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열 올바로 보기?....제1장. 한국 교육의 꿈과 현실: 교육열 환경에 대한 총체적 진단- 한국은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우수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결코 교육기회의 나라가 아니다. 오직 교육이 중복되고 낭비되고 있는 나라 일 뿐이다. 그리고 그 중복과 반복도 무의미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질 경우가 많다. 학력저하, 입시위주교육, 왕따 학교폭력, 교실붕괴, 학교이탈, 학교수준이 올라갈수록 국제학력경시대회에서 낮은 성적을 보이는 일 등 이 모두 그러한 현상의 예들이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육의 양이 넘치면서도 질적으로 크게 왜곡되어있고 매우 비효율적이다. 공교육비 20조원에 10조원 규모의 사교육비를 따로 써야하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도 심각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육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환기 시키고 싶다. 교육의 이상에는 사회의 이상이 반영되어 잇고, 교육의 현실에는 사회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전인교육을 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회의 지도자조차 전인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지도자로 선발되는 상황에서 교육이 홀로 전인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문제는 교육사회에서 발생하고는 있지만 거의가 사회의 문제이다. 교육문제는 사회 문제와 함께 볼 때 제대로 진단할 수 있다. 교육의 병도 사회의 병과 함께 진단되어야 한다.제2장. 교육열에 대한 기초적 이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열이 높다는 점은 우리나 외국인이나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다. 해외 유학열도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교육열’이란 개념은 여전히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교육열을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어떤 행위나 현상들의 저변에 깔린 공통적속성이 교육에 대한 높은 욕구와 집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되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인이 대부분 그런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교육열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즉, 교육열은 한국인의 교육행위로부터 추정되어진 개념이다.제3장. ?교육열?인식의 전환을 위한 재개념화 작업- 우리는 교육열을 올바르게 봐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열을 다시 봐야한다. 왜냐하면 교육열은 잘못 이해되었고 잘못 다루어져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여전히 한국교육의 희망요소이다. 과잉 교육열이나 왜곡된 교육열 때문에 교육이 안 된다는 인식은 바뀌어야한다.제4장. 교육열과 정책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의 대전환- 한국교육에서의 특이한점 하나는 교육비의 투자량도 높고 교육경쟁도 극심한데 교육의 국제 경쟁력은 하위권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초중등에서는 국제학력 비교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데 대학은 하위수준이고 그 이후의 인재들이 국내에서 잘 육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열이 세계 최고로 높다는 한국의 교육이 왜 이러할까? 교육열이 우리보다 낮아 보이는 미국에는 각 분야의 세계적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한국은 왜 그러하지 못한 것일까? 이러한 교육열의 긍정적인 인식보다 부정적 인식이 강한 일반적 현상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교육열은 사회악이 아니며, 각종 교육문제의 원인도 아니며, 오히려 자원으로 활용 가능한 자원이다. 교육열은 교육정서자본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정부는 교육열 정책을 적극적으로 세워 이 정서자본을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제5장. 교육열의 운동법칙과 결합법칙- 우리 국민들의 교육열은 우리 교육의 희망요소이자, 동시의 우리교육에 가장 큰 골치 덩어리가 과외와 사교육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과외가 없어지면 교육열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과외 현상은 교육열이 아니라 교육열의 결합대상의 하나일 뿐이다. 어느 아파트가 학군이 좋아 비싸다든지, 어느 아파트는 과외학원이 좋은 것들이 몰려있어 비싸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열의 결합대상을 달리할 뿐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외를 하지 않고도 소비, 투자,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해 주는 그런 정책이 되어야 과외가 진정으로 사라질 것이다. 교육열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과 예리한 논리적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제6장. 