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문학작가론다산정약용1. 생애다산은 1762년에 경기도 남양주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翁)·태수(苔?)·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이 있고 자는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다산이 생존하였던 시기는 영조, 정조시대로서 새로운 학풍이 고비를 이루던 때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시대였다. 이문원의 관점에 따라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가. 제1기 성장수학기(1762-1782, 1-21세)다산은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부친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학문과 관리로서의 자질과 역할을 몸소 익혔다. 다산의 재능은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나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 때에는 역법), 산수에 통달하였으며, 9세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자기의 시문을 모아 을 만들었으니, 천재적으로 학문적 자질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또, 15세가 되던 해에 정조의 즉위로 관직에 오른 부친을 따라 상경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해 풍산 홍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나. 제2기 출사기(1783-1800, 22-39세)다산은 22세 되던 4월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학문과 재능을 인정받아 23세 때에는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였다. 다산은 이벽을 통해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얻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그 후 서양 근대의 천문학, 수학, 지리 등의 서적과 지도, 시계, 망원경 등의 새로운 기구를 보았다.29세에 공서파의 지탄을 받아 처음으로 충청도 유배되었으나, 10일 만에 풀려났다. 31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부친의 삼년상의 예를 다하던 중, 정조의 어명을 받고 거중기, 활거)를 사용하도록 제안하여 국가재정의 절약과 공정을 단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다. 제3기 유배기(1801-1818, 40-57세)소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는데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라. 제4기 퇴로기(1818-1836, 57-75세)57세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 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르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2. 문학사상가. 재도론(載道論)도에 근본하지 않은 문학을 부인하고 도에서 발원한 문학을 추구하면서 허문가식의 사장을 버리고 실용의 문학에 힘쓰기를 주장했다. 문장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문학이 갖는 사회적 효용을 중시한 것이다. 사회적 모순이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한 채, 문장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이해만을 생각하는 시는 시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문학정신이었다.)나. 조선시, 조선풍의 주체적 문학관다산은 조선 사람의 생각과 성정에 관련된 시를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조선인이니 즐거이 조선시를 짓노라’ 라는 구절이 담긴 시를 지었다. 또 그는 조선의 말로 시어를 삼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나 등에서 시어를 훈차나 음차의 방법을 이용해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시를 지었다.(보릿고개-麥嶺(맥령), 뇌물-人情(인정))보릿고개 험한 고개 태산같이 험한 고개 / 麥嶺崎嶇似太行단오명절 지나야만 가을이 시작되지 / 天中過後始登場「장기농가 10장」 중 발췌다. 사회비판 의식다음의 시를 살펴보자.燕子初來時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왔을 때??語不休 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語意雖未明 말하는 뜻 분명히 알 수 없지만似訴無家愁 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楡槐老多冗 “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멍 많은데何不此淹留 어찌하여 그 곳에 깃들지 않니?”燕子復?? 제비 다시 지저귀며似與人語酬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楡冗款來啄 “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槐冗蛇來搜 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답니다.”-「고시 8」겉으로는 제비가 황새나 뱀으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당시 지배층들이 서민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우화적인 수법을 동반하여 풍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제비는 지배 세력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서민층을 의미하며, 황새와 뱀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지배 세력을 의미한다. 