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Ⅰ. 러.일전쟁의 배경과 원인1.개요20c최초의 전쟁이라고도 불리워지는 러일전쟁은 기존서구체제와 동북아정세를 뒤바꾸어놓은 동시에 후기 1차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앞으로 이 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원인(Remote cause)과 근인(Immediate cause)의 틀 속에서 바라 본 후에 전후영향을 서구체제와 동북아로 분류하여 역술하도록 하겠다.2.배경어떠한 전쟁을 보건 상관없이 전쟁을 보는 기본3골격(Frame)은 국제체제(계)로 보는 방법과 국가(Domestic):국내상황, 개인(정치지도자, 수뇌)로 보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원인(Remote cause),후자는 근인(Immediate cause)으로 해석된다. 러일전쟁 역시 이에 따라 분석이 가능하다.(1)Remote cause: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극동의 대립양상은 중국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나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게 된다. 일본에 대해 악한감정을 갖고 있었던 중국은 독일과 프랑스를 통해 삼국간섭)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 인정된 일본의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영유(領有)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공동간섭.에 의해 일본의 만주진출을 저지한 러시아와 1896년 러중동맹을 맺게된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일본이 중국의 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에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받고, 대신에 러시아의 외무대신 "파브로프"는 청나라와의 협상에서 여순과 대련을 25년간 조차할 권리와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의 지선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순과 대련까지 연장할 권리를 갖는 것을 합의하였다.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평양이북지역의 관할 요구는 이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몇 년후 이지역의 비무장화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러시아가 만주지방을 사실상 점령하는것과 다를 바 없어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는 영국과 미국을 자극하게 되었고 일본에 힘을 실어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미국에게는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영국은 1898년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과정에서 본국의 종단정책(縱斷政策)과 프랑스의 횡단정책(橫斷政策)이 충돌한 사건인 파쇼다 사건을 맞게되고, 더불어 1899년~1902년엔 네덜란드의 보어(Boer)인과의 보어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보어전쟁은 1867년 보어인의 지방인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노린 영국이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여 결국엔 농민과 영국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전쟁으로 까지 비화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나 그들의 고립정책을 포기하게된다. 게다가 당시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로 이어지는 3국과 -러시아와의 유럽열강들의 대립이 팽팽한 상태였고, 영국은 기존의 고립정책을 고수함으로써 해외경영에만 매진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대립이 격화하였기 때문에 1902년 영국은 그들의 본정책인 종단정책노선을 계속 추진해갈 상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은 그들에겐 치욕적인 삼국간섭을 통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의 이득을 도모하게 된다. 즉 영국은 종단정책노선고수를, 일본은 이 한번의 동맹으로 삼국간섭과 같은 일은 재발하지 않을거라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동맹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중동맹(1896)과 영일동맹(1902)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는 근인이었던(Remote cause)동북아의 양극체제, 즉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을 야기시킨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2)Immediate cause: 근인중의 하나로는 러시아의 만주점령을 생각해볼 수가 있겠는데 이는 사실상 영일동맹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는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이루어진 러시아의 사실상 행위다. 의화단의 난은 의화권에서 발전한 것인데 이는 원래 산동, 직예, 강소 북부등지에서 모순이 나날이 격화되자 의화권도 반서양 종교 투쟁에 더욱더 강력하게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1898년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유명한 의화단운동이 폭발하였다. 이것은 농민을 주체로 한 중국 민중의 반제애국운동으로 사실상 그것은 농민혁명운동이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후에 만주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건설중이던 동청철도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7월 중순, 청국군이 흑룡강을 항해중이던 러시아 기선에게 포격을 가했고, 아이흔 건너편의 러시아 도시 블라고베쉔스크를 포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하여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 당시. 