교육열 분류에 대한 비판적 논의- 높은 진학률과 진학열, 가족의 자녀교육에 대한 헌신 등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많은 개발 도상국가들이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무엇을 배우려는 욕망’ 을 교육열로 규정한다면 이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라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열이 높은 상태를 ‘지나치게 높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법상 잘못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열이 너무 높다’라고 지적할 때, 교육열은 독특한 면을 이미 함축하고 있는 지적이다. 이 독특한 측면을 어떻게 부각시켜야 하는가가 교육열 연구의 한 과제이다. 교육열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의와 분류의 타당성과 합리적 근거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사고를 오히려 ‘분류에 따른 오류’에 빠지게 할 위험성이 있다. 교육열의 유형화는 교육열의 특정한 양상을 파악하고 교육열의 개념을 명료화하기 위한 것일 때 의의가 있는 것이다.제7장. 연합적경쟁론과 교육 전쟁론의 비교 검토- 필자인 이종각과 박남기 두 사람은 모두 입시 위주의 교육열, 학생이 아닌 부모의 교육열로 보고 있다는 데에서 일치된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종각은 교육열 개념을 “교육에 관한 모종의 행위나 현상으로부터 추정 되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개념 규정은 우리가 흔히 학력열을 교육열과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것에서 학력열을 교육열의 현상이지 본질은 아니라는 논리로 전개된다. 이와는 달리 박남기는 교육열이 교육에 관한 어떠한 행위나 현상들로부터 유츄된 개념이라기보다는 교육에 관한 현상이나 행위자체를 교육열로 인식한다. 교육열은 지위경쟁의 구조 안에서 가열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 가열성은 자율의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를 예로 들면, 학원을 많이 보내고 촌지를 보낼 걱정을 하는 현상은 개인의 자율의지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자식 교육이 뒤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경쟁구조의 형태로 교육열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상황이나 구조에서 자율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극도의 경쟁심, 그리고 불안심리가 작용되어 표현되는 현상이라고 보여 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전쟁론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개인의 자율의지를 부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제8장. 교육열과 노무현 정무의 교육정책 과제- 노 대통령은 초정권적 초당적 교육혁신기구를 설치한다고 공약했다.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정책의 불안정과 혼선을 가져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선 공약이라는 것이 정당의 교육전문성이 빈약한 상황에서, 대체로 짧은 기간에 소수의 사람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들의 의견이 짜깁기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오늘의 한국은 건국세력, 근대화 세력 그리고 민주화 세력에 의해 형성 되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화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세기적 전환기 교육의 초석 쌓기에 커다란 오점을 남길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이 강조하는 능력사회를 구현하려면, 교육사회도 능력사회로 구축해야 한다. 능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에서 능력주의 이념이 무너진다면 능력주의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최고의 인재양성을 통해 작지만 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큰 사업의 기틀을 튼튼히 해야 한다. 그리고 최고가 되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고가 아니라 세계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그런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제9장. 학력?학벌의 존재구조와 극복전략- 우리 사회의식 속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서열화 하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사람을 만나면 나이를 묻고, 몇 회를 묻고, 직위를 물어서 그와 나의 서열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아직까지의 습관이다. 이 습관이나 의식이 흐려지기 전에는 서열화 할 수 있는 구실이 조금만 있어도 서열화는 이루어지고 있다. 학벌주의에의 서열 역시 이러한 일상적인 서열중의 하나이다. 새 정부는 학력차별 철폐정책을 강력하게 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차이가 다 차별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또한 학력차별 철폐를 강조하다가 특정 학력이나 특정 출신교에 대한 혐오증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러한 혐오증은 기존의 학벌차별보다 조금도 나을게 없는 역차별일 뿐이다. 능력사회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학력에 대한 선호도도 혐오증도 없이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판단을 통하여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제10장. 교육체제의 재구조화를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개혁요소와 개혁수단의 발견전략 -- 우리 교육에서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들과 가난한 학생들을 소외시켜 온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해왔다. 