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주희 업적의 전반적인 개요2. 본론1. 신유학의 집대성2. 정사와 서원3. 주희와 종교4. 후세의 평가와 세계속의 주희 철학3.결론서론‘진영첩의 주자강의’에서 저자는 주희라는 인물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 해석하고 있다.그 접근방식을 크게 나누어보자면첫째, 주희가 이룩한 신유학의 집대성(1. ‘이’와 ‘기’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힘 2. 태극개념을 발전 3. ‘인’이라는 개념의 고도화된 세련화 4. 도통개념의 혁신 5. 사서 설정과 그에 대한 주석의 집필) 이다.둘째, 후학양성과 학문탐구의 장소였던 ‘정사’와 ‘서원’에 관한 것이다.셋째, 주희와 종교와의 관계이다. 주희의 개인종교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의례전문가로서의 주희를 분석함으로써 주희가 종교적인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이다.넷째, 주희의 철학이 현대의 세계철학에 대해 어떤 면에서 공유되고 기여할 수 있는지,그리고 주희가 이룩한 다방면적인 업적에 관해 1000년동안 이어져온 후세인들의 시선과 평가이다.솔직히 고등학교 때 수능을 위해서 공부한 중국 철학의 기본적인 지식이 전부였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난해했던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와 ‘기’의 개념이나 태극의 개념, 도통의 개념. 세계 철학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부분이 이해되지 않지만, 부족하나마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과 의문점등을 적어보고자 한다.본론1.신유학의 집대성학자들은 보통 주희를 ‘집대성’이라는 말로 수식하곤 한다. 주희가 널리 모아 들여서 크게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흔히들 주희가 송대 초기 다섯 명의 유학자들의 사상을 결합함으로써 단순한 보전자 역할만을 하였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의 결합이란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주희 업적의 가장 혁신적인 측면은 선대 유학자들의 사상의 토대위에서 그것을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사상체계를 이룩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 혁신적인 측면을 본다면 첫째로는 ‘이’와 ‘기’ 개념의 새로운 정립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명의 학자들이 ‘이’와 ‘기’ 개념에 대해 어 논리적인가’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윗대 유학자들의 사상적 특징을 결합하여 ‘이’와 ‘기’의 개념과 관계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부여한 주희의 독창성과 그 노력에 대해 존경스런 마음이 절로 솟던 부분이다.둘째, 주희는 ‘이’와 ‘기’의 개념과 연관된 부분이기도 한 태극 개념을 발전시켰다. 주희는 주로 ‘태극도’의 기반위에서 단순한 구조상의 재조직이나 종합이 아닌 고도로 유기적인 재구축 작업을 통해 주희판 신유학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형상과 형하의 분기가 자칫하면 이원론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태극 개념을 부각시킨 것이다. 또한 태극과 ‘이’를 동일시함으로써 형상과 형하, 하나와 여럿의 관계, 그리고 생성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는 도교와 연관되었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후세인들에게 혁신적이고 교훈적인 측면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셋째, ‘인’ 개념의 고도화된 세련화이다. 공자의 보편적인 덕성으로서의 ‘인’을 거쳐 맹자와 한대의 유학자들에게 ‘인’의 개념은 윤리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만, 주희는 정호. 정이 형제의 창조적인 ‘인’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함의를 바탕으로 ‘인’의 개념을 주희 철학의 핵심적 요소인 ‘이’의 기초위에 자리 잡게 했다.넷째, 도통 개념의 혁신이다. 도통이라는 개념은 주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도통에 관해서 그 당시 유학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주희는 한. 당 시대의 유학자들을 제외하고 맹자에게로 직접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 부분은 주희가 많은 사상적 가르침을 받았던 정호. 정이 형제와 사뭇 다르다. 정이가 맹자에게로 직접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던 것은, 다른 유학자들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도’를 발견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지만, 주희의 취지는 한. 당 유학자들이 공자와 맹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신유학 사상에 대해 철학적으로 설정과 그에 대한 주석의 집필이다.주희는 시경, 서경, 예기, 의례, 춘추 등의 고문헌에 대해 그전에 행해왔던 것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보다는 회의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오경에 대해 주의 깊게 검토하여 과감하고 혁신적인 방식을 취했고, 그의 회의적. 실증적 방식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경전 연구의 움직임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희의 이러한 실증적 태도는 경전과 관련된 가장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업적인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설정으로 이어진다. 사서의 설정으로 인하여 주희는 유학 연구에서 매우 새로운 접근 방식과 정신을 창출했고, 주희 이후의 중국 지식인들은 공자 및 맹자와 직접적인 사상적 연계를 맺을 수 있었다.특히 사서의 설정과 관련해서 주희가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은 ‘대학’이었다. 