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고대 그리스, 로마의 교육ⅰ. 고대 그리스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크게 스파르타의 교육과 아테네의 교육으로 나눠 볼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이 균형 잡힌 시민의 육성을 중시했다. 아테네는 신체교육과 넓은 의미의 음악교육(문자 교육이 포함되고 도덕교육이 중심에 있는 음악교육)으로 이루어진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에 관심을 가졌다. 아테네의 교육은 개인의 인간적 특성에서 자유로운 발전을 희구했고, 또 이것을 국민의 참다운 덕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아테네의 교육은 개인 존중의 자유교육이었다. 인간의 완성을 이상으로 하여 인간의 도야를 교육의 목적으로 하였고 또한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여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발전이라고 믿어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양인 양성을 목표로 한 교육이었다.스파르타에서는 군국주의 교육, 국가주의 교육, 보수적 ? 상무적 통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국가에 충성하는 용감한 군인으로서의 시민양성에 관심을 두고 강인한 신체훈련과 군인에 합당한 정신교육을 중시했다.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사회로 상하계급과 장유질서가 엄격하게 규정되었고, 개인생활도 극도로 위축되었으며, 정신적 교양은 아주 경시되고, 체육과 군사훈련에 편중했다.양국의 교육형태 측면을 비교해 보자면 스파르타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형태로 엄격한 군사적, 신체적 훈련과 그에 따른 도덕적 훈련을 했고 아테네는 개인이 자유롭게 교육을 받는 사립학교 교육 형태로 이루어졌다.이 시기 교육의 특징으로는 첫 번째로, 인간의 이성과 개성을 존중함으로써 인간성을 높이고 확대하는 인문주의에 대한 강조가 주였다는 것과 두 번째로, 지혜와 행동을 겸비한 인간. 조화로운 인간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완전성을 추구하였다는 것. 세 번째로, 자유 시민 공동체인 폴리스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개성과 소질은 중시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ⅱ. 고대 로마로마는 기원전 146년 그리스 정복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공화시대, 그 이후를 제정시대라 한다. 가장 로마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공화시대에는 가정교육이 중심이었으며, Ludus(초등교육)와 같은 사립학교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 12동판법 등을 가르치고 있는 정도였다. 제정시대 이후 로마의 학교교육은 그리스식의 학교교육으로 대치되었다.로마 교육의 목적은 지적발전을 도모하여 웅변을 능숙하게 함으로써 국가에 실제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선량한 인간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그리스와 로마시대를 비교해 보자면 그리스의 경우 철학과 문학, 예술이 발달한 것과 다르게 로마는 건축(교량, 도로)과 법학, 공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추구하는 가치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그리스가 심미적인 요소와 조화를 추구했다고 하면 로마는 현실적이고 실제 정치적 조직 등을 강조하였다.웅변가의 자질은 도덕적 성격, 넓은 교양,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 등을 포함하고 있다.Ⅱ.중세의 교육중세시대의 두 가지 축은 기독교와 봉건제도를 들 수 있다. 기독교가 팽배하고 모든 사회의 중심이 된 가운데 봉건제도와 장원제도등을 기초로 중세 특유의 문화가 확립되었다. 중세교육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인간을 순종과 신앙으로 이끌고 기독교적 완전성으로 인도하는 것이었고 이 시기에는 개인감정의 표현을 금지하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으며, 감각적 경험과 실물을 통한 교육보다 심의에 의해 형성되는 정신적 형상을 중시하였다.이 시기는 교육사적으로는 기독교 교육과 기사도 교육,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중세의 기독교적 교육은 사회전반에 거쳐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던 사회이기에 당연했던 것으로 여기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는 문답학교, 고급 문답학교, 사원학교, 궁정학교, 수도원학교 등이 있었다. 기독교적 무인의 양성과 영주와 교회와 부녀자의 보호를 위함을 목적으로 한 기사도 교육의 특색은 체험위주로 특히 국어교육을 중시하고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학교육의 시작은 다른 무엇들보다도 돋보이는 문화적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광범한 학술이 발달됨에 따라 수도원이나 교회의 부설학교만으로는 전문 분야에 있어서의 교육을 다 할 수 없게 되어 7개(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기본 교과 외에 법률, 의학, 신학 등을 가르치는 대학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학의 발생은 근대 문화를 촉진시켰고 학위제도 등 당시 대학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Ⅲ.르네상스 시기의 교육르네상스 시기의 특징은 인간 중심 사상과 개성존중, 개인주의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중세시대와 대조적인 내용으로 학문 연구에도 새로운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의 교육은 자유 교양 교육이었고 고전 중심 교육이었으며, 시세로 주의라고도 불리는 형식주의가 특징적이었고 중등학교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 큰 의의이다.