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친일파의 의미1 친일파란?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세와의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보다는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 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사회적 언어는 그 개념의 형성이전에 반드시 역사적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친일파’개념 역시 가혹했던 일제 36년 간의 식민지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언어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역사적으로‘친일=반민족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시기의‘친일’에까지 이‘친일파’개념을 적용하는 것도 모순적인 사고이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외세의 침략을 받는 나라에서는 항상 외세와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 출현했다.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19세기말의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친일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친미파, 친청파, 친러파 등이 함께 존재했고 이들 정치 세력의 배후에는 반드시 열강의 힘이 끼여들어 있었다.친일 이란 일제식민정책에 어떤 형식으로든 협조·기여한 행위를 말하며,‘친일파’란 그런 행위를 한 자를 말한다. 한마디로 민족과 역사보다는 개인의 안녕과 영달에만 매달려온 민족반역행위와 민족반역자를 일컫는 말이다. 친일파(親日派)는 말 그대로는 '일본에 친한 사람들 혹은 무리들'을 말한다. 친일파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만 이해하면, '친일파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도 일본과 친한 사람들이나 집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친일파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친일파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하였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에 있는 지인(知人)과 가까이 지낸다거나 일본인들과 사업차 거래하는 사람들까지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에 편승하여 민족을 배반하고정권 청원서를 내기 위해 도쿄에 갔다가 호텔에서 양근환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친일의 화려한 막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옛 일진회 회원들로서 이인수, 김택현, 최영년, 최정규, 민흥식 등 또한 직업적 친일파 인물들이다.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전력을 기울여 설치를 서두른 것이 보민회다. 보민회는 1920년 봄쯤부터 총독부가 직접 배정자와 최정규, 이인수, 김택현, 최영년 등 옛 일진회 잔당(제우교도)을 후원해서 만든 무장 밀정단체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일본 관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을 중심으로 지부를 만들어 독립운동자를 색출하거나 동포들을 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특히 최정규가 초대회장으로 있을 때는 횡포가 극심해 무고한 양민까지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변절하여 독립운동을 파괴하는데 이용되었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희선, 신태현을 들 수 있다. 한때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일제의 회유 등으로 변절하여 밀정 짓을 한 경우는 가장 비밀스런 공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더구나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위의 두 사람은 우연히 사이토문서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김희선은 참의부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였다. 사이토 문서 제739호는 유동열과 김희선을 투항시키기 위한 자금청구서인데, 유동열은 불응했으나 김희선은 투항하였다. 투항한 대가로 사이토에게서 거액의 '하사금'을 받은 그는 이후 일제를 위해 충실한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일제의 밀정으로 변신했던 그가 1969년에 대통령 표창, 1980년에 국민장을 받아 얼마전까지 독립유공자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것이다.그밖에 3·1운동 당시 축음기·환등기·영사기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세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유일선, 도쿄유학생을 감시했던 홍준표, 재일 조선인노동자를 협박하여 고혈을 면서 지방의회라는 유산층 회유장치조차 효율적 전시통제 속에서 형해화되어 갔다. 일반 민중뿐 아니라 유산층은 자신들이 희구하던 엘리트적 정치욕구 조차 통제 당하면서 무제한의 효율적 수탈대상으로 전락하면서도 최소한의 저항의지조차 보이지 못했다.{) 정태헌,「1930년대 조선인 유산층의 친일 논리와 배경」,『친일파란 무엇인가』 p100~101참조민족문제연구소『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문제』,아세아문화사, 2000임종국, 『일제침략과 친일파』, 청사, 1982(4) 민족주의자들의 변절일제는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적 위기에 빠졌고 여기에 광주학생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자 식민통치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일본은 조선에서의 식민지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되어 사회는 철저히 통제되었고 근대화라는 명분아래 철저히 수탈당했다.이 같은 상황에서 민족주의자들의 변절은 이미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로 독립의 길을 포기한 자들의 예정된 행로였다. 국내에서 일제의 전승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가운데 국제정세와 전쟁상황이 왜곡되어 알려지자 투쟁을 포기하고 일제에 동조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언론·종교·문화계 인사들로서 주로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의 노선을 갖고 있던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대륙침략을 일제의 국력확대로 해석하고 일제에 대한 종속으로 민족의 장래를 보장받으려 하였다.만주침략을 단행한 일제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고 전향운동에 주력한다.전시체제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유지해 둔 채 탄압정책만으로 통치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위협과 회유로써 사상 전향 을 유도하여 민족운동을 포기하고 이를 통치선전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전향 이라 하는 것은 이전의 자신의 정신적 신념이나 사상적 경향 또는 처지를 바꾸어 천황제 권력에 자발적으로 승복한다는 의미를 유도한다. 정신작흥이라는 것은 일본인과 공동으로 황은을 비는 관등행사를 주최하고 만주에 침략한 황군을 위문하는 일이었다.