그는 심지어 대학의 제 5장을 완전히 고치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주희의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즉 격물’에 관한 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격물에 관해서도 상당부분 정이의 뜻을 취하고 있지만 주희에게 있어 격물은 학문과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는 점, 그리고 격물의 핵심은 사물의 ‘이’를 탐구하는 점 등이 정이와는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또한 주희는 1175년에 여조겸과 함께 주돈이, 정씨 형제, 장재의 글과 말에서 가려 뽑은 문장들로 ‘근사록’을 집필했다. 주희는 그것이 사서의 연구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라고 비유적으로 말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희 철학의 여실한 모습이자 기본적인 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근사록’에 대한 후세인들의 존경과 탄복이 그 후 중국 사상을 전면적으로 지배했던 ‘성리대전’이 나오게 만든 결과가 아닌 듯싶다.지금까지 언급한 주희의 ‘신유학의 집대성’은 어느 한 분야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주희는 다양한 분야에 대해 신뢰성 있는 충분한 자료를 논거로 제시하고 그에 따른 합리적이고 유기적인 분석을 통해 신유학사상 이처럼 혁신적인 사상을 수립 가능케 한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무엇보다도 부단한 그 열정은 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그의 부단히 노력하는 인간상을 본받고 싶다.2.후학양성과 학문탐구의 장소인 ‘정사’와 ‘서원’주희에 의하면 정사는 본래 학자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하고 토론하는 장소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정부의 공식적인 장려에 힘입어 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사의 의미가 불교 및 도교에 흡수되었지만, 그렇다고 정사와 서원을 엄격한 의미로 구분 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두 곳 모두 후학양성과 학문탐구의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사에서 서원으로의 전환과정에 대한 주희의 설명을 대략적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주희와 관련된 정사와 서원으로는 한천정사, 무이정사, 죽림정사,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동문서원 등이 있는데, 역시 정사와 서원에 관해서도 주희의 학문탐구의 열정과 후학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혁신적인 측면 등을 엿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백록동서원의 게시와 강의에 대한 것과 주희의 정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해석이었다.주희가 학생들이 행해야 할 기본적인 도덕적 원칙을 일반적인 지침으로 제시했던 ‘백록동서원게시’가 그 후대에게 미친 영향이 상당했다는 점, 주희와는 철학적 입장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육구연을 초빙하여 강의를 부탁하고 그 강의내용을 돌에 새기기까지 했던 점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주희의 지대한 영향력과, 주희 라는 인물의 정신적인 깊이를 다시 한번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주희가 세 곳의 정사를 세운 이유가, 어떤 의미에서 불교 및 도교에 흡수돼버린 정사를 유교의 유산으로 회복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저자의 독특한 해석에서는 주희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3. 주희와 종교와의 관계책에도 나와 있듯이 주희의 사상적인 업적에 대해서는 후대의 무한히 많은 평가들이 있지만 그의 종교적인 측면에서 전문적으로 다룬 논 대한 가치관, 천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등을 검토하고 있다.주희의 종교생활에서 가장 특질적인 것은 주희가 설정한 자신과 공자와의 관계가 다분히 개인적, 인격적인 차원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주희는 옛 성인 공자와 자신의 삶의 과업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느꼈고 그로인해 옛 성현들에게 느꼈던 각별한 친밀감등이 제사 의례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났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그리고 그의 선조나 부모님 등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느꼈던 각별한 감정,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각별한 슬픔이나, 자신에게 위태로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가 되는 길을 알지 못한다’라고 내뱉던 그의 말속에서 그를 이끄는 정신적 지침인 천명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의례전문가로서의 주희도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언뜻 들으면 의례의 격식이나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주희를 엄격한 형식주의자로 느낄 수도 있지만,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의례를 경우에 합당하게 합리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고 적절하게 표출시키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유연성을 엿볼 수 있다.그렇다면 주희는 과연 신의 존재를 믿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주희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도 한 인간이기에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서나 현실에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때로는 막막함과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러하기에 공자를 비롯한 그 선대의 성인들에게 어떤 정신적인 교감이나 영감을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주희에게 있어서의 신이란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윗대의 성인들과의 교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말이다.4. 후세인들의 평가와 세계 속에서의 주희 철학후세인들의 주희에 대한 평가는 책에서 보듯이 네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그 첫 번째는 당시 중국인들의 평가로서 그의 오랜 친구인 여조겸이나 장식은 주희에 대해 ‘걸출하며, 항상 앞으로 전진하고, 굳건하고, 명석하며, 세부적인