다산의 우화시는 조선 후기 실상을 묘사하면서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형태를 띤다.)3. 문학작품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다산의 저술은 1922년에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集中本)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가. 경세유표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필사본으로, 44권 1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며, 1표(表) 2서(書)로 대표되는 경세론(經世論)을 펼친 저술 가운데 첫 번째 작품으로 일종의 제도개혁안이다.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인 1817년(순조 17)에 저술하였으며, 처음에는 48권으로 지었으나 필사하는 과정에서 44권 15책으로 편집되었다.경세유표의 저작목적은,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라고 하여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 보겠다는 뜻이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또한 이 책에는 남인 실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인 토지개혁 사상 뿐 아니라 기술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 실현이란 북학파들의 주장까지 폭넓게 담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사회경제적 이념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려 한 이상사회를 밝혀내는 지침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책은 당시 사회의 실상과 온갖 모순을 비판적 안목에서 상세히 서술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 및 경제 연구에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나. 목민심서48권 1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기구의 제도적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다산이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모두 72조로 엮었다.목민심서의 저작목적은 “현행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자”(因今之法而牧吾民也)라고 하여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공직자들이 마음과 몸을 제대로 수양하여 청렴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실제 행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서 아사지경의 인민들을 살려내자는 의도였다.목민관 곧 고을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술로, 고을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쳐 저술하고 있다.지방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것과 암행어사 곡산부사 등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고된 삶을 목격했던 다산의 생생한 체험이 녹아 들어있으며 조선후기 지방사회의 부패상과 인생문제가 소상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수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의 편에서 수령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어 다산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조선후기 지방행정의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책으로 다산이 돌아간 뒤 수많은 필사본이 유통될 정도로 널리 읽혀졌다..
【한국한문학작가론】-金宗直(1431-1492)-1. 들어가면서김종직(金宗直)은 세종(世宗) 13년(1431)에 태어나 성종(成宗) 23년(1492)에 세상을 떠났다. 곧 15세기 전반에서 같은 세기말까지 62년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세종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의 개화기에서 시작되어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을 체험한 후 성종대(成宗代)의 새로운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던 기간에 해당한다.김종직은 조선의 한 시대를 성의껏 살아낸 사람이다. 그는 수많은 시부(詩賦)를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정몽주에게서부터 내려오는 조선 사림의 도학 전통을 이어받은 도학자였으며, 김굉필과 정여창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였고, 훈구대신들이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계에 진출하여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사림 출신 관료였다. 