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불교계는 시국강연과 국방헌금, 위문 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하게 된다.그리고 각 본산 입구에 일자아기 게양대 설치, 말사에도 가급적 건설, 불단 정면에 황군 무운장구 위패를 모시고 매일 아침 6시에 묵념, 매월 1회 부락민의 애국일 행사에 사찰대표자 참석 등의 사항을 결의한다.황국익찬(皇國翼贊)의 종교운동을 펴기 위해 불교신체제 운동위원회가 구성이 되고 비행기헌납모금운동, 시국순회강연, 징병독려강연 등을 연다. 대동아 전쟁을 질시 받는 조선 불교계의 도의를 회복시키는 국가의 일이라는 주장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종욱은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 청년을 사지로 내모는 징병제에 대해 극찬을 하였다. 또한 젊은 승려들에게까지 참전을 권하는 글을 발표한다.일제의 친일 회유 방법으로는 일본 시찰이 대표적이다. 식민 통치자가 피지배 민족의 지도적인 인물을 종주국에 유학이나 시찰을 시키는 것은 1차 세계대전 후 두드러진 사례이다. 총독부는 조선 불교에 대해서도 친일분자 육성 목적과, 피폐한 조선불교와 1차 대전 후 전쟁 경기로 윤택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전돼 있는 일본 불교를 비교시켜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 불교의 우월성을 심어주고 독립자존의 민족적 자긍심에 바탕한 독립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함이다.승려들의 시찰은 그 자체가 친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총독부나 도청의 여비 보조와 주선으로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다. 식민 통치자의 회유정책으로 실시된 일본 시찰에 참가한 조선 승려들은 대개 시찰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파로 전락하는 예가 많았다.▶천교도천도교는 흔히 우리나라 근대화기의 대표적인 민족종교로 일컬어지고 있다. 3.1운동의 준비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 핵심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천도교는 신한 민족사적 과제는 외세의 개입이 없이 조선인들 스스로에 의해 조선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더라면 당시의 내재적 제반여건에 의해서 완벽히 실현될 수 있었다. 곧 해방공간의 내적 원동력에 의해 구조 바꿈과 사람 바꿈을 통하여 식민지 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재적 역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의한 점령정책은 식민지 잔재 청산을 좌절시켰다. 미군이 조선에 상륙하기 이전부터 ‘일반명령1호’에 의거 식민지의 기본구조 및 사회구조와 친일파를 보호 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이 정책은 미군이 상륙하면서 더욱 본격화된다. 미국은 이미 1944년부터 조선에서 일본의 총독 정치를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하고 미점령군은 조선상륙 후 총독부 존속을 공포하며 일본고위관리 대부분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존속시켰다. 이에 따라 해방공간이 대중적 혁명에 의한 기존 식민통치구조의 와해를 저지시켜 식민지 잔재 구조가 지속될 수 있는 터전을 닦았고 해방초기의 구조 바꿈은 무산되었다. 그것도 미군이 전쟁중의 적국이었던 일본과 일본군대와의 제휴를 통하여 주로 전쟁 중 동맹세력을 제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반소, 반공, 반혁명을 정책기조로한 미군은 ‘일반 명령1호’에 의해 주로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인을 동원해 조선인 대중투쟁으로 와해 직전인 식민지 통치구조를 지탱한 뒤 미군정을 실시한다. 이제 미군정은 점령정책 기조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조선인들과의 동맹을 결성하여 그들의 점령정책을 구현해 나가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잔재인 사회 정치구조를 재생시키고, 이 구조의 점유 자를 직 간접적으로 친일파로 채워넣어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켰다. 미군정은 크게 나누어 두개의 조선인 집단과 동맹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하나는 조선인 구래의 지주 계급과 지주 자본가 계급이다. 이 집단은 주로 직접적인 친일파와 간접적인 친일파로 구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관료집단이다. 이 집단은 거의 전부가 직접적인 친일파 집단이다. 이 들 직간접 적인 친일파 집단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다.
지역과 환경 답사를 다녀와서...느즈막한 학기에 듣는 교양과목이라 그다지 큰 부담감은 덜어둔 체 답사길에 올랐다.어느 지역이든지 그 고장만의 독특한 내음이 존재하듯이 안동은 전통문화의 보존과 선비의 옛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 발걸음이었다.따스한 9월의 태양아래 우리는 두어시간을 달려 안동댐에 도착했다.영남 지역 어느곳이든 낙동강과의 만남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유독 안동지역은 그 인연이 깊은 곳이란 생각을 했다. 이날 찾게 된 안동댐과 안동하회 마을이 모두 그와 관련된 탓이리라......{우리가{먼저 답사를 한 곳은 낙동강 상류에 건설된 다목적 댐인 안동댐이었다.☞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수문을 닫아 놓았다. ☞수량의 변동이 심하여 뒤 둑에 단구모양 의 지형이 발달하고 있다.1976년 완공이후로 안동댐은 최고 9만 ㎾의 전력량과 그로 인한 이득을 톡톡히 안겨주고 있었다. 하류지역의 연례적인 행사인 홍수의 피해를 줄이고 안동을 비롯한 낙동강 중상류 지역의 도시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낙동강 중, 상류 유역의 논과 밭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구미 공단 등의 공장 지역에 공업 용수의 공급과 전기를 일으켜 공급하고 관광지로서 많은 사람들을 찾아들게 한다.그러나 수자원의 개발은 이러한 효율적인 면 뒤로 많은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먼저 수자원 부존 지역과 수요지역이 편재되어 있어 용수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1960년대 이후 수계별로 다수의 다목적 댐이 건설됨으로써 새로운 댐의 개발적지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셋째는 댐 개발의 경우 주민들의 이해 관계로 인해 반대가 심하며, 지가의 상승 등으로 새로운 댐의 건설이 어려운 상황이다.또한 일사량이 적어져서 개화가 잘 되지 않으며 그 결과 수확량이 감소되어, 식물 생태계 및 동물 생태계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안동댐은 각각의 장단점을 가진체 오늘날 안동의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민속 박물관에서 간단히 중식을 해결한 우리는 민속 마을을 찾기 위해 다시 차에 올랐다.중요 민속자료 제 122호로 지정작천고택(류시주 가옥) A.병산서원 B.화천서원 가.겸암정사 가.옥연정사 가.원지정사 가.빈연정사 가.상봉정 가.파산정하회마을은 전통적 사상인 풍수지리적 지형이다.