활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은 일반교육의 기반을 확대시켜주었으며, 중세에서 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여성이 점차로 문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Ⅳ.종교개혁기의 교육이 시기는 종교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 문화, 교육운동이었다. 종교 개혁가들은 교육이 계급과 성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것이어야 하며, 의무적이고 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다양한 교육과정을 교육내용으로 도입함으로써 종교개혁 정신과 인문주의 정신, 종교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이 시기 교육의 특징들을 꼽아 보자면, 성서의 독일어번역으로 교육대중화에 기여하였고 실용적 인간을 길러내는데 기여했으며,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 종교적, 세속적인 것의 조화를 도모하였다는 것과 기초 교육으로써의 가정교육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Ⅴ.17세기 실학주의와 교육실학주의는 고전의 실용성을 강조한 인문적 실학주의, 귀족계급을 대상으로 하여 사회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무에 능한 신사양성교육을 중시한 사회적 실학주의, 사물에 대한 감각적 직관을 중시한 실학주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발달하였다.인문적 실학주의의 경우 고전을 배운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교육과 같지만 고전의 형식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사회적 실학주의는 귀족 계급을 대상으로 하여 신사양성 교육을 중시하였으며 사회생활의 경험을 중시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몽테뉴와 로크가 있다. 감각적 실학주의의 경우 사물에 대한 감각적 직관을 중시했으며 대표적인 인물에는 라트케, 코메니우스등이 있다.
Ⅰ. 서론제7차 교육과정은 2000년 시행 초기 현직교사들에게 조차도 극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으며 시작하였다. 시행 7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제7차 교육과정의 내용을 알아봄은 물론 문제점과 그 해결방안을 연구해 보도록 하겠다. 한 달여 기간 동안 고등학교 현장에서 직접 교육실습생으로 잠시나마 교단에 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교과를 보다 중점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7차 교육과정의 출현 배경국가는 국민교육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 중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이 교육과정의 개선으로 교육의 질을 높여 국가 경쟁력을 기르고 일정 수준의 기초학력을 국민 모두에게 교육시켜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유용한 지식을 터득하도록 한다. 이러한 국가 공교육의 일환으로 교육 과정을 시대에 맞게 적절히 개선하는 업무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무이다. 제7차 교육과정은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설치되고 여기에서 교육개혁 방안이 제시되어 21세기를 살아갈 개방적 자기 주도 능력을 가진 인간을 기르고 창의성을 함양하는 교육 과정 운영을 위해 필수과목은 축소하고 선택과목을 확대하는 편제 방향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정보화ㆍ세계화 교육을 강화하면서 교육방법에서 수준별 교육 과정을 도입하는 내용을 중점으로 1996년 2월에 “교육과정 특별위원회”를 별도 설치하고 기초 연구 결과를 토대로 “초ㆍ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혁안”을 대통령에 보고 후, 교육과정 개정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개정의 기본 중점은 21세기 정보화ㆍ세계화 시대를 대비하여 “교육의 질”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과 국민 공통 기본 교육 내용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며, 해방이후 7차에 해당되는 교육과정 개정 작업으로 의상으로는 20세기를 마무리하며 다가오는 21세기에 살아갈 한국인 상을 전망한 획기적인 교육내용의 변화라 할 수 있겠다.21세기는 많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예상하고 있으며 지금의 정보화ㆍ세계화 영역에서 정보기기의 생활화와 컴퓨터가 인간의 심 교육과정으로 구성되었다.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10년간을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기간으로 설정하고, 이 기간 중에는 학교 급별 개념이 아니라 학년제 개념에 기초하여 일관성이 있게 교육과정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은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공통적으로 학습해야 할 기본적인 내용으로 모든 학생에게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 능력, 태도를 가르치고자 도입하였고 모든 학생들이 공통 교과를 학습함으로써 국민으로서 기초적인 소양을 함양하고, 우리 사회의 중핵적인 문화와 가치의 공통 기반을 형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의 충실한 학습은 선택중심 교육과정 운영의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을 도입하게 된 주된 이유는 세계적인 추세인 의무교육 기간의 확대, 기본 기초 교육의 강화이다. 세계적인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모든 국가가 사회복지 차원에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무 교육 기간을 확대하고 있으며, 산업 사회로부터 후기 산업 사회로 넘어가면서 단순 노동ㆍ기능직이 고등 정신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직종으로 대체됨에 따라 모든 국민의 기본 교육이 보다 충실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모든 학생이 10년 동안 공통적인 기본 교육을 받게 됨으로써 국민으로서의 교양 수준과 기초 학력을 강화하고, 고도화ㆍ다변화되는 정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일 수 있으며, 학교 급간이나 학년 간 교육 내용의 중복, 비약을 방지하여 연계성을 지닌 교육과정 체제를 갖추자는 것이다.