그리고 재야에 머물던 사림파 도학자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데 튼튼한 발판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김종직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선택한 역할을 수행하며 한평생을 비교적 무난하게 살고 떠났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게 떠난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사후에 일어난 일들이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생전에는 논란에 휩싸이는 일이 드물었으나 세상을 뜬 이후에는 엄청난 사건과 논란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뜬 직후에는 그에게 내려진 시호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는 그의 글 한 편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2. 생애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자는 계온(季) ·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김종직(金宗直)은 6세부터 그의 부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특히 그는 부친으로부터 체계적인 유교교육을 받아 유가의 교양서적은 물론 역사서와 제자백가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한 것은 18세 무렵이다. 그는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며, 성종의 등훈육으로 이어졌다.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 등이 찾아와 배우기를 청하자, 옛사람들의 학문한 차례에 따라 먼저 『소학』과 『대학』을 읽게 하고, 후에 『논어』와『맹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지방관의 교육적 역할을 흥학사문(興學斯文)에 두고 최선을 다했다. 이에 그들은 김종직의 가르침에 따라 강령과 지취(旨趣)를 알고 도의(道義)를 연구하였다. 특히 함양군민들은 그의 덕을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만들고 참배했다.(『문집』년보, 45세조)46세가 되어 김종직은 선산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목민과 교화에 주력하였다. 아전들을 거느리는 데에 조리와 법도가 있었다. (『문집』년보, 46세조) 52세에는 금산(金山; 지금의 김천)에 서당을 지은 다음 그 옆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경렴당(景濂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이 당시 김종직은 밀양(密陽)의 제자들에게 편지로 학문하기를 권면하여「학규(學規)」를 만들게 하였고, 「향헌(鄕憲)」을 만들어 고을의 풍속을 바로 잡았다..(『문집』년보, 52세조)55세 여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가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성리학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아 교육하였다..(『문집』년보, 55세조) 57세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관내 고을을 두루 순찰하며 권과강독(勸課講讀)과 향음주의와 향사례를 거행하였다..(『문집』년보, 57세조) 58세에는 이조참판,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며, 59세에는 공조참판, 형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투기하는 자들이 많아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또다시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다.(『문집』년보, 59세조) 이로써 그의 관인생활을 끝을 맺었다.60세 이후에는 주로 밀양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강학(講學) 활동에만 주력했다. 문인 정여창 등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였다..(『문집』 년보, 60세조)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종직은 유년기부터 그의 부친에 의해서 유가의 기본 교양서적을 철저히 교육받았고, 체득된 유교적 소양을 토대로 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관인(官人)으해서만큼은 일찍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도학자로서의 김종직의 정체성에 의심을 갖는 후학들도 시를 비롯한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했다. 김종직은 어려서부터 문재를 인정받았으니 30세에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으로 있을 때 선배인 어세겸(魚世謙)이 김종직의 시를 보고는 “나 같은 사람을 말채찍을 잡고 그의 노예가 된다고 해도 달게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성종이 즉위한 후 문학 하는 선비 19명을 선발했는데, 그 가운데 김종직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성종은 우리나라 고금의 시문을 모아 편찬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동문선(東文選)』이다. 『동문선』은 성종의 명을 받아 서거정, 양성지, 노사신, 강희맹 등 훈구 관료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것이다. 김종직은 뛰어난 문재를 지니고 있었지만 사장에 대한 생각은 훈구 관료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편찬된 『동문선(東文選)』과 비견되는 『청구풍아 (靑丘風雅)』와 『동문수(東文粹)』를 스스로 편찬하기도 했다. 『청구풍아』는 시 선집이고, 『동문수』는 산문 선집이다.『청구풍아』와 『동문수』를 두고 나타나는 성현(成俔)과의 견해차는 김종직의 문장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당시 훈구 관료들과 김종직의 문학관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성현은 김종직의 『동문수』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김종직은 오직 문장이 번화한 것을 싫어하여 다만 순후한 글만을 취하였다. 