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명 :제출일:학과 :학과학번 :학번담당교수 :담당교수교수님성명 :성명◎ 목차 ◎Ⅰ. 머리말…………………………………………… 1Ⅱ. 황국사관의 속성………………………………… 11. 황국사관의 탄생………………………………12. 황국사관에 대한 우리의 인식………………2Ⅲ. 일본의 고대사 인식경향…………………………31. 자유주의 사관………………………………… 32. 기마민족설……………………………………‥33. 분국설……………………………………………3Ⅳ. 맺음말……………………………………………… 4Ⅵ. 참고문헌…………………………………………… 4Ⅰ. 머리말현재 우리나라의 역사는 일본의 황국사관과 중국의 중화사관 가운데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하고 점차 왜곡되고 있다. 일본의 신사참배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에 대해 먼저 파악하고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바로잡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의 황국사관에 대해 아는 것은 물론이고, 황국사관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미흡하나마 황국사관과 일본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본인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의식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Ⅱ. 황국사관의 속성1. 황국사관의 탄생일본의 황국사관의 시작은 한반도를 지배하면서부터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의 민족주의 사관은 일본을 우위에 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역사책인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자국의 역사를 우위에 둔 민족주의 사관은 더욱 뿌리를 내리고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즉 일본의 황국사관은 일본의 사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한학파가 「교육칙어」를 끝으로 종말을 고한 이후에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 국학파의 위세가 더욱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학파의 사관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기 시작하였고, 일본인들의 기본적인 역사의식의 바탕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수의 양심적 사학자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일본의 황국사관에서 벗어난 역사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이러한 조선에 대한 역사학의 자세는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역사가들에 의해 세 가지로 나뉘어 진다. 먼저 첫 번째 시각으로 기전외는 일본이 조선사를 올바로 형성하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반성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정상수웅은 동정론을 내세워 한국인도 일본인과 같이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마지막으로 강상파부는 을 내세워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 간 변진계통의 혈통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강상파부의 주장은 일본인들에게 패전에 버금가는 큰 충격을 던져 주었고, 강상파부는 즉각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을 살펴보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왜 왕조가 수립되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의 진왕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인 대화왕조가 진한의 왕에 의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3세기 중국 위나라의 북부 진출과 백제 신라에 의해 밀려난 진왕이 해양으로 진출하였고, 한족, 왜와 연합한 한 왜 연합왕국을 이루었고, 이것이 임나일본부라는 주장이다.이렇게 일부 양심적인 사학자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는 사상은 국학파였다. 이 국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말송보화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삼국사기의 3세기 이 전의 기록은 모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한국 고대사를 낙랑기 즉 중국이 지배하는 시기와 임나기 즉 일본이 지배하는 시기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말송보화의 주장은 현재 일본 사학계의 주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일본 사학계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잘 못된 인식을 바로 잡을 필요성이 있다.2. 황국사관에 대한 우리의 인식황국사관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인식은 어떠하였으며,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 역사의 자율성과 발전성이 증명될 떄에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먼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식민사관이 등장하게 된 일본의 역사부터 알아보고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까지 한국의 고대사와 일본의 고대사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분리주의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일본이 고대사에서 일본이 지배자이고 한반도가 피지배자임을 주장하면서 일원주의를 내세웠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소극적인 자세는 일본의 남조선 경영론을 기정 사실화하는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소극적 자세를 버리고, 일본사에 대해 연구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사실 관계의 검증을 통해서 역사의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일본 고대사의 핵심내용을 이루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대한 올바른 사료비판이 필요하며, 과학적으로 고대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나라가 이러한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일원론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때는 80년대 중반 부터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90년대 초부터 들어오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일본사연구학회’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일관계의 연구를 활성화하는 촉진제로 작용하는데 충분하였다. 현재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 되고 있으며, 과거 한국사의 시각에서 한일 관계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90년대 중반부터 분리주의에서 일원론으로 완전히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오늘날의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계속되는 역사 왜곡 문제는 한반도 남부 경영론이 바탕이 되어 일어나고 있다. 