그러나 이외에도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집단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 교육이 있는 자와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소외시키고 있음을 교육의 큰 문제점으로 생각한다. 교육 개혁의 한 방향은 교육 소비자를 스스로 학교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다른 한 방향은 학교 밖에서도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한국을 교육기회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다양하고 품질이 보증되는 교육기회가 제공되는 교육체제로 전환해야 한다.제11장. 사교육,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가?- 사교육비 문제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조급하게 서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교육비라고 깊은 뿌리를 가진, 그리고 무성한 잎과 가지를 가진 거목을 도끼 몇 번 쳐서 쓰러뜨리려 하지 말고, 아주 서서히 고사시키는 정책으로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정책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합병증을 더 이상 일으키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입시 자율화와 대학 문호의 완전개방이라는 정책목표는 다양성을 허용하는 학교문화 건설, 다양한 능력을 수용하는 교육문화 건설의 한 하위 목표로 생각해야 한다. 더 나아가 능력 중심사회 구현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목표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국립국악원을 다녀와서...국립국악원...명칭은 들어봤지만 나와는 거리가 있을 것 같던 곳에 직접 공연을 관람하고 왔다. 감상문 제출이라는 과제가 계기가 되었지만 문화체험 측면에서 특별한 경험이었다.국립국악원의 토요상설 국악공연에 예매를 하고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땐 위치가 예술의 전당 바로 옆이라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주 다녀보았던 곳이었지만 이렇게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안타까웠다.공연관람 전에는 국악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우리 전통음악의 역사와 다양한 국악기들을 한눈에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셨던 악기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편종, 편경과 같은 생소했던 악기들도 소리를 들으며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악기들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악기들과 거의 흡사한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공연장으로 입장을 하고 한 시간 반이라는 공연시간이 지루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연은 매주 다른 테마를 가지고 진행 되었는데 종류별로 다양한 음악과 무용들로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었다. 국악의 12율(律)의 음명(音名)으로 테마의 주제가 구분 지어졌고 내가 관람했던 부분은 협종(俠鐘)형 이었다.협종형은 평조회상(기악합주), 산조(대금독주), 작법(무용), 태평가(가곡), 신뱃노래(기악합주), 한량무(무용), 구아리랑-도라지타령-노들강변(경기민요), 판굿(타악) 의 순서였다.평조회상부터 얘기하자면 대규모 관현합주로 속도가 매우 느렸고 향피리 중심의 연주여서 인지 관악기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여러 악기가 있었지만 관악기 특유의 음색이 전체적인 톤을 잡고 있어서 대규모 기악합주로서 의미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다. 속도가 느려서인지 공연 초반부터 약간은 늘어지는 느낌도 들었고 진지한 분위기가 낯설게 받아들여졌다.두 번째 공연은 대금산조였는데 대금을 장구 반주에 곁들여 연주하는 독주곡이었다. 굵직한 관에서 울려나오는 음색이 맑고 기품이 있어 보였고 악기의 떨림음은 애절함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또한 생소했던 대금과 장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고 악보 없이 오랜 시간 연주하는 모습이 즉흥적인 연주인지 오랜 경험에 의해서 저절로 외워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가지 더 눈에 띤 것은 무대 장식으로 들어온 병풍이었는데 길고 커다란 병풍의 화려한 문인화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연주를 잠깐 뒤로하고 그림을 잠시 감상하는 딴짓을 하기도...했다.세 번째는 불교 무용 작법이었다. 엄숙한 분위기와 웅장한 북소리가 종교적인 신비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굿을 하는듯한 춤사위와 배경음으로 깔린 오묘한 사람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네 번째는 태평가였다. 가곡의 형태로 남?녀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뒤에서 연주자들이 연주를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아무리 집중을 해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악기와 목소리의 구분이 어려웠고 명확하지 않은 꺾임음들이 많아 가사가 전달되지 않았다. 태평가라 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태평성대를 누려보자는 내용으로 교재에도 실려 있어 낯설지 않았지만 연주와 노래 형태로 구성되어 들어보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화려한 악기와 의상들에 비해 웅장함보다는 얇고 가는 느낌만이 들었다. 