비록 규범에 뜻을 다했다고 하지만 시들고 말라서 기운이 없어 볼만하지가 않다. 그가 찬한 『청구풍아』는 비록 시는 문장과 다르다고 하지만 시가 조금이라고 호방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 이것은 융통성 없는 편협함이라고 할 수 있다.)김종직의 문학적 취향이 지나치게 담백하고 단정하여 화려하거나 호방한 기운이 없다는 비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이 글은 문장에 대한 두 사람의 확연한 차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김종직은 당대 사림의 영수였고, 길재에서부터 내려오는 조선 초기의 도학 전통을 이어받은 도학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문들이 마치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서로가 상대를 쓸모없다고 여기는 상황을 개탄 하는 것이다. 김종직이 보기에 문장과 경술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나무의 뿌리와 가지처럼 한 몸이기 때문에 뿌리인 경술이 튼튼하면 가지 또한 무성할 것이고, 가지가 무성한 것을 보면 뿌리가 튼튼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김종직은 경술을 뿌리로 봄으로써 경술을 문장의 바탕으로 여기고 있다. 경전 역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전이 담고 있는 성리 도덕의 이치를 궁구하면 저절로 문장에도 통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2) 춘추필법적 역사의식의 반영김종직의 문학관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 바로 문학을 통한 춘추적 역사의식의 표출이다.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시부로 옮김으로써 의리를 표출하고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보자면 분리해서 논의해야 할 점이다.김종직의 이러한 문학관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조의제문(弔意帝文)」과「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라는 두 편의 시다. 「조의제문」은 말 그대로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의 글이다. 김종직은 이 글을 지은 내력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정축년 10월 모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경유하여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을 입고 헌걸찬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또 사서(史書)를 상고해 보면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스레 격살(擊殺)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 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으면서 꿈에 의탁하여 글의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 글을 지은 의도를 세조와 반드시 연관시킬 수 있을지에 의문을 나타내는 의견도 있다. 세조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난신적자(亂臣賊子)에 대한 응징이라는 유학적 역사의식의 포괄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조의제문」과 함께 무오사화에서 문제가 된 글은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이다. 이 시는 도연명의 「술주(述酒)」라는 시에 화 ‘춘추필법’적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김종직은 뛰어난 문재를 갖추고 있으면서 그 문재로 당시에 문명을 날리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시문을 통해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우의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김종직의 글 일부를 의리론적으로 해석하여 세조의 일과 연관시켜 역사를 평가하려 하였고, 이를 빌미로 무오사화라는 시련을 맞게 되었다.3) 애민 의식의 표출영남 지방의 한미한 가문에서 나고 자란 김종직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고, 지방관으로 일선에 나서 백성들을 상대했던 만큼 백성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와 그에 대한 감회를 주로 시부를 통해 표출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시부를 읽어 보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세력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제자들에게조차 비판받던 김종직이 자신의 생각을 한 단계 누그러 뜨려 표현한 것이 이러한 시부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재 양준과 공생 홍유손에게 준다(贈楊秀才浚洪貢生裕孫)」는 시의 한 구절에는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과 그러한 백성들의 현실을 돌아볼 줄 모르고 흥청대는 지방관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남쪽 고을은 세 철이나 가물어서,눈에 그득한 것은 피뿐이구나.면포를 가지고 곡식과 바꾸자니,두 가지의 값을 어찌 서로 맞게 논하랴.나물국도 날을 걸러 먹는데,관아에서는 피리를 불어대는구나.술과 고기가 하인들에까지 미치건만,언제 가난한 집 돌아본 적 있으랴.)중앙 관직에 있을 때는 시사에 대해 건의하지 않는다고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는 김종직이었지만, 지방관으로 부임해서는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문제를 파악하여 해결하는 바람직한 목민관의 모습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고 있다.4. 김종직의 저술1) 점필재 선생 문집(?畢齋先生文集)점필재 선생 김종직이 몰한 뒤 성종의 명으로 매계 조위가 남긴 글을 모아 편집하여 궁중에 들였으나, 곧이어 성종이 승하하여 간행되지 못하였 있다.