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그러나 현대의 풍수지리적 재해석에서는 산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우리 국토에서 자연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려는 선조들의 과학적인 지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지리교육과 전영권 교수님 세미나 안동 하회마을(풍수의 허와 실)세거(世居)한 성씨들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풍산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홍수,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계시를 받고 큰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기념사진 촬영 ☞서민들을 위한 놀이인 하회 별신굿놀이이곳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방문한 적이 있고 그후 전세계에서 더 유명해 졌다고 한다.기념으로 만든 그녀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사진을 촬영했다.풍수지리적인 특징 뿐만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는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현장의 보고였다.아쉽게 다 찾아보지 못한 곳에 관하여 레포트를 계기로 더 조사를 해봄으로써 나의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다.이곳에서는 국보, 보물등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유형/무형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먼저, 하회마을의 전래놀이로서 서민들을 위한 놀이와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병존하였다.굿을 겸한 탈놀이인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69호)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서낭신에게 별신굿을 해왔는데, 굿과 아울러 서낭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탈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탈놀이 중에는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향하여 평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나무랄 수 있었으며, 양반에게 수작을 할 수도 있었다. 이 제도는 건전한 비판과 견제가 없는 사회는 온갖 폐단이 발생하므로, 양반이 서민에게 언로(言路)를 개방하기 위함이었다. 1928년 후 단절되었으나, 류한상(柳漢尙)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 (LINK 하회탈)과 함께 발굴하여 사라져가던 것이 재생(再生)되었고, 전 서울대 이두현 교수에 의해 해외주재 대사관을 통하여 외국에 하회탈춤이 홍보되었으며, 현재는「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와 동호인에 의해 상설공연장에서 매주 개최되고 있다. 놀이마당은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시회(詩會)를겸한 불꽃놀이의 축제(祝祭)가 있었는데, 이 축제를 오늘날은 속칭 하회줄불놀이라 한다. 이 불꽃놀이는 높이가 70m 이상인 부용대 단애의 밑을 흐르는 화천(花川:화산에서 이름을 딴 낙동강의 별칭)과 백사장(白沙場) 상공의 여기저기에서 은은하게 작은 불꽃들이 터지고, 화천(花川)에서는「달걀불」이라 부르는 등불들이 상류로부터 유유히 떠내려오면서 불빛이 강물에 아롱거리는 가운데, 강 위에서 배를 띄우고 선유시회(船遊詩會)를 한다.시 한수가 지어질 때마다 부용대 정상에서 불붙인 솔가지묶음을 절벽 아래로 던져 활활 타{{☞하회 선유 불꽃놀이 ☞불꽃놀이가 행해지던 부용대는 불꽃이 절벽 아래로 폭포(瀑布)처럼 떨어질 때, 백사장과 배위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낙화(落火)야!라고 크게 환성을 올려준다.이 낙화(落火)는 백사장 위의 은은하게 터지는 수없이 작은 불꽃 및 강 위의「달걀불」과 함께 그 밝기와 주기(週期)에 의하여 강약장단(强弱長短)의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불꽃놀이의 흥취를 한껏 고조시킨다.{이 불꽃놀이는 자연경관으로 높은 단애(斷崖) 단애 밑을 흐르는 강 강변의 백사장(白沙場)과 소나무들의 3가지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할뿐만 아니라 문화(文華)가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서민들이 중심이 되었던 별신제의 탈놀이와는 대조를 이루었던 행사이다.마을중앙의 삼신당에는 수령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를 잘못 건디리면 동티(-재앙)를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으며, 풍산류씨 입향 시조전서공(典書公)께서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서낭당, 국사당과 함께 삼신당은 풍수지리상 마을의 혈(穴)에 해당하는 곳으로,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정월과 대보름에 마을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여기서 이루어 졌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곳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삼신당 다. 이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나,관광객들이 무심코 뿌리를 밟고 다니면 벗겨질 위험이 있으므로 밟히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함이 시급하다원지 정사는 중요민속자료조선 중기의 정자 건축물로 주목된다.양진당(보물 제306호)은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선생이 거처했던 풍산류씨(豊山柳氏)의 대종택(大宗宅)이다.입암고택(立巖古宅)이란 현판의 입암(立巖)은 겸암(謙菴)류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의 부친인 류중영(柳仲영)선생의 호이며현재 당호로 쓰이는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류운룡선생의 6대손인 류영(柳泳)공의 호에서 취한것이다.규모는 앞면 4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덜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공존하고 있다.병산서원(사적 제260호)은 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서,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士林)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선생{{{☞원지정사 ☞안동양진당을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을 배향하였다. 1863년「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여러가지 모습의 안동 하회탈, 각각의 표정들이 익살스럽다.하회탈은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로서 지금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9개의 탈들만 전해지며, 3개의 탈이 분실되었다.하회탈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먼저 그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던 중에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을 맥타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교수에게 소개하여, 1954년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해외 학계에 발표함으로써 하회탈이 세계제일의 가면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그 후에 국내 학계에서도 활발히 연구하여 국보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겉으로만 보지 말고 깊이 연구하여, 그 소중함을 알아야 함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잃어버린 탈(총각탈, 떡다리탈, 별채탈)을 저명한 조각가와 화가 및 미술사 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복원을 추진하 있다.