대체적으로 고음이 두드러지게 들리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다섯 번째로 신뱃노래였다. 첫 번째 평조회상과 같은 여러 악기들의 합주곡 이었고 흥겨운 가락으로 구성되어 개인적으로는 듣기 좋았다. 특히 아쟁의 연주 형태가 흥미로웠는데 활대로 줄을 마찰시켜 소리 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지만 손가락으로 튕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독특한 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거문고의 연주자들이 셋 있었는데 똑같은 악기의 연주자들일 경우 똑같은 움직임과 연주형태를 보였지만 유난히 거문고의 연주자들은 제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힘과 실력의 차이인지 독특한 자기만의 연주방법이었는지 움직임이 크거나 작거나 또는 부드러운 손놀림 등이 차이를 보였다.여섯 번째는 한량무 였다. 선비 복장을 한 무용수들이 부채와 함께 품위 있고 여유롭게 춤사위를 선보였다. 예전 선비들은 진짜로 이러한 춤을 추었던 것일까? 아니면 무용으로 표현하기위해 구성만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일곱 번째는 경기민요였다. 구 아리랑, 도라지타령, 노들강변 이렇게 세 곡이었는데 우선 귀에 익숙한 음과 가사들이었고 맑고 밝은 음색에 경쾌한 가락들 이었다. 마치 잔치집이나 씨름장에 와 있는 듯한 어르신들이 좋아 하실만한 그런 분위기였다. 특히 명창 분들의 꺾임음들은 시원하게 넘어가는 것이 정말 대단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판굿 이었다. 내가 국립국악원에 온 것이 아깝지 않게 느끼게 해준 부분이었다. 판굿은 각 악기의 잽이들이 춤과 놀이 동작을 곁들여 자신의 최고 기량을 펼치면서 노는 풍물굿의 일종이라고 한다. 처음엔 평범한 사물놀이인 것 같았지만 수준이 동네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고 기술과 노는 방법들이 대단했다. 우선 전체적으로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로 달아올랐고 각 잽이들의 묘기에 가까운 연주와 몸놀림들을 선보였다. 연주뿐만이 아니라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관객들의 호응과 반응이 최고였다. 특히 상모위에 달린 리본끈 같은 것을 자유롭게 돌리고 묘기를 부리면서 흥을 돋우며 터질 듯한 몸짓으로 온몸과 마음을 내던진 것 같은 연주형태는 관객들을 빠져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조선시대 화원제도* 화원이란 ?조선시대 화원이란 궁중작화기관인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궁중화가이며 동시에 직업화가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때로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사화원(私畵員)이나 지방 관청을 중심으로 일했던 방외화사(方外畵師)를 포함한 모든 직업화가들을 통칭하기도 한다.화원들은 국가와 왕실에 관련되는 모든 회화 업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사대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수응하였으며 개인적인 회화적 성취를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전체적인 화단의 경향과 흐름에서 볼 때, 도화서의 화원은 그림을 애호하는 문인사대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화단을 이끌어 나간 두 축을 형성하였다. 화원들은 주로 실용화와 기록화를 전담하였으며 일반 감상화에서도 문인사대부들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새로운 화풍을 정착·발전시키고 일가를 이루는 등 한국적 회화미 창출에 기여하였다.? 도화서국가와 왕실 사대부에게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곳으로서, 제도적으로 화원을 양성하였다. 장관격인 제조(提調)는 예조판서가 겸임하였고, 그 아래 종6품인 별제(別提) 2명과 선화(善畵) 등 약간 명의 관원, 30명의 화원이 있었다. 도화서는 원래 국초에는 종5품에서 거관하도록 된 도화원이었으나 성종 때에 종6품 아문으로 격하되면서 이름이 도화서로 바뀐 것이다.? 화원의 특징- 선발방법도화서 화원의 선발은 시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과 영모, 화초 등 네 과목 중에 두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화학생도를 거쳐 화원이 되는 시기는 대개 10대 후반을 전후한 시기였으며 아무리 늦어도 20세 이전에는 도화서에 입문하여 필력과 묘사력을 연마하는 시간을 가졌다.- 화원의 지위와 역할화원의 진급 또한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 결정하였으며, 이 시험에 들지 못하면 화원으로 수십년을 그림 그리는 일에 전력하였어도 관직을 받지 못했다. 직무로는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의궤화(儀軌畵), 교화서(敎化書)의 도설(圖說) 등을 그리고, 석물(石物)·인장·예복 등의 장식이나 무늬를 넣는 일을 하였다화원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낮았다. 화원은 잡과가 아닌 시취를 통해 선발되었듯이 의원·역관·산관·율관 등 기술직 중인보다 낮게 취급되었으며, 공장(工匠)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국가 행사에 동원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배급되는 요미(料米)나 포상을 보아도 공장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공장 중에서는 사자관(寫字官)과 함께 화원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궁중화가로서 국가와 왕실에 봉사하는 화원의 임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광범위했으며 일의 경중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어진 모사라는 중차대한 일부터 각종 지도나 형세도, 궁궐도와 관아도, 일월오봉병·모란도병·십장생도병·영모도병 같은 궁궐 내부를 장식하는 각종 병풍과 가리개, 교화를 목적으로 한 감계도와 고사도, 각종 의궤(儀軌)의 그림, 오륜행실도 같은 도서의 삽화 등을 그리는 일, 세화 같은 길상도를 그리는 일, 분원에 파견되어 도자기에 문양을 넣는 일, 그리고 필요한 경우 왕에게 올릴 보고서나 문서에 도식을 그리는 간단한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일이 있었다. 