김만중(1) 생애 (2) 작품 ①서포만필 ②사씨남정기 ③구운몽 (3)문학관 ①국문론 ②문학의 감동중시 (4)논란목차①조선후기의 문신(1637~1692) ②호는 서포 ③충렬공 익겸의 유복자 ④생계가 어려웠으나 서포의 어머니는 헌신적으로 서포를 공부시킴 ⑤28세의 나이로 문과급제 ⑥암행어사로 활동 ⑦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다 남해 유배 ⑧56세에 유배지에서 죽음김만중의 생애김만중의 작품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 가운데 의문되는 대목을 해명 신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함. 미적 성취에는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영역강조 우리말 문학강조=국학정신의 선각자적 선언(1)서포만필줄거리 주인공 성진(性眞)은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였으나 8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楊少游)라는 이름으로 인간세상에 유배되어 태어났다. 그는 소년 등과하여 하북의 삼진과 토번의 난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승상이 되어 위국공에 책봉되고 부마가 되었다. 그 동안 그는 8선녀의 후신인 8명의 여자들과 차례로 만나 아내로 삼고 영화롭게 살다가 만년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호승(胡僧)의 설법을 듣고 크게 깨달아 8선녀와 함께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양소유의 일생은 군사적 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으나, 영웅의 일생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저술 한글작품과 한문작품이 모두 전함(2) 구운몽줄거리 중국 명(明)나라 때 유현(劉炫)의 아들 연수(延壽)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유한림은 그후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謝氏)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喬氏)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후 교씨는 간부(姦夫)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유배 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한편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에서 풀려나와 방황하는 사씨를 찾아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와 간부를 잡아 처형한다. 사건의 진행이 당시 인연왕후 폐위 사건과 흡사 = 숙종의 처사를 풍자하여 마음을 돌리고자 함(3)사씨남정기문학사상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령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 -김만중 [서포집] 중 - 『관동별곡』「사미인곡」은 매울 훌륭한 작품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결코 옮겨질 수 없는 美가 있다 -김만중[서포만필] 서포는 문학에서 정의 진정성을 중요시 국문노래를 한자로 표현하면 정을 해침(1) 국어존중론서포만필에서 이항복이 광해군을 노래로써 감동시킨 이야기가 수록 = 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지만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라고 강조 인현왕후폐위 = 사씨남정기 모친위로 = 구운몽(2)문학의 감동중시논란국문이 아닌 것으로 쓰인 문학은 앵무새의 말에 비유하면서 비판 하지만!, 서포는 모든 시를 한시로 저작 구운몽, 사씨남정기도 한글 + 한문 한문문학을 진정 배척했다는 주장이 옳은 지는 의문(4)논란{nameOfApplication=Show}
혜초, 신라의 승려혜초(慧超)통일신라시대 성덕왕 3년(704년)~원성왕 3년(787년)의 고승 밀교(密敎)를 연구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의 저자왕오천축국전, 무한한 세계에 대한 보고서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펠리오에 의해 발견됨 3권이던 원본을 줄여서 엮은 약본으로 추정왕오천축국전의 세가지 가치 유일무이한 8세기 인도 여행기육로와 해로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음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8세기의 여행기록은 이 책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함 불교관계 기록이나 정치정세이외에도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임왕오천축국전 중 남아있는 부분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왕오천축국전 중 남아있는 부분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왕오천축국전 중 남아있는 부분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왕오천축국전 중 남아있는 부분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짓는가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치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왕오천축국전 중 남아있는 부분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이국땅 보배로운 나무 꺾이었는데 그대의 영혼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 이미 재가 되었거늘 생각하니 서러운 정 애끊고 그대 소망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누가 알리오, 고향 가는 길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는 마음끝 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1. 