학습주제 - 4. 이슬람 문화권의 형성과 확대(1) 이슬람 제국의 성립과 발전♣ 학습 핵심 : 종교 열정에 불탄 이슬람 교도들은 유럽·아프리카·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 시아를 정복하여 거대한 종교·문화·경제의 통합 세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동서 문화를 융합 한 고도의 문명을 창조하였고, 민족차별을 완화시켰으며, 종교와 상업이 조화된 고도의 도시문 명을 이룩했다.{이슬람교의 성립1 이슬람교 성립 이전의 아라비아+- 정치적 - 부족 단위의 생활+- 경제적 - 지중해~홍해~인도양을 잇는 중계 문역으로 번영. 무역 도시 발달(메카,메디나)+- 사회적 - 빈부의 격차와 계급 차별이 심했음+- 종교적 - 통일적인 종교가 없는 다신교였음2 이슬람교의 성립* 기본상식 - 이슬람(Islam)이란 이름은 신에 대한 복종(Submission to God)을 뜻하며 무슬림(Muslim) 혹은 모슬렘(Moslem)이란 말은 복종하는 자(Those who submit)의 뜻.* 마호메트 : 이슬람교 창시 (610), 코란 실천 강조(유대교,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일신교(알라)로 성립)┏ 헤지라(622) - 보수적 귀족층 박해로 메카에서 메디나로 성천, 이슬람의 기원┣ 교리 - 유일신, 만민 평등(경제적, 신분적 평등). 우상 배격┃ 경전은 코란, 하디스(마호메트 생전의 언행을 모은 책)┣ 특색 - 칼리프가 지배(정교일치), 성직자와 신도 구분 없음(철저한 인간 평등, 형제애)┃ 무력포교(지하드- 聖戰)인정, 개종을 강요하지 않음(이교도에게 지즈야 징수),┃ 개종하면 면세, 평등┗ 무력에 의한 포교 -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건설한 후메카 점령(630), 아라비아 반도 통일(632)☞ 이슬람 교도의 의무{이슬람교는 알라에 대한 절대 순종과 코란에 대한 절대 믿음과 실천을 강조하고, 신앙의 다섯 기둥, 즉 믿음 예배 단식 자비 성지 순례를 중시하며, 모든 이슬람 교도들은 신앙을 수호하고 확대하는 성전(지하드)의 의무를 진다.☞ 이슬람교는 성립 과정에서 어느 종교의 람교의 교리에 포함되어 있는 천지창조, 천당 지옥 설, 최후의 심판 등의 내용도 이슬람교가 성립 과정에서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3 이슬람교의 팽창(정복 전쟁; 聖戰,지하드)+- 아라비아 반도 통일+- 7C 중엽까지 시리아, 이집트, 사산조 페르시아 정복.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 8C 초 에스파니아 차지(711), 지중해 장악. 투르 푸아티에 전투(732)에서 패배☞ 이슬람 제국이 단시간 내에 거대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이슬람 세력이 팽창하던 시기의 유럽 및 주변 지역은 강력한 통일 제국이 없는 힘의 공백 상태였다. 그리고 이슬람 교도들에게 있어 성전은 천국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에 많은 교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 손에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 이라는 식의 포교 활동보다는 설득과 회유에 의해 이민족을 포용하였으므로 넓은 지역으로 짧은 시간에 전파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력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종교가 그리스도교 보다 더욱 철저한 일신교였던 데다가, 그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로마교회의 삼위일체설에 반대한 아리우스 파의 세력이 커서 보다 용이하게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이슬람 제국의 발전1) 정통 칼리프 시대(631~661) : 칼리프를 선거를 통해 추대한 시기 (4대 까지)* 칼리프 - 이슬람에서의 정치 종교적 지배자1 정복활동 - 사산조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2 이슬람교 확산 - 피 정복민에게 세금 부과, 지세 징수 - 피 정복민의 개종 촉진2) 옴미아드 왕조(661~750) :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옴미아드 왕조 성립,세습 칼리프 시대 세계 제국 건설1 무아위야(시리아 총독)가 정통 칼리프(모하메드의 조카 알리) 살해 - 다마스커스에 도읍2 정복사업 -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 진출, 이베리아 반도 진출(프랑크, 투르. 푸아티에 전 투 패배),3 대제국 건설 - 3대륙 정치·경제 특권 독점 → 아랍 제국5 아랍인 우월주의 : 이슬람교 개종자에게도 과세 - 각지의 반란으로 멸망.3) 제국의 분열1아바스 왕조(동 칼리프, 750∼1258) - 시아파가 바그다드에 도읍·옴미아드 조의 비 아랍 차별정책 반대 → 아바스 왕조는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는 데, 아랍인의 특권은 없어져 요직에는 이란 인이 등용, 궁정의 친위대도 이란 인과 투 르크인 노예병(마물루크)으로 구성됨.·아랍, 비 아랍계 무슬림 평등 대우(이슬람법에 의한 통치 시대: 아랍 제국에서 이슬람 제국으로 변화하는 개혁 ▶ 아바스 혁명)·동서 무역 번성 : 신라까지 진출·세제 - 이슬람 교도라면 비 아랍인도 인두세 면제, 아랍인이라도 정복지에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토지세 부과.2후 옴미아드 왕조(서 칼리프, 756∼1031)·성립 : 옴미아드 일족(압둘 라흐만), 코르도바에 건국.·발전 :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지배유럽에서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 지중해 무역 장악, 11세기 소왕국 분열+- 아바스 왕조(750~1258) - 옴미아드 조를 멸하고 바그다드에 세움. 【동칼리프】| 탈라스 전투(751)에서 당군 격파+- 후 옴미아드 왕조(756~1031) - 옴미아드 일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건설. 【서칼리프】4) 제국의 쇠퇴1 독립 왕조의 속출+- 파티마 왕조(909~1171) - 시아파가 카이로에서 칼리프 선언. 북아프리카 지배.+- 사만조(874~999) - 이란인이 세운 왕조. 투르크인의 이슬람 화에 큰 역할.+- 부와이 왕조(932~1025) - 945년 바그다드에 입성해 아바스 조 지배. 이크타 제도 실시→ 이크타제도? 이슬람적인 봉건제도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정복지의 군사령관들에게 그 지역의 징세권을 주어서 관할하도록 한 것이다.2 이슬람 제국의 멸망+- 아바스 왕조 -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1258)+- 후 옴미아드 왕조 - 11C 초 내분으로 여러 왕조가 교체되다 에스파니아에 의해 멸망{{ ◈보충학습자료◈< 자기 주도적 학습 자하심 가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가운데 대상 무역에 주로 종사하였다. 15년 연상의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하여 그녀의 내조로 오랫동안 명상과 수도 생활을 통해 신의 계시를 받고, 절대적 유일 신앙인 이슬람 교를 성립시켰다. 그는 자신이 아담,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이은 마지막 예언자라고 하면서 평등과 평화,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근간으로 하여 이슬람 교를 완성하였다.□ 이슬람 교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메트(이슬람어로 무하마드)가 완성시킨 종교. 