한반도 경영론의 핵심인 백촌강 싸움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백촌강 전투는 당나라가 한반도를 점령하려 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일어난 전투이다. 이를 통해서 중국, 한국, 일본에서 패권주의가 용납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서 중국의 대제국주의와 일본의 소제국주의가 충돌하여 일어난 전투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은 중국, 한국, 일본의 협력과 통합을 방해하는 처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와 같은 황국사관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뉘우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황국사관과 중국의 중화사상 가운데에서 우리 역사의 왜곡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중국와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으로 중국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일본의 황국사관은 우리나라의 해양사 대륙사를 모두 부정한 채 반도사만이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시간적으로는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한사군에 의한 통치가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두 사관 모두 공통적으로 대외팽창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체성, 자율성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체계적인 학문적 대책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황국사관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일본 고대사에 대한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Ⅲ. 일본 고대사 인식 경향1. 자유주의 사관황국사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 고대사 인식의 대표적인 세 가지 인식 중 첫 번째는 자유주의 사관이다.1995년 등강신승, 서미건이, 안등풍 등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는 패전 이후 미국에 의해 이루어진 자학 사관이 학생들에게 일본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역사 해석을 지향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이념을 초월하여서 자유로운 역사해석을 한다는 명분하에 모였지만, 결국 그들의 종착점은 일본 민족주의로 포장된 우익사관, 전쟁 긍정 사관인 것이다. 이들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진 역사 교과서에 의해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제에 의한 조선 침략이 정당화되고 있으며, 조선에 근대화에 일본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남경대학살 등의 사건에 대해서는 축소, 은폐시키고 있어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 민간에서 검증되면 통과 될 수 있다는 검정교과서제도를 핑계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간구하고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2. 기마민족설일본 고대사의 인식 경향 중 그 두 번째는 예가미나미오의 ‘기마민족 정복설’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부여계통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평양과 한강으로 왔으며, 그 뒤로 김해 정착하여 북구주, 세도네를 거쳐서 기내의 대화지역을 정복하고 통일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천황족의 설립, 통일국가의 성립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대륙의 기마민족 계통에서 온다는 점에서 종례와는 색다른 특색을 지닌다. 이 학설이 처음 발표 되었을 때 일본국민들은 패전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게 되었고, 에가미 나미오는 즉각 구속되기에 이른다. 에가미 나미오는 일부 양심적 사학자였지만, 고대 통일국가의 성립시기, 그리고 그 전개라는 면에 있어서는 기존의 통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륙의 기마민족이 3세기 말~ 4세기 초에 기내 대화로 진출하여 야마토 정권을 수립하고, 5세기 왜의 오왕시대(찬왕. 진왕. 제왕. 흥왕. 무왕)에 보이는 거대한 전방 후원문에 조성된 고분 중기에 통일된 정권은 한반도 남부까지 세력을 뻗쳐서 왜?한 연합왕국을 이루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목차◎머리말……………………………………………………………………1Ⅰ. 향토사의 기본적 정의 ……………………………………………11. 향토사의 의미………………………………………………………12. 향토사의 개념………………………………………………………1Ⅱ. 교재로서의 향토사…………………………………………………21. 향토사 교재의 활용방안………………………………………… 22. 향토사 연구의 활성화 방안과 역사교육……………………… 3맺음말…………………………………………………………………… 4머리말향토사 연구는 요즘 학계에서 중요시 되고 있는 연구 분야이다. 이전에는 국가, 수도 중심의 왕조사 연구가 대부분의 연구 결과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문화사가 강조되면서, 왕조 중심의 역사가 아닌 민중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향토사의 중요성 인식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흐름을 따라서 역사 교육의 내용과 방법론도 바뀌어야 한다. 향토사는 지방사, 지역사와 비슷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와는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본고에서는 향토사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그에 따라 교재로서 향토사를 어떻게 연구하며, 그 중요성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Ⅰ. 향토사의 기본적 정의1. 향토사의 의미교재로서의 향토사를 알기 위해서 우선 향토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향토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을 포함하는 것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역사와 문화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곧 향토사는 토착적이고, 우리의 경험과 밀접한 역사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향토사는 그 성격상 국가사, 세계사를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 부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분이란 중요성이나 역사에서 비중의 경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향토사는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는 국가사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향토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사를 통해서는 만날 수 없었던, 민중들의 생생한 삶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향토사는 신문화사가 대두되면서 더욱 중요시 되었고, 이러한 향토사를 연구하는 것은, 생생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2. 