만주 주둔군은 12,000명에 달하였다. 같은 해 8월 러시아는 만주에 질서가 회복되면 철군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주둔이 계속됨으로 이것은 형식상 선언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러시아정부 내에서의 만주정책은 혼돈상태였다. 람스도르프 외상, 위테 대장상 등은 철수를 주장한 반면, 쿠르 파트킨 육군상을 위시한 만주에 있던 군부는 계속 주둔을 주장하였고, 여기세 베조브라초츠와 같은 황제측근의 모험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만주 개입을 주장하였다.결국, 러시아는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청국측과의 비밀교섭을 통해 만주의 독점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같은 태도는 열강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매우 근접한 원인이 되었다. 두 번째로 러시아의 짜르(황제)체제를 통해 분석해 볼수가 있다. 짜르체제는 몽골지배에서 점차 벗어나 강력한 중앙정부와 관료체제를 형성하게 된 15c중엽의 이반3세(1462∼1502년 재위)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사실상 짜르체제라고 함은 행정기구를 와해시키고 귀족 권한을 축소했으며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정권체제였다. 이 체제는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이 체제는 중앙집권적 전제정권을 기조로 영토를 확장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이 체제가 무너지기 직전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스2세는 짜르체제로 서유럽과 미국에서의 산업혁명의 영향과 급격한 산급의 성장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고, 19C 말엽에는 정치적관심이 농민층까지 확대되었다.국내문제와 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C 후반 아시아로 팽창을 계속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과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조선에서의 일본 세력인정을 거부하자 이것이 후에 러일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러일전쟁후에 이 체제는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는 후에 논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신세대 내각 수상이었던 가쯔라-고무라를 살펴볼 수 있다. 전쟁사를 살펴볼 때 수뇌나 정치지도자 개인의 personality를 살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판단에 따라 국운의 뒤바뀔수도 있는 중요한 키의 산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러일전쟁의 근인은 가쯔라-고무라내각의 진취적-호전적 성향에 있다고 봐야 적당할 것이다. 일례로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의 증가를 감지한 일본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1896년 5월 14일 웨버-고무라(Weber-Komura)각서를 통하여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일본과 동일한 권리를 조선에서 행사할 것을 공식화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적인 대외정책의 주창자인 야마가다 아리도모(Yamagata Arimoto)원수는 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할 것을 예견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의 체결과 같은 외교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판단의 기저에는 일본의 수상 가쯔라 다로(Katsura Taro)의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의 부동항 획득을 목적으로 만주에 이어 조선을 점령하려 한다는 의심이 깔려있었다. 만약, 그들의 판단과 그들의 계획이 없었던들 전쟁은 그대로 개전되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섣부르게 대답할수 없다. 그 만큼 개인의 성향은 중요한 문제이다.Ⅱ.개전양상1904년 2월 8일 일본연합함대의 여순항 기습으로 러일전쟁은 시작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싸움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일본 잘 반영했으며 때마침 러시아의 만주침략(서두에 언급하였다.)을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미국은 영국의 영향으로 일본이 미국에 대신하여 문호개방정책을 지킨다고 생각했었고, 때문에 미국은 일본편에 섰으며 반대로 러시아에게는 적이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당초 전쟁과 상관없이 중립을 지키려 했던 독일과 프랑스에게 러시아에 가담한다면 미국은 일본을 원조할 것이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고발언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1904년 1월 27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 3척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선전포고 없는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하고, 제물포함의 러시아배, 러시아 기함 빼뜨로빠블로로프스끄 등을 차례로 격파한뒤 1905년 5월 동해에서 발틱함대가 대패하게 된다. 이 내부에도 서두에 설명한바 있었던 러시아의 짜르의 명령이 기저에 깔려있었다.Ⅲ.전쟁종결일본은 계속해서 승리를 해나갔고 러시아의 전쟁에서 쉬운 승리를 이끄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양국모두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강화쪽으로 돛대를 돌리게 된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재정경제 상태를 교란시키고 국민의 빈곤을 가중시켜 불만을 고조시키고 있다"라는 한마디로 전비지출과 관련한 문제로, 일본은 추격적을 벌릴 여유가 없었다는 것과 전선이 만주로 확대됨에따라 더 이상의 작전수행을 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에서 였다. 결국 1905년 6월 8일 양국에 강화권고문을 보낸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일본정권 고무라 주따로 외상과 다까히라 코고로 러시아 정권의 윗테 주일공사로젠의 참석하에 1905년 8월 9일 예비회담이 열리게 된다.Ⅳ.루즈벨트 대통령의 등장과 포츠머스 회담동북아지역에의 안정을 위해 평화중재자 역할을 하고자 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초기 평화협상안 권고를 무시했던 양측이 선회함에따라 니콜라스 2세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협상테이블로 이끄는데 성공을 하게 되는데 이에 1905년 8월8일 포츠머스에 각국 대표자들이 임명되었고, 8월10일 첫 공식회의를 가지게