크리스트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 전능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크리스트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 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 교 또는 회교로 불린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인용-□ 칼리프(caliph)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 대행자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하리파가 와전된 말이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후 그가 이룩한 교단 국가(敎團國家)의 최고 지도자로 뽑힌 아브 바크르가 ‘신의 사도의 대행자’라고 칭한 이래 ‘대행자’, 즉 칼리프가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로 되었다. 단, 이 대행자는 마호메트의 예언자 성격으로서의 대행자가 아니고 그의 정치·군사 지도자 성격으로서의 대행자였다. 19세기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칼리프의 칭호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로마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 교도를 대표하고 있듯이 칼리프라고 칭함으로써 술탄이 전체 이슬람 교도의 대표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1924년에 터키 공화국은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인용-□ 이슬람교의 5행1. 신앙의 증언 - 알라 이외의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호메트은 알라의 예언자이다 라는 구문을 외운다.2월 1일부터 한 달간 행해진다. 하루 종일 완전히 금식을 하며 차와 물은 물론이거니와 침을 삼키는 것도 금한다.4. 희사 - 현재의 이슬람교도는 수익의 1/40을 희사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베푼다. (연 1회)5. 순례 - 일생에 한 번 성지 메카의 카바 신전에 숭배한다. 갈 수 없는 사람은 대리인을 세워 갔다오게 한다.□ 코란(Koran/Qur'an)이슬람 교의 경전. 이슬람 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19년경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의 계시·설교를 집대성한 것이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40세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근교의 히라산(山)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코란》이란 아랍어로‘읽혀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계시 받은 마호메트의 말은 초기의 사도들에 의해 기억되어 낙타의 골편(骨片)이나 야자의 엽피(葉皮), 암석의 파편 등에 불완전한 문자로 기록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승이 다양해져 그의 집성·통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코란》의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는데,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루가 시도하여 본격적인 결집은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646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코란》은 당시 정리된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서 인용-□ 헤지라(Hegira)예언자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주’,‘이탈’을 의미하며, 중국의 이슬람교도는‘성천(聖遷)’으로 번역한다. 본래 아라비아 인이 자기 부족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마호메트가 고향 메카에서 쿠라이시 족의 박해를 받아오다가 마침내 622년 7월 16일, 소수의 신도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했다. 그 무렵 내전의 조정자를 찾고 있던 메디나의 지배자는 마호메트를 조정자로 맞아들일 것을 결정하여 그 이주가 실현되었다. 이것이‘헤지라’인데, 흔히‘도주’라고 번역된 것은 잘못이다. 마호메트는‘헤지라’이후, 메디나 사회를 이슬람교도의 사회로 통합하고, 메카를 비롯하여 주변의 인용-
(1) 사회주의 운동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처음 사회주의가 받아들여진 것은 3.1 운동 직전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을 통해서였으며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고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3.1운동 이후부터였다.기존의 전통사상과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사상이 우리나라에 수용되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우선, 일본의 독점자본 유입과정에서 식민지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양적 확대가 이뤄지고 동시에 이들의 계급의식·민족의식이 점차 고양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도자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3.1운동 실패 후 열혈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지도자 상을 갈구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붕괴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청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인 유학생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초기 사회주의 운동은 연해주의 공산주의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과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청년들이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사상단체를 만들고 지방에서 농민조합이나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사상단체로는 서울 청년회, 북풍회, 화요회 등이 있었다.이런 국내 사회주의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25년 4월에 성립된 조선공산당이었다. 이들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고 이후 운동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또한, 모스크바에 유학생을 파견해 공산주의 지도자를 키우기도 했다.1928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이 해체상태에 이르자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조선 공산당의 재건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당과는 다르게 지식인 중심이 아닌 노동자, 농민중심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당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것은 30년대 해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지주 소작문제에 식민지 권력이 개입하여 소작농민을 직접 파악함과 동시에 쟁의의 집단성을 분산시키고 농민을 개별 격파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쟁의의 결과 농민의 요구 관철은 19200-24년, 1927-32년 사이에 각각 28%, 15.6%이었던 것이, 1933-36년에는 58.9%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 초 소작쟁의의 급속한 증가와 그 농민요구의 관철상승은 농민들의 변혁의 욕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당시 일제가 농촌진흥운동과 소작조정령을 통해 농민운동 등 민족운동의 열기를 체제내화 하고자 했던 정책에 따라 농민운동이 식민지 권력의 영향권 아래 흡수되고 있음을 일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한편 식민지 농정의 모순 속에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가운데 자작빈농와 중농도 소작인조합에 가입함으로써, 1920년대 중반 이후 소작인조합은 농민조합으로 전환되어갔다. 