향토사의 개념향토사는 성격상 역사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의미와 향토, 지방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국가사의 일부분으로 이를 보충하고 설명하는 부차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는 경우다. 이는 전통적 역사학자들에 의해 지방사 보다는 국가 또는 그 이상의 영역을 다루는 역사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소산이었다. 따라서 역사교육에서도 지방사는 국가사의 이해를 위한 지역적인 예로써의 가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이에 반해 후자의 경우, 지방사도 국가사나 세계사와 대등한 중요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과거에 설득력이 약한 거시적 안목에 의한 세계사의 문명사적인 접근 방법에 대한 비판과 역사라는 것은 국가나 세계적 차원의 지배를 받지 않는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입장을 밝히는 데서 나오게 되었다. 예컨대 사회 규범, 원시신앙, 토양, 기후, 지방자원, 질병, 인구변동 등을 일정한 지역단위로 다룰 때 가장 효과적인 것 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내용은 경우에 따라서 지역사회를 넘어서 국가적 차원을 단위로 삼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확대된 단위는 부차적인 고려대상에 머물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향토사는 기본적인 환경적 접근이다. 이러한 환경적 접근은 요 근래의 사회과학 여러 분야의 지역사회 연구의 결과로 많이 보강되었다. 특히 지리학자들의 현장연구라든가, 사회학자들의 인간과 환경관계의 연구, 화학자나 생태학자들의 환경오염연구, 생물학자들의 환경보존연구, 건축학자들의 도시계획연구 등은 하나의 지방을 단위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적의성의 근거를 제시해야하고 이러한 관심이 역사연구에서 시사하는 바는 지역사회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 흥망성쇠의 연구를 촉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향토사는 향토사가의 흥미에 의해 선발되어 연구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사적 관점에서 독자적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것은 향토사가 역사교육에 도입된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Ⅱ. 교재로서의 향토사1. 향토사 교재의 활용방안역사교재는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 등의 문헌자료와 사진, 삽화, 슬라이드, 필름 등 비문자 자료로 구분되거나 과거의 직접적인 유물과 유적 기록물 문서 등 1차 사료와 후대의 사람들이 과거를 해석하여 제시한 각종 문헌 등의 2차 사료로 나누어진다. 본 시간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역사교재인 교과서, 시각자료, 사료, 문학작품, 시사자료, 박물관 자료, 영상자료, 컴퓨터 자료 등으로 분류하고 그 활용상의 특성과 유의점의 고찰도 중요함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소홀히 한 분야가 교재로서의 향토사이다. 향토사의 중요성을 다시 언급하자면 향토사는 그 나름의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의 향토나 지역사회를 단위로 하여 종교, 의식주, 교통, 인구변동, 기후풍토, 시장, 인물, 의식적 행사, 문화재, 사회규범 등 역사적 사실을 다루어 그 특징과 문제점을 다루어 해결하고자 한다. 무엇이며, 다른 지역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향토사는 역사교육에서 중요한 교재이다. 특히 각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나오는 지방사 연구 성과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현장 역사교육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학습 자료로 재구성하여 활용해야 한다. 지방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2. 향토사 연구의 활성화 방안과 역사교육교재로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것과 동시에, 그 성과를 역사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방안을 역사교육에 적용하여 바람직한 향토사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향토사를 향토사 연구의 방향을 중앙정부의 집권적 행정적 시각에만 맞추지 말고 지방에 초점을 맞추어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모든 것은 중앙의 지시, 명령, 감독에 따르는 지방의 행정으로만 보지 말고 지역자체의 활동상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의 역사학자들은 향토사학자들의 노력, 업적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 향토사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일반역사학자들의 연구와 접목되었을 때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며 학계에서도 크게 공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의 향토사학자들은 보다 심오한 연구방법론과 학문적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계의 연구동향에도 지방의 향토사학자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로 역사연구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지 않고서는 자료의 정리와 해석을 바르게 하기 힘들고 논문을 작성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일반역사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노력과 이들의 연계를 통해서 향토사 연구는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지방의 자치단체와 행정 당국은 향토사 자료의 보존의 의무감을 갖고 이를 최대한 지원해 주어야 한다. 향토사 자료는 대부분 1사료로써 지방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제 1차 사료에 문제가 생길 때 역사해석을 바르게 할 수 없고, 결국은 역사왜곡이 생기는 불가피한 상황이 생기게 된다.
◎ 목차 ◎Ⅰ. 머리말-----------------------------------2Ⅱ. 한국교육사의 변천과정-----------------------21. 교육기관의 변천사-------------------------22. 교육사상의 변천사-------------------------3Ⅲ. 역사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모색----------------5Ⅳ. 맺음말-----------------------------------6Ⅴ. 참고문헌---------------------------------6Ⅰ. 머리말한국교육사의 변천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발전하기도 하지만,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역사교육은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역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사라지고, 인간의 기본적인 학문보다는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만을 찾아다니는 세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교육사를 살펴보면서,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고, 역사교육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Ⅱ. 한국교육사의 변천과정1. 