그리고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은 이제까지 우리 학교에서 가르쳐 온 교과 교육의 체제를 존중함과 동시에 다과목 피상주의 학습이라는 우리 교육과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0개 학년 10개 교과와 재량활동, 특별활동으로 구성하였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학기 당 이수 과목 수를 10과목 내외로 감축하여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덜어주도록 하였고, 국민공통기본 교육과택제」라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만을 공부하도록 하기 위한 「과정별 필수과목 축소/선택과목 확대」, 보다 쉬운 내용을 가르치기 위한 「내용 수준 조정」 등과 같은 교육정책은 진정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 할 수 있는지 검토되어야 할 것들이다.학생들에게 쉽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우리 속담 중에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와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아이 매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능하면 편하게 하고 싶고, 쉽게 하고 싶고,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다. 학생들은 쓴 약보다는 단 약을 좋아할 것이고, 매보다는 떡을 좋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추진하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정책을 살펴보면 학생들에게 단 약과 떡을 더 많이 주자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대학생들도 과제를 내주고 공부를 많이 시키는 교수보다는 부담 없이 시험만 한 번 달랑 보는 교수의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2)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의 본래의 의도는 의무교육의 확대 및 기초교육의 강화와 더불어 일관성 있는 교육과정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생이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10년 동안 공통적인 기본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교육부의 의도는 교양 수준과 기초 학력을 강화하고, 고도화?다변화되는 정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일 수 있으며, 학교 급간이나 학년 간 교육 내용의 중복, 비약을 방지하여 연계성을 지닌 교육과정 체제를 갖추자는 것이다.그런데 제7차 교육과정을 보면, 단지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학년제 개념 이외에는 제6차 교육과정 기본 틀에서 변한 것을 찾기 힘들다. 우선 교육부(고시 1997-15)에서 제시한 교육과정 자체가 초등학교[별책 2]?중학교[별책 3]?고등학교 교육과정[별책 4]으로 분리될 수 있고, 1997년 2월에 발표행해졌던 엄격한 개별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고, 완전학습이 이루어진 후에 다음 단계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개별화 교육은 그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현장교사들이 열린교육을 통해 이해했던 '개별화'는 학생들의 학업 능력 수준에 따른 1:1 교육(개인지도)을 의미했던 것만은 아니다. '열린교육=인성교육'으로 인식하였고, 이는 개개인의 특성, 관심, 흥미, 요구 등을 반영한 개별화를 의미했다. 그것은 수업 전 활동 또는 수업의 도입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러그 미팅)(rug meeting)과 같은 활동에서 볼 수 있다. 러그 미팅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의 사전(事前)경험, 흥미, 관심사, 요구를 탐색하여 수업에 반영하는 과정으로, 러그 미팅을 통하여 교사가 수업의 방향을 잡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수업 시간 중에 개별적인 학습과제를 제시할 때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는 단계이다. 물론, 개인의 학습 능력 혹은 학습 속도도 수업 전 상황분석 자료에 포함된다. 그러나 러그 미팅이 결코 학업 능력이 뛰어난또는 부진한 학생들을 별도로 그룹을 짓거나 특별한 과제를 부여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업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부진한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이나, 부진한 학생들이 뛰어난 학생들을 모델로 하여 배울 수 있는 방안들을 탐색하는 과정이라 하겠다.따라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수준별'의 개념이 학습자의 학업 능력에 한정되어 있어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유승희, 1999; 이화진, 1999; 황윤한, 1999). 