농민조합의 단계에서는 소작쟁의의 성격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종래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에서 관계자의 검거 투옥 등의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농민운동은 경제투쟁으로부터 식민지통치에 대해 저항하는 정치투쟁으로 변화되었다. 즉 1920년대 후반 소작쟁의의 현상은 지주와 더불어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이행해갔는데, 이러한 쟁의의 주체가 농민조합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소작쟁의의 성격은 단순한 경제 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민족적 성격이 농후하였다.이러한 대규모 소작쟁의는 기본적으로 소작인의 경제투쟁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대규모의 지속적 쟁의가 가능하였던 것은 사회주의운동들의 지도적 역할 특히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의 조직적 지도와 관련이 있다.2 혁명적 농조운동1930년대 혁명적 농조운동이 출현하게 된 객관적 조건은, 농가경제의 파탄과 소작쟁의의 격증, 일제의 사회 정책적 농정과 농민에 대한 통제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일제는 1932년 이후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진흥회, 향약 등 관제 조직을 통해 농민들의 일상적 생단계에서 너무 조급하게 소모적인 과격투쟁을 벌임으로써 농조의 지속적인 활동역량을 크게 손실시켰다. 또한 초기 단계에서 운동의 지도층이 일종의 이념의 과격성을 보여, 처음부터 빈농을 중심으로 여러 계급.계층을 통일전선으로 결집시켜 운동역량을 강화하는데 한계를 보였던 것이다.3농촌계몽운동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가 사회운동의 주된 이념으로 발전함에 따라, 농민운동은 이후 조직의 정비와 확대 강화를 통해 농민 속으로 침투해갔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주의계열에서도 농민계몽 생활개선 농사개량 등을 주요 목표로 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농민의 생활의식의 변화, 영농개선, 협동 등을 통해 농민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농민이 당면한 생활난을 타개하고 농민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립적인 농촌경제를 창출하자는 것을 지향하는 운동인데, 여기에는 조선농민사운동 협동조합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이 속한다. 이 운동은 농민의 몰락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식민지 경제체제라는 외적 요인보다는 농민의 생활의식과 농촌사회의 생활조건이라는 내적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지 통치권력이나 지주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운동은 극단적인 정치개혁보다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였으며, 또 물질생활의 향상보다는 정신생활의 향상, 즉 도덕개조와 인격개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자립경제운동이었다.1930년대 초 농업공황의 영향으로 농민의 전층적인 하강분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조직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30년대 들어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자들은 농민획득경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는 혁농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체제지향적인 운동의 체제내 포섭정책을 취하고, 농민운동의 좌경화를 막기 위한 '사회운동의 안전판'으로서 개량주의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촉진하였음으로, 농촌계몽운동이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일제는 식민지통치에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도 했다는 건수의 비율은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1930년대만을 놓고 보면 1930년대 전반기에는 성공한 파업보다는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례가 많았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실패한 파업에 비하여 관철되는 사례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의식과 투쟁역량이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1933∼34년경부터 노동쟁의 건수와 참가인원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가 전쟁준비를 위하여 한국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전반기는 한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치열한 투쟁의 시기로서 흔히 노동운동의 격동기니 노동운동의 폭력화 시대라고 불리어진다.2종전기의 노동운동1930년대 말 이후 한국 사회는 이른바 일제의 본격적인 전시 동원체제로 편입되면서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노동능률의 극대화를 위한 극심한 통제와 억압을 경험하였다. 이에 따라 흔히 이시기의 노동운동은 침체기 또는 암흑기 라 한다. 전시동원과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한 전반적 억압이 가중되었던 상황에서 이 시기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부진하였다고 평가하나 관점에 따라서는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태업이나 집단탈주, 기계파괴 등 이러한 투쟁은 일제의 군수물자 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침략전쟁의 수행에 크나큰 차질을 초래하였다.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일제하의 노동운동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착취와 종속에 반대하는 경제적 성격과 아울러 민족차별에 반대하고 반일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 지식인이나 민족운동가들의 원조와 영향아래에서 성립하였던 이시기의 노동운동은 점차 노동자들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주체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과 생활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적 임무와 아울러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지향은 해방 이후에는 노동 영역에서 민주적인 권리들과 함께 사회 일반의 민주주의를 확것은 남성들의 비중보다 더 높은 것이다.