똑같은 주제로 레포트를 두 번 써보긴 처음이다. 하지만 힘든 이 과정이 고전음악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었다. 모두가 집으로 가버린 토요일 밤 기숙사에서 난 장미의 이름이라는 비디오를 친구 컴퓨터로부터 급하게 공유 받아 보기 시작했다. 전에 쓴 글레디에이터를 고쳐 보려고하니 도저히 고칠 엄두가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기독교신자인 내가 교회음악에 대해('장미의 이름'에선 중세교회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인물이 영화는 1986년 서독과 이탈리아 프랑스가 합작해서 만든 작품으로써 감독은 장 자크 아노(Jean Jacques Annaud)이고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숀 코네리(Sean connelly)와 머레이에이브럼(Murray Abraham), 크리스천 슐레이터(Christian slater)가 주연했다.→영화배경이탈리아 기호학자로 유명한 움베르트 에크(Umberto Eco)의 동명소설을 장 자크 아노라는 프랑스 영화감독이 영화화해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80년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가 팔린 6백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이론에 지나지 않았던 기호학을 최초로 소설장르에 접목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럽영화로는 보기 드문 파격적인 제작비였던 천 오백만 달러를 들여 제작했다고 한다. 신비로운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유희를 통해 미궁에 빠진 음모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현대와 중세가 어우러진 미스테리 작품이었다.★중세음악★작품배경이 수도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장미의 이름에선 유독 교회음악 그 중에서도 중세교회음악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중세 음악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서양음악사에서 종교음악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서양음악의 뿌리가 흔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특히 서양음악의 본산지가 기독교 문화권임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정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곳은 교회였다. 중세에는 교회 종교음악이 예배음악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예배음악은 미사곡뿐 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큰 공감을 얻고 있다.③칸타타(Cantata)소나타가 기악곡이라는 뜻이듯 칸타타는 성악곡이란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칸타타는 루터파 교회의 성가를 가리킨다. 루터파에서 발달한 칸타타는 원래 기도나 성가 혹은 다른 종교적인 감정에 의해 작곡된 것으로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특별한 날의 예식에 행해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칸타타가 많이 작곡되어 매 일요일 마다 특정한 칸타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칸타타가 발달한 것은 바흐시대 였고 루터파 교회에 국한된다. 대표적인 칸타타로 바흐의 작품이 있는데. 이는 다른 칸타타에 비해 아주 뛰어나다. 완벽하고 고상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엄격한 신앙의지가 나타난다. 모든 신도가 참여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 음악은 루터파가 카톨릭에서 갈라졌던 개신교 초기 신도들의 참여와 공동의식을 중요시했던 의미가 담겨있다. 때문에 처음 감상하려면 바흐의 칸타타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칸타타의 대표격이었던 바흐는 과연 누구인가?바흐의 음악이 처음부터 그 위대함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존경받는 작곡가이긴 했지만 만년에 눈이 멀었고 그의 죽음은 별관심을 끌지 못했다.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아서 그의 아내는 홀로 남아 아이들을 데리고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녀는 1760년 59세로죽었는데 거지로 취급받아 공동묘지에 파묻혔다. 물론 바흐의 음악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 후 간간이 천재적이 작곡가들이 바흐의 작곡법을 배우기는 했다. 하이든은 바흐의 푸가) 원래는 ‘도주(逃走)’의 뜻으로 음악용어로는 둔주곡(遁走曲) ·추복곡(追覆曲) 등으로 번역된다. 그 전에는 카논을 뜻했으나 17세기 이후부터는 모방대위법에 의한 보다 완성된 음악형식과 악보 적는 법을 의미하게 되었다.【구조】 푸가는 역사적인 변화를 거쳐 그 발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J.S.바흐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가지 형태를 보였으나지 단지 첼로 연습용 음악에 불과 했다. 그러다가 파블로 카잘스라는 첼로연주자를 만나서야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바흐가 살던 때에는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다성음악을 버리고 단일한 음악선율에다 화음을 받쳐주는 방식에 몰두 할 때였다. 바흐 음악은 그 둘의 장점을 훌륭하게 결합한다. 