연구에 골몰한다. 그러나 1933년 나치스는 그의 작품3점을 만하임에서 화형식을 벌이며 불살라버린다. 독일의 미술관에서 그의 유화들이 헐값으로 팔리고…다른 작품들은‘퇴폐예술’전시회에 나온다.1937년샤갈은 이 작품에서 혁명가들에게 붉은 기를 가리키는 어릿광대 모습의 레닌을 통렬히 비난한다. 1941년 반유대인법 때문에 마침내 프랑스로 떠나게 되고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나게 된다.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의 그늘 밑으로 모여든 피난민들 중에는 유대인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많았다.46년..샤갈의 완벽한 회고전이 열어지고 샤갈은 미국 최초의 발레단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식과 의상까지 맡게 되고..그 후에도 그의 딸 이다의 도움으로 함께 찬사를 받게 된다.1947년 파리가 해방되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지고 파리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졌지만 그해 그의 그림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잃는다. 벨라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샤갈은 이후 얼마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 그런 그의 좌절을 또다시 극복하고 파리로 다시 돌아가고“파리는 내 마음이 반사된 모습이다. 나는 나만의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그의 지적탐구는 끝없이 이어지고 신을 마주한 세계에 대한 그의 이런 인식은 그의 걸작들 속에 계속 자리 잡는다.1985년 3월 28일, 20세기 미술계의 마지막 거장, 그림을 통한 예언자인 마르크 샤갈은 98년에 걸친 그의 삶을 평화롭게 마감하고 생폴르 방스에서 묻힌다.‘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입 밖에 낸다면 진실된 예술은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Marc Chagall, Le Message Biblique마크 샤갈, 성서의 메세지"나의 유년기부터, 나는 성서에 매혹되어왔다. 그것은 당시 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태초 이래 나타난 모든 시의 근원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인생과 예술 안에서 이것의 그림자를 찾아왔다. 거의 모든 자연 속에서 성서는 모습을 드러내었고, 나는 이 비밀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때때로 나는 내가 완전히 다른 개체처럼, 내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처럼, 그리고 세상은 나의 영혼이 한줄기 빛처럼 배회하는 거대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들 그림을 꿈의 모음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 집안에서 사람들이 평화, 정신력, 신앙심 그리고 삶의 숨결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들 그림은, 적어도 내 생각으론, 나 한 사람이 아닌 인류 모두의 꿈을 나타내는 것이다...."인간의 창조1956 - 58, 캔버스에 유채, 300 x 200 cm이 그림은 '우리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만들다 (창세기 1:26)'를 따 르고 있다. 천사의 얼굴 모습은 아직 생명을 얻기 전인 인간의 얼 굴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샤갈은 그만의 세계에서 이 주제를 더 욱 풍족하게 하고 있다. 부드럽게 하나가 된 부부와 새, 당나귀, 사 자들의 아직 평화로운 동물의 세계가 그림 하단에 위치한다. 상단 에는 태양의 주위로 유대민족의 운명적 모습들, 즉 십계를 애워싼 민중, 왕,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모습이 둘러있다.낙원1961, 캔버스에 유채, 198 x 288색조만으로 그려졌다는 면에서 가장 특이하다. 화면 구성에 있어서 수평과 수직으로 잘 짜여진 배치가 눈에 뜨인다. 그림에서 표현된 식사모습은 샤갈이 잘 알고있는 러시아의 식탁풍경이 엿보인다. 또한 전통 종교화의 분위 기도 풍긴다. 이러한 여러가지 영향아래에서 샤갈은 자신 만의 독특한 조합으로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다.이삭의 희생1960 - 66, 캔버스에 유채, 230 x 235 cm인간과 그 창조주와의 대화가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나고 있 다. '아브라함과 세천사'가 숭고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면 '이삭의 희생'은 끔직한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가 있을 뿐이고 천사가 그를 극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칼 아래에 노출된 아들 이 삭의 얼굴과 천사를 올려다보는 아브라함의 얼굴에서 그리 고 그들을 둘러싼 노란빛과 빨간빛이 극적인 분위기를 자 아낸다. 