여성들이 농민운동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 경우도 눈에 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고 활동 경험이 적기 때문에 지도적 인물이 적었다. 여성들은 농민조합 간부간의 연락과 각종 선전물의 운반 배포, 일제 경찰이나 스파이들의 감시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여성이 각종 사회운동에 참가하여 〈치안유지법〉으로 실형을 받는 경우는 9년 동안 46명 이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대신 여성들의 운동참가를 훼방하는 방법은 악질적 선전을 퍼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일제는 직접적으로 부형들을 선전 회유하여 자위단 같은 괴뢰조직을 만들어 운동을 감시, 보고하는 스파이 노릇까지 하도록 강요하였다.부인들의 자발적인 활동도 있긴 하였지만 일제의 체제내화 공작에 말려 들어간 사례도 빈번하였다.3 잠녀(해녀)투쟁1930년대 여성운동 중에 주목해 볼 것 하나가 1932년 1월 제주도 잠녀 투쟁이다. 이것은 일제시기에 일어났던 최대의 여성투쟁이었다. 생산자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수천 명의 잠녀들이 일제히 일어났다.제주도의 사회운동은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제주도도 일부지역이 아니라 제주도 전역에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잠녀들의 투쟁은 공동판매 때 해녀조합의 부정으로 인한 문제로 이미 1920년대부터 계속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1930년 9월 투쟁, 1930년 11월 제주도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 살포 등의 움직임을 비롯하여 점점 더 구체적이고 대규모 투쟁으로 나아갔다. 1932년 1월의 잠녀투쟁은 그 중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투쟁이었다.1930년 9월의 잠녀투쟁은 정의면 성산포산 석화채를 조합서기가 경쟁입찰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잠녀에게서 매수하려던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그러는 중에도 해녀조합은 해산물 수매가격을 인하하고 등급을 부당하게 산정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잠녀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1931년말부터 하도리의 잠녀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이다.
1,화투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倭(왜)가 신공황후 49년에 가야지역을 군사정벌하여, 4세기 말 5세기초에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대결을 벌이고, 5세기에는 한반도 남부를 일본영토로 중국남조 송(宋)에게 인정받는 등,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중심으로 약 3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흠명천황 23년에 이를 신라에게 빼았겼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한마디로 왜넘들이 우리를 오래전에 지배했었다는 우끼고 자빠지는 소리인거다. 물론 이 임나설은 이미 학계에선 검토의 가치도 없는 황당무계설로 판정, 더 이상 연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그러던 중, 본지 산하 "우리역사 바로눕혀 명랑사회 앞당기기 실천본부"에서는 일본의 역사 왜곡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특파한 고증전문위원들을 통해 이 임나설의 근거가 되는 "日本裸歌梨遺事" (일본나가리유사)를 다시 한번 정밀검토하게 되었다.그 결과 일본넘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광개토왕비와 칠지도의 명문만 삭제조작한 것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설과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책인 자체를 조작했음이 밝혀졌다.본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백제시대에 들어 우리 민족 고유의 두뇌 스포츠인 화투가 각종 문물과 함께 일본에 전수되어 당시 무지몽매했던 일본백성들의 여가선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의 문구가 그동안 의도적으로 지워져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음은 물론,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가 대규모로 숨겨져 있는 곳을 표시하는 보물지도까지 발견하는 사학계에 길이 남을 개가를 올렸다.더구나 이번 보물지도에 의해 일본 '파토'현에서 발굴된 여러 보물들은 모두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국보급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이 중 백제유민들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9세기경의 화투장은 인쇄상태가 선명하고 화투장의 질이 상당히 우수하여 그 당시 수준높은 우리 민족의 인쇄, 제조술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이번에 복원된 의 문구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 직접 건너가 화투를 전수했던 한 젊은이는 이 기간 동안 머리털이 다 빠졌다 하니 그 훈련의 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이 젊은이는 훗날 중국 본토로 돌아가 당시 화투의 볼모지였던 중국에 화투를 퍼뜨리기 시작해 오늘날까지도 중국 화투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니 바로 비광대사다.또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민화투, 월남뽕정도의 저급한 수준의 화투 문화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국내에서는 화투 종주국답게 계속적인 연구와 발전을 통해 화투문화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고도리가 개발되어 이미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폭넓게 행해졌다.고도리 문화가 조선시대 들어 백성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이 당시 고도리는 양반집의 규방에서 특히 많이 행해졌으며, 단오절 그네뛰기와 함께 여염집 처자들의 2대레포츠로 자리잡게 되었다.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 폐허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일부 고도리 중독증이 걸린 처자들은 고도리를 끊기 위해 작은 칼을 가지고 다녔으며, 이는 다시 한번 고도리를 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결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은장도의 효시다.한편, 조선말에 들어 서양의 선교사들이 포카를 들여와 보급하기 시작했으니 바로 '포카포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카놀이는 카드의 퀸과 킹 그림이 왕권모독이라는 이유로 왕실에 의해 금지되었다.그러나, 서양의 선교사들과 일부 포카옹호자들이 계속된 포카포교를 실시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을 잡아 모두 칼을 씌우고 능지처참하였으니 이를 '신유년에 피본 선교사들 박해', 줄여서 '신유박해'라 하며 더 줄여서는 '피박'이라 한다. '피박썼다'의 어원이 되겠다.