또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중국에 파견되는 연행사나 일본에 가는 통신사 사절단을 수행하여 여러 회사에 대비하는 일도 수행하였다.채색 다루는 모든 일을 담당이 모든 일의 공통점은 일의 난이도를 떠나 채색을 사용하여 작업한다는 점이다. 채색 원료의 실용성 판단, 제조법의 습득을 포함하여 채색을 다루는 일은 모두 화원의 고유 업무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국가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료들끼리 모여 기념화를 만드는 풍조가 널리 성행하였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그림이 궁중의 행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각종 궁중행사도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이러한 그림도 관청이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되고 행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으레 행하는 순서로 운영되었지만, 처음에는 관료들이 결성한 계회의 기념화로 출발했다. 궁중행사도는 관청 보관용 혹은 궁중 내입용을 포함하여 관료들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여러 벌이 제작되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인 만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여러 화원이 공동 작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화원은 도화서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 관청에 관할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한두 명씩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 후기에는 특별한 업무를 맡기기 위해 임시로 대기시키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라는 것이 있었다.이 차비대령화원의 운영은 정조 7년(1783)에 규장각을 중심으로 절목을 갖추어 제도화되었으며 이후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이들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관직과 녹봉, 근무 조건에서 일반 화원과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으므로 일반 화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화원들 간의 경쟁 또한 치열했다. 이 점은 국가행사를 위한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에서 일한 뒤에 그 공로로 상전을 매길 때 몇몇 화원들은 차비대령화원으로 승격되는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이들은 원래 규장각 소관의 서책과 어제를 인찰(印札)하는 일을 전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나 국가의 주요 회사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컨대 1795년 정조의 화성 능행을 기념한 〈화성능행도〉 제작에 김홍도가 관여하였고, 당시 차비대령화원이었던 최득현(崔得賢)·김득신(金得臣)·윤석근(尹碩根)·이명규(李命奎)·이인문(李寅文)·허식(許寔) 등이 실질적인 제작자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헨리 무어의 작업 세계에 대해서.(Henry Moore,1898-1986년,영국)헨리 무어의 조형 이념의 근원은 생명력, 인간애 그리고 자연성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무어는 그의 작품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자연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무어는 현대 미술이 소외되어 있었던 영국에서, 엡스테인(1880)과 더불어 아방가르드 운동을 전개시켜 영국의 젊은 조각가들에게 새로운 예술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브랑쿠시와 피카소에 필적할 만한 조각가로 영국의 현대 예술운동의 주역을 맡고 있었다.●무어의 작업 배경(요크셔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영향이 조형 세계의 커다란 영향)-언덕과 골짜기와 근처의 거대하고 자연적인 돌더미들. -탄광 마을의 싸여진 폐산더미-고대의 낡은 성과 유명한 전쟁터 -중세풍의 수도원>>자연에 대한 감동을 주로 인체와 자연을 하나로 연결 제작.그의 작품성은 원시적인 경향에 가까웠다. 그는 1919년 리즈 도서관에서 영국의 미술 비평가 로저 프라이의 저서과 를 접하면서 원시미술 즉 아프리카 흑인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프라이의 영향을 받아 대영 박물관에 자주 찾아가 원시 고대 유물들을 스케치 함.무어는 조각예술의 출발은 당대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원시조각에의 깊은 관심, 즉 초기 르네상스의 로마네스크, 고딕, 아프리카, 잉카, 이집트 등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형태의 집중력에서 ‘구심력적’ 표현을 위주로 출발하여, 그의 초기 작품이 원래 경직성, 고요함, 정온함을 지닌 양괴적ㆍ구심력적 표현을 나타내고 있음으로서 어디까지나 원시조각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그의 초기 작업은 나무와 돌 등을 직접 깎아서 만든 조각이었다. 그에게 원시 미술은 그의 예술 세계에 지적인 영감과 기술적이 기교를 동시에 제공한 동기가 되었다. 그가 원시 조각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작품의 형태는 단순성과 응집성을 표현 .