한국 영화에 대해서.경영학부 9932201 임익택1.한국영화에서의 수요자, 공급자의 특징은 무엇인가1)수요자의 특징영화상품은 문화상품의 하나로서 그 자체의 소비가 어떤 명확한 효용을 소비자에게 주는 일반 소비재와는 달리, 소비자가 여가의 필요나 감성적인 필요에 의해서 구매하는 상품이다. 이처럼 영화상품 특유의 속성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나타내는데 첫째, 소비의 비반복성을 나타낸다. 영화와 같은 문화상품은 단 한 번의 소비로 그 상품에 대한 소비자 개개인의 수요가 종결된다. 따라서 제품의 수명 주기가 짧게 되어 한 상품의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는 다른 소비재와 달리 단시간에 판명된다.둘째, 수요의 소득 탄력성이 크다. 이는 문화 상품으로서의 영화 상품이 사치재임을 의미한다. 수요의 원인이 소비자의 여가나 감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소비자의 소득 변화에 따라 수요의 변화가 민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득의 증가에 따라 영화에 대한 수요는 소득이 증가한 것 이상으로 확대된다고 예상할 수 있다.셋째, 경험재적 특성으로 인해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비대칭적 정보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이럴 경우 소비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품질의 불확실성에 따른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첫 번째는 그 상품의 품질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보를 수집하는데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정보 수집은 적정한 수준까지만 이루어진다. 두 번째 대응은 과거의 소비 경험을 이용하여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어떤 제작사나 특정 감독 혹은 연기자가 만든 영화를 보고 만족을 얻었다면 그들이 만든 새로운 영화에 대한 수요가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영화상품의 수요에서 이러한 고정적 수요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제작사나 감독, 영화배우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는 하나의 진입 장벽으로도 작용하게 된다.2)공급자의 특징첫째, ‘흥행주 제도’가 생산 조직에 도입되어 생산과 관리가 이원화되는 체제에서 상품이 만들어진다. 즉, 직것이다.다섯째, 요즈음 세계화의 추세속에서 영화는 단순히 영화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일뿐만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 나라의 사회문화이며 문화적 또는 민족적 정체라고도 말할수 있는 것이다.즉, 영화는 그 자체가 바로 메시지라는 말처럼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는 문화를 강하게 드러낼뿐만 아니라 집단 수용이나 집단동화라는 커뮤니케이션 심리적 기능도 위력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는것도 좋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가는데 가장 대중성있는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3.한국영화에서의 혁신은 무엇인가한국영화는 예술창작이라는 영화의 특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화제작들을 통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민족의식을 고취한 (1926, 나운규), 최초의 발성영화(1935), 출연료없이 영화인들의 투지와 정열로 만들어낸 (1946)등이 1950년 이전의 한국영화의 명맥을 이어온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규환)과 (한형모)등은 50년대 후반을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다시 사회문제를 리얼리즘 기법으로 만든 (유현목), 손꼽히는 전쟁영화(1963 이만희) 그리고 멜러물 (1964 김기덕)등은 1960년대를 대표하고 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대중오락으로 각광을 받았다고 하겠는데 이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다른 이렇다 할 오락수단이 보급되지 않은 상태가 상호작용하여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텔레비전 수상기의 급속한 보급에 영향을 받아 영화관 영화는 위축되었으며, 유신체제의 틀 속에서 현실도피적 성격의 호스티스 영화가 붐을 탔다. (1974 이장호) ,(1975 김호선) ,(1975 하길종), (1977 김호선) 등의 흥행작들은 70년대 우리나라 사회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70년대 연평균 113편의 제작기록을 가진 한국영화는 80년대에는 연평균 98편의 작품을 생산하 DVD업계와 비디오 업계는 현행 저작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엔 반대 의견도 있다. 인터넷 업체들의 반대다. 5-10년후 음반 시장에서의 MP3처럼 영화를 파일로 제공하는 또 하나의 거대 시장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런 시장이 도래했을 때 법을 다시 개정할 수 있겠느냐하는 우려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태를 둘러싼 경찰 단속반과 불법 동영상 유포자들의 쫓고 쫓기는 게임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최근 피디박스에서 한국영상협회의 저작권 보호 요청 때문에 제재가 강화되자 상당수 의 네티즌들은 빠져 나갈 방도를 궁리했다. 피디박스에서 포털 사이트 까페로 이어지는 창을 만들어 자동적으로 카페 방으로 옮겨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신이 보유한 데이터들을 과시하려는 욕구와 온라인 서비스 제공업자들로부터 게시물을 등록해 제공받는 패킷의 수익 때문에 지속적으로 불법 동영상을 공급하는 네티즌들의 두뇌 싸움은 끝이 없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영화명을 수정해 암호화하는 방식을 취한 악성 네티즌들은 불법 영상물을 개인별로 50-100편이상 보유하고 있고, 이런 이들만 1천여 명에 달한다. 