교육기관의 변천사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교육기관이 성립된 때는 고구려시대 부터이다. 최초의 관학 고등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태학이 성립되었고, 이는 고급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반면에 최초의 사학기관인 경당도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졌고, 일반 평민들의 기본적인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바로 경당이 조선시대의 서당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교육기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있지만, 백제의 경우에는 어떤 교육기관이 있었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오경박사가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당시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진흥왕 37년에 화랑제가 실시되어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세속오계, 삼덕과 같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을 가르쳤다. 또한 화랑도는 무술과 인격도야에 힘썼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 풍류집단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화랑도의 특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과에서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을 배웠으며, 잡학과에서는 율학, 서학, 산학 등을 배웠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논어와 효경은 필수적으로 배워야만 하였다. 이렇게 국자감은 유학과 잡학을 나누어 가르쳐서 국가의 필요에 맞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국자감은 외족의 침입과 교관인 관학자의 무성의와 실력 부족으로 사학이 개설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16대 예종은 국자감 진흥책에 힘쓰기 위해 문무 7제를 두고, 양현고)를 두어서 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사학으로는 최충이 세원 십이도가 있다. 이는 최충이 국가가 세운 국자감에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보고 자신이 직접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국자감과 기본적인 교육내용은 비슷하였고, 교육의 목적도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이러한 십이도는 예종의 국학 부흥운동으로 인해 국학에 흡수되어 고려 말에 폐지되었다.조선시대의 국학기관으로는 성균관이 있는데, 이는 태조 7년에 세워진 최고의 유교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은 고등교육기관으로써 생원과와 진사과에 합격한 학생들만을 받아들였다. 성균관의 교육목적도 역시 고급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으며, 교육내용으로는 사서와 오경, 제사를 강독하는 것과 제술, 또한 글씨 쓰는 방법을 익히는 서법이 있었다. 서법에는 해서와 행서 초서가 있었는데, 이러한 글쓰기도 교육내용의 하나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균관내에는 사부학당이 존재하였는데, 생원과 진사시험준비, 성균관 진학을 준비하는데 목적을 둔 학당이었다. 문묘를 갖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학제나 교육방침들은 성균관과 비슷하였다. 또한 지방에는 향교가 있어서 지방의 양반 자제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향교의 교육목적은 사회교육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사회교화, 향풍순화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잡과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소관아문도 있어서 기술관을 양성하는데 힘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학으화가 이루어지면서 폐해가 날로 심하여 졌다. 결국 조선후기에는 몇 개의 서원을 제외하고는 많은 서원을 폐지하기에 이르게 된다. 반면에 또다른 사학기관으로써 서당은 서민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의 기초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을 교화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교육내용은 강독, 제술과 습자로 다른 교육기관과 크게 다른점은 없었지만, 능력별로 교육이 이루어지면 개별적인 학습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이때까지의 교육은 대부분 경전에 의지한 경사일체 중심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호가 개방되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교육도 많은 변화를 겪게된다. 특히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들은 조선인들에게 신선함 충격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근대학교의 전신으로는 원산지방에 민간유지들에 의해 1883년에 세워진 원산학사와, 1883년 독일의 묄렌도르프가 세원 동문학과, 1885년 미국 알렌에 의해 설립된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 등이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계의 근대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는데, 여기엔 배제학당, 경신학당, 이화학당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봉건계급사상을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근대적인 사고를 심어주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와 같은 학교들은 근대학교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고, 188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관학인 육영공원이 설립되기에 이르게 된다. 육영공원에서는 영어를 교수하고, 세계사를 가르치는 등 학생들의 눈이 세계로 향할 수 있도록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육영공원은 개화된 현대식 학교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선진 서양교육을 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895년에는 소학교령이 공포되어서 공립학교를 세웠으며, 이는 국민교육제도로써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근대학교의 성립에는 사학이 크게 공헌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통해 민족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 현대식 교육을 재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결국 교수요목기와 1차에서 7차까지의 개정을 거쳐 현재의 교육에 이르게 되었다.2. 교육사상의 변천사삼국시대의 교육은 경전과 사서를 중심으로 한 교육으로써 유교정신을 체득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목적을 두고 이루어졌다. 