이러한 조치에도 불구, 동양의 위대한 놀이문화라 일컬어지던 고도리에 대해 전해들은 서양인들이 고도리의 비법을 계속 전수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들의 청을 물리치고 쇄국정책을 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단대원군이었다.당시 흥단대원군은 가 미개한 서양인들의 손에 넘어가 숭고한 고도리정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강력한 쇄국정책을 펴게 되었다.상황이 이러하자 프랑스는 1866년에 7척의 군함을 이탈리아어(語) 카자(casa)가 어원이고, 르네상스시대 귀족들이 소유하였던 사교 ·오락용 (댄스 · 당구 · 도박 등)의 별관을 뜻하였다. 처음에는 대중적 사교장이었으나, 오늘날은 해변가 ·온천지 ·휴양지 등에 있는 일반 옥내 도박장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서 과세 · 관광시설 · 외화획득의 목적으로 개설을 공인한 데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왕국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18∼19세기에 유럽 각지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는데,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활발했으며, 혁명 (귀족계급의 몰락)이나 속화(俗化:악덕의 온상) 등 이유로 잇따라 금지되어 왔다.미국에서도 서부개척기 이래 도박이 활발했으나 카지노라고 하게 될 만큼 시설을 선보인 것은 19세기 중엽부터 남북전쟁때까지 미시시피강(江)에 있는 200여 척의 호화판 도박선이었다. 19세기 말에는 뉴올리언스에서 과세목적으로 공식개설이 허용되었다. 미국에서 개설을 허용하고 있는 주(州)는 네바다주 ·뉴저지주 · 노스다코타주이며,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 ·리노에는 20여 개의 카지노가 있다. 유럽에서는 지중해에 면한 남프랑스의 칸 · 니스, 1861년에 개설된 몬테카를로 (모나코 왕국)의 카지노가 유명하다. 그 밖에 이탈리아 (산레모) · 독일 (트라페뮌트) · 영국에서도 허가제의 카지노가 개설되어 있다. 중남미 여러 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관광객용의 카지노가 있는데,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샌환(푸에르토리코)의 카지노가 알려져 있다. 아바나 (쿠바)에도 카지노가 있었으나 혁명 후 문을 닫았다.아시아에는 일본 ·홍콩 · 마카오 등이 알려져 있다. 한국에도 관광업의 발전을 위해서, 국내 외국인이나 관광객용으로 서울 ·부산 ·제주 등의 관광호텔에 개설되었다. 일반적으로 카지노에서 이루어지는 도박으로는 룰렛 ·슬롯 머신 ·블랙잭 등이 있다. 왜 카지노에 가는가?사회적 상호관계 - 카지노에서 얻는 사회적 상호관계가 고독이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준다. 카지노의 직원뿐만 아니라 경비조차도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안전한것 자체가 흥분되며 그런 거짓말이 그들의 배우자보다 무언가 보이지 않은 힘을 얻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자아존중 - 게임 하나하나를 자신의 판단으로 진행해 나가면서 가족이나 타인의 시간이나 도움없이도 이젠 모든걸 혼자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 스스로 자신에게 능력과 권리를 부여함으로서 만족한다.크거나 작은 카지노 잭팟 뉴스 - 우승상금은 여러 도박자들에겐 제2의 자극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승리를 맛본후엔 도박이야 말로 지금 겪고 있는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비현실적인 확율의 규칙을 믿게 되며 복권과 같은 하늘의 별따기를 시도하게 된다.카지노의긍정적인영향 카지노산업은 외화획득률이 가장 높은 선진 관광사업이며, 필수 관광 상품입니다.미국,프랑스,영국,독일,스위스 등은 관광수입 세계 10위권 국가들은 세계 10대 카지노 보유국이기도 합니다.카지노는 많은 국가들이 주요 관광사업으로 적극 육성하고 있으며, 합법화된 여가활동으로 외래 관광객의 체제기간을 연장시키고, 경비지출을 증대시키는 관광상품입니다. 고부가 가치 외화획득 사업이며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유치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카지노 사업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4년 발효된 관광진흥법에 의거, 우리나라 카지노 사업도 그 발전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이미 정부는 주요관광산업의 일환으로, 카지노업의 정비와 육성을 병행해 나감으로써 카지노산업이 건전한 관광사업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밝힌바 있습니다.강원도 폐광 지역 카지노 리조트건설, 외국인 카지노사업 투자자유화, 1억불이상 외자를 유치하는 관광사업자에게는 카지노를 인가해주는 특별법 제정등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카지노 사업은 우리 관광사업의 새로운 중점분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그 발전성 역시 다른 분야 보다 큽니다.관광사업은 세계주요국가의 21세기 전략사업입니다.세계의 관광사업은 소득과 소비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발전하고 있습니다.세계05년에는 8백만명 유치를 목표로 관광진흥 5개년 계획(1999년~2000년)을 수립하였으며, 관광자원 확충, 관광상품개발, 관광인프라 구축에 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관광부 선정 7개 관광권 개발, 30개 문화관광 거점별 관광 패키지 특화,부산~목포 남해간 육.해상 관광밸트 조성에 8조 3천억원 투자등 2003년 관광수입 120억달러를 목표로 하는 '관광비젼21'을 발표했습니다.특히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2002년 월드컵등은 새로운 세기의 서막을 장식할 지구촌 축제로 기획되고 있으며, 세계 관광계 역시 한국관광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주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래관광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서 벗어나 해외관광시장의 변화에 눈을 돌리고, 고유한 관광상품 개발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자국관광사업의 발전을 기해야 할 때입니다.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관광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 차원의 심도있는 노력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관광한국의 내일은 어느 때보다 밝습니다.카지노의부정적인영향 앞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국가 사업의 하나인 관광 사업의 중요성과 그의 첨병인 카지노의 긍정적인 역할을 언급 했다. 외화 획득, 고용 창출, 국제수지개선, 투자 자극등 카지노가 지역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지대하다.정부도 카지노 사업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카지노업의 정비와 육성을 병행해 나감으로써 카지노산업이 건전한 관광사업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밝혔다.그럼, 현재 카지노는 건전한 오락 시설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기사에 따르면 강원랜드는 금년 상반기만 매출액 2,246억원을 달성, 하루 평균 12.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각종세금 및 기금 공제 후 당기순이익은 1,121억원으로 예상되며 강원랜드가 납부하는 국세 및 폐광지역개발기금 등 각종 세금과 기금 납부액은 매출액의 46%에 해당하는 1천억원에 육박, 지역경제 회생은 물론 지자체 및 관광산업에의 기여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