내용상에서도 학생들의 능력 수준의 차가 가장 심한 체육이나 영어 교과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수준별 교육과정 적용을 제한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또, 수학 교과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10단계를 두고, 각 단계별로 학기를 단위로 하는 2개의 하위 단계를 설정하여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도록 하였으나, 초등학교는 사실상 월반 제도가 없기 때문에통합을 통해서 통합적 사고력의 향상을 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과목의 축소 및 민주시민생활에 필요한 사고력 및 태도 가치관을 기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통합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과 교사 한명 한명이 통합된 사회과 과목을 통달해야 한다는 것인데, 역사, 지리, 일반사회, 경제, 정치 등의 과목 등은 통합과목으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독립과목으로서 더 효과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한 분야의 전문적으로 배운 교사가 학생들에게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쳐주면 결국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통합을 해도 어떻게 통합할 것이며, 그 통합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효과들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5. 제7차 교육과정의 효과적 실행을 위한 방안1) 교사의 교육과정 개발 능력 향상황윤한(1998)은 제7차 교육과정이 열린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제6차 교육과정보다 후퇴한 교육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여기 한 아이가 있다고 하자. 나이는 겨우 4살 정도. 혼자 걸어서 뛸 정도지만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해 겨우 마당에 놓인 조그만 물통에서 물놀이를 할 정도다. 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를 위하여 좋은 수영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좋은 수영장을 자랑하면서, 자기 아이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나라의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은 제5차 교육과정기까지 중앙 집권형 체제로 일관되어 왔다. 제6차 교육과정에 이르러서야 교육과정 결정 방식의 분권화가 진전되어 시?도교육청과 학교가 교육과정의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와 학급 자체적으로 수준별 교육과정을 만들라고 하였으니, 수영도 못하는 아이를 수영장에다 던져 넣어 배영이나 접영을 이다.
서 론2005년에도 한국영화의 열풍은 대단했다. 올해 한국 영화의 점유율은 55.1%로) 3년 연속 50%를 넘는 성과를 보였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국 영화는 관객들에게 괄시를 받았으며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면 돈이 아깝다.’는 말까지도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한국영화의 이 같은 성장 요인은 무엇일까? 지난 8월 개봉하여 올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웰컴투 동막골』의 성공사례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 향후 한국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연구해 보도록 하겠다.본 론Ⅰ. 『웰컴투 동막골』에 대한 개괄적 소개○ 감 독 : 박광현○ 출 연 :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임하룡, 서재경, 류덕환○ 제 작 : 필름있수다○ 배 급 : 쇼박스○ 개봉일 : 2005년 8월 4일○ 줄거리 :1950년 11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연합군 병사 스미스의 전투기가 동막골에 불시착한다. 동막골에 살고 있는 여일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소식을 전달하러 가던 중 인민군 리수화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동막골로 데려온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때 자군 병력에서 이탈해 길을 잃은 국군 표현철과 문상상 일행이 동막골 촌장의 집까지 찾아오게 되면서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동막골에 모이게 되고, 긴장감은 극도로 고조되지만 정작 동막골 사람들은 바깥세상의 현실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생전 총을 본 적도 없는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의 정서 속에 세 부류의 군인들은 서서히 평화롭게 녹아들어 간다. 하지만 동막골에 추락한 미군기가 적군에 의해 폭격됐다고 오인한 국군이 마을을 집중 포격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막골의 군인들은 그 어떤 경계도 없이 한마음으로 마을을 지키려 한다. 사상 유례없는 연합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치밀한 준비와 목숨을 건 공격으로 결국엔 동막골을 지켜낸다.○ 수상내역 :제 26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제 26회 청룡영화상 최다 관객상제 26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감독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음악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조연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감독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각색상제 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최우수작품상2006년 제 78회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부문 한국 공식 출품작 선정Ⅱ. 『웰컴투 동막골』의 성공 요인ⅰ)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구성, 시대 상황의 새로운 접근『웰컴투 동막골』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바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구성에 있다. 