이것은 석조 반신상으로 인체의 표정이나 형태의 변형에서 원시 조각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스톤헨지의 거대한 돌기둥처럼 신비롭고 추상적이 작으로 「두 개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내적인 힘, 유기적인 생명력의 표출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는데 지적인 영감을 제공한 것은 원시 고대 유물이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무어의 작업 발전 과정-제이콥 엡스타인의 영향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엡스타인은 당시 영국 미술계에서 최고의 작가 중 하나였다. 무어는 초기에 앵글로 색슨 조각의 영향을 받았음.-무어의 발전 과정은 두 가지 측면, 즉 기법적인 측면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직접 쪼아내는 기법을 아주 좋아해서, 몇 점의 테라코타 작품을 제외하고는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제작한 거의 모든 작품을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다. 또한 콘크리트 작품도 몇 점 있다. 1939~1945년 사이에도 깎아 내는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 대부분이었지만 테라코타로 된 ‘습작’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테라코타 습작들은 마치 나중에 같은 주제를 대작으로 만들 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이 임시 재료에 기록해 두었다.●무어의 작품 경향1930년대-고전과 낭만적 요소 즉 질서와 초월, 지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고, 추상적 요소와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포함시켜 개성을 잘 살림.(인간상 즉 가로누운 자태가 중심적 테마)추상적인 형태와 구상적인 형태가 혼연일체됨에 따라 전체적인 이미지는 신비스럽고 비현실적인이나 유기적인 생명감을 추구.무어는 조각과 풍경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산과 계곡, 해안, 동굴을 표현하기 위하여 인간 신체의 형상을 자연 풍경의 특성으로 변형).납이나 목재의 형태에 철사를 첨가한 여러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추상적 형식으로 덩어리를 개방하여 흩뜨리고 이들을 몇 개의 무리로 조합함으로써 공간에까지 깊은 관심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비어 있는 곳과 닫혀진 공간 사이에 긴장감을 만들기도 했다. 엄격한 기하학적 단순화와 추상의 영역에서 제작이 계속되었는데 그것들은 유기적 성질을 이용한 인체에 대 변형들이었음.1940년대-인물에 더 큰 구멍을 내어 공간을 확대시켰으며 구성은 더욱 복잡해졌다. 공간의 활용과 독특한 인체의 구성은 전후에 더욱 다양한 테마와 형식을 진전시켰다. 그는 인체상이든 두세 덩어리의 추상조각이든, 자기상실로 인한 고독을 품은 현대인의 우수 어린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사랑이나 신뢰를 잃고 가치관의 혼돈에서 인간성마저 상실한 텅 빈 자아를 의미하고 있다.나무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유기적인 공간으로 처리.얼굴과 가슴은 오목형으로 함축된 공간을 부여하고 인체의 변형된 사지는 자유롭게 묘사되어 있다. 무어는 인체에 구멍을 뚫어 현대인의 공허한 가슴을 상징했고 더불어 그 빈 가슴을 채우겠다는 절대적인 인간애를 담음.절대적인 인간애에서 모성애의 이미지로...무어는 가족이란 모티브를 형성하는데 추상적, 유기적 형태의 구멍을 사용하였다. 이 구멍의 의미는 자기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궁을 은유한, 생성의 원리를 내포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자식에게 주는 자양분의 근원이 도기도 하고, 어머니의 가슴이나 유방을 의미하기도 한다.무어의 작품을 통하여 ‘인간 본성의 회복’이나 ‘모성애’를 자연 속에 부여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가져오게 하였다.1949년에 제작한 「가족상」,「모자상」은 대부분 자연 환경적 공간으로 나무, 잔디 등 자연 경관과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무어는 학교 건물과 주위의 숲을 배경으로 자연 경관과 공간의 조화에서 영감을 자애는 작품을 구성하였다.무어의 조각 작품은 환경 공간을 개선하고 자연성, 생명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그의 조형 이념과 조각 작품들에는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인식이 그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1950년대-「왕과 비」는 군림의 뜻을 지닌 왕과 왕비의 모습이 아니라 미케네, 아테네를 여행하면서 얻은 무어의 영감에 의해 왕의 모습을 그리스 신화에서 보이는 신비스러운 동물의 형태로 묘사하였다. 무어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인의 특징인 피곤과 경쟁에 대한 역설을 표현함과 동시에 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였다.1945년 이후로는 가끔씩 자신의 형태 감각을 직접 깎아 내는 기법으로 시험했던 것 같지만 사실 청동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라는 작품은 처음에는 21cm의 청동 모형으로 만들었고 다음에는 같은 해에 62cm 높이의 모형을 제작, 그 후 2m 높이의 실제 작품 크기와 모형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단계는 262cm 높이의 느릅나무로 조각한 대작을 완성하였다. 점차 청동이 작품의 최종 재료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모형들을 수정해 나갔다.