결국 교육의 중심에는 유교사상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서를 교육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 이루어 졌고, 17세기 실학사상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교육사상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먼저 삼국시대 신라의 교육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설총의 화양계가 있는데, 이는 비유와 풍자로서 신문왕을 훈계하려는 우화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설총은 자신의 군왕교육사상을 나타내었고, 이는 군왕이 올바르게 교육받고 올바른 정치를 할 때에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안정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군왕에 대한 교육이 강조되었음은 삼국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이어 고려의 교육사상을 살펴보면, 안향은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전래한 유학의 대가로써 일상생활의 윤리를 강조하고, 불교사상을 배격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색은 문과만 중시되고 무과가 천시되는 고려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과거제에 무과도 함께 볼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교육사상은 당시 상황에 맞게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이 특히 발전 하였고, 그에 따른 교육사상도 함께 변화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교육목적은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고 성현의 행실을 모방하는데 두는 등 교육사상에 유학의 지식이 매우 중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교육사상가로서 권근은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수양덕목으로는 공, 근, 관, 신을 내세웠다. 또한 소학을 인륜의 필요한 것으로써 강조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집대성을 이룩하였의 경전을 위시한 교육에 한계를 느끼면서 실학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훈고학파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유입하였으며, 그와 함께 사회개혁에 필요한, 서양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실학은 근대지향성과 민족지향성을 갖도록 하였으며, 주체성이 있는 역사의식을 갖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실학파는 사림파들이 중화주의사상을 중시하여, 단군조선보다 위만조선을 중시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자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 연구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사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료를 통하여 역사서를 집필하였고, 또한 역사의 인식 대상도 넓혀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만주를 우리나라 역사에 끌여들이게 되었다. 또한 많은 교육과정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개인차를 인정하여 능력에 의한 교육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육이 민중에게도 동등히 이루어져서 교육의 기회가 균등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사상들은 당시에는 반영되지 못하였고,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반영되어 성과를 이루게 된다. 당시 실학사상가인 유형원은 교육의 기회균등을 통해 덕행인과 능력인을 양성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향상과 방상은 초등교육기관으로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분에 상관없이 국비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한 것은 당시엔 놀라운 인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나아가 정약용은 인간은 실용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과거의 개선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국사교육을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실학사상가들의 노력은 당시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실학자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느 정도를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일합방으로 인해 교육계는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민족의 고난기에 도산 안창호선생은 자아혁신을 통해 주인정신을 기르자고 주장하였다. 자아혁신을 통해 개인의 혁명을 이루고, 이로 인해 민족의 혁신과 민족 개조를 그의 핵심사상 있다.
학교와 계급재생산이 책의 배경은 영국 미들랜드의 산업도시 해머타운이다. 해머타운은 산업혁명 때 크게 성장하였고, 주민들은 산업혁명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최초의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주민 대부분은 노동자계층으로, 성인 중에서 학교에 다니며 공부만 하는 사람은 2%도 안 되며, 대다수의 주민들이 육체노동자들이었다.이 책의 원제는 ‘노동자가 되기 위한 배움,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로 말 그래도 문제아 12명의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2년과 직장생활 초기까지의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반학교문화와 저항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된다. 이 책에서는 학교가 단순하게 계급을 재생산하는 제도라고 결론짓지는 않았다. 학교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꼭 거쳐 가는 곳이며, 학교로 부터 아이들은 부모가 속한 노동자 계층의 문화를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장래를 결정하고, 사회에 대한 인식을 확립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를 통해 사회화가 이루어지며, 사회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필자는 학교를 무조건 폐지하고 없애자는 반학교, 탈학교를 주장하지는 않는다.이 책에서 만난 아이들은 자신들을 ‘해머타운의 싸나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쉽게말해 고등학교의 문제아들로, 이들 중 대부분은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이다. 부모가 노동자라는 것과 아이가 문제아라는 것은 어떤 상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이 왜 교육적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문제아가 되어버리는 것인지, 결국엔 부모님과 같이 노동자가 되어 육체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알아보고자 하고 있다.학교에는 흔히 말하는 문제아들과 열심히 공부하는 ‘범생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들이 문제아가 되고, ‘범생이’가 되는 환경적 요인은 무엇인가? 