허난설헌. 그녀의 생애 2. 조선중기 : 유교사회 여성의 입지 3. 작품세계 4. 문학사상 5. ★ 쟁점 6. 문학사적 의의 7. 참고자료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蘭雪軒). 본명 초희(楚姬). 명종 18년(1563년) 강릉(江陵) 에서 출생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의 누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혼인 시집살이와 남편의 외방 출입으로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 사랑하던 남매를 잃고 복중의 아이마저 유산 친정의 몰락, 오빠와 동생의 귀양 등 가문의 비극 허약한 육신과 정신적 피폐함 등으로 인한 27세 요절표준영정 (2002. 12. 14. 발용(군) 제공) 지정 년도 : 1997. 제작작가 : 손연칠조선조 명종 18년 (1563년) ~ 선조 22년(1589년) 조선 중기 – 혼란의 시기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사대사화 훈구, 사림 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 세력의 득세와 격화된 붕당정치조선은 건국과 함께 이상적인 유교사회 건설을 목표 성리학의 영향과 유교제도 아래 여성의 자아는 상실 위정자들은 여성의 역할을 철저히 폐쇄적으로 한정 예) 이익의 『성호사설』중 글을 읽고 의리를 논하는 것은 장부의 일이고, 부인은 조석으로 의복, 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정절을 여성이 지켜야 할 최우선 덕목으로 간주 : 여성의 외부 출입,접촉이 자유로우면 그만큼 실덕의 위험이 있게 된다는 논리 여성의 교육이나 생활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덕이 있다고 함 : 따라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부정적시(詩) 《유선시(遊仙詩)》《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 가사(歌辭) 《원부사(怨婦辭)》《봉선화가》 등 유고집(遺稿集) 난설헌집특징 1. 높은 자존 의식 2.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 3. 님의 부재 그리고 규원 4. 이상세계에 대한 소망遣興 一 梧桐生嶧陽 其年倣寒陰 幸遇稀代工 劚取爲鳴琴 琴成彈一曲 擧世無知音 所以廣陵散 終古聲煙沈 (煙 연 : 火변 대신 土변)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에서 자라나 차가운 비바람 속에 여러 해를 견뎠네 다행히도 보기 솜씨 좋은 장인을 만나 깎고 다듬어 좋은 소리 거문고 되었네 다 만들어 한 곡조 타 보는데 온 세상에 알아 줄 사람이 없네 이래서 광릉산 노래 가락은 끝내 전하지 못하고 말았나 보네자신을 거문고를 만드는 오동나무로 빗대어 스스로의 자존 의식을 드러냄 역양은 오동이 자라기에 알맞은 환경 즉 친정 집 그러나 세태는 부녀자가 시를 쓰는 것을 허용치 않음 봉건적인 시댁과의 불화 역시 그녀를 좌절시킴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없는 안타까움 드러냄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少少長寒門 良媒不相識手把金剪刀 夜寒十指直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貧女吟인물도 남에게 그리 빠지지 않고 바느질에 길쌈 솜씨도 좋건만 가난한 집에서 자라난 탓에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면 추운 밤에 열 손가락 곱아온다네 시집살이 길옷 밤낮이지만 이내 몸은 해마다 홀로 새우잠인가가난한 여인의 힘든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사 여성 화자의 심리 역시 섬세하게 드러냄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박대를 당하는 화자 사회 제도의 모순에 의해 소외된 계층을 나타냄 그녀는 이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에 감정을 이입 조선시대를 사는 여인들에게서 동병상련 느낌 애민의식. 사회를 바라보는 거시적 시각閨怨歌 二 삼삼 오오(三三五五) 야유원(冶遊園)의 새사람이 나단 말가. 곳 피고 날 저물 제 정처(定處)없이 나가 있어, 백마 금편(白馬金鞭)으로 어디어디 머무는고. 원근(遠近)을 모르거니 소식(消息)이야 더욱 알랴. 인연(因緣)을 긋쳐신들 생각이야 업슬소냐. 얼골을 못 보거든 그립 기나 마르려은, 열두 때 김도 길샤 설혼 날 지리(支難)하다. 옥창(玉窓)의 심은 매화(梅化) 몇 번이나 픠여진고. 겨을 밤 차고 찬 제 자쵯 눈 섯거 치고, 여름 날 길고 길 제 구즌 비는 무슨 일고. 삼춘 화류(三春花柳) 호시절(好時節)에 경물(景物)이 시름없다. 가을 달 방에 들고 실솔이 상(床)에 울 제, 긴 한숨 지는 눈물 속절없이 헴만 만타.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려울사.남존여비(男尊女卑), 여필종부(女必從夫)하는 인습 때문에 여성은 늘 인내하고 따라야만 했음 은근하면서도 강렬하게 사랑을 소망한 허난설헌 하지만 현실의 남편과는 좋은 짝을 이루지 못해 한을 품음 작품은 남편의 부재로 인한 괴로움을 노래 이에 담긴 슬픔은 작자 자신의 외로움과 한의 표출遊仙詩 瓊花風軟飛靑鳥 王母麟車向蓬島 蘭旌蘂피白鳳駕 笑倚紅欄拾瑤草 天風吹擘翠霓裳 玉環瓊佩聲丁當 素娥兩兩鼓瑤瑟 三花珠樹春雲香 平明宴罷芙蓉閣 碧海靑童乘白鶴 紫簫吹徹彩霞飛 露濕銀河曉星落유선시 옥구슬 꽃 바람 타고 청조가 날자 서왕모 기린수레 봉래도 향해 가네. 