우선 이 『웰컴투 동막골』은 장진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연극 『웰컴투 동막골』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탄탄한 원작을 영화화함에 있어서 이것이 도리어 부담이 되고 장애가 될 수 있었지만 뛰어난 각색으로 원작 이상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 같은 요소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적인 남과 북의 군인 또 연합군이 전쟁이란 것을 전혀 모르는…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동막골이라는 곳에서 함께 생활하고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하는 등 다소 비현실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남, 북의 군인들이 신나게(?) 멧돼지를 잡는 장면이나 이 멧돼지를 함께 구워먹는 장면,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수류탄을 잘 못 던져 곡식창고에 있는 옥수수 등이 팝콘이 되어 눈처럼 내리는 장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가볍고 밝게 그려내었다.이는 관객들에게 관람 내내 훈훈한 미소를 번지게 하였고, 모든 세대에게 공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다.ⅱ) 판타지적 요소와 “히사이시 조”의 OST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전쟁과 동 떨어져 있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마을이라는 것과 남과 북의 군인이 소통을 하고 함께 생활한다는 상황자체가 판타지적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또한 박광현 감독은 CG로 처리된 판타지 장면을 첨가함으로써 동화스럽고 판타지적 느낌을 살리며 연극과의 차별화를 꾀하였는데, 앞서 잠시 언급한 멧돼지 장면이나 팝콘 장면. 인민군을 이끌었던 나비와 연합군의 전투기를 교란시키는 나비 떼의 등장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이 영화에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등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 감독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영화 음악의 거장 “히사이시 조(Hisaishi Joe)”가 만든 OST가 사용되었다. 이 역시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영화의 판타지에 더욱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ⅲ) 뛰어난 영상미『웰컴투 동막골』은 강원도 평창군에 지어진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 작품성을 높이기 위하여 약 5000여 평의 부지에 총 10여억 원을 들여 100일간의 공사 끝에 집 10채, 방 20개, 우물에서 개울까지 완벽한 하나의 마을을 만들었다. 또한 동막골을 감싸는 풍성한 조경을 연출하기 위해 나무를 구입하는 데만 3억원을 투자했으며, 동막골의 4계절을 다 담아내기 위해 가을에는 누렇게 시든 풀숲에 수 십 리터의 식용 색소를 뿌려 청록의 싱그러운 여름을 탄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CG작업을 병행하여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영상을 만들었다.박광현 감독이 CF감독 출신이라는 점 또한 이 영화의 화려하고도 뛰어난 영상미를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광고에서처럼 순간의 찰나를 필름 카메라로 찍어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장센(Mise-en-scene) 기법을 많이 활용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ⅳ) 실력파 배우의 캐스팅 및 배우들의 연기력보통 많은 한국 영화가 톱스타를 원톱 또는 투톱 형태로 내세우는 것과 다르게『웰컴투 동막골』에서는 소위 말하는 1등급의 톱스타는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연기력으로 정평이 자자한 신하균, 정재영, 강혜정을 비롯하여 임하룡, 서재경, 류덕환 등이 출연을 한다. 이들의 코믹하고도 감동적인 연기는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또한 누가 주연이고 누가 조연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 모두의 비중은 상당하였다.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만들어 낼 정도로 강원도 사투리. 동막골식 말투는 선풍적인 유행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다.톱스타 한명의 개런티를 여러 연기파 배우 캐스팅에 쏟은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ⅴ) 공격적인 마케팅과 적절한 개봉시기보통 1~2,000명 수준에서 행해지는 시사회를 『웰컴투 동막골』에서는 유료 시사회를 포함하여 19만 300명을 동원하였다. 이는 배급사 쇼박스의 공격적인 마케팅 능력과 스타급 연기자의 부재를 입소문을 통해 만회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또한 『웰컴투 동막골』의 개봉시기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 중 하나인데,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웰컴투 동막골』은 8월. 여름방학 기간에 개봉을 했다. 이때는 많은 학생들이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더욱이 『웰컴투 동막골』은 12세 관람가의 영화로 소구계층이 넓었다. 게다가 때마침 북한의 핵문제로 살벌하던 시기에 우화 같고 무겁지 않은 감성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는 점에서 더욱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올 수 있었다.ⅵ) 실패자들의 성공담영화를 이끌어가는 남북의 군인 표현철과 리수화는 각각 피란민이 건너고 있는 다리를 폭파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따른 데 대한 죄책감으로 탈영을 하였고, 전투에서 동지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혼자 살아남았으나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길을 잃은 실패자였다. 또한 여기에 연합군 스미스는 폭격기의 추락으로 동막골에 들어오게 된 인물이었다.자기 무리에서 낙오한 인물들이 동막골에서 함께 생활하며 후에는 비록 전부 죽게 되지만 이유야 어쨌든 동막골을 공격한 국군으로부터 동막골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것 또한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요소가 되었다.ⅶ)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히사이시 조”라는 음악 감독의 OST 참여와 “미야자키 하야오”를 존경한다는 박광현 감독의 인터뷰 내용)등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판타지적 요소와 배경이 되는 마을 자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의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고, 마을 앞에 장승이 아닌 호박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는 것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봐왔던 것이다.