문제아들의 대부분은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반항을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억압된 상황에서의 해방감을 누리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학교의 문제아들 즉 ‘싸나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참여관찰과, 토론하는 등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싸나이’들의 생각과 그들의 행동 저변에 깔려있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관찰하고 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아무 거리낌없이 욕설과 은어가 섞여있어, 아이들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여 준다.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학교 선생님과, ‘범생이’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선생님들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려고 한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친다던지, 교문 바로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던지 갖가지 방법으로 학교 교칙에서 일탈하여, ‘싸나이’들 만의 즐거움과 권위에 도전하여 느끼는 희열감을 맛보려 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 뒤에는 학교에 대한 반항심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이들의 문화는 같은 또래집단 안에서 공유되어 진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집단은 ‘싸나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같은 집단 안에서 문화를 공유하고, 함께 일을 꾸미고, 학교의 권위에 대해 반항한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 때에 그들은 힘을 얻고, 함께 학교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또한 ‘싸나이’들은 범생이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겨한다. 학교의 제도에 순응하며, 선생님들에게 순종하는 ‘범생이’들은 ‘싸나이’들이 볼때에는 재미없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 학교생활 가운데 친구들과 삭도 치는 등의 재미가 없이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사회의 제도적 장치에 순응하며 사는 ‘범생이’들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은 ‘범생이’들을 괴롭히고 지배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들에게 담배와 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학생들에게 금기시되는 것을 함으로써 그들의 반학교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선생님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또한 이들에게 돈은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이다. 돈이 실질적으로 있어야만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신들의 쓸 돈을 벌기도 한다. 샌님처럼 정신적인 노동이 아닌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가치있게 생각하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샌님처럼 사는 것은 저항심이 없고 순응적인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싸나이’들끼리의 다툼과 싸움은 그 안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여자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성적 매력을 풍겨야하는 것과 가정성을 띠는 것,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에서 여자를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여자를 꼬셔서 하룻밤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싸나이’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이 곧 남성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다른 인종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인종별로 모인 그룹들에 반감을 가지고, 그들과 자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범생이’와 같이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 보다 단순히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있다.이러한 ‘싸나이’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는 노동자계급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싸나이’들의 아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의 대체적인 문화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들은 결국에는 사회로 나아갔을 때에 노동자로써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부모님의 계급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선택을 통해 노동자로써의 삶을 산다. 그들이 자본주의의 체제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인 노동자의 삶을 스스로 택하면서 다시 원래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학교문화를 이끌면서 학교에 반항하는 저항이 결국에는 계급 재상산에 기여하며,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끔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반학교문화, 일상, 저항학교는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며, 누구든지 실력만 갖추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싸나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면서 이것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싸나이에게 이것은 탐탁치 않은 일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계집애’들이나 하는 정신노동을 하는 것은 세상에 저항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샌님들이나 하는 일이며, 나약한 짓이라는 것이다. 건강한 팔뚝을 드러내며 땀을 흘리는 일, 무거운 것을 들어나르고 자기들끼리의 의리로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인사를 하는 것. 그것은 싸나이들에게 저항의 상징이 된다.싸나이들에게 저항은 일상이다. 선생님 몰래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은 ‘모험심’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이런 일들은 일단 재미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재미를 포기할 수 없다. 싸나이들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우월감을 획득한다.학교와 일터‘싸나이’들은 ‘계집애’들에게나 어울리는 정신노동보다 ‘싸나이’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육체노동을 선호한다. 노동자가 남성성을 강조하며 힘을 쓰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싸나이’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육체노동을 선호하는 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고와 연결된다. 술과 여자를 끼고 노는 것도 좋아한다. 