그림의 좌측에는 아내 사라의 모습이 보이고 상단 부에는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림의 조화 를 이룬다야곱의 환상1960 - 66, 캔버스에 유채, 195 x 278 cm두개의 창문으로 구성된 이그림은 야곱의 꿈을 표현하고 있다. 깊고 푸른 바다색과 보라색의 조화가 초자연적인 특 성을 살려주면서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야곱과 천사의 씨름1960 - 66, 캔버스에 유채, 251 x 205 cm이 그림 역시 푸른색과 보라색이 지배하고 있다. 그 주제는 회화 역사상 매우 자주 다루어진 것이며 특히 샤갈은 들라크르와의 그 림을 깊게 연구한 듯 하다. 그러나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 림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슬라브인의 전통에서 따온 금빛 수탉, 자신의 유년시절 마을 풍경, 신혼부부의 모습, 새들과 군중 들의 모습이 씨름 장면을 둘러싼 밤의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떨기나무 불꽃 앞의 모세1960 - 66, 캔버스에 유채, 195 x 312 cm성서 메세지의 첫번째 시리즈는 출애굽으로 막을 내린 다. 다음에 이어지는 '떨기나무 불꽃 앞의 모세', '바위를 뚫는 모세'복한다.
여가Aristotle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며, 가장 고귀한 인간활동학문, 철학, 명상을 통해 교양을 얻고 또 마음에 수양을 얻는 활동일의 필요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Dumazedier(1967)개인이 직장과 가정, 사회로부터 맡겨진 의무로부터 해방되었을 때에 휴식을 취하고, 기분 전환을 하고, 또한 이득과는 관계없는 지식과 능력의 양성, 자발적인 사회참여, 자유로운 창조력의 발휘를 위해 완전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활동의 총체M. Kaplan(1975)일에서 해방된 시간, 자유시간, 취미시간, 자신의 시간김오중(1987)생활에서의 모든 의무와 책임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제외한 나머지 자유로운 시간 인 동시에 자유로운 마음이며 자기시간을 찾을 수 있는 기회최장호(1983)인간의 생활 중에서 비의무적인 시간임과 동시에 자발적인 활동이며 자유정신(free spirit)박무철(1991)일과 생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간들이 모두 충족되고 난 후의 잔여시간Neulinger(1974)인생의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라고 보고 마음의 상태(subjective state of mind)나 경험의 정도를 중시하여 “여가를 보낸다 함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수행하는 활동에 흡입함을 의미하고, 기쁨과 만족을 부여받을 수 있고 , 한 개인이 존재의 중심 내면과 깊이 관계가 있는 무언가를 수행하는 것Godbey(1976)한 개인이 속해 있는 문화나 물리적 환경의 외적 강제력이 어느 정도 배제된 자유로움 속의 삶이며, 이는 개인적으로 즐겁고 직관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신념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방향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활동 할 수 있게 되는 것Kraus(1971)여가란 생활을 돌보고 남은 자유재량시간(discretionary time)을 의미Berger(1963)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구되어 지고, 보상을 주는 일과는 대조되며, 자유 시간에 행해지는 자발적인 참여활동Csikszentmihalyi(1975)여가란 일상생활 속에서 심리적인 상태로서 개개인이 또는 집단의 활동으로, 그것은 본질적인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가치와 밀접한 동기가 있어서 행해지는 것으로, 사회적 자극이나 문화적 영향이 레크레이션 활동의 형식을 이룬다.G.D. Butler자기 스스로 자기표현의 기회를 발견하고 즐기고 휴식하고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활동으로, 그활동 자체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가치가 있는 목적의 형태를 이루는 것H.P. Fairchild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 영위되는 활동이고 그 활동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보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은 아니고 그 활동자체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동기가 주어진 자유롭고 즐거운 활동을 의미R.E. Carlson레크레이션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그 속에 직접적인 만족이 있는 즐거운 레저의 경험이다.