黑田勝廣『韓國人の歷史觀』(1999)文藝春秋를 한국어로 完譯한 것이다. 저자 구로다(黑田)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본의 우익 논객이다. 책 속에서 한국인의 이중적인 반일 민족주의를 시종 비웃고 있는 저자는 읽는 우리의 속을 뒤틀리게 하지만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게도 한다. 일본군 장병을 위해 위안부로 고생했던 한국인 여성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한다는 대목에서는, 대형 스피커를 통해 터져나오는 일본 극우파의 외침을 듣는 듯 하다. 하지만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옛 조선총독부 철거에 이어 민족정기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기관이 앞장섰던 전국적인 '쇠말뚝 뽑기' 사업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우리의 반일정서 속에 흐르고 있는 이상기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목 차한국인의 역사관제1장 종군위안부 문제―일본 콤플렉스의 심층'일본인은 도덕 파탄적'인가 / '반일'이라는 정신안정제/ 국가보상과 개인보상근거불명인 채 사죄한 일본정부/ 위안부는 군의 적이었던가제2장 대일 '저항사관'의 신화단절의 역사관/ 전승국이 되지 못한 한(恨)/ 한국은 언제 '건국' 되었는가대일 '협력'의 기억/ 하마터면 일본인이 될 뻔 했던 한국인제3장 한국인 만들기―반일 교육은 왜 필요한가'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 논쟁/ 너무 일본인화 된 한국인식민지 근대화론의 행방/ 민족적 자존심과 사실인식제4장 끝도 없는 '사죄' 요구의 근거배상인가 독립축하금인가/ 소련, 러시아에는 관용적인 한국중국은 유감 표명도 하지않고/ '서울' 인가 '한성' 인가제5장 중국의 그림자―'일왕'이라는 호칭왜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나/ 계기는 소화천황의 사망/ 민주화와 내셔널리즘'華夷'의 질서관/ 반복된 역사제6장 일제 풍수모략설―'광복 50주년'의 반일 풍경1'일제'가 박은 쇠말뚝/ '민족의 정기'를 끊는다?/ 풍수적 매카시즘피해의식이 낳은 '모략설'/ 교차로와 군함기제7장 옛 총독부 해체―'광복 50주년'의 반일 풍경2'역사파괴'와 '역사직시' / 50년 후의 '민교과서에서는 '우리 민족은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강대국의 이익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어지는 민족적 비극을 맞기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확실히 미국과 소련의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해외에 있었던 '대한 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규정한 포츠담 선언이 약속했던, '조선의 독립'을 담당할 확실한 주체가 될 수 없다고 국제 사회는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싫더라도 한국인이 응시해야만 하는 점일 것이다.요전에 일본에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프라이드'가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노린 것은 전승국(연합국)이 패전국(일본)을 일방적으로 심판한 극동군사재판, 소위 '동경 재판'에 대한 비판이다. 간단히 말해 패전국인 일본도 할말이 있다는 것으로, 그것을 태평양전쟁(대동아 전쟁) 개전시에 최고 책임자였던 도조 히데키 수상(당시)의 변명을 통해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이 영화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당연히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역사 왜곡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언론은 동경발로 계속 비판의 보도를 전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이 동경 재판을 지지하며 그 결과는 옳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동경 재판은 과거의 일본을 철저하게 심판하고 규탄했기에 한국으로서는 당연할 것이다.그러나 '대일 독립 전쟁 사관'을 국정(國定) 역사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일본과 '독립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스스로는 왜 동경 재판의 원고석에 앉을 수 없었는지, 왜 동경재판에서 그들 스스로 일본을 심판하고 규탄 할 수 없었는가 하는 관점은 결여되어 있다.한국 입장에서 동경 재판에 대한 비판이 있어도 좋으련만,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연합국에 의한 동경 재판의 결과에 편승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을 스스로 심판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한국인의 심층 심리에 존재하는 민족적 울분의 커다란 요인일텐데 말이다.한국은 언좋은 일도 했다'라는 주장을 둘러싸고는 '언론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언'에는 논의의 여지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매스컴)에서는 '망언'을 말한 일본인 이름에는 경칭을 붙이지 않는다.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도 모두 경칭을 붙이지 않고 부른다.