목란 깃발 꽃술 배자 흰 봉황 수레 타고 난간에 웃고 기대 요초를 줍는구나.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이 헤집으니 옥고리 경패 소리 댕그렁 댕그렁. 선녀들 짝을 지어 거문고 연주하자 삼화주 나무에는 봄 구름 향기롭다. 동 트자 부용각서 잔치를 파하고서 청동은 푸른 바다 백학타고 건너가네. 피리소리 사무쳐서 오색 노을 날려가고 이슬 젖은 은하수엔 새벽별이 지는구나.현실의 모든 상황은 그녀를 비참한 궁지로 몰고 감 신선세계는 불행을 극복하는 이상적 공간이자 허난설헌 시 세계의 기본적인 정조로 일관됨 유선을 통하여 현실 세계에서의 불만과 갈등 해소 꿈과 이상을 펼쳐 보임 신선시를 매체로 꿈과 이상을 펼쳐 보인데 의의허난설헌의 시는 중국 당대의 악부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임 현실 속에서는 규원의 한을 품고 살면서도 사상적으로는 현실초월적 도교의 신선관이 중심 그녀의 작품은 도교의 신선세계, 궁중, 변방, 가정사 중심 특히 「유선사 (遊仙詞)」 87수는 선계를 동경하 유교적 질서가 중시되던 조선조 사회에서 정신적 휴식처의 역할을 함그녀 생애의 어려운 기폭들 역시 강한 자존심을 통한 자아정립,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 갈등 속의 가족애, 이상을 향한 중단하지 않는 꿈 등으로 작품 속에 나타남허난설헌의 작품을 둘러싸고 많은 표절 시비가 있어옴 동시대의 이수광을 필두로 해서 최근까지도 그녀 작품의 표절에 관한 논란은 계속됨허난설헌은 생전 아주 많은 양의 작품을 저술했다고 함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죽을 때의 유언에 따라 화장에 부쳐짐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은 동생 허균이 남아있는 글들을 모아 1590년에 처음으로 난설헌고(藁) 를 만들고 후에 난설헌집 으로 출간한 것허난설헌의 문재(文才)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며, 그녀의 생전에 문명(文名)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보여짐 그러나 작품들은 사후에, 그것도 대부분이 불태워져 버리고 남은 것들이 모아졌으며 그 작품집의 형성에 있어서 허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에 허균을 둘러싼 의문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수광(1563-1628), 지봉유설(芝峰類說) 의 주장 김시양(金時讓), 부계기문([물거품 부]溪紀聞) 의 주장 신흠(申欽), 청창연담(晴窓軟談) 홍만종(洪萬宗), 시화총림(詩話叢林)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 중에 인용된 유여시의 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허난설헌 표절 찬성 측 주장 a. 난설헌집 의 작품들이 허난설헌 자신의 작품이거나 최소한 가까운 경우: 허난설헌 자신이 표절을 하였음. b. 난설헌집 에는 허난설헌 자신의 작품은 일부만 포함하고 있고 일부 또는 대부분을 허균이 만들어서 허난설헌의 이름으로 냄. c. 난설헌의 이름을 높이려고 허균이 일부러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기존 작품들을 표절해서 몰래 난설헌집 에 끼워넣음.이에 대한 반론 a. 허난설헌 생존 시부터 시작된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대한 명성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됨 b.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이외에는 정확하게 집어서 허균의 작품이라고 주장된 적이 없음 난설헌의 작품 품격이 허균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되어 왔기 때문에 작품을 보면 허균의 것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음 c. 초고인『난설헌고』를 유성룡에게 보이며 발문을 부탁해서 받음 후에『난설헌집』의 서문과 제사(題辭)를 중국인에게 부탁함 이처럼 지식인들에게 곧 발각될 가능성이 있는 일을 허균이 고의적으로 했다고 보기는 어려움200수가 넘는 허난설헌의 작품들 중 표절 시비를 받고 있는 것들이 많음 하지만 한시의 특성상 몇 구절의 유사성만 가지고 표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함 반면, 엄밀히 말해 표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작품들도 확실히 최소한 수 편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고 판단됨 때문에 이러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 것허난설헌은 글재주가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나 천부적인 재주와 출중한 용모로 여신동이라 불림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함 중국 악부시와의 유사성, 집안의 몰락 등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았고 동시대와 현재까지 표절 논란 역시 이어지고 있음 그러나 규원의 한을 품고 살면서도 현실초월의 신선세계를 그려나감으로써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음 유작 한시의 양적·질적인 면에서 동양 삼국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평가를 받음디지털 강릉 문화 대전 두산 백과사전 이익 성호사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2권 한국고시가문학회 허난설헌의 한시에 드러난 작가의식 연구 김광복의 똥침 국어 교실 http://www.hongkgb.x-y.net 초희 허난설헌 http://kenji.cnu.ac.kr/chohee/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http://www.seelotus.com/ 허난설헌연구 (허미자)의 표절 시비에 대하여“{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