마우라(三隅達郞)레크레이션은 의식한다, 의식하지 않는다와는 관계없고 적극적이고 소극적이고 간에 즐거운 감성에 따르는 경험이며 그것에 만족이 있어 각자의 자아의식에 따라 개인 또는 집단으로 행하여지는 활동이며 모든 행위이다.D.E. Gray & S. Greben레크레이션은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행복감이나 만족감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감정의 상태이다. 그것은 자기 Image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R.G. Kraus레크레이션은 활동이나 경험으로부터 성립되고 있다. 참가자의 자유의식에 따라 행해지고 그 활동이나 경험으로부터 직접적인 만족 혹은 개인이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행하여지는 것이다Jackson Anderson스스로 활동을 선택하여 기쁨을 위해서 참가하는 경험기회의 활동이다. 결국 자유스러운 활동이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 스스로 참여하는 활동, 만족스러운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홍경표각자의 선택적인 활동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목적의식을 가진 교육적인 활동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혀있는 불신의 벽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재발견을 위한 새로움에 도전하는 창rt)의 영지에서 푸나게임을 재현한 것이 근대스포츠로서 배드민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이러한 푸나경기는 영국 글로스터셔주의 뷰포트 공작이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방법을 정리하여 게임의 명칭을 자신의 저택이름인“배드민턴(Badminton)”으로 정하면서 영국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1983년 이후로 그 해에는 아일랜드 배드민턴협회가 창설되었으며, 이로 인해 배드민턴이 활발하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경기규칙이 통일되었고 경기기술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간의 국가대항 경기가 시작된 1902년 이후에는 배드민턴이 세계 여러 나라에 보급되었으며 1934년 세계 배드민턴연맹이 창설되었다. 1939년에는 국제 배드민턴 규칙이 제정, 1948년 제 1회 세계 남자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 1956년에는 제1회 세계 여자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올림픽에서의 배드민턴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 시범종목으로 실시하였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 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는 1945년 YMCA를 통하여 배드민턴이 처음으로 보급되어 1957년 배드민턴 협회가 창설되었다. 배드민턴은 1962년 대한체육회 정식 산하단체로 가입, 전국체육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우리나라 선수들은 1966년부터 제5회 방콕아시아 경기대회를 시작으로 1969년 제2회 아시아 배드민턴 선수권대회, 1970년 제6회 방콕아시아 경기대회, 1971년 제4회 아시아 배드민턴 선수권대회, 1977년 제1회 세계배드민턴 선수권대회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나라의 배드민턴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1981년 제 71회 전영 배드민턴 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식이 우승하였으며 19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여자복식을 우승하였다. 이후에도 198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복식과 혼합복식에서 우승하였으며 1986년 제 76회 전영 오픈 여자단식, 여자복식에서 우승하였다. 199은 체인지엔드 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3게임에는 어느 한 팀이 8포인트를 선취하였을 경우(단, 여자 단식의 경구에는 6포인트)체인지를 실시한다.4. 세팅(Setting)배드민턴에는 배구의 듀스와는 다른 독특한 룰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세팅이라고 한다. 세팅은 남자 단식과 복식의 경우 14대14의 경우에는 3포인터 연장게임이 인정된다(여자 단식의 경구에는 10대10에서 2포인트)이러한 권한은 먼저 14점에 도달한 팀이 가지는 것으로 하고 안 하고는 자유이다. 