식민지 근대화론의 행방그러나 한일간에 때로는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하는 이러한 '망언'사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한국의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일본 통치 시대의 역사적 진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과의 과거 역사에 관한 이제까지의 민족주의적인 편향을 배제하고 실증적, 객관적으로 과거를 평가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일본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경제사 연구자에 의해 주도되고, 그 주장은 통칭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불리거나, 종래부터 주류를 이룬 민족주의파의 '침략과 수탈'사관에 대해 '침략과 개발'사관이라고 불리운다. 즉 이 새로운 조류는, 일본 통치 시대를 '수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개발'이라는 긍정적 요소도 보려는 입장이다.요즈음, 각종 학회에서 이 양자에 의한 토론이 전개되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무시할 수 없는 움직임이 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진보파 지식인이 중심이면서, 한국의 사상계를 주도해 온 계간《창작과 비평》지(1997년 겨울호)가 특집을 짜는 등, 이 문제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만 봐도, '과거'인식을 둘러싸고 지식인 세계에 하나의 변화가 엿보이는 것이다.물론 이에 대해, 여전히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민족주의파로부터는 '식민지 미화론'이라고 심한 비평, 비난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 논쟁을 특집으로 소개하는 매스컴도 '식민지 정책의 본질은 착취성'(1997년 12월 6일자「동아일보」)라든지 '"일제 공업화가 한국 성장의 토대"는 무리'(1995년 2월 6일자「중앙일보」)등 대부분은 아직 부정적이다.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라는 주장에 이어지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다는 것이 그 진상(眞相)이다. '천황(天皇)'이란 한자에서 '황(皇)'은 '황제'를 의미한다. 일본의 천황을 영어로는 'emperor'라고 하고, 독일어로는‘kiser’라고 부르는 것도 '황제'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天)'이란 것은 무엇인가? 중국문화권에서는 절대적인 우주의 지배자 곧 신(神)에 상응하는 '천제(天帝)'의‘천’이다. 한국의 국가인 애국가의 1절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하느님이 바로 '천(天)'이다. 이렇게 되면 점점 곤란해진다. '천황(天皇)'이란 말은 한국인에게 하느님에다 '황제'를 더한 의미가 된다. 그런 초월적인 호칭을 일본에 사용하는 것은 견딜수 없는 일이다.한국인에게 중국문화권의 국제질서라는 것은 중국을 부모라고 하는 경우, 한국과 일본은 그 자식들이고, 게다가 한국이 형이고 일본은 아우라고 하는 자리매김이다. 그 막내동생과 같은 일본에게 부모보다 상회하는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따를 수 없다. 특히 '천(天)'은 용납할 수 없다.그 결과가 '일황(日皇)'인 것이다.한국에서는 일본지배로부터 해방된(1945년) 이후, 일본의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이 '일황(日皇)'을 사용해 왔다. 한국에서 일본 '천황'의 존재가 일상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표기는 당연히 신문을 비롯한 매스컴이 주도했다. 따라서 '일황(日皇)'이라는 표기는 신문이 정착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그런데도 신문에서 보는 한 '천황'이란 표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사용되기도 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관찰 경험을 통해서도 이것은 확인할 수 있는데, 같은 신문지면에서 기사에 따라 '천황'과 '일황(日皇)'이란 표기가 병존 내지 공존하는 예도 있었다.여기에는 한국사회의 세대적 배경이 있다. 일본통치시대에 일본교육을 받은 경험을 갖는 세대가 상당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천황' 표기에는 위화감이 없다. 동시에 일본체험 세대에게는문제의 말뚝의 진상에 관해서도 '풍수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리적인 방위 표시와 측량에 필요한 삼각점 설치 등을 목적으로 박은 것이라며 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인 측량관과 동행한 적이 있는 고령의 노인의 증인까지 소개했다. 물론 일부는 암석으로 된 곳에 난간 등, 위험 방지의 시설을 위한 것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이 조사 보도는 '일제의 풍수 모략'을 증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전하고 있다.민족주의자 단체와 '풍수사'들이 주장하는 '일제 풍수 모략설'에 대해서는 실제로 한국인 사이에서도 비판과 의문은 있었다. 예컨대 앞에서 말한 서울의 북한산의 말뚝에 관해서 일본 통치 시대인 1927년에 돌층계와 난간 등과 함께 방위 측정용으로 설치한 것이라는 증언이 있었는데도 관여치 않고 그 사실 관계의 확인은 무시한 채 '풍수 모략설'이 홀로걷기하고 반일 정서에 이용된 것이다라고 한다.또한 강원도에서 일본 통치 시대의 스스로의 체험을 토대로 측량용 삼각점인 쇠말뚝이라고 증언했던 노인이 그 지방의 신문 기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에는 "일제의 만행"이란 식으로 보도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실 관계는 문제가 아니다. 반일 정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동원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 된다. 기사에는 반일 강경파로 알려진 서울대 사회학과의 신용하 교수의 주장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일제 자신은 풍수 지리설을 신앙으로 삼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이 이것을 신앙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러한 정책과 행동을 취했다"고 단정하고 확신한다.유명 교수조차 '문헌'이 아닌 '구전'으로 논문을 쓰고 논지를 펴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과 관련되어 반일 정서를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사로운 일이고, 세상 또한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다.일본 통치 시대에 일본인 측량관과 함께 일을 한 적 있다는 앞의 노인은 '구전'으로서의 '풍수 모략설'의 배경에 대해 "나라를 빼앗이다.