술과 여자는 남성적인 능력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생일 때도 몰래 선술집에 가서 술을 퍼마시며 자기들끼리 으쓱댄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순종적이며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미를 두지 않고 만나는 여자애들은 찝쩍대보기 일쑤다.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지 않고 엉덩이 붙이고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은 범생이들이나 하는 바보짓이다. 땡땡이는 남성의 용기를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난이나 농담에 적극 반응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앉아 있는 것도 ‘계집애’ 같은 일이다. 이 아이들은 남성이 가사를 분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문화는 노동현장에서도 발견된다. 결국 반학교문화와 노동현장문화는 동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반학교문화는 노동현장문화로 이어지며, 노동현장으로 새로운 노동력이 유입되는 원인이 된다. ‘싸나이’들에게는 차라리 노동현장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이 아이들에게 취업은 학교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즐겁게 생활하며 노는 장소를 노동현장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범생이’보다 더 쉽게 적응하는 아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자기 인식을 시작함과 동시에 당당해진다.
아름다움 뒤에 감추어진 독여성들은 흔히 오랜 세월 동안 남성에 비해 약하고 연약한 존재하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여성이 결코 남성에 의해 지배당하고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지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악하다고 평가를 받는 여성들이 많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봤을 때 통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없지만, 그런 여성들을 보고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내 안에도 이브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았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여성으로써 그들처럼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팜므 파탈에 대한 정의는 한마디로 쉽게 내려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팜므 파탈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은 자신만의 매력을 가진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미인형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가진 여성들이 바로 팜므 파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도 팜므 파탈들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들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클레오 파트라 같은 경우에도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녀만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정복하였다. 또한 조제핀은 뛰어난 외모보다는 그녀만의 매력으로 나폴레옹을 유일하게 사로잡은 여성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의 현대 여성들도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도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매력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또한 팜므 파탈은 자신만의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팜므 파탈들은 남성들에게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목적이 비록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어느 하나에 집중하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모습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얻기 위해 왕 앞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춤추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들릴라도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녀들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아름답지만 속에 독을 품고 있는 여성들, 그녀들이 진정한 팜므 파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무엇보다도 당당한 모습이 팜므 파탈이 가진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악독한 일을 저질러도, 누구의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은 당당하고,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은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면 가지기 힘든 베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당당한 모습이 그녀들을 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해밀턴 부인의 경우에는 남편과 애인,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두 사람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마릴린 먼로도 영화계에서 몸을 팔아 배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만, 자신만은 당당하게 살아왔다. 이러한 모습들은 보통 여자들의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통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지 않는 여성이라면 이러한 자신감과 당당함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팜므 파탈의 기본적 자질이라는 생각이 든다.오늘날에도 많은 팜므 파탈이 존재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팜므 파탈의 여성들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또한 그러한 여배우들은 스타가 되고 영화는 흥행한다. 팜므 파탈의 전형적 얼굴이라고 여겨지는 도톰하고 빨간 입술과 하얀 피부의 여성들이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에 대한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요즘 영화에서 말하자면 물랑루즈의 니콜 키드만이나 시카고의 르네 젤위거 같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금발머리에 빨간 입술 하얀 피부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시카고의 르네 젤위거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서 살인의 죄를 짓고도 무죄를 선고받고 자신이 원하던 화려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자신의 미모나 매력을 가지고 남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여성이야 말로 팜므 파탈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