「수직의 내부와 외부 형태」-내부는 실제 모습이고, 외부는 안쪽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형태는 자궁이나 태아의 원형적인 모습으로 창조적 상징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작품에서 생명의 어머니, 죽음의 어머니 즉 인간 근원의 자아 의식에 대한 본래적인 모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무어는 작품의 외부와 내부, 어머니와 자식, 육체와 영혼, 세상과 인간, 이러한 모든 것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1959년 작품「두 조각의 와상」은 그의 새로운 조형 감각으로 제작되었는데, 인체의 덩어리를 절단하여 얻어지는 조각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조각을 서로 결합하려는 접합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화를 시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이 주는 거칠은 질감은 자연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연의 형태를 완전히 수용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상체의 덩어리는 팔의 절단을 통해 단순화를 시도하고 절단면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자국은 부서진 바위 덩어리의 형태를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자연 형태에 대한 관찰에서 얻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1960년대-무어는 1963년 「아치 형태」를 제작. 작품은 마치 신비의 동굴, 관문처럼 풍경 속에 서 있다. 2개의 형체가 만나서 둥글게 깎아진 것으로 인위적이지 않은 이 작품의 기본적인 형체는 인체에서 비롯된 두 개의 조상이며 독립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조각은 형상과 공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연속체로 여겨지고 있으며 들판 끝에 수직으로 반복하여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 즉 자연과도 시각적인 조화를 얻고 있다.1970년대-1976년 작품인 「와상」은 뼈, 조개껍질 등 자연물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 제작되었는데 이 형상은 동물과 인간의 환상으로, 바위나 산과 같이 튼튼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자연의 이미지를 형상화시켜 상징적인 형체로 변형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과 자연을 화합시키려는 의미로 여체를 형상화하였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여체의 곡선은 곧 산이나 언덕의 곡선과 합치는 이미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만든 「모자 와상」에서 어머니의 가슴과 유방은 어린이의 관점에서 보면 어린이 생명의 근원이다. 대지의 영원한 상징인 ‘모자상’의 요소는 형태간 공간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방대한 공간세계와 참을성 있는 인간성 사이의 관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웅변적인 구멍 공간은 오른쪽 팔을 구부림으로 자연히 생긴 구멍이나, 그것은 해부학상으로는 어긋나는 구멍이다. 즉 구성에 있어서 다른 구형과 함께 리듬을 주기 위한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구멍 공간이 작품 요소가 되고자 한다면 형태공간과 관련을 맺기 위해 어느 정도의 왜곡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질료와 형식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해석해 나가면서 표현의 자유를 얻고 있는데 열려진 공간 속에 놓여진 조각이 공간 전부를 볼 수 있도록 제작된 상태인 것이다.●무어의 작업 중점- 두 가지 견해1)“재료에 충실하기”- 조각작품의 유기적 형태와 그 재료의 유기적 변화과정은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 무어는 단단한 덩어리를 파나가는 작업을 할 때, 자연적으로 형성된 대리석 무늬나 석회암 줄무늬, 혹은 나무결을 작업의 계획도에 따라 제작하였다. 작업이 재료에 긴밀하게 반응하면서 진행되었으므로 완성된 형상은 재료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다. “모든 재료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재료를 통하여 어떤 개념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조각가가 직접 작업을 하면서 재료와 적극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함.
미술교육의 방향우리나라 사람들은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6년을 합해 보통 미술교육을 12년 동안 받으며 유아교육과 대학까지 합하면 1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통해 미술을 접한다. 그런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사람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현대미술의 여러 현상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는가? 그렇게 장기간의 미술교육을 받으면서도 일반적으로 미술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삶과 생활 속에서 미술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개선하려는 생각을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게 못하다는 대답이 많다면 그동안 미술교육은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해왔는가?미술교육은 전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다. 이것은 미술에 대한 소비자 교육이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대학에서 미술을 전문적으로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들 중에서도 나중에 미술가로 활동하는 비율이 매우 작은 수에 불과하다면, 표현과 실기 중심의 미술교육은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하는 문제임에 분명하다. 