1이번 공연은 국립 국악원에서 열렸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공연 시작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티켓과 팜플렛을 사고 국립 국악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참 멋들어진 건물들이었다. 국악 하는 사람들이 이런 곳에 오면 더 의욕이 솟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함께 이러한 공연. 문화 시설들이 너무 서울에만 집중되어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공연 시작 전에 팜플렛을 보고 직감적으로(^^;) 어려운 공연일거라고 생각했다. 창작 무용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예술 작품들은 그냥 보는 것 그대로 느끼면 되는 거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있어야 좋았을 텐데……. 아무튼 이점이 아쉬웠다.공연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예악당 공연장에 들어섰다. 천장은 방패연 형상의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고 무대 커튼은 추상화 같은 한국화가 그려져 있었다. 높은 천장과 넓은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아하다는 인상이 들었었다.2태극 구조의 기본 춤장장 30여분이나 되는 공연 이였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었다. 14명의 무용수들이 검은 상의와 치마를 입고 연둣빛에 가까운 속치마를 입고 있었다. 복장만 봐서는 한국 무용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공연의 주(主)를 이룬 것은 한국적인 음악과 동작이었지만 중간에 캐스터네츠소리가 나면서 무용수들이 경쾌하게 춤을 추는 부분에서는 복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플라멩고. 서양 춤이 연상되기도 했었다.이 작품 처음 시작부분에 북소리와 징소리, 종소리(산사(山寺)에서 들을 수 있는 풍경 소리 같았다.) 가 들렸었다. 평소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징소리가 이날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깊은 울림……. 다른 악기 소리에 묻혀 지내 온 징소리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것도 이번 공연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수확이었다.춤 기법 / 동작 유형 2번 끌어올리고 내리기 부분에서 몸을 S자로 만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우선 멋있었고 한(恨) 같은 것을 풀어내는 느낌이었다. 한국 전통 춤의 한풀이가 소극적 이였다면 여기서의 한풀이는 적극적이고 대담해 보였다. 동작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무언가 자기 안으로 에너지(한?) 같은 것을 끌어들이다 내뿜는다는 느낌이 들었다.작품 중·후반부부터는 경쾌하고 빠른 장단에 맞춰 무용수들이 뛰는 동작을 보이고 했었는데 격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많은 부분에서 현대무용. 서양 춤의 느낌이 들었었는데 동작이 크고 직선적이며 단조로웠고 대형을 바꿔가며 춤을 추는 동작 등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호흡Ⅱ흰 소복을 입은 여러 여성 무용수들이 나와 정말 보고있는 관객이 안타까움에 아픔을 느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동작들을 보여주었었다. 한, 두번이 아니라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러한 동작들이 거의 주를 이루었었다. 보면서도 저게 과연 춤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춤추시는 분들이 왕년에 요가를 했던 분들이 아니었을지...(^^;)한참동안을 음악 없이 춤을 추는 부분이 있었는데 어느 한 사람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동작이 일치해서 참 놀랬었다.이 춤은 한국 전통 무용의 동중정 과 정중동 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몸 풀기·몸 만들기전형적인 전통가락과 음악을 사용했다고나 할까? 한국 전통 무용에서 익히 들었던 악기들과 가락이 사용되어 비교적 친숙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에 반해 조금 식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음악과는 다르게 춤동작은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우선 처음 시작부분에서 무용수 한 명이 나와 춤을 추다가 양 옆에서 두명이 더 나와 세명이 같이 춤을 추고 그 다음에 5명, 그 다음엔 7명, 10명 다시 6명, 4명으로 바뀌어가며 춤을 추는 것도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동작이었다.또한 시작부분의 독무(獨舞)에서 조명을 무대 앞쪽 중앙에서 비추어 뒤편으로 무용수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던 것도 새롭고 독특했다고 생각했다.배김 허튼춤가장 흥겹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음악은 쇠(꽹과리), 장고, 북, 징 같은 풍물 악기와 태평소 이렇게 6가지 악기의 소리로 구성되었었다. 한때 풍물패 활동을 해서 낯익은 가락도 두어 개 찾을 수 있었다.(^^;) 워낙 그 분야에 정통하신 분들이겠지만 특히나 상쇠이신 분과 북 치배를 맡으신 두분의 기교는 정말 다양하고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