만약 세팅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심판이“러브 올(Love All)”을 선언하고 스코어는 0대0이 된다.5.서브(Serve)시합은 토스로 시작된다. 이때 이긴 쪽이 서브권이나 원하는 코트를 선택하게 되고, 배구와 마찬가지로 서브권이 있을 경우에만 득점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토스에서 이기면 대부분 서브권을 선택한다.?단식경기단식경기는 자기 득점이 0점이거나 짝수의 점수일 때 오른쪽 서비스 코트에서 서브를 넣으며, 자기 득점이 홀수일 때에는 왼쪽 서비스 코트에서 서브를 넣는다. 리시버는 상대편 서버의 점수가 짝수일 경우에는 오른쪽에서 리시브를 하며 점수가 홀수일 경우에는 왼쪽에서 리시브를 한다. (즉, 대각선상에서 리시브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브를 넣는 위치는 상대편 점수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자신의 점수가 짝수인가 홀수인가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1포인트를 얻게 되면 서버는 왼쪽에서 서브를 넣게 되고 리시버도 왼쪽에서 리시브를 한다. 경기가 개시되면 서버는 처음에 오른쪽 코트에서 상대편 오른쪽 코트로 서브를 넣어야 한다. 경기 중 서브는 주심이 스코어 콜을 한 다음에 넣어야 하며 서비스 콜(Service Call)을 하기 전에 서브를 넣으면 무효가 된다.?복식경기복식경기는 최초 서브를 넣는 편의 경우 한 사람만이 서브를 할 수 있으며 (즉 first serve만이 가능) 서브권이 상대편으로 넘어간 경우부터는 두 사람 모두 서브를 넣을 수 있다. 복식경기에서 두 번의 서브권이 주어지는데 처셔틀콕을 얹어 이동하는 것이다.1. 서브(Serve)할 때의 반칙사항.배드민턴만큼 서브에 있어서 엄격한 룰이 많은 종목도 없을 것이다. 라켓의 각도는 그립보다 라켓의 면이 아래로 오지 않으면 안되고, 셔틀을 치는 위치는 서버의 허리부분보다 아래이어야 한다. 또한 다리를 질질 끌거나 바닥에서 떼면 안된다. 이렇듯 까다로운 사항들이 많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Over Wais : 서비스가 타구되는 순간 셔틀콕의 일부가 서버의 허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Over Hand : 서비스가 맞는 순간에 라켓 헤드 전체가 라켓을 쥐고 있는 손보다도 분명하게 아 래 방향이 아닌 것.Foot Fault : 서비스 할 때 서버 및 리시버의 양발의 일부가 코트면에 정지하고 있지 않은 것.Line Cross : 서비스 할 때에 서버나 리시버의 발이 라인을 밟거나 넘어가는 것.Out : 서브한 셔틀콕이 바르게 리시브 코트에 들어가지 않는 것. 그러나 셔틀콕이 리시 브 코트 라인 위에 떨어지거나 네트에 닿아서 리시브 코트에 떨어진 경우는' 인(In)'이다.Balk : 서비스할 때에 서버 또는 리시버가 의식적으로 상대를 현혹시키는 듯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비스 하려고 앞으로 내민 라켓을 도중에서 멈추는 행 위 등이다.2. 경기중의 반칙사항.Out : 셔틀콕이 상대 코트 안으로 바르게 되받아 쳐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즉 셔틀콕이 상대 코트의 바깥에 떨어지거나 네트의 밑을 통과한 경우 등이다.Over the net : 라켓이나 신체의 일부, 또는 전부가 네트를 넘어서 상대의 코트로 나가는것.Touch the net : 라켓 또는 신체나 의복의 일부가 네트나 포스트에 닿는 것.Touch the body : 셔틀콕이 플레이어의 신체나 의복에 닿는 것.Dribble : 같은 플레이어가 셔틀콕을 계속하여 치는 것.Double touch : 복식에서 한사람이 셔틀콕을 치고, 그 파트너가 계속해서 한 번 더 타구하는 것.Holding : 셔틀콕을 순간적으로 치지 않고 라다.
a299018 권민주조이스 테니슨(joyce tenneson)정말 아름다운 사진들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 작품들 이였다. 사진 같지 않고 그림 같아 보이는 그의 사진들은 뭔가 오묘하고 빨려드는 듯한 마력을 가진 듯 했다. 정말 이런 사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이 그렇듯 이 사진작가 또한 그저 아름답기만 한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니였다. 그 뒤엔 인간의 원초적 외로움과 슬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옆의 사진은 내가 본 사진 중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사 진이다. 늙은 노인이 젊은 사람의 팔에 정말 힘없이 안겨있는 이 사진.. 그야말로 인간을 한 장의 사진에 잘 담아 놓은듯하다. 사 람은 태어나서 언젠간 늙어 죽게 되어있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 한 사진이라 생각된다. 나도 그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늙은 노인들을 보며 자기 자신 도 그렇게 될 것임을 알고 느끼게 된다. 그저 늙은 힘없는 노인과 선행을 하는 젊은 사람으로 보여 질수도 있는 사진이지만, 테니슨 을 사로잡았던 탄생과 죽음의 생명 사이클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고 우리는 사진 속의 사람들처럼 운명을 담담하게 받 아들여야 한다.