설령 작가를 키우기 위한 전문적인 미술가교육이라 하더라도 바람직한 실시활동을 탄탄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시지각 교육과 미적 안목을 기르기 위한 교육, 넓은 개념의 조형능력을 기르고 창의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교육이 절실한 것이다.우리의 삶은 장님이 아니 이상, 그리고 잠자는 시간이 아닌 이상 시, 지각을 통해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판단하며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지각과 판단과 개선을 가능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술교육의 목적으로 앞에서 제시했던 미술의 소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바로 미적 안목을 갖는 것임에 분명하다. 미적 안목을 갖기 위해서는 미술의 제반적 현상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또한 미술에는 세 측면이 있으며 그것은 미술의 형식, 미술의 표현, 미술의 가치이다. 미술의 형식은 조형성으로서 미술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며, 그것은 미술교육에서 미술이해교육을 통해 이루어짐을 앞에서 언급했었다. 즉 미술은 나름대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은 미술표현의 기본 구조가 되고 미술 감상의 기본 근거가 된다. 이런 미술 기본 형식에 대한 이해는 미술의 창작과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교사는 미술교육에 대한 방임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에서 검토했듯이 우리나라의 미술교육은 표면적으로 창의성 중심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사는 미술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창의성을 계발한다는 입장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창의성 중심 미술교육은 학생의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미술을 통한 창의성 계발. 표현과정의 중시라는 큰 특징을 갖는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사의 간섭을 극도로 경계한다.하지만 자기표현만큼 미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도 중요하고, 창의성만큼 미적 안목과 조형능력도 중요하며, 표현과정 못지않게 표현결과 역시 중요하다. 또한 창의성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표현만 한다고 해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체계적 이해 과정에서, 어떤 계기에 의해서, 자극과 격려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계발되는 것이다. 방임은 교육이라고 할 수 없으며 간섭과 지도는 분명하게 다르다. 간섭은 학생들의 표현과정에 의미 없이 끼어들어 그들의 표현을 방해하는 것이지만 지도는 학생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도록 자극하고 격려하고 이끌고 도와주는 활동이다. 교사의 합리적 지도를 간섭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며 그 지도는 적극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교사가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한다고 했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 지도가 기능이나 기법을 가르치는 것이거나, 암기식이거나 일방적인 설명식이거나, 또는 지식 전달식으로 흐르는 것이다. 표현지도에서 교사는 동기 부여나 발상을 효과적으로 하고, 표현과정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여 개별적으로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작품을 가지고 토론하고 발표할 때 그 흐름을 조정하게 된다. 그러나 미술의 이해지도나 감상지도에서 교사의 역할은 매우 막중해진다. 어떤 하나의 원리나 지식을 가르치려 하거나 일방적으로 교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달하려 해서는 학생들이 미술을 멀리하도록 도와주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므로 미술의 이해나 감상을 지도하면서도 일정한 체계 속에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 표현을 활발하게 이끌어 내고, 충분한 시청각자료 등의 참고자료로 재미있으면서 쉽고 체계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하며, 그것을 미술표현과 연결시켜 학생들이 사실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체험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그런 측면에서 교사의 많은 역할과 자질이 요구된다. 그런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교사양성기관에서 합리적인 교육과정에 의해 미술을 이해하고 조형 능력과 감상 능력을 갖춘 교사의 배출이 절실한 것이다.미술이 교육에서 공식적인 교과로 받아들이는 데는 실로 긴 세월이 필요했다. 물론 미술가를 기르기 위한 미술교육은 도제형식으로 실시되었지만 학교에서의 본격적인 미술과 교육의 역사는 백년이 약간 넘을 뿐이다.지금까지 여러 형태의 미술교육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실시되었으나, 이러한 많은 목적들을 포괄적으로 표현기능 중심 미술교육과 창의성 중심 미술교육, 이해 중심 미술교육의 세 흐름으로 묶을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들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특징, 대표적인 학자나 미술교육 운동, 검토와 시사점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