하지말라면 더 하고 보지 말라면 더 보는 이 숨바꼭질을 해결할 방책은 없나? 아직 국내 몇몇 영화 수입사들은 불법 영상물의 피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잠재 관객의 감소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정도 인터넷에 돌아야 홍보도 되지 않겠냐는 입장을 지닌 영화사들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당한 저작권을 보호하며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키데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잘못된 인터넷 공유 문화, 저작권법에 대한 현저하게 질 낮은 인식, 너무 느슨한 법 제도 이 모두가 해당된다.우선은 저작권법 개정. 즉 친고죄 폐지가 시급하다. 단순 복제나 유통은 처벌이 안되고 상업적인 유형의 복제만 처벌이 되는데, P2P사이트를 통한 단속은 거의 불가능할 듯 하다. 불법 유통시 적발되면 막대한 벌금을 물리고, 실형도 주는 엄벌주의가 필요하다.또한 온라인 파파라치의하면 스크린 쿼터제를 2002년부터 ‘92일’로 2005년부터는 ‘86일’로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좌석별 쿼터제’와 ‘전용관 설치’로 한국영화를 보호해 주겠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스크린쿼터 감시단’의 홍성원 조사통계부장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 고 일축했다. 미국측의 제안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영화산업은 ‘배급’이 성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국내 시장이 직배사들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에서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졌을 경우 ‘전용관’이나 ‘좌석별 쿼터제’는 실효성이 없다는 얘기다. 1998년 여름 영화 ‘여고괴담’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었으면서도 ‘고질라’에 밀려 간판을 내려야했던 것도 직배사들의 힘을 상징하는 한 예라 할수 있다.그러나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한.미 투자협정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예측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 논리가 힘을 갖고 있는 한 스크린쿼터 문제는 언제든지 재등장할 소지를 갖고 있다. 더구나 현재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한 영화계의 대응은 아직도 일차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스크린쿼터 문제는 단순히 존폐 문제를 떠나 정책적인 부분부터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성원 부장은 ‘초기에는 정책적인 접근이 부족했으나 현재 공대위에 정책입안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여러 세미나를 통해 정책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밝힌바 있다.스크린쿼터제를 지지하는 입장이나 반대하는 입장 모두 ‘한국영화의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정부와 외교통상부가 내놓는 대안은 통상마찰을 피하면서 ‘돈’으로 직접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문화산업기금 조성이나 영화진흥금고 확대 등 지원책이 그것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정부의 이런 정책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차례 진행되었던 정부의 지원정책은 쿼터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엄청난 규모의 지원이 아니고서는 헐리우드와 맞서기 힘들다는 시각이다.6. 어떻게 하면 한국영화에 더 많은 이나 평가가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면서 초반 시장을 독점하는 그야말로 치고 빠지는 식의 흥행방식이다. 미국의 블록버스터들이 바로 이 전략을 사용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그 진가를 알기위해 어느 정도 뜸들일 시간이 필요한 영화들은 미처 입소문이 나기도전에 황급히 극장에서 내려진다. 아마도 누구나 ‘좋다고해서 보러갔더니 이미 극장에선 다른 영화를 하고 있더라’라는 말을 이즈음 부쩍 자주 들었을 것이다. 주말 좌석 점유율이 나오자마자 작은 영화들은 내려가고 블록버스터들이 그 자리를 밀고 들어간다. 하지만 조폭으로 알려진 덩치들이 등장하는 덩치 큰 영화들이 급속히 증식하고 있으니 이런 식이라면 한국영화의 신선함에 대한 관객의 평가가 얼마나 갈지도 의문이다.사려깊은 한국영화들만이 아니다. 유사 헐리우드 양식을 취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헐리우드 영화들을 제외한 이른바 예술영화들이나 대안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해외영화제나 국내의 영화제들이 일종의 공공영역으로 기능하면서 시장에서 쉽게 주목받지 못할 영화들을 관객에게 소개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역할은 정확히 거기서 그칠 공산이 크다. 영화관계자들은 잘 알지만 로카느로영화제는 상당히 선택의 기준이 까다롭고 독특한 영화제이다. 배용균 감독의 과 박광수 감독의 영화들이 바로 로카르노에서 수상했다. 이제까지 국제영화제로부터의 그러한 승인은 관심있는 관객을 극장에 모을 수 있는 꽤 괜찮은 초청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선 국제영화제만이 아니라 영화전문 기자들 그리고 평론가들의 진심어린 옹호와 지원도 멀티플렉스가 주도하는 좌석 점유율이라는 숫자와의 싸움에서 고지를 점하고 있진 않다.그렇다면 왜 우리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라도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창들을 만들어야 하는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한국시장에서 헐리우드를 제압하고 창궐하는 현재의 상황은 역설적이다.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와 정치상황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화는 미국화와 동의어다. 이러한 상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