그녀는 왜 본인이 늘 두 개의 같은 이미지, 거울속에 비친 반영, 동일한 형태의 반복되는 상에 집착하느냐는 점에 스스로 의문을 가졌다. 특히 '조명'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연달아서 나타나고 있다. 언뜻 보면 완벽하게 같은 인물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피사체의 모습 에서 그녀 스스로 무엇을 찾으려고 애썼는지 궁금히 여겼던 부분이었다.그녀가 이런 사진을 찍게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란성 쌍둥이 였지 만 동생과 성격이 너무나 달랐고 젊은 나이에 사망한 바람에 그녀는 얼굴은 똑같지만 전연 다른 이모의 모습을 보면서 늘 혼란 에 빠져 들었다한다. 그 결과 그녀는 항상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찾는데 애착을 갖게 되지만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그 무엇이 되 었고 작품으로 그것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a299018 권민주로버트 매플소프이번 과제로 접해본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남성의 누드와 동성애 장면 그리고 많은 꽃 사진들이 대부분 이였다. 그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난 그의 사진 몇 장에 관심을 가짐으 로써 그가 동성애자였고 에이즈로 죽게 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되 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작품이 일반에 인정받게 된 데에는 1985년 영국의 현대 예술원에서의 발표가 큰 역할을 했다. 영국 화랑에서는 과거에 결코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소재와 충격적 일 수밖에 없는 동성연애 사진들이 전시되어, 방문객들에게 놀라움 을 안겨 주었다. 사실 나에게도 그의 사진은 조금의 충격이였다. 잘 알 수 없는 그저 어려운 사진으로만 보였고, 그에 대한 여러 글 을 본 지금도 약간은 아리송하다. 모든 사진이 그렇듯 사진속엔 작 가가 담겨있고, 이글을 쓰면서 난 여전히 그의 사진에 대한 이해 를 위해 그를 알아가려 노력중이다.메이플소프가 카메라 한 대로 공격했던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예술은 그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플소프의 카메라는 얼굴을, 신체를, 사회를 벗겨냈다. 그리하여 감춰진 위선과 도덕의 이중성을 폭로했다. 그가 다루었던 인물사진은 '사회적 위선'을 투사한 가면의 형상이었고, 스스로 제작한 셀프 포트레이트는 '부정과 양심의 거래'였다. 남성의 누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셀프 포트레이트는 갖힌 성에 대한 인간의 자의식을 보게 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태어나 성장하고 사회성을 배우면서 욕망을 억제하는 방법을 강요받고 그 질서 속에서 웅크리며 산다. 모든 예술은 그러한 금기를 깨고자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몸에서 분출되는 그 고통의 몸부림, 일그러진 자아, 소외된 육체를 직접 보고 싶은 욕망, 그것을 앵글에 담아내 새로운 자유를 얻으려하는 몸짓이 이 셀프 포트레이트에 그대로 남아 있다.그의 작품 중 꽃의 사진들은 왠지 꽃으로 보이는 않는 탓에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꽃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약간 무서움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 그러한 것인지...어디선가 ‘백합은 성기로, 성기는 얼굴로, 얼굴은 해골로, 그리고 해골은 다시 백합으로 변조된다. 변조된다는 것은 소멸의 또 다른 과정이다. 그리고 소멸은 곧 창조를 말한다.’ 란 글을 보았다. 매이플소프의 사진이 소멸 시리즈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가 죽음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꽃들이 모두 아름답다기보단 접근하기 힘들고 무섭게 느껴진 것일까?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꼭 나에게 뭐라 속삭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기에 난 그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내겐 그의 사진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뭔가 어렵고 심오하고 다가가기 힘들게만 느껴지는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오면 그의 사진들이 달라져 보이지 않을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하여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