이것이야말로 바흐 음악의 진정한 위대함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음악형식이 거대하게 엇갈리는 시대에 살았지만 낡은것에 미련하게 집착하지 않았다. 또 새로운 것에 경박하게 휩쓸리지도 않았던 것이다.cf)파이프오르간장미의 이름에 자주 등장했던 악기, 허나 이것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혹은 영화속 교회의 미사장면을 생각할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바람을 일으키는 모터나 풀무를 이용하여 일정한 공기 압 을 만든 후 이 바람을 여러 장치와 통로를 통해 파이프로 보내 소리를 내게 하는 건반 악기이다.쉽게 설명하면 단계적으로 맞추어지고 조정된 수백 또는 수천 개의 피리가 풀무에 의해 만들어진 바람이 건반에 의해 열려지며 연주되어 지며 악기중의 여왕이라 불려 칭하여 진다.파이프 오르간의 이름오르겔(orgel)은 그리스 어원의 오르가논(Organon)에서 유래한다. 라틴어의 Organum 으로 4세기경부터 Organa로 15세기에 이르러 불가리아 기록에 Organen과 Orgelen이 같은 의미로 병행되다 현재 독일" die Orgel, 영어 Organ, 불어 unOrgue로 불리고 있다. 오르간은 악기의 여왕으로 불리는데 이 표기는 중세기 기욤드 마쇼(Guillaume de Machault,약 1300 ~ 1377) 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종교 개혁 시대의 열성 자 들은 "주의 시녀"(ancilla domini) "마귀의 나팔" 또는 "마귀의 주머니 파이프"라 불렀다, 이들은 중세 말 예배의 호화 찬란함에 대항하고 순수한 말씀 전파를 주장한 이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은 다른 어떤 악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2000년 이상 발전해온 역사 속에서 부여된 것이다.파이프 오르간의 역가 " 피핀왕(pipen der kleine, 714-768)에게 오르간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로 인해 오르간이 서방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악기는 납으로 된 파이프를 장착한 것으로 꽁삐에느(Conpiegne)에 있는 성 코넬리우스 교회에 설치 되었다. 16개의 파이프에 연주를 위해 6명의 사람이 필요했다고 한다. 2명은 연주를 4명은 바람의 공급을 맡았다. 영국에서의 오르간 제작은 8세기 초반에 개발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8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캔터버리(Canterbury)의 더스탄(Dunstan)에의해 제작된 악기 (925~88)는 동으로 만들어진 파이프를 설치했었다. 독일에서 오르간 제작의 발전은 9세기부터 기원한다. 826년에는 루드비히 대왕(Ludwing der Fromnen, 778-840) 카를 대제의 셋째아들이 826년 베니스의 신부 게오르그(Georg)를 시켜 오르간을 제작토록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아헨의 궁정에는 최초로 서양에서 제조된 오르간이 생성되었다. 당시에는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승려들이 오르간을 만들었으며 전음계로 한 옥타브(c-c')의 음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4'의 프린치팔 파이프(Prinzipal 4')가 사용되었다. 지금과 같은 건반은 없었으며 음이 쓰여있는 수직의 막대기를 당겨 음을 내게 하였다. 신부 게오르그는 오르간의 지식을 비잔틴에서 얻었고 이제작 기술을 수도사들인 몇몇제자에게 전했을 것이다. 최초의 서양의 오르간 제작들이 성직자들인 이유가 있다. 왜냐면 이계급만이 당시에 복잡한 일들을 하는데 필요한 지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이 귀한 악기를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컸으리라 생각된다.④오라토리오(Oratrio)오라토리오 역시 넓은 의미로는 종교음악이지만 미사나 칸타타처럼 교회의식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라토리오는 아주 강한 인상을 주는 종교음악회의 연주작품 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오라토리오의 구성은 오케스트라) 시대별 변을 이뤘던 배경음악도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음악전체를 이루는 교회음악들의 특징과 음악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분류-㉠관현악클래식 음악을 나타내는 상징이나 공연을 보면 지휘자가 모든 악기가 한 자리에 모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 이러한 연주 형태로 연주되는 음악을 큰 의미에서 오케스트라(orchestra) 또는 관현악이라 할 수 있다.오케스트라는 합주의 한 형태인데, 여러가지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로 이루어지는 조직화된 합주를 의미하며 그 규모는 작은 것은 10면, 큰 것은 100명 넘는 인원을 필요로 하는 것까지 각양각색이다. 다만 최소의 오케스트라에 있어서도 관악기의 각 파트는 보통 2명 이상의 연주자가 담당하여야 함을 원칙으로 하고, 이 점이 1파트 1명을 원칙으로 하는 실내악과 다르다.관현악의 악기편성시대. 용도. 장소 등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나 오늘날의 교향 관현악은 일반적으로 100명 안팎의 연주자로 이루어지며, 그것들은 현악기군(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목관악기군(피콜로. 플루트. 오보에. 잉글리시호른. 클라리넷. 파곳 등), 금관악기군(호른. 트럼펫. 트롬본 등), 타악기군(팀파니. 큰북. 작은북. 트라이앵글. 탬버린. 심벌즈. 목금 등)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1명의 연주자가 2개 이상의 악기를 맡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연주자수와 악기수가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다.이상의 악기군 가운데 18세기 이후의 관현악에서 주체를 이룬 것은 현악기군이며, 관악기군은 여기에 색채를 곁들이고 타악기군은 주로 리듬을 강조하는 데 사용된다. 또 특별한 경우에는 하프. 피아노. 오르간. 첼레스타 등을 곁들일 수도 있다.근대의 관현악에서는 이들 악기군 사이에 거의 일정한 비례관계가 존재하며 1961년의 빈 필하모니관현악단을 예로 들면 현악기군 68, 목관악기군 20, 금관악기군 23, 타악기군 6으로 이루어졌다. 편성규모는 각 목관악기의 수에 따라 2관편성. 3관편성 등으로 불리며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